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주강운이 쫓아왔고 그는 빨랫대로 남자의 손목을 가격했다. 저릿하게 전해지는 고통에 남자가 칼을 놓쳤다. 남자는 바로 몸을 돌려 주강운과 몸싸움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비록 주강운보다 키는 작았지만 살집이 있고 건장한 체격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받은 것 같은 몸놀림이었다. 몇 번의 주먹다짐 끝에 두 사람은 바닥에서 뒹굴며 몸싸움했다. 남자는 주강운의 목을 꽉 조르며 핏기가 서린 눈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저년을 도와 나랑 이혼하게 했다며. 오늘 넌 내 손에 죽는 거야!”산소 부족으로 주강운의 얼굴이 점점 충혈되었고 이마에도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는 팔꿈치로 남자의 머리를 꽉 누르고 있었다. 주강운은 잔뜩 충혈된 눈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유현진에게 소리쳤다. “가요!”유현진의 손가락이 덜덜 떨려왔다. 차미주도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들은 한 번도 이런 미친놈을 본 적이 없었다. 주강운을 이기지 못한 남자가 다시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칼과 점점 가까워지자, 주강운의 눈빛이 잿빛으로 변해갔다. 그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김치를 담근 항아리가 남자의 이마를 가격했다. 움찔 몸을 굳힌 남자는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었고, 자기 이마를 내려친 사람을 확인할 새도 없이 기절했다. 주강운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도 드디어 풀렸다. 주강운이 고개를 들자 유현진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차미주는 얼른 옆에 있던 식칼을 한쪽으로 차 버렸다. “주 변호사님, 괜찮으세요?”그제야 정신이 든 주강운이 유현진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괜찮아요.”주강운은 몸을 돌려 쓰러진 남자를 바닥에 꽉 눌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차미주에게 말했다. “미주 씨, 끈 좀 찾아줄래요?”차미주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끈을 찾았다. 주강운이 유현진을 힐끔 쳐다보니 그녀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유현진의 시선은
주강운의 말을 들은 차미주는 순간 변호사라는 직업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주 변호사님, 우리 방금 그건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죠? 만약 저 인간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저희가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니겠죠?”주강운이 웃으며 말했다.“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주강운이 유현진을 쳐다보자 그녀는 아직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현진 씨? 괜찮아요?”유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개를 돌린 유현진은 주강운 손에 넥타이가 감겨있는 것을 발견했다. 넥타이는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차미주도 주강운의 손을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주 변호사님. 대동맥을 찔린 것처럼 피가 왜 이렇게 많이 나는 거예요.”유현진: ...주강운은 차미주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피가 잘 멎지 않아서요. 괜찮아요.”유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미주야, 네가 먼저 주 변호사님 모시고 병원에 가서 지혈 좀 해. 내가 진술서 작성하러 갈게.”주강운은 혈우병을 앓고 있었다. 상처를 제때 치료해 지혈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차미주는 주강운과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 유현진이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한서가 맡긴 임무를 떠올린 차미주는 그 말을 삼켜야만 했다.“그래.”주강운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같이 진술하러 가요. 전 괜찮아요.”유현진이 말했다.“먼저 지혈부터 해요. 건강이 중요하죠.”그에 주강운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는 한참 만에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오늘 일은, 두 분께 신세를 졌네요. 괜히 저 때문에...”차미주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친구 사이에 신세는요.”주강운이 웃으며 고개를 돌려 유현진을 쳐다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멈칫하던 유현진은 주강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실 애초부터 위에 올라갈 생각이 없었다. 뛰어 올라간 차미주가 걱정되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절대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진술을 마치고 경찰서에서 나온 유현진은 차미주에게 문자로 그쪽 상황을 물었다. 차미주가 말했다. 「주 변호사님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아. 간호사가 꿰매는 중이야.」상처가 깊다는 말에 유현진은 깜짝 놀랐다. 차미주가 말을 이었다. 「현진아, 우리 과일바구니라도 사서 병문안 가야 하는 거 아냐? 아무래도 같이 있었던 일이기도 하고, 상처를 꿰매기도 했잖아.」「이 저녁에 선물을 사 들고 병문안 가는 게 어딨어.」잠시 생각하던 유현진이 말했다. 「내가 강한서에게 주 변호사님 가족분께 연락하라고 할게. 병문안할 땐 하더라도 타이밍을 잘 봐야지.」「알겠어. 너 여기로 올 거야?」「난 안 갈래. 이따 가족분들 도착하면 너도 돌아와. 다른 건 집에 가서 얘기해.」「그래.」차미주와 문자를 마무리한 뒤, 유현진은 바로 강한서에게 전화했다. 같은 시각, 강한서는 회장실에서 앉아있었다. 그의 옆에는 강단해와 강현우가 앉아있었고 맞은편 소파에는 정인월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진씨와 강민서가 있었다. 정인월은 굳은 얼굴로 강단해와 강한서를 쳐다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내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 임원 회의에서 싸우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거냐?!”강한서는 시리도록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단해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머니, 이번엔 한서가 너무했어요. 쟤 한마디로 지사와 프로젝트의 존망이 결정되면 다른 주주에게 제가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한성 그룹은 강씨 가문만의 것이 아니에요. 모두의 이익을 함께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요? 전에 한서가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땐 저희 주주들이 회사를 지켰잖아요.”정인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들었니? 한꺼번에 전부 문을 닫으면, 주주에게는 뭐라고 할 거니?”강한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매 시즌마다 두 곳씩 청산하는 거로 하죠. 적자가 제일 많은 것부터 시작하면 되겠네요.”정인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방법이겠구나.”강단해의 얼굴에 당
사무실에서 나온 강한서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는 일부러 도도한 척했다. “밥은 다 먹었어? 이제야 남자친구가 있는 게 기억났나 봐?”유현진: ...‘이 질투쟁이가!’‘하지만...’“너, 우리 밥 먹으러 가는 건 어떻게 알았어?”멈칫하던 강한서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널 몰라? 일 처리가 끝났으면 네 변호사님께 한턱 크게 내려고 했겠지.”유현진: ...“밥은 못 먹었어.”유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변호사님께 일이 좀 생겼어.”움찔 몸을 떤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강운이가 왜?”“칼에 손을 다쳤어. 지금 병원에서 봉합 중이고. 너 주 변호사님 가족분이랑 친하잖아. 집에 연락 좀 해줘.”강한서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너희 일 보러 간 거잖아. 대체 어떻게 칼에 손을 다친 거야?”유현진은 간단히 오후에 있었던 일을 강한서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다 들은 강한서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유현진이 복도에 있던 항아리로 사람을 쓰러뜨렸다는 말에, 그는 씰룩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한서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어 유현진은 꾸짖으려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 변호사님은 고맙다고 하시더라고. 하지만 사실 난 처음부터 올라갈 생각이 없었어.”유현진의 말에 강한서는 의아해했다. “왜? 정의로운 네가 왕자님을 구해 네 착한 마음씨를 뽐낼 절호의 기회였잖아.”유현진: ...‘개자식, 또 비꼬네.’유현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 망나니가 칼을 들고 있었다고. 내가 미쳤어? 칼로 위협받고 있는 사람이 너도 아니고, 내가 올라간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어?”잠시 멍해졌던 강한서가 씩 입꼬리를 올리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만약 위협받는 게 나라면, 넌 앞뒤 안 가리고 달려올 거야?”유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만약 너라면, 난 더 멀리 도망칠 거야. 넌 그 입이 문제라, 네 원수는 절대 널 용서할 리가 없잖아. 어차피 구하지도 못할 거야. 차라리 멀리 도망쳐야지. 불똥이 튀지 않게.”강한서: ...그는 바득
“헛소리 좀 하지 마.”유현진이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나 지금 너랑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잖아.”강한서는 도무지 “어두운 기운”이 어딜 봐서 진지한 얘기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현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얘기해.”유현진이 비밀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엔 말이야, 주 변호사님은 미주가 말했던 것처럼 팔자가 사납고 어두운 기운이 많고 운이 나쁜 사람인 것 같아. 이제 알고 지낸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매번 만날 때마다 다치지 않으면 사고가 생기잖아. 물론 나랑 사주팔자가 맞지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어. 그러니까 만나기만 하면 재수 없는 일이 생기는 거겠지.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주 변호사님을 멀리해야겠어. 괜히 내가 병원에 갔다간 대량출혈이라도 할 것 같아.”강한서: ...강한서가 그렇게 얘기할 땐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결국엔 미신이 그녀를 설득한 셈이었다. 강한서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강한서가 앙큼하게 설득하는 척 연기했다. “너 풍수나 그런 건 다 거짓말이라며? 그러면서 이런 건 믿는다고? 강운이가 들으면 서운해할 거야.”유현진이 콧방귀를 뀌었다. “연기하지 마. 넌 내가 주 변호사님을 멀리하길 원했잖아.”강한서가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난 강운이가 잘 됐으면 좋겠어. 물론 너도 더 잘됐으면 좋겠고. 하지만 네가 걔한테 너무 잘해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강운이 편집증은 심한 편이야. 난 네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아.”유현진은 진정한 편집증이 어떤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정신질환 환자의 이미지는 전부 미쳐있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그런 이미지와 주강운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유현진은 비록 팔자 핑계를 댔지만, 사실 그녀는 팔자나 미신 같은 건 잘 몰랐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전형적인 이익 추구형 인간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주강운과 함께 있어서 사고가 자주 난다면, 만나지
강단해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정인월은 어두운 얼굴을 한 강현우를 힐끔 쳐다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마. 네 형이 널 데리고 있는다 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 줄 알아? 네가 계속 이렇게 철이 들지 않는다면, 서부로 돌아가서 계속 성장해야지.”강현우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할머니.”정인월이 잔을 내려놓았다. “한서야, 민서에게도 자리 하나 내주렴. 너무 높은 직책 말고, 일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거로.”강한서는 강민서를 슥 훑어보았다. 강민서는 잔뜩 움츠러든 채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심지어 강한서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강한서의 얼굴만 보면 강민서는 자기도 모르게 강단해의 집에서 자신을 경찰서로 끌고 갔던 강한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민서를 향한 강한서의 사랑은, 그날 전부 강민서의 악몽이 되었다. 경찰서에서 당했던 일만 떠올리면 그녀는 끓어오르는 원망과 공포를 감출 수가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담담하게 말했다. “먼저 비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민 실장에게 안내하라고 할게요.”민경하: ...그는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말 안 듣는 애는 그냥 베이비시터에게 맡기면 안 돼요? 여긴 유치원이 아니라고요.’민경하와 달리 정인월은 굉장히 만족했다. “그렇게 하렴. 민 실장. 민서 데리고 입사 절차 밟아요.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게.”민경하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는 강민서에게 말했다. “민서 아가씨, 같이 가시죠.”강민서를 입술을 짓이기며 민경하를 뒤따랐다. 정인월은 강단해와 강현우를 쳐다보며 이마를 어루만졌다. “너희도 이젠 가렴. 이런 작은 일로 나까지 부르다니, 너희들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려. 내가 아주 수명이 줄어.”강단해는 기가 막혔다. 정인월을 부른 것은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정인월이 맏이를 편애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단해는 어두운 얼굴로 강현우를 데리고 회장실을 나왔다. 진씨도 자리를 비켰다. 그들이 회장실에서
강한서는 어처구니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그야말로 유현진의 친할머니가 따로 없었다.“현진이는 예전과 많이 달라요. 이미 진짜 가족도 찾았죠. 재혼하는 건 집안 큰일이에요. 그러니 현진이뿐만 아니라 현진이 가족들 동의도 받아야 해요.”정인월은 의아한 듯 물었다.“진짜 가족을 찾았다니?”강한서는 유현진과 송씨 가문, 그리고 한씨 가문에 대해 정인월에게 말해주었다.정인월은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래, 어쩐지 현진이 인상부터가 착한 사람 인상이라고 했어. 그 아이가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그래, 그랬군. 아람이가 낳은 아이였구나. 정말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군.”말을 마친 그녀는 이내 다시 뜸을 들이다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갑자기 든 생각인데, 네 재혼이 순탄치 않을 것만 같구나. 그 집안에서 네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게 아니더냐?”“...”강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래서 말인데 할머니, 별일 없으시면 자주 한씨 집안 어르신들과 차라도 마셔주세요. 할머니 손자 35살 되기 전에는 장가가야 하지 않겠어요?”그러자 정인월은 코웃음을 쳤다.“인과응보다, 이놈아! 현진이가 너 없으면 안 된다고 하던? 네가 현진이 없으면 안 되는 거겠지! 처음부터 네가 현진이랑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부터 알아봤다! 그나마 얼굴이 보기 좋아서 결혼하긴 개뿔, 넌 그냥 현진이한테 반한 거잖아! 그래 놓고 자꾸 아닌 척할래?!”강한서는 급히 변명했다.“...처음에는 확실히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냥 그나마 눈에 거슬리지 않아서 결혼한 거예요.”“허허.”“...정말이에요, 할머니. 제가 거짓말을 해서 뭐해요.”정인월은 그를 흘겨보았다.“그래,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그럼 첫날밤을 보낼 때 뭐 그렇게 조사했어? 현진이가 다칠까 봐 감히 손도 못 대던 놈이 말이야!”강한서는 입을 삐죽거렸다.“할머니 허위 사실 유포하시면 안 돼요.”정인월은 점점 더 목소리가 커졌다.“이 집안에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주강운의 어머니는 입술을 틀어 문 채 나직하게 물었다.“네가 사고 났을 때, 유현진 씨랑 같이 있었니?”주강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현진 씨가 아니었다면 전 아마 병원에조차 제때 오지 못했을 거예요. 현진 씨가 절 구해 줬거든요.”그녀의 안색이 다소 이상해졌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나중에 내가 유현진 씨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해야겠구나.”주강운은 바로 손을 내저었다.“어머니, 어머니는 이 일에 신경 쓰실 필요 없으세요. 나중에 제가 다 나으면 직접 갈 거예요.”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강운아, 유현진 씨는 한서의 전 아내잖니. 그러니 유현진 씨와 가깝게 지나지 말렴. 괜히 그러다 사람들한테 이상한 소리나 듣게 돼.”주강운은 뜸을 들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상한 소리가 대체 뭔데요?”그녀가 말했다.“한서랑 현진 씨는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네가 현진 씨랑 가까이 지내면 한서가 이혼한 이유가 네 탓이 되는 거야. 아니면 네가 분명 현진 씨랑 뭔가가 있다고 소문이 나겠지. 너랑 한서는 친구잖니. 그런 소문이 돌면 너한테도, 한서한테도, 누구한테도 안 좋아.”주강운은 침묵하다가 한참 후에야 말을 꺼냈다.“만약 정말로 그런 소문이 퍼지는 거라면 저한테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 사실... 현진 씨를 좋아하고 있어요.”쨍그랑-!그녀의 손에 있던 과도는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충격을 받은 듯한 그녀는 경직되더니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네가 현진 씨를 좋아한다고? 강운아,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혹시 머리라도 다친 거니? 어떻게 유현진을 좋아할 수가 있어?!”주강운은 충격에 휩싸인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냉정한 모습으로 말했다.“제가 왜 좋아하면 안 되는데요?”그녀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왜라니? 그 애는 한서의 전 아내야. 네가 그 애를 좋아하면 앞으로 한서랑 어떻게 계속 지내? 세상에 좋은 여자가 그렇게 많은데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