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무슨 일이야?” 시연은 방으로 뛰어들어가자, 우주가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져버린 것이 보였다. 은범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확인한 후, 시연에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이미 게임의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상태가 표시되어 있었다! “...” 시연은 또다시 말을 잃었고, 마음속은 우주가 해내 보인 것들 때문에 도저히 차분할 수 없었다. 은범이 말했다. “서번트 증후군이라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 중 일부는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우주가 그런 경우인 것 같아.” “음...” 시연은 놀라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붉어진 눈시울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물이 금세 쏟아질 듯했다.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동생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고 난 후, 글을 읽고 쓰는 것에만 집중했을 뿐, 더 많은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시연은 우주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죄책감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면, 내가 우주의 가능성을 놓치고 있었던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 넌 이미 최선을 다했어.” 오랜 세월 시연과 함께해왔던 은범은 시연이 동생을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장미리 같은 새어머니와 냉정한 아버지 지동성 사이에서, 시연이 아니었다면 우주는 벌써 버려졌을 것이다. 시연은 자신이 지씨 집안에서 당한 학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우주를 위해 인내하며 살아왔다. 요양병원을 나온 은범은 시연을 학교로 데려다주었다. “우주에 대한 일은 내가 전문가와 상의할 테니 걱정하지 마. 내가 있으니까.” 만약 우주가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게 맞다면, 시연은 정말로 은범에게 큰 빚을 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우주를 위해 그 빚을 감수하기로 했다. “은범아, 고마워.” 학교 밖에는 차량이 들어갈 수 없어, 은범은 시연을 강울대학교 앞에 내려주고 떠났다. 시연이 기숙사로 향하는 중, 핸드폰이 울렸
이때, 유건의 잘생긴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동공은 축소되며 냉랭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지시연, 참 냉정한 여자였군.’ 시연의 이런 태도는 소미처럼 큰 소란을 부리는 것보다도 훨씬 타격감이 컸다. 마치 시연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뺨이라도 후려친 듯, 마음이 몹시 아려왔다. 유건의 눈썹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냉정했다. “그깟 드레스 한 벌, 더 좋은 걸로 사주면 그만이야.” “그래요.” 시연은 유건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전 들어갈게요.” 그녀는 돌아서서 다시 기숙사 쪽으로 걸어가며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시연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유건은 갑자기 손을 들어 드레스가 든 상자를 바닥에 내리칠 듯이 들어 올렸다가 곧 멈춰 섰다. 그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저 여자가 원하지 않으면 그뿐인데, 왜 화가 나는 것일까?’ 유건은 바로 돌아서서 차에 올라타고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해 거실의 불을 켠 유건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연에게 주려고 했던 그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시연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팔찌가 놓여 있었다. 이제 그 팔찌 옆에 드레스까지 추가되었다. 유건은 차가운 웃음을 터트리며 자조했다. “허! 지시연에게 주려고 했던 것들 결국 하나도 주지 못했네!” “지시연, 넌 정말 좋고 나쁨도 모르는 고집불통이야!’ ...점심때, 시연은 친구 임진아와 식사하기로 했었다. “여기!” 진아는 시연에게 서류 하나를 건넸다. “뭔데?” 진아가 대답했다. “대학원 진학 추천서야. 어제 학교에 갔는데, 네 것도 챙겨왔어.” 시연은 서류를 열어보고는 이마를 찡그렸다. “대학원 추천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 “너 성적도 좋고, 매년 장학금도 받아왔잖아. 왜, 못 할 것 같아?” 진아의 말이 맞았지만, 대학은 이미 반은 사회로 나가는 문턱이었고, 시
유건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유건 씨!]장소미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 촬영이 없어서 저희 어머니가 유건 씨와 저희 집에서 저녁 식사 함께하자고 하셨어요. 언제 저 데리러 올 수 있어요?] 그녀의 말투는 유건이 당연히 올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평소의 유건이라면 그렇게 했겠지만, 지금 그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오늘 저녁엔 일이 있어. 못 갈 것 같아.” 유건은 현재 할아버지의 병환이 가장 우선순위라 소미의 전화를 끊어버렸다. 장소미는 핸드폰을 쥐고 당황하며 충격에 빠졌다. ‘고유건이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다니!’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지, 시, 연...!!” ‘틀림없이 시연 때문이야!’ ‘지시연이 고유건의 아내 자리를 차지하고, 고유건을 못 오게 막은 것이 틀림없을 거야!!’ 소미는 화가 치밀어 핸드폰을 집어던졌고, 그것은 바닥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는 또다시 시연이 했던 말들이 떠오르며, 이를 악물고 이를 갈았다. “지시연, 이렇게 교활한 계략을 쓰다니! 해도 너무하는군!” ...병원 진료실에서 양석현과 시연은 유건에게 자세한 상황을 설명했다. “수술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환자분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서, 수술 전에 몸을 잘 추슬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술을 견디기 어려울 겁니다.”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물었다. “수술 성공률은 얼마나 됩니까?” 시연은 양석현을 한번 바라본 후 대답했다. “양 교수님은 이 분야의 권위자세요. 직접 집도하시면 성공률이 93% 이상이고, 수술 후 치료가 잘 이루어지면 5년 이상의 생존율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결과는 유건이 예상했던 것보다 나은 예상치였다. 유건은 시연을 믿으며 말했다. “그럼 네 말대로 진행해.” “알겠어요.” 시연은 작게 대답했다. “하지만 치료를 시작하려면 할아버지의 협조가 필
얼마 지나지 않아, 유건은 고상훈의 퇴원 수속을 다 마쳤다. 그날 저녁 유건과 시연도 바로 고씨 가문의 본가로 이사했다. 유건은 차를 주차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고상훈은 몸이 허약하고 기력이 없어서 집에 오자마자 바로 방으로 돌아가 쉬었다. 거실에서는 시연이 집사인 이호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사님, 할아버지 식사랑 약은 대강 이 정도예요. 제 연락처를 저장해두시고요. 잠시 후에 제가 환자를 돌보는 데에 필요한 정보가 담긴 문서를 보내 드릴 테니까 가끔 잊어버리시면 한 번씩 확인하시면 돼요.” “그거 좋네요.” 이호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엌 쪽을 가리키며 “왕 아주머니가 지금 국을 끓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상관없었지만, 사모님이 한 번 봐주시겠어요? 문제가 없는지?” “그럴게요.” 두 사람은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자연스레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지금 여기 지시연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집안 분위기가 어두워지고 혼란스러워질 줄 알았는데, 지시연이 와서 모든 걸 잘 정리해 주니 나도 마음이 놓이네.’ 유건은 먼저 고상훈의 상태를 확인한 후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서자, 방 한가운데에 그다지 크지 않은 캐리어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안에 짐이 얼마 들어있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방문이 열고 들어온 시연은 방 안에 미리 와있던 유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미안해요, 문 두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유건은 별다른 반응 없이 캐리어를 가리켰다. “이게 전부야?” “이 정도면 많은 거죠.” 시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한 계절 옷하고 책 몇 권 정도...” ‘한 계절?’ 유건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옷을 한 계절 입을 것만 가져왔어?” “네.” 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그가 왜 묻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여기서
“우주가 식중독에 걸렸대요...” 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유건은 동생 우주를 모를 테니 설명하듯 덧붙였다. “우주는 제 남동생이에요!” 유건은 순간 놀라서 몸이 굳어졌다. 시연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지시연에게도 가족이 있었구나.’ “내가 같이 갈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시연이 거절하려던 순간, 유건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서 차를 잡는 건 불가능해! 같이 가!” 유건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 동생이 걱정되지 않아?” “아, 네!” 다급한 상황에서 결국 시연은 유건을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차에 탔다. “정말 죄송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귀찮게 해서요.” 유건은 그녀를 흘깃 보며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나한테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데, 이럴 때 내가 널 안 도우면 나는 사람도 아니게?” “감사해요.” 시연은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 우주는 요양병원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시연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응급실은 사람이 많아 혼잡한 상태였다. “의사 선생님, 제가 지우주 환자 보호자예요!” 의사는 시연을 보며 말했다. “드디어 오셨네요! 빨리 위세척해야 하는데 환자가 자폐증이 있어서 소통이 어려워 협조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 마취 후 삽관할 수밖에 없습니다! 빨리 서명하세요!” 시연은 그 말을 듣고 다리가 풀려버렸다. 비록 그녀도 의사였지만, 막상 우주의 일에 있어서는 전문가로서의 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지시연!” 유건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넘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부축했다. 그는 시연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고, 그녀를 반쯤 안은 채 의자에 앉혔다. “여기서 기다려.” 시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유건은 이미 의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에 서명하면 되죠?” 의사는 유건을 보며 물었다
입술 위의 부드러운 감촉에 두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유건은 서둘러 시연에게서 떨어졌다. ‘내가 이 여자를 볼 때마다 자꾸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게 이번이 몇 번째지? 아이고, 모르겠다!!’ “흠.” 그는 가볍게 헛기침하며 어색함을 감추려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네가 안 피곤해도, 네 배 속에 있는 아이는 피곤하지 않겠어?” “네...” 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유건의 시선을 피했다. 유건은 그녀를 소파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돌아서며 말했다. “그럼 자라.” “그래요.” 하지만 시연은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두 번째였어! 고유건이 나에게 키스한 게!!’ ‘지난번엔 술에 취해서 한 실수였다지만, 이번에는 왜?!’ 시연은 손으로 입술을 만지며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장소미의 남자 친구에게 키스를 받을 수 있지?!’ ‘고유건의 입술이 얼마나 많이 장소미와 닿았을지 모를 일인데!!’ 결국 시연에게는 잠들 수 없는 밤이 이어졌다. ... 다음 날 아침, 유건은 시연을 강울대학교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리며 그는 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잠깐만, 근처 식당에서 아침 먹고 가.” 시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장소미였다. 소미는 눈가가 붉게 충혈된 채로 유건과 시연 두 사람을 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미의 원망은 시연을 향했고, 슬픔은 유건을 향한 것이었다. “유건 씨... 지 선생님과 둘이서...?”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유건의 손을 뿌리쳤다. “저 먼저 갈게요.” 시연이 출근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 유건이 시연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소미는 참지 못하고 감정을 시연에게 폭발시켰다. 시연을 붙잡으며 외쳤다. “지 선생님!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가요! 설명도 없이 어디로 가려는 거
‘헤어지자고?’유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나는 장소미와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도 없는데...’하지만 자신이 한때 소미에게 결혼을 약속했던 만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순간, 소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안 돼요!! 유건 씨, 저는 헤어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소미 씨, 대답할 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유건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를 덮었다. “사실은, 소미 씨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는 거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은 지치기 마련이다. 유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미의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보며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을 충분히 하고 대답해. 만약 우리가 헤어져도, 내가 약속했던 지원은 변하지 않을 거야.” 그는 결국 소미에게 죄책감을 느꼈고, 일종의 보상이라도 하기 위한 지원을 약속했다. 유건은 자리를 떠났다. 소미는 흐르던 눈물을 닦고, 갑자기 손을 들어 탁자를 뒤엎었다. 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녀는 이를 갈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외쳤다. “지시연! 내가 이렇게 호락호락 물러날 것 같아?!!” ... 유건은 회의를 마친 뒤, 사무실로 돌아와 서류 두 개에 서명하고 그것을 주지한에게 건넸다. “지한아, Four Hours에 연락 좀 해줘.” 지한은 잠시 멈칫했다가, 유건이 미소 지으며 설명을 덧붙이자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연에게 줄 거야.” 유건과 시연이 고씨 가문의 본가로 이사한 일은 지한도 알고 있었다. Four Hours는 고급 맞춤 의류를 제작하는 곳으로, 유건이 입는 모든 옷은 이곳에서 제작하고 있었다. 이제 시연의 옷도 함께 맞추려는 것이었다. 지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결국 시연 씨에게 느끼는 형님의 감정이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네.’ “알겠어요, 형님.” ... 병원에서 시연은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엇을 하든 자꾸만 유건과 나눴던 그 키
유건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상훈은 깊은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손자를 응시했다.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지. 아내에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야.” 유건은 순간 멈칫하며 눈을 깜빡였다. “제가 뭐라고 했다고 그러세요? 별 말한 것도 없잖아요.”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 그럼 할아버지의 손주며느리가 어디 갔는지 아세요?” “나한테 묻냐?” 고상훈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아내가 어디 갔는지 네가 몰라? 그럼 너 스스로 반성해야지.” “저더러 반성하라고요?” 유건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모를 리가 없죠. 할아버지의 손주며느리가 저한테 전화하긴 했는데, 제가 그때 바빠서 못 받았을 뿐이거든요.” 고상훈은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유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유건은 왠지 불편해졌다. “할아버지,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고상훈은 단호하게 말했다. “널 보면 딱 한 가지 생각만 나. 말만 앞서는 녀석.” 유건은 그 순간 고상훈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고상훈에게 완전히 말로 당한 유건은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시연에게 전화를 걸며 중얼거렸다. “전화 안 받으면 두고 보자.” 그러나 이번에는 시연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유건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디야?” [할아버지가 말씀 안 하셨나요?]시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 [집에 들렀을 때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는데요.]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나는 너에게 물어봤는데 왜 자꾸 대답은 안 하고 나한테 다시 물어봐?” 그는 약간 화가 난 듯했다. 평소 기분 변화가 심한 남자였다. 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창우면에 있어요.] “창우면? 그게 어디야?” 유건은 기억을 더듬었지만, 창우면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거기서 뭐 하러 가 있냐?” [일하러요.] 시연은 웃
시연은 온몸이 찌릿하게 굳었고,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로얄호텔... 그날 밤... 그 남자...’ 애써 잊으려 했지만, 그건 분명 시연의 가슴 깊숙이 박힌 가시였다.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찔림. 그런데 소미가 지금 그걸 언급했다. ‘무슨 뜻이지? 설마... 뭔가 알아낸 거야?’ 시연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고, 소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너, 뭘 안다는 거야?” 시연은 숨을 참으며 다그쳤다. “그날... 그 남자, 누구야?” [진정해.] 소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 지금 강울대 뒷골목에 있어. 우리 잠깐 만나자. 내가 아는 걸 다 말해줄게.] “좋아.” 시연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근무 중 자리를 비우는 그녀를, 기환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소미가 보낸 주소를 따라, 시연은 강울대 후문 쪽에 있는 한 중식당으로 갔다. 물론, 식사하러 가는 건 아니었다. 그 식당엔 단독 룸이 있었고, 대화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먼저 도착한 시연은, 소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환은 무슨 일인지 몰라 식당 입구에서 대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미가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장소미 씨?” 기환은 의아해졌다. ‘설마 형수님이 만날 사람이 장소미 씨였어?’ “기환 씨.” 소미는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여기, 밀크티예요. 아까 주차하러 가는 길에 사 왔어요.” “아...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장소미 씨 드시죠.” “괜히 사 온 거 아니에요. 시연이도 있으니, 정기환 씨도 있을 것 같아서 석 잔 산 거예요. 안 드시면 그냥 버릴 수밖에 없는데요?” “그럼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기환은 어쩔 수 없이 받아서 들었다. “천만에요.” 소미는 환하게 웃은 후, 나머지 두 잔을 들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기환은 밀크티를 들고 복잡한 표정으로 생
“들어가시죠.” “응.”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밀어 열었다. 방 안엔 이미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말라보였지만, 한 명은 비대한 체격. 여자가 들어서자, 두 사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 마른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금은, 가져왔지?” 여긴 이태길, G시에서 알아주는 암시장이자,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될 모든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이곳의 규칙은 단 하나. 오직 현금을 이용하는 것.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 “응.” 그녀는 미리 준비해 온 여행용 가방을 들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마른 남자가 옆의 뚱뚱한 남자를 흘끔 보더니, 둘이 함께 다가와 가방을 열었다. 현금다발을 일일이 확인한 뒤, 이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시킨 일, 내용은 다 이해했어.” “좋아.” 여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끝나는 대로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때 잔금을 줄게.” “거래 성사.” 이 말을 마친 여자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모자챙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놀란 여자가 허둥지둥 줍기 전에, 마른 남자가 손을 뻗어 먼저 집어 들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내밀었다. “여기.”여자는 얼른 모자를 받아서 들었지만,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시선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뭘 그렇게 봐?” “아, 그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서. 우리... 예전에 본 적 있나?” “아니거든.” 여자는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뱉고, 단숨에 자리를 떠났다. ‘기분 나빠...’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를 벗어나 골목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고 거칠게 숨을 몰아쉰 그녀는 전혀 생각지 못한 듯했다. ‘설마 했는데... 이 암시장에서 잡은 놈들이 그 둘일 줄은 몰랐네.’ ‘하마터면... 들킬
탈의실 한가운데엔, 의료진이 환복할 때 앉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시연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의식을 잃은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유건은 물론, 함께 들어온 간호사도 깜짝 놀랐다. “지 선생님, 왜 이러시죠?” “여보!” 유건은 단숨에 뛰어 들어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간호사님, 당장 의사 좀 불러주세요! 제 아내는... 임신 중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간호사가 급히 뛰쳐나가려던 찰나, 유건의 품에 안긴 시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으...음...” 유건은 얼떨떨했다. ‘여보...?’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눈빛으로 유건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탈의실이었다. “여긴...? 당신, 어떻게 들어왔어요?” ‘설마 이젠 수술실까지 침입하는 건가? 이 사람...?’“정신 좀 들어?” 유건은 대답 대신 그녀를 꼭 안은 채 그대로 걸어 나가려 했다. “어디 불편해? 쓰러질 때 부딪힌 데는 없어?” “어...어어?” 시연은 놀라 입을 벌렸다. “쓰러졌다고요?” 그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아... 이건 완전한 착각이잖아.’“내려줘요.” 시연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난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쓰러졌잖아.” “아니, 쓰러진 게 아니라...” 결국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어요.” 이번 수술을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중간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긴 했지만, 시연은 끝까지 버텼고, 체력이 바닥나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으려다 잠시 벤치에 앉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던 거였다. “진짜예요. 그냥 잠들었어요.” “잠든 거라고?” 유건은 여전히 믿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 당신 생각만큼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요. 수술 끝났다고 바로 기절하는 스타일 아니라고요.” 옆에
시연은 유건을 조심스럽게 놓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봐요.” “응.” 그녀는 뒤돌아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문이 서서히 닫히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밖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유건은 처음으로, 시간이 이렇게까지 더디게 흐르는 걸 느꼈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 곧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지한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형님, 수술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잠깐 뭐라도 드시죠.” 하지만 유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안 먹을래.” 진심이었다. 그는 무언가 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고도의 긴장 상태에서는 배고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유건은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눈썹을 깊게 찌푸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시연이가 분명... 이번 수술은 양석현 교수가 직접 지도하는 거고, 큰 수술이 아니라고 했었는데...’‘잘만 되면 정오쯤이면 끝날 거라고... 그런데 지금이 몇 시지?’ 벌써 12시를 넘겼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유건의 가슴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불안하게 걸음을 옮겼다. 지한과 다른 이들도 그 모습을 지켜봤지만,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결국 한 시간 반이 지나, 오후 두 시가 가까워질 무렵 수술실 문이 열렸다. “할아버지!” 유건은 누구보다 먼저 뛰어갔다. 지한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간호사가 밀고 나온 수술대 위, 고상훈은 조용히 누워 있었고, 팔에는 아직 링거가 꽂혀 있었다. 곧이어 양석현 교수가 마스크를 벗고 나왔다. 그는 유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 대표님.” “교수님...” “수술은 아주 잘 됐습니다.” 양석현은 침착하게 말했다. “다만 어르신의 회복력이 떨어질 수 있어서 48시간 정도는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큰 문제가 없다면, 그 후엔
그 한마디가 소미의 뇌리에 박혔다.‘그래...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난 아직 포기할 수 없어.’‘그리고... 내 손에는 아직 남은 패도 있으니까.’ 그 순간, 눈물이 뚝 그쳤다. “늦었네, 이만 올라가서 쉬자.” “네...” 모녀는 서로의 팔짱을 끼고 계단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발밑을 가득 메운 아기용품들에 막혀 걸음을 멈췄다. “쳇!” 장미리는 갑자기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박스를 몇 번이나 세게 차도 성에 안 찼다. “네 아빠, 병에 걸리더니 이젠 정신까지 나갔나 봐. 죽기 전에 후회한들 뭐가 달라지니?” “엄마.” 소미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조용히 말했다. “아빠, 병 걸리고 나서 좀 달라졌잖아요. 너무 방심하지 마세요.” “왜?” 장미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몸 가지고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서 그래?” “그게 아니라...” 소미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지시연이랑 지우주 쪽이 걱정돼요.” 장미리는 단번에 그 의미를 알아챘고,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너 지금... 그 둘한테 돈 줄까 봐 걱정하는 거야?” “네.” 소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마, 이 집안의 돈은 엄마가 잘 관리해야 해요. 아빠가 몰래 두 사람한테 뭔가 주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요.” “네 아빠 감히...?” 장미리는 눈을 부라리며 이를 악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이 집을 십수 년 동안 지킨 사람이야. 내가 그런 허튼 꼴 당할까 봐?” “아니면 다행이고요.” 금요일.오늘은 고상훈의 수술 날이었다. 아침 일찍, 유건과 시연은 병원에 도착했고, 모든 수술 전 준비는 이미 마무리된 상태였다. 고상훈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채 병상에 앉아 있었고, 유건은 곁에서 말벗이 되어주고 있었다. 시연은 수술 준비 때문에 밖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유건이 고상훈의 손을 꼭 잡았다. 오히려 고상훈보다 손자의 얼
소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이 집구석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네...’ 그녀의 시선이 장미리가 들고 온 박스들로 향했다. 전부... 아기용품이었다. 놀란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설마, 진짜예요?” ‘설마 진짜 밖에 여자가 있어서... 애까지?’ 이쯤 되면 장미리의 의심이 헛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정말 너무 수상했다. “소미야...!” 장미리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 으흐흑...” 지동성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며, 한결같이 말했다. “그런 일 없었다니까.” “그럼 이건 다 뭐예요?” 소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가 거짓말하는 건 같진 않아. 그럼 이 많은 아기용품은 대체 왜?” “선물하려고 산 거야.” 결국 지동성이 입을 열었다. “하! 웃기고 있네요!” 장미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 우리 집 사람들 경조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챙기는 사람이에요” “요즘 주변에 임신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믿든 말든 당신 마음이지.” 지동성은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미야, 너도 들었지?” 장미리는 억울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울먹였다. 소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빠의 행동... 확실히 요즘 너무 이상해.’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아빠, 엄마가 이미 다 알아버렸잖아요.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건 어때요? 계속 숨기다간... 더 골치 아파질 거예요.” “소미야?” 장미리는 놀라 소리쳤다. “너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소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아빠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지동성은 입을 뗄 듯 말 듯 망설였다.그 모습에, 소미의 뇌리를 번뜩 스치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설마... 최근 들어 아빠가 보여준 수상한 움직임... 전부 지시연 때문인가?’ “아빠... 이거
기환은 시연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보고 급히 손을 뻗었다. “형수님, 괜찮으세요?”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근데... 내가 한때 사랑했고,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그 사람이...’‘그 사람이 병들었어. 그것도, 너무 많이...’기환은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시연을 본가까지 바래다주었다. 왕성애와 이호민에게 그녀를 맡긴 뒤, 유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형님, 형수님이 노은범 사장님을 만난 건 아니지만, 진료차트를 보고 오셨습니다.” [알겠어.]전화를 끊은 유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노은범이... 우울증이라니...’ 그날 밤. 유건이 본가로 돌아왔을 때, 시연은 이미 잠든 상태였다. 그는 조용히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가가 살짝 부어 있었는데, 많이 운 모양이었다. ‘내 아내가... 다른 남자를 위해 울다니.’ “됐어.” 유건은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만 봐준다. 딱, 이번 한 번만.” ...그 시각, 장소미는 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건, 장미리의 날카로운 고함이었다. “말 좀 해봐요! 당신, 벙어리라도 된 거예요?” 며칠 전 퇴원한 지동성은 간 이식 대기 중이라, 당분간은 외래 치료로 버티고 있었다. “뭘 자꾸 설명하라는 거야?!” 지동성은 피곤한 얼굴로 짜증을 냈다. “분명히 말했잖아.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하? 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 장미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비웃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당신, 사람을 기만하는 재주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네요!” 그때, 소미가 들어왔다. “엄마, 아빠, 또 왜 그러세요?” 부부싸움이 일상이 된 이 집안에서, 소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소미야!” 장미리는 다급히 딸을 붙잡고, 손가락으로 지동성을 가리켰다. “너 잘 왔다. 엄마 좀 도와줘. 너희 아빠...
심재규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것들, 시연은 스스로 다 알 수 있었다. “그건...” 기환이 아직도 망설이자, 시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같이 가요. 제 말이 거짓말이라면... 당장 절 묶어서 끌고 가세요.” 그러곤 간절히 덧붙였다. “부탁이에요, 기환 씨, 은범이는... 제 친구예요. 지금 많이 아픈 것 같아요. 아주 심하게.” “그럼, 알겠습니다.” 시연의 간절함에 결국 기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혹시라도 시연이 은범을 직접 만나게 될까 봐, 기환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뒤따르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시연은 익숙하게 응급 외과로 향했고, 은범의 진료차트를 어렵지 않게 열람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트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병력, 과거력란에서 시선이 멈췄다.‘우울증 병력, 3년?’‘왼쪽 손목 자해 흉터... 영구적 손상?’그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뻐근했다. 옆에 있던 당직 간호사가 말을 걸었다. “지 선생님, 지인분이세요?” “네.” 시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드릴게요. 많이 도와주세요.” “물론이죠.”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히 외상은 크지 않아요. 아직 젊으니까 회복도 빠르고요. 근데...” 간호사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우울증이 꽤 심해요. 밤새 잠도 못 자고, 반복 행동도 있고... 오늘 정신과 교수님도 다녀가셨어요. 좀 나아진 것 같긴 한데...” 그 뒤로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연의 머릿속은 엉망이 되었다가, 이내 텅 비어버렸다. “부탁드릴게요.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지 선생님.” 진료차트를 돌려주고, 시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병실을 빠르게 벗어났고, 끝내 은범과 만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기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시연은 점점 걸음을 재촉했고, 이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시연이? 우리 시연이, 너무 오랜만에
“네.”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딱히 움직임은 없어요. 아마, 자기들 살기 바쁠 거예요.” 고상훈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때마침 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수술 날짜 정해졌어요. 이번 주 금요일인데, 그날은 할아버지 한 분만 수술이 잡혀 있어서 양석현 교수님께서 직접 집도하실 거예요. 물론 저도 양 교수님 곁에서 그분을 도와드릴 거고요. 할아버지, 제가 같이 있어 드릴게요.” “그래, 잘 됐구나.” 고상훈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착한 손자며느리가 옆에 있는데, 내가 뭐가 무섭겠냐.” 수술 이야기를 마친 뒤, 유건은 먼저 병원을 나서 회사로 향했다. 시연은 고상훈 곁에 조금 더 머물다가 병실을 나섰다. 그런데 복도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심재규였다. 그는 유건이 우주를 위해 따로 모셔 온 정신과 교수였다. “심 교수님?” “사모님.” 심재규 역시 시연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시간이라면, 그는 분명 태산요양병원에 있어야 할 터였다. 그래서 심재규도 급히 해명했다. “오늘 진행해야 할 우주 군의 치료 일정은 모두 끝났습니다. 요양병원을 떠나기 전에 최예민 선생님께 인수인계도 다 해뒀고요.” “혹시라도 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급한 볼일이 생기는 바람에... 바로 처리하고 돌아갈 겁니다.” 시연은 손을 내저었다. “교수님, 긴장하지 마세요. 따지러 온 건 아니니까요.” 그 말투와 표정이 진심처럼 느껴져, 심재규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제 환자 중 한 분이 지난번에 다쳤는데, 이후로 통 진료를 받으러 못 오셔서요. 시간 날 때 한번 보려고 들렀습니다.” “환자 보러 오신 거였군요?” 같은 의료인으로서, 시연은 그런 의사들을 가장 존경했다. ‘역시 심 교수님은 진짜 의사야.’ “교수님처럼 진심으로 환자를 생각하시는 분께 뭐라 할 이유는 없죠.” “사모님,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