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갈등은 이사라가 남자친구인 진상현의 집에서 노란색 머리띠를 발견한 후 발생했다. 비록 진상현이 그 머리띠는 담배를 살 때 거스름돈으로 받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사라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 머리띠는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이었고 가격도 싸지 않았다. 판매량도 높은 물건이라 내놓으면 무조건 돈을 벌 수 있었기에 거스름돈으로 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남자에게 말이다. 그러니 그녀는 주변에 머리띠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 친구에게서 윤여령에게 똑같은 노란색 머리띠가 있었는데 1주일 전 잃어버렸다고 전해 들었다. 콧대가 높은 이사라는 진상현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물건을 건드리는 것은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특히 춤으로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윤여령은 더 신경이 쓰였다. 수업 후, 그녀는 윤여령을 가로막고 그 일에 대해 물었다. 윤여령은 당연히 부인했고 두 사람은 몸싸움을 일으켰다. 밀치는 도중 발을 헛디딘 윤여령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며 계단에 놓였던 유리를 깨뜨렸고 깨진 유리 파편에 그녀는 팔을 베었다. 윤여령은 병원으로 실려 갔고 이사라는 이 일 때문에 학교에서 경고 처분을 받았고 전교에 소문이 나면서 교환생 자격을 취소당했다. 집에서 그녀를 질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사라와 윤여령의 원한은 그로 인해 더 깊어졌다. 그러니 윤여령에게 독을 탄 뒤로, 많은 증언들이 그 사건에서 제일 혐의가 컸던 그녀를 가리켰다. 오늘 촬영할 장면은 바로 계단에서의 몸싸움 신이었다. 대사가 있는 부분은 문제가 없었고, 문제라면 송민영의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장면이었다. 이건 두 사람이 합을 맞추어야 했다. 유현진은 밀치는 동작을 해야 했고 송민영은 스스로 방향을 잘 조절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서 팔뚝의 피 주머니를 찔러야 했다. 배우의 운동신경이 중요한 장면이었다. 일반적으로 제작진은 배우에게 근접 촬영만 할 것은 요구했다. 먼 곳에서 촬영하는 계단 구르는 장면은 대역 배우가 완성해
샤워를 마친 윤여령은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샤워실에서 나오다 계단 모퉁이에서 이사라와 마주쳤다. 이사라는 아직도 연습복을 입고 곧게 서 있었다. 그들 모두 무용 전공이었지만, 그녀의 아우라는 다른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목도 길고 가늘어 서 있기만 해도 고고한 백조 같았다. 윤여령이 시야에 들어오자 이사라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윤여령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친구들과 자리를 피하려는데, 이사라가 윤여령을 불러세웠다. “잠깐만.”함께 있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지만 그녀가 누구를 부른 것인지는 몰랐다. 이사라가 윤여령 앞으로 걸어가 노란색 머리띠를 꺼내 태연하게 윤여령을 쳐다보며 물었다. “눈에 익지 않아?”윤여령이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머리띠를 알아보고 나지막이 이사라에게 말했다.“여령아, 이거 네가 며칠 전에 잃어버린 머리띠 아니야?”윤여령이 입술을 짓이기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것 아냐. 내 것은 학교 밖에서 잃어버렸어.”“공교롭네.”이사라의 시선이 슥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이것도 학교 밖에서 주운 거야.”옆에 있던 친구들도 그제야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러니 그곳엔 두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윤여령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갈아입은 옷을 안고 자리를 피하려는데 이사라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 물건 안 가져가?”윤여령이 미간을 찌푸렸다.“말했잖아. 내 것 아니라고.”“그럼 네 머리띠는?”“내가 말하지 않았어? 잃어버렸다고!”“잃어버려?”이사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 집 형편이라면, 이 머리띠. 너한텐 싼 물건은 아닐 텐데, 이렇게 비싼 물건을 네가 그렇게 쉽게 잃어버렸다고?”윤여령이 입술을 짓이겼다. “누구든 부주의할 때가 있잖아. 다른 일 없으면 난 갈게.”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자 이사라는 갑자기 반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상현아, 어쩐 일이야?”그 순간 윤여령은 멈칫했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일어난 사고에 모든 사람들이 아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창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다들 멍하니 서서 뭐 해, 얼른 부축하고, 의사 불러!”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급히 송민영에게 다가갔다. 송민영은 기이한 자세로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몸에 매달았던 피 주머니가 터져 온몸을 적셨고 이마에는 핏자국이 나 있었는데 피가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스태프들이 부축하려고 송민영을 잡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녀의 왼쪽 다리의 자세가 괴이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에 사람들은 감히 그녀를 부축하지 못하고 구급차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촬영장에 와있던 송민영의 팬들은 이미 그 광경에 충격을 받았고 자기 배우가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데도 아무도 부축하지 않자 바로 달려와 송민영을 살펴보려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유현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안창수는 행여 팬들이 소란을 피울까 안색이 어두웠다. 그는 사람을 시켜 팬들을 제지하면서 비서에게 얼른 유현진을 데리고 대기실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책임을 묻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송민영의 부상과 분노를 터뜨리는 팬이었다. 얼마 후,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고 송민영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유현진은 아무 말 없이 밴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송민영이 왜 굳이 이렇게 위험한 액션신을 직접 하겠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유현진은 송민영이 자신을 끌어들여 팬들에게 그녀가 왕따당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여 해묵은 원한을 풀려는 줄로만 알았다. 송민영이 자신을 이용해 그녀를 “다치게” 만들려는 것이 목적일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유현진이 알고 있는 송민영에게는 이런 짓을 벌일 용기가 없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연예인이었기에 자신의 외모를 소중하게 여겼다. 이렇게 자신을 다치게 해 목적을 달성하는 단순한 수단을, 유현진은 감히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크루즈 때처럼, 유현진이 송민영을 밀어 물에 빠뜨렸다고
유현진은 진희연이 시키는 대로 했다. 진희연은 유현진에게 페이스북의 댓글 기능을 잠시 꺼두라고 했다. 사건의 전말이 제대로 밝혀지기 전부터 일부 극단적인 팬들이 그녀의 페이스북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유현진이 페이스북을 열자 송민영이 다쳤다는 사실이 이미 실검에 올라 있었다.물론 그녀의 이름은 더 높은 실검 순위에 위치해 있었고 #송민영을 밀친 유현진#, #유현진 왕따#, #유현진 살해# 등이 태그되어 있었다. 페이스북에는 그녀가 손민영을 “밀친” 동영상들이 미친 듯이 나돌고 있었고 1시간 사이 조회수는 이미 몇백만이 되어 있었다.그 동영상은 유현진을 비스듬히 등지고 찍은 것인데 각도 선점이 굉장히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 각도에서는 송민영의 표정이 자세히 보였지만 유현진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유현진이 사람을 미는 행동은 똑똑히 찍고 있었다. 송민영은 떨어지는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송민영이 떨어진 뒤에도 계단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그녀의 냉담한 태도는 송민영 팬의 질타를 받았다. 심지어 송민영의 팬이 아닌 사람도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민 거야? 저건 살해야!」「민영 언니 떨어질 때 표정. 세상에, 완전 무방비 상태였잖아. 방금 유현진 편을 들면서 촬영장에서 준비된 액션이라고 말하던 사람 나와 봐. 정말 준비된 거였다면 민영 언니가 저런 표정이겠어?」「같은 여자끼리 어떻게 저렇게 독한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거죠?」「다들 알다시피 유재수는 오랫동안 민영 언니를 미워했었어. ‘비밀의 연인’ 때도 자주 실검을 조작하면서 민영 언니를 비하했잖아. 배우로 전향한 후엔 드라마가 방영될 때마다 꼭 민영 언니를 끌어들여 실검에 올랐잖아. 왜, 자기도 민영 언니 이름 없이는 실검에 오를 수 없다는 걸 알았나 보지?」「‘봄에 연인’도 원래 중전 역할을 하기로 했던 배우가 방송 정지를 먹은 게 다 유재수 양아버지 짓이라고 하더라고요. 민영 언니는 5년 동안 작은
유현진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진희연은 “네”라고 대답하면서도 그녀가 말을 듣지 않을까 봐 페이스북 앱을 삭제했다. 유현진도 굳이 그녀를 막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언니, 송민영 보호대 착용했었잖아요. 어떻게 다리가 부러진 거예요?”40개가 되는 계단이었고 보호 조치도 취한 상황에서 굴러떨어진 것이었는데 어떻게 다리가 부러질 수 있었을까. 도자기도 아니고 말이다. 진희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라고 쳐도 송민영의 부상은 너무 심각했다. 생각에 잠겼던 진희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잠깐만 있어요. 어디 좀 다녀올게요.”진희연이 가자마자 안창수와 함께 사람들이 들어왔다. 주연 배우가 다친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촬영장에 다친 것이니 촬영에도 지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작진에 대한 평가와 영화 상영에도 영향이 있었다. 안 그래도 송민영의 알레르기 사건과 방이진 사망 때문에 제작진은 이미 두 번이나 실검에 올랐었다. 촬영도 계속 미뤄지고 있는 와중에 송민영이 또 부상으로 입원했으니 정말 운이 더럽게 따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었다. 20여 년의 감독 생활 동안, 이렇게 다사다난한 경우는 처음이라 안창수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번 일이 이렇게 짧은 시간 사이에 회사 고위직에 계시는 분들까지 움직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이번 영화 제작사의 임원인 기태영이었다. 그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현장에 오자마자 유현진을 만나겠다고 했다. 안창수는 아직 자초지종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회사 임원의 요구를 한낱 감독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를 데리고 대기실로 향했다. 유현진은 안창수가 들어오자 몸을 일으켰다. “감독님.”안창수는 말이 없었고 그의 옆에 서 있던 40대쯤 되어 보이고 키는 170cm 정도 되는 깡마른 남자가 곁눈질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유현진 씨?”유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한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아마도 인터넷의 소식을 보고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유현진이 전화를 들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기태영이 눈짓을 하자, 한 남자가 갑자기 그녀의 휴대폰을 뺏어갔다. 유현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하시는 거죠?”“직접 올리시기를 거부하시니, 그럼 저희가 대신 올려드려야죠.” 그러더니 그녀의 휴대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유현진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피를 들어 상대방의 눈에 부어 버렸다. 눈에 커피가 들어간 기태영은 욕설을 퍼부으며 눈을 비볐다. 유현진은 단번에 자신의 휴대폰을 가로채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어떤 글을 올릴지는, 저희 소속사에서 알아서 해줄 겁니다. 제가 귀사와 체결한 계약은 상업 협력 계약이에요. 제 개인 계정까지 관리할 자격은 없으실 텐데요.”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다 한 것 같네요. 믿지 못하시겠으면 CCTV를 찾아 확인해 보세요. 인터넷에 올라 온 글만 보시고 조사도 없이 저를 질책하지 마시고요. 제가 맹세하는데, 만약 오늘 일이 제가 벌인 짓이라면, 전 곱게 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송민영이 계획적으로 벌인 일이라면, 다리가 부러져도 싸죠.”기태영은 분노로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는 뭔가 더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안창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 대표님, 아직 이런 얘기를 하기엔 좀 이른 것 같네요. 억지로 사과하게 했다가 만약 진실이 밝혀지면, 수습하기 더 어려울 겁니다.”기태영은 안창수의 손을 뿌리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참 좋은 배우를 고르셨네요!”돌아오던 진희연은 차가운 얼굴로 자리를 떠나는 기태영과 마주쳤다. 기태영을 쳐다보던 그녀는 시선을 거두어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현진을 보았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없는 동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진희연이 무슨 일인지 깊게 생각할 새도 없이 안창수가 유현진을 불러세우며 나지막이 말했다. “집에 가서 먼저 쉬고 있어요.
그는 유현진이 사람을 상대하는 수단에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뒷수습도 잘할 거라는 믿음은 없었다. 어르신 때문에 강민서를 혼쭐을 냈을 때든, 강연에서 유현아의 출생을 밝혔을 때든, 그녀는 너무 티가 났다. 전엔 일반인이라 상관이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 인지도가 있는 배우이니 그녀가 제때 수습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유현진이 눈을 감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연기만 잘하면 배우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열심히 일한 사람을 이상하게 여겼고 감사함과 기싸움은 많은 직장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여겼다. 송민영 한 사람의 실력으로는 절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여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악플이 흘러가는 흐름을 보며 그녀는 자신을 모함하는 것은 그저 보여지는 것뿐이고, 송민영이 진정으로 끌어내리려고 한 것은 “봄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수직 상승하는 시청률은 너무 많은 사람의 이익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니 “봄의 연인”의 조기 종영에 대한 여론은 여러 조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 바닥의 무서운 진면모를 알게 되었다. 진희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현진 씨, 기태영이 방금 뭐라고 했어?”유현진이 정신을 차리고 진희연의 말에 대답했다. “그 골초처럼 생긴 남자가 기태영이에요?”진희연: ...이 묘사는... 꽤 어울렸다. “그 사람은 태상 엔터의 주주예요. 태상 영화사 책임자 중 한 명이기도 하죠. 기태영은 홍보관 출신이라 상당히 예민하고 수단도 악랄한 편이에요. 젊은 시절 홍보관을 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고, 나중에 태상으로 들어가면서 주주가 되었죠.”진희연이 나지막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기태영에게 또 다른 신분이 있어요. 말하면 현진 씨도 알 거예요.”유현진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무슨 신분이요?”진희연이 덤덤하게 말했다. “한세정 남편이요.”유현진: ...‘태상의 주주라, 어쩐지 한세정에게 그렇게 많은 작품을
그들은 그녀의 소속사에서 만들어 준 것이 아닌 이런 사과문을 그녀가 절대 업로드 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굳이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유현진은 휴대폰을 움켜쥐고 생각에 잠겼다. 강한서가 보내온 주소는 포레스트 섬의 한 별장이었다. 그녀가 도착하자, 민경하가 이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별장은 할머니가 강한서의 30살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고 올해 봄에서야 인테리어를 끝냈다. 인테리어도 그녀가 할머니와 함께 인테리어 회사와 스타일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별장의 인테리어가 끝날 때쯤 그녀와 강한서의 결혼도 끝나 버렸다. 그러니 그녀는 인테리어가 완성된 후 처음으로 와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지금 이 별장의 인테리어를 감상할 기분 같은 건 별로 없었다. 민경하는 유현진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거실에 들어가자마자 벽에 걸린 커다란 웨딩 사진이 눈에 띄었다. 아름드리 펜션에 걸린 것과 같은 사진이었지만 이 사진이 한눈에 봐도 훨씬 컸다. 유현진: ...민경하가 말했다. “이 별장은 연초에 이미 인테리어가 끝났었어요. 하지만 이 사진을 제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죠. 대표님께서는 원래 사모님을 이 별장으로 모셔서 함께 살 계획이었어요. 여긴 사모님이 계신 곳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더 조용하거든요.”잠시 말이 없던 유현진이 물었다. “강한서가 매달 민 실장님한테 저희 사이를 좋아지게 만드는 것에 관해서 보너스라도 더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민경하는 강한서를 어떻게 칭찬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늘 유현진의 마음에 와닿는 얘기만 꺼냈다. 민경하가 작게 웃어 보였다. “그건 없어요. 하지만 사모님께서 원하신다면, 저 대신 대표님께 신청해 주세요.”유현진: ...‘낯가죽이 꽤 두껍네.’그때, 송민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유현진에게 일이 생겼을 때, 그는 호텔에서 바쁘게 가족 연회 현장을 꾸미고 있었다. 그의 휴대폰은 충전하고 있었던 터라 일을 마친 뒤에야 이준에게서 여러 통의 전화가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