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갑자기 차미주에게 물었다. “넌 정명석을 어떻게 알아?”“나 졸업하자마자 히든 엔터에 이력서를 넣은 적이 있었어. 물론 그쪽에선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그때 면접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 히든 엔터의 소속 연예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같이 면접 봤던 사람에게 들으니까 정석호 대표님 외동아들이라고 하더라고.”“특히 한 번만 봐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상징적으로 잘생긴 얼굴이었거든. 정석호 대표님의 아내가 당시 미스 유니버스의 우승자라고 하더라고.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가 수려한 외모를 지닌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아무래도 아들은 엄마를 닮는 법이니까.”한성우는 차미주가 다른 남자를 칭찬하는 것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상징적으로 잘생긴 외모? 얼마나 상징적인데? 나보다... 한서보다 더 상징적이야?”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상징적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쓰이는 거였더라?’차미주는 진지하게 비교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강한서랑 분위기가 비슷한 것 같아. 같은 스타일이라고 할까? 외모라는 건 보는 사람 취향에 따라 다른 거니까. 내가 보기엔 비슷한 것 같아.”한성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여자야, 넌 잘생긴 사람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지. 비슷해? 어디가 비슷하다는 거야? 강운이 리즈시절 외모가 겨우 한서랑 비슷한 수준인데. 만 명 중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외모가 그렇게 흔한 거였으면, 연예계에 선남선녀가 이렇게도 적겠어?”차미주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믿기 싫으면 관둬.”한성우는 자신이 한 말을 인정받으려 얼빠인 유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형수님, 제 말이 맞죠?”방금까지 멍때리고 있던 유현진은, 한성우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뭐라고요?”한성우: ...차미주가 한성우를 비웃었다. “현진아, 조금 있으면 정명석 도착할 거야. 네가 나중에 봐봐, 강한서랑 비교할 만한 외모가 맞는지 아닌지. 내 말이 헛소리인지 아닌지 말이야.”한성우가 말했다
잠시 후, 정명석이 걸음을 옮겨 앞으로 다가왔다. 유현진에게 향했던 그의 시선은 잠시 뒤 강한서와 한성우를 향했다. 옆에 있던 젊은 친구가 소개했다. “도련님. 이분은 바이브 엔터의 한성우 대표님이세요.”정명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내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정명석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은 아마도 정석호가 아들에게 붙여준 비서인 것 같았다. 일부러 정명석을 데리고 모임에 나와 업계의 사람들을 소개하는 중인듯했다. 한성우와 히든 엔터는 비록 라이벌이지만, 사석에서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니 한성우는 상대방이 내민 손을 잡으며 악수했다. “정씨 집안 도련님이셨군요. 역시 들은 대로 멋지시네요. 정 대표님 젊은 시절 모습이 보여요.”정명석도 공손하게 말했다. “저도 아버지께 한 대표님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젊으신데 능력까지 겸비한 분이라고. 안목이 좋으신 분이라 기회가 되면 대표님께 많이 배우라고 하셨거든요.”한성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로 배우는 거죠.”비서가 이번엔 강한서를 소개했다. “이분은...”“한성 그룹 강한서 대표님이시죠.”비서가 말을 꺼내기 전에 정명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업적은 유학 시절 많이 들었어요.”그러더니 손을 뻗으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강한서는 상대방의 손을 아주 잠깐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그는 비록 정석호와 안면이 있었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정석호는 오히려 강단해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니 그의 아들인 정명석에게 강한서도 특별히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저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며 어색한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을 정도면 충분했다. 강한서는 모르는 사람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성우는 아니었다. 한성우가 그렇게 많은 연예계의 찌라시를 알고 있는 건 전부 그의 말솜씨와 뻔뻔함 덕분이었다. 그러니 소개를 마친 뒤, 한성우는 원래부터 친했던 사이처럼 정명석에게 물었다. “명석 군, 결혼식에
정명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 나 기억 안 나?”그는 또 충격적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한성우는 이미 경악하던 표정을 지우고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강한서와 분위기가 비슷하고 외모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남자가 유현진과 아는 사이였다. ‘이건... 너무 재밌잖아.’한성우는 강한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강한서는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고,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흔들림 없이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시선이 뒤에서 느껴지자, 유현진은 마음에 찔려 감히 뒤돌아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마음이 아무리 불안한 상태여도 유현진은 겉으로는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에 익은 것 같기는 한데. 죄송해요.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요. 힌트라도 좀 주시겠어요?”유현진의 반응에 정명석은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눈앞에 있는 여자를 훑어보았다. 사실 유현진은 고등학교 시절과 많이 달라졌다. 애굣살도 많이 빠졌고, 턱선도 더 선명해졌다. 물론 이목구비도 더욱 또렷해졌다. 당시 학교 장기 자랑 무대에서 촌스러운 옷을 입고 콩트를 하던 여자아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유독 변하지 않은 것은 반짝거리는 그녀의 두 눈이었다. 촉촉하던 그녀의 눈빛을, 정명석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순진무구해 보이는 그 눈빛에 숨겨진 교활함을 말이다. 유현진은 바로 그 촉촉한 눈빛으로 정명석을 바라보았었다. 그녀는 그에게 귀여운 동물로 변신시키는 마술을 보여주겠다고 하더니 그의 손에 쥐 한 마리를 올려놓았었다. 몇 초간 빤히 유현진을 쳐다보던 정명석은 고개를 숙여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기억 안 나면 어쩔 수 없지. 다시 알아가면 되니까.”그러더니 그는 손을 내밀며 다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전 한주고등학교 15기 3학년 9반 정명석이에요.”유현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차미주가 말했다. “한주고등학교? 현진아, 너도 한주고등학교
한성우는 유현진의 말을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어쩐지 유현진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명석을 보는 그녀의 눈빛은 학교 동문을 만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한성우가 뭔가 더 얘기를 꺼내려는데, 유현진이 차미주에게 말했다. “미주야, 나랑 음식 가지러 가자.”“응, 그래.”두 여자가 자리를 비우자, 한성우는 그제야 강한서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네 와이프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잘생긴 남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형수님 성격상, 방금 정명석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야 정상적인 반응일 텐데 말이야. 하지만 방금, 형수님은 정명석을 몇 번 쳐다보지도 않았어. 매번 눈이 마주치면 바로 시선을 피하고. 언제 잘생긴 남자를 봤다고 저렇게 수줍어했던 적 있어?”강한서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도 당연히 유현진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유현진 편을 들었다. “대체 어떤 눈으로 봐야 수줍어한 거로 보이는 거야? 현진이가 보지 않는다는 건, 잘생기지 않았다는 거야.”한성우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왜 예전엔 강한서의 ‘을’ 성향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만약 유현진과 장명석 사이에 아무 사연이 없다면, 한성우는 자신이 성을 갈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유현진은 집게로 차미주에게 에그타르트를 집어주고 있었다. 차미주는 에그타르트를 바로 입에 넣으며 물었다. “현진아. 정명석이라는 사람, 네가 2주일 만나고 헤어진 첫사랑이지?”유현진: ...유현진의 반응을 확인한 차미주는 자신의 추측을 확신했다. “어쩐지 반응이 이상하더라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기억 못하겠어. 게다가 학교 킹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얼굴인데.”유현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강한서 앞에서 헛소리하지 마. 안 그러면 또 난리 날 거야.”차미주가 말했다. “만약 네가 방금 솔직하게 얘기했으면, 강한서도 그렇게까지 쪼잔하게 굴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네가 정명석을 모르는 척
전남친의 충격적인 발언에 옆에서 귀를 기울이던 차미주에게는 재밌는 구경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현진이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잖아? 귀국하자마자 강한서와 현진이 일도 알고.’‘일부러 소식을 알아본 게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알았을 리가 없을 텐데.’‘설마,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순간 차미주의 머릿속에는 삼각관계 로맨스물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그녀는 당장 한성우에게 전화해 라이브로 이 상황을 같이 구경하고 싶었다. 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정명석의 말에 대답했다. “그건 내 일이야. 너한테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정명석은 덤덤하게 미소 지었다. “그냥 물어본 거야. 내가 생각해도 강한서 씨 때문은 아닌 것 같아. 어차피 넌, 사람을 버릴 땐 늘 깔끔하게 선을 긋는 사람이니까.”그의 말에 차미주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게 무슨 말이야?’‘현진이가 찼다는 뜻인가?’“얘기 끝났어? 더 할 얘기 없으면 난 갈게.”접시를 내려놓고 자리를 피하려는 유현진을 정명석이 가로막았다. 그러더니 그는 망고 푸딩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만나서 반가웠어. 진심으로.”그는 유현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유현진은 손바닥 위에 놓인 푸딩을 보더니 자리 원위치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굉장한데?’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차미주를 협박하며 말했다. “강한서한테 말하지 마. 안 그러면 절교야.”차미주가 얼른 맹세했다. “걱정하지 마. 나 입 무거워.”그러더니 차미주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가 찼어?”유현진이 말했다. “내가 헤어지자고 한 건 맞지만, 쟤도 바로 알겠다고 했어. 평화로운 이별이었다고.”“왜? 외모는 네 타입이잖아. 게다가 성격은 강한서보다는 좋은 것 같은데.”유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할 수 없는 사연은 아니야. 집에서 유학을 보내려고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헤어지자고 했어.”“겨우 그거라고?”“내가 유학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 때문
얼마 후, 강한서와 한성우는 드디어 인사를 마치고 유현진과 차미주 쪽으로 걸어왔다. 강한서는 손에 바나나를 들고 유현진에게 건네주었다. 바나나를 건네받은 유현진이 바로 껍질을 벗겨 입에 넣으려고 했다. 강한서가 유현진에게 눈치를 줬다. “유상수 왔어. 들키지 마.”유현진은 멈칫하더니 바나나를 다시 강한서에게 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마음대로 이러지 마시죠. 저 바나나 안 좋아해요.”한성우: ...‘1초 만에 몰입하다니.’유상수는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기며 바나나를 들고 서서는 한참 후에야 물었다. “뭐 먹고 싶어. 내가 가져다줄게.”“제가 뭘 먹고 싶든, 강 대표님과 무슨 상관이죠?”유현진은 조금 짜증스럽게 말했다. “비켜주시겠어요?”유상수가 얼른 유현진 곁으로 다가왔다. “현진아, 왜 그러니? 한서도 너 챙겨주려고 그러는 거잖아. 얘가, 너무 고집스러워서 탈이야.”유현진은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계집애가, 자기 엄마처럼 성격이 더러워서는. 강한서가 어떤 사람인데. 강한서가 정말 끝도 없이 맞춰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유상수는 강한서가 화라도 낼까 봐 얼른 유현진을 대신해 사과했다. “한서야, 괜찮니? 얘가 정말 성질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네. 이혼까지 해놓고 아직도 반성하지 않다니 말이야.”유상수의 말에 차미주는 욕설을 퍼붓고 싶어졌다. ‘대체 무슨 낯으로 저런 얘길 하는 거야?’‘현진이가 저 자식이랑 이혼한 건, 아주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잖아. 아주머니 남편이라는 인간이 장례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무슨 자격이 있어서 현진이를 질책해?’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유 대표님, 현진이는 잘못한 거 없어요.”유상수가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거... 강한서가 이렇게 사랑꾼이었나?’잠시 생각하던 유상수는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다. ‘이건, 너무 잘된 일이잖아.’강한서의 지금 상태는, 유현진의 말이 곧 법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유현진은 지정욱이라는 젊은 남자를 쓱 훑어보았다.지정욱이 정명석의 사촌 동생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의 외모는 너무나도 평범했기 때문이다.작은 두 눈에, 큰 머리. 키는 작지는 않았지만, 비율이 좋지 않았고 살짝 정 자세로 서 있기 힘들어 보이기도 했으며 거북목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전혀 젊은 남자의 기백이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알코올에 중독되어 정신이 흐릿한 사람으로 보였다.유현진의 시선을 느낀 상대는 바로 작은 두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유현진은 바로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했다.마음이 급했던 유상수는 얼른 미래의 사위가 될 강한서를 소개하려고 했다. 상대에게 인맥을 넓혀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는 강한서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강한서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고는 시선을 계속 유현진에게만 돌리고 있었다.그런 그의 모습에 유상수는 분명 강한서가 아직도 유현진에게 미련을 못 버린 것으로 생각했고 반드시 두 사람을 처음의 함께 했던 사이로 만들어 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두 사람이 다시 이어지게 되면 자신의 사업에도 도움이 되었기에 유상수는 절대 이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그렇게 생각한 유상수는 바로 고개를 돌려 유현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따 결혼식이 끝나면, 바로 네가 내 딸이라고 밝힐 생각이다. 현진아, 앞으로 유씨 가문이 널 든든하게 지켜줄 거다.”유현진은 시선을 떨군 채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도 먼저 아줌마와 상의해 보고 결정하시죠. 이렇게 좋은 날에 분위기를 망칠 순 없잖아요.”그는 식견도 짧고 그의 뜻을 눈치채지 못하는 백혜주에게 딱히 알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그러나 그는 일단 그녀의 말에 대답을 했다.“그래, 알았다.”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유현아에게 말했다.“일단 손님들을 계속 네가 맞이하거라. 난 네 엄마한테 가보마.”“알았어요. 아빠.”유상수는 바로 자리를 옮겨갔다. 유현아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유현진만 바라보고 있는 강한서를 목격하게 되었고 순간 열불이 올라왔다.그녀에게 강한서는
차미주는 바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아무 말도 안 했어.”강한서의 목소리가 다운되었다.“그러니까, 현진이가 정명석과 키스를 했다고?”차미주는 모른 척 말했다.“잘 못 들은 거야.”그녀는 바로 우정이 아닌 도망을 선택하려 했다.“그, 뭐냐. 나도 갑자기 배가 고픈 것 같아. 스테이크 더 있나 확인하러 갈게.”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도망갔다.“...”유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미주의 주둥아리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강한서는 어두워진 시선으로 유현진을 보며 물었다.“설명해 봐.”유현진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돌아가서 설명하면 안 돼? 아직 이 연극은 안 끝났잖아.”강한서의 얼굴에서 빠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 그의 모습에 유현진은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넘어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그녀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별거 아니야. 그냥... 그냥 정명석은 내 첫사랑이었거든.”강한서의 안색이 그녀의 예상대로 어두워졌다.그는 이를 갈며 말했다.“아까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어?”유현진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졌다.“그건 그냥 네가 화낼까 봐 그런 거야.”“내가 화낼 걸 알면서도 나를 속여?”“속인 거 아니야.”유현진은 그의 손등을 살살 쓸었다.“나도 그 사람을 여기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어. 그래서 너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단 말이야. 넌 질투가 심하잖아. 만약 네가 삐쳐서 연기 안 해주겠다고 하면 헛걸음하게 되잖아.”강한서의 안색은 여전히 굳어져 있었다.유현진의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강한서, 한서야? 대표님?”그러나 강한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심한 듯 이를 꽉 물더니 바로 말했다.“오빠, 화내지 마. 집에 가서 오빠 하란 대로 다 할 테니까 화 좀 풀어, 응? 자꾸 화내면 건강에 안 좋아. 그럼 나도 마음이 아프다고.”강한서의 심장이 쿵쾅쿵
이틀 후 깔린느 정기 회의에서 서해금은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언급하며 각 부서가 직원들의 시간을 조율하고 차례로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시간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그럼 특별한 사항 없으면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현진이 서해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서해금도 눈을 들어 한현진을 응시하며 여유 있게 말했다. “현진 씨, 더 지시할 거라도 있어요?” 한현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지시라뇨.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제 선배님들이세요. 업무적인 부분은 앞으로도 많이 배우고 의지해야 할 분들입니다. 다만 서 대표님께서 직원 건강검진에 대해 언급하신 걸 듣고 마침 오늘 회사 고위층 분들도 다 계셔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요.” “서 대표님, 괜찮으실까요?”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한현진이 아마도 회사 관리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회사에 온 지 몇 달이 되었고 비록 진씨 가문 사모님 홍혜림을 중심으로 몇몇 고객을 끌어들였지만 서해금의 기반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매우 컸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큰 진전이 없었으니 한현진은 분명히 조급할 것이다.서해금은 두 손을 가볍게 포개어 테이블에 놓고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기 회의는 원래 경영진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어떤 의견이라도 편하게 말씀하세요. 좋은 제안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적극적으로 채택할 겁니다.” 그녀는 매우 너그러운 태도로 민주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이것이 바로 서해금이 이렇게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회의에서 나온 의견과 제안은 결코 당면에서 거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뒤에서는 다른 수단을 써서 상대를 밀어내는 법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루는 데 그녀는 능숙했다.한현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직설적을 말
송가람은 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 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녀는 강한서보다 더 초조해했다. 황 닥터는 금지된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이유로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고 당분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가 오지 않으면 강한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이다. 송가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서 오빠, 저랑 같이 외국에 가서 교수님한테 진료받으러 갈래요? 그쪽에서 꼭 잘 봐주실 거예요.] 송가람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람아, 평소 같았으면 바로 갔겠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요즘 한주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난 지금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으면 여기서 다른 의사를 찾아서 진료를 받는 방법을 찾아볼게.][그럴 수는 없어요!] 송가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강한서는 잠시 멈칫했다. [왜 안 되지?] 송가람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닫고 잠시 말을 더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뇌과학 전문가 중 한 분이세요. 국내 의사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의사를 바꾸면 강한서가 예전에 사용한 약에 대해 물어볼 것이었고 그렇다면 그녀는 그것을 말해야 하므로 폭로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강한서는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약은 효과가 좋았어. 매번 먹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잡생각들이 사라졌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 약이 다 떨어져서 최근에 다시 두통이 찾아왔어. 그 약만 있으면 황 닥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텐데.]송가람의 눈이 번쩍였다. ‘맞다. 그 약이 있었지.’ 그녀는 속으로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하지만 이 보험은 직원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가족은 이 보험을 가입할 수 없다. 지금 강한서의 의도는 이 혜택을 직원의 가족에게까지 확장하려는 것이다. 주혁은 집에 두 명의 환자가 있고 약을 자주 복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회사의 이 선의를 거절한다면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 예전에 아들을 위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을 돈을 마련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장을 잃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강한서의 개인적인 의도도 있었다. 이런 세심한 직원에 대한 배려는 점차 아래 직원들이 한현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위층은 작은 이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일반 직원들에게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이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다. 그들 대부분은 삼십대에서 마흔다섯 사이로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회사가 약속한 성과급 같은 허황한 말보다는 이런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실비보험이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한현진은 마치 뭔가 깨달은 듯 강한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얻는 거구나.” 강한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생각까지는 못 했어. 할머니가 병원에 갈 때는 항상 진씨 아저씨랑 같이 가서 내가 직접 겪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이런 일도 거의 없었고.” “그런데 한 번은 민 실장이랑 같이 출장 가는 길이였어. 그때 민 실장 어머니께서 비를 맞으면서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길이 미끄러워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셨어. 가벼운 사고가 나이었고 수술이 필요한 정도로 심했었지.”“그때 민 실장한테 병원에 남아서 어머니를 돌보라고 하고 혼자 고객을 만나러 갔어. 며칠 만에 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렀더니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입원부터 치료까지 전부 합쳐서 거의 천만 원 가까이 들었더라. 민 실장은 보험 청구를 했
강한서가 가식적인 말투로 말했다. “부탁할게. 나중에 내가 너랑 여정 씨에게 크게 한 턱 쏠게.”강한서에게 등을 돌린 신우가 손을 들어 중지를 내밀었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신우 씨가 널 꽤 귀찮아하는 것 같아. 전에 여정 씨에게 신우 씨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아닐 걸?”강한서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우리 사이가 좋다고 생각해. 봐봐, 지금 얼마나 열심히 우릴 도와주고 있어.”한현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왜 신우 씨가 마지못해 하는 것 같지?’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이제 이런 일로 신우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 우리 다른 방법 찾아보자. 언제까지 부탁할 순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계속 신우에게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신우처럼 능력 있고 입도 무거운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현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언제까지 신우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신우의 할아버지가 위독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삼촌들의 후계자 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다. 수많은 눈이 서로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기에 신우의 처지 역시 살얼음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신씨 가문에서 요즘 경쟁이 제일 치열한 것이 바로 제일 많은 계약금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강한서는 이 기회를 빌려 신우에게 투자금을 보태 그동안 진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지문 대조 결과가 나왔다. 편지 봉투와 그림에는 한현진과 강한서의 지문을 제외한 세 사람의 지문이 있었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주혁의 아내였고 또 다른 사람은 주혁의 아들인 주지호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문 대조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의 지문이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이 정보를 따라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렇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사 결과는 결국 시스템에조차 등록되어 있
시원하게 욕을 날린 신우는 의리 있게 강한서의 부탁을 들어줬다.10여 년 전 주혁이 경찰서에 남겼던 지문을 받은 강한서는 곧 생체 인식 실험실에 보내 두 지문을 대조하도록 했다. 2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한지와 편지봉투에서는 주혁의 지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에 한현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냐? 그때 직접 손으로 나에게 건네줬었어. 심지어 장갑도 하지 않았는데, 지문이 안 나왔다고?”신우가 말했다. “여긴 여정이와 여정이 사수가 함께 만든 실험실이에요. 게다가 형사들과 자주 협력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문 대조 시스템은 여길 따라올 곳이 없어요. 한 번도 틀린 적 없었어요.”신우의 말은 지문 대조 결과가 틀렸을 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신우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이제 막 담배 한 대를 꺼내려던 그때, 손에 들린 담배가 강한서의 손에 내쳐져 툭,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신우: ???머리가 복잡했던 한현진은 두 사람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왜 없는 거지?”여전히 오리무중에 빠진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이미 눈치 채고 있은 듯 말했다. “혹시... 지금 그 사람은 애초부터 주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경찰에게 지문이 남아있을까 봐 그런 방법의 자신의 모든 지문을 지워버린 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강한서의 추측에 한현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너무 많이 앞서간 거 아냐? 기사님은 가족도 있고 아이도 있어. 만약 정말 사람이 바뀐 거라면 가족들은 눈치 채야 하는 거 아냐?”“데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 아무리 닮은 쌍둥이라고 해도 가족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어쩌면 가족들은 원래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지.”한현진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얼른 강한서에게 물었다.
“얼른 다시 가져와. 급히 쓸데가 있어.”강한서: ?“왜 그래?”한현진이 말했다. “전화로 얘기하긴 복잡한 일이야. 아무튼 얼른 전화해서 그림 다시 가져오라고 해. 만약 안 건드렸으면 못 건드리게ㅔ 하고 만약 꺼냈으면 얼른 다시 포장하라고 해. 내가 금방 갈게. 만나서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게.”강항서가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당장 다시 가져올게.”한현진은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화에서 한현진이 워낙 급하게 얘기한 탓에 강한서도 그녀가 걱정이라 손에 있던 일을 미리 마친 후 칼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나자마자 강한서를 본 한현진이 물었다. “기사님 아직 그림 안 넣었지?”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너무 일찍 얘기해서 넣지도 못한 상황이야. 네가 그림을 가진 후로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랍에서 일회용 장갑을 꺼내 낀 후 그림과 평지를 함께 꺼내 일회용 봉투에 넣었다. 한현진의 행동을 본 강한서의 눈가가 파를 뛰었다. “증거 수집해?”한현진은 봉토를 밀봉하며 말했다. “정말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일단 가직해 둬.”“대체 무슨 일이야?”한현진이 장갑을 벗고 나서야 강한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과 본인의 의심과 의혹을 얘기했다. “이번 주에 기사님께서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어. 그래서 재판장에서 지문 인식하는 걸 거부하는 거겠지. 만약 기사님이 전과범이고 회사에서 그 사람을 그대로 둔다면 기사님이 영향을 끼치는 것 나뿐만이 아니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내가 생각해봤는데 일단 지문을 수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일단 고여정 씨께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아봐. 그래야 만일이 사태에 대비를 하지.”한현진의 말을 들은 강한서가 의문을 제기했다. “주혁 씨의 지문은 이미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신상 조회를 하면 바로 나올 텐데 지문을 지우는 게 무슨 소용 있어?”한현진이 멈칫했다. “없을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