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혜주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지씨 가문은 줄곧 싸늘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고 지정욱은 이틀이 지나서야 그녀를 불러세웠다.“회사가 최근에 인원을 많이 충원해서 자금이 부족해요. 그래서 말인데 일단 160억 정도라도 먼저 꺼내고 싶은데...”유현아는 짜증 났다.“정욱 씨, 투자하겠다며 고집할 땐 언제고 엄마에게 문제가 생기자마자 이러는 게 비겁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지금 도대체 무슨 뜻이죠?”지정욱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현아 씨, 그때랑 지금은 상황 자체가 다르잖아요. 어머니가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고... 솔직히 살인자의 딸을 며느리로 들이고 싶은 집안은 없을 거예요.”유현아는 표정이 잔뜩 어두워진 채로 이를 악물었다.“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후회하지 마요.”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곧바로 주식 인출하고 싶다며 유상수에게 연락했다.유상수는 백혜주가 적지 않은 금액을 들고 떠나는 바람에 자신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고 호소하며 며칠만 기다리라고 한 후 전화를 끊었다.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유상수는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고 유현아는 어쩌면 유상수에게 속았을 수도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백혜주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강한서는 극도로 분노했다.추적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도 공항까지 쫓아갔으나 그녀가 화장실 가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처음 보는 강한서의 분노에 민경하는 어쩔 줄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독사처럼 사악한 백혜주가 사모님을 찾아갈까 봐 걱정하는 강한서의 마음도 이해되었다.그는 바닥에 놓인 서류를 주워 들며 말했다.“대표님, 이 일은 저희의 불찰이 맞습니다. 백혜주 씨가 눈치가 이렇게 빠른 사람일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백혜주는 현장에 경찰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후 곧바로 화장실에 있는 자신과 비슷한 체형의 여자에게 코트와 모자를 건넨 뒤 눈에 띄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고 어물쩍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중년여성이 이렇게 교활하고 꼼수가 많을 줄 누가 알았을까.공항을 빠져나온 그녀는
강한서는 주씨 가문에서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고 예상했다.예전에 한상우가 옆 학교 일진을 때린 적 있었고 당시 맞았던 일진은 홧김에 사람을 불러 한상우가 다니고 있는 학교 앞을 가로막아 시비붙은 적이 있었다. 당시 강한서와 주강운도 마지못해 싸움에 참여하게 되었고 학부모가 불려 올 정도로 일이 커졌다.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후에도 주강운이 학교에 나오지 않자 한성우와 함께 집으로 찾아간 적 있었는데 그때 주씨 가문 가정부가 주강운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며 알려줬다.강한서는 아직도 주강운을 만나러 간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했다. 그는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 채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등 전체를 가득 채운 채찍 자국에 주강운 어머니는 가슴 아파하며 옆에서 눈물을 흘렸었다.강한서는 어려서부터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금지옥엽으로 키워졌고 사고를 쳐도 기껏해야 손바닥이나 엉덩이 몇 대를 맞는 정도에서 끝났다. 자아가 생긴 사춘기에 이르러서는 글쓰기를 한다던가 책을 읽는 등등 간단한 처벌로 이어졌다. 이에 비해 주씨 가문의 처벌은 끔찍하고 터무니없었다.당시 강한서와 한성우는 난처해할 주강운을 생각하며 병원에 가서도 창문 너머로 쳐다만 볼 뿐 절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주아름에 대한 주진철의 사랑은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걸 무릅쓰고 손찌검을 했으니 이 일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주강운도 당시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했는데 주아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그 시각 주시윤은 사진 유포자를 잡아낼 거라며 씩씩거렸다.그중 유력한 후보가 송민준이었는데 원한으로 인해 오히려 주씨 가문에 연락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일을 도와주려다가 되레 상대방에게 보복당할 수도 있다.강한서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며칠만 좀 참다가 터뜨리면 얼마나 좋아. 신신당부하자마자 사진이 유출됐으니 그쪽에서는 무조건 형님을 의심하지!”송민준은 기분이 언짢았다.“그러게 누가 현진이를 건드리래? 이 정도에 그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말을 이어가던 그는 또다시 강한서를 원망
차미주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거실 쓸 거야? 그럼 방으로 들어갈게.”한성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왜 그렇게 생각해? 이틀 동안 밤늦게까지 대본을 쓰던데 괜찮아? 많이 걱정되네.”한성우는 그녀의 옆에 자리 잡고선 포장해 온 족발을 꺼냈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자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진 차미주는 긴장하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야식을 챙겨온 그의 모습이 의아했던 차미주는 코웃음을 쳤다.“매일 편하게 일하지 않고 돈 버는 너 같은 대표님은 모르겠지만 밤늦게까지 대본 수정하는게 내 일상이야.”한성우는 웃으며 답했다.“나도 노력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거야. 젊을 때 고생 안 하는 사람이 어딨냐? 다 목숨 걸고 노력하는 거지.”한성우는 말하면서 비닐장갑을 꺼냈다.차미주는 그가 예전처럼 비닐장갑을 건네줄 거라 예상해 손을 뻗었으나 예상과 달리 그는 혼자 장갑을 끼고선 포장지를 뜯고 먹기 시작했다.한입 먹고선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족발 냄새 심해? 일하는데 방해되는 건 아니지?”차미주는 답답함에 퉁명스럽게 말했다.“괜찮아. 배 안 고파.”한성우는 흠칫하더니 물었다.“너 주려고 곱창 사 왔는데 배 안 고파? 은박지에 포장되어 있어서 아직 따뜻한데.”숯불에 구운 매운 곱창은 차미주의 최애인데 이걸 사 오다니. 아무래도 그녀는 이제 한성우의 손바닥 안인 것 같다.하지만 배 안 고프다고 말한 상황에 곱창을 먹는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기에 그녀는 한성우가 한발 물러서 주기를 바라며 시치미를 떼고 담담하게 말했다.“곱창에 지방이랑 콜레스테롤 함량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이 시간 먹는다면 무조건 2kg 찔 거야.”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뭐가 살쪄?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려면 몸에 에너지를 많이 비축해야 해. 고칼로리 음식을 좋아하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거고 다이어트는 어찌 보면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먹어.’라고 말할 것이다.그렇게 되면 다이어트를 안 해도 될 합리적인 이유가 생기게 되고 체면을 지키면서 마지못
한성우는 웃으며 답했다.“이런 걸 똑똑하다고 하는 거야. 강한서도 기분 좋고, 네 친구도 기분 좋고, 다들 좋아하면 그건 거짓말이 아니지.”차미주는 어이가 없었다.“거짓말한 사람치고 핑계가 참 많네.”한성우는 방금 뜯은 젓가락을 그녀에게 건네줬다.“자, 밤새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식기 전에 얼른 먹어. 너 주려고 사 온 거야. 난 어차피 못 먹으니까 네가 안 먹으면 다 버려야 해.”차미주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기가 흐르는 곱창이 너무 유혹적이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먹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안 먹을 수도 있으니까 다음부터는 사기전에 미리 연락해. 안 그러면 낭비잖아.”한성우는 웃으며 답했다.“그래.”젓가락을 받으려고 손을 뻗으며 저도 모르게 한성우와 살이 스쳤는데 그는 반사적으로 재빨리 손을 뺐다.젓가락은 바닥에 떨어졌고 한성우는 마치 바늘에 손을 찔린 것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이자 차미주는 그대로 얼어붙었다.한성우는 짜증 난 듯 떨어진 젓가락을 줍더니 개봉하지 않은 새것을 꺼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네가 직접 뜯어.”말을 마친 그는 방금 전처럼 건네주는 게 아니라 그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예전부터 이상함을 느꼈지만 차미주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나 곧 그가 의도적으로 스킨십을 피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예를 들어 음식을 먹고 같이 테이블이 정리할 때 의도치 않게 머리카락이 팔에 스치기만 해도 한성우는 재빨리 몸을 피했고 물을 건네줄 때도 전처럼 뚜껑을 따서 주는 게 아닌 테이블에 놓고 직접 가지라고 했다.차미주는 그가 일부러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가슴 한편이 미어졌다.사귀지 않았어도 예전에는 사이좋게 지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한성우의 격렬한 반응에 차미주는 그와의 관계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온 한성우는 눈살을 찌푸린 채 걱정 가득한 모습을 보이는 차미주를 발견했다.밝은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가 좌불안석하는 게 의아했지만 한성우는 눈치채지 못한
한성우는 세 사람을 초대했다. 그 중 한 사람은 한성우의 요청에 바로 게임에 접속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이미 게임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게임에 접속한 채 게임 중인 나머지 한 사람을 기다렸다. 차미주는 그 사람과 친하지 않았던 터라 평소 말이 많던 그녀임에도 지금은 매우 조용하고 얌전히 있었다. 한성우는 아마 그 사람과 굉장히 친한 것 같았다. 게임 아이디가 「약골」인 팀원이 말했다. “미남 형, 오랜만이네요.”형님은 한성우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한성우의 게임 아이디가 「전국 최고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한성우가 말했다. “요즘 조금 바빴어요.”「약골」이 살풋 웃으며 말했다. “몇 번 게임 접속한 걸 봤었는데, 초대하려고 보니까 오프라인으로 전환했더라고요. 다른 여자와 노셨나 봐요?”그러더니 또 물었다. “이 돼지 도둑이라는 분이에요?”「돼지 훔치러 옴」은 차미주의 게임 아이디였다. 한성우가 웃으며 말했다. “제 친한 친구예요.”그 말에 상대방이 얼른 말을 이었다. “친구라니 다행이네요. 안 그러면 나중에 미남 형 와이프가 보면 속상하겠어요.”차미주가 움찔하며 입을 열었다. “와이프?”「약골」이 말했다. “게임에서 미남 형이랑 커플이거든요. 서포터인데 목소리가 엄청 듣기 좋아요.”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를 비웠던 두 팀원이 하나둘 들어왔다. 하나는 「디즈니 프린세스」였고 다른 한 명은 「프린세스 찾아 삼만리」였다.두 사람의 게임 아이디는 커플 아이디 같았다.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디즈니 프린세스」가 말했다. “여보, 이게 얼마 만에 같이 게임 하는 거야.”여자의 애교 섞인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귀를 녹여 버릴 것 같았다. 여자인 차미주가 들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한성우는 오히려 평온한 얼굴로 차갑게 한 마디 내뱉었다. “바빴어.”너무도 단답이라, 조금은 냉정하고 무정해 보이기도 했다. 「디즈니 프린세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계속 나랑은 게임도 안 했으면서 이렇게 딴
차미주는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성우가 나지막이 차미주에게 말했다. “포탑 아래에서 파밍하고 있어. 나가지 말고.”차미주가 “응”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 게임은 먼저 레벨 올릴 기회를 놓치면 쉽게 상대방에게 발목을 잡히기 마련이었다. 상대 팀은 미드가 돌파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계속 차미주를 잡을 기회만 엿보았다. 팀원들은 다른 포탑을 노리느라 아무도 차미주를 도와주지 않았다. 매번 차미주가 상대 팀에게 킬을 당한 뒤에야 부랴부랴 달려왔다. 몇 분 사이, 차미주는 이미 3번이나 킬을 당했고 심지어 매번 부활하자마자 상대팀에게 잡히고 말았다.한두 번은 실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횟수가 많아지니 팀원들은 당연히 차미주의 실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프린세스 찾아 삼만리」가 짜증스럽게 말했다.“못 이길 것 같으면 아예 나가지 마요.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디즈니 프린세스」가 말했다.“15분 동안 벌써 7번이나 죽었어요. 상대 팀은 그쪽 때문에 레벨만 올랐다고요. 여보, 대체 어디서 저린 아마추어를 팀으로 들인 거야?”한성우가 덤덤하게 말했다.“저런 전술에는 누구라도 어쩔 수 없어.”「디즈니 프린세스」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실력이 부족한 건 부족한 거야!”차미주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전엔 게임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설전을 벌이던 그녀가,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한성우는 차미주를 힐끗 쳐다보더니 또 곧 주먹을 움켜쥐고 시선을 돌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닥치고 게임에나 집중해.”「약골」이 큼 마른기침을 하더니 말했다.“돼지 도둑님, 제가 도와드릴게요.”차미주는 작게 알겠다고 대답했다.차미주는 오늘따라 집중이 되지 않았다.당연히 팀원의 야유 때문은 아니었다. 차미주는 그런 말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게임 할 때 설전을 벌인다면, 아무도 그녀를 이길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차미주는 누군가를 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여보”라는 말로 가득 찼다.매번 그 소
“난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한성우가 손을 뻗어 차미주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그러나 차미주가 그의 손을 쳐냈다.“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면 왜 나한테 고백한 거야? 내 마음만 뒤숭숭하게 만들어놓고 넌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다른 여자들이랑 놀아나고 있고. 내가 너 심심하면 갖고 노는 장난감이야?”차미주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이 격해져 있던 탓에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네가 좋으면 끌어와 안고 입 맞추고, 싫어지면 바로 한쪽으로 버려버리고. 그냥 손이 닿은 것뿐인데,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내 몸에 가시라도 있어? 아니면 독이라도 있어서 그러는 거야?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 대체 고백은 왜 한 건데?”“더 멍청한 건 나야. 네가 그런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 너에게 전여친이 그렇게 많은 줄 뻔히 알면서도 네 그 장난 같은 고백에 마음은 뒤죽박죽이고, 널 거절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기회라도 줘볼까 생각한 내가 바보였어. 넌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데 말이야.”차미주는 말하며 팔을 들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벅벅 닦았다.“요 며칠 거둬줘서 고마웠어. 앞으로 너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월세는 내일 보내줄게. 이따 바로 나갈 거야.”말을 마친 차미주가 바로 가버리려고 했다. 한성우는 당연히 차미주가 그렇게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차미주의 손목을 잡아 그녀를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렇게 늦었는데, 어딜 가겠다는 거야.”차미주가 버둥거리며 한성우의 스킨쉽을 거부했다.“어디든. 다신 너랑 같이 안 살아. 내가 왜 양심도 없는 바랑둥이인 네 헛소리를 믿어서는...”말하며 차미주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한성우는 울고 있는 차미주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네가 그냥 보통 친구만 하자고 했잖아. 난 네가 싫어할까 봐 감히 닿지도 못했던 거야. 나가서 술을 마신 것도 너에게 거절당해서 마음이 복잡해서였고. 너랑 같이 있고 싶지만, 또 한편으
차미주는 또 울고 싶어졌다.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받아주기는 하겠지만, 조건이 있어.”한성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조건이 하나가 아니라 만개라도 다 들어줄 수 있어.’그는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며 나지막이 물었다.“조건이 뭔데?”차미주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했다.“우리 엄만 나밖에 없어서 내가 데릴사위 데리고 오길 원하시거든. 나중에 아이도 내 성을 따랐으면 하고. 사실 난 내 남편 될 사람이 데릴사위 하겠다고 하든 안 하든 상관은 없는데, 엄마는 아마 꼭 아이는 많이 낳으라고 하실 거야.”한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를 많이 낳는 건 조건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한성우도 아이를 좋아했으니 차미주의 몸이 건강하기만 하다면 몇 명 더 낳는 것쯤은 당연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만약 차미주 건강에 무리가 간다면 그건 운명에 맡겨야 했다.하지만 차미주의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우리가 만나면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엄마의 꿈은 아마 이루기 어려울 것 같아. 난 네가 되든 안 되든 신경 안 써. 난 널 좋아하니까. 네가 그걸 할 수 없어도 난 널 버리지 않을 거야. 하지만 만약 우리 엄마가 기어코 아이가 있어야 된다고 하면, 그땐 입양이라도 해야 해. 하지만 피가 안 섞였다고 아이를 미워하면 안 돼. 너 할 수 있겠어?”“...”너무 기쁜 나머지 한성우는 차미주 눈에는 지금 자기가 그걸 못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다른 핑계를 대는 건데.’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차미주는 자기가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백을 받아준 것이었다. 그 순간 한성우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내렸다.한성우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차미주가 나지막이 말했다.“너 혹시 싫은 거야?”현실적인 얘기들은 먼저 하는 게 맞았다. 나중에 이 문제로 갈등이 생겨 싸우게 된다면 그건 더 귀찮은 일이었다.한성우가 입술을 짓이기며 나지막이 말했다.“네 말대로 할게.”그의 병은 차미주와 사귀게 되면 자연스레
윤명훈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인터넷에 떠도는 스캔들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동안, 이 미친 인간들은 경찰서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 한열의 반항적인 성격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윤명훈은 충분히 버거웠다. ‘하지만 이젠 한 명이 더 늘었잖아. 젠장. 그 놈의 돈 벌기가 점점 더 힘드네!’비록 화가 치밀긴 했지만 의식을 잃은 신하리와 한열 몸에 묻은 피를 보자 윤명훈도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하리 씨는 어때?”“안 죽어요.”한열이 신하리가 꼬집던 허리를 어루만지며 쓰러진 척 연기하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연기할래요?”그제야 천천히 눈을 뜬 신하리는 한열의 눈빛과 반말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때, 누나 연기가 좀 실감났어?”흥, 콧방귀를 뀐 한열이 시선이 저도 모르게 신하리의 뒤통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머리숱이 많아 얼마나 많이 다친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날아온 돌멩이는 힘이 꽤 실려있었다. 옆에 있던 한열의 귀에도 돌멩이가 무겁게 머리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신하리는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제외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는 심지어 티슈를 뽑아 뒤통수의 피를 닦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열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티슈로 상처 닦으면 안 돼요. 더럽잖아요.”“더러우면 걸레라고 하겠지, 왜 티슈라고 부르겠어?”신하리가 억지스러운 논리를 늘어놓았다. “티슈로 엉덩이를 닦을 땐 왜 더럽다고 하지 않는 거야?”한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티슈로 엉덩이를 닦지, 치질을 닦는 건 아니잖아요.”멈칫하던 신하리가 순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장난스레 말했다. “너 아이돌 이미지는 버린 거야? 아이돌 입에서 어떻게 엉덩이니, 치질이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어?”한열이 불퉁한 말투로 대답했다. “머리 상처에 출혈이 꽤 있었어요. 티슈로 닦으면 상처에 먼지가 붙어서 염증이 날 거예요. 나중에 흉터
한열의 마음에 남아있던 감동이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사람이 신고를 마치고 나오자 경찰서 밖은 이미 수많은 기자와 팬들로 둘러싸였다. 경찰서 앞이었던 만큼 경찰들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 현장은 그나마 평화로웠다. 한열이 신하리를 감싸며 차에 오르던 그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열!”한열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란 크기의 돌멩이가 한열을 향해 날아왔다. 한열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누군가 나타나 온 몸으로 돌멩이를 막았다. 신하리였다. 그 돌은 신하리의 뒤통수에 부딪혔다. 극심한 통증에 신하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몸이 앞으로 휘청였다. 한열이 무의식적으로 신하리를 부축했다. 미간을 찌푸린 신하리가 손을 뻗어 돌멩이에 맞은 곳을 만졌다. 뜨뜻하고 축축한 촉감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펼치자 빨간색의 피로 흥건했다. 신하리의 부축하고 있던 한열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창백했다. 돌을 던진 사람이 큰소리로 질타했다. “개 같은 자식!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투표해서 널 데뷔시켰는데. 연애도 부족해서 이젠 뭐, 성추행? 팬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지어 옆에서 질서를 유지하던 결찰들도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돌을 던진 그 사람이 달려들려고 하자 경찰이 얼른 앞으로 나서 제압했다. 그 사람은 심지어 바닥에 제압당한 채 여전히 욕설을 내뱉으며 난동을 부렸다. “네가 이런 인간이란 걸 진작 알았다면 차라리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투표를 했을 거야! 넌 정말 네가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정말 팬들이 네 재능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그 반반한 얼굴 아니었으면 너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긴 했을 것 같아? 팬들 덕에 넌 아이돌이 될 수 있었던 거야. 팬들이 아니면 넌 아무 것도 아니라고!”구경 중이던 사람들과 기자들이 미친 듯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한열은 신하리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그녀의
신하리는 말하며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저 정신병 있는 거 다들 아시죠?”그 말에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얼마 전, 신하리가 한 드라마 촬영 중 현장에서 갑자기 귀신에 쓰인 사람처럼 아무런 안정장비도 하지 않은 채 6미터가 넘는 곳에서 뛰어내려 뼈가 부러진 사건이 있었다. 다들 신하리에게 왜 뛰어내렸냐고 묻자 그녀는 아래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그러나 당시 상황을 증명해 줄 동영상은 없었고 그 사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듣고 지나보냈었지만 지금 신하리의 입으로 직접 그녀에게 정신병이 있다고 말하니 그때의 사건을 떠올린 사람들은 순산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이건 분명한 경고였다. 마치 난 심신이 미약한 사람이라 너에게 정말 염산을 뿌려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으니 내 말을 장난으로 가볍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신하리의 등장으로 [아기 고양이]의 라이브 방송의 인기는 더 뜨거워졌다. 댓글에도 다양한 의견이 더 많아졌다. [사랑에 눈이 먼 연예인 1위! 보상은 산에서 산나물 캐기 18년!][신하리 미친 거 아녜요? 이렇게 대놓고 협박이라니.][면전에 협박하는데 아직도 신고하지 않는다고? 증거가 없는 거야, 아님 애초부터 한열을 모함하고 있었던 거야?][성추행을 한 사람도 경찰서에 신고했는데 당한 사람은 대체 뭐가 무서워서 신고하지 않는 거야.][지난번에 스스로 신고한 인간은 아직도 감옥에서 사회봉사 중이예요.][만약 지금 당장 신고한다면 전 아기 고구마 말을 믿을 거예요. 계속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는 건 오히려 한열을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작당 모의에 더 가까워 보여요.][지금 루머를 퍼뜨리는 건 너무 쉬운 일이 됐어요. 스크린샷 몇 장이면 바로 스토리를 짤 수 있으니까요.]여론이 점차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멀어지자 [아기 고구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예요? 아
신하리의 라이브 방송 연결 요청에 [아기 고구마]가 잠시 멍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옆을 바라보던 그녀가 곧 시선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 미세한 행동을 포착하지 못했지만 한현진에겐 들키고 말았다. [아기 고구마]는 혼자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 했다. 그녀의 옆에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모인 사람들과 진실 규명을 바라는 팬들이 미친 듯이 댓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겁쟁이! 네가 그러고도 무슨 남자야! 사건이 터지면 뒤로 물러나 여자친구가 나서서 모든 걸 감당하게 하다니. 네 팬이었다는 게 너무 후회돼!][끼리끼리는 과학이라잖아요. 한열이 이런 쓰레기라면 신하리도 그리 좋은 인간은 아니지 않겠어요? 연결해요.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죠.][언니! 얼른 입도 벙긋 못하게 증거를 뿌려버려요. 저런 인간은 아이돌을 할 자격이 없어요.][경찰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난 영원히 한열을 믿을 거야!][덕질에 도덕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나보네.]...[아기 고구마]는 사람들의 부추김에 신하리와 라이브 방송을 연결했다.신하리의 모습이 라이브 방송 화면에 나타나자 카메라는 신하리의 얼굴을 향해 바짝 다가갔다. 후드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신하리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그쪽 대신 경찰에 신고했어요. 얼른 오세요.”카메라가 홱 회전하며 한주 용하구의 경찰서 대문을 비췄다. 그에 라이브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순간 멍해졌다. ‘신하리, 미친 거야? 어제 저녁에도 한열 대신 해명해주더니.’[아기 고구마]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 전 신고한다고 안 했어요.”신하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한열이 그쪽을 성추행했다면서 신고를 안 해요? 성모 마리아세요? 방송으로 울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보다 신고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요? 경찰은 그쪽을 도와줄 수 있는데도 싫다고요?”네티즌들도 신하리의 말을 따라 댓글을 남겼다. [맞아요
알겠다고 대답한 한현진이 전화를 끊기 전 호기심을 못 이겨 물었다. “오빠, 문채영 씨와는 어떻게 됐어요?”멈칫한 송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서 그 자식 혹시 네 옆에 있어?”한현진이 움찔하며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가로젓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한현진이 대답했다. “아뇨. 샤워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개의치 않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걔한테 내 말 똑바로 전해. 다음에 또 이렇게 입을 가볍게 놀렸다간 내가 그 입을 꿰매 버릴 거라고.”강한서: ...그 말에 한현진이 어색하게 하하, 웃어버렸다. “사실 강한서는 별말 안 했어요...”송민준은 더는 아무 말 없이 일찍 쉬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송민준의 얼굴이 공개된 후, 한열의 바람 스캔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람들도 점차 한현진이 한열의 사촌누나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열의 성추문은 여전히 일파만파 퍼져나갔다.한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은 [아기 고구마]였다. 이 계정은 피드를 올릴 때마다 다음 업로드 시간을 예고하며 다음엔 마치 증거를 공개할 것처럼 사람들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에 [아기 고구마] 계정의 팔로워는 점차 늘어갔다. 하지만 예고와는 달리 매번 터무니없는 사실들만 업로드 했고 그 피드의 내용으로는 한열이 여자 연예인을 성추행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계정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하룻밤 사이, 한열의 팔로우는 십만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열의 회사 측에서는 변호사가 작성한 소장을 공개하며 이미 경찰에 신고를 마쳤고 루머를 퍼뜨린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한열의 회사에서 소장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 고구마]도 페이스북에 점심 열두시부터 라이브 방송으로 빼박 증거를 공개해 한열과 직접 맞설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에 네티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말을 아끼던 윤명훈이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계약 해지 때문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회사에서는 쿨하게 한열을 보내줄 마음이 없거든요.”그가 한현진에게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현진도 알 수 있었다. 윤명훈은 똑똑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한열이 아직 취해 있는 지금 그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은 채 윤명훈은 한현진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리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제가 잠시 후 해명글을 올릴게요. 명훈 씨는 신하리 씨에게 인터넷에 떠도는 쓸데없는 기사들 처리해 달라고 연락하세요. 제가 변호사를 선임해 보내드릴게요.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해요.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해명하기 어려워질 거예요.”한열의 바람 스캔들을 터트린 건 그저 페이크에 불과했다. 성추문으로 한열에게 흙탕물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만약 한현진이 한열의 회사 대표였다면, 자신의 두 손으로 탑급의 자리까지 올린 아이를 이렇게 쉽게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사 계약을 해지 한다고 해도 한열의 빛을 어느 정도는 계속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한열은 신하리라는 충무로 연기파 배우의 인맥까지 갖고 있으니 앞으로 어느 정도로 발전할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까지 끝장을 볼 이유는 없었다. 연예계에게는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었다.그러니 이번 일은 오히려 누군가 한열을 나락으로 보내기 위해 꾸미고 있는 일 같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세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을 SNS에 업로드 했다. 다만 송민준의 눈은 모자이크 처리했다.[저희 오빠와 사촌 동생이 그렇게까지 닮은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신하리]사진 속에서 한현진은 가운데 서 있었고 그녀의 왼쪽엔 송민준이, 그리고 오른쪽엔 한열이었다. 막내 동생인 한승은 아예 잘라버린 후 사진을 업로드 했다.비록 송민준의 눈을 모자이크 처리하긴 했지만 하관만 보아도 한열과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닮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
[두 여배우 모두 연기력이 그렇게 뛰어나면서, 대체 얼마나 보는 눈이 없어야 한열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그건 좀 아니지 않나? 한열도 미남상이긴 하잖아.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세 사람 같이 촬영했었잖아요. 한현진이 한열과 신하리가 사귀는 걸 몰랐을까요? 이건 뻔히 알면서도 만난 거잖아요.][살려줘! 나 한현진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전에 햇살 유치원 사건 때문에 엄청 호감이었는데. 봄의 연인의 중전마마 역도 완전 잘 소화했었다고. 대체 바람은 왜 핀 거야. 연예계에 사고 안 치는 연예인이 있긴 한 거야?] [두 여신을 동시에 만나다니. 한열, 능력도 좋아. 지까짓게 뭔데...] [한열은 신하리에게 빌붙으려는 목적이었던 거예요. 지금 소속사와 계약 해지를 준비 중이예요. 회사에서도 전혀 신경 안 쓰고 있고요. 신하리가 아니었으면 한열 주제에 어떻게 유명 감독에게 캐스팅 될 수 있었겠어요. 정말 어떻게든 여자 덕 좀 보겠다고 애쓰네.]아래의 댓글들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도 없었다. 대부분은 그들을 욕하는 악플이었다. 한열과 신하리의 공개 연애에 대해 두 사람의 팬들은 자신의 배우가 아깝다며 강력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이 열애를 인정한 후부터 양측의 팬들은 줄곧 다툼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커플 팬계정인 [이열치열]은 팬들의 감정 쓰레기통 같은 곳이 되어버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열은 열애 인정으로 회사와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인지도와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회사 측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렸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터라 잠깐의 파장을 일으킨 후 곧 사그라들었다. 공개 연애 후 꽤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한열의 인기는 요즘 다시 천천히 오르고 있는 추세였다. 회사 측에서 밀어주던 신인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한열의 뒤를 이어받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회사 측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 한열이 바람 폈다는 기사가
한현진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예능부 기자 채용 문턱이 이 정도로 낮아진 거야? 두 눈이 멀어도 기자로 활동할 수 있나봐?”진윤: ...‘우리 여신님 사석에서는 이렇게 독설을 날리는 사람이었어?’휴대폰 너머에서 한참을 듣고 있던 차미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진 너와 한열 아니야?”한현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건 나랑 오빠야.”“하지만 이 사진들은 정말 한열과 비슷해 보여. 게다가 네 오빠가 운전한 거 한열 차 아니야?”한현진은 그날 송민준이 운전한 차를 눈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한열의 차를 운전하고 온 거라면 파파라치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다시 페이스북을 다운로드 받고 인기 검색어를 확인한 한현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연예 부문의 인기 검색어의 TOP 5는 전부 한열의 바람에 관한 이슈가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꽃뱀, 이열 커플 사이에 끼어들다], [이열 커플, 결별 위기 스크린 밖에서도 삼각관계], [한열 살아있네], [찐사랑을 못 숨겨] 등이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검색어들이 가득 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하자 수백 개의 DM과 십만 개가 넘는 댓글이 쏟아졌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신하리와 한열 두 사람의 팬들의 남긴 수많은 욕이거나 일반 네티즌의 호기심에 가득한 댓글일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이 얼마나 필터 없이 악랄한 글로 난무한 곳인지 잘 알고 있는 한현진은 아예 댓글을 확인하지도 않고 뉴스피드로 들어갔다. 한열과 한현진의 기사는 두 시간에 터졌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각 마케팅 계정에서는 이미 타임 라인까지 정리한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현진은 관련 피드를 대충 훑었다. 마케팅 계정의 분석에 의하면 한열과 신하리는 [살의] 촬영 이전에 이미 사귀기 시작했고 송민영이 하차된 후 한열이 자신의 여자친구인 신하리를 여주인공으로 추천했으며 영화 홍보 현장에서의 친밀한 스킨십 사진이 폭로되어 어쩔 수 없이 공개 연애를 택한 것이었다. 그 계정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