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한현진을 마주칠 줄은 몰랐던 은서하는 황급히 얼굴의 눈물자국을 닦아냈다.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안녕하세요.”은서하는 주세은보다 고작 몇 살 더 많았다. 한 눈에 봐도 앳되보이는 얼굴이었다. 말간계란형 얼굴은 심지어 창백해 보이기도 했다. 툭 치면 무너질 것 같은 가녀린 모습에 한현진은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래서 은서하의 모습이 더 기억에 남기도 했다. 한현진이 티슈를 뽑아 은서하에게 건네며 다정하게 말했다. “닦아요.”티슈를 건네받은 은서하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한현진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전 화장실로 들어설 때 한현진은 어렴풋이 병원과 통화 중인 은서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화 내용엔 결제와 수술비 등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하현주가 입원해 있을 당시 엄마를 살리고 싶었지만 병원비용을 지불할 수 없던 무력감을 떠올린 한현진이 저도 모르게 질문했다. “집에 힘든 일 있어요?”그 질문에 울음을 멈추었던 은서하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은서하는 눈물을 꾹 참으려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대표님. 전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은서하는 다급하게 화장실을 벗어났다. 은서하가 화장실을 나서자 또 다른 칸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칸막이 문이 열리고 조향팀 B구역 1팀 팀장인 이시연이 모습을 드러내며 한현진을 불렀다. “대표님, 묻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더 캐물으셔도 어차피 서하 씨는 대표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이 일은 대표님이 관련된 일이기도 하니까요.”멈칫한 한현진이 물었다. “저와 관련이 있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이시연도 오지랖이 넓거나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은서하는 재무팀에서 그나마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었다. 평소 영수증을 청구하러 가면 다른 직원들인 이런저런 이유로 일을 미루기 일쑤였다. 경비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저녁을 사야 하는
“뿐만 아니라 재무팀의 모든 직원이 서하 씨를 따돌리고 있어요. 심지어 서하 씨와 친하게 지내던 다른 부서의 직원들도 이젠 감히 서하 씨에게 말을 걸지도 못하고요. 행여나 자기에게 불똥이 튈까 두렵기 때문이겠죠.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서하 씨는 아마 두 달이면 사직서를 내게 될지도 몰라요. 빠른 시일 내로 서하 씨에게 맞는 직장을 찾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사이 생기는 병원비를 서하 씨는 지불하기 어려울 거예요.”굳은 얼굴을 한 한현진의 표정이 침울하게 변해갔다. “이 팀장님, 은서하 씨와 친하세요?”이시연이 말했다. “그럭저럭요. 저희 B구역의 영수증 관리는 제가 담당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서하 씨와는 제가 제일 많이 얘기하는 편이예요. 밥도 자주 같이 먹었고요.”한현진이 속삭이며 이시연에게 몇 마디 건네자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해볼게요.”화장실에서 나오자 박해서가 한현진을 불렀다. 깔린느의 중요 고객 중 한 명인 홍혜림이 곧 회사에 도착한다며 한현진이 직접 마중을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현진은 로비로 걸음을 옮기며 박해서에게 물었다. “오늘 손님이 오신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박해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비서실에서 공지한 거라 저도 잘 모르겠어요.”한현진의 손에는 중요 고객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홍혜림이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특수 주문 제작을 하는 고객들은 일반적으로 서해금이 직접 접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서해금은 인스타그램에 몰디브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사진을 업로드 했으니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지금 이 시점에 회사에 방문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은 절대 한현진에게 자신의 인맥에 가까워질 기회를 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의심스러운 마음을 잠시 접어둔 채 한현진은 응접실 문을 열었다. 응접실은 화려하게 인테리어가 되어있었다. 가죽 소파에는 단아해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비록 나이가 있긴
성월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이분이 바로 얼마 전에 송씨 가문으로 돌아왔다는 잃어버렸던 딸이군요. 그러니 부대표도 하는 거지.”한현진이 씩 미소 지으며 화를 내지 않았다. “죄송해요, 사모님. 제가 아직 회사 상황을 잘 몰라서 결례를 했네요. 시향하고 싶은 제품을 말씀해주시면 제가 준비해드릴게요.”한현진의 단정한 태도에 홍혜림의 날이선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홍혜림이 태연하게 말했다. “얼마 전 새로 만든 운천, 그걸 시향해 보고 싶어요. 정말 당신들이 얘기한 것처럼 그렇게 좋다면 아들 결혼식 때 손님들께 드릴 답례품으로 주문하려고요.”“운천”이라는 향수를 몰랐던 한현진은 성월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성월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 대표님, ‘운천’은 파시면 안 돼요. 그건 얼마 전 민주련 사모님께서 주문하신 향수예요. 민주련 사모님은 다른 분과 같은 향수를 쓰는 걸 제일 싫어하세요. 저희쪽에서도 2차 판매는 하지 않을 거라고 계약을 체결했고요. 그리고 아무리 홍혜림 사모님께서 ‘운천’이 마음에 드셨다고 해도 결혼식 전에 제작을 완성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어려워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2차 판매도 할 수 없을 만큼 진귀한 향수를 홍혜림 씨는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성월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녀 역시 대체 누가 “운천”의 존재를 누설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운천”을 시향하러 회사에 방문한 홍혜림에게 시향조차 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면 그녀의 미움을 살 것이 분명했다. 지금 홍혜림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건 분명 누군가 시향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일 테였다. 홍혜림을 대하는 성월의 태도로 보아 그 VVIP 고객이 서해금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사람 같았다. 서해금은 향수를 판매할 수 없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홍혜림에게 회사에 방문해 시향해 보라고 했을 리가 없었다. 한 번의 선택으로 두 명의 고객에게 밉 보일만큼 서해금은 멍청하지 않았다. 이 일은 송가람과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현진을 홍혜림의 눈밖에
그러나 홍혜림은 한현진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전 시향을 꼭 해야겠어요. 향이 좋고 우리 집안 체면을 살릴 수 있는 제품이라면 그게 얼마가 됐든 지불할 수 있어요.”한현진이 해명을 시도했다. “저는 절대 그런 뜻이...”홍혜림이 한현진의 말을 자르며 짜증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런저런 헛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요. 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시향할 수 있어요, 없어요?”주먹을 꽉 움켜쥔 한현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가능하죠.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말하며 고개를 살짝 숙인 한현진이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섰다. 한현진은 재빨리 강한서에게 연락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일단 ‘운천’이라는 향수가 대체 어떤 매력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향수 진열대 앞에선 한현진은 ‘운천’이라는 향수를 찾을 수 있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청량한 향이 물씬 풍겨왔다. 그건 고요한 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코를 찌르는 짙은 향은 아니었고 어떤 식물에서 추출해 낸 향인 것 같았다. 굉장히 천연적이고 자연스러웠다. 이 향수를 뿌린 사람이 옆을 스쳐지나간다면 그녀는 아마 이 향이 그 사람 본연의 체향이라고 느껴질 것 같았다. 향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극강의 자연스러움이었다. 한현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홍혜림은 이 향수를 당연히 마음에 들어 할 것이라고. 한현진 자신 역시 이 향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이 향수로 홍혜림 씨를 유혹할 수 있었던 거야. 너무 독특해.”한현진이 조심스레 샘플 뚜껑을 닫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제 어떡하지? 아니면 내가 지금이라도 가서 이 향수는 제작시간이 오래 걸려서 아드님 결혼식 전까진 출고가 어렵다고 얘기할까?”강한서가 말했다. “만약 처음 그 분이 시향 하겠다고 했을 때 아예 그렇게 말했다면 어쩌면 그냥 넘겼을 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돌아가 만들 수 없다고 얘기한다면
송가람도 걸음을 옮겨 홍혜림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한현진에게 이 상황을 대처할 만한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홍혜림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운천”을 시향하기만 하면 홍혜림은 절대 다른 향을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다. 홍혜림이 시향실에 도착했을 때, 한현진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현진의 옆 테이블에는 수십 병의 향수가 진열되어 있었다. 홍혜림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 ‘운천’을 시향하겠다고 했을 텐데, 왜 이렇게 많이 꺼내놓은 거죠?”한현진이 미소 지으며 못생긴 유리병 하나를 가리키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바로 ‘운천’이예요. 혹여 사모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싶어 다른 것도 시향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봤어요.”“주도면밀하긴 하네요.”홍혜림은 다리를 꼬고 앉아 好整以暇道말했다. “시작하죠.”고개를 끄덕인 한현진이 시향지에 향수를 묻혔다. 그 모습을 본 주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먼저 ‘운천’부터 시향해야 하는 거 아인가요?”멈칫하던 홍혜림은 그제서야 한현진이 가져온 향수가 “운천”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수작인 거죠?”한현진이 태연하게 설명했다. “좋은 건 당연히 제일 마지막에 시향 하셔야죠. 그래야 사모님께서 ‘운천’이 얼마나 특별한 향수인지 아실 수 있잖아요.”말하며 한현진이 홍혜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모님, 이 향수는 ‘인 드림’이라는 제품이에요. 저희 회사의 수석 조향사의 작품이에요. 이 향수 역시 ‘운천’과 마찬가지로 아직 출시되지 않았어요.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시리즈의 향수로 아직 시향하신 고객님이 없어요. 사모님께서는 수많은 향수를 사용해 보셨으니 향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모님께 피드백을 구하고 싶었어요. 사모님 같은 VVIP 고객님의 조언은 저희가 향을 제조함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피드백이 되거든요.”그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사람이라면
한현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응접실에서 사모님을 처음 봤을 때 사모님께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메이크업은 한 상태였고 저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화장품은 조금씩이라도 향이 있기 마련인데 사모님께는 화장품 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사모님은 향을 싫어하는 분도 아니셨죠. 그래서 전 사모님께서 시향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신 거라고 생각했어요.”홍혜림은 순간 한현진이 달리 보이는 것 같았다. 고객의 사소한 부분까지 캐치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고객의 입장에서 상품을 고를 줄 알았다. 단지 상품을 팔기 위한 목적으로 아무 소리가 지껄이지는 않는다는 얘기였다. 홍혜림이 덤덤하게 말했다. “계속 하죠.”송가람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시선을 내린 한현진이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계속 시향을 이어갔다. 한현진은 연속 9개의 향수를 홍혜림에게 건넸다. 그녀는 화려한 언변으로 모든 상품이 홍혜림의 마음에 쏙 들게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향을 맡으면 사람의 후각은 점점 둔해지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모든 향수의 첫 번째 향, 중간향, 잔향까지 전부 느껴야 했으니 걸리는 시간이 너무 짧은 편도 아니었다. 반복되는 시향으로 홍혜림은 마지막엔 모든 향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한현진이 아무리 얼마나 좋은 향이라 칭찬 일색이어도 홍혜림에겐 그저 평범한 향 같을 뿐이었다. 홍혜림의 표정에 드리운 지루함을 보아낸 한현진이 시기적절하게 입을 열었다. “사모님, 일단 물이라도 마시면서 좀 쉬세요. 잔향이 가시면 ‘운천’을 시향해 드릴게요.”손을 내저은 홍혜림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바로 시작하죠.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조금 피곤하거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지금 바로 시향해 드릴게요.”한현진이 향수를 시향지에 묻히는 순간, 현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송가람은 “운천”을 시향한 홍혜림이 감탄하는 모습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향기가 시향실 가득 퍼지는 동안 홍혜림은 아무 말도
한현진은 얼마 전 탕비실에서 조향사 몇 명이 모여 후각에 대한 대화를 나눈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향하면서 너무 많은 향료의 냄새를 맡아 후각이 둔해진다며 일반적으로 냄새를 맡는 작업은 3시간 이상 지속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한현진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시향한지 2시간 30분이 흘러가고 있었다. 홍혜림은 전문적인 조향사가 아니었으니 2시간 30분이면 후각이 둔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는 홍혜림의 모습에 한현진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홍혜림에게는 먹히지 않았을까 불안해졌다. 홍혜림은 “인 드림”과 “운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결국 “운천”으로 향했다. 한현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홍혜림이 입을 열려는 그 순간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홍혜림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홍혜림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나왔어? 오늘 수업 안 해? 아, 그래? 좀 기다려야 할 거야. 아직 시향 중이거든.”“전에 쓰던 것들은 너무 오래 되서 지겨워졌어. 다른 거로 바꿔볼까 해. 좀 젊어 보이는 거로.”“자식, 아무튼 말은 예쁘게 한다니까.”“마음에 드는 건 있는데 고민 중이야. 둘 다 괜찮은 것 같아.”“다 사라고?”홍혜림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 돈 아니라고 쉽게 얘기하네.”“돈의 문제가 아니라 샀다가 뿌리지 않을까 봐 그러지. 네 할머니가 보면 또 잔소리하시잖아. 할머니 잔소리가 지나면 네 아빠가 또 시작할 거고. 머리 아파.”“네가 골라준다고? 네가 향수에 대해 알기나 해? 전엔 향수 바꾼 것도 눈치 못 채던 놈이.”“알면서 모른 척 한 거라고? 그 말을 내가 믿어? 내가 널 몰라?”“그래, 알겠어. 그럼 네가 와서 골라. 네 마음에 드는 거로 살게. 운전 조심하고. 나까지 걱정할 일 만들지 마.”전화를 끊은 홍혜림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잠깐 기다리죠. 아들이 와서 골라준다네요.”한현진은 여전히 마음을 놓을
금발의 소년이 홍혜림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건 걔가 죽음을 자초한 거고요. 터널에서 역주행하면서 시속 160까지 딛으니까 그렇죠. 제가 120km/h 초과하는 거 보셨어요?”홍혜림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120이 느려?”“안 느려요, 안 느려.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딱 이번 한 번 만요. 너무 타고 싶어서 그랬어요. 엄마가 이번만 모른 척 해주면 다시는 안 탈게요.”금발의 소년은 홍혜림이 대답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엄마, 요즘 화장품 바꾸셨어요? 피부가 왜... 이렇게 이상하지?”그 말에 홍혜림이 순간 긴장한 표정으로 얼굴을 만졌다. “아닌데, 줄곧 쓰던 브랜드야. 내 얼굴이 왜? 어디가 이상한데?”금발의 소년이 옅은 주황색의 눈을 똑바로 뜨고 홍혜림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예쁘네.”홍혜림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금발의 소년을 한 손으로 툭 밀어냈다. “자식, 엄마를 놀리기는.”금발의 소년은 쪼르르 달려와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진심이에요. 다른 애들 엄마는 점점 나이가 들어 보이는데 엄마는 점점 더 젊어지는 것 같아요. 지난번에 옷 가져다주시려고 학교에 왔을 때 다들 엄마가 제 누나인 줄 알았다니까요. 제 친구는 저한테 엄마 전화번호를 물어보기도 했었다고요. 제 매형이 되고 싶다면서요. 생각해 보니까 아빠가 절대 동의할 리가 없어서 단호하게 거절했어요.”예의 없다며 아들을 꾸짖는 홍혜림의 말과는 다르게 그녀는 전혀 화가 나 보이지 않았다. “됐어. 장난 그만해. 엄마 향수 골라준다며? 자, 얼른 고르고 집에 가자. 네 아빠 곧 퇴근할 시간이야. 식사할 시간까지 집에 없으면 또 그 더러운 성질부릴 거야.”금발의 소년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현—”말을 다 내뱉기 전에 멈칫하던 소년이 홍혜림에게 물었다. “엄마, 이 누나는 뭐라고 부르면 돼요?”“이 분은 깔린느의 부대표님이신 한현진 씨야.”홍혜림이 간단하게 소개했다.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