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우리 우주를 위해서?” 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물론이지.] 은범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와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킬 거야.] 시연은 이 일이 우주에 관한 것인 만큼 더는 따지지 않았다. “그럼 도착하면 전화해.” [알겠어.]전화를 끊고, 은범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시연이 우주 때문에 연락을 받았을 뿐이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시연이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고, 결국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 비는 점점 더 굵어졌다. 진아는 문 앞에 서 있는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네.” 그러더니 진아도 궁금한 듯 물었다. “누구 기다리는 거야? 너 정말 남편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보이는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시연이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시연은 1층 공터로 내려갔고, 그곳에서는 은범이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시연은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됐어?” 은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어 있었고, 얼굴과 옷에는 진흙이 잔뜩 묻은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은범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는 길에 타이어가 터져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느라 이렇게 됐어.” 시연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은범은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 걸 보고 말렸다. “내가 창우면에 오지 않았다 해도 타이어는 터졌을 거야.” 그는 시연의 뒤를 힐끗 보며 말했다. “나 안으로 들어가도 돼?” “아, 맞다!” 시연은 그를 손짓해 재촉하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그래.” 시연은 그를 따라 2층으로 데려갔다. “여기는 병원 직원 숙소야. 좀 낡고 허름하지만, 화장실이 있으니까 샤워는 할 수 있어.” 말을 나누며 두 사람은 시연의 방에 도착했다. 시연은 문을 열며 말했다. “나랑 진아는 한방을 써.”
문이 열리자, 노은범의 부드럽고 우아한 얼굴이 드러났다. 방금 샤워를 마친 그는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상체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하체는 시연이 방금 김현진에게서 빌린 널찍한 운동복 바지만 입고 있었다. 유건은 그를 가만히 응시하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 대표님.” 은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시연이 찾으러 오셨나 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공기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은범은 말했다. “시연이 지금 욕실에 있어요.” 그는 이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남자의 직감으로, 은범도 유건이 시연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유건은 단순히 시연의 환자가 아니었어...’ 유건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차가웠다. 지금 이 상황은 그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유건은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그저 낮게 말했다. “시연이 어디 있지? 직접 만나야겠어.” “은범아, 누구야?” 바로 그때, 시연이 나와 은범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보며 걸어왔다. 유건은 은범을 무시하고, 시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유건 씨?” 시연은 놀라며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이 남자는 조금 전까지도 장소미와 함께 있던 게 아닌가?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따라와.” 유건은 시연의 손목을 잡고 이끌려 했다. 그러나 은범이 유건을 막아섰다. “고 대표님, 이 손 놓으세요.” 그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퍼져나갔다. 유건은 비웃으며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 시연에게 물었다. “나랑 갈 거야, 말 거야?” 시연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말했다. “은범아, 고 대표님과 몇 마디만 하고 올게. 걱정하지 마.” 시연이 이렇게 말하자, 은범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며 당부했다. “만약에 너를 괴롭히면 바로 소리 질러.” “알았어..
GP그룹 회의실. 주지한은 서류 폴더 하나를 펼쳐 유건 앞에 놓았다. 최근 GP그룹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기술 협력 파트너가 필요한데, 현재까지 적합한 후보가 없는 상태였다. 이번에 제출된 것은 두 번째 후보군이었다. 유건은 한눈에 서류를 훑었다. [HUA테크, CEO 겸 총괄 엔지니어, 노은범]유건의 손가락이 ‘노은범’이라는 세 글자를 톡톡 두드렸다. 지한이 말했다. “형님, 노은범은 비록 최근에 귀국했지만, 해외 유학 시절 뛰어난 성과를 냈고, 여러 번 과학 기술상을 수상한 인재입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노은범은 매우 드문 전문가였다. 유건은 사업가이자 남자였다. 사업상의 문제를 감정과 잘 분리했고, 또한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좋아, HUA테크와 절차를 진행해.” 저녁에 유건은 부지하 등과 술자리 약속이 있었다. 유건은 노은범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있어?” “노씨 가문의 도련님 말이지.” 주정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거 못 들어봤어? 사람들이 G시 제일 미남이라고 평가했잖아.” 유건의 머릿속에 노은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유건조차도 은범이 그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시연은 노은범의 외모에 반한 거야?!’ 유건은 무의식적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답답한 숨을 내쉬었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너 여자냐? 누가 외모 얘기를 물었어?” “그럼 뭘 묻는 건데?” 유강석은 웃으며 말했다. “은범 도련님은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고, 별다른 나쁜 습관도 없어. 너처럼 남녀 관계도 깨끗하고...” 하지만, 그도 말을 돌려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너는 예전 얘기고, 지금은 본처와 첩을 두 손에 잡고 있는 상태잖아!” 유건은 침묵했다. ‘결국 노은범이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었던 거야?’ ‘좋네.’ ‘지시연도 눈이 멀진 않았고, 원하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힘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은 그녀의 진심을 속일 수 없었다. 전혀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마 되지 않는 만큼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시연에게 친절을 베풀면, 그 작은 호의조차도 그녀는 감사하게 여기며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남이 자신에게 베푼 작은 호의를 열 배로 갚으려 했다. ... 강울대학교병원을 나선 시연은 고씨 가문의 본가로 돌아갔다. 고상훈은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고, 시연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며칠 동안 네가 없어서 그런지, 우리 유건이도 뭘 그렇게 바쁜지 하루 종일 얼굴을 못 봤어. 마침 잘 됐어, 저녁에 같이 밥을 먹자.” 그러나 전화를 걸자, 유건은 말했다. [할아버지, 저 바빠서 못 돌아갑니다.] “뭐가 그렇게 바빠?” 고상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을 것 아니냐? 더군다나 시연이가 출장 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는데...” [할아버지, 회의가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고상훈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런 고얀 것! 정말 무례하군!” “할아버지.” 시연은 속으로 알고 있었다. 유건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오늘 저녁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할아버지랑 밥도 먹고, 같이 바둑도 두고, 불경도 읽어드릴게요. 괜찮죠?” “좋지, 좋지.” 순식간에 고상훈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그날 저녁, 유건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그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고유건이 돌아왔나?’ ‘침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니, 아마 아침에 돌아온 것 같네.’ 물소리가 멈추고, 유건은 욕실에서 나와 곧바로 옷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그녀를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정
유건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빛이 어두워졌다. “맞아. 왜?” “감사해요.” 시연은 그를 바라보며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어릴 때부터 저에게 잘해준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요.” 유건은 가슴속이 찌릿하게 울리며, 그 느낌이 온몸에 퍼졌고, 겨우 입꼬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흥, 그래.” “그런데...” 시연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현진아? 내 친구 외투가 너에게 있다고? 알았어... 아, 그리고 아직 너한테 고맙단 말도 못 했네. 그날 밤, 내 친구를 위해 침대를 양보해 줘서 고마워. 너무 늦었고, 비까지 쏟아져서 호텔을 못 잡았거든. 너 주사실에서 자느라 아주 피곤했지? 나중에 밥 한번 살게.” 시연은 통화하면서 유건에게 지하철역을 가리키며 자신이 바쁘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뛰어 들어갔다. “천천히 가!” 유건은 그녀가 그 말을 들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결국 올라가고 말았다. ‘이 여자가 결국 나한테 고마워하고, 내 마음을 알고 있었네!’ 게다가, 방금 시연이 전화에서 말한 내용을 유건도 아주 분명히 들었다. ‘그날 밤, 비가 쏟아지던 날, 그건 바로 노은범이 왔던 날이 아닌가?’ ‘이 여자는 노은범과 같은 방에서 자지 않았어!’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그러니까 노은범은 지시연을 버렸었고, 두 사람은 아직 화해하지 않은 상태이야! 흥!’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는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태산요양병원. 은범과 시연은 문 앞에서 서 있었다. 방 안에서는 CA국에서 온 전문가들이 우주를 검사하고 있었다. 시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손을 꼭 쥔 채 떨고 있었다. “시연아.” 은범은 시연의 옆에 서서,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
“뭐?” 강석은 갑작스럽게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누가 연애 경험이 많다고? 나에게 그런 딱지 붙이지 마! 그 여자들은 다 내 여자 친구가 아니라 그냥 친한 여사진들이라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가차 없이 눈을 굴리며 그를 향해 빈정거렸다. “헤헤.” 강석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개의치 않는 듯 웃었다. “애 있는 여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지...” “하하!” 정빈이 강석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거지. 우리 강석 도련님이 만약 마음에 들었다면, 애가 있든 없든 상관없지. 그렇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두 사람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강석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요즘 같은 시대에 애 하나 때문에 평생을 묶어두겠어?” “네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그동안 조용히 있던 지하가 끼어들며 말했다. “지금 시대가 어떻든, 옛날에 많은 나라들은 왕의 어머니도 딱 한 번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도 했지만, 결국 또 다른 군주와 결혼해 많은 자식을 낳았잖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고.” 지하는 유건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눈빛 속에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유건은 이내 흥미를 잃고, 밤 10시도 되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본가로 가는 길에 그는 문득 생각했다. ‘시연은 퇴근했을까?' 그때, 그는 우연히 버스에서 내리는 시연을 보았다. 이곳에서 집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고,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유건은 아무 말 없이 차를 그녀 가까이로 몰고, 창문을 내렸다. “타.” 시연은 남자가 유건인 것을 보고는, 거절하지 않고 차에 올랐다. “정말 우연이네요.” 차에 앉자마자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는 메시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유건은 그녀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며칠 후, 노은범은 GP그룹에 갔다. HUA테크는 GP그룹의 요구에 따라 절차를 밟았고, 오늘은 고유건을 만나러 온 날이었다. 유건의 비서가 은범을 작은 회의실로 안내했고, 은범이 막 자리에 앉자 유건이 도착했다. 은범은 일어나 인사했다. “고 대표님.” “노 사장님.” 유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악수했다. “앉으세요.” 두 사람은 짧은 인사 후 바로 협력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다. 유건은 은범의 능력에 매우 만족했고, 바로 계약을 결정했다. “협력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야말로 고 대표님께서 저희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협력 잘 부탁드립니다.” 관례에 따라 저녁에는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유건이 초대했다. “노 사장님, 저녁 식사 같이하시죠?” 은범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고 대표님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만, 잠시 후에 일정이 있어서 오늘 저녁엔 G시에 있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다음에 제가 장소를 정해서 고 대표님을 초대하겠습니다.”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은범이 떠나자마자, 유건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은 금요일인데, 노은범이 저녁에 G시에 없다고? ‘CLOUD’는 G시 밖에 있는 곳이야. 시연도 오늘 저녁에 떠난다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이 여자는, 노은범과 함께 놀러 가는 거야?!!!’ 핸드폰이 울리자 유건은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부지하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거칠게 나올 것까진 없잖아! 누가 너 건드렸어? 저녁에 우리랑 같이 안 갈 거야?] 유건은 불쾌한 기분에 답했다. “너희들이랑 술 마시고 카드 게임하는 게 그렇게 재밌겠냐?” 지하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고 대표님. 뭐가 재밌는지 말씀해 보시죠?]유건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휴가 가자. CLOUD가 좋겠군.” ... 은범은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시연보다 일찍 도착한 유건 일행은 이미 말을 타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주정빈과 유강석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유건은 시연을 주시하며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를 본 부지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왜 갑자기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말을 타자고 하나 했더니, 알고 보니 여기 우리 고 대표님의 아내가 계시네.” 유건은 지하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멈췄다. 지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아내가 방이 없어서 곤란해하는 거 보고도 안 도와줄 거야?” ‘도와주라고?’ 유건의 입술에 미소가 살짝 번졌지만, 곧 자리를 떴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옆에 딴 남자가 이미 있지.’ “시연아.” 그때, 은범이 차를 주차하고 시연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시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방을 예약하지 못한 일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 작은 문제야.” 은범은 우주를 그녀에게 맡기고 말했다. “내가 해결할게. 걱정하지 마.” 그가 나서자마자, 문제는 금세 해결되었다. 은범은 두 장의 방 키를 들고 시연에게 흔들며 말했다. “다 됐어.” 그는 짐을 들고 설명했다. “내가 VIP 카드가 있어서 사전 예약 없이도 가능해.” 시연이 여전히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은범은 부드럽게 말했다. “왜 화가 나 있어?” 시연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성빈이도 못 오게 됐어...” 알고 보니 그 일 때문에 화가 난 거였다. “괜찮아.” 은범은 미소 지으며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우리는 우주를 위해 온 거잖아. 우주가 기뻐하는 게 가장 중요해. 나머지는 사소한 문제야.” 시연은 그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미소를 지었다. “응.”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분위기가 훈훈했다. “우주 손 잘 잡고, 방에 짐부터 놓으러 가자.” “그래.” 이 광경을 목격한 지하는 깜짝 놀라며 유건을 쳐
‘그래서 그런가... 불길한 예감은 꼭 맞아떨어진다니까.’ 저녁 회의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처음엔 단순히 목이 간질간질했는데, 곧이어 재채기가 계속 나왔고, 콧물에 눈물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깜짝 놀랐다.‘뜨거워... 감기다. 몸살이 왔어.’ 그녀는 임신 중이라 함부로 약을 먹을 수도 없었고, 병원에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시연은 따뜻한 물을 끓여 계속 마시면서, 이불에 몸을 꽁꽁 감쌌다.‘이러면... 땀 나면서 열 좀 빠지겠지.’ 하지만 아무리 이불을 덮고 있어도 오한이 멈추지 않았다. 몸은 나른하고,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깐만... 쉬자...’ 그렇게, 시연은 핸드폰 진동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같은 시각, G시. 유건은 회사를 나와 BLUE로 향하던 중, 차에 올라타자마자 첫눈을 마주했다. 창밖에서는 조용히 작은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진짜 겨울이네...’ 그때, 별산장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말해.” [고 대표님, 우주 도련님께서 며칠 뒤에 건강검진 예약이 잡혀 있는데요. 이쪽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돼서, 이전 병원 기록을 요청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나한테 물어보면 뭐 해? 사모님한텐 연락 안 했어?” [네, 사모님께 먼저 연락드렸는데... 전화를 안 받으시더라고요. 바쁘신 것 같아서요.]유건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내가 해볼게.”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계속 진동음만 울릴 뿐, 받지는 않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회의는 끝났을 텐데.’ ‘잠든 건가?’ 하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럴 리 없는데...’ ‘시연이... 요즘 몸도 약해졌는데...’ 유건은 핸드폰을 꾹 쥐고 곧바로 옆자리에 앉은 지한에게 말했다. “시연이가 L시에 있는 호텔 이름 확인해.
임신 후기가 되면서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된 시연은 L시까지 가는 KTX를 예약했다. 출장 기간은 일주일. 짐도 그만큼 많았다. 다행히 양석현 교수가 챙겨줘서 특실로 표를 끊을 수 있었다. 기차에 올라 지정석을 찾아갔지만, 자리 앞에서 시연은 한참을 고민했다. ‘이거... 혼자 올릴 수 있을까?’ 배가 제법 불러온 상태. 짐이 무거워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톡 쳤다. “시연아.” 그녀가 돌아보자, 은범이 웃으며 서 있었다. “은범이...?”시연은 깜짝 놀랐지만, 그의 얼굴이 반갑긴 했다. “이 캐리어 네 거야?” “응.” “내가 해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범은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들어 선반에 올려주었다. “고마워.” “뭘, 당연히 해야지.” 두 사람의 좌석은 우연히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정말 묘한 인연. 시연은 낮게 웃으며 물었다. “난 L시에서 학회 발표가 있어서 가는 거야, 너는 출장?” “응.” 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약 복용 중이라 장거리 운전은 피하라고 하길래, 그냥 기차 타기로 했어.” ‘약...’ ‘그럼, 역시...’ 시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은범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그래서 굳이 놀라는 척도, 돌려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은범의 그 담담한 말투 안에서 시연은 뭔가 미묘한 걸 느꼈다. “내가 그거, 알고 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었구나?” “응.” 은범은 아주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그날,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웠어.” ‘역시... 알았구나.’ 시연은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 그제야 그날 이후 유건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모두 들어맞는 듯했다. “너였구나.” “응, 내가 고 대표한테 말했어.” 은범은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곧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했던 일, 정말 미안해. 그 일로 두 사람 사이가 더 꼬인 건 아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건은 미묘하게 시선을 낮추며 기다렸다. “오늘 온 거, 프로젝트 투자자로서 문 과장님이랑 양 교수님의 체면을 봐서 온 거예요? 아니면... 정말, 나 때문이에요?” ‘이 질문은... 피하지 말고 꼭 해야 해.’ 생각보다 직설적인 질문에 유건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너는,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진심으로, 그녀도 헷갈렸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전자예요.” 그 말에 유건은 피식, 짧은 웃음을 흘렸다. 비웃는 것인지, 자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럼 당연히, 전자지.” 남자의 눈매가 비죽 올라갔다. “설마, 지금... 내가 너 때문에 왔다고 생각한 거야?” 시연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유건은, 그 침묵이 곧 대답이라는 걸 알아챘다. ‘아, 진짜 그렇게 믿은 거야?’ 그는 낮게 웃었다. 어딘가 허탈한 웃음. “너, 참 재밌다.”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궁금하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한다고... 나한테 마음도 없는 여자 붙잡고 질질 끌 사람으로 보여?”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뿐이고, 내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그 말에 시연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착각했구나.’ 무안함과 동시에, 어딘가 가볍게 안도감이 스쳤다. 시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굴었네요. 그냥... 우리가 예전에 했던 그 이상한 결혼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 시절,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 감정의 거래였으니까.’ 유건의 심장이 순간에 세게 쪼여왔다. ‘이상한 결혼 생활?’ ‘그게, 너한텐 그렇게까지 나빴던 거구나.’ 가슴이 먹먹했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담담했다. “나도 그래.” 그는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유건은 계속 이해가 안 됐다.‘그 정도로 화가 났다고? 내가 온 게 그렇게 싫은 건가.’ 사실 오기 전부터 그는 이미 예상했다. 시연이 자신을 반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비록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유건도 묘하게 가슴이 쓰렸다. ‘그래...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그 순간, 유건의 머릿속에 뭔가 스쳐 지나갔다. 살짝 몸을 기울여 시연의 귀에 대고 작게 물었다. “아까 족발, 좀 아쉬웠던 거지?” 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갑자기, 웬 족발?’ 하지만 놀란 얼굴로 유건을 바라보던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헉... 들켰나?’ 유건은 그 반응 하나로 모든 걸 알아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알았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더 시켜줄게.”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애도 아니고... 고작 한 점 덜 먹었다고 삐지는 거야?” “네?!” 시연은 반사적으로 부르려다 멈췄다. ‘뭐야, 지금 이 사람 왜 이래?’ ‘어디서 갑자기 예전처럼 굴고 있는 건데...’ 시연은 헷갈렸다.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거야? 아니면 진짜... 뭔가 바뀌었나?’ 잠시 후, 더 주문한 족발이 나왔다. 유건은 그것을 직접 들어 시연 앞에 내려놓았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먹어. 너 한 사람 먹으라고 더 시킨 거야. 그리고 오늘 회식비, 내 카드로 결제했어.” “당신...” 시연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걸 해?’ 하지만 주변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런 자리에서 굳이 따질 수는 없었다. ‘이따가 따로 물어보자.’ 그녀는 결국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고, 족발을 한 점 들어 입에 넣었다. 유건은 조용히 웃었다.며칠간의 출장 때문에 쌓인 피로가 단번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시연도 두 점쯤 먹고 나자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래, 이렇게까지 했는데... 굳이 삐져 있을 필요는
‘아래층? 무슨 아래층?’ 시연은 헛기침이 나왔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던 그녀는, 곧 유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지금 1층인데, 데리러 와줄래?’‘진짜... 온 거야?’ 그리고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잠깐...” 말도 제대로 안 마친 채, 주변 눈치도 보지 않고 헐레벌떡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1층 로비로 향했다. 그곳에, 유건이 있었다. 정말로. 큰 키, 넓은 어깨, 공항에서 막 돌아온 듯한 모습.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는, 그 익숙한 실루엣. “시연아.” 유건은 시연을 발견하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길고 고된 이동 끝에도 그 눈빛엔 피곤 대신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어쩐 일이에요...” 시연은 다가가며 말했다. 그 얼굴엔 놀람만 가득했고, 기쁨은 없었다. ‘기뻐해야 하나? 아니잖아.’ 유건은 살짝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초대한 거 아니었어? 지금 보니까... 아닌가 봐?”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시연은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표정은 최대한 부드럽게 유지한 채. ‘솔직히 말하면, 진짜로 온 게 아직도 실감 안 나.’ “네가 초대한 거 맞잖아. 나는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못 간다’라고는 안 했고.” 유건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입꼬리에 묘한 웃음까지 살짝 얹었다. 그 말에 시연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아, 또 저런 말장난이네.’ ‘바쁘면 안 와도 괜찮은데... 굳이 시간 내서 오면 나는 또 ‘잘 지내는 부부’처럼 보여야 하잖아...’‘할아버지 앞에서도 그랬고, 이젠 과장님, 교수님들 앞에서도?’ 시연은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 사람이 그걸 몰랐다고?’ ‘난 우리 둘 사이, 서로 암묵적으로 선 그은 줄 알았는데.’ “사실...” 시연이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문광수 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선생!” 시연은 본
지한은 조심스럽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형님... 근데 이건 좀 너무 빡빡한 거 아닙니까?” 유건이 직접 수정한 일정표에는 거의 쉴 틈이 없었다. 식사 시간은커녕, 수면 시간도 애매했다. “괜찮아.” 유건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대로 해. 중간중간 짬 날 때 눈 좀 붙이면 돼. 빨리 마무리하면, 빨리 돌아갈 수 있잖아.” 지한은 눈을 좁히며 물었다. “형님, 급하게 복귀하시는 이유라도...?” 유건은 짧게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할아버지 혼자 병원에 계시는데, G시를 너무 오래 비우니까 좀 신경 쓰여서.” 지한이 속으로 그 대답을 믿지 않았다.‘거짓말인 티가 너무 난다...’ ‘어르신은 전담 간호사도 있고, 형님은 G시에 있어도 병실에 잘 안 가시잖아...’ 하지만 그런 말을 지한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형님 마음속엔 다른 사람이 있는 거겠지.’ ...드디어, 심폐 프로젝트팀의 축하 파티 날. 의사, 간호사, 인턴, 심지어 병동 도우미까지, 진료과 전원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출발 전, 모두가 병동 회의실에 모여 대기 중이었고, 주하은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시연의 팔짱을 꼈다. “시연아, 나랑 같이 다니자. 낯선 자리에서 혼자 있으면 어색하잖아.” “좋지.”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뭘.” 하은은 슬쩍 웃으며 시연을 흘끗 바라봤다. 그러다 못 참고 툭 던지듯 물었다. “근데... 고 대표님이랑 너, 이제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응...?” 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나랑 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 “흥... 그 눈빛은 못 속이지.” 하은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지만, 그 순간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연의 눈이 커졌다. ‘고유건’이라는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왜?’ 그녀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양석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그건 너한테 부탁할게. 부부 사이잖아, 말하기 편할 테니까.” ‘부부 사이...’ 시연은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유건이 직접 나서서 논문 사건을 해결해 줬으니, 양석현 입장에선 두 사람이 사이가 좋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이, 그런 거 아니에요, 교수님...’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시연은 결국 꾹 삼켰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번 말해볼게요. 유건 씨가 그런 거 따지는 사람은 아니지만, 요즘 워낙 바빠서요... 시간이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괜찮아.” 양석현은 부담 주지 않으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고 대표가 바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우리 문 과장님이랑 나도 충분히 이해해.” “네.” ...병실 돌아다닐 때도,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서도 시연의 머릿속은 온통 ‘전화’ 생각뿐이었다. ‘며칠 전에 도움받았는데... 이렇게 또 연락하면, 진짜 내가 고유건한테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루 종일 핸드폰을 쥐었다 놨다 반복하며 망설이던 시연은, 결국 늦은 밤, 조용한 집 안 거실에서야 조심스레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시연은 이 기다림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마치 몇 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여보세요.]낮고,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시연?]이름을 불러주는 그 한마디에 시연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왜 이렇게 긴장돼...’ 입술을 한 번 핥고 나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고 대표님.” [응?]유건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또 무슨 호칭이야? 장난치지 마. ‘고 대표님’은 너한테 해당 안 되는 말이야.]“아, 그게...” 시연은 급히 말을 이어갔다. “이번 전화는 내 사적인 용무가 아니라서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그래?] 이번엔 유건의 말투가 조금 진지해졌다
그 질문은 유건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지하가 던진 말에, 유건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래... 인정해. 난 나비 공주를... 잊은 적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장소미가 나비 공주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 감정은 자연스레 장소미에게 옮겨갔다.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생각해 봐.” 지하는 유건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였다. “기억 속 첫사랑이랑 계속 살 건지, 지금 네 앞에 있는 결혼이라는 현실과 살아갈 건지... 이제는 정해야 할 때 아냐?” “치.” 유건은 코웃음을 치며 지하를 노려봤다. “내가 장소미랑 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지만...” “넌... 내가 시연이랑 백년해로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냥... 나 놀리는 거지?” 지하는 피식 웃으며 눈을 굴렸다. “왜, 네가 더 억울한 표정이냐?” 그는 가볍게 반문하며, 유건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나만 더 묻자. 넌, 시연 씨한테 ‘한 번이라도’ 제대로 다가가 본 적 있냐?” 유건은 말문이 막혔고, 대답하지 못했다. 지하는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없지.” “그럼 넌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시연 씨가 널 좋아해 주길 바라는 건데?” ‘그냥 돈이 많아서? 능력 있어서? 그게 다야?’ 유건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그렇게 한심했나?’ 그 순간, 멀리서 강석이 당구봉을 흔들며 소리쳤다. “야, 너희 둘! 왜 거기서 연애 상담만 하냐? 와서 당구나 쳐!” “갈게!” 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겉옷을 벗었다. 일어서기 전, 유건을 다시 바라보며 덧붙였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누굴 얻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야. 그럼 세상의 ‘순정남’들은 어디서 숨 쉬고 살겠냐?” 그 말은 유건의 가슴에 조용히 박혔다. ‘나 지금,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날 밤, 유건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댔고, 다음 날엔 아무 말 없
말을 마친 유건은 웃음을 거두고, 날카롭게 내뱉었다. “빨리 꺼져.” 은주는 유건의 눈빛에 숨이 턱 막혔다. 그 안에 담긴 서늘한 분노가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그래요... 인정 안 할 거면 갈게요!” 울먹이며 뒤돌아선 은주는 그대로 뛰쳐나갔다. 은주가 사라지자, 남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 분위기, 왜 이렇게 민망하지...’ “저기, 그게...” 유건은 식은땀이 날 정도로 당황했다.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말을 꺼냈다. “오해하지 마. 그날 클럽에는 지하랑 거래처 사람들이 있었고...”“굳이 설명 안 해도 돼요.” 시연은 황급히 손을 저었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그런 설명까지 필요하진 않잖아요. 법적으로만 안 끝났지, 서로의 감정은 이미 끝났으니까.”‘당신 마음은... 장소미를 향하고 있잖아.’ ‘이제 와서 해명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 말을 들은 유건은 얼어붙은 듯 시연을 바라봤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끝났다고?’ 둘 사이에 감돌던 공기가 더 묘하게 얼어붙었다. 시연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장소미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다행이죠, 뭐. 장소미였으면, 아까 그 상황을 설명할 겨를도 없었을걸요?”그 말에 유건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하... 그 이름을... 왜 굳이 지금 꺼내는 건데.’ 시연도 순간 후회했다. ‘말... 잘못했나?’ ‘괜히 분위기 풀어보려다 더 망친 것 같아...’이렇게 생각한 시연이 헛기침하자, 유건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그는 먼저 걸음을 옮겼고, 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따라갔다. 차 안. 출발한 뒤에도 유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운전만 할 뿐. 남자의 손은 단단히 핸들을 쥐고 있었다. 표정은 차분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