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가람은 얼굴을 굳히더니 말했다. “전 그 뜻이 아니라.”“그럼 방관자답게 굴어. 두 사람 일에 끼어들지 말고.”송가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송민준 앞으로 다가가 송민준을 불렀다. “오빠.”송민준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넌 모르는 일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였어?”그 말에 송가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오빠, 저도 그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전 말하고 싶었지만 한서 오빠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제가—”“그만해!”서해금의 송가람의 말을 자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얘기든 돌아가서 해.”송병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전엔 송가람의 마음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젠 그녀의 꿍꿍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더 험한 꼴을 보지 않으려면 서해금은 송가람의 말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강씨 가문의 본가였고, 대화를 나누기에 합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입을 닫은 송가람은 입술을 깨물고 붉게 달아오른 눈을 한 채 서해금 옆에 서 있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의 휠체어를 밀어주려고 그의 뒤로 다가갔다. 휠체어 손잡이를 건드리자마자 강한서가 한현진에게 말했다. “제가 할게요.”멈칫 행동을 멈춘 한현진은 강한서의 말을 무시한 채 멋대로 그의 휠체어를 밀며 앞으로 걸어갔다. “네가 예전에 사람은 본분을 지키는 게 먼저라고 그랬어. 지금 넌 반신불수가 된 본분이나 똑바로 지키면 돼. 엄한 일에 센 척 하지 말고.”강한서는 말문이 막혔다.“반신불수라니요. 말 참 듣기 싫게 하시네요.”“그래?”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넌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하는 않는 내가 좋아서, 그래서 나랑 사귄 거야. 난 내가 한 말은 전부 애정 표현 같은데.”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 한현진은 강한서를 밀며 익숙하게 서재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곧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강한서가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얘기하자면서요. 어디 가요?”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서재의 문을 잠그더니 몸을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
한현진은 여자 건달처럼 강한서가 하는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단 번에 강한서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어낸 한현진은 두 손으로 양쪽 옷깃을 잡았다. 그녀는 강한서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깨에 걸쳐진 옷을 그대로 벗겨냈다. 그 순간, 온몸을 뒤엎은 크고 작은 상처들이 눈을 찔렀다. 강한서의 몸에는, 특히 그의 등에는 성한 피부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상처는 이젠 거의 아물어 옅은 붉은색 혹은 갈색의 자국만 남아 있었고, 아직 아물지 않은 건 여전히 상처를 봉합한 바늘 자국과 뒤집힌 살갗이 남긴 흉터가 또렷이 보일 정도였다. 제일 긴 상처는 목뒤에서부터 왼쪽 허리 옆까지 쭉 이어졌다. 상처에는 심지어 아직 동상의 흔적까지 남아 있어 흉측하기에 그지 없었다. 한현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숨 쉬는 것 마저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상처투성이인 등을 만졌다. 한현진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날 밤 피를 뒤집어쓴 강한서의 모습 뿐이었다. 마음 아프고 두려운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코 끝이 찡해진 한현진은 목이 메어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강한서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부끄러움과 분노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달아오른 얼굴로 한현진을 밀쳤다. 굳은 얼굴로 화를 억누른 채 말했다. “대체 염치라는 게 있—”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강한서는 눈물이 가득 고인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닌 모습으로 흐느껴 울었다. “아파?”한현진의 목소리를 잔뜩 잠겨 있었고 웅얼거리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녀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입가를 맴돌던 질책의 말들이 그대로 목구멍에 막혀버렸다. 그는 무미건조하게 셔츠를 여미었다. “다 나았는데, 뭐가 아프겠어요.”잠시 생각하던 강한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가람 씨가 저희가 함께 납치되었었다고 하더라고요. 비록 전 기억이 안 나지만 그것 때문에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돼요.”“죄책감은 개뿔! 난 마음
한현진이 그제야 바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는 아마 평생 이렇게 누군가의 손아귀에 있었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화가 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 비록 발을 제대로 내딛지는 못했지만 다친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됐죠!”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갑자기 허리를 숙여 강한서의 바지를 벗겼다. 힘이 어찌나 센지 바지를 그대로 종아리까지 내려버렸다. 강한서: “!!!”분노가 치밀어 얼굴이 어두워진 강한서가 한현진을 밀쳤다. 그는 허둥지둥 다급하게 바지를 올렸다. 그의 입에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변태”, “양아치”와 같은 단어들만 튀어나왔다. 한현진은 비록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한결 놓였다. 강한서가 그녀를 속이지 않았다. 그의 다리엔 확실히 큰 상처는 없었다. 그의 말대로 병상에 너무 오래 누워있어 근육이 위축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몸이 허했던 강한서는 갑작스러운 한현진의 양아치 같은 행보에 놀라 한참이나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바지를 입지 못하고 있었다. 한현진이 몸을 일으켜 그의 앞으로 다가가 바지를 올려주었다. 그 순간 강한서는 한현진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한현진을 밀었다. “만지지 말죠.”한현진이 말했다. “계속 밀면 바지를 아예 벗겨버린 채 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지금 네 모습을 보여 줄 거야.”“...”결국 강한서는 대표로서의 자존심을 이기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지금 이런 꼴을 보여줄 수는 없었던 강한서는 어쩔 수 없이 두 눈을 딱 감고 타협해야 했다. “여자가 대뜸 남자 옷을 벗기고 바지를 내리는 게 정말 부끄러운 줄 모르는 거예요?”한현진이 강한서의 바지를 올려주더니 자상하게도 주름 잡힌 옷을 펴주기까지 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한서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우리 결혼도 했었어.”강한서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이것과 무슨
“뭐라고?”짧은 순간 동안 한현진은 귀를 의심했다. 강한서는 아무런 감정의 동여 없이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파혼하자고요. 예전의 일은 기억이 안 나요. 전 지금 한현진 씨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한현진은 숨이 턱 막혔다. 강한서가 기억상실인 척하고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송가람이 너에게 약이라도 먹인 거야? 아니면 뭐로 약점 잡혔어? 지X 맞은 기억상실이라니. 강한서, 이건 드라마가 아니야. 장난하지 마.”한현진이 무슨 말을 하든 강한서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제가 한현진 씨를 기억한다면 생사를 함께 한 사람을 제가 왜 모른 척하겠어요? 전 정말 한현진 씨가 누군지 기억이 안 나요.”강한서가 냉정할수록 한현진은 불안해졌다. “한성우 씨도 기억하고, 우리 오빠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은 전부 기억하면서 왜 유독 나만 잊은 거야? 내가 믿을 것 같아? 혹시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 때문에 화내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기억 못 하는 척 나 놀라게 하는 거야?”한현진은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말도 두서없이 내뱉었다. “다들 네가 죽었다고 했지만 난 믿지 않았어. 네가 분명 살아있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살아있으면서 왜 나타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 내가 주강운 씨와 만나면, 아니, 우리 안 만났어... 아니다, 일부러 언론사에 함께 있는 모습을 찍혀서 네가 그걸 보고 질투하게 하고 싶었어. 넌 내가 강운 씨와 가깝게 지내는 걸 제일 싫어했었잖아. 네가 기사를 보면 무조건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어. 이것 봐, 정말 돌아왔잖아...”강한서는 냉담한 표정으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잔인하기에 그지 없었다. “전 기사를 보고 돌아온 게 아니에요. 가람 씨가 제 장례식이 진행된다고 알려줘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현진 씨가 강운이와... 아니, 그 누구와 만나든 지금 저에겐 전부 똑같아요. 전엔 아무리 뜨거운 감정이었다고 해도 지금의 저에겐 한현진 씨
한현진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휠체어의 방향을 돌려 서재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한현진이 강한서가 문을 열 때쯤 갑자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살아있어서 너무 다행이야.”강한서가 멈칫하더니 곧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두 사람이 거실에 도착하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강한서를 부축하러 가려는 송가람의 옷깃을 서해금이 잡아당기며 가지 말라고 눈짓했다. 주강운이 한현진 앞으로 다가가며 나지막이 물었다. “얘기 잘했어요?”한현진이 “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고개를 돌려 송병천과 송민준에게 말했다. “아빠, 오빠. 집으로 돌아가세요.”한현진이 남아 강한서를 보살피지 않는다는 건 이번의 대화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비록 송병천은 강한서와 송가람이 함께 나타난 것이 꽤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강한서의 건강을 걱정했다. 강한서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 나서야 송병천은 가족을 데리고 강씨 가문 본가를 나섰다. 정원에서 차미주와 한성우는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차미주가 일방적으로 한성우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한성우는 방어만 할 뿐 반격하지 않았다. 차미주는 땀이 온몸을 적실 정도로 애를 썼지만 한성우를 때리지 못했다. 3이었던 분노 게이이지가 이젠 7로 솟아올랐다. 바로 이때, 한현진과 그녀의 가족이 나오는 모습을 본 차미주가 한현진을 불렀고 한성우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미주는 한성우가 경계를 늦춘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발을 꽉 딛어버렸다. 찌릿한 고통에 한성우는 그대로 한 발로 콩콩 뛰어다녔다. 차미주가 한현진을 따라가며 물었다. “현진아, 강한서 괜찮은 거지? 너희 화해했어?”한현진이 아직 대답하기도 전에 강민서가 갑자기 따라 나오며 그들을 불렀다. “가람 언니, 오빠가 들어오래요. 할 말이 있다고.”한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미주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강한서가 날 기억하지 못 해.”“뭐? 장난해? 내가 쓴 대본도 이렇게까지 막장은 아니라고. 연기하는 거 아냐?”차미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현진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서재에서 강한서의 모습은 가짜 같지 않았다. 설사 정말 송가람이 벌인 짓이라 그가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하는 거라고 해도 방금 두 사람이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는 충분히 한현진에게 눈치를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정말 한현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의 눈에는 경계와 냉담함 뿐이었다. 강한서가 돌아오긴 했지만 돌아온 강한서는 한현진이 바라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복귀는 안 그래도 명확하지 않은 일들에 안개마저 끼인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한현진은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날 기억한다면 내가 송가람을 싫어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굳이 내 앞에서 송가람을 불렀겠어?”차미주가 멈칫했다. ‘그러네. 이건 팔불출인 강한서가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잖아?’“가자.”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돌아가서 마저 얘기해.”차미주는 어쩔 수 없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물음을 다시 삼켜야 했다. 한성우는 차미주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급급했다. 얼른 차미주를 속인 것을 만회하고 싶었던 그가 먼저 차미주에게 다가갔다. “내가 데려다줄게.”“그런 거짓 호의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려던 차미주는 한성우와 강한서가 절친한 사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생각을 바꿨다. 만약 강한서가 정말 연기를 하는 것이라면 한성우는 분명 뭐라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우린 택시 타고 돌아가면 돼. 넌 여기 남아서 강한서 좀 지켜봐. 넌 강한서와 제일 친한 친구잖아. 병문안 좀 해.”말하던 차미주가 잠시 멈칫했다. “나 저녁에 요리할 거야. 시간 맞춰 올 수 있으면 901호로 와. 못 오면 말고.”거절당해 어두워졌던 한성우의 두 눈이 그 순간 놀라울 정도로 반짝였다. “장 봐 갈
한성우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송가람 씨에게 도와달라고 한 거야?”주강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줬다. 한성우 역시 강한서가 기억상실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 역시 한현진과 마찬가지로 아마 한현진과 주강운의 스캔들을 보고 화가 나 일부러 기억하지 못하는 척 화풀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주강운을 본 한성우는 이 일은 시작점부터 끝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성우가 입을 열었다. “강운아, 전에 일은 얘기하지 않을게. 그땐 우리 모두 한서가 죽은 줄 알았고 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거야. 하지만 이젠 한서가 돌아왔잖아. 어떤 마음은 숨길 수 있으면 숨겨야 해. 우리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데, 여자 하나 때문에 친구도 할 수 없으면 안 되잖아.”주강운의 얼굴엔 그다지 표정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앞에 놓인 김이 폴폴 올라오는 찻잔을 보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 둘이 만날 가능성이 아예 사라지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나서지는 않을 거야.”“그 둘이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넌 형수님을 마음에 품어서는 안 돼. 둘이 정말 헤어지고 너와 형수님이 만나도 매번 마주쳐야 하는 사이인데, 불편하지 않겠어?”한성우는 노파심에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오랜 친구 사이가 같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므로 인해 결국 등지는 모습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형수님처럼 미인의 정석 같은 느낌의 여자를 좋아하는 거면 내가 소개해 줄게. 네 조건엔 네가 원하기만 하면 형수님보다 예쁘고 좋은 여자들 많아. 만나보면 형수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느끼게 될 거야.”주강운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차미주 씨보다 예쁘고 기품 있고 학력도 높은 사람이 많은데, 넌 왜 굳이 차미주 씨여야만 하는 거야?”“좋아하니까.”차미주 얘기만 나오면 한성우는 말이 많아졌다. “같이 있으면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해.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해도 심심하지 않아. 삶에 갑자
‘젠장!’그 순간 한성우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강한서, 나중에 무릎 꿇을 걱정이나 해.’멈칫한 강한서는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 서재에 있을 때의 뜨겁던 눈빛과 다르게 지금 한현진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강한서가 방금 내뱉은 말들을 전부 들은 것이 분명했다. 한성우가 강한서를 위해 변명하려 했다. “형수님, 화가 나서 한 얘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한서가 못된 말 만 내뱉는 거 잘 아시잖아요.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그래요. 질투가 —”“전 장갑 가지러 왔어요.”한현진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맑은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장갑이라...”한성우가 멈칫했다. “어딨어요?”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서재에 있어.”송가람이 말했다. “제가 현진 씨와 다녀올게요.”“괜찮아요.”한현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제가 가람 언니보다 이 집에 대해 더 잘 알아요.”송가람이 멋쩍게 입을 닫았다. 이번엔 강한서도 송가람 편을 들지 않았다. 한현진은 곧장 서재로 향해 장갑을 가지고 바로 방을 나섰다. 거실을 지나칠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강운 씨, 사무실 가실 거예요? 여기 택시 잡기가 어려워서 그러는데 강운 씨가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한현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성우가 맹세컨대 그는 오직 한현진이 연기한 드라마에서만 이렇게 부드러운 한현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강한서도 이런 대우는 받지 못했었다. ‘이... 이건 너무 가짜잖아.’일이 아예 컨트롤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까 봐 한성우는 대의를 위해 희생하기로 했다. “형수님, 강운이 차에 가실 거면 차라리 제 차에 타시죠. 이웃이잖아요. 얼마나 가까워요. 강운이는 같은 방향도 아니고.”한현진은 한성우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미주가 성우 씨 차에 타고 싶지 않대요.”“...”주강운이 한현진과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말을 아끼던 윤명훈이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계약 해지 때문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회사에서는 쿨하게 한열을 보내줄 마음이 없거든요.”그가 한현진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현진도 알 수 있었다. 윤명훈은 똑똑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한열이 아직 취해 있는 지금 그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은 채 윤명훈은 한현진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제가 잠시 후 해명글을 올릴게요. 명훈 씨는 신하리 씨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쓸데없는 기사들 처리해 달라고 연락하세요. 제가 변호사를 선임해 보내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해요.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해명하기 어려워질 거예요.”한열의 바람 스캔들을 터트린 건 그저 페이크에 불과했다. 성추문으로 한열에게 흙탕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만약 한현진이 한열의 회사 대표였다면, 자신의 두 손으로 탑급의 자리까지 올린 아이를 이렇게 쉽게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계약을 해지 한다고 해도 한열의 빛을 어느 정도는 계속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한열은 신하리라는 충무로 연기파 배우의 인맥까지 갖고 있으니 앞으로 어느 정도로 발전할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끝장을 볼 이유는 없었다. 연예계에게는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었다.그러니 이번 일은 오히려 누군가 한열을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 꾸미고 있는 일 같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세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업로드 했다. 다만 송민준의 눈은 모자이크 처리했다.[저희 오빠와 사촌 동생이 그렇게까지 닮은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신하리]사진 속에서 한현진은 가운데 서 있었고 그녀의 왼쪽엔 송민준이, 그리고 오른쪽엔 한열이었다. 막내 동생인 한승은 아예 잘라버린 후 사진을 업로드 했다.비록 송민준의 눈을 모자이크 처리하긴 했지만 하관만 보아도 한열과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닮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