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대표님, 회사로 가실 건가요?”강한서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니요. 먼저 한현진 씨를 댁으로 모시죠.”말을 마친 강한서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름드리 쪽에 연락해서 청소 좀 해두라고 해요. 내일부터 우리 아름드리로 돌아갈 거예요.”‘우리?’‘임신하더니 이젠 따라다닐 필요도 없는 거야?’민경하는 한현진을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름드리로 돌아가서 살 거라는 강한서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민경하는 한현진의 본가를 향해 운전했다. 본가에 도착하자 물건을 챙겨 차에서 내리려던 한현진은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내일 직접 데리러 와요. 만약 안 오면 저...”강한서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울고불고 난리 칠 거예요?”한현진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강한서의 말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임산부는 원래 감정 기복이 오르락내리락하거든요. 이해해 줘요.”말하며 한현진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민경하에게 물었다. “한현진 씨는 전에도 저랬나요?”민경하가 헛기침하더니 대답했다. “지금은 많이 참으신 거예요. 전엔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화나게 하시면 안에서 문을 잠그고 대표님이 못 들어가게 하셨어요. 그래도 지금은 체벌은 안 하시잖아요.”“...”강한서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가 예전엔 그 정도로 자기 멋대로 하게 내버려뒀다는 건가요?”민경하가 속삭이듯 말했다. “남자라면 열에 아홉은 여자를 밝혀요. 사모님 외모를 좀 보세요. 그리고 대표님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대표님이라면 아쉽지 않을지.”“...”강한서는 오늘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떠올랐던 엉뚱한 기억 때문에 순간 조금 마음이 불편해졌다. “전 외모에 그다지 관심 없어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최고의 미모를 가지신 분과 결혼하셨으니 당연히 외모엔 관심이
“싸우시죠.”민경하가 말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을 이기지 못하셨어요. 결국엔 선물을 사 들고 사모님을 달래셔야 했고요.”강한서는 또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또 참지 못하고 민경하에게 질문했다. “혹시 무슨 수단을 써서 저에게 결혼을 강요한 거 아니에요?”“그건 아니에요. 회장님께 찾아가 사모님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 건 대표님이셨어요. 당시 사모님께서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예전의 양아버지에게 정략결혼을 강요당하고 계셨고요. 결혼으로 이득을 본 건 오히려 대표님이라고 할 수 있죠. 아무래도 사모님께서는 대표님보다 많이 어리시잖아요. 보통의 연애를 하셨다면 아마 대표님 나이대의 분은 만날 일이 없으셨겠죠.”“고작 다섯 살이 많을 뿐인데, 제 나이대라뇨.”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자 민경하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이건 사모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제가 한 말이 아니라.”그 말에 강한서는 더욱 불퉁해졌다. “내가 전에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이가 많다고 싫어하는 거야.”“사모님은 그저 객관적인 사실을 진술하신 것뿐이지 대표님께서 나이가 많다는 얘기는 아니었어요. 다만 사모님 나이엔 대표님은 확실히 조금—”“됐어요. 닥쳐요.”강한서의 굳은 얼굴엔 우울함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민경하는 핸들을 돌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강한서가 점차 건강을 회복함에 따라 그의 이성과 감정들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막 돌아왔을 때의 그는 한현진에 대해 알아가는 것조차 거부했었다. 이상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강한서는 한현진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요즘은 점차 나아지는 것 같았다. 돌아온 뒤로 익숙한 사람과 일들을 많이 접촉했던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모든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신호등을 기다리던 민경하는 줄곧 창밖을 보고 있는 강한서의 모습을 발견했다. 강한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창밖엔 유아용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었다. “대표님, 들어가서 보시겠어요?”강한서가 시
송가람은 기분이 퍽 좋은 듯 한현진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인사를 받고 아래층으로 향하려는 한현진을 송가람이 불러세웠다. “현진 씨.”한현진이 고개를 돌렸다. 송가람이 미소 짓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 옷 좀 골라줘요.”한현진은 어리둥절해졌다. 송가람이 말했다. “현진 씨 안목이 좋잖아요. 옷도 잘 입고. 내일 제가 뭐 입고 나가면 좋을지 봐줘요.”한현진은 송가람이 또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송병천과 서해금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으니 한현진은 괜히 송가람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 송병천을 난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송가람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송가람은 한현진을 자기 드레스룸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전 드레스룸은 별장에서 제일 큰 방이었다. 당시엔 한현진이 송병천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집에 들어오기 전이라 송가람은 집안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먹고 입는 것을 포함한 전부를 송가람에게는 최고로 대접했다. 예를 들면 별장에서 볕이 제일 잘 들고 베란다가 제일 큰 방은 송가람 것이었다. 집에서 제일 큰 드레스룸도 송가람 것이었고 환경이 제일 좋은 서재도 송가람의 몫이었다. 한현진이 집으로 돌아온 후, 사실 송병천은 송가람에게 드레스룸을 비우라고 하고 싶었다. 그 드레스룸은 한현진의 방과 제일 가까웠기에 그녀에게 주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송가람에게는 드레스룸이 하나 더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옷을 놓기에도 충분한 공간이었다. 물론 송병천은 좋은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남자는 많은 부분을 두루 살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그렇게 하면 편리하겠다고만 생각했겠지만 송가람 역시 같은 생각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친딸을 집으로 데려오고 나서 양딸에게 주었던 물건을 줄인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그들이 송병천에게 뭐라고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송병천이 그 제의를 꺼냈을 때,
송가람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한현진도 대충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송가람의 드레스룸을 슥 훑어보고는 에메랄드 컬러의 개량 한복을 송가람에게 건넸다. “이거로 입어요. 너무 정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캐주얼하지도 않을 것 같아요.”송가람이 옷을 건네받았다. “역시 안목이 좋으시네요. 이건 오빠가 작년 제 생일 때 선물로 준 거예요. 제가 이 디자이너님의 옷을 좋아하는 걸 알고 몰래 제 사이즈를 기록해 두었다가 주문한 거거든요. 아까워서 선물 받고 몇 번 입어보지도 못했어요.”한현진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송가람과 송민준 혹은 송병천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다지 듣고 싶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그녀를 잘못 안아가지 않았다면 그들에게는 20여 년이라는 감정의 공백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송병천은 한현진의 어릴 적 사진을 볼 때마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어린 시절의 그녀를 안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며 아쉬워했다. 한현진은 그가 어린 딸이 예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성장 과정을 지나쳐 버린 것을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쉬운 감정은 한현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이미 인생의 절반을 지나 나이가 드셨고 그의 곁을 지킬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한현진은 가족을 갈라놓은 범인이 죽도록 미웠다. 그러니 송가람이 송민준과 송병천의 옛일을 꺼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현진에게 송가람이 송병천과 송민준에게서 뭘 얼마나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안타깝게 여기는 건 송가람에게 빼앗긴, 함께 하지 못한 가족들과의 추억이었다. 더 이상 송가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던 한현진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가 볼게요.”송가람이 옷을 내려놓았다. “현진 씨. 전 늘 한서 오빠가 아니었다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멈칫, 한현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강한
한성우는 고개를 돌려 윤 작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어린애가 멋도 모르고 하는 헛소리하는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마.”차미주가 괜히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살까 걱정되어 자기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윤 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네 여자친구 꽤 재밌네.”한성우가 차미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눈빛을 지었다. “힘도 세. 혼자서 우리 셋을 때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차미주가 재촉했다. “윤 작가님, 꼭 그렇게 야한 장면이 있어야 해요? 배드신이 없으면 상 못 받는 거에요?”그건 윤 작가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어떤 스토리엔 스킨쉽을 통해 감정 변화를 표현하는 것도 필요하니까요.”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차미주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배드신을 보면서 감정의 변화에 집중해요. 다들 여자 주인공의 가슴이나 남자 주인공의 엉덩이나 쳐다보는 거 아니예요?”“풉—”윤 작가가 입에 머금었던 물을 뿜어냈다. 한성우는 할 말을 잃었다. ‘술을 마시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차미주는 여전히 주절거렸다. “제가 보기엔 그 사람들은 그걸 미끼로 사람들을 낚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영화를 무엇 때문에 보는지, 정말 모르는 거예요? 포르노를 찍고 싶으면 찍으면 되잖아요. 왜 예술영화라고 포장하는 거죠? 전 이젠 예술영화라는 말만 들어도— 읍—”한성우가 차미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기야, 물 좀 마시고 음식도 좀 먹어.”차미주가 한성우의 손을 찰싹 때렸다. “나 배 안— 읍— 고파— 읍—”웃음이 터진 윤 작가가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우리끼리인데 뭐, 놔줘. 마음껏 얘기하게.”한성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술을 따지 말았어야 했어.”윤 작가가 말했다. “그래도 꽤 귀엽네. 네가 미주 씨 데리고 왔을 땐 배우를 소개해 주려는 건 줄 알았는데, 작가일 줄이야.”말하며 멈칫한 윤 작가가 차미주에게 물었다. “미주 씨는 무슨 작품 쓰셨어요?”차미주는
한성우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만약 내가 제작한다면 대박 난다고 해도 미주는 자기 실력으로 성공한 거라고 믿지 않을 거야. 내가 뒤에서 뭔가 수작을 부린 거라고 생각하겠지. 보기엔 호탕해 보여도 자기 일엔 늘 자신감이 부족해.”윤 작가가 말했다. “연애를 무슨 딸 기르듯이 하네.”“어쩔 수 없지, 뭐.”한성우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너도 미주처럼 착하고 순진한 애를 만나면 아껴주고 싶을 수밖에 없을 거야.”윤 작가는 피식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한성우에게 전화번호 하나를 건넸다. “이건 내 후배 전화번호야. 나중에 미주 씨 시나리오를 그쪽으로 보내. 요즘 웹 드라마를 촬영 중이더라고. 요구도 높지 않은 편이니까, 먼저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한성우는 윤 작가가 준 전화번호를 저장하며 물었다. “미리 얘기 좀 잘 해줘. 저작권료가 너무 싸면 안 되니까.”윤 작가가 웃으며 욕을 지껄였다. “돈에 미친 놈아.”식사가 끝난 뒤 한성우는 앙증맞은 차미주의 가방을 메고 그녀를 부축하며 집으로 향했다. “여친 님, 집에 가야죠.”차미주가 비틀거리며 대답했다. “오빠는? 나 아직 물어볼 게 있는데.”‘술 좀 마시더니 오빠?’오빠라는 두 글자 한성우의 질투심에 작은 불씨를 지폈다. “갔어. 뭘 물어보려고?”“나 그거... 그거 물어보려고...”차미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음... 뭘 물어보려 했더라...”차미주가 손을 들어 머리를 탁 치더니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생각났어. 배드신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물어봐야 해.”한성우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순간 경계심을 높였다. “그건 물어서 뭐 하게?”“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가르쳐달라고 할 거야.”“그것도 배워야 아는 거야?”한성우가 자기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다. 주변 사람의 이목이 쏠리자 그는 곧 목소리를 낮추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방금까지 에로신을 넣은 예술 영화를 디스했잖아. 왜, 너도 쓰려고?”차미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쓰
한성우는 차미주의 손을 자기 어깨 위에 걸치고는 입꼬리를 씨익 올려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나 있잖아. 예술을 위해 이 한 몸 헌신하는 것쯤이야 영광이지. 난 한 푼도 받지 않을게.”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말에 차미주가 눈을 순간 반짝였다. 그녀는 한성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언제 갈 거야?”한성우는 차미주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말하며 허리를 숙이던 그는 차미주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올렸다. 차미주도 얼른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새삼 확인했다. “정말 돈 안 받아?”“정말 무료야.”한성우는 코끝으로 살며시 차미주의 코끝을 비비며 말했다. “키스만 하게 해주면.”차미주의 얼굴이 더 붉게 물들었다. 부끄러운 탓인지, 술 때문인지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면 키스를 여러 번 하면 더 많이 볼 수 있어?”“당연하지.”마음이 너그러운 모델은 웃으며 차미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밤새 봐도 돼.”그 말에 차미주가 한성우보다 더 조바심을 냈다. “그럼 얼른 집에 가자.”한성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명 받들겠습니다.”한성우는 단지 거짓말로 차미주를 달래 집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성우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차미주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보여달라며 소란을 피웠다. 한성우가 신을 벗겨줄 때부터 차미주는 떼를 썼다. “거짓말쟁이, 무료로 보게 해준다며?”한성우는 차미주의 양말을 벗기며 말했다. “볼 땐 보더라도 네가 맑은 정신일 때 봐야지.”차미주가 한성우를 째려보았다. “나 지금 정신 말짱해.”한성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내가 누군지는 알아?”“개자식!”툭 나온 대답에 한성우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턱 막혔다. “이름이 뭐냐고.”차미주가 입을 삐죽이며 내키지 않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한성우.”“그럼 너 우리 헤어진 건 기억해?”흐리멍덩한 눈으로 한성우를 쳐다보던 차미주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기억
한성우가 움찔 몸을 굳히더니 순간 눈을 부릅뜨고 차미주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차미주가 그의 신호를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한성우의 그곳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차미주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한성우가 소파에서 벌떡,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손이 묶인 채로 침실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손이 속박되어 있던 탓에 행동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빠른 걸음으로 달려온 차미주에게 다시 잡혔고 또다시 그녀에 의해 바닥에 쓰러졌다. 한성우는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그는 수도 없이 이런 장면을 상상해 왔었다. 그러나 장담컨대, 자기가 묶여있는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차미주는 한성우의 몸 위에 올라타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성우가 묶인 채로 움직이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기를 쳐다보고 있자 그가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차미주는 순간 배드신의 소재로 쓸만한 포인트를 캐치했다. “긴장하지 마.”차미주가 한성우를 달래며 말했다. “그저 보기만 할 거야. 구경 다 하면 풀어줄게.”‘내가 묶여 있는 데 대체 뭘 어떻게 구경한다는 거야.’그리고 차미주는 곧 행동으로 묶여서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한쪽에 세워두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한성우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차미주의 행동에 한성우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인지, 한성우는 순간적으로 자기를 묶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냈다. 그는 휙 몸을 돌려 차미주를 아래에 눕혔다. 그는 한 손으로 차미주의 두 손을 머리 위에 잡아두고 다른 한 손으로 벨트를 빼내더니 고개를 들어 씩 미소 지었다. “자기야, 이건 자기가 함부로 가지고 장난할 물건이 아니야.”벨트를 푸는 한성우의 모습은 차미주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한성우에 의해 꽁꽁 묶인 뒤였다. 잔뜩 지친 한성우는 땀이 온몸을 적셨다. 그는 셔츠를 벗더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말을 아끼던 윤명훈이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계약 해지 때문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회사에서는 쿨하게 한열을 보내줄 마음이 없거든요.”그가 한현진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현진도 알 수 있었다. 윤명훈은 똑똑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한열이 아직 취해 있는 지금 그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은 채 윤명훈은 한현진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제가 잠시 후 해명글을 올릴게요. 명훈 씨는 신하리 씨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쓸데없는 기사들 처리해 달라고 연락하세요. 제가 변호사를 선임해 보내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해요.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해명하기 어려워질 거예요.”한열의 바람 스캔들을 터트린 건 그저 페이크에 불과했다. 성추문으로 한열에게 흙탕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만약 한현진이 한열의 회사 대표였다면, 자신의 두 손으로 탑급의 자리까지 올린 아이를 이렇게 쉽게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계약을 해지 한다고 해도 한열의 빛을 어느 정도는 계속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한열은 신하리라는 충무로 연기파 배우의 인맥까지 갖고 있으니 앞으로 어느 정도로 발전할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끝장을 볼 이유는 없었다. 연예계에게는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었다.그러니 이번 일은 오히려 누군가 한열을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 꾸미고 있는 일 같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세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업로드 했다. 다만 송민준의 눈은 모자이크 처리했다.[저희 오빠와 사촌 동생이 그렇게까지 닮은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신하리]사진 속에서 한현진은 가운데 서 있었고 그녀의 왼쪽엔 송민준이, 그리고 오른쪽엔 한열이었다. 막내 동생인 한승은 아예 잘라버린 후 사진을 업로드 했다.비록 송민준의 눈을 모자이크 처리하긴 했지만 하관만 보아도 한열과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닮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