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갈등은 이사라가 남자친구인 진상현의 집에서 노란색 머리띠를 발견한 후 발생했다. 비록 진상현이 그 머리띠는 담배를 살 때 거스름돈으로 받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사라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 머리띠는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이었고 가격도 싸지 않았다. 판매량도 높은 물건이라 내놓으면 무조건 돈을 벌 수 있었기에 거스름돈으로 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남자에게 말이다. 그러니 그녀는 주변에 머리띠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 친구에게서 윤여령에게 똑같은 노란색 머리띠가 있었는데 1주일 전 잃어버렸다고 전해 들었다. 콧대가 높은 이사라는 진상현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물건을 건드리는 것은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특히 춤으로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윤여령은 더 신경이 쓰였다. 수업 후, 그녀는 윤여령을 가로막고 그 일에 대해 물었다. 윤여령은 당연히 부인했고 두 사람은 몸싸움을 일으켰다. 밀치는 도중 발을 헛디딘 윤여령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며 계단에 놓였던 유리를 깨뜨렸고 깨진 유리 파편에 그녀는 팔을 베었다. 윤여령은 병원으로 실려 갔고 이사라는 이 일 때문에 학교에서 경고 처분을 받았고 전교에 소문이 나면서 교환생 자격을 취소당했다. 집에서 그녀를 질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사라와 윤여령의 원한은 그로 인해 더 깊어졌다. 그러니 윤여령에게 독을 탄 뒤로, 많은 증언들이 그 사건에서 제일 혐의가 컸던 그녀를 가리켰다. 오늘 촬영할 장면은 바로 계단에서의 몸싸움 신이었다. 대사가 있는 부분은 문제가 없었고, 문제라면 송민영의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장면이었다. 이건 두 사람이 합을 맞추어야 했다. 유현진은 밀치는 동작을 해야 했고 송민영은 스스로 방향을 잘 조절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서 팔뚝의 피 주머니를 찔러야 했다. 배우의 운동신경이 중요한 장면이었다. 일반적으로 제작진은 배우에게 근접 촬영만 할 것은 요구했다. 먼 곳에서 촬영하는 계단 구르는 장면은 대역 배우가 완성해
샤워를 마친 윤여령은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샤워실에서 나오다 계단 모퉁이에서 이사라와 마주쳤다. 이사라는 아직도 연습복을 입고 곧게 서 있었다. 그들 모두 무용 전공이었지만, 그녀의 아우라는 다른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목도 길고 가늘어 서 있기만 해도 고고한 백조 같았다. 윤여령이 시야에 들어오자 이사라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윤여령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친구들과 자리를 피하려는데, 이사라가 윤여령을 불러세웠다. “잠깐만.”함께 있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지만 그녀가 누구를 부른 것인지는 몰랐다. 이사라가 윤여령 앞으로 걸어가 노란색 머리띠를 꺼내 태연하게 윤여령을 쳐다보며 물었다. “눈에 익지 않아?”윤여령이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머리띠를 알아보고 나지막이 이사라에게 말했다.“여령아, 이거 네가 며칠 전에 잃어버린 머리띠 아니야?”윤여령이 입술을 짓이기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것 아냐. 내 것은 학교 밖에서 잃어버렸어.”“공교롭네.”이사라의 시선이 슥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이것도 학교 밖에서 주운 거야.”옆에 있던 친구들도 그제야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러니 그곳엔 두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윤여령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갈아입은 옷을 안고 자리를 피하려는데 이사라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 물건 안 가져가?”윤여령이 미간을 찌푸렸다.“말했잖아. 내 것 아니라고.”“그럼 네 머리띠는?”“내가 말하지 않았어? 잃어버렸다고!”“잃어버려?”이사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 집 형편이라면, 이 머리띠. 너한텐 싼 물건은 아닐 텐데, 이렇게 비싼 물건을 네가 그렇게 쉽게 잃어버렸다고?”윤여령이 입술을 짓이겼다. “누구든 부주의할 때가 있잖아. 다른 일 없으면 난 갈게.”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자 이사라는 갑자기 반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상현아, 어쩐 일이야?”그 순간 윤여령은 멈칫했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일어난 사고에 모든 사람들이 아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창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다들 멍하니 서서 뭐 해, 얼른 부축하고, 의사 불러!”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급히 송민영에게 다가갔다. 송민영은 기이한 자세로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몸에 매달았던 피 주머니가 터져 온몸을 적셨고 이마에는 핏자국이 나 있었는데 피가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스태프들이 부축하려고 송민영을 잡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녀의 왼쪽 다리의 자세가 괴이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에 사람들은 감히 그녀를 부축하지 못하고 구급차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촬영장에 와있던 송민영의 팬들은 이미 그 광경에 충격을 받았고 자기 배우가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데도 아무도 부축하지 않자 바로 달려와 송민영을 살펴보려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유현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안창수는 행여 팬들이 소란을 피울까 안색이 어두웠다. 그는 사람을 시켜 팬들을 제지하면서 비서에게 얼른 유현진을 데리고 대기실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책임을 묻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송민영의 부상과 분노를 터뜨리는 팬이었다. 얼마 후,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고 송민영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유현진은 아무 말 없이 밴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송민영이 왜 굳이 이렇게 위험한 액션신을 직접 하겠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유현진은 송민영이 자신을 끌어들여 팬들에게 그녀가 왕따당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여 해묵은 원한을 풀려는 줄로만 알았다. 송민영이 자신을 이용해 그녀를 “다치게” 만들려는 것이 목적일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유현진이 알고 있는 송민영에게는 이런 짓을 벌일 용기가 없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연예인이었기에 자신의 외모를 소중하게 여겼다. 이렇게 자신을 다치게 해 목적을 달성하는 단순한 수단을, 유현진은 감히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크루즈 때처럼, 유현진이 송민영을 밀어 물에 빠뜨렸다고
유현진은 진희연이 시키는 대로 했다. 진희연은 유현진에게 페이스북의 댓글 기능을 잠시 꺼두라고 했다. 사건의 전말이 제대로 밝혀지기 전부터 일부 극단적인 팬들이 그녀의 페이스북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유현진이 페이스북을 열자 송민영이 다쳤다는 사실이 이미 실검에 올라 있었다.물론 그녀의 이름은 더 높은 실검 순위에 위치해 있었고 #송민영을 밀친 유현진#, #유현진 왕따#, #유현진 살해# 등이 태그되어 있었다. 페이스북에는 그녀가 손민영을 “밀친” 동영상들이 미친 듯이 나돌고 있었고 1시간 사이 조회수는 이미 몇백만이 되어 있었다.그 동영상은 유현진을 비스듬히 등지고 찍은 것인데 각도 선점이 굉장히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 각도에서는 송민영의 표정이 자세히 보였지만 유현진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유현진이 사람을 미는 행동은 똑똑히 찍고 있었다. 송민영은 떨어지는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송민영이 떨어진 뒤에도 계단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그녀의 냉담한 태도는 송민영 팬의 질타를 받았다. 심지어 송민영의 팬이 아닌 사람도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민 거야? 저건 살해야!」「민영 언니 떨어질 때 표정. 세상에, 완전 무방비 상태였잖아. 방금 유현진 편을 들면서 촬영장에서 준비된 액션이라고 말하던 사람 나와 봐. 정말 준비된 거였다면 민영 언니가 저런 표정이겠어?」「같은 여자끼리 어떻게 저렇게 독한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거죠?」「다들 알다시피 유재수는 오랫동안 민영 언니를 미워했었어. ‘비밀의 연인’ 때도 자주 실검을 조작하면서 민영 언니를 비하했잖아. 배우로 전향한 후엔 드라마가 방영될 때마다 꼭 민영 언니를 끌어들여 실검에 올랐잖아. 왜, 자기도 민영 언니 이름 없이는 실검에 오를 수 없다는 걸 알았나 보지?」「‘봄에 연인’도 원래 중전 역할을 하기로 했던 배우가 방송 정지를 먹은 게 다 유재수 양아버지 짓이라고 하더라고요. 민영 언니는 5년 동안 작은
유현진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진희연은 “네”라고 대답하면서도 그녀가 말을 듣지 않을까 봐 페이스북 앱을 삭제했다. 유현진도 굳이 그녀를 막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언니, 송민영 보호대 착용했었잖아요. 어떻게 다리가 부러진 거예요?”40개가 되는 계단이었고 보호 조치도 취한 상황에서 굴러떨어진 것이었는데 어떻게 다리가 부러질 수 있었을까. 도자기도 아니고 말이다. 진희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라고 쳐도 송민영의 부상은 너무 심각했다. 생각에 잠겼던 진희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잠깐만 있어요. 어디 좀 다녀올게요.”진희연이 가자마자 안창수와 함께 사람들이 들어왔다. 주연 배우가 다친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촬영장에 다친 것이니 촬영에도 지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작진에 대한 평가와 영화 상영에도 영향이 있었다. 안 그래도 송민영의 알레르기 사건과 방이진 사망 때문에 제작진은 이미 두 번이나 실검에 올랐었다. 촬영도 계속 미뤄지고 있는 와중에 송민영이 또 부상으로 입원했으니 정말 운이 더럽게 따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었다. 20여 년의 감독 생활 동안, 이렇게 다사다난한 경우는 처음이라 안창수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번 일이 이렇게 짧은 시간 사이에 회사 고위직에 계시는 분들까지 움직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이번 영화 제작사의 임원인 기태영이었다. 그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현장에 오자마자 유현진을 만나겠다고 했다. 안창수는 아직 자초지종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회사 임원의 요구를 한낱 감독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를 데리고 대기실로 향했다. 유현진은 안창수가 들어오자 몸을 일으켰다. “감독님.”안창수는 말이 없었고 그의 옆에 서 있던 40대쯤 되어 보이고 키는 170cm 정도 되는 깡마른 남자가 곁눈질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유현진 씨?”유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한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아마도 인터넷의 소식을 보고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유현진이 전화를 들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기태영이 눈짓을 하자, 한 남자가 갑자기 그녀의 휴대폰을 뺏어갔다. 유현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하시는 거죠?”“직접 올리시기를 거부하시니, 그럼 저희가 대신 올려드려야죠.” 그러더니 그녀의 휴대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유현진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피를 들어 상대방의 눈에 부어 버렸다. 눈에 커피가 들어간 기태영은 욕설을 퍼부으며 눈을 비볐다. 유현진은 단번에 자신의 휴대폰을 가로채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어떤 글을 올릴지는, 저희 소속사에서 알아서 해줄 겁니다. 제가 귀사와 체결한 계약은 상업 협력 계약이에요. 제 개인 계정까지 관리할 자격은 없으실 텐데요.”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다 한 것 같네요. 믿지 못하시겠으면 CCTV를 찾아 확인해 보세요. 인터넷에 올라 온 글만 보시고 조사도 없이 저를 질책하지 마시고요. 제가 맹세하는데, 만약 오늘 일이 제가 벌인 짓이라면, 전 곱게 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송민영이 계획적으로 벌인 일이라면, 다리가 부러져도 싸죠.”기태영은 분노로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는 뭔가 더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안창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 대표님, 아직 이런 얘기를 하기엔 좀 이른 것 같네요. 억지로 사과하게 했다가 만약 진실이 밝혀지면, 수습하기 더 어려울 겁니다.”기태영은 안창수의 손을 뿌리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참 좋은 배우를 고르셨네요!”돌아오던 진희연은 차가운 얼굴로 자리를 떠나는 기태영과 마주쳤다. 기태영을 쳐다보던 그녀는 시선을 거두어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현진을 보았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없는 동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진희연이 무슨 일인지 깊게 생각할 새도 없이 안창수가 유현진을 불러세우며 나지막이 말했다. “집에 가서 먼저 쉬고 있어요.
그는 유현진이 사람을 상대하는 수단에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뒷수습도 잘할 거라는 믿음은 없었다. 어르신 때문에 강민서를 혼쭐을 냈을 때든, 강연에서 유현아의 출생을 밝혔을 때든, 그녀는 너무 티가 났다. 전엔 일반인이라 상관이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 인지도가 있는 배우이니 그녀가 제때 수습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유현진이 눈을 감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연기만 잘하면 배우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열심히 일한 사람을 이상하게 여겼고 감사함과 기싸움은 많은 직장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여겼다. 송민영 한 사람의 실력으로는 절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여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악플이 흘러가는 흐름을 보며 그녀는 자신을 모함하는 것은 그저 보여지는 것뿐이고, 송민영이 진정으로 끌어내리려고 한 것은 “봄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수직 상승하는 시청률은 너무 많은 사람의 이익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니 “봄의 연인”의 조기 종영에 대한 여론은 여러 조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 바닥의 무서운 진면모를 알게 되었다. 진희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현진 씨, 기태영이 방금 뭐라고 했어?”유현진이 정신을 차리고 진희연의 말에 대답했다. “그 골초처럼 생긴 남자가 기태영이에요?”진희연: ...이 묘사는... 꽤 어울렸다. “그 사람은 태상 엔터의 주주예요. 태상 영화사 책임자 중 한 명이기도 하죠. 기태영은 홍보관 출신이라 상당히 예민하고 수단도 악랄한 편이에요. 젊은 시절 홍보관을 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고, 나중에 태상으로 들어가면서 주주가 되었죠.”진희연이 나지막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기태영에게 또 다른 신분이 있어요. 말하면 현진 씨도 알 거예요.”유현진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무슨 신분이요?”진희연이 덤덤하게 말했다. “한세정 남편이요.”유현진: ...‘태상의 주주라, 어쩐지 한세정에게 그렇게 많은 작품을
그들은 그녀의 소속사에서 만들어 준 것이 아닌 이런 사과문을 그녀가 절대 업로드 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굳이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유현진은 휴대폰을 움켜쥐고 생각에 잠겼다. 강한서가 보내온 주소는 포레스트 섬의 한 별장이었다. 그녀가 도착하자, 민경하가 이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별장은 할머니가 강한서의 30살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고 올해 봄에서야 인테리어를 끝냈다. 인테리어도 그녀가 할머니와 함께 인테리어 회사와 스타일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별장의 인테리어가 끝날 때쯤 그녀와 강한서의 결혼도 끝나 버렸다. 그러니 그녀는 인테리어가 완성된 후 처음으로 와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지금 이 별장의 인테리어를 감상할 기분 같은 건 별로 없었다. 민경하는 유현진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거실에 들어가자마자 벽에 걸린 커다란 웨딩 사진이 눈에 띄었다. 아름드리 펜션에 걸린 것과 같은 사진이었지만 이 사진이 한눈에 봐도 훨씬 컸다. 유현진: ...민경하가 말했다. “이 별장은 연초에 이미 인테리어가 끝났었어요. 하지만 이 사진을 제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죠. 대표님께서는 원래 사모님을 이 별장으로 모셔서 함께 살 계획이었어요. 여긴 사모님이 계신 곳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더 조용하거든요.”잠시 말이 없던 유현진이 물었다. “강한서가 매달 민 실장님한테 저희 사이를 좋아지게 만드는 것에 관해서 보너스라도 더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민경하는 강한서를 어떻게 칭찬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늘 유현진의 마음에 와닿는 얘기만 꺼냈다. 민경하가 작게 웃어 보였다. “그건 없어요. 하지만 사모님께서 원하신다면, 저 대신 대표님께 신청해 주세요.”유현진: ...‘낯가죽이 꽤 두껍네.’그때, 송민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유현진에게 일이 생겼을 때, 그는 호텔에서 바쁘게 가족 연회 현장을 꾸미고 있었다. 그의 휴대폰은 충전하고 있었던 터라 일을 마친 뒤에야 이준에게서 여러 통의 전화가
한현진은 반나절이 걸려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난번 홍혜림 씨 사건이 있었을 때 왜 진윤 씨가 갑자기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키나 했더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잖아.’순간 한현진은 뻘쭘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금 전화를 받고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입도 벙긋하지 말았어야 했다. 진윤의 말처럼 이건 정말 비열한 짓이었다. 유치한 강한서가 벌일 만한 일이 맞긴 한 것 같았다. 강한서 본인 역시 이번 일은 너무 얍삽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어쩌다 아이를 달래주었다.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라고 해. [정상에서]에서 지금 자체 테스트 중인 스킨 한 세트 줄게. 어때?”진윤이 작게 울먹이며 말했다. “스킨 세 세트?“강한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 딜을 하는 걸 보니 그리 큰 상처를 받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 세트 전부 줄게.”진윤이 곧바로 울음을 멈췄다. 절판되어 더는 살 수 없는 게임 스킨과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신 중 아무리 바보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요. 제가 오해한 거라고 하죠.”말하며 한현진을 쳐다보던 진윤은 여전히 아쉬워하며 말했다. “현진 누나,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셨어요. 남자 때문에 손에 넣었던 트로피도 놓칠 수가 있어요.”강한서의 눈가가 파르르 뛰었다. “결혼이 커리어 영향주지 않아. 이간질 하려고 하지 마.”“형님은 남자니까 당연히 영향을 안 받으시겠죠.”강한서에게 농락을 당한데다 하루아침에 구닥다리에게 여신을 뺐긴 진윤은 누구보다 빨리 흑화 했다. “결혼하면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어떤 유명한 감독이 임산부를 캐스팅하려고 하겠어요. 제일 예쁠 나이를 남편과 아이에게 바치면 나중에 아이가 클 때쯤엔 본인의 레전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요. 제가 다 아쉬워서 그래요. 너무 불공평해요.”비록 진윤은 그저 이간질을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은 현실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커리어엔 고난과 역경이
한현진: ?강한서가 들고 있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차미주의 목소리였다. “현진아! 너 내연녀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그 상대가 네 사촌 동생이래.”강한서: ?강한서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그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전여친, 현여친이 뭐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이 목소리,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거지?’“저... 저기 혹시 전화 잘못 하신 거 아녜요?”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곳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 현진 누나?”한현진이 멍해졌다. ‘날 알아?’“네. 제가 한현진이예요. 누구세요?”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그저 조금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무슨 일이야?”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화 받은 사람 누구예요!”강한서가 말했다. “내 와이프.”“그럴 리가 없어!”진윤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 사생팬 같은 아저씨가! 혹시 일부러 날 속이려고 옆에 성대모사하는 분이라고 모셔놓은 거 아녜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너처럼 유치한 인간인 줄 알아? 그리고 현진이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어.”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거짓말 좀 그만 해요. 현진 누나는 지금 그 티베탄 마스티프와 데이트하는 중이라고요. 만약 누나가 정말 형님 와이프라면 형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나가 딴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지켜볼 수 있어요?”더 이상 진윤을 대꾸하기 귀찮았던 강한서가 그에게 영상통화를 보냈다. 몇뿐 후, 휴대폰 화면으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여신과 딱 붙어 앉아있는 전남편 형님을 확인한 진윤은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비춰진 진윤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윤 씨가 강한서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야?’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어댔다. “거짓말쟁이! 뻔뻔한 인간! 전
유난히 예쁘게 잘 나온 사진을 보며 한 현지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온 것 같다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강한서는 굳이 자신이 찍겠다면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한현진이 눈을 실룩거렸다. “네가 사진을 찍겠다고? 168cm인 나를 138cm로 만들어 버리는 네가? 강 대표님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강한서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별로야?”한현진이 말했다. “쌀을 뿌린 휴대폰을 닭이 부리로 쪼아도 내가 찍은 것 보단 낫다고 할 수 있어.”왠지 수치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강한서가 이를 악 물면 말했다. “그럼 난 왜 우리가 데이트했을 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밤새도록 보고 있었던 거야?”강한서가 괜히 그 얘기를 꺼낸 탓에 잊혀 가던 한현진의 기억이 문득 돌아왔다.“사진을 보면서 넌 그저 사진을 찍을 줄 모르는 것뿐이라고 날 설득 하지 않는다면 호텔 앞에서 바로 너와 싸우 버릴 것 같았거든. 내 외모에, 감독님께서도 나에게 각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하셨는데 넌 대체 어떻게 날 사실 눈으로 찍을 수 있었던 거야?”강한서: ...“사시눈... 처럼 나왔어?”한현진이 일을 악물었다. “내가 뛰어다니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니까 유체 이탈한 것처럼 찍어줬잖아! 내가 피드를 업로드할 때 실수로 그 사진까지 넣었더니 애들이 나한테 대체 어디서 이런 심령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었어.”“...”활활 타오르던 강한서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쩌다 가끔... 몇 십 장뿐이었잖아.”한현진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뭔가를 말하려던 강한서가 고개를 숙이자 무릎 정도까지 오는 어린 아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아직 더 놀 거예요? 저희 잠깐 놀게 해주시면 안 돼요?”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뒤에는 어린 라이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한현진: ...창피함에 고개
“하하하.”한현진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오빠. 제가 티슈 없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핑계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여 아내를 따라 염치 없이 말했다. “형님, 저도 없어요.”송민준이 가방과 티슈를 두 사람에게 던지며 강한서를 노려보았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겼다. 한현진: ...“오빠가 나한테 화 난 건 아니겠지?”강한서가 우울하게 말했다. “너보단 날 먼저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네 오빠가 아무리 너에게 화가 나도 결국은 나에게 그 화살이 돌아올 거야.”한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네.”강한서: ?한현진이 그의 손을 잡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빠가 널 탐탁지 않아 한게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오늘 이 일로 크게 달라지진않을 거야.”“...”‘행복은 본인이 누리고 잘못은 내가 뒤집어쓰고. 정말 좋은 아내네.’강한서는 한현진을 데리고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입덧이 끝난 이후로 한현진의 식욕은 줄곧 안정적이었다. 매 끼니마다 많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지만 배고픔도 빨리 찾아왔기에 하루에 몇 끼씩 먹어야 했다. 그 덕에 지금의 한현진은 송아지처럼 튼튼하기만 했다. 강한서는 임신한 한현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했지만 한현진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다. 그의 주변엔 임산부가 많이 없었지만 많은 아내들이 임신 후 남편을 괴롭힌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현진에겐 모든 임신의 호르몬 변화가 거짓말처럼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 의사는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큰 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강한서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자주 다니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한현진은 정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조금 유치해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현진은 강한서의 팔을 끌며 굳이 아이들의 흔들 목마에게 타게 해달라며 떼를 썼다.
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채영 언니.”문채영이 가방에서 포장한 선물 박스를 건넸다. “첫 만남이라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몰라 제가 직접 향낭을 만들었어요. 향 맡아봐요.”한현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언니도 조향하세요?”문채영이 미소 지었다. “제가 조향에 입문하게 된 것도 민준이 덕분이었어요. 전엔 이런 거 만드는 거 좋아했었거든요.”한현진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조향하는 송민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줄곧 송민준은 그쪽으론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불쾌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주문부터 해. 배고파.”멈칫하던 문채영이 시선을 내려 눈에 맴도는 서운함을 숨겼다. 한현진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언니, 오랜만에 오셨을 텐데 오늘은 한주 음식으로 드시는 게 어때요?”문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현진 씨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해요.”주문한 음식 서빙을 마치고 룸을 나서려는 종업원에게 송민준이 갑자기 말했다. “장어 국수도 주문할게요.”문채영이 힐끗 송민준을 쳐다보자 시선을 올린 그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지.”‘그래, 환영회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고 하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하고 많은 국수 중에 왜 하필 장어 국수야?’‘오빠가 장어 국수라고 말할 때 언니 표정을 보면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장어 국수와 관련된 스토리가 있었던 건가?’호기심이 활활 불타오른 한현진이 몰래 테이블 아래로 강한서의 손을 꼬집었다. 그러자 강한서는 그녀에게 새우를 발라 주었다. 한현진: ...강한서과 문채영은 너무 친한 사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한현진은 문채영의 외할머니와 강한서의 할머니가 먼 친척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촌수가 먼 사이라 피가 거의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지낸지 한참 후에야 두 가문이 몇 세대 전에는 친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현진이 고개를 들자 옆에 서 있는 벤틀리가 보였다. 송민준이 운전석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차창은 닫혀 있었으니 송민준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강한서의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를 세운지 한참이 지나도 두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송민준은 강한서가 또 이상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송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놓고 그녀의 옷을 정리하며 단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민경하는 은연 중에 자신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서 내린 송민준은 카키색의 캐주얼한 외투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평소 한열이 자주하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고 선글라스를 콧등에 걸친 채 입술을 앙다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긴 다리의 그가 우뚝 서 있으니 카리스마와 매력이 흘러넘쳤다. 전엔 그가 한열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런 차림에 선글라스까지 쓴 모습을 보니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그를 한열로 착각할 것도 같았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이 가방을 메고 송민준을 향해 걸어갔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멋져요?”송민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언제 안 멋진 적이 있었어?”한현진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어떤 날이든 멋지긴 하죠. 그래서 언제 데뷔할 생각이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건네받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난 열이와 캐릭터가 너무 비슷해. 내가 데뷔하면 연예계에 걔 자리가 있긴 할 것 같아?”한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송민준은 손을 들어 검지로 콧등에 걸린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강한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쟨 차에서 뭐하는 거야?”“업무 통화 중이예요.”송민준이 한현진의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한현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우린 먼저 올라가는 게 좋겠어. 혼자 미적거리라고 해.”룸에 도착하자 송민준은 그제야 물었다. “너희 두 사람, 대체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이렇
한현진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한서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 약해질 줄 알았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한현진이 말했다. “처음엔 마음이 약해졌는데 조금 전 불쾌한 일이 있었거든.”한현진은 간단하게 주혁이 무릎 꿇은 일을 서술했다. “난 사실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어. 하지만 꿇어앉아 있는 기사님 모습을 본 순간 화가 치밀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날 강박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 기회를 빌려 바로 전근시켰어.”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 처리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 기사님은 지금 아들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돈이 부족한 상황이거든. 전근하면 월급은 당연히 전보다 줄어들 텐데.”강한서가 한현진의 손등을 토닥였다.“인공 달팽이관은 보청기와 비슷한 거야.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아니니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당장 급할 건 없어. 하지만 굳이 너를 속여 가며 부업을 하려고 했어. 난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멈칫한 한현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기사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강한서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릎을 꿇고 자존심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신의 존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걸 거야. 전근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어. 네가 그 사람을 곁에 두는 건 내가 불안해.”강한서는 한현진의 손을 잡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 약해지지 마. 네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난 심장이 떨려.”“휴. 신세를 지기도 했고 기사님 집에는 장애인이 두 명이나 있잖아. 안타까워서 그러지. 내가 언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는거 봤어? 난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강한서는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강운이에겐 마음 약하게 굴었잖아.”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려는 강한서의 태도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불쌍해 보이는 주 변호사님 외모
한현진이 민경하를 살펴보았다.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얼마 전 야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 아냐? 신제품 발표회도 마무리 됐으니 이젠 좀 쉬게 해줘야지. 민 실장님이 쓰러지면 나중에 너만 고생할 거야.”강한서가 한현진에게 텀블러를 건넸다. “내가 부하 직원 생사도 나 몰라라 하는 그런 대표 같아? 민 실장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휴가 줄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괜찮아요, 사모님. 저 건강해요. 휴가 필요 없어요.”만약 평소였다면 휴가를 주겠다는 강한서의 말에 당연히 쉬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 상황을 겪고 나니 지금의 민경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민경하가 강민서와 밤낚시를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된 강한서는 한현진과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얼마나 갔을까, 강한서가 입을 열었다. “밤낚시... 몇 명이 가는 거예요?”민경하가 말했다. “밤낚시 모임이 있어요. 아마 20명 정도 있을 거예요. 다들 스케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을 땐 8명에서 10명 정도 모여요. 적을 땐 4, 5명이 만날 때도 있고요.”“그래요.”단답으로 대답한 강한서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민경하에게 물었다. “밤새 낚시하면 피고하지 않아요?”민경하가 말했다. “텐트가 있어서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면 돼요.”강한서가 또 다시 “그래요”라며 단답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가 또 물었다. “두 사람... 같은 텐트에서 자요?”“...”그 질문에 민경하는 바짝 긴장했다. 어쩐지 그 어떤 대답도 목숨을 걸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4, 5명이면 텐트 2개를 사용해요. 피곤한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쉬고요.”강한서는 더는 말이 없었다. 5분 후. “두 사람 같이 쉰 적 있어요?”“...”‘같이 잤냐고 묻는 일만 남았네.’민경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누워서 얘기만 좀 나눴어요.”“그래요.”10분 후. “얘기만 조금 나눈게 전부예요?”민
남자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해금이 또 말을 이었다. “당신이 뿌리를 제대로 뽑지 못해 이렇게 큰 후환을 남기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람이 처지도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을 거야.”서해금이 말한 후환은 당연히 한현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현진 말이 나오자 남자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다.그 여자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일은 그 역시도 송씨 가문에서 한현진을 데려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당시 그 여자가 품에 안아 보여주던 여자 아이는 애초부터 송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다른 곳에서 죽은 아이를 안아와 한아람의 딸이라고 그를 속였던 것이다.친딸이 태어나는 모습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그는 곧 자신의 친딸에게 인생을 빼앗길 아이를 마주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그는 심지어 아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포섭당한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졌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한현진이 죽지 않았으니 송씨 가문이나 한씨 가문에서는 기필코 당시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서해금은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화근을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전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기에 아무리 쥐 잡듯이 뒤져도 그 해의 진실은 알아내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서해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한현진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쓸데없는 짓해서 괜한 의심 사지 마. 걔는 걔 엄마랑 똑같아. 의리가 치명적인 약점이거든. 잠깐만 조용히 지내.”잠시 멈칫하던 서해금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내 지시 없이 함부로 회사에 나타나지 마. 회사는 여기저기 보는 눈이 많아. 조그만 실수라도 있었다간 우리 가족 전부 끝장이라고.”우리 가족이라는 두 단어에 남자는 그만 멍해졌다. 그의 눈빛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