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면은 드라마의 마지막 클라이맥스였다. 유현진은 정치적으로 이용 당한 뒤 버러진 폐비를 완벽하게 연기했다. 중전의 일생은 악독했고 비극적이면서 가여웠다. 극 중의 그런 악역은 원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했지만, 유현진은 자신의 뛰어난 연기력으로 캐릭터를 살아 숨 쉬게 했다. 중전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중전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유현진은 연기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관계자의 글과 드라마의 시너지 효과로 인성갑과 연기 천재라는 연관 검색어가 유현진을 따라다녔다. 그 연관 검색어를 발견한 유현진은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대체 어느 착한 인간 만든 검색어인 거야. 너무 무섭잖아. 이렇게까지 치켜세우지 말라고. 본성이 드러날까 봐 걱정이란 말이야...’“현진아. 너 팬 이름 생겼어.”차미주가 다가와 휴대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니케.”“풉—”유현진이 이번엔 참지 못하고 물을 뿜었다. “죽을래? 누가 지었어?”유현진은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이름은 너무 과하잖아.’차미주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난 너랑 어울리는 것 같은데? 하늘에서 내려온 승리의 여신이 연예계를 평정하다.”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 “아마 욕을 바가지로 먹을 거야.”“욕하는 놈들은 자기들도 니케로 이름 바꾸라고 해. 바꿀 능력이나 있어? 너처럼 연기력이 좋기는 하대?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야. 아마추어나 시끄럽게 말이 많지.”유현진이 차미주를 놀렸다. “지금 했던 말 그대로 반박해 줘.”차미주는 멈칫하더니 이내 진지하게 말했다. “누가 그랬어. 바보랑은 맞고 틀리고를 따지는 게 아니랬어. 그런 사람들과 똑같게 굴면서 내 창작에 영향 줄 수는 없어.”“쳇.”유현진이 말을 이었다. “좀 이따 송가람 생일 파티 갈 거야?”“가야지. 공짜 온천인데 왜 안 가?”차미주가 말했다. “송가람이 쓰는 건 송씨 가문 돈이잖아. 넌 송씨 가문의 딸이고. 그러니까 네가 날 초대한 것과 마찬가지인데,
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튼, 주의 좀 해.”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민경하가 여러 명의 사람과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저마다 드레스를 두세 벌 들고 거실에 일렬로 줄 맞춰 섰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고르신 드레스에요.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확인하시고 없으시면 다시 준비하겠습니다.”“...”놀란 차미주는 턱이 떨어질 듯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너희는 드레스를 이렇게 선택해?”유현진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민 실장님. 오늘은 송가람 씨 생일인데, 제가 이렇게 입고 가는 게 맞는 걸까요?”‘이건 내가 시선을 뺏는 거잖아.;민경하도 어쩔 수 없었다. “저도 대표님께 얘기를 드렸습니다만, 대표님께서 사모님은 오바하는 스타일이니 사모님의 액세서리를 전부 가져와 몇십 개를 고르라고 하셨어요.”곧이어 뒤에 있던 사람들은 들고 있던 박스를 열었다. 그 안엔 전부 화려한 주얼리가 들어있었다. “...”차미주는 더 크게 벌어진 입을 손으로 닫더니 고개를 돌려 유현진에게 물었다. “너 전에도 이렇게 부자처럼 스타일링하고 파티에 참석했었어?”유현진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예전의 그녀는 나이도 어렸고 유치했다. 그땐 일부러 과한 차림으로 파티에 참석했었다. 이유는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화를 돋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의 유현진은 이젠 제법 성숙한 어른이었다. 오히려 강한서가 점점 나이를 거꾸로 먹는 듯 유치해졌다. “저 이거 안 입어요. 강한서한테 전화해서 가져가라고 해요. 드레스 룸에 있는 옷 아무거나 입고 갈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사모님께서 직접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 말은 안 들으시거든요.”유현진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들어 강한서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강한서가 물었다. “드레스 골랐어?’“나 드레스 안 입어.”강한서가 말했다. “생일 파티엔 다 드레스 입을 거니까 너도 입어야 해. 그건 예의라고.”“그래도 네가 보낸 이런 건 안 입을 거야
개량 한복을 입은 유현진은 입을 열지 않을 땐 조선시대의 양반집 규수 같은 느낌이었다. 거울을 보며 두 바퀴 돌아보던 유현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엉덩이가 너무 커보이네.”“...”사람들이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차미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네 예쁜 얼굴 감상 좀 하게 그 입 좀 다물어줄래?”...백혜주는 창백해진 얼굴로 경찰서에서 나왔다. 유현아는 멀지 않은 곳에 주차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혜주가 차에 올라타자 유현아가 얼른 물었다. “엄마, 어떻게 됐어요?”백혜주가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모든 아이들의 신체검사 결과가 나오면 다시 와야 한대. 유치원은 영업 정지당했고, 다시는 교육 업계엔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될 거야.”“그럼 작은어머니는...”백혜주가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 “그까짓 돈을 탐내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텐데. 다 자기 탓이지, 뭐.”입을 다물었던 유현아가 잠시 후 나지막이 말했다. “엄마, 유현진이 X이 그 땅과 건물을 기부했어요. 애초부터 가질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게 목적인 것 같아요.”백혜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최근 일어났던 일을 빠르게 회상하더니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왜 계속 날 저격하는 거지?”순간 백혜주의 머릿속엔 반짝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고 백혜주의 생각도 곧 끊겨 버렸다. 백혜주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백혜주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사모님, 원하시는 바를 이루게 되신 거 축하드려요.”휴대폰 너머에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너머의 사람이 참지 못하고 기침했다. 움찔, 백혜주의 몸이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녀는 곧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유현아는 백혜주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누구 전화길래 나 몰래 받는 거야?’백혜주는 사람이 한적한 곳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축하
백혜주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성질을 죽이고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도 그렇게 많이는 없어. 준비할 시간 좀 주면—”“내 병은 너 못 기다려. 3일. 3일 안에 돈을 안 보내면 그땐 그 집 큰 따님 찾아갈 거야.”전화를 끊은 백혜주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그때 깔끔하게 처리했어야 했는데!’“엄마.”유현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백혜주는 유현아임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누구랑 통화한 거예요? 차까지 내려서.”“아무것도 아니야.”백혜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아빠 집에 있어?”유현진이 입을 삐죽였다. “말했잖아요. 요즘 계속 그 X 집에서 지내면서 그 X 배만 신경 쓰고 있어요.”“데려다줘.”유현아가 멈칫했다. “어디로요?”백혜주가 굳은 얼굴로 차 문을 열었다. “네 아빠한테.”가는 길 내내 백혜주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그녀는 유상수가 다른 일에 대해 알게 되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하현주가 둘째를 유산한 진실만은 유상수에게 들킬 수는 없었다. 당시 유상수는 사립 병원의 의사에게 몰래 돈을 넣어주며 미리 아이의 성별을 알아 왔다. 남자아이였다. 그때 유현아는 4살이었고 백혜주도 고작 갓 스무 살을 넘겼을 때였다. 학벌도, 능력도 없던 그녀에게 유상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하현주가 남자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안 뒤로 유상수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점점 가정적으로 변해갔고 하현주와 산부인과를 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백혜주와는 점점 거리를 두었다. 백혜주는 하현주의 아이가 태어나면 유상수가 더 이상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미혼모인 자신과 딸은 어떻게 될까? 그런 두려움에 백혜주는 차태오와 손잡고 하현주의 아이를 유산시켰다. 그건 유상수의 첫아들이었다. 그는 그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아이는 그만 뱃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그 일로
백혜주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최연서가 멀지 않은 곳에서 컵에 물을 따르고 있었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목소리를 한껏 깔고 말했다.“오빠도 내가 여기서 하현주가 어떻게 교통사고를 당했는지에 대해 말 꺼내는 거 싫죠?”유상수는 그대로 경직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백혜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전 내려가서 차에서 기다릴게요. 오빠가 오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나가버렸다.유상수는 당황한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저 미친 여자가 정말!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감히 내 앞에서 그 일을 꺼내? 그런다고 본인한테는 아무런 타격이 없을 것 같아?!'유상수의 안색이 변해가고 결국 겉옷을 챙겨 최연서에게 말했다.“잠깐 나갔다 오 마.”최연서는 바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저랑 같이 식사한다고 하셨잖아요. 왜 저 여자가 오자마자 가려는 건데요?”유상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토닥토닥 두드렸다.“그냥 두어 마디 얘기만 하고 바로 돌아오마.”최연서는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무슨 얘기인데 나가서 해야 하는 거예요?”그러자 유상수는 대충 둘러댔다.“회사 일이야. 대충 두어 마디만 하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최연서는 비록 기분이 언짢았지만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겉옷을 들어 그에게 입혔다....클라우드 아파트 902호.차미주는 연한 핑크색의 원피스를 입고 방에서 나오더니 치맛자락을 들며 한성우 앞에서 한 바퀴 빙 돌며 물었다.“이 옷 어때?”한성우는 턱을 매만지며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음... 뭔가 귀여운 척, 어린 척하는 것 같아.”차미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야, 지금 벌써 8벌 째야. 내가 입고 나온 옷마다 넌 별로라고 지금 말하고 있잖아. 왜, 네 눈엔 내가 뭘 입어도 안 어울리냐?”그러자 한성우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내 눈에 넌, 뭘 입어도 다 예뻐. 다만 네가 입고 나온 옷들이 생일 연회에 입고 가기엔 이상할 뿐이
차미주는 우물쭈물하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네 친구가 비싼 것만 선물하니까 내 선물이 너무 초라해 보이잖아. 그래서 도저히 꺼낼 수가 없어서 현진이가 너한테 줄 때 얼버무렸어.”한성우는 바로 코웃음을 쳤다.“그러니까 넌 거저 한 끼를 챙겨 먹었다는 거네? 나한테 선물도 주지 않고?”차미주는 주눅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어차피 그날 선물 많이 받았잖아. 딱히 부족한 것도 없어 보이던데, 왜 지금에 와서 그때 일을 따지는 거야?”“남이 준 건 남이 준 거고, 네가 준 건 네가 준 거지. 그게 같아?”한성우는 뜸을 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너 그럼 그날 왜 내 생일 파티에 온 건데? 그때 우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 안 그래?”“그거야... 조 선생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간 거지...”차미주는 애꿎은 치맛자락만 꼼지락거렸다.“원래는 조 선생님과 친해지려고 네가 날 초대했다고 말하려고 했었어. 근데 네가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계속 나한테 꼬치꼬치 캐물을 줄 누가 알았겠냐? 혹시라도 내 속셈이 들통날까 봐 두려워서 너를 꽉 안고 있었던 거야. 내 얼굴 보지 못하게...”“...”한성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것이 차미주가 조준과 친해지기 위해 그랬다는 말에 순간 기분이 확 나빠졌다.그리고 생일 다음 날 아침 조준이 방문을 노크할 때 심히 당황한 모습을 보이던 차미주를 떠올렸다. 마치 자신과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조준이 알아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듯 말이다.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한성우는 순간 씁쓸함이 밀려왔다.“조준이 그렇게도 좋아?”한성우가 갑자기 물었다.차미주는 당황하더니 한참 후에야 답했다.“예전에는 아주 좋아했지.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뭔가 조 선생님은 나에게 안개 같은 사람이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그냥... 너처럼 그렇게 현실적이고 솔직하지 않은 것 같아.”한성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솔직하다고? 어느 부분이?”“그냥 모든 게 눈에 보이잖아. 비록 네 입에서 나
사실 조준은 한성우만큼 잘생긴 외모가 아니었다. 차미주가 조준에게 콩깍지가 쓰인 건 그저 조준의 의사라는 직업 필터 때문이었다.마치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서 반장은 무조건 공부를 잘해야 하고 예체능을 배우는 학생들은 공부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꽉 틀어막힌 인식처럼 말이다.차미주에게 연예계에서 일하는 한성우 같은 사람은 매일 그저 수많은 유혹이 오가는 알록달록한 세계에 사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당연히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조준과 그를 비교할 수 없었다.그리고 지금, 그녀는 한성우의 다리 위에 앉아 반강압적으로 이 문제에 대답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그의 얼굴이... 잘생겨 보이기도 했다.어쩌면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일까. 그녀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두근두근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그의 시선을 마주한 차미주는 순간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뛰게 되었고 말도 버벅거리게 되었다.“내, 내, 내, 내가 왜, 왜 이런 하찮은 질문에 대, 대답해야 하는 건데!”그녀는 있는 힘껏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댔다.“궁금하면 조 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봐.”그러자 한성우는 담담하게 말했다.“난 조준보다 내가 더 잘생겼다고 생각해. 너 혹시 눈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차미주는 헛구역질하는 제스처를 보이며 말했다.“자아도취 심하네!”대화를 나누고 있던 와중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한성우가 현관을 확인하러 간 사이 차미주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땐, 한성우는 소파에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고 테이블 위엔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안에는 연두색의 작은 꽃 패턴 원피스가 있었다.어딘가 바닷가에 놀러 가면 입을 법한 원피스였지만 질감은 아주 좋아 보였다.그녀는 바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뭐야? 내 거야?”한성우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아니, 여자 친구한테 주려고.”그러자 차미주가 말했다.“내가 지금 네 여자 친구잖아.”그러다가 이내 뜸을 들이며 다시
“...”송민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형님”이라고 부르는 강한서에 송민준은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그는 굳어진 얼굴로 강한서를 몇 초간 빤히 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난 왜 예전에 네가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란 걸 몰랐지?”강한서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그건 네가 일찍 해외로 나가서 그렇잖아. 우리가 함께 있은 시간이 별로 없었으니까 나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거야.”송민준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너 설마 현진이가 네 마음을 받아줬다고 마음 편해진 거 아니지?”강한서는 바로 겸손한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형님의 인정까지 받아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현진이는 너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라고.”“... 자신감 넘치네. 만약 네가 마음에 안 든다면 어떻게 하려고?”그러자 강한서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그럼 뭐 어쩔 수 없는 거지.”“?”송민준은 어이가 없었다.강한서는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몇 초 지나지 않아 휴대폰 화면에 여자의 형체가 나타났다.“강한서, 지금 어디길래 주위가 이렇게 까만 거야?”강한서가 말했다.“여긴 까맣지 않아.”말을 마친 그는 휴대폰을 들어 송민준에게 건넸다. 휴대폰 속 여자를 확인한 송민준은 잠깐 멈칫하더니 입술을 틀어 문 채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여자도 당황한 듯 침묵하다가 이내 그를 불렀다.“민준 오빠, 오빠야?”송민준은 한참 후에야 대답하였다.“응.”...유현진은 강한서의 연락을 받자마자 집에서 나왔다.강한서가 말하길 송민준이 주차장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유현진은 상당히 당황했고 송민준이 강한서를 차에 타지 못하게 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강한서는 이미 송민준의 차에 타고 있었다.한성우와 차미주도 시간에 맞춰 같이 내려왔다.여하간에 공짜로 차를 얻어 탈 기회였기에 한성우는 당연히 그 기회를 놓칠 인물이 아니었다.그렇게 동생만을 데리러 온 송민준의 차엔 그들도 앉게 되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