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현진이가 강한서라면 정신을 못 차린다 했더니, 개자식 꾸미니까 세상 사람 다 기죽게 멋있잖아.’워낙 키가 컸던 터라 강한서는 어디를 가도 유독 눈에 띄었다. 그러나 지금 강한서는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입꼬리를 내리고 인상을 쓰고 있는 강한서의 날카로운 눈빛이 한성우와 차미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성큼성큼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어딨어?”강한서가 입을 열자 차미주는 곧 그가 온몸으로 내뱉고 있는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성우는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갔어.”강한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왜 막지 않은 거야.”그러더니 그는 더 이상 한성우를 신경 쓰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수술실 문 앞으로 걸어가 있는 힘껏 문을 두드렸다. “한현진, 나와!”“대체 언제 임신한 거야. 왜 나에게 말 안 했어?”“내가 파혼하겠다니까 아이를 지우려는 거야? 왜 이렇게 멋대로 굴어?”“아이는 그쪽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나랑 상의했어? 왜 그쪽 마음대로 결정해.”“한현진. 나와서 똑바로 설명해.”높게 울려 퍼지던 강한서의 목소리가 나중에는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설명을 하라는 거야.”등 뒤로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움찔, 몸을 굳혔다. 그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이 환자복을 입은 채 팔짱을 끼고 덤덤한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고 있었다. 강한서가 빨개진 눈으로 멍하니 한현진을 쳐다보며 웅얼거렸다. “안에 있는 거…”그러더니 그는 홱 고개를 돌려 지금 이 상황의 원인 제공자인 한성우를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아니었어요?”한성우가 눈을 깜빡였다. “화장실 간건데?”강한서의 분노가 화르르 끓어오르더니 열이 치솟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순간 한성우를 수술실로 끌고 가 없애버리고 싶었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 간호사가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 “한현진 씨?”한현진이 고개를 돌렸다. “제예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강한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좀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돼요?”“생각할 필요 없어요.”한현진이 냉담한 눈빛으로 말했다. “강한서 씨가 힘들게 뭔가를 조정할 거 없어요. 파혼하고 아이를 지우면 우린 더 이상 아무 상관없는 사이가 되는 거예요. 간단한 일을 왜 복잡하게 만들려는 거예요?”한현진의 태도에 화가 난 것인지 강한서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한현진 씨, 그건 생명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어요?”“그러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제가 아이를 낳아주면 돈이라고 주실 건가요?”한현진의 눈빛이 비웃음으로 가득했다. “안 될 것도 없죠. 말해 봐요. 얼마나 줄 건데요? 제가 출산의 고통을 느낄 만한 가격인지 들어나 보죠.”강한서의 얼굴이 더 무섭게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이혼할 때 2000억 준다고 하셨잖아요. 아이를 낳는 건 결혼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니 그 2배는 주셔야겠죠? 아니면 제가 왜 아이를 낳아드리겠어요? 전—”“결혼해요.”강한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한현진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라고요?”강한서의 목젖이 꿀렁 움직였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해요. 결혼하면 한현진 씨는 미혼모가 될 필요가 없잖아요. 나중에 이혼하고 싶으면 저도 원하는 대로 해드릴게요. 재산분할도 절대 섭섭지 않게 해드릴 겁니다.“기뻐서 널뛰던 한현진의 기분이 순간 차게 가라앉았다. 강한서가 여전히 말을 이었다. “허락하시면 지금 바로 민 실장에게 변호사님을 모셔서 계약서를 작성—”“허락은 개뿔.”한현진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잡힌 손을 획 빼냈다. “결혼하고 싶으면 무릎이라도 꿇어 청혼부터 해야 할 거예요.”말을 마친 한현진이 어두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차미주가 그런 한현진을 쫓아갔다. “현진아, 수술 안 해?”한현진이 이를 악물었다. “할 거야. 하지만 강한서 때문에 피가 거꾸로 솟아 과다 출혈로 죽을 것
한성우가 콧방귀 뀌며 말했다. “내가 정말 이번 일을 빌미로 널 비난하고 싶었던 거라면 형수님이 수술을 마친 뒤에 너에게 알려줬을 거야.”굳은 얼굴을 한 강한서의 눈빛은 우울로 가득 찼다. 한성우가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그냥 그 아이를 원하는 거라면 더 이상 형수님 건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이는 없어도 상관없잖아. 넌 어차피 형수님을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나중에 다른 여자 만나. 너에게 아이를 낳아줄 여자는 많아.”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관자놀이가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다. 그는 손을 들고 힘을 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나 지금… 머리가 너무 복잡해.”“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한성우가 강한서를 훑어보았다. “강한서. 하필 형수님만 전부 잊어버렸어.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강한서는 말이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 어느 한 구역은 마치 잠겨있는 것처럼 그 구역을 건드리려고만 하면 머리가 찢어지듯 아파졌다. 그의 대뇌는 무의식적으로 한현진을 밀어냈다. 하지만 완벽하게 컨트롤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강한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현진의 행동을 관찰했다. 예를 들면 어제저녁처럼 말이다. 그는 한현진이 주강운이 집어준 음식을 젓가락으로 뒤적거리기만 할 뿐 사실은 한 입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계속 식탁의 담백한 음식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매번 그 음식들이 그녀 앞으로 돌려질 때면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러다 다른 사람에 의해 음식이 다시 돌아가면 한현진은 또 두 눈을 멀뚱히 뜨고 음식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원형 식탁을 자주 돌리는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한현진의 모습에 강한서는 어쩐지 조금 그녀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매번 우연하게도 한현진이 원하는 음식을 그녀 앞에 돌려주었다. 맛있게 음식을 먹는 한현진의 모습을 보는 강한서는 자기 기분마저도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현진이 먼저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올 때면 강한
차미주가 말했다. “엄마가 네가 임신한 시간에 맞춰서 점쟁이에게 물어봤대. 아이 낳으면 너랑 우리 딸 데리고 집으로 오라던데? 그 점쟁이랑 식사 자리도 가졌어. 아이 점 좀 잘 봐달라고 하려고.”말하던 차미주는 안타깝다는 태도로 말했다. “네가 아이를 지우면 엄마는 그 애를 만날 기회도 없는 거네.”한현진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누가 애 지운대?”“너 방금 강한서한테는 다른 병원으로 가서 수술한다며.”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나빠지라고 한 말이야.”“뭐?”한현진이 냉소 지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다음 이혼하라잖아.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이를 빌미로 발목 잡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차미주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현진아. 너도 강한서가 다시 마음을 돌리길 바랐잖아. 지금 너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거면 네 목적도 이룬 거 아냐? 왜 그런 말을 해서 화를 돋우는 거야?”“내가 임신했기 때문에 결혼하려는 거잖아. 진심으로 나와 결혼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차미주는 어리둥절해졌다. “너 오늘 이런 일 벌인 거, 네가 임신했다는 걸 강한서에게 알려주고 널 잡게 하려고 그런 거 아니었어?”“그랬지.”한현진이 모자를 쓰며 말했다. “내가 그런 목적이었다고 해도 강한서 입에서 아이를 낳으면 이혼하겠다는 말이 나온 이상 절대 그러겠다고 할 수 없어. 설사 아이가 있더라도 난 굳이 네가 아니어도 된다는 걸 강한서도 알게 만들어야 해. 날 잡고 싶고, 이 아이를 원하면 성의를 보여야지.”차미주가 말하려는데 벌컥,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니 강한서와 한성우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을 본 차미주는 얼른 입을 닫고 옆으로 비켜섰다. 한현진은 강한서를 쓱 훑더니 개의치 않고 양말을 신기 시작했다. 강한서는 옆에 서서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급해진 한성우가 옆에서 강한서를 걷어찼다. “말해. 그새 할 말을 까먹은 거야?”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다른 병
차미주는 한성우의 말에 감탄했다. ‘역시 입만 번지르르한 쓰레기 같은 자식이 있어서 다행이네.’강한서가 혀로 입술을 훑더니 말했다. “그럼… 이혼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요.”한현진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태도네요.”“…”강한서는 순간 곤혹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전엔 왜 이렇게 말발이 센 와이프를 만난 거야?’강한서가 막 입을 열려는데 누군가에 의해 병실 문이 열렸다. “현진아, 현진아.”정인월이 잰걸음으로 황급하게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아직 환자복을 입고 있는 한현진을 본 정인월이 순간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내가 그래도 한발 늦은 거니? 아직 얼굴도 못 본 우리 귀한 증손주, 벌써 지운 거야?”말을 하는 정인월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했다. 가까이 있던 한성우가 얼른 정인월을 부축했다. “아뇨, 아뇨. 아직 형수님 배 속에 있어요.”정인월은 순간 심장의 통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직 있어?”한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위기는 넘겼어요. 다음 위기가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요. 아이 엄마와 아빠가 지금 어쩔지 상의하고 있어요.”그 말에 정인월은 또 쓰러지고 싶어졌다. 이때 강한서도 정인월 앞으로 다가갔다. “할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정인월이 가슴을 움켜쥐고 화를 냈다. “그 말은 내가 물어야 할 말 같은데? 넌 현진이 데리고 여긴 어쩐 일인 거냐?”강한서는 어리둥절해졌다. “제가 데리고 온 거 아니에요. 전 한현진 씨 만나려고 여기 온 거라고요.”“그게 무슨 말이야? 현진이가 우리 귀한 증손주를 지우려고 했다는 거야?”정인월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현진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임신을 바랐는데, 이제 겨우 아이를 가졌는데 지우려고 할 리가 있어? 네 놈이 현진이를 여기로 데리고 온 게 틀림없어. 기억을 잃고 현진이를 기억하지 못해 파혼하고 쫓아내려고 하더니, 이젠 아이까지 지우려고 하는 거냐? 어떻게 너 같은 놈이 있을 수 있어.”강한서는 억울해 미칠 지
정인월은 한현진을 품에 안고 꽤 오랫동안 그녀를 위로했다. 한현진은 한참 동안을 훌쩍거리며 은연중에 강한서 흉을 봤다. “할머니에게 말해보렴. 한서가 아이 지우라고 데려온 거 맞지?”정인월이 이렇게 물으면 한현진은 울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강한서도 절 위해 그런 거예요. 아무래도 저희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정인월이 또 한현진에게 물었다. “현진아, 임신이 얼마나 큰일인데, 왜 이 할미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니?”그러면 한현진은 대답했다. “지난번에 갔을 때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들어가자마자 강한서와 가람 언니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한현진은 말끝을 흐리며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강한서와 송가람이 한 얘기나 행동 때문에 한현진이 충격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정인월의 지팡이는 또다시 자기 의무를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하도 매를 맞은 강한서는 나중에는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이렇게 교활하고 폭력적인 여자를 대체 어떻게 임신까지 하게 한 거야?’‘나 정말 m 성향이었던 거야?’그는 정말이지 과거의 자신에게 엄지를 치켜올려 주고 싶어졌다. ‘용사네, 용사야.’한현진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정인월이 강한서에게 물었다. “한서야, 말해 보렴. 어쩔 생각이니?”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께서 날을 정해주세요. 제가 선물을 준비해서 현진 씨 댁으로 결혼 허락받으러 갈게요.”정인월이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강한서는 그 눈빛에서 정인월이 하려는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네 놈이 어쩌다 인간다운 말을 하는구나.’“할머니, 저 저 인간이랑 결혼 안 해요.”한현진의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한성우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잠깐만. 오늘 이 모든 게 다 강한서가 결혼하겠다는 말을 꺼내게 하려고 그런 거 아니었어? 목적 달성이 눈앞에 있는데 왜 거절하는 거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정인월도 한현진을 바라
강한서는 입술을 짓이기더니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네. 할머니 말씀대로 할게요.”정인월이 한현진의 손을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정말 쟤가 기억을 찾지 못하면 어쩌려고 그래.”한현진이 정인월을 다독였다. “할머니, 설사 강한서가 절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절 다시 사랑하게 만들 거예요. 안심하시고 증손주 볼 준비하고 계세요.”확신이 가득한 한현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인월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한현진은 애초부터 아이를 지울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오늘 이 모든 건 차미주의 협박을 받은 한성우가 자신을 도운 한 편의 연극이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강씨 가문의 저택에서 정인월에게 자기가 임신한 사실을 은근히 흘렸을 때부터 한현진의 계획은 시작된 것이다. 한현진이 대놓고 임신한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지만 신중한 정인월의 성격상 사람을 시켜 한현진을 지켜보게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현진이 아이를 지우러 갔다는 사실에 정인월은 아마 깜짝 놀라 병원으로 달려올 것이었다. 강한서는 머리가 정상은 아닌데다 한현진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강한서를 누구보다 아끼는 정인월은 아무리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라도 결국은 강한서의 뜻을 따를 것이었다. 그러니 한현진은 아이로 정인월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강한서는, 한현진은 여전히 그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는 강한서가 자기에 대해 전혀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특정 사람과의 모든 기억만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너무나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강한서가 돌아온 후 보여준 송가람에 대한 알 수 없는 무조건적인 신뢰는 특히나 이상한 부분이었다. 한현진은 그 모든 것을 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강한서를 곁에 두어야만 기회가 있었다. 재혼은 그녀의 모든 계획 중 제일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 말 중, 한 마디만은 진심이었다. 결혼을 하더라도 강한서와
정인월은 워낙 사리에 밝은 사람이었기에 한현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꿍꿍이가 많은 애라는 걸 할미가 왜 예전엔 몰랐을까?”한현진이 씩 웃더니 다정하지만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전엔 한서가 저를 지켜줬잖아요. 이젠 제가 한서를 지켜줘야죠. 전에 할머니도 그러셨잖아요. 부부는 서로 감싸줘야 하는 거라고.”정인월의 눈빛이 따듯하게 빛났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한서의 사람을 보는 눈에 모든 장점이 쏠린 모양이구나.”한현진이 그 말에 누구보다 깊이 공감했다. 강한서가 다시 병실로 돌아왔을 때 한현진은 이미 단정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몇 마디 더 당부한 정인월은 먼저 진씨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던 정인월은 강씨 가문 자손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러 사찰에 가려고 했다. 한현진은 천천히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조금 서두르죠?”한현진은 여전히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움직였다. “못 기다리시겠으면 먼저 가요.”강한서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닫고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정리되지 않은 물건을 한현진에게 건넸다. 고맙다고 말한 한현진은 물건을 안에 넣어 정리하더니 갑자기 또 전부 쏟아버렸다. 그 행동에 강한서가 어리둥절해졌다. 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무언가를 찾는 듯 가방을 뒤적거렸다. 조용히 있으려던 강한서는 한참을 찾으면서도 찾아봐 달라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한현진의 모습에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진심이길 바란다고 하지 않았어? 날 무시하면 내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목소리를 가다듬은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뭐 찾아요?”한현진이 고개도 들지 않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걸이요.”“무슨 목걸이요? 어떻게 생겼어요?”“실버 목걸이에요. 직사각형 모양의 펜던트가 있어요.”강한서가 병실 곳곳을 살피며 한현진을 도와 목걸이를 찾아보았다. 병실을 한 바퀴 다 둘러본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