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별문제가 없다고 거듭 말했지만, 현빈은 끝까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성현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고 나는 임신한 일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래서 성현이 병실로 뛰어왔을 때, 나는 이미 그에게 질문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성현은 내가 무슨 목적이 있다고 의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내가 성현에게 잘해주면 그는 내가 부탁할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우리의 빈부 차이가 크기 때문에 애당초 아무리 사랑해도 성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나에 대한 경멸을 지울 수 없었다.이번에도 성현은 내가 칩을 준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낙태에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할머니는 잘 보호하지 못했지만, 이 아이는 지키려고 마음을 먹었다.하지만 성현이 루틴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성현은 조용히 문을 열었는데, 나를 놀라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그의 얼굴에는 기쁨과 놀라움이 가득했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사랑에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서, 침묵 속에서 성현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성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희연아, 오늘 일 들었어, 내가 잘못했어, 할머니 무덤에 주혜가 갈 줄은 몰랐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성현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내가 전에 당신을 화나게 한 거 잘 알아, 앞으로 주혜랑 멀리할게, 걔네 집에 가서 확실하게 말할 테니까, 우리 앞으로 잘 지내면서 아이도 함께 잘 키우자. 응?”성현은 말할 때 나를 보지 않았지만, 눈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나는 그저 성현을 보며 지난 몇 년간 수없이 그랬듯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성현의 희망찬 눈빛에 나는 칼을 꽂았다.“성현, 너 지금의 모습 정말 날 역겹게 해.”멍하니 있던 성현의 얼굴에 웃음기가 아직 남아 있는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났다.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시간을 줄 기분이 아니었다.“자기가 한 짓이 도를 넘은 걸 알면서도 했잖아,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 해?
떠난 후, 나는 현빈의 도움으로 방을 얻었고 다행히 요 몇 년 동안 줄곧 성현을 따라다녔지만, 대학교 때 열심히 공부해서 배운 지식을 잊지 않고 있었다.현빈의 도움으로, 나는 그의 친구에게서 일자리를 얻어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었다.나는 할머니를 묻기 위해 묘지를 새로 샀고 그동안 정신을 차린 성현이 내게 수없이 사과와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왔다.그래서 나는 소셜 앱을 다 차단했다. 그러나 성현은 포기하지 않고 내가 남긴 이혼 서류를 찢었고 계정을 바꿔가서 사과했다.참다못한 나는 결국 몇 년 동안 쓰던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기로 결심했고, 과거와 완전히 작별할 수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배는 점점 더 부풀어 왔고 가게의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게 되었다.가게 점장이 현빈의 친구여서 나에게 많은 일을 시키지 않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월급을 받는 것이 부끄러워 집으로 돌아가 온라인 일을 하는 것을 선택했다.그런데 일을 그만둔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집 앞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얼굴을 만났다.현빈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큰 봉지를 들고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왜 여기 있어요? 성현이 오라고 했어요?”현빈은 고개를 저으며 신발을 갈아 신은 후 집 안으로 들어갔다.“저 회사를 그만뒀어요. 사장님께서 미치셔서 사람 살 곳이 아니에요.”현빈의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떠난 후, 성현이 다른 사람이 됐다는 것을 말이다.성현은 미친 듯이 내의 흔적을 찾았고, 모든 책임을 주혜에게 돌렸다.두 사람이 친했던 만큼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그러나 성현은 화가 풀리지 않아 두 집안의 오랜 정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혜 가문을 압박했다.그러자 주혜의 가족은 기분이 좋지 않아 직접 성현의 부모님을 찾아가 일렀다.시부모님은 자비롭고 선한 분인데, 성현이 이렇게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하니, 화가 치밀어 올라 성현의 직권을 박탈했다.이렇게 되자 성현은 나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잃게 된 셈이다.심지어 부모님의 핍박으
병원에서 의사가 건네준 사망진단서를 받아든 나는 조용히 서명했다.아까 너무 울어서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았다.나의 할머니가 방금 나를 영원히 떠났다.나는 할머니가 주워 온 아이이고 할머니에게 다른 가족이 없어서 장례식에 올 사람이 없었다.나는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고 병원에서는 할머니의 시신을 화장터로 보냈다.나는 할머니를 데리고 집에 가려고 했었다.하지만 원래 나는 곧 행복한 시간을 보낼 생각에 잠겨 있었다.두 시간 전에 나와 주성현은 결혼식 무대 뒤에서 준비하고 있었다.할머니는 자애로운 얼굴로 내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우리 희연이 드디어 시집가네? 할머니는 이젠 평생 여한이 없다.”나는 할머니를 껴안고 진심으로 기뻐했다.나는 성현을 매우 사랑했고 이번 결혼식은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이었다.결혼식을 할 때, 신랑을 모셔보자는 사회자의 멘트가 나왔지만, 성현이 나타나지 않았다. 사라진 것이다.종업원이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성현 씨께서 방금 전화를 받고 황급히 나가셨어요.”그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어떤 사람은 동정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어떤 사람은 고소해 하는 것 같았다.나는 겁에 질린 얼굴로 할머니를 바라보기만 했다.할머니는 가슴팍을 잡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결혼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늘은 할머니를 내 곁에서 데려갔다.이 기간에 나는 수없이 성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어느 날, 성현한테서 전화가 오더니 술을 대신 먹어달라고 했다.나는 그제야 성현이 이런 일 때문에 나를 버리고 할머니를 죽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나는 마비된 마음으로 유골함을 안고 있었는데, 여기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성현과 성현의 어릴 때부터 친했던 친구 서주혜였다.주혜는 빨개진 눈으로 성현이 품에 안은 유골함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성현아, 나 너무 슬퍼, 이렇게 불쌍한 고양이
우습게도, 우리는 사실 삼 일 전에 혼인 신고를 했고, 결혼식을 아직도 하지 못했는데, 이제 이혼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성현이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곧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성현은 차가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희연, 내가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건데, 이렇게까지 한다고?”성현의 마음속에 나는 무릎을 꿇고 비위를 맞추어서라도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그러니 성현이 내가 이혼하겠다는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비록 내가 성현을 사랑했고, 그와 결혼하고 싶었으며, 특히 할머니께서 내가 시집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기에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자 했었다.그런데 이제 할머니도 안 계시니 더 이상 매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그래서 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주성현, 너는 내가 계속 너 봐줄 줄 알았어?”나는 유골함을 들고 두 사람을 무시하고 앞으로 갔다.평소 같으면, 나의 이런 태도는 진작에 성현을 화나게 했을 것이고 며칠 동안 나를 무시할 것이다.그러나 성현은 오히려 나를 잡아당기며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됐어, 이번에는 내가 잘못했어. 오늘 밤에 내가 돌아가서 오늘보다 더 성대한 결혼식을 다시 준비할까?”성현의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내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부드러움이었다.“할머니께서 우리 결혼식 기다리고 계시잖아.”할머니를 떠올리자 흔들리던 내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성현 때문에 나는 나의 유일한 가족을 잃었다.“할머니? 할머니 너 때문에 열 받아서 돌아가셨어!”나는 품에 안고 있던 유골함을 보여주었다.성현이 멍하니 있자, 곁에 있던 주혜가 즉시 성현의 표정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희연 언니, 제가 성현을 불러서 결혼식을 망친 건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할머니 목숨을 가지고 사람 속이면 안 되죠.”주혜의 말에 성현이 즉시 반응을 보였고, 경멸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희연, 이젠 할머니까지 이용하는 거야? 할머니는 너의 유일한 가족인데 이렇게
나는 헝클어진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새빨간 눈으로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주혜는 내 눈빛에 놀라 억울한 표정으로 성현의 뒤로 숨었고 성현도 순간 불안해했다.아마도 성현이 내가 이런 한 많은 눈빛으로 그를 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황급히 현장을 떠나자, 장례식장을 둘러보던 직원들은 그제야 내게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나는 다 거절했다.이때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났고 천천히 앉았다.그의 손에는 새 유골함을 들고 있었고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남은 유골을 조금씩 유골함에 담아주었다.그 사람의 얼굴을 보니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이 사람은 성현의 비서인데 할머니가 결혼식 때 쓰러졌을 때도 병원에 데려다준 사람이다.그 사람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아까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이곳은 사장님께서 갖고 계시는 묘지입니다. 사장님의 아내로서 할머니를 묻으실 곳을 골라 묻으시면 됩니다.”나는 사실 아내라는 신분이 너무 싫었지만, 지금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 할머니를 편히 쉬게 할 묘지가 절실히 필요했다.그래서 나는 아무 말 없이 받아 버렸다.일을 처리한 후, 나는 성현과 함께 있는 집으로 돌아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내 물건은 많지 않았다. 내가 성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돈 많은 사장님이었고 나는 그저 사회 초년생으로 취직도 못 한 대학생이었다.성현은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며 미친 듯이 쫓아다녔고 나는 곧바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뜨거운 구애 속에 서서히 빠져들었다.성현이 준 선물은 하나도 안 챙기고 내 옷만 캐리어에 담았다.그런데 할머니가 주신 팔찌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그것은 할머니의 유품 중에서 가장 귀한 물건인데, 결혼식 때 쓸 수 있도록 남겨두신다고 했다.그래서 나는 팔찌를 옷장 가장 깊은 곳에 숨겨뒀었는데, 그곳이 텅텅 빈 것이다.성현과 이야기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거부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끝나기 바로
한 잔 또 한 잔의 소주를 마시자, 나의 위는 빠르게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이따금 쥐어뜯는 통증은 내 얼굴을 점차 일그러지게 했다.구경하려고 몰려든 사람들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싸늘하게 지켜만 보던 성현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나는 입가의 술을 닦으며 비아냥거리는 듯 쳐다봤다.“술 마셔 달라고 하지 않았어? 방해하지 마.”성현은 내 말에 완전히 분노한 것 같았다.예전 같았으면 성현이 조금이라도 화를 내면 나는 곧바로 그의 비위를 맞춰 주었었다.단지 내가 성현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우리 사이의 차이를 잘 아니까 그렇게 했었다.하지만 이런 모습에 성현은 더욱 밉게 행동했고 그의 친구들마저 나를 무시했다.마치 내가 성현의 아내가 아니라 하인처럼 말이다.또 몇 잔 더 마시자, 나는 위의 통증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쓰레기통을 움켜쥐고 구토를 했다.이때 성현이 나에게로 다가와 멱살을 잡고 테이블에서 멀어지라고 강요했다. “그만 해.”주혜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반병 정도 남은 술병을 바라보다가 성현의 경고하는 눈빛을 보고 마지못해 팔찌를 벗었다.그런데 그 팔찌가 작아서인지, 아니면 주혜가 일부러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벗을 때 제대로 잡지 못해서 팔찌가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내가 받아 쥐려고 했지만,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몸이 통제되지 않았다.나는 그 자리에 넘어져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옥팔찌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내 마음도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할머니뿐만 아니라 할머니께서 이 세상에 내게 남겨주신 마지막 물건까지 사라졌다.나는 깨진 팔찌를 들고 한마디도 하지 않자, 성현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조심스럽게 나를 건드렸다.이때 내가 갑자기 폭발하여 주혜의 얼굴을 세게 때렸고 그녀의 하얀 볼이 심하게 부어올라 눈물이 쏟아냈다.그러나 성현은 나의 이상함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주혜의 앞을 가로막고 나를 세게 밀었다.술을 너무 많이 마신 몸은 도저히 그 힘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병원의 하얀 천장이 보였다.성현은 병실에 없었지만, 지금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침대 옆을 지키던 간호사가 내가 눈을 뜨자, 반갑게 주치의를 불렀다.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내 침대 옆에 둘러앉아 말하기 시작했다.“환자분, 결혼한다고 해도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면 안 되죠, 알코올 중독이 될 뻔한 거 알아요?”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의사는 한숨을 쉬고 곧 축하한다는 듯이 말했다.“환자분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술은 마시지 마세요. 임신하신 지 한 달 되셨어요, 겹경사네요?”의사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나는 배를 어루만지며 날짜를 되새겨 봤는데, 지난번에 성현과 같이 잔 날이 확실히 지난달이었다.그때 성현이 밖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와 엄청나게 취해 있어 나는 반항도 못 하고 강제로 당하고 말았다.하지만 이 아이가 나에게 온 것에 대해 나는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예전 같았으면 성현한테 다가갈 수 있는 모든 일이 즐거웠는데, 지금은 간접적으로 할머니를 죽인 이 사람과는 아무 연락도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할머니도 한때 버려진 나를 주워 와서 혼자 키웠다는 생각에 내가 뱃속의 아이를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성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요?”아이가 생기면 이혼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된다.다행히 주혜을 데리고 가서 멍든 곳을 치료하느라 의사의 말을 다 듣지도 못하고 가서 내가 임신한 것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이 아이 제가 키울 거니까 성현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의사들은 미심쩍은 기색을 보였지만 성현이 나를 데려다 줄 때 오열하던 여자를 부축해 준 것을 떠올린 듯했다.순간 침묵이 흘렀고 검사가 끝난 후 의사들은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 병실을 떠났다.나는 마침내 머리를 잠시 비울 수 있게 되었다. 요 며칠 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그때 방문이 다시 열렸고 성현이 들어왔다.성현은 도시락을 들고 입술을 물며
성현이 나에게 죄책감이 있지만 나의 거듭된 무시 속에 인내심이 바닥이 되었다.성현은 일어서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고라니까? 게다가 당신도 주혜 때렸잖아! 이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가자.”나는 성현의 말에 웃겨서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다만 나의 눈빛에는 이미 지난날의 사랑은 사라지고 비아냥거림으로 가득했다.‘할머니의 목숨이 주혜의 뺨과 비교되다니, 너무 우스운 거 아니야?’나와 오랜 시간 동안 만났으니, 성현은 당연히 내 집안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할머니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한때는 날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성현의 마음속에는 두 사람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비교하게 됐고 포기를 한 사람이 나였다.비아냥거리는 내 목소리에 성현의 얼굴에는 이미 분노가 서려 있었다.그러나 내 표정을 본 성현은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성현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안다.성현을 바라보는 내 눈빛에는 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성현은 당황한 듯 보였다.내 과거의 사랑은 성현의 잠재의식 속에 내가 영원히 그를 떠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틀렸다.성현은 쩔쩔매며 나를 쓰다듬어 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 손길을 피해 버렸다.“당신의 팔찌는...! 내가 고쳐 줄게,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 결혼식은 뒤로 미루자.”나는 딱히 거절은 하지 않았다.성현과 함께한 후, 나는 수입이 없었고 성현이 나를 그의 회사에 데려갔지만, 월급을 준 적이 없었다.우리는 연인이었기에 나는 성현의 카드를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하지만 그때 나는 성현의 돈을 많이 쓰는 것을 아까워해서 필요한 생활용품 지출을 제외하고 사용하지 않았다.그런데 동료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고 한순간에 모든 동료가 나를 배척하기 시작했으며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나는 동료가 나를 낙하산이라고 생각해서 배척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배로 열심히 일했고 그 모습에 동료들은 나를 더 이상 험담하지 않았다.생각을 정리하고 나는 성현
떠난 후, 나는 현빈의 도움으로 방을 얻었고 다행히 요 몇 년 동안 줄곧 성현을 따라다녔지만, 대학교 때 열심히 공부해서 배운 지식을 잊지 않고 있었다.현빈의 도움으로, 나는 그의 친구에게서 일자리를 얻어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었다.나는 할머니를 묻기 위해 묘지를 새로 샀고 그동안 정신을 차린 성현이 내게 수없이 사과와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왔다.그래서 나는 소셜 앱을 다 차단했다. 그러나 성현은 포기하지 않고 내가 남긴 이혼 서류를 찢었고 계정을 바꿔가서 사과했다.참다못한 나는 결국 몇 년 동안 쓰던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기로 결심했고, 과거와 완전히 작별할 수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배는 점점 더 부풀어 왔고 가게의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게 되었다.가게 점장이 현빈의 친구여서 나에게 많은 일을 시키지 않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월급을 받는 것이 부끄러워 집으로 돌아가 온라인 일을 하는 것을 선택했다.그런데 일을 그만둔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집 앞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얼굴을 만났다.현빈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큰 봉지를 들고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왜 여기 있어요? 성현이 오라고 했어요?”현빈은 고개를 저으며 신발을 갈아 신은 후 집 안으로 들어갔다.“저 회사를 그만뒀어요. 사장님께서 미치셔서 사람 살 곳이 아니에요.”현빈의 말을 듣고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떠난 후, 성현이 다른 사람이 됐다는 것을 말이다.성현은 미친 듯이 내의 흔적을 찾았고, 모든 책임을 주혜에게 돌렸다.두 사람이 친했던 만큼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그러나 성현은 화가 풀리지 않아 두 집안의 오랜 정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혜 가문을 압박했다.그러자 주혜의 가족은 기분이 좋지 않아 직접 성현의 부모님을 찾아가 일렀다.시부모님은 자비롭고 선한 분인데, 성현이 이렇게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하니, 화가 치밀어 올라 성현의 직권을 박탈했다.이렇게 되자 성현은 나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잃게 된 셈이다.심지어 부모님의 핍박으
나는 별문제가 없다고 거듭 말했지만, 현빈은 끝까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성현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고 나는 임신한 일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래서 성현이 병실로 뛰어왔을 때, 나는 이미 그에게 질문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성현은 내가 무슨 목적이 있다고 의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내가 성현에게 잘해주면 그는 내가 부탁할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우리의 빈부 차이가 크기 때문에 애당초 아무리 사랑해도 성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나에 대한 경멸을 지울 수 없었다.이번에도 성현은 내가 칩을 준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낙태에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할머니는 잘 보호하지 못했지만, 이 아이는 지키려고 마음을 먹었다.하지만 성현이 루틴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성현은 조용히 문을 열었는데, 나를 놀라게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그의 얼굴에는 기쁨과 놀라움이 가득했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사랑에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서, 침묵 속에서 성현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성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희연아, 오늘 일 들었어, 내가 잘못했어, 할머니 무덤에 주혜가 갈 줄은 몰랐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성현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내가 전에 당신을 화나게 한 거 잘 알아, 앞으로 주혜랑 멀리할게, 걔네 집에 가서 확실하게 말할 테니까, 우리 앞으로 잘 지내면서 아이도 함께 잘 키우자. 응?”성현은 말할 때 나를 보지 않았지만, 눈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나는 그저 성현을 보며 지난 몇 년간 수없이 그랬듯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성현의 희망찬 눈빛에 나는 칼을 꽂았다.“성현, 너 지금의 모습 정말 날 역겹게 해.”멍하니 있던 성현의 얼굴에 웃음기가 아직 남아 있는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났다.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시간을 줄 기분이 아니었다.“자기가 한 짓이 도를 넘은 걸 알면서도 했잖아, 이제 와서 후회하면 뭐 해?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자, 내 마음은 더없이 평온해졌다.나는 유골함을 조심스럽게 놓고 일어나 주혜에게로 향했다.지금 뱃속에 새로운 생명이 생겼기 때문에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하지만 주혜를 완전히 무너뜨리려면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입구 쪽을 살펴보니, 사고가 나면 비서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차갑게 굳은 얼굴로 주혜에게로 갔더니, 그녀는 즉시 경계하는 태세로 바뀌었다.주혜는 더 이상 뺨을 맞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주혜와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기가 싫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성현이 지금 여기 없는데 굳이 나한테 시치미를 뗄 필요 없잖아?”내가 이렇게까지 까밝혔는데도 주혜는 여전히 가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언니,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단지 꽃분을 안치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성현이 허락했어요. 어쨌든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서 성현이 저를 친동생처럼 대해주잖아요?”주혜는 친동생 이야기를 할 때, 마치 내가 화내지 않을까 봐 이를 갈며 말했다.하지만 주혜는 성현에 대한 내 사랑을 과대평가했다.예전 같았으면, 나는 정말 주혜의 도발에 넘어갔을 것이지만 지금의 나는 이런 행동을 한 그녀가 너무 우스웠다.“너도 동생인 줄 알면서, 오빠 결혼식 날에 불러서, 나는 또 오빠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려는 줄 알았네?”이 말에 주혜의 예쁜 얼굴이 일그러졌고 그녀는 내 뺨을 때리려고 했다.사실 주혜가 조금 망설이는 듯해 보여서 그 속도를 피하기에 충분했지만, 나는 멀리서 달려오는 현빈을 보고 조금 미소를 지었다.나는 주혜의 충격받은 눈빛을 보고 일부러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고 현빈이 달려오는 순간 얼굴을 가리고 뒤로 넘어졌다.“희연 씨, 괜찮으세요? 많이 어지러워요? 지금 바로 병원에 모셔다드릴게요.”주혜는 내가 임신한 것도 모르고 무심하게 나를 흘겨보았다.“이렇게 살짝 때렸는데, 넘어갔어요? 예전에 밤새도록 성현을 위해 술을 먹어주던 사람이었는데?”주혜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와 현빈을 보며 물었다.“아니면 둘 사이
신사처럼 내게 손을 내미는 남자를 보니 낯이 익었다.“희연 씨, 지난번에 너무 혼란스러워서 미처 위로의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그제야 그 사람이 바로 나와 할머니를 차로 병원에 데려다주고 유골함을 깨뜨린 뒤 새 항아리를 가져다준 비서라는 것을 눈치챘다.나는 그에게 이름을 물었고 정현빈이라고 했다.“현빈 씨, 제가 아직 감사 인사를 못 드렸네요.”현빈이 황급히 손을 뻗어 나를 부축했고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차에 오른 후 내비게이션에 찍힌 목적지가 집인 것을 보니 속이 메스꺼웠다.나는 그곳에, 나와 주연이 함께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그곳은 원래 우리가 결혼한 후의 신혼집이었어야 했다.결혼식 전에 디자인 때문에 한 달을 썼고 방 안의 모든 곳에 나와 성현의 오랜 연애의 추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그때의 나를 생각하니 너무 역겨웠다.“현빈 씨, 저를 무덤 쪽에 데려다주세요, 할머니를 뵈러 가고 싶어요.”나는 사실 현빈이 내 요구를 들어준다는 자신이 없어서, 시도해 보자는 마음으로 물어봤다.어쨌든 현빈은 성현의 비서일 뿐이고, 그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런데 뜻밖에도 현빈은 내 말을 듣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핸들을 돌려 무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현빈의 행동에 내 마음이 따듯해졌다.현빈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유일하게 진심으로 나를 대해준 사람인 것 같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선의를 베푸는 사람은 이전에 몇 번 만나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이다.내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에게 악의를 거리낌 없이 표했고 단지 내가 성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현의 인식 속에 자기가 무엇을 하든 내가 다 용서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차는 그 입구에 세워졌고 나는 현빈의 동행을 사양하고 혼자 걸어갔다.얼마 전에 비가 와서 걷는데, 잔잔한 흙냄새가 풍겨왔다.내가 아직 성현의 법적 아내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위치의 묘지를 포함하여 그의 명의로 된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할머니의 유골을 직
성현이 나에게 죄책감이 있지만 나의 거듭된 무시 속에 인내심이 바닥이 되었다.성현은 일어서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고라니까? 게다가 당신도 주혜 때렸잖아! 이 일은 그냥 이렇게 넘어가자.”나는 성현의 말에 웃겨서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다만 나의 눈빛에는 이미 지난날의 사랑은 사라지고 비아냥거림으로 가득했다.‘할머니의 목숨이 주혜의 뺨과 비교되다니, 너무 우스운 거 아니야?’나와 오랜 시간 동안 만났으니, 성현은 당연히 내 집안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할머니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한때는 날 사랑했을지 모르지만, 성현의 마음속에는 두 사람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비교하게 됐고 포기를 한 사람이 나였다.비아냥거리는 내 목소리에 성현의 얼굴에는 이미 분노가 서려 있었다.그러나 내 표정을 본 성현은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성현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안다.성현을 바라보는 내 눈빛에는 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성현은 당황한 듯 보였다.내 과거의 사랑은 성현의 잠재의식 속에 내가 영원히 그를 떠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틀렸다.성현은 쩔쩔매며 나를 쓰다듬어 주려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 손길을 피해 버렸다.“당신의 팔찌는...! 내가 고쳐 줄게,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 결혼식은 뒤로 미루자.”나는 딱히 거절은 하지 않았다.성현과 함께한 후, 나는 수입이 없었고 성현이 나를 그의 회사에 데려갔지만, 월급을 준 적이 없었다.우리는 연인이었기에 나는 성현의 카드를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하지만 그때 나는 성현의 돈을 많이 쓰는 것을 아까워해서 필요한 생활용품 지출을 제외하고 사용하지 않았다.그런데 동료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고 한순간에 모든 동료가 나를 배척하기 시작했으며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나는 동료가 나를 낙하산이라고 생각해서 배척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배로 열심히 일했고 그 모습에 동료들은 나를 더 이상 험담하지 않았다.생각을 정리하고 나는 성현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병원의 하얀 천장이 보였다.성현은 병실에 없었지만, 지금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침대 옆을 지키던 간호사가 내가 눈을 뜨자, 반갑게 주치의를 불렀다.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내 침대 옆에 둘러앉아 말하기 시작했다.“환자분, 결혼한다고 해도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면 안 되죠, 알코올 중독이 될 뻔한 거 알아요?”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의사는 한숨을 쉬고 곧 축하한다는 듯이 말했다.“환자분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술은 마시지 마세요. 임신하신 지 한 달 되셨어요, 겹경사네요?”의사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나는 배를 어루만지며 날짜를 되새겨 봤는데, 지난번에 성현과 같이 잔 날이 확실히 지난달이었다.그때 성현이 밖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와 엄청나게 취해 있어 나는 반항도 못 하고 강제로 당하고 말았다.하지만 이 아이가 나에게 온 것에 대해 나는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예전 같았으면 성현한테 다가갈 수 있는 모든 일이 즐거웠는데, 지금은 간접적으로 할머니를 죽인 이 사람과는 아무 연락도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할머니도 한때 버려진 나를 주워 와서 혼자 키웠다는 생각에 내가 뱃속의 아이를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성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요?”아이가 생기면 이혼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된다.다행히 주혜을 데리고 가서 멍든 곳을 치료하느라 의사의 말을 다 듣지도 못하고 가서 내가 임신한 것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이 아이 제가 키울 거니까 성현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의사들은 미심쩍은 기색을 보였지만 성현이 나를 데려다 줄 때 오열하던 여자를 부축해 준 것을 떠올린 듯했다.순간 침묵이 흘렀고 검사가 끝난 후 의사들은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 병실을 떠났다.나는 마침내 머리를 잠시 비울 수 있게 되었다. 요 며칠 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그때 방문이 다시 열렸고 성현이 들어왔다.성현은 도시락을 들고 입술을 물며
한 잔 또 한 잔의 소주를 마시자, 나의 위는 빠르게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이따금 쥐어뜯는 통증은 내 얼굴을 점차 일그러지게 했다.구경하려고 몰려든 사람들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싸늘하게 지켜만 보던 성현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나는 입가의 술을 닦으며 비아냥거리는 듯 쳐다봤다.“술 마셔 달라고 하지 않았어? 방해하지 마.”성현은 내 말에 완전히 분노한 것 같았다.예전 같았으면 성현이 조금이라도 화를 내면 나는 곧바로 그의 비위를 맞춰 주었었다.단지 내가 성현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우리 사이의 차이를 잘 아니까 그렇게 했었다.하지만 이런 모습에 성현은 더욱 밉게 행동했고 그의 친구들마저 나를 무시했다.마치 내가 성현의 아내가 아니라 하인처럼 말이다.또 몇 잔 더 마시자, 나는 위의 통증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쓰레기통을 움켜쥐고 구토를 했다.이때 성현이 나에게로 다가와 멱살을 잡고 테이블에서 멀어지라고 강요했다. “그만 해.”주혜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반병 정도 남은 술병을 바라보다가 성현의 경고하는 눈빛을 보고 마지못해 팔찌를 벗었다.그런데 그 팔찌가 작아서인지, 아니면 주혜가 일부러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벗을 때 제대로 잡지 못해서 팔찌가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내가 받아 쥐려고 했지만,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몸이 통제되지 않았다.나는 그 자리에 넘어져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옥팔찌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내 마음도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할머니뿐만 아니라 할머니께서 이 세상에 내게 남겨주신 마지막 물건까지 사라졌다.나는 깨진 팔찌를 들고 한마디도 하지 않자, 성현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조심스럽게 나를 건드렸다.이때 내가 갑자기 폭발하여 주혜의 얼굴을 세게 때렸고 그녀의 하얀 볼이 심하게 부어올라 눈물이 쏟아냈다.그러나 성현은 나의 이상함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주혜의 앞을 가로막고 나를 세게 밀었다.술을 너무 많이 마신 몸은 도저히 그 힘
나는 헝클어진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새빨간 눈으로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주혜는 내 눈빛에 놀라 억울한 표정으로 성현의 뒤로 숨었고 성현도 순간 불안해했다.아마도 성현이 내가 이런 한 많은 눈빛으로 그를 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황급히 현장을 떠나자, 장례식장을 둘러보던 직원들은 그제야 내게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나는 다 거절했다.이때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났고 천천히 앉았다.그의 손에는 새 유골함을 들고 있었고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남은 유골을 조금씩 유골함에 담아주었다.그 사람의 얼굴을 보니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이 사람은 성현의 비서인데 할머니가 결혼식 때 쓰러졌을 때도 병원에 데려다준 사람이다.그 사람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아까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말했다.“이곳은 사장님께서 갖고 계시는 묘지입니다. 사장님의 아내로서 할머니를 묻으실 곳을 골라 묻으시면 됩니다.”나는 사실 아내라는 신분이 너무 싫었지만, 지금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 할머니를 편히 쉬게 할 묘지가 절실히 필요했다.그래서 나는 아무 말 없이 받아 버렸다.일을 처리한 후, 나는 성현과 함께 있는 집으로 돌아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내 물건은 많지 않았다. 내가 성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돈 많은 사장님이었고 나는 그저 사회 초년생으로 취직도 못 한 대학생이었다.성현은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며 미친 듯이 쫓아다녔고 나는 곧바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뜨거운 구애 속에 서서히 빠져들었다.성현이 준 선물은 하나도 안 챙기고 내 옷만 캐리어에 담았다.그런데 할머니가 주신 팔찌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그것은 할머니의 유품 중에서 가장 귀한 물건인데, 결혼식 때 쓸 수 있도록 남겨두신다고 했다.그래서 나는 팔찌를 옷장 가장 깊은 곳에 숨겨뒀었는데, 그곳이 텅텅 빈 것이다.성현과 이야기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거부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끝나기 바로
우습게도, 우리는 사실 삼 일 전에 혼인 신고를 했고, 결혼식을 아직도 하지 못했는데, 이제 이혼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성현이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곧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성현은 차가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희연, 내가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건데, 이렇게까지 한다고?”성현의 마음속에 나는 무릎을 꿇고 비위를 맞추어서라도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그러니 성현이 내가 이혼하겠다는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비록 내가 성현을 사랑했고, 그와 결혼하고 싶었으며, 특히 할머니께서 내가 시집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기에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자 했었다.그런데 이제 할머니도 안 계시니 더 이상 매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그래서 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주성현, 너는 내가 계속 너 봐줄 줄 알았어?”나는 유골함을 들고 두 사람을 무시하고 앞으로 갔다.평소 같으면, 나의 이런 태도는 진작에 성현을 화나게 했을 것이고 며칠 동안 나를 무시할 것이다.그러나 성현은 오히려 나를 잡아당기며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됐어, 이번에는 내가 잘못했어. 오늘 밤에 내가 돌아가서 오늘보다 더 성대한 결혼식을 다시 준비할까?”성현의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내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부드러움이었다.“할머니께서 우리 결혼식 기다리고 계시잖아.”할머니를 떠올리자 흔들리던 내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성현 때문에 나는 나의 유일한 가족을 잃었다.“할머니? 할머니 너 때문에 열 받아서 돌아가셨어!”나는 품에 안고 있던 유골함을 보여주었다.성현이 멍하니 있자, 곁에 있던 주혜가 즉시 성현의 표정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희연 언니, 제가 성현을 불러서 결혼식을 망친 건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할머니 목숨을 가지고 사람 속이면 안 되죠.”주혜의 말에 성현이 즉시 반응을 보였고, 경멸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희연, 이젠 할머니까지 이용하는 거야? 할머니는 너의 유일한 가족인데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