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송가람이 말했다. “현진 씨, 의사가 한서 오빠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요. 오늘은 이미 충분히 피곤할 것 같은데 할 얘기가 있으면 나중에 오빠가 회복한 다음에...”한현진이 차가운 태도로 송가람의 말을 잘랐다. “제가 지금 강한서와 얘기하고 있잖아요. 좀 닥쳐요.”한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낮은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만 열면 닥치라니, 한현진 씨는 기본적인 예의가 뭔지도 모르세요?”송가람을 감싸는 강한서의 모습에 한현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모두가 널 찾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네가 어디 있는지도 분명 알고 있었으면서도 억울한 척, 불쌍한 척했어. 손을 대지 않은 게 나에게는 이미 최대로 예의를 지켜준 거야.”강한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가람 씨가 숨겼다고 하더라도 그건 제가 원한 겁니다. 무슨 자격으로 따지시는 거죠?”그 말은 방금 송가람을 감싸주던 것보다 더 큰 살상력이 있었다. 한현진의 심장은 날카로운 칼에 찔린 듯했고 그녀의 얼굴은 순간 잿빛이 되었다. “무슨 자격?”한현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오른손 무명지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들어 보였다. “네 약혼녀라면, 자격이 충분하겠지?”강한서가 멈칫하더니 곧 미간을 찌푸리며 한현진을 훑어보았다. 신미정은 강한서가 한현진과 함께 있으면서 옛 기억을 떠올리고 또 자기를 강씨 가문에서 쫓아내 버릴까 두려웠다. 그러니 그녀는 그 상황을 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웃기는 소리. 네가 정말 한서 약혼녀라면 엄마인 내가 모르겠어?”송민준이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 “아들이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모르시는 분이니 그 사실을 모르시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한서 씨가 당신을 강씨 가문에서 쫓아냈으니 약혼녀가 생겼어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죠.”말문이 막힌 신미정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한현진이 가운데서 이간질 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자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야.”“이간질?”한현진이 고개를 들
송가람은 얼굴을 굳히더니 말했다. “전 그 뜻이 아니라.”“그럼 방관자답게 굴어. 두 사람 일에 끼어들지 말고.”송가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송민준 앞으로 다가가 송민준을 불렀다. “오빠.”송민준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넌 모르는 일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였어?”그 말에 송가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오빠, 저도 그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전 말하고 싶었지만 한서 오빠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제가—”“그만해!”서해금의 송가람의 말을 자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얘기든 돌아가서 해.”송병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전엔 송가람의 마음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젠 그녀의 꿍꿍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더 험한 꼴을 보지 않으려면 서해금은 송가람의 말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강씨 가문의 본가였고, 대화를 나누기에 합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입을 닫은 송가람은 입술을 깨물고 붉게 달아오른 눈을 한 채 서해금 옆에 서 있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의 휠체어를 밀어주려고 그의 뒤로 다가갔다. 휠체어 손잡이를 건드리자마자 강한서가 한현진에게 말했다. “제가 할게요.”멈칫 행동을 멈춘 한현진은 강한서의 말을 무시한 채 멋대로 그의 휠체어를 밀며 앞으로 걸어갔다. “네가 예전에 사람은 본분을 지키는 게 먼저라고 그랬어. 지금 넌 반신불수가 된 본분이나 똑바로 지키면 돼. 엄한 일에 센 척 하지 말고.”강한서는 말문이 막혔다.“반신불수라니요. 말 참 듣기 싫게 하시네요.”“그래?”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넌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하는 않는 내가 좋아서, 그래서 나랑 사귄 거야. 난 내가 한 말은 전부 애정 표현 같은데.”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 한현진은 강한서를 밀며 익숙하게 서재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곧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강한서가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얘기하자면서요. 어디 가요?”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서재의 문을 잠그더니 몸을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
한현진은 여자 건달처럼 강한서가 하는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단 번에 강한서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어낸 한현진은 두 손으로 양쪽 옷깃을 잡았다. 그녀는 강한서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깨에 걸쳐진 옷을 그대로 벗겨냈다. 그 순간, 온몸을 뒤엎은 크고 작은 상처들이 눈을 찔렀다. 강한서의 몸에는, 특히 그의 등에는 성한 피부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어떤 상처는 이젠 거의 아물어 옅은 붉은색 혹은 갈색의 자국만 남아 있었고, 아직 아물지 않은 건 여전히 상처를 봉합한 바늘 자국과 뒤집힌 살갗이 남긴 흉터가 또렷이 보일 정도였다. 제일 긴 상처는 목뒤에서부터 왼쪽 허리 옆까지 쭉 이어졌다. 상처에는 심지어 아직 동상의 흔적까지 남아 있어 흉측하기에 그지 없었다. 한현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숨 쉬는 것 마저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상처투성이인 등을 만졌다. 한현진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날 밤 피를 뒤집어쓴 강한서의 모습 뿐이었다. 마음 아프고 두려운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코 끝이 찡해진 한현진은 목이 메어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강한서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부끄러움과 분노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달아오른 얼굴로 한현진을 밀쳤다. 굳은 얼굴로 화를 억누른 채 말했다. “대체 염치라는 게 있—”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강한서는 눈물이 가득 고인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닌 모습으로 흐느껴 울었다. “아파?”한현진의 목소리를 잔뜩 잠겨 있었고 웅얼거리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녀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입가를 맴돌던 질책의 말들이 그대로 목구멍에 막혀버렸다. 그는 무미건조하게 셔츠를 여미었다. “다 나았는데, 뭐가 아프겠어요.”잠시 생각하던 강한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가람 씨가 저희가 함께 납치되었었다고 하더라고요. 비록 전 기억이 안 나지만 그것 때문에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돼요.”“죄책감은 개뿔! 난 마음
한현진이 그제야 바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강한서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는 아마 평생 이렇게 누군가의 손아귀에 있었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화가 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 비록 발을 제대로 내딛지는 못했지만 다친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됐죠!”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갑자기 허리를 숙여 강한서의 바지를 벗겼다. 힘이 어찌나 센지 바지를 그대로 종아리까지 내려버렸다. 강한서: “!!!”분노가 치밀어 얼굴이 어두워진 강한서가 한현진을 밀쳤다. 그는 허둥지둥 다급하게 바지를 올렸다. 그의 입에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변태”, “양아치”와 같은 단어들만 튀어나왔다. 한현진은 비록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한결 놓였다. 강한서가 그녀를 속이지 않았다. 그의 다리엔 확실히 큰 상처는 없었다. 그의 말대로 병상에 너무 오래 누워있어 근육이 위축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몸이 허했던 강한서는 갑작스러운 한현진의 양아치 같은 행보에 놀라 한참이나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바지를 입지 못하고 있었다. 한현진이 몸을 일으켜 그의 앞으로 다가가 바지를 올려주었다. 그 순간 강한서는 한현진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한현진을 밀었다. “만지지 말죠.”한현진이 말했다. “계속 밀면 바지를 아예 벗겨버린 채 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지금 네 모습을 보여 줄 거야.”“...”결국 강한서는 대표로서의 자존심을 이기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지금 이런 꼴을 보여줄 수는 없었던 강한서는 어쩔 수 없이 두 눈을 딱 감고 타협해야 했다. “여자가 대뜸 남자 옷을 벗기고 바지를 내리는 게 정말 부끄러운 줄 모르는 거예요?”한현진이 강한서의 바지를 올려주더니 자상하게도 주름 잡힌 옷을 펴주기까지 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한서의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우리 결혼도 했었어.”강한서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이것과 무슨
“뭐라고?”짧은 순간 동안 한현진은 귀를 의심했다. 강한서는 아무런 감정의 동여 없이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파혼하자고요. 예전의 일은 기억이 안 나요. 전 지금 한현진 씨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한현진은 숨이 턱 막혔다. 강한서가 기억상실인 척하고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송가람이 너에게 약이라도 먹인 거야? 아니면 뭐로 약점 잡혔어? 지X 맞은 기억상실이라니. 강한서, 이건 드라마가 아니야. 장난하지 마.”한현진이 무슨 말을 하든 강한서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제가 한현진 씨를 기억한다면 생사를 함께 한 사람을 제가 왜 모른 척하겠어요? 전 정말 한현진 씨가 누군지 기억이 안 나요.”강한서가 냉정할수록 한현진은 불안해졌다. “한성우 씨도 기억하고, 우리 오빠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은 전부 기억하면서 왜 유독 나만 잊은 거야? 내가 믿을 것 같아? 혹시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 때문에 화내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기억 못 하는 척 나 놀라게 하는 거야?”한현진은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말도 두서없이 내뱉었다. “다들 네가 죽었다고 했지만 난 믿지 않았어. 네가 분명 살아있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살아있으면서 왜 나타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 내가 주강운 씨와 만나면, 아니, 우리 안 만났어... 아니다, 일부러 언론사에 함께 있는 모습을 찍혀서 네가 그걸 보고 질투하게 하고 싶었어. 넌 내가 강운 씨와 가깝게 지내는 걸 제일 싫어했었잖아. 네가 기사를 보면 무조건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어. 이것 봐, 정말 돌아왔잖아...”강한서는 냉담한 표정으로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잔인하기에 그지 없었다. “전 기사를 보고 돌아온 게 아니에요. 가람 씨가 제 장례식이 진행된다고 알려줘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현진 씨가 강운이와... 아니, 그 누구와 만나든 지금 저에겐 전부 똑같아요. 전엔 아무리 뜨거운 감정이었다고 해도 지금의 저에겐 한현진 씨
한현진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휠체어의 방향을 돌려 서재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한현진이 강한서가 문을 열 때쯤 갑자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살아있어서 너무 다행이야.”강한서가 멈칫하더니 곧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두 사람이 거실에 도착하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강한서를 부축하러 가려는 송가람의 옷깃을 서해금이 잡아당기며 가지 말라고 눈짓했다. 주강운이 한현진 앞으로 다가가며 나지막이 물었다. “얘기 잘했어요?”한현진이 “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고개를 돌려 송병천과 송민준에게 말했다. “아빠, 오빠. 집으로 돌아가세요.”한현진이 남아 강한서를 보살피지 않는다는 건 이번의 대화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비록 송병천은 강한서와 송가람이 함께 나타난 것이 꽤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강한서의 건강을 걱정했다. 강한서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 나서야 송병천은 가족을 데리고 강씨 가문 본가를 나섰다. 정원에서 차미주와 한성우는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차미주가 일방적으로 한성우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한성우는 방어만 할 뿐 반격하지 않았다. 차미주는 땀이 온몸을 적실 정도로 애를 썼지만 한성우를 때리지 못했다. 3이었던 분노 게이이지가 이젠 7로 솟아올랐다. 바로 이때, 한현진과 그녀의 가족이 나오는 모습을 본 차미주가 한현진을 불렀고 한성우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미주는 한성우가 경계를 늦춘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발을 꽉 딛어버렸다. 찌릿한 고통에 한성우는 그대로 한 발로 콩콩 뛰어다녔다. 차미주가 한현진을 따라가며 물었다. “현진아, 강한서 괜찮은 거지? 너희 화해했어?”한현진이 아직 대답하기도 전에 강민서가 갑자기 따라 나오며 그들을 불렀다. “가람 언니, 오빠가 들어오래요. 할 말이 있다고.”한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미주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
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강한서가 날 기억하지 못 해.”“뭐? 장난해? 내가 쓴 대본도 이렇게까지 막장은 아니라고. 연기하는 거 아냐?”차미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현진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서재에서 강한서의 모습은 가짜 같지 않았다. 설사 정말 송가람이 벌인 짓이라 그가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하는 거라고 해도 방금 두 사람이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는 충분히 한현진에게 눈치를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한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정말 한현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의 눈에는 경계와 냉담함 뿐이었다. 강한서가 돌아오긴 했지만 돌아온 강한서는 한현진이 바라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복귀는 안 그래도 명확하지 않은 일들에 안개마저 끼인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한현진은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날 기억한다면 내가 송가람을 싫어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굳이 내 앞에서 송가람을 불렀겠어?”차미주가 멈칫했다. ‘그러네. 이건 팔불출인 강한서가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잖아?’“가자.”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돌아가서 마저 얘기해.”차미주는 어쩔 수 없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물음을 다시 삼켜야 했다. 한성우는 차미주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급급했다. 얼른 차미주를 속인 것을 만회하고 싶었던 그가 먼저 차미주에게 다가갔다. “내가 데려다줄게.”“그런 거짓 호의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려던 차미주는 한성우와 강한서가 절친한 사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생각을 바꿨다. 만약 강한서가 정말 연기를 하는 것이라면 한성우는 분명 뭐라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우린 택시 타고 돌아가면 돼. 넌 여기 남아서 강한서 좀 지켜봐. 넌 강한서와 제일 친한 친구잖아. 병문안 좀 해.”말하던 차미주가 잠시 멈칫했다. “나 저녁에 요리할 거야. 시간 맞춰 올 수 있으면 901호로 와. 못 오면 말고.”거절당해 어두워졌던 한성우의 두 눈이 그 순간 놀라울 정도로 반짝였다. “장 봐 갈
한성우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송가람 씨에게 도와달라고 한 거야?”주강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줬다. 한성우 역시 강한서가 기억상실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그 역시 한현진과 마찬가지로 아마 한현진과 주강운의 스캔들을 보고 화가 나 일부러 기억하지 못하는 척 화풀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주강운을 본 한성우는 이 일은 시작점부터 끝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성우가 입을 열었다. “강운아, 전에 일은 얘기하지 않을게. 그땐 우리 모두 한서가 죽은 줄 알았고 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거야. 하지만 이젠 한서가 돌아왔잖아. 어떤 마음은 숨길 수 있으면 숨겨야 해. 우리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데, 여자 하나 때문에 친구도 할 수 없으면 안 되잖아.”주강운의 얼굴엔 그다지 표정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앞에 놓인 김이 폴폴 올라오는 찻잔을 보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 둘이 만날 가능성이 아예 사라지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나서지는 않을 거야.”“그 둘이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넌 형수님을 마음에 품어서는 안 돼. 둘이 정말 헤어지고 너와 형수님이 만나도 매번 마주쳐야 하는 사이인데, 불편하지 않겠어?”한성우는 노파심에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오랜 친구 사이가 같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므로 인해 결국 등지는 모습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형수님처럼 미인의 정석 같은 느낌의 여자를 좋아하는 거면 내가 소개해 줄게. 네 조건엔 네가 원하기만 하면 형수님보다 예쁘고 좋은 여자들 많아. 만나보면 형수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느끼게 될 거야.”주강운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차미주 씨보다 예쁘고 기품 있고 학력도 높은 사람이 많은데, 넌 왜 굳이 차미주 씨여야만 하는 거야?”“좋아하니까.”차미주 얘기만 나오면 한성우는 말이 많아졌다. “같이 있으면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해.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해도 심심하지 않아. 삶에 갑자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