한성우는 테이블 위에 놓은 박스를 열어 차미주 앞으로 가져갔다. “너 주려고 52개 샀어. 하루에 하나씩 바꿔 착용해도 한 달 동안은 겹치지 않아.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면 금은방에서 다시 제작하면 그만이야. 수공비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차미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가 뭐 해파라도 돼? 온 몸에 손밖에 없어서 52개를 착용하게?”‘로맨틱은 개뿔! 대체 뇌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내가 어쩌다 저런 놈을 좋아해서는.’한성우가 차미주를 끌어안으며 바짝 달라붙었다. “전혀 감동적이지 않아? 네가 반지 52개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다들부러워 죽으려고 할걸?”차미주가 발버둥 치며 말했다. “나 때문에 웃겨 죽으려고 하는 거겠지! 프러포즈하면서 반지를 몇 십 개씩 준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미친 거야? 그럼 결혼식은 어느 반지로 하는데? 1분에 한 번 바꿔 착용할까?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한성우가 잔꾀를 부리며 말했다. “결혼할 때 반지를 목걸이로 만들어 착용하는 거야. 그러면 목걸이 값도 아낄 수 있어.”차미주는 어이 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입을 벌려 한성우의 어깨를 꽉 깨물었다. 한성우가 허리를 숙여 두 손으로 차미주의 엉덩이를 받들어 자신의 허리에 앉히듯 안아 올렸다. 그는 차미주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꼬리뼈는 다 나았어?”차미주가 물고 있던 한성우의 어깨는 놓아주며 이를 악물었다. “화나서 안 나을 것도 다 나았겠어.”말하는 순간 한성우 목에 있는 빨간 자국이 차미주의 눈에 띄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목에 그거 뭐야?”차미주가 손을 뻗어 자국을 비비자 그녀의 손가락이 빨갛게 물들고 목에 있던 흔적이 옅어졌다. “너 뭐 바른 거야?”한성우가 말했다. “네 립스틱으로 키스마크 그려봤어. 비슷하지?”차미주는 어이가 없었다. “너 미친 거 아냐? 그걸 왜 그려? 그걸 보면서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거야?”한성우가 쯧, 혀를 찼다. “내가 이걸 안 그렸으면 그 두 밉상이
한성우의 말에 차미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옷을 벗으며 부끄러움이 몰려오자 차미주는 불을 끄라고 했다. 긴장한 것은 차미주뿐만이 아니었다. 한성우도 마찬가지였다. 차미주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긴장했고 한성우는 혹여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까 긴장하고 있었다. 차미주는 긴장하면 말이 많아졌다. 분위기를 잡으려 애쓰는 한성우에게 차미주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전에 너 생일 때, 우리 둘이 호텔에 있었던 날 말이야. 너 그날 일 하나도 기억 안 나?”간지러운 손길로 차미주의 몸을 만지던 한성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억 안 나.”차미주는 이상하게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이며 말을 더듬었다. “그때, 그때 피가 엄청 많이 났었잖아.”한성우는 말 없이 행동을 이어갔다. 그의 손이 은밀한 곳에 닿자 터져 나올 뻔 한 소리를 입술을 깨물며 삼킨 차미주가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피드에서 봤는데, 너무 세게만 안 하면 처음이라고 꼭 피가 나는 건 아니래. 넌 대체 얼마나 심하게 했기에 내가 피를 그렇게 많이 흘린 거야.”한성우는 움찔 손을 떨었다. 하마터면 집중이 완전히 깨질 뻔했다. 고개를 든 그는 어둠 속에서 차미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기야, 할 말이 없을 땐 그저 입 닫고 가만히 있어줄래?”차미주가 불쌍한 말투로 말했다. “입 닫고 네 숨소리를 들으면 더 긴장된단 말이야.”한성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계속 말해.”입을 달싹인 차미주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언제 들어와?”“...”한성우는 고개를 숙여 차미주의 입술에 입 맞추어 세상도 놀랠 말을 삼키도록 했다. 십분 후. 욕설이 섞인 여자의 비명소리가 방에서 흘러나왔다. “제기랄! 안 아프다며!”그리고 곧 억누른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젠장, 역시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맞았어. 자기, 힘 좀 빼봐.”“힘을 빼긴 뭘 빼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그 분 세심하신 분이라며? 세심한 사람이 뜨거운 물이 너한테 튀게 해?”원망 섞인 강한서의 말투에 한현진이 멈칫했다. 그리곤 곧 미소 지으며 그의 팔을 끌어안고 어깨에 기댔다. “그렇게 심각한 거 아냐. 왜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그래? 평소엔 직원이 실수해도 너그럽게 봐줬잖아.”“이게 안 심각해? 종아리가 다 데었어야 심각하다고 할 거야?”강한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내가 젊은 사람으로 고용해야 한다고 했잖아. 일처리도 깔끔하고 손도 빠르고.”“기사님은 그저 노안인 것뿐이야. 전에 면접 보러 온 다른 운전기사가 나에게 손을 대려고 하는 걸 기사님께서 앞장서서 막아주셨어. 난 기사님 반응속도가 꽤 빠르다고 생각했어. 게다가 운전 경력도 많으시잖아. 집에 와이프와 아이가 아픈 데도 버리지 않은 걸 보면 꽤 책임감 있는 사람 같아. 기회라는 건 늘 젊은 사람에게만 줄 순 없잖아. 너희 회사도 지금 연령 제한 높였잖아.”강한서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핑계 찾지 마. 그건 그냥 동정심이 넘쳐나는 거고 빚지기도 싫어서 그러는 거야.”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 식구 중 장애인이 두 명이야. 다들 힘들게 살잖아. 내가 기사님에 대해 특별한 요구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해보라고 하는 거지. 게다가 입사한지도 며칠 되지 않았고 말도 적고 책임감도 있는 사람을 컵이 깨져 좀 데었다고 자를 수는 없잖아. 다른 사람이 알면 내가 너무 인정머리 없다고 할 거야.”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 주변에 네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네가 네 생각을 고집하듯이 나에게도 내 마음이 놓일 수 있는 보장이 필요해. 운전기사를 안 바꿔도 돼. 하지만 너에게 개인 비서 한 명 붙여주려고 해.”한현진이 경악했다. “개인 비서? 아주머니도 따로 개인 비서는 없으신데 고작 부 대표인 내가 개인 비서까지 데리고 다니는 건 너무 오버 아냐?”강한서가 말했
한현진이 어두워진 얼굴로 강한서를 몇 번이나 노려보았다. ‘어쩐지 쉽게 잘생긴 남자 비서를 붙여준다, 했어. 날 놀리려는 못된 심보를 품고 있었던 거야.’원율은 비록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말은 굉장히 많은 편이었다. 그는 연예계의 일과 연예인 개인 비서의 업무, 그리고 한현진의 필모에 대해 척척 대답했다. 강한서가 미리 가르친 것이 분명했다. 꽤 약삭빠른 청년이었다. 송병천과 서해금이 도착하는 날엔 한현진과 송민준이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 공항엔 사람이 많아 한현진은 차 옆에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송변천과 서해금이 나오는 방향을 지켜보았다. 곧 선글라스를 낀 송병천이 커다란 캐리어 두개를 끌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송병천의 뒤를 따르는 서해금은 미니 캐리어에 비싼 가방을 들고 있었다. 고급스럽게 차려 입은 모습이 옛사진 속 한아름의 곁에 서있던 수수한 옷차림에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여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한현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빠, 여기요!”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 송병천은 인파 속에서도 정확이 딸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성큼성큼 한현진에게로 걸어갔다. 앞으로 다가간 한현진이 송병천을 꼭 끌어안았다. “아빠, 오셨어요? 여행은 즐거우셨어요?”송병천이 딸의 어깨를 토닥이며 미소 지었다. “즐거웠어. 아빠는 모든 걸 거의 다 체험했어. 나중에 네가 가면 내가 가이드해 줄 수 도 있어.”한현진이 손을 뻗어 송병천의 캐리어를 가져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네요. 전 아빠와 아주머니께서 지루하셨을까 봐 걱정이었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며칠 더 추가한 건데.”그 말에 서해금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추가는 무슨. 애초부터 9박 10일의 패키지를 예약하고는 그들에게 5박 6일이라고 속인 거잖아. 비행기가 착륙하고 체크인까지 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고.’서해금은 불쾌한 기분을 꾹 참아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송병천은 한현진이 아닌 송민준에게
사실 한현진은 서해금이 홍혜림과 약속을 잡았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어젯밤 잠 들기 직전에 양시은이 전화를 걸어와 그 소식을 전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큰 고객을 잃었으니 서해금은 당연히 이대로 가만히 앉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홍혜림의 지인이기도 한 채지윤에게 부탁해 홍혜림과 약속시간을 잡았다. 채지윤은 홍혜림의 절친한 친구였고 그녀의 큰딸은 양시은 명의의 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뤘었다. 마당발에 사업 수완이 좋은 양시은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결혼식장으로 꾸며주어 채지윤은 친구들 사이에서 한껏 콧대를 세울 수 있었다. 그 뒤로 손자의 돌잔치, 회사 워크숍, 집안 어르신 생신 연회 등 중요한 모임은 줄줄이 양시은에게 부탁했고 그렇게 채지윤과 양시은은 점차 가까워졌다. 서해금은 채지윤을 통해 홍혜림에게 연락했다. 만약 직접 채지윤에게 연락한다면 그녀는 아마 도와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채지윤은 지인을 통해 자신의 막내 아들과 송가람의 소개팅을 주선한 적이 있었지만 서해금에게 거절 당했다. 물론 서해금이 직접적으로 거절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요즘 세월엔 아이들 뜻이 중요하니 함부로 결정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만약 서해금의 말이 진심이라면 채지윤도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도 지나지 않아 서해금은 송가람과 강씨 가문 장손의 맞선을 주선했다. 채지윤은 마음 속 불만을 꾹 참았다. 그녀는 줄곧 서해금이 심씨 가문을 송씨 가문에는 가당치도 않은 집안이라며 무시하는 것이라고 여겼다.하지만 채지윤의 아들은 배알도 없이 아무리 많은 여자를 소개해줘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송가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했다. 두 사람은 해외 유학시절 알고 지낸 친구 사이였다. 채지윤의 아들이 오랫동안 송가람을 따라다녔지만 결국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 못했다. 송가람은 그와 연애를 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좋은 우정을 이어갔다. 식사 모임, 심지어 파티에 참석할 때도 늘 심원을 초대했다. 송가람이 귀국한 뒤에야 심원과의 사이가 점차
정신을 차린 한현진이 의아한 눈길로 송병천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빠.”송병천이 말했다. “네가 그렇게 웃으면 네 엄마가 널 임신했을 당시 화가 나면 너와 똑같은 미소로 날 향해 웃고는 내 배에 수박을 묶고 감자를 주으라던 일이 생각나. 심지어 웃는 얼굴로 날 두꺼비라고 해서 트라우마가 좀 있어.”“...”송민준이 앞에서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누가 아빠더러 함부로 엄마 얼굴에 반점이 생겼다고 쓸데없이 솔직하게 얘기하래요? 엄마도 임신이 얼마나 힘든 건데 그 와중에 안 예쁘다는 소리까지 듣고 있는 기분을 아빠가 직접 느껴보게 하려고 그런 거죠.”송병천은 후회하며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은 그 반점이 귀엽다는 뜻이었어.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아. 정말 알 수가 없어.”한현진는 머릿속으로 송병천이 한아람에게 혼나는 장면을 상상하고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성격은 엄마인 한아람을 더 닮은 듯 했다. 한성 그룹. 송가람은 적지 않은 물건을 바리바리 싸들고 프론트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예약도 하지 않았고 직원은 송가람이 누군지 알지도 못했으니 죽어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송가람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녀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눈치 없는 것. 너 내가 누군지 알아?”프론트 직원은 매뉴얼대로 움직였다. “대표님의 아내 분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그게 누구든 대표님을 만나시려면 예약하셔야 해요.”말하며 직원은 책상 위에 놓였던 한현진의 포스터 사진을 손을 쥐고 송가람의 얼굴과 비교했다. “사진 속 사모님과는 다른 분이시네요.”분노로 송가람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덕질하느라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녜요? 한서 오빠는 진작 이 여자와 이혼했다고요.”“네.”프론트 직원이 멈칫했다. “예약하셨나요?”대화가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 송가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너 두고 봐.”말하며 송가람은 강한서에게 전화했다. 레스토랑에 앉은 강한서는 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폰을 보더니 고개
프론트 직원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송가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악의가 깃든 송가람의 눈빛은 마치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딱 기다려, 넌 끝났어.”그 눈빛을 본 프론트 직원이 얼굴을 찡그렸다. 민경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가람 씨, 가져오신 물건은 프론트에 맡겨두세요. 미팅 장소가 밖이라 저희가 지금 회사에 없거든요.”멈칫하던 송가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서 오빠가 회사에도 없는데 프론트 직원이 계속 예약, 예약한 거예요? 사람이 회사에 없는데 무슨 예약을 하라는 거예요? 어떻게 이런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한 거예요?”민경하가 태연하게 말했다. “매일 대표님을 만나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만약 누구든 함부로 들여보내는 사람이야말로 채용하면 안 되죠.”송가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는 나중에 강한서와 사귀게 되면 꼭 똑같이 갚아줄 거라며 마음속으로 원한을 새겼다. 하지만 현실은 민경하에게 부탁을 해야하는 처지였기에 송가람은 불쾌함을 꾹 삼키며 나지막이 말했다. “죄송해요, 민 실장님. 제가 로비에서 한서 오빠를 너무 오래 기다리다보니 마음이 급해져 말을 함부로 내뱉었네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클라이언트와의 미팅 장소를 알려주실 수 있어요? 중요한 일로 한서 오빠를 만나야 해서요. 도와주시겠어요?”잠시 말을 멈추었던 송가람이 말을 이었다. “민서에게 들었는데 요즘 차 구매하려고 하신다면서요? 제 친구 중에 대리점을 하는 애가 있는데 ‘처리’해야 할 차들이 있다면서 지인들에게 내부 가격만 받고 팔고 있어요. 제가 나중에 연락처 드릴 테니까 구매 의향 있으시면 그쪽으로 연락해 보세요. 4억 정도 되는 차는 지불해야 하는 세금의 2배 정도를 할인 받는데엔 문제없을 거예요.”잠시 침묵하던 민경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대표님께서는 히비스커스 호텔 레스토랑의 수운 룸에 계세요. 대표님껜 제가 알려드린 건 비밀이에요.”알겠다고 대답하는 송가람의 표정엔 멸시로 가득했다. ‘역시 밑바닥에서 올라온 것들은 저렇게
서해금은 처음엔 송가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한현진 말로는 아침에도 봤었다며. 네가 직접 운전하고 오겠다고 해서 같이 안 온거라고 하던데. 그땐 너 아프단 얘기는 없었는데?”송가람은 오지랖 넓은 한현진을 욕하며 거짓말을 이어갔다. “한현진이 누구 좋으라고 내 상태를 엄마한테 알려주겠어. 내가 공항으로 마중 안 나가서 아빠가 나에게 안 좋은 마음이 생기길 눈이 빠지게 바라고 있을 텐데.”또 콜록이며 기침한 송가람이 말했다. “엄마, 나 정말 병원이야. 못 믿겠으면 내가 보낸 위치를 봐. 일부러 엄마 전화 안 받은 거 아니야. 정말 너무 힘들어서 그래. 전화를 무음모드로 해놓고 깜빡했어.”송가람의 말에 그녀가 보낸 위치 공유를 확인한 서해금은 그제야 송가람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그리곤 송가람의 몸 상태를 묻기 시작하자 송가람이 대답했다. “아직 대기하고 있어. 진료 끝나면 알려줄게.”서해금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진료 끝나면 얼른 와. 40분밖에 시간 못 줘. 오늘 홍혜림 씨와 식사 자리를 마련했어. 사고는 네가 친 거니까 오늘 쓰러지지 않은 한 어떻게든 식사 자리에 나와야 해! 아프면 오히려 좋지. 홍혜림 씨에게 우리 성의를 보일 수 있는 기회니까. 홍혜림 씨가 화를 풀어야 오랫동안 파트너십을 이어갈 수 있어. 이 고객들이 나중엔 전부 네 것이 될 거라고.”송가람이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짜증이 몰려왔지만 서해금의 명령이라 감히 거역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알겠어.”서해금의 목소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엄마가 인정머리 없다고 뭐라고 하지 마. 창피하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네가 정말 아무것도 없이 모든 걸 잃어보면 체면이든 자존심이든 뭐든, 돈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좀 이따 새 주소 보내줄게. 도착하면 말해.”송가람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송가람에게 위치를 전송했다. 그녀는 옷매무시를 정리한 후 미소를 걸고 룸으로 들어섰다. 화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