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서야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피로연 날짜가 정해졌던데 민준이가 너한테 얘기했어?”유현진이 말했다. “말했어. 오빠가 난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래. 그냥 그날 오기만 하면 된다고. 그래도 조금 불안한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될까?”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마음의 준비만 하면 돼. 민 실장이 주문한 드레스도 곧 도착할 거야. 그때 예쁜 드레스로 골라서 부잣집 딸 다운 면모를 잘 보여주면 돼.”그 말에 유현진이 웃어버렸다. “부잣집 딸 다운 면모가 뭐야. 창피한 일만 없어도 감지덕지할 것 같아. 송가람 씨가 옆에 서 있으면 난 고상한 척이라도 해야지.”이 바닥에 오래 있으니 유현진도 사람 보는 눈이 늘었다. 진짜 부잣집 자식과 가짜 부잣집 자식, 그리고 한 사람의 교양은 입고 있는 옷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분위기만 보아도 알아볼 수 있었다. 송가람에게는 부잣집 딸의 특유의 분위기와 기품이 흘러넘쳤다. 특출난 외모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남다른 기품은 한눈에 보아도 옆에 있는 사람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하현주도 유현진에게 앉는 자세, 서 있는 자세와 식사 예절을 가르치는데 많은 돈을 썼었다.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몸에 배도록 습관 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유현진은 기껏해야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제법 부잣집 딸들처럼 연기할 수는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송가람은... 그녀는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예절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던 제일 정확한 매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교양은 이미 송가람의 뼛속 깊은 곳에까지 자리 잡고 있어 그녀는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강한서는 유현진의 손등을 살며시 어루만지더니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가람에게 천 가지, 만 가지 좋은 점이 있다고 해도 너에겐 어림도 없어. 나에게나, 너희 가족들에게 모두.”유현진이 피식 소리 내 웃더니 갑자기 확 다가와
「송가람이 송씨 집안 딸이 아니었어요? 언제 작은딸이 있었다는 거예요?」「장 여사님, 소식이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송가람은 서해금 씨와 전남편 사이의 딸이에요. 송씨 가문에서 자란 건 사실이지만 송병천 씨의 친딸은 아니에요.」「그러면 송병천 씨가 서해금 몰래 딴 여자와 딸을 낳았다는 건가요?」「그런 말 마세요. 송병천 씨가 유상수 같은 쓰레기인 줄 아세요? 이 딸은 송병천 씨와 전 아내 사이에서 낳은 딸이에요. 송민준 친동생이죠. 틀림없는 송씨 가문 핏줄이라고요.」「그러니까, 한아름 딸이라는 거예요?」「네.」「말도 안 돼요. 당시 한아름은 난산으로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요?」「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아이도 죽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송씨 가문에서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니에요?」「피로연까지 준비하고 있는데 설마 착오가 있겠어요? 핏줄이 어디 그렇게 쉽게 속일 수 있는 문제겠어요.」「이번에 데려온 그 아이가 바로 당시 한아름 씨가 난산으로 낳았던 그 아이라도 하더라고요. 그때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면서 한씨 가문에서는 아이가 죽은 줄 알았던 것 같아요. 사실 아이는 멀쩡하게 살아있었는데 말이에요.」「역시 될 사람은 어떻게든 되는 것 같아요. 몇십 년이 지났는데 찾을 수 있다니, 정말 믿을 수 없어요.」「친딸이 돌아왔으니 송가람 씨 자리가 흔들리겠네요. 한주시에 송가람이 송씨 집안 딸이라 장가가고 싶어 하는 있는 집안 자제들이 얼마나 많은데요.」「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누구에게 더 안 좋은 일이 될지는 아직 모르죠.」...그룹 채팅방의 문자를 보며 신미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송씨 가문 친딸?’‘대체 어느 때 일인데 소문조차 없었던 거야?’신미정은 입술을 짓이기며 양시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파티 준비를 하고 있던 양시은은 신미정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휴대폰을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그녀는 일을 마무리한 뒤에야 신미정에서 콜백했다. 양시은이 전화를 받지 않아 조금 화가 난 신미정이 나지막이 말했다. “뭐 하느라 이제야
양시은이 말을 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송가람 씨는 어렸을 때부터 그 집에서 딸처럼 컸는데, 친딸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절대 푸대접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가람 씨를 며느리로 들이는 데 문제 될 건 없어요.”신미정이 눈을 씰룩거렸다. ‘송씨 가문이 친딸이 돌아왔는데 내가 왜 송가람과 다리를 놔주겠어?’‘우리 한서 정도면 결혼을 해도 송씨 가문 친딸과 해야지.’문제는 지금 강씨 집안에서 쫓겨났으니 그 피로연에 참석할 초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직접 피로연에서 친딸이 누군지 확인하려고 해도 기회조차 없다는 말이었다. “시은 씨, 피로연 초대장 받았어요?”양시은이 말했다. “저도 가고 싶었는데, 전 송씨 가문과는 전혀 연이 없어서요. 당연히 전 초대받지 못했죠. 가고 싶으시면 어르신께 부탁해 보세요. 어르신은 송씨 가문과 한씨 가문 모두 연이 있으시잖아요. 어르신이라면 아마 초대받으셨을 거예요. 아니면 강 대표에게 부탁하셔도 되잖아요. 강 대표는 송민준 씨와 친구 사이시니 당연히 갈 거예요.”양시은이 한마디 할 때마다 신미정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녀는 요즘 양시은이 일부러 자신이 아픈 곳을 쿡쿡 찌르는 말만 골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비꼬는 말투는 아니라 신미정은 자신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입술을 짓이긴 신미정이 말했다. “시은 씨는 아는 사람도 많고 수완도 좋으니까 저 대신 초대장 좀 구해줄 수 있는지 알아봐 줘요. 전 의원 투표는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요.”양시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개 같은 X! 아직도 날 속이려고!’그러나 양시은은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그래요. 제가 물어볼게요.”전화를 끊고 한참이나 욕을 지껄이던 양시은은 유현진에게 전화했다. 막 촬영을 끝내고 강한서와 드레스를 고르기로 약속한 유현진은 이제 강한서에게 가고 있는 길이었다. 양시은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미정이 양심도 없는 XX X..
양시은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 사람인데, 유현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현진 씨에요?”유현진이 말했다. “제가 여신 뺨치는 외모라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인가 보네요.”양시은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 뻔뻔함만은 모두가 인정하긴 하죠.’남자 여럿 울릴 유현진의 미모와 지난번 파티에서 봤던 송민준의 얼굴을 떠올린 양시은이 생각했다. ‘어쩐지 송 대표는 만난 적도 없었는데 얼굴이 눈에 익다 했더니, 눈매가 아주 현진 씨 판박이잖아?’양시은은 처음부터 하현주의 불륜 사실을 믿지 않았다. 비록 그녀는 하현주와 친분이 깊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봤던 하현주는 강인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현주는 유상수가 바람피운 사실을 알고는 바로 증거를 모아 이혼을 결심했었다. 그런 사람이 본인이 먼저 배우자를 배신하는 일을 저지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양시은은 너무도 쉽게 유현진이 하현주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는 곧 송씨 가문의 친딸에게 빌붙으려던 신미정을 떠올리곤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신미정은 줄곧 강한서에게 집안을 비롯한 모든 것이 어울리는 여자를 찾아주려고 유현진과의 결혼을 망치는 일까지 불사했다. 하지만 신미정이 눈독 들이던 송씨 집안 친딸이 바로 그녀가 그토록 무시했던 전 며느리였다. 송씨 가문 친딸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면 신미정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양시은은 자신이 유현진과 연맹을 맺은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저 신미정에서 복수할 생각밖에 없었는데, 인제 보니 대어를 낚은 것 같았다. 송씨 가문에서 피로연을 자기 호텔로 예약한 것을 떠올린 양시은이 물었다. “저희 호텔에 예약한 건 현진 씨 생각이에요?”유현진이 말했다. “제 생각이라기보단, 그냥 살짝 귀띔했을 뿐이에요.”유현진은 적에게는 누구보다 독하게 굴었지만 자기 사람은 누구보다 잘 챙겨주었다. 이소원 자살 사건이든, 유치원 식품 안전 사건이든 양시은은 그녀의 인맥을 이용해 널리 소문을 내준 덕에 일이 수월하게
유현진이 돌아오면 손해를 제일 많이 보는 것은 서해금과 송가람이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유현진을 환영하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이 추측이 속 좁은 사람처럼 보일지도 몰랐지만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었다. 양시은의 추측을 들은 유현진이 침묵했다. 그날 식사 자리에서 서해금은 친절하게 유현진을 대했다. 송가람 역시 예절 바르게 유현진을 대했고 그날은 제법 화목한 분위기에서 식사 자리를 마무리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호텔 예약에 관해 얘기를 꺼낸 서해금은 세심하게도 미리 알아본 호텔 몇 곳을 유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현진아, 이 몇 곳은 내가 이미 가서 확인했어. 모두 각자의 분위기가 있더라고. 이번 피로연은 아무래도 네 생각이 중요하니까, 네가 한 번 봐봐. 네가 마음에 드는 곳으로 예약해야지.”대충 훑어보던 유현진의 눈에 양시은의 호텔이 들어왔고 그녀는 곧 양시은의 호텔로 정했다. 그땐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송민준이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며 또 호텔 얘기를 꺼냈다. 송민준은 용호나 신라호텔을 추천했다. 용호의 야외 장소는 한주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신라호텔은 한주의 최고급 호텔이었다. 이미 11월이라 야외는 추웠고 신라호텔이 제일 좋은 선택지였다. 그러나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던 유현진은 송민준에게 그랜드호텔은 지인이 하는 호텔이라 어차피 호텔에서 할 거라면 지인에게 맡기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 송민준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송민준이 유현진에게 신라호텔을 추천했던 건 아마 양시은과 같은 생각에서였던 것 같았다. 유현진은 똑똑하긴 했지만 그쪽으로는 전혀 머리를 굴리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양시은이 이렇게 언질을 주니 그녀의 마음에도 파란이 일었다. 잠시 후에야 유현진이 입을 열었다. “어떤 의도에서였든, 이미 결정된 일이에요. 인제 와 얘기해 봐야 늦었단 소리죠. 내일이 피로연인데 지금 장소를 옮긴다는 건 불가능해요.”옮기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너무 귀찮은 일이었다. 손님들 초대도
강한서는 이미 한참 전에 도착해 있었다. 유현진이 들어갔을 때, 강한서는 소파에 앉아 패션 잡지를 보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있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고개를 든 강한서는 유현진임을 확인하고는 얼른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가 덥석 손을 잡았다. 막 촬영장에서 나온 유현진은 옷을 얇게 입고 있었다. 차에 한참 앉아있었지만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강한서는 다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유현진의 손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히터도 아까워서 켜지 않은 거야?”유현진이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십 분이면 도착하는데 필요 없어.”손을 꼭 잡고 있던 강한서는 아예 외투를 벗어 유현진의 어깨에 걸쳤다. 두 사람이 알콩달콩하며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주인공이지, 내가 주인공도 아닌데 내가 왜 드레스를 골라?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돼?”“호박이라니? 그건 누굴 디스하는 거야?”한성우는 차미주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내일 피로연엔 한주의 많은 명문가에서 참석할 거야. 내가 연애한다는 걸 믿지 않으니까 널 데려가 눈으로 확인시켜 줘야지. 그래야 이 남신에게도 임자가 있다는 걸 다들 알지 않겠어?”차미주가 한성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무슨 신? X 신?”한성우가 피식 웃었다. “호박이랑 딱이네.”차미주가 주먹을 꽉 쥐고 한성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로 그때, 차미주의 눈에 유현진과 강한서가 들어왔다. 차미주는 한성우를 때리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유현진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현진아. 너도 여기서 드레스 고르는 거야? 골랐어?”유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차미주가 얼른 유현진에게 팔짱 끼며 말했다. “잘됐다. 같이 고르자.”그렇게 두 사람은 사이좋게 드레스를 고르러 떠났고 두 남자만 덩그러니 남겨져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성우가 강한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일이 피로연인데 이제야 드레스 고르러 온 거야?”차미주에게 드레스를 골라주고 지퍼도
이번 달에 들어서야 조금 나아지고 있었다. “나 이젠 건강해요.”은서가 고집스레 말했다. “그래?”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운동장 두 바퀴 뛰어봐. 아주머니에게 동영상 찍어달라고 하고. 운동장 뛰고 줄넘기 200개 하고도 괜찮으면 데리러 갈게.”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 “현진 이모도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강한서가 피식 웃었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현진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현진이 힘들게 안 해.”“그럼 저는요?”강한서가 말했다.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나 보지.”은서가 불퉁하게 입을 삐죽였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날 챙겨줘요?”강한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투정 부리지 마. 약 잘 먹고 얼른 나아야 내가 빨리 데리러 가지.”은서가 여전히 입을 삐죽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 입양할 거예요?”강한서가 말했다. “아니. 넌 가족이 있어.”“그럼 그 사람들은 왜 날 신경 쓰지 않는 거예요?”“그 사람들은...”멈칫하던 강한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다칠까 봐 겁나서 그래.”조금 슬퍼진 은서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왜 삼촌이 내 아빠가 아닌 거예요?”강한서는 아이를 달래줄 재간은 없었다. 게다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특히 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훌쩍이는 은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강한서가 다정하게 말했다. “네 아빠는 대단한 사람이야.”아빠라는 말에 은서가 참지 못하고 울먹였다. “삼촌보다 더요?”“나보다 엄청 더.”“그럼 난 언제 아빠를 만날 수 있어요?”입을 뻐금거리던 강한서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만날 거야.”결국은 단순한 아이인지라, 강한서의 말에 곧 해맑게 말했다. “현진 이모가 나온 드라마 봤어요.”“현진 이모 너무 예뻐요.”“저도 크면 현진 이모처럼 예뻐질까요?”강한서가 말했다. “그럴 수는 없을걸. 네 엄마가 현진만큼 예쁘지가 않거든.”은서는 그만 말문이 턱 막혔다. “삼촌 미워!”...강한서가 고른 드레스는
한성우는 울상으로 두 여자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십여 벌을 피팅하고 나서야 차미주는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고를 수 있었다. 그녀는 한성우 앞으로 뛰어와 치맛자락을 살짝 들며 말했다. “개자식, 봐봐. 예뻐?”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하려던 한성우는 잔뜩 파인 차미주의 등을 확인하고는 얼른 말을 바꿨다. “안 예뻐. 다리 짧아 보여.”차미주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녀는 한성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힐을 안 신어서 그런 거야. 신으면 예뻐.”“너 하이힐 신고 걸을 수는 있어? 호텔에 도착도 하기 전에 발목 다치지 말고 얼른 갈아신어.”“그놈의 입! 넌 정말 보는 눈이 없어. 현진이는 내가 이 드레스를 입으면 이목이 집중될 거라고 했단 말이야.”한성우가 말했다. “넌 형수님 말을 믿어?”차미주는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믿어. 난 이거 입을 거야. 네가 계속 말리면 나 혼자 갈 거야. 현진이랑 갈 거라고. 우린 그냥 따로 가. 서로 피해주지 말고.”한성우는 드디어 정인월의 생신 연회에 유현진이 등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왔을 때 강한서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내일 아침 드레스 고르러 오는 건데. 아무리 남자친구라지만 절친 앞에서는 전혀 존재감이 없잖아.’드레스를 선택하자 마침 강한서도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네 사람은 매니저를 따라 대기실로 들어가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기다렸다. 문제가 생기지 않기 위해 내일의 헤어 메이크업을 미리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상의를 해야 했다. 유현진은 요즘 촬영으로 바빴던 지라 드레스 피팅을 오늘로 미뤘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한성우가 예약했다. 그는 이미 연예계에서 많은 연예인을 배양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많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가 유현진을 위해 부른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연예계에서도 많은 여자 연예인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네 사람이 대기실에서 30분을 기다렸지만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