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자고?’유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나는 장소미와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도 없는데...’하지만 자신이 한때 소미에게 결혼을 약속했던 만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순간, 소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안 돼요!! 유건 씨, 저는 헤어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소미 씨, 대답할 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유건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를 덮었다. “사실은, 소미 씨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는 거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은 지치기 마련이다. 유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미의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보며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을 충분히 하고 대답해. 만약 우리가 헤어져도, 내가 약속했던 지원은 변하지 않을 거야.” 그는 결국 소미에게 죄책감을 느꼈고, 일종의 보상이라도 하기 위한 지원을 약속했다. 유건은 자리를 떠났다. 소미는 흐르던 눈물을 닦고, 갑자기 손을 들어 탁자를 뒤엎었다. 방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녀는 이를 갈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외쳤다. “지시연! 내가 이렇게 호락호락 물러날 것 같아?!!” ... 유건은 회의를 마친 뒤, 사무실로 돌아와 서류 두 개에 서명하고 그것을 주지한에게 건넸다. “지한아, Four Hours에 연락 좀 해줘.” 지한은 잠시 멈칫했다가, 유건이 미소 지으며 설명을 덧붙이자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연에게 줄 거야.” 유건과 시연이 고씨 가문의 본가로 이사한 일은 지한도 알고 있었다. Four Hours는 고급 맞춤 의류를 제작하는 곳으로, 유건이 입는 모든 옷은 이곳에서 제작하고 있었다. 이제 시연의 옷도 함께 맞추려는 것이었다. 지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결국 시연 씨에게 느끼는 형님의 감정이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네.’ “알겠어요, 형님.” ... 병원에서 시연은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엇을 하든 자꾸만 유건과 나눴던 그 키
유건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상훈은 깊은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손자를 응시했다.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지. 아내에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야.” 유건은 순간 멈칫하며 눈을 깜빡였다. “제가 뭐라고 했다고 그러세요? 별 말한 것도 없잖아요.”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 그럼 할아버지의 손주며느리가 어디 갔는지 아세요?” “나한테 묻냐?” 고상훈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아내가 어디 갔는지 네가 몰라? 그럼 너 스스로 반성해야지.” “저더러 반성하라고요?” 유건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모를 리가 없죠. 할아버지의 손주며느리가 저한테 전화하긴 했는데, 제가 그때 바빠서 못 받았을 뿐이거든요.” 고상훈은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유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유건은 왠지 불편해졌다. “할아버지,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고상훈은 단호하게 말했다. “널 보면 딱 한 가지 생각만 나. 말만 앞서는 녀석.” 유건은 그 순간 고상훈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고상훈에게 완전히 말로 당한 유건은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시연에게 전화를 걸며 중얼거렸다. “전화 안 받으면 두고 보자.” 그러나 이번에는 시연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유건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디야?” [할아버지가 말씀 안 하셨나요?]시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 [집에 들렀을 때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는데요.]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나는 너에게 물어봤는데 왜 자꾸 대답은 안 하고 나한테 다시 물어봐?” 그는 약간 화가 난 듯했다. 평소 기분 변화가 심한 남자였다. 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창우면에 있어요.] “창우면? 그게 어디야?” 유건은 기억을 더듬었지만, 창우면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는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거기서 뭐 하러 가 있냐?” [일하러요.] 시연은 웃
창우면.이 시각, 영광병원은 이미 한바탕 혼란 속에 휩싸였다. 겉으로 보기엔 혼잡해 보이지만, 모두가 산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구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의료봉사는 원래 병원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연은 산사태가 일어난 그 산속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시연은 산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아와 김현진도 함께였다.“시연아, 준비 다 했어? 얼른 차에 타!”“응, 다 했어!”시연은 약상자를 메고, 양팔에는 산화에틸렌 소독 팩을 안은 채 마당으로 뛰어나갔다.“시연아, 그거 내가 들어줄게.”진아가 시연의 짐을 받아 들고, 현진과 함께 시연을 트럭에 올려주었다.차는 산 입구까지 달려가서 멈췄다.“여기부터는 걸어가야 해.”남자인 현진은 가장 무겁고 많은 짐을 들고 있었다.진아는 조용히 시연에게 속삭였다. “현진이 진짜 괜찮지 않아? 한 번 사귀어 볼 생각이 전혀 없는 거야?”“일이나 하자.”시연 그 질문에 대답할 마음이 없었다. ‘생각할 게 뭐가 있어? 내 배 속에 있는 아기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이제 곧 3개월이 다 되어간다!’‘아기를 지울 거라면, 빨리 결정을 내려야지, 더 늦어지면 내 몸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데...’산사태 현장에는 소방대가 이미 도착해 있었고, 의료팀을 위해 텐트를 쳐서 비워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시연과 팀원들은 도착하자마자 즉시 구조 작업에 투입되었다.오후 두 시가 다 되어 모두 교대로 급하게 도시락을 몇 입씩 먹었다.“시연아!”시연이 힘겹게 밥을 넘기고 있을 때, 뒤에서 이번 팀의 리더인 장성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교수님.”시연 서둘러 일어났다. 양석현 때문에 장성산은 늘 시연을 좋게 보지 않았다.역시나, 이번에도 장성산은 입을 열면 시연에게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짐 챙겨. 곧 산사태 현장으로 들어가서 응급처치해!”“알겠습니다, 교수님.”이미 그쪽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시연은 절반만 먹은 도시락을 내려놓고 집
“고, 고...” 진아는 놀라서 더듬거렸다. 하지만 유건은 이런 상황에서 참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묻잖아, 누가 지시연에게 어떻게 했다고?” “그게 말이죠...” 눈앞의 남자는 평범하지 않아 보였다. 현진은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고, 좀 더 덧붙였다. “지금 시연이와 연락이 안 돼요.” 이야기를 다 들은 유건의 얇은 입술은 일직선으로 굳어졌고, 그의 깊은 눈동자는 마치 짙은 먹물을 뿌린 듯 어둡고 무서웠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건가.” 그리고 이어서 그도 지시를 내렸다. “지한아, 민환, 기환, 나랑 같이 가자!” “네, 형님.” 유건 일행은 산사태 지역으로 들어갔다. 현진의 말대로 아무도 시연이를 본 적이 없었다. 지한과 민환 형제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유건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었다. 유건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 그의 이마에서는 미세하게 뛰고 있는 혈관이 보였다. 그는 무겁게 말했다. “지한아, 헬기를 준비해. 더 깊이 들어간다. 산 전체를 뒤엎어서라도 지시연을 찾아내야 해.” “네, 형님!” 지한의 목소리마저 긴장에 차 있었다.... 밤은 점점 짙어갔다. 산 위로 헬기의 굉음이 들려왔고, 하늘에서 강한 빛줄기가 아래로 내려와 산을 훑었다. ... 이때 시연은 여덟, 아홉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 남자아이는 무너진 동굴에서 시연이 간신히 구해낸 아이였다. 그래서 그녀의 두 손은 상처투성이에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손톱도 두 개나 부러져 있었다. 남자아이는 다리가 부러져 한 발짝도 걸을 수 없었고, 시연은 아이를 업고 길을 나섰다. 그녀는 이 산길에 익숙하지 않아 길을 잃었고, 아직 산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엉엉...” 등 위에서 남자아이가 울고 있었다. “누나, 너무 아파요.” 시연은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의 동생인 우주를 떠올리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심장은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좋아해?” 유건은 손가락으로 시연의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다시 물었다. “내가 너에게 키스하는 거, 좋아하냐고?” 시연은 충격에 말을 잃었다. 오직 유건의 심장 고동 소리만, 쉴 새 없이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유건은 다시 고개를 숙여 시연의 입술을 붙잡았다. 시연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상큼한 향기, 마치 신선한 귤처럼 코끝을 감싸며 그를 매료시켰다. “고 대표님!” 갑작스러운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이 로맨틱한 순간을 깨뜨렸다. 시연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유건을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품이 비어 있자, 유건은 굳어진 얼굴로 남자를 향해 싸늘한 눈길을 보냈다. “뭐야?” “그게, 말이죠...” 남자는 그들과 함께 온 현지 주민으로,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저희 마을 사람들이 아직 실종된 분들이 있어서, 혹시 헬기를 잠깐 빌릴 수 있을까 해서요.” 유건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써도 돼.”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가 물러나자, 유건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사이 시연은 이미 멀리 가서 남자아이 곁에 있었고, 아이를 들것에 옮기는 것을 돕고 있었다. 귀환하는 헬기 안에서, 유건과 시연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유건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시연은 눈을 감고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우리... 또... 키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헬기 안에서, 침묵이 이어졌다....병원에 도착하자, 현진과 진아가 서둘러 달려왔다. “시연아, 괜찮아?” “정말 깜짝 놀랐잖아!” “괜찮아.”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아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럼 화장실 가서 거울 좀 보고 와.” “어? 아, 그래.” 시연은 왜 그런지 몰랐지만, 순순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본 순간
“그게 말이죠...” 진아는 유건의 연속되는 질문 공격에 잠시 멍해졌다. 시연의 사생활을 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유건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무의식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 대표님이 이렇게 묻는 걸 보니... 네. 있었어요.” 그 말을 듣자, 유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남자가 바로 시연의 아이의 아버지겠군.’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누굽니까? 이름이 뭐죠?” 진아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고 대표님은 잘 모르실지도 모르겠네요. 노은범이요, 노씨 가문의 막내아들인데, 들어보셨나요?” ‘노, 은, 범.’ ‘바로 그 사람이구나.’ 유건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수축되었고, 손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 속에서는 찌르는 듯한 고통이 퍼졌다. 그는 침착하게 물었다. “왜 헤어졌죠?” 진아는 입술을 앙다물고 답했다. “은범이 어머니가 반대해서요. 결국 헤어지게 됐어요.” “그렇군.”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지시연이에게 내가 이걸 물어본 사실은 비밀로 해주세요.” 진아는 그의 빈틈없는 잘생긴 얼굴을 보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진아가 돌아서자, 유건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얼굴은 순식간에 험악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노은범이라니!’ ‘노은범이 나와 두 번 마주쳤을 때, 내가 느꼈던 그 설명할 수 없었던 적대감...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네... 후...’ ‘그놈은 어떻게 지시연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미 지시연을 버린 사람 아니었나?’ 유건은 남자였기에, 은범이 아직도 시연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특히나, 유건 자신도 지금 시연에게 끌리고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오자, 지한 일행이 유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한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건은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 “장성산 처리해.” 지한은 잠시 당황했지만
강울대학교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시연은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시연아.” 유건의 잘생긴 얼굴에 약간의 불안함이 비쳤다. “나, 할 말이 있어.” “지시연!” 앞쪽에서 이미 누군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결심한 듯 말했다. “지금은 일하러 가야 하니까, 일 끝나면 그때 얘기 들어줄게요.” 잠시 멈추고 나서 덧붙였다. “그리고, 나도 고유건 씨에게 할 말이 있어요.” 유건의 깊은 눈빛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좋아.”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시연은 차에서 내려 동료들과 함께 부상자의 등록과 이송을 돕기 시작했다. 그녀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유건은 미소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시연이도 나와 같은 말을 하려는 걸까?’ ... 모든 부상자들의 입원 절차가 끝난 후, 시연은 비로소 잠시 쉴 수 있었다. “지 선생님, 어서 가서 식사하세요! 오늘 도시락이 정말 맛있어요!” ‘정말?’ 시연은 웃으며 도시락을 받으러 갔고, 확인해 보니 정말 맛있어 보였다. ‘가을’에서 만든 도시락이었다. ‘G시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레스토랑인 가을에서 만든 도시락을 외부로 배달하다니, 오늘 병원에서 엄청난 투자를 한 모양이네.’ 밥, 반찬, 그리고 국까지, 모두 개별 포장되어 있었으며 과일도 함께 제공되었으며,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시연은 도시락을 먹으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에헴!” 첫 번째로 보인 것은 유건이 보낸 메시지였다. [도시락 맛있어?] ‘뭐?’시연은 곧바로 이해했다. 이 도시락은 모두 유건이 시연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렇지, 병원이 이렇게까지 신경 썼을 리가 없지.’ ‘하지만 고 대표님은 돈이 많으니 어렵지 않겠지.’ [왜 답장 안 해? 아직도 못 쉬고 있나? 바쁜 거야?] [지시연, 네 몸을 항상 먼저 생각해. 너무 무리하지 마!] ‘이 남자는 이미 살짝 화가 난 것
장소미가 고유건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유건 씨, 이 며칠 동안, 저도 많이 생각해 봤어요. 도저히 당신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유건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짙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력하게 말했다. “소미 씨...” 그 두 글자를 들은 시연은 갑자기 뒤돌아서서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기환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시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특히 그녀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았다. “시연 씨, 무슨 일이에요?” 시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지만, 그 웃음은 눈까지는 닿지 않았다. “제가 온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고 대표님이 아주 바쁘신 것 같으니, 먼저 가볼게요.”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다녀간 건 굳이 말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시연은 이곳에서 한순간도 더 머무를 수 없었다. 불과 몇 분 만에 현실은 그녀에게 잔인하게 알려주었다. 병원에서 서둘러 온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그저 유건과의 애매한 관계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고, 진짜 부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내가 잊었지... 고유건에게는 이미 장소미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내가 지금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품고 있는 몸인데, 고유건이 무슨 이유로 이런 나를 좋아하겠어?’ 시연은 유건의 회사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야 눈물이 흐르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유건은 소미를 밀어내며 말했다. “소미 씨, 미안하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 당신에게 아무런 약속도 해줄 수 없어.” 소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그녀는 감정이 폭발한 듯 소리를 높였다. “저 정말 기다릴 수 있어요! 유건 씨, 나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예요?” “소미 씨...” “그만 말해요!” 소미는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시연은 유건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냥... 조금 나른할 뿐이에요.”“시연아.”유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단호하고 냉정한 톤이었다.“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협의하자는 것도 아니고.”그리고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연의 아랫배로 향했다. 그 시선 하나에, 시연은 숨을 삼켰다.“너, 너 자신은 둘째치고... 얘한테까지 무심할 거야?”아이 이야기까지 나오자, 시연의 눈빛엔 망설임이 번졌다.“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이건 일이니까...”‘지금 상황에선 내가 나서야 해...’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유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기다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이 문제는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유건은 바로 양석현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결하면서도 공손하게 상황을 설명했다.“양 교수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시연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졌네요.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네, 감사합니다...”전화기 너머에서 양 교수는 무언가를 길게 말했다. 시연은 가만히 입술을 다문 채 기다렸다. 두 손은 자연스럽게 아랫배에 모아졌다.“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유건은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내려놨다.“양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병가를 내주셨어. 바로 다른 사람을 보내시겠대. 그러니까 너는 그냥 푹 쉬어.” 유건은 시계를 확인했다.“지금 아직 7시도 안 됐어. 대체 인원 도착해서 준비하면 충분해.”세미나는 9시 반 시작이었다. 시간상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고마워요.”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한마디에 유건의 가슴이 묘하게 저릿해졌다.‘이젠... 우리 사이가 이렇게나 멀어진 건가?’ ‘‘고맙다’ 같은 말이 이렇게 남처럼 들리다니.’“고마워할 필요가 없어. 별것도 아니잖아.”표정 하나 변하지
문을 닫자마자 유건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굵은 핏줄이 툭툭 뛰기 시작했다. 시연이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모습만 떠올려도 속에서 무언가 폭발할 것 같았다.“고유건, 너 진짜 미쳤다. 짐승이 따로 없네.”그는 작게 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연은 아픈데,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유건은 방에서 나왔다. 그가 부탁한 호텔 측의 얼음찜질팩과 생강차도 마침 도착했다. 유건은 얼음팩을 시연의 이마에 조심스레 얹어주고, 생강차를 한 숟갈씩 떠서 입에 가져다 댔다. 아플 땐 유난히 말을 잘 듣는 시연이었다. 유건이 물 마시라고 하면 그녀는 얌전히 마셨고, 알코올 솜으로 몸을 닦아줄 때도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건은 점점 녹초가 되어갔다. 그 정성은 점차 효과를 보기 시작했고, 결국 밤엔 시연의 상태도 조금 나아졌다. 베개에 기대어 잠든 그녀의 눈가엔 마른 눈물 자국이 살짝 맺혀 있었다. 유건은 그제야 한숨 돌리며 조용히 그녀 곁을 지켰다. 하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30분 간격으로 체온을 체크했고, 그때마다 시연을 살짝 깨워 물을 마시게 하고, 얼음팩도 계속 갈아주었다. 그렇게 새벽을 지나, 시연의 체온은 다행히 더 오르지 않았다. 곧 동이 트려는 시간이었다. 유건은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저 시연을 바라보는 눈빛엔 절박함과 집착이 뒤섞여 있었다. ‘다행이야... 내가 와서.’ 그가 오지 않았다면, 지난밤 시연 곁에서 지킨 건 은범이었을 것이다. ‘그럼 내가 시연에게 한 모든 일들을... 노은범이 했겠지?’ 그 끔찍한 상상을 하자마자 유건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쭉 흘렀다. ...아침 7시, 시연의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시연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고, 막힌 코도 많이 나아졌다. 이어서 팔을 뻗으며 일어나려는데, 유건이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일어나긴 왜 일어나? 아직
시연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말끝도 흐릿했다. “그냥 눕느라... 새 양말도 못 신었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건의 손이 시연의 이마에 조심스레 닿았다. 차가운 손바닥이 화끈거리던 열기에 닿으니, 시연은 본능적으로 눈을 살짝 감았다. ‘시원하네.’ 그 모습에 유건은 순간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해졌다. ‘귀여워. 아픈 사람 맞나...’ 목이 간질거려서 목소리도 저절로 낮아졌다. “의사 왔으니까, 진료받아 보자.” 이어서 고개를 돌려 의사를 향해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네, 고 대표님.” 의사가 다가와 진찰을 시작했다. 귀찮아하던 시연도, 이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의사는 시연의 체온을 측정하고, 목 상태와 복부 상태를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 걸리셨네요. 다행히 열은 심하지 않아요. 임산부이기 때문에 약물은 조심해야 하고요.” 말을 끝내고 나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덧붙였다. “이건 알코올이에요. 대동맥이 지나가는 부위, 예를 들어, 목, 겨드랑이, 허벅지 안쪽... 이런 곳을 닦아드릴게요. 물리적으로 열 내릴 수 있을 겁니다.”“그리고 이마랑 겨드랑이에 얼음팩을 올려주시면 훨씬 나아질 겁니다. 그래도 열이 안 떨어지면, 마지막엔 해열제 투여를 생각해야겠고요.” “그게 다예요?” 유건은 뭔가 미덥지 않은 눈빛으로 물었다. “생강 끓인 물 같은 거, 마셔도 되나요?” 의사가 당황스러운 듯 웃었다. “네, 드셔도 됩니다. 중요한 건 따뜻한 물을 조금씩 자주 마시는 거고요.”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있던 지한에게 말했다. “지한아, 방 하나 잡아서 의사 선생님이 쉬실 수 있게 도와. 혹시 밤에 또 무슨 일 있으면 모셔야 하니까.” “네, 형님.” 의사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한과 의사가 방을 나간 뒤, 유건은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제야, 뒤편에 아직도 남아 있던
‘허.’ ‘말도 그렇게 하더니, 진짜 행동하는 사람이었네.’ ‘노은범이 이 시간에 여기 온 건... 본인 의지였을까?’ ‘설마 시연이가 직접 불렀을까?’ 그 가능성을 떠올린 순간, 유건의 속은 마치 식초를 들이켠 듯 꽉 막혀버렸다. ‘몸이 아파서 누군가를 불렀는데, 그 누군가가... 왜 내가 아니야?’ 유건은 서늘한 눈으로 은범을 내려다봤다. “노 사장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이 늦은 밤에 남의 아내 방 앞에서 서성이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은범은 비웃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눈빛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 사이, 이미 금 간 지 오래지.’ ‘정상적인 부부였다면... 시연이가 날 찾을 일도 없었겠지.’ 그는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연이가 불러서 온 겁니다. 몸이 안 좋아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직접 불렀다고?’ 유건의 눈빛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눈꼬리가 번뜩이며, 살기마저 스쳤다. “노은범.” 유건이 한 걸음 다가섰다. “지금, 죽고 싶어서 여기 온 거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건은 양손으로 은범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챘다. “꺼져.”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지금은 참고 있지만, 한 번 더 건드리면 주먹이 날아갈 수도 있다고.” ‘지금 이 순간, 시연이가 내 아내라는 사실은... 네가 잊고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야.’은범은 겁먹지 않았고,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왜 꺼져야 하죠?” “당신이 대충 다룬 사람일지 몰라도, 내겐... 그 사람이 전부거든요.” 유건의 눈동자가 휘청 흔들렸다. ‘전부?’ 그 말이 유건의 심장을 그대로 쥐어짰다. “죽고 싶구나 진짜.” 이성이 흔들린 유건은 팔을 들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딸칵- 그리고, 문틈으로 시연이 고개를 내밀었다. “뭐 해...?” 피곤하고 창백한
‘그래서 그런가... 불길한 예감은 꼭 맞아떨어진다니까.’ 저녁 회의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처음엔 단순히 목이 간질간질했는데, 곧이어 재채기가 계속 나왔고, 콧물에 눈물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깜짝 놀랐다.‘뜨거워... 감기다. 몸살이 왔어.’ 그녀는 임신 중이라 함부로 약을 먹을 수도 없었고, 병원에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시연은 따뜻한 물을 끓여 계속 마시면서, 이불에 몸을 꽁꽁 감쌌다.‘이러면... 땀 나면서 열 좀 빠지겠지.’ 하지만 아무리 이불을 덮고 있어도 오한이 멈추지 않았다. 몸은 나른하고,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깐만... 쉬자...’ 그렇게, 시연은 핸드폰 진동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같은 시각, G시. 유건은 회사를 나와 BLUE로 향하던 중, 차에 올라타자마자 첫눈을 마주했다. 창밖에서는 조용히 작은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진짜 겨울이네...’ 그때, 별산장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말해.” [고 대표님, 우주 도련님께서 며칠 뒤에 건강검진 예약이 잡혀 있는데요. 이쪽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돼서, 이전 병원 기록을 요청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나한테 물어보면 뭐 해? 사모님한텐 연락 안 했어?” [네, 사모님께 먼저 연락드렸는데... 전화를 안 받으시더라고요. 바쁘신 것 같아서요.]유건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내가 해볼게.”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계속 진동음만 울릴 뿐, 받지는 않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회의는 끝났을 텐데.’ ‘잠든 건가?’ 하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럴 리 없는데...’ ‘시연이... 요즘 몸도 약해졌는데...’ 유건은 핸드폰을 꾹 쥐고 곧바로 옆자리에 앉은 지한에게 말했다. “시연이가 L시에 있는 호텔 이름 확인해.
임신 후기가 되면서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된 시연은 L시까지 가는 KTX를 예약했다. 출장 기간은 일주일. 짐도 그만큼 많았다. 다행히 양석현 교수가 챙겨줘서 특실로 표를 끊을 수 있었다. 기차에 올라 지정석을 찾아갔지만, 자리 앞에서 시연은 한참을 고민했다. ‘이거... 혼자 올릴 수 있을까?’ 배가 제법 불러온 상태. 짐이 무거워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톡 쳤다. “시연아.” 그녀가 돌아보자, 은범이 웃으며 서 있었다. “은범이...?”시연은 깜짝 놀랐지만, 그의 얼굴이 반갑긴 했다. “이 캐리어 네 거야?” “응.” “내가 해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범은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들어 선반에 올려주었다. “고마워.” “뭘, 당연히 해야지.” 두 사람의 좌석은 우연히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정말 묘한 인연. 시연은 낮게 웃으며 물었다. “난 L시에서 학회 발표가 있어서 가는 거야, 너는 출장?” “응.” 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약 복용 중이라 장거리 운전은 피하라고 하길래, 그냥 기차 타기로 했어.” ‘약...’ ‘그럼, 역시...’ 시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은범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그래서 굳이 놀라는 척도, 돌려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은범의 그 담담한 말투 안에서 시연은 뭔가 미묘한 걸 느꼈다. “내가 그거, 알고 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었구나?” “응.” 은범은 아주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그날,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웠어.” ‘역시... 알았구나.’ 시연은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 그제야 그날 이후 유건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모두 들어맞는 듯했다. “너였구나.” “응, 내가 고 대표한테 말했어.” 은범은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곧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했던 일, 정말 미안해. 그 일로 두 사람 사이가 더 꼬인 건 아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건은 미묘하게 시선을 낮추며 기다렸다. “오늘 온 거, 프로젝트 투자자로서 문 과장님이랑 양 교수님의 체면을 봐서 온 거예요? 아니면... 정말, 나 때문이에요?” ‘이 질문은... 피하지 말고 꼭 해야 해.’ 생각보다 직설적인 질문에 유건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너는,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진심으로, 그녀도 헷갈렸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전자예요.” 그 말에 유건은 피식, 짧은 웃음을 흘렸다. 비웃는 것인지, 자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럼 당연히, 전자지.” 남자의 눈매가 비죽 올라갔다. “설마, 지금... 내가 너 때문에 왔다고 생각한 거야?” 시연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유건은, 그 침묵이 곧 대답이라는 걸 알아챘다. ‘아, 진짜 그렇게 믿은 거야?’ 그는 낮게 웃었다. 어딘가 허탈한 웃음. “너, 참 재밌다.”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궁금하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한다고... 나한테 마음도 없는 여자 붙잡고 질질 끌 사람으로 보여?”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뿐이고, 내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그 말에 시연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착각했구나.’ 무안함과 동시에, 어딘가 가볍게 안도감이 스쳤다. 시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굴었네요. 그냥... 우리가 예전에 했던 그 이상한 결혼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 시절,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 감정의 거래였으니까.’ 유건의 심장이 순간에 세게 쪼여왔다. ‘이상한 결혼 생활?’ ‘그게, 너한텐 그렇게까지 나빴던 거구나.’ 가슴이 먹먹했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담담했다. “나도 그래.” 그는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유건은 계속 이해가 안 됐다.‘그 정도로 화가 났다고? 내가 온 게 그렇게 싫은 건가.’ 사실 오기 전부터 그는 이미 예상했다. 시연이 자신을 반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비록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유건도 묘하게 가슴이 쓰렸다. ‘그래...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그 순간, 유건의 머릿속에 뭔가 스쳐 지나갔다. 살짝 몸을 기울여 시연의 귀에 대고 작게 물었다. “아까 족발, 좀 아쉬웠던 거지?” 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갑자기, 웬 족발?’ 하지만 놀란 얼굴로 유건을 바라보던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헉... 들켰나?’ 유건은 그 반응 하나로 모든 걸 알아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알았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더 시켜줄게.”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애도 아니고... 고작 한 점 덜 먹었다고 삐지는 거야?” “네?!” 시연은 반사적으로 부르려다 멈췄다. ‘뭐야, 지금 이 사람 왜 이래?’ ‘어디서 갑자기 예전처럼 굴고 있는 건데...’ 시연은 헷갈렸다.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거야? 아니면 진짜... 뭔가 바뀌었나?’ 잠시 후, 더 주문한 족발이 나왔다. 유건은 그것을 직접 들어 시연 앞에 내려놓았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먹어. 너 한 사람 먹으라고 더 시킨 거야. 그리고 오늘 회식비, 내 카드로 결제했어.” “당신...” 시연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걸 해?’ 하지만 주변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런 자리에서 굳이 따질 수는 없었다. ‘이따가 따로 물어보자.’ 그녀는 결국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고, 족발을 한 점 들어 입에 넣었다. 유건은 조용히 웃었다.며칠간의 출장 때문에 쌓인 피로가 단번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시연도 두 점쯤 먹고 나자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래, 이렇게까지 했는데... 굳이 삐져 있을 필요는
‘아래층? 무슨 아래층?’ 시연은 헛기침이 나왔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던 그녀는, 곧 유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지금 1층인데, 데리러 와줄래?’‘진짜... 온 거야?’ 그리고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잠깐...” 말도 제대로 안 마친 채, 주변 눈치도 보지 않고 헐레벌떡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1층 로비로 향했다. 그곳에, 유건이 있었다. 정말로. 큰 키, 넓은 어깨, 공항에서 막 돌아온 듯한 모습.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는, 그 익숙한 실루엣. “시연아.” 유건은 시연을 발견하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길고 고된 이동 끝에도 그 눈빛엔 피곤 대신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어쩐 일이에요...” 시연은 다가가며 말했다. 그 얼굴엔 놀람만 가득했고, 기쁨은 없었다. ‘기뻐해야 하나? 아니잖아.’ 유건은 살짝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초대한 거 아니었어? 지금 보니까... 아닌가 봐?”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시연은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표정은 최대한 부드럽게 유지한 채. ‘솔직히 말하면, 진짜로 온 게 아직도 실감 안 나.’ “네가 초대한 거 맞잖아. 나는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못 간다’라고는 안 했고.” 유건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입꼬리에 묘한 웃음까지 살짝 얹었다. 그 말에 시연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아, 또 저런 말장난이네.’ ‘바쁘면 안 와도 괜찮은데... 굳이 시간 내서 오면 나는 또 ‘잘 지내는 부부’처럼 보여야 하잖아...’‘할아버지 앞에서도 그랬고, 이젠 과장님, 교수님들 앞에서도?’ 시연은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 사람이 그걸 몰랐다고?’ ‘난 우리 둘 사이, 서로 암묵적으로 선 그은 줄 알았는데.’ “사실...” 시연이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문광수 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선생!” 시연은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