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무슨 일이야?” 시연은 방으로 뛰어들어가자, 우주가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져버린 것이 보였다. 은범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확인한 후, 시연에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이미 게임의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상태가 표시되어 있었다! “...” 시연은 또다시 말을 잃었고, 마음속은 우주가 해내 보인 것들 때문에 도저히 차분할 수 없었다. 은범이 말했다. “서번트 증후군이라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 중 일부는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우주가 그런 경우인 것 같아.” “음...” 시연은 놀라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붉어진 눈시울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물이 금세 쏟아질 듯했다.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동생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고 난 후, 글을 읽고 쓰는 것에만 집중했을 뿐, 더 많은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시연은 우주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죄책감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면, 내가 우주의 가능성을 놓치고 있었던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 넌 이미 최선을 다했어.” 오랜 세월 시연과 함께해왔던 은범은 시연이 동생을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장미리 같은 새어머니와 냉정한 아버지 지동성 사이에서, 시연이 아니었다면 우주는 벌써 버려졌을 것이다. 시연은 자신이 지씨 집안에서 당한 학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우주를 위해 인내하며 살아왔다. 요양병원을 나온 은범은 시연을 학교로 데려다주었다. “우주에 대한 일은 내가 전문가와 상의할 테니 걱정하지 마. 내가 있으니까.” 만약 우주가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게 맞다면, 시연은 정말로 은범에게 큰 빚을 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우주를 위해 그 빚을 감수하기로 했다. “은범아, 고마워.” 학교 밖에는 차량이 들어갈 수 없어, 은범은 시연을 강울대학교 앞에 내려주고 떠났다. 시연이 기숙사로 향하는 중, 핸드폰이 울렸
이때, 유건의 잘생긴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동공은 축소되며 냉랭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지시연, 참 냉정한 여자였군.’ 시연의 이런 태도는 소미처럼 큰 소란을 부리는 것보다도 훨씬 타격감이 컸다. 마치 시연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뺨이라도 후려친 듯, 마음이 몹시 아려왔다. 유건의 눈썹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냉정했다. “그깟 드레스 한 벌, 더 좋은 걸로 사주면 그만이야.” “그래요.” 시연은 유건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전 들어갈게요.” 그녀는 돌아서서 다시 기숙사 쪽으로 걸어가며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시연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유건은 갑자기 손을 들어 드레스가 든 상자를 바닥에 내리칠 듯이 들어 올렸다가 곧 멈춰 섰다. 그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저 여자가 원하지 않으면 그뿐인데, 왜 화가 나는 것일까?’ 유건은 바로 돌아서서 차에 올라타고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해 거실의 불을 켠 유건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연에게 주려고 했던 그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시연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팔찌가 놓여 있었다. 이제 그 팔찌 옆에 드레스까지 추가되었다. 유건은 차가운 웃음을 터트리며 자조했다. “허! 지시연에게 주려고 했던 것들 결국 하나도 주지 못했네!” “지시연, 넌 정말 좋고 나쁨도 모르는 고집불통이야!’ ...점심때, 시연은 친구 임진아와 식사하기로 했었다. “여기!” 진아는 시연에게 서류 하나를 건넸다. “뭔데?” 진아가 대답했다. “대학원 진학 추천서야. 어제 학교에 갔는데, 네 것도 챙겨왔어.” 시연은 서류를 열어보고는 이마를 찡그렸다. “대학원 추천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 “너 성적도 좋고, 매년 장학금도 받아왔잖아. 왜, 못 할 것 같아?” 진아의 말이 맞았지만, 대학은 이미 반은 사회로 나가는 문턱이었고, 시
유건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유건 씨!]장소미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 촬영이 없어서 저희 어머니가 유건 씨와 저희 집에서 저녁 식사 함께하자고 하셨어요. 언제 저 데리러 올 수 있어요?] 그녀의 말투는 유건이 당연히 올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평소의 유건이라면 그렇게 했겠지만, 지금 그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오늘 저녁엔 일이 있어. 못 갈 것 같아.” 유건은 현재 할아버지의 병환이 가장 우선순위라 소미의 전화를 끊어버렸다. 장소미는 핸드폰을 쥐고 당황하며 충격에 빠졌다. ‘고유건이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다니!’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지, 시, 연...!!” ‘틀림없이 시연 때문이야!’ ‘지시연이 고유건의 아내 자리를 차지하고, 고유건을 못 오게 막은 것이 틀림없을 거야!!’ 소미는 화가 치밀어 핸드폰을 집어던졌고, 그것은 바닥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는 또다시 시연이 했던 말들이 떠오르며, 이를 악물고 이를 갈았다. “지시연, 이렇게 교활한 계략을 쓰다니! 해도 너무하는군!” ...병원 진료실에서 양석현과 시연은 유건에게 자세한 상황을 설명했다. “수술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환자분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서, 수술 전에 몸을 잘 추슬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술을 견디기 어려울 겁니다.”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물었다. “수술 성공률은 얼마나 됩니까?” 시연은 양석현을 한번 바라본 후 대답했다. “양 교수님은 이 분야의 권위자세요. 직접 집도하시면 성공률이 93% 이상이고, 수술 후 치료가 잘 이루어지면 5년 이상의 생존율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결과는 유건이 예상했던 것보다 나은 예상치였다. 유건은 시연을 믿으며 말했다. “그럼 네 말대로 진행해.” “알겠어요.” 시연은 작게 대답했다. “하지만 치료를 시작하려면 할아버지의 협조가 필
얼마 지나지 않아, 유건은 고상훈의 퇴원 수속을 다 마쳤다. 그날 저녁 유건과 시연도 바로 고씨 가문의 본가로 이사했다. 유건은 차를 주차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고상훈은 몸이 허약하고 기력이 없어서 집에 오자마자 바로 방으로 돌아가 쉬었다. 거실에서는 시연이 집사인 이호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사님, 할아버지 식사랑 약은 대강 이 정도예요. 제 연락처를 저장해두시고요. 잠시 후에 제가 환자를 돌보는 데에 필요한 정보가 담긴 문서를 보내 드릴 테니까 가끔 잊어버리시면 한 번씩 확인하시면 돼요.” “그거 좋네요.” 이호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엌 쪽을 가리키며 “왕 아주머니가 지금 국을 끓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상관없었지만, 사모님이 한 번 봐주시겠어요? 문제가 없는지?” “그럴게요.” 두 사람은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자연스레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지금 여기 지시연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집안 분위기가 어두워지고 혼란스러워질 줄 알았는데, 지시연이 와서 모든 걸 잘 정리해 주니 나도 마음이 놓이네.’ 유건은 먼저 고상훈의 상태를 확인한 후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서자, 방 한가운데에 그다지 크지 않은 캐리어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안에 짐이 얼마 들어있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방문이 열고 들어온 시연은 방 안에 미리 와있던 유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미안해요, 문 두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유건은 별다른 반응 없이 캐리어를 가리켰다. “이게 전부야?” “이 정도면 많은 거죠.” 시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한 계절 옷하고 책 몇 권 정도...” ‘한 계절?’ 유건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옷을 한 계절 입을 것만 가져왔어?” “네.” 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그가 왜 묻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여기서
“우주가 식중독에 걸렸대요...” 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유건은 동생 우주를 모를 테니 설명하듯 덧붙였다. “우주는 제 남동생이에요!” 유건은 순간 놀라서 몸이 굳어졌다. 시연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지시연에게도 가족이 있었구나.’ “내가 같이 갈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시연이 거절하려던 순간, 유건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서 차를 잡는 건 불가능해! 같이 가!” 유건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 동생이 걱정되지 않아?” “아, 네!” 다급한 상황에서 결국 시연은 유건을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차에 탔다. “정말 죄송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귀찮게 해서요.” 유건은 그녀를 흘깃 보며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나한테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데, 이럴 때 내가 널 안 도우면 나는 사람도 아니게?” “감사해요.” 시연은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 우주는 요양병원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시연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응급실은 사람이 많아 혼잡한 상태였다. “의사 선생님, 제가 지우주 환자 보호자예요!” 의사는 시연을 보며 말했다. “드디어 오셨네요! 빨리 위세척해야 하는데 환자가 자폐증이 있어서 소통이 어려워 협조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 마취 후 삽관할 수밖에 없습니다! 빨리 서명하세요!” 시연은 그 말을 듣고 다리가 풀려버렸다. 비록 그녀도 의사였지만, 막상 우주의 일에 있어서는 전문가로서의 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지시연!” 유건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넘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부축했다. 그는 시연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고, 그녀를 반쯤 안은 채 의자에 앉혔다. “여기서 기다려.” 시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유건은 이미 의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에 서명하면 되죠?” 의사는 유건을 보며 물었다
입술 위의 부드러운 감촉에 두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유건은 서둘러 시연에게서 떨어졌다. ‘내가 이 여자를 볼 때마다 자꾸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게 이번이 몇 번째지? 아이고, 모르겠다!!’ “흠.” 그는 가볍게 헛기침하며 어색함을 감추려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네가 안 피곤해도, 네 배 속에 있는 아이는 피곤하지 않겠어?” “네...” 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유건의 시선을 피했다. 유건은 그녀를 소파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돌아서며 말했다. “그럼 자라.” “그래요.” 하지만 시연은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두 번째였어! 고유건이 나에게 키스한 게!!’ ‘지난번엔 술에 취해서 한 실수였다지만, 이번에는 왜?!’ 시연은 손으로 입술을 만지며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장소미의 남자 친구에게 키스를 받을 수 있지?!’ ‘고유건의 입술이 얼마나 많이 장소미와 닿았을지 모를 일인데!!’ 결국 시연에게는 잠들 수 없는 밤이 이어졌다. ... 다음 날 아침, 유건은 시연을 강울대학교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리며 그는 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잠깐만, 근처 식당에서 아침 먹고 가.” 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장소미였다. 소미는 눈가가 붉게 충혈된 채로 유건과 시연 두 사람을 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미의 원망은 시연을 향했고, 슬픔은 유건을 향한 것이었다. “유건 씨... 지 선생님과 둘이서...?”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유건의 손을 뿌리쳤다. “저 먼저 갈게요.” 시연이 출근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 유건이 시연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소미는 참지 못하고 감정을 시연에게 폭발시켰다. 시연을 붙잡으며 외쳤다. “지 선생님!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가요! 설명도 없이 어디로 가려는 거
‘헤어지자고?’유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나는 장소미와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도 없는데...’하지만 자신이 한때 소미에게 결혼을 약속했던 만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순간, 소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안 돼요!! 유건 씨, 저는 헤어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소미 씨, 대답할 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유건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를 덮었다. “사실은, 소미 씨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는 거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은 지치기 마련이다. 유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미의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보며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을 충분히 하고 대답해. 만약 우리가 헤어져도, 내가 약속했던 지원은 변하지 않을 거야.” 그는 결국 소미에게 죄책감을 느꼈고, 일종의 보상이라도 하기 위한 지원을 약속했다. 유건은 자리를 떠났다. 소미는 흐르던 눈물을 닦고, 갑자기 손을 들어 탁자를 뒤엎었다. 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녀는 이를 갈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외쳤다. “지시연! 내가 이렇게 호락호락 물러날 것 같아?!!” ... 유건은 회의를 마친 뒤, 사무실로 돌아와 서류 두 개에 서명하고 그것을 주지한에게 건넸다. “지한아, Four Hours에 연락 좀 해줘.” 지한은 잠시 멈칫했다가, 유건이 미소 지으며 설명을 덧붙이자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연에게 줄 거야.” 유건과 시연이 고씨 가문의 본가로 이사한 일은 지한도 알고 있었다. Four Hours는 고급 맞춤 의류를 제작하는 곳으로, 유건이 입는 모든 옷은 이곳에서 제작하고 있었다. 이제 시연의 옷도 함께 맞추려는 것이었다. 지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결국 시연 씨에게 느끼는 형님의 감정이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네.’ “알겠어요, 형님.” ... 병원에서 시연은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엇을 하든 자꾸만 유건과 나눴던 그 키
유건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상훈은 깊은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손자를 응시했다.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지. 아내에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야.” 유건은 순간 멈칫하며 눈을 깜빡였다. “제가 뭐라고 했다고 그러세요? 별 말한 것도 없잖아요.”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 그럼 할아버지의 손주며느리가 어디 갔는지 아세요?” “나한테 묻냐?” 고상훈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아내가 어디 갔는지 네가 몰라? 그럼 너 스스로 반성해야지.” “저더러 반성하라고요?” 유건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모를 리가 없죠. 할아버지의 손주며느리가 저한테 전화하긴 했는데, 제가 그때 바빠서 못 받았을 뿐이거든요.” 고상훈은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유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유건은 왠지 불편해졌다. “할아버지,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고상훈은 단호하게 말했다. “널 보면 딱 한 가지 생각만 나. 말만 앞서는 녀석.” 유건은 그 순간 고상훈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고상훈에게 완전히 말로 당한 유건은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시연에게 전화를 걸며 중얼거렸다. “전화 안 받으면 두고 보자.” 그러나 이번에는 시연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유건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디야?” [할아버지가 말씀 안 하셨나요?]시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 [집에 들렀을 때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는데요.]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나는 너에게 물어봤는데 왜 자꾸 대답은 안 하고 나한테 다시 물어봐?” 그는 약간 화가 난 듯했다. 평소 기분 변화가 심한 남자였다. 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창우면에 있어요.] “창우면? 그게 어디야?” 유건은 기억을 더듬었지만, 창우면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거기서 뭐 하러 가 있냐?” [일하러요.] 시연은 웃
문 밖.유건, 은범, 그리고 진주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가장 먼저 진주의 핸드폰이 울렸다.“엄마. 네, 이제 끝났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진주는 은범을 바라보았다.“은범아, 우리 엄마가 집에 빨리 들어오래.”하지만 은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없이 굳어 있었다.그는 무조건 시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진주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응...”은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 시연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그러나 그때, 은범의 핸드폰이 울렸다.강수희였다.“어머니.”[은범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진주를 안 데려다준 거니? 서로 친해지는 건 좋지만, 너무 늦으면 진주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은범은 진주를 한 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강수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이제 늦었으니, 무조건 진주 데려다줘야 해. 알겠지?]이를 악물며, 은범은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고, 그는 진주를 향해 말했다.“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어?”진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그래도 돼?”“너랑 같이 왔잖아.”은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게 맞지.”시연에게는 나중에 충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가자.”“응.”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건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빛 가득한 냉소를 띄웠다.‘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었어.’그는 긴 다리를 내디뎌 은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비꼬는 듯한 미소.“어디 가려고?”“고 대표님...”은범이 답하려 했지만, 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내가 있는 한, 넌 한 발짝도 못 움직여.”은범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고 대표님, 전 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합니다.”“헛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몇 걸음 떨어진 곳.노은범과 하진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그리고 시연과 마주쳤다.“시, 시연아.”은범은 당황해 더듬거렸다.진주는 은범을 한 번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친구야?”“응, 아니... 아니야. 내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이야.”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부정했고, 더 이상 진주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시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뜻밖의 조우에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교수님이 여기서 회의 중이셔. 놓고 가신 자료를 가져다주러 왔어.”그녀가 유건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그렇구나.”은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연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엔 허공을 잡았다.시연은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은범은 순간 멍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연아?”시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엔 명확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널 방해하면 안 되잖아.”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은범은 당황했다.시연이 오해했다고 확신했다.“시연아...”“잠시만요.”진주가 갑자기 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여자의 직감은 빠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진주는 분위기를 감지했다.시연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했다.“죄송하지만, 잠깐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어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시간 없어서요. 비켜주세요.”거절이었다.진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강단 있게 나섰다.그녀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잠깐이면 돼요! 금방 끝날 말이에요.”그녀는 은범을 흘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당신이 은범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친구일 뿐이거든요.”“하고 싶으신 말, 다 하신 거예요?”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