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온 힘을 다해 따귀를 내려쳤다. 뺨을 맞은 유현아는 눈앞이 노래졌다. 남자의 손이 또 한 번 올라가자 자포자기한 유현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두 번째 따귀는 유현아의 볼에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폭행하시는 모습은 제가 이미 다 촬영했습니다. 또 때리시면 이 동영상을 바로 경찰에 제출할 겁니다. 증거가 확실하니 최소 며칠 들어가 계시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남자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쓸데없이 남 일에 끼어들지 마! 저 X이 내 돈을 갚지 않잖아.”민경하가 두말하지 않고 신고하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남자가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유현아를 향해 경고를 날렸다. “너 두고 봐!”그러더니 지갑 속의 돈을 전부 꺼내 지갑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민경하가 지갑을 주워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더니 유현아에게 건넸다. “유현아 씨,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유현아가 입꼬리를 올려 냉소 지었다. “왜요. 이미 우물에 빠진 사람, 돌까지 던지라고 하던가요?”민경하가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현아 씨에게 물어볼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한쪽 볼이 부어오른 유현아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뭘요?”민경하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한 대표님 생일 파티에서, 어떻게 저희 대표님 방에 들어가신 거예요?”멈칫하던 유현아가 민경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건 왜요?”“누가 들여보낸 건지, 대답만 하시면 됩니다.”유현아가 피식 소리내 웃었다. “알고 싶어요? 제 빚 다 갚아주면 알려줄게요.”민경하는 아무 말도 없었다. 유현아도 더 이상 그와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유현아에게 민경하는 그저 유상수의 비서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한낱 비서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비서는 물이나 따르고 심부름이나 하는 존재였다. 그러니 민경하가 아무 말이 없자 유현아는 뒤돌아가려 했다. 빚쟁이들이 그녀가 숨은 곳을 알아냈으니 얼른 이사해야 했다. 하
“그러니까...”유현아가 잠시 멈칫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먼저 제가 있을 집 구해주고 지정욱을 벗어나게 해주면 나머지를 알려줄게요.”민경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에게 주신 정보가 너무 적은데요. 유현아 씨가 한 말이 거짓말인지도 알 수 없고요.”유현아가 말했다. “그날 일은 너무 이상했던지라 제가 그 쪽지를 사진 찍어뒀었어요.”그러더니 그녀는 휴대폰에서 사진을 찾아 민경하에게 건넸다. 사진 속 쪽지에는 “0713”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고 쪽지 옆에는 호텔 방 키가 놓여있었다. 사진을 찍은 날짜도 한성우에게 사고가 났던 그날이었다. 유현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민경하가 휴대폰으로 그 사진을 찍으려 하자 유현아가 얼른 휴대폰을 가져갔다. “제가 부탁한 일을 다 처리해 주면 그때 보내드릴게요.”민경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이 유현아 씨를 해치면 어쩌시려고 바로 가셨어요?”“떠보려고 하지 마세요.”유현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 쪽지를 누가 준 건지 알아내는 건, 민 실장님이 어떻게 하시냐에 달렸어요.”유현아를 쳐다보던 민경하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좋아요, 도와드리죠. 하지만 제가 오늘 유현아 씨를 찾아온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시면 안 됩니다. 유현아 씨에게 쪽지를 건넨 사람에게도요. 만약 제가 찾아온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그 책임은 유현아 씨가 알아서 지셔야 할 겁니다.”민경하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유현아 씨를 통해서만 그 일에 관해 조사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그 말에 유현아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드리죠.”월세방을 나선 민경하가 곧바로 강한서에게 전화해 상황을 설명했다. “대표님. 대표님 추측이 맞으셨어요. 누군가 유현아 씨를 대표님 방으로 보낸 게 맞았어요. 하지만 지정욱에게서 벗어나게 해주지 않는 이상 키를 준 사람이 누군지 말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일단 유현아 씨 요구에 알겠다고 대답했어요.”강한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신분이 폭로된 순간, 유현아는 바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입양된 ‘고아’였든, 아니면 17이든 유현아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여론을 조작해 인기를 얻은 수법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대중을 더 분노하게 한 것은 유현아는 유치원 사건으로 이득을 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유치원 사건의 내막을 누구보다 제일 잘 아는 사람이면서 SNS를 통해 방귀 낀 놈이 성내는 식으로 사건의 진위를 뒤집으려 했다. 그러니 지정욱이 유현아의 신분을 폭로하자 곧바로 그녀의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 사진, 주소를 비롯한 모든 신상정보가 탈탈 털려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유현아와 지정욱이 계약을 해지한 당일 오후, 유현아의 휴대폰은 테러 맞은 듯 울려댔다. 심지어 거리에서도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고, 길거리에서 그녀를 향해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하룻밤 사이, 유현아는 여기저기 매를 맞는 동네북이 되었다. 유현아는 감히 집 밖을 나갈 수도 없었고 심지어 배달시키기도 무서웠다. 행여나 배달원이 자신을 알아보고 지금 살고 있는 집주소를 공개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민경하가 유현아에게 새 휴대폰과 음식을 가져다주었을 때 유현아의 상태는 그 전보다 훨씬 더 나빠져 있었다. 그녀는 잔뜩 겁에 질린 강아지처럼 주눅이 들어있었다. 몇 번이나 문을 두드리고 유현아에게 신분을 확인받고 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요즘엔 일단 이 번호로 저와 연락하면 됩니다. 잠시 여론이 가라앉길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예요.”뱃가죽이 등에 붙을 듯 배가 고팠던 유현아는 민경하가 하는 말엔 대꾸도 하지 않고 음식이 담긴 주머니를 가로채 빵 하나를 뜯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허겁지겁 먹는 유현아의 모습을 보며 민경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비록 유현아는 마음이 바르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의 처지는 조금 잔인한 것 같기도 했다. 빵에 목이 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유현아를 보며 민경하는 물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따서 건넸다. 유현아가 반병 넘게 물을 들이부어
번쩍 정신이 든 유현아가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뭐 하는 거야? 이거 놔!”얼음장처럼 차가운 민경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계신 집이 누가 구해준 건지 잊으신 모양이군요. 유현아 씨 입에서 제가 원하는 정보를 들을 수 없다면 저 역시 유현아 씨에게 예의를 다할 필요가 없겠죠.”민경하는 말하며 문을 열더니 그대로 유현아를 밖으로 내던졌다.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유현아는 잠시 멍해졌다. “누가 나에게 쪽지를 준 건지 알고 싶지 않아요?”민경하가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유현아 씨가 아니더라도 조사해 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단지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죠.”그러더니 민경하는 유현아의 캐리어까지 밖으로 던졌다. 누가 봐도 진심인 민경하의 모습에 유현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나도 찾지 못했어요. 그쪽은 그게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찾아요?”“그건 제 사정입니다.”시간을 확인한 민경하가 말했다. “아직 문단속할 시간이 되지 않았으니 얼른 가시죠. 아니면 경비원 부를 겁니다.”유현아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를 악물며 말했다. “2억, 2억만 주면 누군지 알려줄게요.”민경하가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기 모르는 여자가 저희 집에 쳐들어...”십 분 후, 유현아는 욕설을 지껄이며 경비원에게 쫓겨났다. 물론 민경하도 진짜로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는 유현아 같은 유형의 인간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인간들의 입을 열려면 너무 다급해 해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의 가치를 알게 되면, 끝도 없이 그것을 빌미로 상응한 대가를 치르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유현아에게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돈이 없는 데다 모든 네티즌들의 미움을 받고 있으니 얼마 못가 결국 먼저 민경하를 찾아올 것이다. 그때야말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오갈 곳 없는 유현아가 백현석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발신 번호를 확인한 백현석이
말을 마친 백현석이 뚝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유현아의 계좌로 200만 원이 입금되었다. 마스크를 쓴 유현아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길가에 주저앉아 갑자기 소리내 폭소했다.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고 그녀의 표정은 점점 더 미쳐갔다. 행인들은 그녀를 정신 질환으로 오해하고 하나둘 유현아를 피해 멀리 도망갔다. 통화를 마친 백현석이 3층 테라스를 떠났다. 2층 베란다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주강운은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컵에 있던 찻잎을 아래층 화단에 쏟아버렸다. 지정욱은 유현아를 망가뜨리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SNS에 퍼지던 유현아의 일들은 잠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화제를 몰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사람을 고용해 유현아를 괴롭혔다. 유현아가 집 밖을 나서기만 하면 지정욱이 고용한 사람은 유현아의 곁을 따라다녔다. 그 사람은 유현아를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고 그저 팻말을 들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유현아가 저지른 비열한 짓을 폭로했다. 유현아는 도저히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악랄한 지정욱의 처사는 끝내 유현아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유현아는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자기 새로운 SNS 계정을 만들었다. 공개 라이브 방송을 켠 그녀는 “밥 안 먹는 베베”가 업로드한 동영상의 내막을 공개했다. 수작을 걸던 남자의 동영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하고 찍은 것이었다. 심지어 그 동영상의 대본은 유현아의 작품이었다. 유현아는 대본뿐만 아니라 촬영 현장까지도 공개했다. 영상 속 변태는 회사의 직원이었고 촬영이 끝난 후 회식하면서 어떻게 편집하면 더 많은 어그로를 끌 수 있을지 토론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현아는 지정욱에게 맞은 진단서를 공개하며 “밥 안 먹는 베베”와 지정욱의 부적절한 관계를 폭로했다. 지정욱은 “밥 안 먹는 베베”와 여러 차례 호텔을 드나들었고 직장 내에서도 따돌림이 있었다고 얘기했다. 지정욱은 유현아가 이런 미친 물귀신 작전을 벌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유현아의 라이브 방송 후 “밥 안 먹는 베베”의 팔로워가
전혜지가 한현진의 사무실 책상 앞으로 걸어와 품에 있던 샘플 몇 가지를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대표님, 위에는 이번 달 새로 나온 샘플이고 아래는 전에 나온 겁니다. 확인해 보세요.”한현진이 보석 감별 라이트로 사무실 책상에 놓인 샘플을 자세히 확인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샘플들은 왜 이렇게 스크래치가 많아요?”전혜지가 입술을 짓이기며 대답했다. “이번에 들여온 원석으로 만든 샘플은 전부 이래요. 오후에 제품을 가지러 오신 손님들껜 제가 핑계를 대고 시간을 뒤로 미뤘어요. 이런 품질의 제품을 고객님들께 판매할 수는 없어요. 저희 고객님들은 보석 감별 베테랑이잖아요. 제품의 품질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잠시 말을 멈춘 전혜지는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표님, 저도 요즘 회사 매출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요. 재룟값도 인건비도 오르고 있지만 품질은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명품 브랜드가 되려면 원가를 아끼려고 이러면 안 돼요.”잠시 말이 없던 한현진이 입을 열었다. “제가 재룟값을 아끼기 위해 품질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전혜지가 멈칫하더니 물었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사항이 아니에요?”한현진이 이마를 짚었다. “주얼리는 이미 비싼 가격에 판매하고 있어요. 제가 그런 짓까지 할 이유가 없어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이 문제를 언제 발견한 거예요?”“어제요. 어제 고객님께서 주문 제작한 제품이 어느 정도까지 완성되었는지 물으셔서 가지러 갔다가 발견하게 되었어요. 이번 제품엔 품질이 나쁜 것과 좋은 게 섞여 있었어요.”전혜지가 민망해하며 말을 이었다. “전 대표님께서 원가를 아끼시려고 지시하신 건 줄 알았어요.”한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하지만 누구 짓인지 대충 알 것도 같네요.”한현진은 그가 조금 더 기다렸다가 손을 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그녀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회사에서 친한 사람
한현진은 사무실에 앉아 공급처의 책임자가 자신에게 한탄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대표님, 저희가 스트레인지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해왔고, 좋은 물건은 언제든 먼저 스트레인지에 드렸어요. 설사 외상을 하셨다고 해도, 급히 돈 쓸 일만 없었다면 1년을 미루셨어도 재촉하지는 않았을 겁니다.”“수년간의 파트너로서 그 정도 믿음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 막무가내잖아요.”한현진이 컵을 그 사람 쪽으로 밀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 매니저님, 먼저 물부터 마셔요.”상대방이 컵을 받아 들자 한현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손 매니저님께서 하신 얘기, 어떻게 된 일인지 사실 전 모르겠어요. 원석을 구매하는 건 계속 계 매니저님이 책임지고 진행하던 업무였어요. 저도 손 매니저님이 하신 얘기만 듣고 전부 사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계 매니저님을 모셔 오면 직접 얘기하시죠. 그래도 괜찮죠?”손 매니저는 당연히 삼자대면이 두려울 게 없었다. “이 일은 제가 먼저 계 매니저님과 얘기했었어요. 하지만 얘기가 잘되지 않아 이렇게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다.”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지금 당장 오라고 할게요.”계 매니저는 오늘 학교 학부모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이유로 휴가를 신청한 상태였지만 실상은 불륜녀와 함께 쇼핑 중이었다. 그의 불륜녀는 그 대신 모든 죄명을 뒤집어쓰고 해고당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보상을 해줘야 했다. 마침 생활이 조금 나아진터라 불륜녀와의 데이트를 위해 휴가를 냈다. 한현진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계 매니저는 불륜녀와 함께 명품점에서 옷을 사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계 매니저는 불륜녀에게 눈짓을 하고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대표님.”“매니저님, 제가 매니저님께 물어 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 지금 가게로 오셔야 할 것 같아요.”계 매니저가 말했다. “지금요? 저 지금 학부모회에 와 있어서요. 물어 보고 싶으신 게 있으
“제가 언제 물건을 가져갔다고 그래요? 함부로 얘기하지 마시죠.”계 매니저가 말을 이었다.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요. 먼저 돌아가세요. 나중에 제가 이 대표님께 직접 확인할게요.”평소였다면 손 매니저는 당연히 계 매니저의 말을 알아듣고 자리를 비켰을 것이다. 물건을 가지는 사람이 가운데서 차액을 버는 일은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 며칠 회사의 자금 상황은 정말로 좋지 않았고 그로 인해 손 매니저는 대표에게 호되게 혼나기도 했다. 게다가 계 매니저는 그의 전화를 받지 않고 전혀 대화가 되지 않았다. 화가 잔뜩 난 손 매니저는 당연히 계 매니저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가방에서 십수 장의 외상 영수증을 꺼냈다. 영수증을 받아 확인한 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계 매니저를 보며 말했다. “계 매니저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회사 도장은 매니저님이 갖고 계시잖아요.”계 매니저가 얼른 영수증을 가져가더니 이내 당황해하며 말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우리 회사를 사칭해 물건을 가져간 게 아닐까요? 사기당하신 거 아니에요?”한현진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진짠지 가짠지도 구분 못 하는 거예요?’계 매니저가 줄줄 식은땀을 흘렸다. 서해금은 비록 한현진에게 스트레인지의 지분과 소유권을 전부 넘겼지만 회사의 회사 도장은 한현진에게 주지 않고 계 매니저에게 맡겼다. 한현진이 전에 회사 도장을 달라고 했지만 계 매니저는 늘 이런저런 이유로 한현진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니 회사 도장이 계 매니저의 손에 있는 지금 이런 일이 터졌으니, 당연히 그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었다. “대표님, 원자재를 들이는 일은 늘 제가 직접 해왔어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시킨 적이 없다고요. 저도 대체 누가 회사 도장을 훔쳐 제 이름으로 물건을 가져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엔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요.”한현진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동안 원자재를 직접 가져온 게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