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진은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번호라곤 가족, 강한서, 차미주와 한성우의 번호뿐이었다.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한성우의 번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강한서를 한 손으로 속박하고 있던 가정 폭력남은 다른 한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어 한현진이 부르는 번호대로 발신창 다이얼을 눌렀다.한편, 한성우는 강한서와 한현진이 있는 곳의 단서를 직접 경찰 측에 알리기 위해 도로 위를 질주 중이었다. 그러다 발신 번호 제한으로 걸려 온 전화에 무의식적으로 통화 수락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한성우가 전화를 받는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한현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한성우가 입을 열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걸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한현진의 잔머리였을 것이다.“주 변호사님, 저예요.”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의외의 목소리에 놀란 한성우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갓길에 차를 세웠다.한성우는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휴대전화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어디 계세요? 제가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는지 아세요?”대충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고 재치 있게 대답해 준 한성우에 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몇 초의 짧은 시간 동안 수화기 너머의 한성우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설마 “그 사람을 왜 나한테서 찾아?”와 같은 것일까 봐 걱정돼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한현진이었다.한현진은 일전에 납치범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경찰 쪽에서 이미 어쩌고저쩌고했던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그 대화로 이미 둘이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을 적어도 친인척들과 친구들은 알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만약 한성우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행동했더라면 오히려 납치범들의 의심을 샀을 것이 분명했다.한현진이 침착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저는 지금 안전해요. 다만, 돌아갈 수가 없을 뿐이에요.”“한서는요? 한서는 지금 어때요?”“한서는…”한현진은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반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한서는
한현진이 상황 파악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납치범은 거칠게 휴대전화를 강물에 빠트리며 말했다.“이 개 같은 X 년이, 또 날 갖고 놀았다 이거지?”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한현진도 당황스럽고 억울했다.“속인 적 없어! 강한서가 지금 당신 손에 인질로 잡혀있는데 내가 대체 무슨 용기로 당신을 속여!”한성우가 도착하려면 멀었으니 밖에서 들리는 엔진소리가 한성우의 차일 리는 없었다.이 야밤에 이런 외딴 황무지까지 올 사람이 있나? 설마 경찰이 여길 알아버린 건가?점점 가까워지는 차를 보던 납치범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강한서의 멱살을 억세게 쥐고 있던 납치범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궁지에 몰린 납치범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역시나 경찰인 듯싶었다.이미 피를 많이 흘린 강한서의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져 납치범의 손에 멱살만 잡힌 채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힘없이 그 자리에 축 늘어져 있었다.그런 강한서를 보는 한현진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납치범이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강한서를 차가운 물 속으로 밀어 넣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한현진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진짜 속인 적 없어. 제발 한서 좀 놔주면 안 될까?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어딜 도망간다고 그래. 차라리 나를 인질로 잡아. 제발, 제발... 내가 이렇게 빌게.”그런 한현진의 모습을 보는 강한서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는 한현진이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며 머리를 숙이는 모습이 너무 싫었다. 그것도 하루에 두 번씩이나...점점 가까워지는 차에 납치범의 모든 정신이 그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밝은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다가오던 차는 다리까지 다다르고 나서야 헤드라이트를 껐다.납치범은 무의식적으로 강한서의 어깨를 짓누르며 재빨리 손을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바로 그때, 차 안에서 한 여
여인의 말에 가정 폭력남이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은 듯 멈칫하더니 곧이어 강하게 여인의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다.“그럴 리가 없어!”답답해진 여인이 눈을 붉히며 따졌다.“네가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며, 그럼 그때 차라리 날 찾아와서 따졌어야지. 그깟 같잖은 네 친구들 말만 철석같이 믿고 네 아내를 바람핀 여자로 의심해? 애초에 나한테 해명할 기회를 준 적은 있었어? 내가 너랑 이혼을 결심한 건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너 때문이야. 네가 변해서라고!”가정 폭력남의 표정이 멍해졌다. 완전히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공허한 표정으로 물었다.“진짜 다 내 잘못이라고?”흔들리는 듯한 가정 폭력남의 모습에 주강운이 여인에게 눈빛으로 무언의 신호를 주었다. 주강운의 눈빛을 읽은 여자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차분한 말투로 대답했다.“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그렇게 그냥 흘려보내자. 더는 아무 죄 없는 사람 다치게 하지 마. 지금 당장 그 사람 풀어주면,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게.”의외의 대답에 가정 폭력남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낮게 물었다.“정말...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여인은 두려운 마음에 떨려오는 목소리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당연하지...”가정 폭력남은 몇 초 동안 여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의심을 아직 완전히 거두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남자가 언제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심장을 졸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이리로 와, 나 부축 좀 해줘.”예상치 못한 남자의 태도에 여인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차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던 주강운이 여인에게 나지막이 속삭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곧 경찰들이 도착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가보세요.”입술을 꽉 오므린 여인은 손가락을 안쪽으로 말아 힘껏 주먹을 쥔
하지만 이미 상처를 많이 입어 몸에 힘이 없던 강한서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하고 거센 물살에 휩쓸려 2m 되는 곳까지 밀려 나갔다.한현진은 죽을힘을 다해 강한서가 있는 곳으로 헤엄쳐 가까스로 그의 옷깃을 잡는 데 성공했다.하지만 강한서가 떠밀려 가지 않게끔 잡는다 한들 물속에서 한현진이 강한서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끄러운 물소리에 원활한 소통도 하기 힘들뿐더러 여자의 몸으로 건장한 성인 남성을 이끌고 뭍으로 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상황판단이 끝난 한현진은 두 사람의 얼굴만은 물 위로 노출 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천천히 강한서를 데리고 강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헤엄쳐 가며 어떻게든 살아남을 기회만을 노렸다.하늘이 그녀를 도운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원체 운이 좋은 사람인 것인지 물살을 따라 헤엄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현진은 물살을 가로막고 있던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나뭇가지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옮겨 강한서를 그곳에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어찌 됐든 한현진은 그 나뭇가지 덕분에 잠깐이라도 한숨을 돌릴 기회가 생겼다.“강한서...”한현진은 울먹이며 입을 열어 강한서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삼켜가며 큰 소리로 다시 한번 강한서의 이름을 불렀다.“강한서, 잠들면 안 돼! 나 더는 너 못 끌고 가. 내가 밑에서 받쳐줄 테니까 넌 이 나뭇가지 타고 올라가. 나도 곧 뒤따라갈게. 우리 빨리 여기서 나가자.”한현진의 부름에 강한서가 쿨럭이며 조금 전 물에 빠지던 순간 먹었던 물을 뱉어냈다. 그는 물에 빠지기 전부터 심한 상처를 입었던 탓에 온몸의 힘이 다 빠져 기진맥진해 있던 상태였다.하지만 한현진의 간절한 울음소리에 강한서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으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천천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조금씩 위로 올라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제대로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나뭇가지가 “콰직”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나뭇가지 자체가 물속으로 점
한현진의 고집에 강한서는 그대로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추운 한겨울 밤,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로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어떻게든 체력을 아끼려 노력했다. 한현진의 체력 역시 바닥을 찍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극심한 추위에 노출되어 있던 탓에 입술은 보라색으로 변색 되기 시작했고 정신까지 흐리멍텅해지고 있는 상태였다. 오직 삶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만이 남아 그 얇은 나뭇가지를 꽉 붙들고 있었다.그 순간, 육지 근처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산스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린 한현진이 다급하게 강한서를 불렀다.“강한서, 일어나. 사람들 온 것 같아. 우릴 구하러 왔다고!”들뜬 목소리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등 뒤에 있던 강한서가 어느 순간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순간적으로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을 느낀 그녀는 머리끝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한현진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텅 빈 수면 위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큰 소리로 강한서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름에 대답하는 것은 매정하게도 시끄러운 물소리뿐이었다.불안해진 한현진이 잡고 있던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 물살을 따라 다시 헤엄쳐 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서야 자신의 온몸이 나뭇가지에 꽁꽁 묶여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한서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기 전, 마지막 남은 힘을 총동원해 자신의 허리띠로 한현진을 나뭇가지에 묶어버린 것이었다. 그녀의 손에 힘이 풀려버린 순간에도 강한서의 허리띠가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던 덕에 한현진은 조금 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얼음장처럼 차가운 강물 속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던 한현진은 진작에 동상으로 온몸의 감각이 마비되어 있던 상태라 강한서가 무슨 짓을 하든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다.한현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미친 듯이 자신을 감싸고 있던 그 허리띠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던 순간, 육지의
“강한서...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차미주가 울음을 삼키며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물었다.한성우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오므렸다. 평소에 그렇게 누군가를 위로해 주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던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대 긍정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다.강한서는 수영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깊은 상처를 입은 채 그렇게 물살이 센 곳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란 0에 수렴한다고 봐도 무방했다.강한서와 함께 강물에 뛰어든 그 가정 폭력남의 시체는 이튿날 오후에 바로 발견되어 건져 올려졌지만 강한서에 대한 건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짧게 한숨을 내쉰 한성우가 조용히 말했다.“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잖아. 현진이는 아무 상처도 없이 물속에 오래 있었던 것뿐인데 지금까지 못 깨어나고 있잖아. 강운이가 그러는데 한서, 상처까지 입은 상태로 물에 빠진 거래. 어쩌면... 누가 구해준 거 아닐까? 현진이처럼 한서도 아직 못 깨어난 거고.”차미주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현진이 깨고 나서 아직도 한서 못 찾은 거 알면, 우리 현진이 어떡해...”한현진은 병상에 누워있는 며칠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고열에 시달려야 했다. 그 탓에 가족들은 온종일 그녀 곁에서 수시로 상태를 체크해 줘야만 했다. 병실에 상주 할 수 없었던 차미주도 하루에 두 번씩은 얼굴을 비추었다. 병실로 들어설 때마다 차미주의 눈에 들어온 건 악몽이라도 꾸는 듯 인상을 쓰고 괴로워하는 한현진의 표정과 끊임없이 “강한서” 세 글자만을 외치는 한현진의 입술이었다.멀쩡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단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제3자도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인데 강한서와 각별한 사이였던 한현진의 속은 얼마나 문드러질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차미주는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말했다.“그래, 그 범인은 이미 죽었어. 그러면 나머지 두 명은? 대선 직전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건, 분명 배후가 존재한다는 뜻이야. 강한서 삼촌이 사람 시켜서 벌인 짓일지 누가 알아!
“그게 뭐야?”“흔히 말하는 안면인식장애 말이야. 우리가 평소에 농담처럼 얘기하는 그런 거 말고, 그 사람은 정말 사람을 구별하지 못해. 낯선 사람은 더더욱. 오직 옷차림이나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대. 진료를 봤었던 의사가 그러는데 전에 뇌에 종양이 생겨서 수술한 뒤로 저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경찰 측에서도 지인, 친구, 동료를 통해 알아봤는데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게 확실해. 게다가 그 병 때문에 부서 이동도 했었고.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니까 점점 의심이 많아지고 성격도 괴팍해지면서 조울증까지 왔대. 그리고 그 원인으로 당시 사람을 다치게 한 후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했었대.”“전 와이프와 친구들이 그러는데, 감정 기복이 심하고 소유욕이 강했대. 특히 병이 난 후에는 와이프가 이성과 대화만 나눠도 자신을 배신했다고 오해했고 강운이가 와이프의 이혼 소송을 도와주니까 앙심을 품고 손 쓸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거야.”잠시 말을 멈춘 한성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경찰은 한서를 강운이로 착각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어.”차미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걸 어떻게 착각해? 강한서와 주 변호사님을 못 알아보면 현진이는 어떻게 알아본 건데? 그 이유는 말이 안 되잖아.”“형수님은 왼쪽 귀 위에 점이 있잖아. 형수님이 출연한 봄의 연인도 인기가 엄청났었고. 납치범은 형수님을 이미 여러 번 봤으니 형수님 신체 특점과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을 거야. 경찰 측에서 납치범의 휴대폰을 복원했는데 그 안에 형수님 동영상이 가득했다고 했어. 복수를 위해서 한서 부부를 납치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거지.”차미주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만약 복수가 목적이라면 현진이와 강한서가 동해에 갔던 그때가 더 좋은 기회였잖아. 왜 하필 주주총회가 있는 날 한성 그룹 앞에서 그런 짓을 한 거야?”얘기하던 차미주의 머릿속에 갑자기 뭔가가 반짝 떠올랐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복수를 하려는 것이든 강한서를 주주총회에 참가하지 못하도
주강운 역시 자연스레 차미주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시선을 아래로 떨군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현진 씨는 어때?”“열은 이미 내렸는데, 아직 안 깨어났어.”한성우가 양지원을 보더니 어떻게 된 거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주강운이 설명했다. “현진 씨 사고 났다는 소식을 듣고 양지원 씨도 병문안 오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 마침 나도 이쪽으로 오는 길이라 같이 온 거야.”한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 씨, 들어오세요.”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물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차미주는 수건을 들고 한현진의 손등을 닦아주고 있었다. 양지원이 들어오자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네곤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한현진은 창백한 얼굴로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야윈 듯 볼은 핼쑥해졌고 이목구비는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평소 방긋방긋 잘 웃고 말주변이 좋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양진환에게서 사건의 모든 과정을 전해 들은 양지원은 대체 얼마나 사랑해야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다리에서 따라 뛰어내릴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그저 한 남자일 뿐이었다. 송씨 가문의 귀한 딸이라면 어떤 남자든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다. 한현진을 꽤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까지 사랑에 눈이 멀었을 줄이야. 남자 하나를 위해 자기를 이런 꼴로 만들다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긴 한 걸까?“의사가 뭐래요?”양지원이 나지막하게 차미주에게 물었다.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