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는 이리저리 살펴보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복원할 수 있을 것 같아.”“얼마나 걸려?”고여정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늦으면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야.”신우의 말의 옆에 있던 변우석이 발끈했다.“한 시간이요? 이봐요, 허풍도 상황을 봐가면서 떨어야죠? 장수혁 님이 계셨다고 해도 한 시간은 무리라고 할 텐데, 지금 웃기려고 작정한 건가요?”변우석이 언급한 장수혁이 바로 출장 나간 그 실력자였다.기술팀에서 장수혁을 제외하고 가장 뛰어난 사람은 변우석이었는데, 장수혁이 있는 한 변우석은 출세할 날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 장수혁이 부재한 틈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변우석은 모처럼 자기에게도 출세할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고여정이 잠깐 사이에 이런 외부인을 찾아왔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한 시간이면 복원할 수 있다고 큰소리까지 쳐대니 말이다.‘이렇게 젊은데...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얼굴로 허세는, 참 가소롭단 말이야.’변우석은 고여정을 힐끗 쳐다보았다.“고 법의관님, 사건을 해결하고 공을 세우려고 무리수를 두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를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는 건 모두의 시간을 낭비하는 겁니다. 우리의 분석이 지체되는 동안 범인은 도망갈 기회를 노릴 겁니다. 그러니 고 법의관님은 지금 수사팀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거란 말이죠.”변우석이 입을 열자 다른 동료들도 신우의 말이 그저 어린애의 장난으로 들렸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한 시간? 국내 최고의 기술자도 감히 그런 말을 못 할 거야.”“무식한 자는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고 법의관님은 어디서 저런 사람을 찾아온 거래?”“애인인 것 같은데, 방금 문 앞에서 두 사람이 껴안는 걸 봤거든.”“어쩐지 고 법의관님답지 않게 눈에 필터를 끼고 있더라.”“고 법의관님 그렇게 안 봤는데, 연애하면 물불 안 가릴 줄은 몰랐네요.”고여정은 동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나
정말 신이라고 불러도 될 어마어마한 실력이다!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져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변우석의 모습을 본 신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배우고 싶어요?”변우석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신우는 침착하게 말했다.“제 아내에게 정중하게 사과한다면 가르쳐드리죠.”변우석은 말문이 막혔다.고여정은 잘난척하며 까불고 있는 남편을 밖으로 끌어냈고 신우는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했다.“이제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고 이러기야? 너무 배은망덕하잖아.”고여정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데이터가 기밀이라 넌 보면 안 돼.”말을 이어가던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신우에게 입을 맞췄다.“수고했어. 먼저 집에 가서 쉬고 있어. 나도 오늘은 일찍 집에 갈 테니까 같이 밥 먹자.”흠칫 놀란 신우는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끌어안더니, 두 사람은 곧이어 뜨거운 키스를 나눴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숨을 헐떡일 지경이 이르고서야 신우는 손을 놓았고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집에서 기다릴게.”“그래.”신우를 배웅한 후 안으로 돌아가려던 고여정은 헐레벌떡 뛰어나온 동료에게 가로막혔다.“고여정! 네 남편이 지금 엄청난 일을 했어. 복원한 녹음 파일이 고인이 살해되었을 때의 현장 녹음이래.”같은 시각 신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강한서에게 전화를 걸었고 통화가 연결되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처리했어. 그나저나 페넌트는 언제쯤 완성되는 거야?”강한서는 웃으며 답했다.“곧.”“무조건 화려해야 해. 내가 원하는 대로 안 하면 너 재혼할 때 하루 종일 구청 문 닫을 거야.”신우의 말에 강한서는 할 말을 잃었다.강한서는 사람을 시켜 차태오의 지갑에 소형 위치추적 몰래카메라를 숨겼는데 백혜주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 덕분에 강한서는 추적기에 노출된 위치를 기반으로 재빨리 그녀가 버린 증거들을 찾을 수 있었다.이런 건 직접적인 증거로 채택될 수 없었기에 그는 신우에게 부탁해 오디오 파일을 차태오의 핸드폰으로 옮겨 녹음 파일로 만들었다.파
백혜주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지씨 가문은 줄곧 싸늘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고 지정욱은 이틀이 지나서야 그녀를 불러세웠다.“회사가 최근에 인원을 많이 충원해서 자금이 부족해요. 그래서 말인데 일단 160억 정도라도 먼저 꺼내고 싶은데...”유현아는 짜증 났다.“정욱 씨, 투자하겠다며 고집할 땐 언제고 엄마에게 문제가 생기자마자 이러는 게 비겁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지금 도대체 무슨 뜻이죠?”지정욱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현아 씨, 그때랑 지금은 상황 자체가 다르잖아요. 어머니가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고... 솔직히 살인자의 딸을 며느리로 들이고 싶은 집안은 없을 거예요.”유현아는 표정이 잔뜩 어두워진 채로 이를 악물었다.“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후회하지 마요.”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곧바로 주식 인출하고 싶다며 유상수에게 연락했다.유상수는 백혜주가 적지 않은 금액을 들고 떠나는 바람에 자신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고 호소하며 며칠만 기다리라고 한 후 전화를 끊었다.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유상수는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고 유현아는 어쩌면 유상수에게 속았을 수도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백혜주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강한서는 극도로 분노했다.추적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도 공항까지 쫓아갔으나 그녀가 화장실 가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처음 보는 강한서의 분노에 민경하는 어쩔 줄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독사처럼 사악한 백혜주가 사모님을 찾아갈까 봐 걱정하는 강한서의 마음도 이해되었다.그는 바닥에 놓인 서류를 주워 들며 말했다.“대표님, 이 일은 저희의 불찰이 맞습니다. 백혜주 씨가 눈치가 이렇게 빠른 사람일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백혜주는 현장에 경찰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후 곧바로 화장실에 있는 자신과 비슷한 체형의 여자에게 코트와 모자를 건넨 뒤 눈에 띄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고 어물쩍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중년여성이 이렇게 교활하고 꼼수가 많을 줄 누가 알았을까.공항을 빠져나온 그녀는
강한서는 주씨 가문에서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고 예상했다.예전에 한상우가 옆 학교 일진을 때린 적 있었고 당시 맞았던 일진은 홧김에 사람을 불러 한상우가 다니고 있는 학교 앞을 가로막아 시비붙은 적이 있었다. 당시 강한서와 주강운도 마지못해 싸움에 참여하게 되었고 학부모가 불려 올 정도로 일이 커졌다.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주강운이 학교에 나오지 않자 한성우와 함께 집으로 찾아간 적 있었는데 그때 주씨 가문 가정부가 주강운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며 알려줬다.강한서는 아직도 주강운을 만나러 간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했다. 그는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 채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등 전체를 가득 채운 채찍 자국에 주강운 어머니는 가슴 아파하며 옆에서 눈물을 흘렸었다.강한서는 어려서부터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금지옥엽으로 키워졌고 사고를 쳐도 기껏해야 손바닥이나 엉덩이 몇 대를 맞는 정도에서 끝났다. 자아가 생긴 사춘기에 이르러서는 글쓰기를 한다던가 책을 읽는 등등 간단한 처벌로 이어졌다. 이에 비해 주씨 가문의 처벌은 끔찍하고 터무니없었다.당시 강한서와 한성우는 난처해할 주강운을 생각하며 병원에 가서도 창문 너머로 쳐다만 볼 뿐 절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주아름에 대한 주진철의 사랑은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걸 무릅쓰고 손찌검을 했으니 이 일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주강운도 당시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했는데 주아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그 시각 주시윤은 사진 유포자를 잡아낼 거라며 씩씩거렸다.그중 유력한 후보가 송민준이었는데 원한으로 인해 오히려 주씨 가문에 연락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일을 도와주려다가 되레 상대방에게 보복당할 수도 있다.강한서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며칠만 좀 참다가 터뜨리면 얼마나 좋아. 신신당부하자마자 사진이 유출됐으니 그쪽에서는 무조건 형님을 의심하지!”송민준은 기분이 언짢았다.“그러게 누가 현진이를 건드리래? 이 정도에 그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말을 이어가던 그는 또다시 강한서를 원망
차미주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거실 쓸 거야? 그럼 방으로 들어갈게.”한성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왜 그렇게 생각해? 이틀 동안 밤늦게까지 대본을 쓰던데 괜찮아? 많이 걱정되네.”한성우는 그녀의 옆에 자리 잡고선 포장해 온 족발을 꺼냈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자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진 차미주는 긴장하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야식을 챙겨온 그의 모습이 의아했던 차미주는 코웃음을 쳤다.“매일 편하게 일하지 않고 돈 버는 너 같은 대표님은 모르겠지만 밤늦게까지 대본 수정하는게 내 일상이야.”한성우는 웃으며 답했다.“나도 노력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거야. 젊을 때 고생 안 하는 사람이 어딨냐? 다 목숨 걸고 노력하는 거지.”한성우는 말하면서 비닐장갑을 꺼냈다.차미주는 그가 예전처럼 비닐장갑을 건네줄 거라 예상해 손을 뻗었으나 예상과 달리 그는 혼자 장갑을 끼고선 포장지를 뜯고 먹기 시작했다.한입 먹고선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족발 냄새 심해? 일하는데 방해되는 건 아니지?”차미주는 답답함에 퉁명스럽게 말했다.“괜찮아. 배 안 고파.”한성우는 흠칫하더니 물었다.“너 주려고 곱창 사 왔는데 배 안 고파? 은박지에 포장되어 있어서 아직 따뜻한데.”숯불에 구운 매운 곱창은 차미주의 최애인데 이걸 사 오다니. 아무래도 그녀는 이제 한성우의 손바닥 안인 것 같다.하지만 배 안 고프다고 말한 상황에 곱창을 먹는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기에 그녀는 한성우가 한발 물러서 주기를 바라며 시치미를 떼고 담담하게 말했다.“곱창에 지방이랑 콜레스테롤 함량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이 시간 먹는다면 무조건 2kg 찔 거야.”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뭐가 살쪄?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려면 몸에 에너지를 많이 비축해야 해. 고칼로리 음식을 좋아하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거고 다이어트는 어찌 보면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먹어.’라고 말할 것이다.그렇게 되면 다이어트를 안 해도 될 합리적인 이유가 생기게 되고 체면을 지키면서 마지못
한성우는 웃으며 답했다.“이런 걸 똑똑하다고 하는 거야. 강한서도 기분 좋고, 네 친구도 기분 좋고, 다들 좋아하면 그건 거짓말이 아니지.”차미주는 어이가 없었다.“거짓말한 사람치고 핑계가 참 많네.”한성우는 방금 뜯은 젓가락을 그녀에게 건네줬다.“자, 밤새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식기 전에 얼른 먹어. 너 주려고 사 온 거야. 난 어차피 못 먹으니까 네가 안 먹으면 다 버려야 해.”차미주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기가 흐르는 곱창이 너무 유혹적이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먹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안 먹을 수도 있으니까 다음부터는 사기전에 미리 연락해. 안 그러면 낭비잖아.”한성우는 웃으며 답했다.“그래.”젓가락을 받으려고 손을 뻗으며 저도 모르게 한성우와 살이 스쳤는데 그는 반사적으로 재빨리 손을 뺐다.젓가락은 바닥에 떨어졌고 한성우는 마치 바늘에 손을 찔린 것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이자 차미주는 그대로 얼어붙었다.한성우는 짜증 난 듯 떨어진 젓가락을 줍더니 개봉하지 않은 새것을 꺼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네가 직접 뜯어.”말을 마친 그는 방금 전처럼 건네주는 게 아니라 그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예전부터 이상함을 느꼈지만 차미주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나 곧 그가 의도적으로 스킨십을 피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예를 들어 음식을 먹고 같이 테이블이 정리할 때 의도치 않게 머리카락이 팔에 스치기만 해도 한성우는 재빨리 몸을 피했고 물을 건네줄 때도 전처럼 뚜껑을 따서 주는 게 아닌 테이블에 놓고 직접 가지라고 했다.차미주는 그가 일부러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가슴 한편이 미어졌다.사귀지 않았어도 예전에는 사이좋게 지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한성우의 격렬한 반응에 차미주는 그와의 관계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온 한성우는 눈살을 찌푸린 채 걱정 가득한 모습을 보이는 차미주를 발견했다.밝은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가 좌불안석하는 게 의아했지만 한성우는 눈치채지 못한
한성우는 세 사람을 초대했다. 그 중 한 사람은 한성우의 요청에 바로 게임에 접속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이미 게임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게임에 접속한 채 게임 중인 나머지 한 사람을 기다렸다. 차미주는 그 사람과 친하지 않았던 터라 평소 말이 많던 그녀임에도 지금은 매우 조용하고 얌전히 있었다. 한성우는 아마 그 사람과 굉장히 친한 것 같았다. 게임 아이디가 「약골」인 팀원이 말했다. “미남 형, 오랜만이네요.”형님은 한성우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한성우의 게임 아이디가 「전국 최고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한성우가 말했다. “요즘 조금 바빴어요.”「약골」이 살풋 웃으며 말했다. “몇 번 게임 접속한 걸 봤었는데, 초대하려고 보니까 오프라인으로 전환했더라고요. 다른 여자와 노셨나 봐요?”그러더니 또 물었다. “이 돼지 도둑이라는 분이에요?”「돼지 훔치러 옴」은 차미주의 게임 아이디였다. 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제 친한 친구예요.”그 말에 상대방이 얼른 말을 이었다. “친구라니 다행이네요. 안 그러면 나중에 미남 형 와이프가 보면 속상하겠어요.”차미주가 움찔하며 입을 열었다. “와이프?”「약골」이 말했다. “게임에서 미남 형이랑 커플이거든요. 서포터인데 목소리가 엄청 듣기 좋아요.”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를 비웠던 두 팀원이 하나둘 들어왔다. 하나는 「디즈니 프린세스」였고 다른 한 명은 「프린세스 찾아 삼만리」였다.두 사람의 게임 아이디는 커플 아이디 같았다.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디즈니 프린세스」가 말했다. “여보, 이게 얼마 만에 같이 게임 하는 거야.”여자의 애교 섞인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귀를 녹여 버릴 것 같았다. 여자인 차미주가 들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한성우는 오히려 평온한 얼굴로 차갑게 한 마디 내뱉었다. “바빴어.”너무도 단답이라, 조금은 냉정하고 무정해 보이기도 했다. 「디즈니 프린세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계속 나랑은 게임도 안 했으면서 이렇게 딴
차미주는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성우가 나지막이 차미주에게 말했다. “포탑 아래에서 파밍하고 있어. 나가지 말고.”차미주가 “응”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 게임은 먼저 레벨 올릴 기회를 놓치면 쉽게 상대방에게 발목을 잡히기 마련이었다. 상대 팀은 미드가 돌파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계속 차미주를 잡을 기회만 엿보았다. 팀원들은 다른 포탑을 노리느라 아무도 차미주를 도와주지 않았다. 매번 차미주가 상대 팀에게 킬을 당한 뒤에야 부랴부랴 달려왔다. 몇 분 사이, 차미주는 이미 3번이나 킬을 당했고 심지어 매번 부활하자마자 상대팀에게 잡히고 말았다.한두 번은 실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횟수가 많아지니 팀원들은 당연히 차미주의 실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프린세스 찾아 삼만리」가 짜증스럽게 말했다.“못 이길 것 같으면 아예 나가지 마요.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디즈니 프린세스」가 말했다.“15분 동안 벌써 7번이나 죽었어요. 상대 팀은 그쪽 때문에 레벨만 올랐다고요. 여보, 대체 어디서 저린 아마추어를 팀으로 들인 거야?”한성우가 덤덤하게 말했다.“저런 전술에는 누구라도 어쩔 수 없어.”「디즈니 프린세스」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실력이 부족한 건 부족한 거야!”차미주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전엔 게임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설전을 벌이던 그녀가,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한성우는 차미주를 힐끗 쳐다보더니 또 곧 주먹을 움켜쥐고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닥치고 게임에나 집중해.”「약골」이 큼 마른기침을 하더니 말했다.“돼지 도둑님, 제가 도와드릴게요.”차미주는 작게 알겠다고 대답했다.차미주는 오늘따라 집중이 되지 않았다.당연히 팀원의 야유 때문은 아니었다. 차미주는 그런 말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게임 할 때 설전을 벌인다면, 아무도 그녀를 이길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차미주는 누군가를 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여보”라는 말로 가득 찼다.매번 그 소
한열은 신하리가 그 의사를 회사에서 보낸 사람이라 오해하고 있음에도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아니,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하리가 그 의사가 어머니가 보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상처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 앞에서 빛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과도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비도덕적이고,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이야기처럼 여겨졌다.상처를 치료하던 중, 한현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그녀는 한열의 상황을 걱정하며 계속 라이브 방송을 지켜보다가 하리가 다친 걸 보곤 놀라 몇 번이나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자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큰 걱정 안 하셔도 돼요.”한열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같이 응급처치 중이에요.”“넌 다친 데 없지? 진짜 괜찮은 거야?”“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한현진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외숙모께서 나한테 전화하셨어. 너 걱정하시느라 많이 물어보시지도 못하고, 나더러 가서 너 좀 보라고 하시더라. 지금 어디야? 강한서랑 같이 갈게.”“아니에요, 누나. 정말 괜찮아요.” 한열은 급히 말을 막았다. 누나는 지금 만삭인데,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책임은 자신이 전부 감당해야 할 것이 뻔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과 사촌 형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원래 걱정이 많으신 분이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따로 전화할게요.”하지만 한현진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다. “너희 집 앞에 기자들이 잔뜩 몰려 있다더라. 오늘 밤 머물 곳은 있니? 없다면 내가 사람을 보낼게. 며칠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어때?”그 순간, 한열은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누나, 한주시에 호텔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잘 데가 없을까 봐요?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현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때문에 너까지 고생하
한열은 신하리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열애를 인정했을 당시, 신하리는 할 얘기가 있어 한열을 찾아갔고 우연히 그의 가족들과 마주쳤다. 한현진과 송민준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한열과 신하리의 연애가 가짜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니 신하리를 만난 그들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기어코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비록 신하리는 한열 앞에선 막무가내였지만 어른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친근한 호칭으로 어른들 마음에 꽃을 피웠다. 심지어 줄곧 연예인을 싫어하던 그의 아버지조차도 눈빛으로 얘기했다. ‘너 이 자식, 어디서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를 만난 거야?’그날 신하리의 모습에 심지어 한열 스스로도 그동안 자신이 너무 복수심 어린 눈빛으로 신하리를 바라보고 있어 너무 극단적으로 사람을 판단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식사 자리가 끝난 후 차에 올라탄 신하리가 그에게 물었다. “마마보이인 줄은 몰랐네. 생선도 아주머니께서 일일이 가시를 발라줘야 하다니.”한열이 평생 제일 혐오하는 단어가 바로 마마보이였다. 그 일은 중학교 1학년이던 어느 날 아침, 그의 어머니가 학교에 우유를 가져다주면서 시작되었다.그날 아침 한열은 낮잠을 잔 탓에 아침도 먹지 못한 채 다급하게 등교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배고플 아들이 걱정되어 일부러 학교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하연희는 160cm로 그리 큰 키는 아니었다. 남편인 한준웅이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어쩐지 아이의 키는 엄마의 유전자에 달린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 이유로 하연희는 늘 한열이 키가 크지 않을까 걱정이었고 한열을 위해 준비한 식단 중 우유는 언제나 필수였다. 하지만 한열은 우유를 좋아하지 않았고 하연희는 한열이 우유를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번 그가 다 마실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았다. 아침을 가져다 준 날도 마찬가지였다. 우유를 깨끗하게 비운 한열을 본 하연희는 습관처럼 아들을 품에 안았고 그 모습을 마침 입이 가벼운 친구가 보게 된 것이다.
‘아...’한열은 복잡한 마음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지경이었다. ‘저 미친 여자가 왜 날 좋아해?’문자에 답장하는 신하리를 쳐다보던 한열은 고개를 들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재빨리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창에 비춘 심각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멍해진 한열은 순간 어쩌면 신하리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씨 가문 유전자가 대단하긴 하니까. 그런 생각이 든 한열이 저도 모르게 몸을 바로하고 턱을 살짝 들었다. 신하리 쪽에서 보면 그의 옆라인은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화보를 찍고 수많은 무대에 오르면 그는 자신이 어떤 각도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가장 멋지게 보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문자를 마친 신하리는 휴대폰을 한쪽에 놓고 고개를 돌려 한열을 쳐다보았다.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 그를 본 신하리가 멈칫 하더니 물었다. “허리에 줄자라도 넣은 거야? 안 굽혀져?”윤명훈이 풉,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열은 윤명훈보다 10살이나 어렸다. 그러니 윤명훈에게 한열은 그저 유치한 아이 같았다. 도도한 척 하고 허세를 부리는 건 그 또래 남자아이들에겐 너무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특히 한열처럼 잘생기기까지 한 사람이라면 나르시시즘이 있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윤명훈 역시 신하리처럼 한열에게 불평하고 싶을 때가 있긴 했었다. 하지만 누군가 이렇게 한열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신하리 씨, 그야말로 용사시네요.’한열이 움찔하며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신하리를 노려보았다. “연예계에 이렇게 오래 몸담고 있으면서 신하리 씨를 때린 사람이 없었어요?”신하리가 전혀 타격 없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너 대신 맞았잖아.”그 말 한 마디는 또다시 한열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는 입을 꾹 닫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한열을 신하리를 데리고 자신의 담당 주치의에게 찾아갔다. 주치의의 이름은 서동훈이었다. 그는 신하리를 데리고 온 한열을 의외라는
한열은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렸다. ‘못생긴 표정 연기니, 연예인병이니 하더니 이 미친 여자가 그냥 날 놀리려고 하는 얘기였어.’한열은 수치스러운 표정으로 신하리의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다. 요리조리 피하던 신하리가 조심하지 않아 뒤통수를 유리에 부딪쳤다. 몰려오는 아픔에 신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한열은 재빨리 휴대폰을 빼앗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신하리의 신음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신하리의 휴대폰을 손에 쥔 한열은 창백해진 신하리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신하리가 조금 전 저지른 악행을 떠올리고는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장난 좀 그만해요. 제가 또 당할 것 같아요?”신하리는 말없이 티슈로 상처를 꾹 눌렀다. 그녀가 손을 떼자 티슈가 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한열이 순간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왜 피가 이렇게 많이...”신하리가 상처를 누르며 한열을 힐끔 쳐다보았다. “사납게 굴 땐 언제고, 이제야 무서워?”한열: ...한열이 바득 이를 갈았다. “조용히 좀 해요.”‘이 미친 여자는 아프지도 않은 거야?’한열이 속도를 올리라며 윤명훈을 재촉했다. 심각한 표정의 한열을 본 신하리가 참지 못하고 또 그를 놀렸다. “내가 그렇게 걱정돼?”한열이 신하리를 노려보았다. “누가 걱정한다고 그래요! 전 신하리 씨가 제 차에서 죽을까 봐 이러는 거예요.”신하리가 피식 소리 내 웃었다. 눈을 감은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걱정 마. 원래 나쁜 놈들이 더 오래 사는 법이야. 난 아직 900년쯤은 더 살 수 있어.”나른한 신하리의 모습을 보던 한열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쩐 일인지 신하리의 말에 반박하지 않은 한열은 그저 계속 그녀의 뒤통수를 힐끔거렸다. 그의 눈빛에 담긴 걱정스러운 마음은 쉽게 감춰지지도 않았다. “대체 지울 거야, 말 거야?”신하리가 나지막이 물었다. “안 지울 거면 휴대폰 돌려줘.”생각에 잠겼던 한열이 불퉁하게 말했다. “비밀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지워요.”
“결국 사람들이 혐오하는 건 자격 없는 배우뿐이거든요. 만약 여전히 그걸 모른 채 그저 학력으로 시청자들의 입을 막을 생각이라면 아무리 고학력자라고 해도 시청자의 눈엔 그저 학력만 높은 무능력한 인간일 뿐이에요.”“배우는 아이돌과 달라. 팬들이 널 좋아할지 아닐지는 80%는 네 얼굴에 달렸어. 외모가 마음에 들어야 너라는 사람을 알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길 테니까. 많은 드라마에 아이돌을 캐스팅하는 것도 너희가 잘생겼거나 예쁘기 때문이야. 그래야 팬들의 환상을 만족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배우는 굳이 잘생기거나 예쁠 필요가 없어. 배우는 그저 캐릭터를 위해 있는 사람에 불과하니까. 심지어 어떤 작품에서는 시청자에게 네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을 때도 있어. 하지만 넌 그럼에도 여전히 네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이 널 기억하게 해야 해. 그게 바로 배우이라는 직업의 매력이야.”“너에게 유명한 감독님들 소개해줄 순 있어. 하지만 네가 여전히 아이돌 때처럼 팬들 눈에 비친 네 모습이나 이미지를 신경 쓰면서 연예인 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내가 떠먹여줘도 넌 받아먹지도 못할 거야. 내 말 이해했어?”신하리는 남녀를 불문하고 수많은 신인 배우들과 작업을 했었다. 연기력이 안 좋은 건 사실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신하리도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땐 카메라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아마추어였었고 감독에게 욕을 먹고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누구든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법이니까. 만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선 신하리의 뒤에는 그 누구 못지않게 고생하고 견뎌온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부분 신인 배우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건 바로 연기를 간단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들은 연출과 대본에 많은 정력을 쏟는 것보다 오히려 카메라에 비춰지는 자신의 외모에 더 신경을 썼다. 아직 인기가 없는 배우도 그랬고, 인기가 있는 배우는 심지어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팬들을 위한 드라마에서는 그런대로 봐줄 수는 있어도 정극에선 그 정도 연기력
멈칫하던 한열이 신하리와 눈이 마주치자 발끈하며 귓불이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누구더러 멍텅구리라는 거예요! 저도 되갚아 인 거 알아요.”신하리가 눈을 깜박이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너 조금 전엔 분명 되갑아라고 했어.”한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적 없어요.”“그랬어.”“아니라고요!”“맞다니까! 매니저님도 옆에서 들으셨어.”신하리가 말하며 윤명훈을 향해 살짝 턱짓을 했다. “그렇죠, 매니저님?”유치한 두 사람 사이의 언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윤명훈이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얘길 하시는 거예요? 잘 못 들었어요.”신하리가 쯧, 혀를 찼다. “어쩐지 요즘 신인들 중에 멍텅구리가 많더라니. 전부 매니저님들께서 오냐오냐 해주셔서 그래요.”한열은 순간 신하리를 차 밖으로 차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윤명훈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열이가 국어에 좀 약해요. 다른 건 꽤 잘했어요.”한열 대신 변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씨 가문은 공부를 잘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공영선은 퇴직 전엔 선생님이었다. 아들인 한준웅과 딸 한아람 모두 타고난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송씨 가문의 남매 역시 학창시절부터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한열의 동생은 더 말 할 것도 없었다.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계 주니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한열은 그의 사촌형이나 사촌 누나, 심지어 동생에게 비교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적이 나쁜 편도 아니었다. 그는 당시 가족 몰래 연극영화과에 지원했고 일단 합격한 뒤 가족들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열은 시도조차 하기 전에 한준웅에게 그 계획을 들키고 말았고 그의 핍박에 어쩔 수 없이 고담의대에 원서를 넣어야 했다. 국내 TOP 5에 의대 중 하나인 고담의대에 합격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열의 성적으론 충분했다. 국어 성적은 겨우 1등급을 받은 정도였음에도 10등이라는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다른 영역의 성적이 얼마나 높았을 지는 보지
남자의 말에 신하리가 대답했다.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인사는 너무 빠른 것 같아요.”남자가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젠 어린 나이 아니잖아. 아버지와 아주머니께서도 계속 네 결혼 때문에 걱정이 많으셔. 특히 아주머니는 흰머리까지 많아지셨어. 만나는 사람도 생겼으니 빨이 집에 데려와 인사 드려야지. 그래야 아주머니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거야.”입술을 짓이기던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이제 사귄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요리는 저보다 몇 살이나 어리고 아직 한창 일에 집중해야 되는 시기라 저희는 최근 몇 년 사이엔 결혼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 일찍 집에 인사드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몇 년 후 열이도 배우로 자리 잡고 저희도 여전히 좋은 감정으로 잘 만나고 있어서 열이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그땐 얘기하지 않으셔도 저희가 먼저 인사드리러 갈 거예요.”신하리는 남자가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일 없으면 먼저 끊을게요. 열이가 요즘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서 스트레스가 많거든요. 요즘엔 또 말도 안 되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시간 내서 옆에 있어주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주 가족 모임엔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두 분께 전해주세요.”말을 마친 신하리가 전화를 뚝 끊었다. 전화가 끊기기 바로 직전, 신하리는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둔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인 것 같았다. 물론 신하리는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수없이도 봐왔었다. 전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떨렸지만 이젠 그녀의 마음에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힘들었던 일도, 영원히 지나지 않을 것 같던 일도 결국은 시간이 모두 해결해 주었다. 생각에 잠겼던 신하리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한열이 고개를 갸우뚱한 채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신하리는 조금 전 자신이 꼬집었던 한열
‘이렇게 뻔뻔한 여자였어?’‘사랑하긴 개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들어 안 도와주면 죽어버리겠다는 표정으로 사정하지만 않았어도 난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거라고.’신하리의 이런 뻔뻔한 거짓말은 한열도, 수화기 너머의 남자도 믿지 않았다. 남자는 심지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히 볼멘소리하지 마. 네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온 가족이 다 알아.”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신하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마나 세게 휴대폰을 꽉 움켜쥔 건지 손톱마저도 조금 하얗게 질려있었다. 시선을 내린 신하리가 실소를 터뜨렸다. “하도 시간이 오래 되어서 잊으셨나보네요.”“뭘?”신하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 첫사랑은 남자였어요. 처음 좋아했던 사람도 남자였고요.”신하리의 옆에 앉아있던 한열은 그녀의 통화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한열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신하리를 힐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지, 그럼 여자겠어?’하지만 한열과 달리 윤명훈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에 폭풍이 몰아쳤다. ‘설마 신하리에 대한 루머가 사실이었다는 거야?’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풋, 소리 내 웃었다. “장난하지 마.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넌 키스신도 한 번 찍은 적 없어. 너희 바닥에서야 그런 널 도도하다고 하겠지만 난 알아. 넌 남자와 스킨십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심지어 숨결만 느껴져도 본능적으로 구역질을 하잖아. 그런 네가 남자친구를 사귀어?”이를 악문 신하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연이 얘기 안 해요?”“뭘?”“그날 제작발표회에서 제가 주연이 보는 앞에서 제 남자친구와 키스한 거.”...상대방이 말이 없자 신하리가 말을 이었다. “주연이 안 믿을 것 같아서 보여준 거예요. 맞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살짝 만지는 것도 전 역겨워요. 주연도 같은 생각이었겠죠.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잘 아니까. 저도 열이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한열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하리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의 말에 속상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분명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를 위해 돌을 막아줬을 리가 없었다. 그런 마음에 아니라면, 그에게 장난을 치며 관심을 끌었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내가 너무 상처 되는 말을 하긴 했어.’여전히 고민하는 한열의 귓가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한열이 멍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신하리가 배를 끌어안은 채 폭소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찔끔 흘린 그녀는 웃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똥강아지, 너 솔직하게 얘기해. 태어나서 한 번도 연애해 본 적 없지?”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는 신하리의 얼굴엔 슬픔이라곤 전혀 없이 온통 장난기뿐이었다. 그제야 또라이 같은 여자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윤명훈도 운전석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티베탄 마스티프는 사촌 누나 앞에서만 순한 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한열을 길들이는 사람이 있다니. 역시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는 법이었다. 수치와 분노를 동시에 느낌 한열이 바득 이를 갈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신하리를 물어버릴 것처럼 말했다. “제가 사귀었던 사람은 신하리 씨가 손가락 다 사용해도 부족할 거예요!”“소꿉놀이 같은 연애 말하는 거야?”신하리가 야유 섞인 말투로 한열을 놀렸다. “설마 첫 키스 상대가 나였던 거 아냐?”순간 뜨끔한 한열의 몸이 어색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저 한열을 놀리려던 신하리는 그의 반응에 당황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 나야?!”한열이 창피함을 못 이겨 버럭 화를 냈다. “아니거든요!”하지만 한열은 거짓말엔 너무 소질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신하리에게 이렇게 빨리 모태 솔로라는 사실을 들켰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거짓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인식한 한열이 자포자기하며 말했다. “제가 신하리 씨와 전에 했던 건 첫키스 아녜요. 제가 일부러 신하리 씨 기분 더럽게 하려고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