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이 얼른 다른 책 한 권을 건넸다. “그럼 이건 어떠세요?”책자를 받은 양지원이 몇 장 펼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지원과 함께 온 어린 여자가 말했다. “별로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대표가 바뀌니 제품 퀄리티도 엉망이네요.”양지원 일행은 근처에서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파티 사건 이후, 양지원은 오랫동안 이런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들은 양지원이 안하윤의 일로 화가 나 자신들에게까지 불똥이 튀어 집안 사업에 영향을 미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왕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한다면 진환 그룹과 협력하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어쩌다 양지원이 먼저 모임을 제안했지만 모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지원이 갑자기 액세서리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심지어 함께 가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양지원과 빨리 전 같은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랐던 그들은 흔쾌히 양지원의 요청에 응했다. 은하 플라자 맞은편에서 모였던 그들은 걸어서 스트레인지에 도착했다. 스트레인지를 본 그들은 뭔가를 눈치챘다. 그들 중 한 어린 여자의 부모님은 양진환과 사이가 꽤 좋았다. 얼마 전 양진환의 집에 초대받기도 했다. 그 여자는 집으로 돌아온 후 그룹 채팅방에서 한현진이 양지원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눈치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양지원에게 물건을 보낸다고 했다. 하지만 양지원은 한현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귀찮게 여긴다고 했다. 사람들은 양지원과 송가람이 사이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현진의 출신이 밝혀진 후 송가람은 송씨 가문에서 냉대받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스트레인지는 서해금이 송가람을 위해 준비한 회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회사를 한현진이 물려받았으니 그들은 비록 내막을 모르긴 했지만 어느 정도 한현진이 뺏은 것은 아닌지 추측할 수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한현진에게 선물 공세를 받은 양지원이 자신의 절친을 위해 화풀이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쩐지 액세서리 쇼핑을 한다면 그들을
서해금이 미소 지으며 다정한 집안 어른 같은 표정으로 양지원 어깨에 늘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얘는, 또 이렇게 사람 기분 좋게 만든다니까.”양지원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저희 엄마도 분명 동갑인데 아주머니는 너무 동안이라 너무 부럽다고 그러시는걸요.”서해금은 한현진의 무심한 표정을 보며 더 환하게 웃으며 양지원과 대화를 나누더니 한참 만에야 물었다. “이렇게 많은 친구를 데려온 건, 무슨 일이 있는 거야?”서해금이 마침 그 일에 관해 묻자 양지원이 참지 못하고 투정 부렸다. “하아. 전에 액세서리를 주문했었잖아요? 저에게 붙여준 그 다자이너가 더럽게 안 예쁘게 디자인해 준 덕에 아빠에게 보여줬더니 숨이 넘어가게 웃으시는 거예요. 닭대가리를 왜 목에 거냐면서요. 화가 나 죽겠다니까요.”주변에 있던 친구들도 깔깔 웃었다. “아저씨도 너무 유머러스하신 거 아냐?”“왜 환불 안 해?”“주문 제작한 액세서리라, 품질 문제가 아니라면 환불이 안 되지 않아요?”“그건 너무 심한 거 아냐? 얼마나 비싼 건데, 그렇게 엉망으로 디자인하고 환불이 안 된다니. 이건 고객에게 바가지 씌우는 거잖아.”한현진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언제 양지원 씨에게 닭대가리를 보냈어?’서해금이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더니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현진이가 이제 막 스트레인지를 물려받다 보니까 이런 문제를 제대로 처리 못 했던 것 같아. 정말 마음에 안 들면 가져와. 아줌마가 환불해 줄게. 비즈니스도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하는 거지, 한쪽이 함부로 강요해선 안 되지.”그 말은 대놓고 사업가로서 아량 넓은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한현진을 감싸며 자신이 대신 뒤처리를 해주는 것은 물론 양지원이 신세를 지게 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한현진이 인정머리가 없고 사업가의 기질이 없다고 비난했다. 한현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오늘 계건후를 해고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해금이 뛰쳐나온 거로도 부족해 양지원까지 가게로
서해금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방금까지 양지원이 마침 타이밍을 잘 맞춰 찾아왔다고 생각했었다. 차라리 소란을 피우면 더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스트레인지에 새로운 사람을 붙일 명분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해금은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서해금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한현진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요즘 한현진과 양지원은 아무런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다. 디자인도 전혜지가 전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양지원은 그 디자인 시안이 마음에 든다며 계약금을 지불했고 이틀 전에야 제품이 완성되어 회사에서 사람을 보내 직접 양지원에게 보냈다. 그러니 한현진은 그녀가 정말 제품이 마음에 안 들어 오늘 찾아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입으로는 미운 말만 하고 있지만 양지원이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전부 한현진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었다. 한현진은 자신도 모르게 말과 행동이 다른 자신의 남자친구를 떠올리곤 두 사람 모두 똑같은 츤데레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양지원을 쳐다보는 한현진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전 아무래도 그쪽으론 프로가 아니긴 하지만 지원 씨가 마음에 드신다면 무료로 아이디어를 드릴 순 있어요. 그리고 지원 씨가 말씀하신 디자이너를 바꾼 일은, 전혜지 씨를 디자이너로 두고 싶으신 거면 전혀 문제없어요. 혜지 씨가 아마 요즘 일이 많아서 지원 씨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할까 봐 디자이너를 바꿔드리겠다고 한 것 같아요.”양지원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전 다른 건 몰라도 돈과 시간은 많아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한현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혜지 씨에게 먼저 예약 받으라고 얘기할게요.”“그럼 예약부터 하죠.”양지원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해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몇 년간 스트레인지의 품질이 많이 떨어졌었는데, 아주머니께서 새 대표를 데려오신 후로 품질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한현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정말 일을 극단적으로 처리하려 했다면, 오늘 이 자리에 계 매니저님 아내와 딸 그리고 불륜녀까지 함께 불렀을 거예요. 전 이미 아주머니를 봐서 적당히 끝내는 거예요.”서해금의 얼굴이 점차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걸음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그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한현진의 눈빛이 냉담했다. 서해금이 가고 얼마 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다. 그들은 뒷문으로 계건후를 데려갔고 한현지은 그제야 로비로 돌아왔다. 로비에 들어서자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양지원이 보였다. 막 인사를 건네려는데 양지원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과 수다를 떨었다. “...”소파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척하던 양지원이 고개를 돌리자 한현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좌우를 살피며 한현진이 어디로 간 것인지 찾고 있는데 머리 위로 누군가 커피를 건넸다. “저 찾아요?”한현진이 눈을 예쁘게 휘고 웃으며 양지원을 쳐다보았다. “...”컵을 건네받은 양지원은 뭔가 얘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결국 이번에도 역시 한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아니면 저도 이렇게 쉽게 대응하지는 못했을 거예요.”양지은이 컵을 만지며 조금은 불편하게 대답했다. “전 그냥 물건이 좋아서 보러 왔을 뿐이에요. 의미 부여하지 마요.”한현진이 살포시 웃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고마워요.”전혜지가 방금 한현진에게 전부 얘기해주었다. 한현진이 계건후의 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양지원은 카톡으로 전혜지와 보석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건지 묻고 있었고 겸사겸사 한현진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자 전혜지가 회사의 일을 간단하게 얘기하며 서 대표님이 오셔서 일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양지원이 친구들을 데리고 가게로 찾아와 조금 전의 일이 있었던 것이다. 양지원이 나타나 바로 상황을 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한현진은 멈칫하더니 이내 입을 닫았다. 그 사람은 주강운이었다. ‘그래, 외모는 강한서와 비교할 만하지만, 음...’한현진은 그래도 강한서가 더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한현진의 신분을 공개하는 피로연이 끝난 후 그녀는 주강운과 마주친 적이 거의 없었다. 신제품 제작 발표회도 사정이 있어 오지 못했지만 역시나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처리할 줄 아는 그답게 화환을 두 개 보냈다. 못 본 사이 주강운은 살이 빠져 이목구비가 더욱 날카로워졌지만 부드러운 미소만은 여전했다. 주강운은 막 파티에 다녀온 사람처럼 손에는 주머니를 들고 있었고 흰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헤어도 스타일링을 받아 우아한 귀공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강운이 가까워지자 한현진이 미소를 지었다. “강운 씨, 여긴 어떻게 왔어요?”주강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근처에서 결혼식이 있었거든요. 오픈 때도 못 와봤는데 마침 근처라 들렀어요. 현진 씨가 가게에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그는 손에 들렸던 주머니를 한현진에게 건넸다. “결혼식에서 준 선물이에요. 이런 건 받으면 좋다고 하던데요.”한현진이 주강운이 건네는 물건들을 받아 자기는 하나만 가지고 나머지는 전혜지에게 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바쁘신 분이 화환을 보내신 것만으로도 전 너무 고마웠어요. 이렇게 친히 방문해 주셨으니 출연료라도 달라고 할까 봐 겁나는데요?”주강운도 농담을 던졌다. “국숫값 정도면 너무 비싸진 않죠? 지난번 것과 같이 갚아요.”멈칫하던 한현진은 순간 막 이혼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한현진의 명예 훼손 소송을 도와주던 주강운에게 그녀는 국수를 사겠다고 약속했지만 강한서가 주강운의 차를 들이받는 사고를 치는 덕에 국수를 먹기는커녕 오히려 강한서가 한현진을 데려갔었다. 그렇게 오래된 일은 주강운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밥을 사주겠다고 하면서 계속 미루기만 하다가 한 번에 제대로 약속을 잡은 적이 없었다. 한현진이 웃으며
주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해요.”10분만 기다려 달라던 한현진은 여러 가지 일로 계속 자리를 비울 수 없이 10분이 지나고, 또 10분이 지나 20분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던 양지원이 물었다. “주강운 씨는 어떻게 한현진 씨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거예요?”주강운이 고개를 들어 양지원을 쳐다보았다. 그는 양지원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강운은 예의상 묻는 말에 대답했다. “현진 씨는 성격이 좋잖아요. 열정적이고요. 친구에게는 의리도 있는 사람이니 충분히 친하게 지낼 가치가 있는 사람이죠.”“네. 하지만 주강운 씨는 시간개념이 없는 사람을 싫어하시잖아요. 현진 씨가 10분만 기다리라더니 20분이 지나도 아직 내려오지 않는데, 주강운 씨라면 절교 쪽지 한 장 써넣고 가버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주강운은 그제야 눈앞의 양지원이 누군지 떠올렸다. 얼마 전 집안에서 맞선 자리를 주선해 줬었다. 비록 그는 집안에서 주선한 모든 맞선 자리에 나갔지만 그건 그저 집안 어른들의 요구에 응한 것일 뿐이었다. 주강운은 전혀 맞선으로 만난 사람과 연인으로 발전하려는 생각이 없었고, 그러니 당연히 이런저런 핑계를 찾아 거절했다. 양지원이 쪽지라는 말을 꺼내자 주강운은 바로 기억을 떠올렸다. 주강운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실례했네요. 전 맞선으로 연인이 되는 걸 별로 추구하지 않는 타입이거든요. 하지만 집에서 맞선을 나가라고 하니 거절할 수는 없어 핑계를 찾은 것뿐이에요. 그로 인해 지원 씨를 불쾌하게 해 죄송해요.”“...”‘내가 생각한 시나리오와는 전혀 다르잖아?’‘내가 이렇게까지 비꼬는데 전혀 화를 안 내? 성격이 너무 차분한 거 아냐?’괜히 자신만 속이 좁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양지원이 말했다. “뭘 그렇게까지. 사실 상관없어요. 전 그날 차가 펑크가 난 거라 일부러 늦은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저
결국 한현진은 주강운, 양지원과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도 문자를 보냈지만 그는 일이 너무 바빠 물도 겨우 시간 짜내 마시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강한서는 그 와중에도 질투하는 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한현진이 양지원도 초대했다는 말에 마지못해 질투심을 거두었다. 그는 한현진에게 할 얘기가 있으니 식사가 끝나면 밖에서 딴짓하지 말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했다. 한현진은 강한서가 하려는 말이 뭔지 대충 눈치챘다. 모레는 한현진의 생일이었다. 아마 그녀에게 생일선물을 주려는 것일 테였다. 송병천은 한현진의 생일에 많은 사람을 초대해 성대하게 파티를 열 생각이었지만 한현진에게 거절당했다. 안 그래도 한현진은 이 바닥에서 친구가 몇 명 없었는데 그렇게 큰 파티를 개최해 봐야 재미가 없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눈살을 찌푸릴 수 있었다. 그녀의 신분을 공개한 피로연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생일파티까지 연다면, 송병천이나 딸 사랑이 지극해 그렇다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곱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모저모 말을 하고 나서야 송병천은 결국 가족과 친구 몇 명을 불러 작은 생일파티를 여는 것으로 양보했다. 아무래도 이번은 송병천이 처음으로 한현진이 생일을 챙겨주는 것이었으니 그가 욕심을 부릴 만도 했다. 그 말에 한현진은 결국이 마음이 시큰해져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작은 생일파티라지만 손님맞이도 해야 했으니 강한서와 단둘이 붙어 있을 시간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는 당연히 미리 그녀와 더 많이 붙어 있으려고 할 테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현진은 자신도 모르게 밥 먹는 속도를 올렸다. 양지원이 그런 한현진을 보며 끝내 한마디 했다. “현진 씨가 사는 거라 더 많이 드시려는 거예요?”“풉—”사레가 들린 한현진이 입을 틀어막고 기침했다. ‘지원 씨가 강민서랑 바뀐 거 아냐? 저 입은 강한서가 같은 핏줄일 것 같은데.’주강운이 다정하게 종이를 건넸다. “인스타그램 보니까 오디션 붙었던데, 촬영 언제
양지원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한현진을 보는 주강운의 눈빛이 단순히 친구를 보는 눈빛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한현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방금까지 주강운과 대화를 나누던 한현진은 발신 번호를 확인하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휴대폰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죄송해요.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요.”그러더니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한현진이 나가자 주강운의 눈빛이 눈에 띄게 실망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양지원은 태연하게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주강운 씨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설마 임자 있는 한현진 씨야?’‘절친의 여자친구를 짝사랑한다고... 충격적인데?’한현진은 테라스까지 가서야 통화버튼을 눌렀다. “왜 이제야 전화 받아?”누군가 불만을 털어놨다. “안이 너무 시끄러워서 방금 나왔어.”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일 끝났어?”“응.”강한서가 말했다. “지금 데리러 갈게. 더 늦으면 시간 없어.”“응?”강한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비밀스럽게 말했다. “널 위해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어.”한현진이 웃으며 물었다. “무슨 서프라이즈?”“그걸 얘기하면 더 이상 서프라이즈가 아니잖아. 나 곧 도착해. 너도 이제 마무리하고 나와.”“그래.”전화를 끊은 한현진이 먼저 밥값을 결제하고 주강운과 양지원에서 인사하러 갔다. 한현진이 가겠다고 하자 주강운이 말했다. “제가 데려다줄게요.”“괜찮아요. 강운 씨는 지원 씨 데려다주세요. 시간도 늦었는데 여자 혼자는 위험하잖아요.”주강운이 입술을 짓이겼다. “그래요.”한현진이 고맙다며 인사를 전하고 빠른 걸음으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양지원이 바로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휴대폰 두고 가셨네요.”고개를 돌린 주강운의 시야에 테이블 위에 놓고 간 휴대폰이 보였다. 그는 휴대폰을 가져오더니 말했다. “제가 가져다줄게요. 준비하고 나오세요. 모셔다드릴게요. 아래에서 기다릴게요.”그러더니 양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