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그래, 우리 내일부터 집 알아보자.”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무자비하게 짓밟힌 내 마음 때문에, 그리고 온 마음 다해 날 지켜주고 사랑해 주는 엄마, 아빠 때문에. 무슨 일이 있든 엄마,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다시 침대 위에 누운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지난 18년이 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난 마음이 너무 아파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내가 모든 걸 다 내주며 좋아했던 그 소년은 결국 나와 인연이 아니었다.앞으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고, 점점 멀어질 것이다.‘내 소년 신우야, 내 꿈아. 이제 안녕!’...다음 날은 주말이었다. 나는 나른하게 침대에 기대어서 일어나질 않았다.엄마와 아빠는 몇 번이고 날 보러 왔다. 내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자 더 자게 내버려두었다.내가 일어났을 때는 거의 8시가 다 돼가는 시간이었다. 난 식탁 앞에 앉아 엄마가 날 위해 따뜻하게 데워준 음식을 먹었다.아빠와 엄마는 내 곁을 지켜줬다. 너무도 조심스러운 두 분의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내가 부족해서 엄마, 아빠에게 걱정을 끼쳤으니 내 잘못이었다.사실 난 입맛이 별로 없었지만 엄마, 아빠가 걱정할까 봐 걱정되어 억지로 밥 한 그릇을 다 비웠고 음식도 반쯤 먹었다.젓가락을 내려놓자마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엄마는 현관문 렌즈로 밖을 바라보았고 소리 없이 나와 아빠에게 유신우 가족이 찾아왔다고 알려줬다.어제저녁에 있었던 일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난 차마 그들을 마주할 수 없어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고 엄마, 아빠에게 뒷일을 맡겼다.엄마는 문을 연 뒤 덤덤히 입을 열었다.“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로 온 거야?”“해윤아, 어제 일은 전부 신우 탓이야. 나랑 우리 남편이 신우를 데리고 사과하러 왔어.”아줌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늦은 사과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상대방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심장을 파낸 뒤에 겨우 사과 한마디 들었다고 아무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문을 꼭 닫지 않아서 작은 틈 사이로 거실의 모습이 조금 보였다.유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리 엄마와 아빠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아저씨, 아줌마, 죄송합니다. 어제 일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수진이를 그렇게 욕해서는 안 됐어요. 사실 수진이는 아주 착한 아이예요. 전 수진이를 그런 애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아빠는 줄곧 굳은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고, 엄마는 잠깐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신우야, 우리 마음은 바뀌지 않아. 넌 사과할 필요 없다. 네 말이 맞아. 너희도 컸으니 앞으로 각자 인생을 살아가겠지. 수진이가 널 계속 따라다니는 것도 타당치 않아. 네가 어제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우리도 이 사태의 엄중함을 인지하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어제 수진이가 사람들 앞에서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잖니? 나도 수진이를 혼냈단다. 그러니까 넌 걱정할 필요 없어. 앞으로 수진이는 수진이 인생 살 거니까 너도 네 인생 살면 돼. 우린 그저 이웃일 뿐이잖아. 그렇게 특별한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해윤아...”아줌마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했는데 아빠가 말렸다.“정훈아, 미나 씨. 이미 지나간 일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돌아가세요. 고3이라 바쁠 텐데 신우도 공부해야죠.”아빠와 엄마는 문을 열고 세 사람을 내보냈다.난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유신우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박스 안에 넣은 뒤 적절한 시기에 그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어차피 정리해야 할 테니 깨끗이 정리하는 편이 나았다.다음날 난 아침 일찍 일어나 평소와 같이 책상 앞에 앉아서 수학 문제를 풀었다.엄마는 몰래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날 본 뒤 다시 문을 닫고 조용히 떠났다. 곧 주방에서 밥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밥을 먹은 뒤 난 큰 가방을 메고 학교로 갔다. 평소처럼 유신우의 집 문을 두드려서 그를 찾지는 않
난 이제야 깨달았다. 유신우의 인내와 묵인은 그때의 그 우스운 약속과는 무관하다는 걸 말이다. 유신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게 싫증이 나 있었다. 그저 오랫동안 참았을 뿐이다.아마도 추석 때 식사하면서 엄마와 아줌마의 말에 큰 자극을 받아서, 장소 따위, 결과 따위 상관하지 않고 그런 소동을 일으켰을 것이다.어쩌면 그런 방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우리 둘은 절대 이어질 수 없다는 걸, 그러니까 두 번 다시는 우리 둘을 엮지 말라고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유신우, 난 네 말을 전부 기억해 뒀어. 난 네가 말한 대로 할 거야. 난 마지막으로 네 말에 따를 거야. 내가 진짜 많이 좋아했던 널 이젠 보내줄 거야.’그날 등굣길에 우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아침 햇살은 따스했고 나와 유신우는 남남처럼 걸었다.내가 먼저 교실로 들어갔고 유신우가 뒤이어 들어왔다. 예전에는 유신우가 먼저 교실로 들어갔는데 이제는 내가 그를 앞섰다. 생각해 보면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친구들은 우리 둘 얘기로 자주 농담을 했다. 그들은 나와 유신우가 언제나 찰싹 붙어 다닌다고 했었다.우리 둘이 나란히 교실로 들어오자 뒷줄에 앉아 있던 남학생들이 휘파람을 불면서 짓궂은 장난을 쳤다.“우리 반 잉꼬부부가 왔네.”평소 자주 치던 장난이었다. 난 그 말을 들으면 짜증이 나는 동시에 조금 기쁘기도 했다. 비록 사귀는 건 아니었지만 난 그를 진심으로 내 남자 친구처럼 생각했고 최선을 다해 그에게 잘해주려고 했었다.오늘도 그들은 평소처럼 장난을 쳤다. 그들은 달라진 게 없지만 내 마음이 완전히 달라졌다.난 본능적으로 유신우를 힐끗 보았다. 유신우는 굳은 얼굴로 바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자리에 가서 앉더니 문제집을 꺼내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유신우의 냉담한 표정을 보자 난 마음이 콕콕 쑤셨다.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그리고 어떤 일들은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다.‘나와 완전히 연을 끊을 생각이라면 내가 도와줄게.’난 가방을 자리에 내
하교 후 나는 유신우를 기다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반쯤 걸었을 때 뒤에서 터벅터벅 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가 유신우임을 알았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난 여전히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난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둘 것이고 그걸 나 혼자만의 일로 만들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 유신우는 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그 뒤로 우리는 단 한 번도 함께 등교하자고 약속한 적이 없었다. 비록 이따금 우연히 마주치긴 했지만 그저 간단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만 건넸을 뿐, 내가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유신우는 여러 번 길에서 멈춰 섰다. 날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입술을 깨무는 걸 보면 나한테 할 얘기가 있는 듯했는데 난 발견하지 못한 척 그냥 지나쳐 갔다.친구들은 그날 내가 교단에서 했던 말을 믿지 않았다. 나와 유신우가 십 년 넘게 붙어 지냈기 때문이다. 장겨울 말을 들어보니 이 일로 애들이 여러 번 모여서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유신우에게 화가 나서 그런 거라고, 내 화가 풀리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고 결론을 냈다고 한다.난 그들이 내린 결론에 가타부타 말을 얹지는 않았다. 안 믿어도 상관없었다. 그들의 뇌를 열어서 내 생각을 들이부을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다. 어차피 사실이 내 말을 증명해 줄 것이었다.목요일 6교시는 체육 시간이었다. 고3 학생은 다들 매일 교과서와 문제집들을 풀면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우중충한 분위기 때문에 선생님은 우리가 우울증에라도 걸릴까 봐 체육 시간이면 우리를 운동장으로 내쫓아서 몇 바퀴 달리게 했다.난 생리 때문에 배가 아파서 선생님에게 얘기해 나가지 않았다.체육 시간이 시작되고 20분쯤 지났을 때 한 여학생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다짜고짜 날 데리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수진아, 수진아. 유신우 축구하다가 다쳐서 피가 엄청 많이 나. 얼른 가봐.”그가 다쳤다는 말에 순간 이성을 잃은 나는 초조한 마음을 안고 운
내가 떠나는 건 모두의 예상을 비껴간 일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떠난 뒤 열띤 토론을 벌였다. 별의별 얘기가 다 나왔지만 난 못 들은 척했다. 걸음을 멈추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렀고 그 사건이 있고서 보름이 지났다. 난 조금 외로웠지만 동시에 아주 자유로웠다유신우의 얼굴이 가끔 머릿속에 떠오르긴 했지만 난 그의 얼굴이 떠오르면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리며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도저히 내 자신이 통제되지 않을 때면 문제집을 꺼내서 풀었다.그날 밤은 달이 아주 크고 별이 아주 밝았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나서 난 복습할 것들을 한가득 안은 채로 장겨울과 이세영과 인사한 뒤 홀로 집으로 돌아갔다.밤경치가 예뻐서 기분이 꽤 좋았던 나는 언젠가 들어봤었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걸었다.그러다 다음 가사가 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유신우가 갑자기 모퉁이에서 튀어나와 내 앞에 섰다.유신우는 아주 잘생겼다. 눈도 눈썹도 예쁘고, 피부는 하얗고 몸은 마르고 키가 컸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외모였다.그러나 아무리 잘생겨도 이젠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갑자기 그를 마주하게 되자 나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불쾌했던 기억이 순간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팠다.유신우와는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른쪽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떠나려고 했는데 유신우가 나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또 한 번 내 길을 막았다.난 조금 짜증이 나서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난 최대한 평온하게, 덤덤하게 말했다.“무슨 볼일 있어?”“볼일 없으면 너랑 같이 하교할 수 없는 거야? 예전에는 우리 항상 같이 집으로 돌아갔잖아.”난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예전이고 지금은 달랐다.“볼일 없으면 난 먼저 가볼게. 안녕.”난 또 한 번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유신우가 재빨리 내 팔을 잡았다.“나수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꼭 이렇게 무정하게 굴어야겠어?”“유신우, 나 집 갈 거야. 비켜줬으면 좋겠어.”“나수진.”유신우는 이를 악물고 낮게 말
시간은 물 흐르듯 흘렀고 두 가족 사이도 한결 좋아졌다. 물론 예전처럼 친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와 유신우 사이에도 벽이 생겼다.난 그 뒤로 그의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집에 찾아간 적도 아주 드물었다. 우리 가족과 유신우의 가족이 함께 식사하게 되더라도 최대한 빠져나갔다. 그리고 유신우와 단둘이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최대한 그와 멀리 떨어진 채로 침묵을 유지했다.그해 설날, 우리 가족은 집에서 설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아저씨와 아줌마가 우리를 몇 번이나 초대했고, 결국 부모님은 그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했다.난 빠질 생각이었다. 어쩌다 휴일을 보내는 건데 푹 쉬고 싶었다. 그리고 유신우와 가까이 있는 게 싫었다. 유신우의 곁에 있으면 그의 차가운 표정과 무정한 말들이 떠올라서 괴로웠기 때문이다.난 유신우가 날 찾아올 줄은 몰랐다.난 소파에 앉아 헤드폰을 쓴 채로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유신우가 소리 없이 내 옆으로 와서 섰다.사실 난 그가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모른 척했을 뿐이다.유신우가 내 헤드폰을 벗겨버려서 난 어쩔 수 없이 눈을 떠야 했다.그의 이목구비는 여전히 준수했다. 난 한때 내가 좋아했던 그의 검은 눈동자에 비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무슨 일이야?”내가 입을 열었다.유신우는 내 곁에 앉았고 난 티 나지 않게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모습을 본 유신우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수진아, 사실 나 너한테 사과하려고 온 거야.”“뭐라고?”난 내 귀를 의심했다.“너한테 사과하려고. 그날은 내가 잘못했어. 너한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는데. 내가 널 좋아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널 진심으로 싫어했던 적은 없어. 앞으로도 난 너를 내 여동생처럼 여길 거야.”“그래서?”“그러니까 수진아, 앞으로 우리 같이 등하교하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엄마랑 너희 엄마가 우리 때문에 계속 걱정할 거야.”나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꽉 깨물었다. 그의 사과는 내 상
소녀의 마음이, 그리고 유신우를 향한 나의 신앙과 미래를 향한 동경이 전부 거기에 적혀 있었다.그 일기들은 내 청춘이었다.피식 웃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유신우는 방문에 기대어 장난스럽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난 황급히 일기들을 서랍 안에 넣었고, 유신우는 날 향해 웃었다.“왔어?”“어, 잠꾸러기야. 이제 깨어났어?”유신우는 다가와서 엉덩이를 들어 내 책상 위에 앉더니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느껴졌다.나와 그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유신우가 갑자기 다가오자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불편함에 못 이겨 옆으로 피했다.“응.”예전이었다면 유신우가 내게 다가왔을 때 설렜을 것이다.그러나 이젠 그가 다가오면 피하고 싶었다.“수진아, 시험 어떻게 봤어?”유신우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즐거움이 보였다.“나 몇 번이나 왔었는데 그때마다 네가 자고 있었어. 너 정말 잘 잔다.”“그래.”난 고개를 숙이고 그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난 책상 위에 놓인 장식품을 만지작거리면서 그와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사실 난 시험을 꽤 잘 봤다. 하지만 나와 그 사이에는 이미 간극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더 이상 예전처럼 그와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없었고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다.내 마음을 통제할 수 없을까 봐, 다시 그에게 빠져들게 될까 봐 무서웠다.그리고 결국 내가 바쳤던 모든 것들이 우습게 될까 봐 무서웠다.유신우를 마주하게 되면 난 항상 자신을 타일렀다. 유신우는 오빠고 난 동생일 뿐이라고,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수진아, 솔직히 얘기해 봐. 너 여전히 나한테 화 나 있지?”나의 냉랭함을 눈치챈 건지 유신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날 한동안 쳐다보더니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다시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그러나 난 그의 손을 피했다.유
옆 반에는 김현주라는 전학생이 있었다. 작은 키에 동그란 얼굴, 짧게 일자로 자른 단발머리, 그리고 웃을 때마다 보이는 대칭되는 작은 보조개까지, 아주 귀여운 여학생이었다.난 유신우가 그녀와 같이 다니는 걸 여러 차례 보았다. 손을 잡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난 몇 번이나 마음이 아팠다.수능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 답을 맞춰본 날, 유신우가 김현주의 손을 잡고 구석에 숨어 그녀와 같은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는 걸 난 내 두 눈으로 보았다. 유신우는 김현주의 기사가 되어 평생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고 했었다.당시 나는 마음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한 사람의 정력은 유한하다. 유신우는 기사가 되기를 선택했는데 어떻게 또 날 지켜주겠는가? 유신우는 그저 자신의 자책감을 덜고 싶었던 것뿐이다.나도 사람이다. 난 또 한 번 상처받기 싫었고, 더 오래 아프기 싫었다. 애정행각을 벌이는 그들의 모습을 매일 같이 지켜보는 건 내게 큰 상처였기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난 18년 동안 유신우에게 내 애정을 쏟았다. 그리고 이젠 날 위해 살 것이다.그러니까 그들과 같은 대학교에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나와 유신우는 같은 날 지망을 썼다.유신우는 지망을 다 쓴 뒤 토끼처럼 내 방으로 뛰어 들어와서 들뜬 목소리로 내게 선택했느냐 물었다.난 그의 눈동자가 빛나는 걸 보았다.그건 나 때문이 아니었고 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응.”“경한대 썼지? 올해 경한대에서 모집인원을 확대해서 너라면 분명 붙을 수 있을 거야.”“유신우, 김현주도 경한대 쓴 거야?”사실 묻고 싶지 않았다. 대답은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결국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여전히 유신우에게 희망을 품고 있다니, 얼마나 멍청한가? 하지만 유신우가 좋은 걸 어쩌겠는가? 유신우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활짝 웃었다.“응. 걔 엄청 소심하잖아. 내가 곁에 없으면 매일 울까 봐 겁나.”난 애써 슬프지 않은 척했다.유신우는 바보 같았다. 그를 그리워할 때 나도 매일 같이 울었었는데,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