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찰나, 주지한이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시연 씨 깨어났어요.]“그래, 알았다.” 유건이 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소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깨어났으니, 가서 봐야겠어.” “잠깐만요!!” 소미가 유건의 팔을 잡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도 같이 갈게요.” 지금 소미는 유건과 시연이 단둘이 있는 상황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유건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유건 씨, 걱정하지 마요.” 소미는 서둘러 말했다. “저 지 선생님과 싸우지 않을게요. 저도 지 선생님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같은 여자로서 더 쉽게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유건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같이 가자.” ... 휴게실. 은범은 침대 옆에 앉아 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시연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가득했다. “괜찮아?”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종이로 만든 인형도 아닌데, 물에 좀 담갔다고 죽기야 하겠어?” “그런 말 하지 마.” 은범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하게 말했다. “시연아, 그때 내가 얼마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과 소미가 들어왔다. 시연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즉시 사라졌다. “은범아, 난 괜찮으니까. 먼저 나가 있어.” 은범은 내키지 않았지만, 유건과 시연 사이에 더 많은 일이 있을 것을 알았기에 마지못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잘 쉬어.” “응.” “고 대표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은범이 고유건과 스치듯 지나칠 때, 그는 유건에게서 강한 적대감을 느꼈다. 문이 다시 닫히자, 시연이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이 함께 오셨군요. 꽤 시끌벅적하네요.” 소미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지 선생님, 아까 일은 정말 미안해요.” 시연은 놀랍다는 듯 비웃으며 말했다. “뭐라고요?” 그러나 유건이 먼저 나서
시연은 문 앞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콜택시를 불렀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지금 와서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직 끝나기 전이었다. 장미리와 장소미가 시연을 찾아온 것이다. 장미리는 몇 걸음에 달려와 시연에게 소리쳤다. “지시연! 네가 바로 고유건을 협박해서 결혼한 그 저질 여자였구나! 도대체 뭐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거니? 고 대표는 우리 소미가 사귀는 남자 친구야!”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장 여사.” 시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끄럽다’는 말,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야. 그 말은 장 여사가 할 말은 아니지. 장 여사가 제일 ‘부끄러운’사람이니까. 장 여사가 ‘부끄럽지 않아서’딸이 생긴 거잖아.” “...”장미리는 순간 말문이 막히며 얼굴이 붉어졌다. “너랑 나랑 같니? 난 네 아빠와 진심으로 사랑했어! 넌 그럴 자격도 없어! 고 대표는 너를 원해서 결혼한 게 아니야!” 시연은 속이 울렁거렸지만 참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정말 남녀가 하는 더러운 짓을 말로 포장하긴 하네.” 소미는 치를 떨며 말했다. “지시연, 너 우리 엄마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내가 뭐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문제야?”시연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오히려 너희들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네. 너희가 나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지 않았더라면, 난 고유건의 집안을 찾지도 않았을 테니까.” 시연의 눈빛이 흥분으로 형형하게 빛났다. “네가 그 사람 여자 친구라는 걸 알았을 때, 난 솔직히 기뻤어.” “...”소미는 충격을 받아 몸이 굳어버렸다. “너 일부러 그랬구나. 나를 불행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거였어!” “그래.” 시연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말이 안 통해!” 소미는 숨을 가쁘게 쉬며 말했다. “소용없어! 유건 씨가 날 좋아해!” “상관없어.” 시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진심으로 무관심한
[그리고...] 지한이 말을 이었다. “민환이가 그러는데, 아까 장소미 씨가 휴게실에 들렀다고 합니다. 장소미 씨가 거기서 잠시 기다리다가 형님을 만나지 못하고 떠났다고 하더군요.” 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장소미가 거기서 미리 그 드레스를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바로 그 때문에 수영장 옆에서 시연을 붙잡고 함께 물에 빠진 것이다! 유건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고, 눈에는 차가운 어둠이 스며들었다.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연회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순간 소미가 유건을 향해 마주 걸어왔다. 소미는 다급히 유건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유건 씨, 방금 어디 있었어요?”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손목이 유건에게 꽉 잡혔다. 소미는 그제야 유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아무 감정도 없었다. 자신의 손목은 유건의 손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유건 씨, 무슨 일이에요?” 유건의 표정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물어볼게. 네가 지시연을 수영장 물에 빠뜨린 거 맞아?” “어...?” 소미는 당황해서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네, 지 선생님도 인정했잖아요!” 그때, 유건의 입에서 조용히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긴 눈에는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그래? 그럼 이 영상을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소미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그 영상에는 소미가 시연을 붙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찍혀 있었다. 소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유건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이미 사실이 드러났으니, 소미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 전 너무 당황해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알지 못했어요. 그냥 지 선생님과 다투다가 물에 빠진 것만 생각났어요...” 유건은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면 물에 빠진 후에, 네가 지시연을 붙잡고 놓지 않은 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전화 왜 끊었어? 고 대표님이지? 그분, 너 걱정 많이 하시던데.” “걱정은 무슨...” 시연은 가볍게 눈을 들어 은범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 회장님과 마찬가지로, 고유건 씨도 내 환자야.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걱정이지.” 그 말은 은범에게 핑계처럼 들렸지만, 시연은 곧 말을 이었다. “얼마 전 BLUE 앞에서 고유건이 칼에 찔린 사건, 못 들었어? 내가 고유건의 주치의였어.” 이 사실은 비밀이 아니었다. 은범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지만 남자는 남자를 잘 아는 법! 은범은 운전대에 힘을 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보기엔, 그 사람 너에게 무척 신경 쓰는 것 같아. 아마... 너를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그 말에 시연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뜨고 은범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사람 여자 친구 있는 거 몰라? 바로 장소미잖아, 아까 같이 봐놓고선.” 은범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래, 내가 너무 앞서갔나보다, 그렇지?”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불안과 초조함이 있었다. ‘나도 서둘러야 해. 그렇지 않으면 상황이 어떻게든 달라질 수도 있을 거야. 또 한 번 시연이를 잃을 수 없어!’ 차는 시내로 들어섰고, 시연은 길가를 가리켰다. “나 여기서 내려줘. 여기서 지하철 타면 돼.” 은범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는데? 내가 데려다줄게. 지하철은 왜 타?” “괜찮아. 나 태산요양병원에 있는 내 동생 보러 가는 길이야. 여기서 꽤 멀어, 너 시간 낭비하게 하기 싫어. 너는 네 볼일 보러 가.” “나 바쁜 일 없어.” 은범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나도 우주를 오랫동안 못 봤어. 같이 가자.” 은범은 차를 계속 몰았고, 시연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럼, 부탁할게.” “부탁은 무슨.”
“우주, 무슨 일이야?” 시연은 방으로 뛰어들어가자, 우주가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져버린 것이 보였다. 은범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화면을 확인한 후, 시연에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이미 게임의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상태가 표시되어 있었다! “...” 시연은 또다시 말을 잃었고, 마음속은 우주가 해내 보인 것들 때문에 도저히 차분할 수 없었다. 은범이 말했다. “서번트 증후군이라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 중 일부는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우주가 그런 경우인 것 같아.” “음...” 시연은 놀라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붉어진 눈시울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눈물이 금세 쏟아질 듯했다.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동생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고 난 후, 글을 읽고 쓰는 것에만 집중했을 뿐, 더 많은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시연은 우주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죄책감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면, 내가 우주의 가능성을 놓치고 있었던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 넌 이미 최선을 다했어.” 오랜 세월 시연과 함께해왔던 은범은 시연이 동생을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장미리 같은 새어머니와 냉정한 아버지 지동성 사이에서, 시연이 아니었다면 우주는 벌써 버려졌을 것이다. 시연은 자신이 지씨 집안에서 당한 학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우주를 위해 인내하며 살아왔다. 요양병원을 나온 은범은 시연을 학교로 데려다주었다. “우주에 대한 일은 내가 전문가와 상의할 테니 걱정하지 마. 내가 있으니까.” 만약 우주가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게 맞다면, 시연은 정말로 은범에게 큰 빚을 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연은 우주를 위해 그 빚을 감수하기로 했다. “은범아, 고마워.” 학교 밖에는 차량이 들어갈 수 없어, 은범은 시연을 강울대학교 앞에 내려주고 떠났다. 시연이 기숙사로 향하는 중, 핸드폰이 울렸
이때, 유건의 잘생긴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동공은 축소되며 냉랭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지시연, 참 냉정한 여자였군.’ 시연의 이런 태도는 소미처럼 큰 소란을 부리는 것보다도 훨씬 타격감이 컸다. 마치 시연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뺨이라도 후려친 듯, 마음이 몹시 아려왔다. 유건의 눈썹은 차갑게 얼어붙었고,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냉정했다. “그깟 드레스 한 벌, 더 좋은 걸로 사주면 그만이야.” “그래요.” 시연은 유건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전 들어갈게요.” 그녀는 돌아서서 다시 기숙사 쪽으로 걸어가며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시연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유건은 갑자기 손을 들어 드레스가 든 상자를 바닥에 내리칠 듯이 들어 올렸다가 곧 멈춰 섰다. 그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저 여자가 원하지 않으면 그뿐인데, 왜 화가 나는 것일까?’ 유건은 바로 돌아서서 차에 올라타고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해 거실의 불을 켠 유건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연에게 주려고 했던 그 그림을 보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시연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팔찌가 놓여 있었다. 이제 그 팔찌 옆에 드레스까지 추가되었다. 유건은 차가운 웃음을 터트리며 자조했다. “허! 지시연에게 주려고 했던 것들 결국 하나도 주지 못했네!” “지시연, 넌 정말 좋고 나쁨도 모르는 고집불통이야!’ ...점심때, 시연은 친구 임진아와 식사하기로 했었다. “여기!” 진아는 시연에게 서류 하나를 건넸다. “뭔데?” 진아가 대답했다. “대학원 진학 추천서야. 어제 학교에 갔는데, 네 것도 챙겨왔어.” 시연은 서류를 열어보고는 이마를 찡그렸다. “대학원 추천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 “너 성적도 좋고, 매년 장학금도 받아왔잖아. 왜, 못 할 것 같아?” 진아의 말이 맞았지만, 대학은 이미 반은 사회로 나가는 문턱이었고, 시
유건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유건 씨!]장소미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 촬영이 없어서 저희 어머니가 유건 씨와 저희 집에서 저녁 식사 함께하자고 하셨어요. 언제 저 데리러 올 수 있어요?] 그녀의 말투는 유건이 당연히 올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평소의 유건이라면 그렇게 했겠지만, 지금 그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오늘 저녁엔 일이 있어. 못 갈 것 같아.” 유건은 현재 할아버지의 병환이 가장 우선순위라 소미의 전화를 끊어버렸다. 장소미는 핸드폰을 쥐고 당황하며 충격에 빠졌다. ‘고유건이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다니!’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지, 시, 연...!!” ‘틀림없이 시연 때문이야!’ ‘지시연이 고유건의 아내 자리를 차지하고, 고유건을 못 오게 막은 것이 틀림없을 거야!!’ 소미는 화가 치밀어 핸드폰을 집어던졌고, 그것은 바닥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는 또다시 시연이 했던 말들이 떠오르며, 이를 악물고 이를 갈았다. “지시연, 이렇게 교활한 계략을 쓰다니! 해도 너무하는군!” ...병원 진료실에서 양석현과 시연은 유건에게 자세한 상황을 설명했다. “수술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환자분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서, 수술 전에 몸을 잘 추슬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술을 견디기 어려울 겁니다.”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물었다. “수술 성공률은 얼마나 됩니까?” 시연은 양석현을 한번 바라본 후 대답했다. “양 교수님은 이 분야의 권위자세요. 직접 집도하시면 성공률이 93% 이상이고, 수술 후 치료가 잘 이루어지면 5년 이상의 생존율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결과는 유건이 예상했던 것보다 나은 예상치였다. 유건은 시연을 믿으며 말했다. “그럼 네 말대로 진행해.” “알겠어요.” 시연은 작게 대답했다. “하지만 치료를 시작하려면 할아버지의 협조가 필
얼마 지나지 않아, 유건은 고상훈의 퇴원 수속을 다 마쳤다. 그날 저녁 유건과 시연도 바로 고씨 가문의 본가로 이사했다. 유건은 차를 주차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고상훈은 몸이 허약하고 기력이 없어서 집에 오자마자 바로 방으로 돌아가 쉬었다. 거실에서는 시연이 집사인 이호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사님, 할아버지 식사랑 약은 대강 이 정도예요. 제 연락처를 저장해두시고요. 잠시 후에 제가 환자를 돌보는 데에 필요한 정보가 담긴 문서를 보내 드릴 테니까 가끔 잊어버리시면 한 번씩 확인하시면 돼요.” “그거 좋네요.” 이호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엌 쪽을 가리키며 “왕 아주머니가 지금 국을 끓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상관없었지만, 사모님이 한 번 봐주시겠어요? 문제가 없는지?” “그럴게요.” 두 사람은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자연스레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지금 여기 지시연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집안 분위기가 어두워지고 혼란스러워질 줄 알았는데, 지시연이 와서 모든 걸 잘 정리해 주니 나도 마음이 놓이네.’ 유건은 먼저 고상훈의 상태를 확인한 후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들어서자, 방 한가운데에 그다지 크지 않은 캐리어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안에 짐이 얼마 들어있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방문이 열고 들어온 시연은 방 안에 미리 와있던 유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미안해요, 문 두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유건은 별다른 반응 없이 캐리어를 가리켰다. “이게 전부야?” “이 정도면 많은 거죠.” 시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한 계절 옷하고 책 몇 권 정도...” ‘한 계절?’ 유건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옷을 한 계절 입을 것만 가져왔어?” “네.” 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그가 왜 묻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여기서
‘그래서 그런가... 불길한 예감은 꼭 맞아떨어진다니까.’ 저녁 회의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처음엔 단순히 목이 간질간질했는데, 곧이어 재채기가 계속 나왔고, 콧물에 눈물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깜짝 놀랐다.‘뜨거워... 감기다. 몸살이 왔어.’ 그녀는 임신 중이라 함부로 약을 먹을 수도 없었고, 병원에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시연은 따뜻한 물을 끓여 계속 마시면서, 이불에 몸을 꽁꽁 감쌌다.‘이러면... 땀 나면서 열 좀 빠지겠지.’ 하지만 아무리 이불을 덮고 있어도 오한이 멈추지 않았다. 몸은 나른하고,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깐만... 쉬자...’ 그렇게, 시연은 핸드폰 진동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같은 시각, G시. 유건은 회사를 나와 BLUE로 향하던 중, 차에 올라타자마자 첫눈을 마주했다. 창밖에서는 조용히 작은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진짜 겨울이네...’ 그때, 별산장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말해.” [고 대표님, 우주 도련님께서 며칠 뒤에 건강검진 예약이 잡혀 있는데요. 이쪽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돼서, 이전 병원 기록을 요청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나한테 물어보면 뭐 해? 사모님한텐 연락 안 했어?” [네, 사모님께 먼저 연락드렸는데... 전화를 안 받으시더라고요. 바쁘신 것 같아서요.]유건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내가 해볼게.”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계속 진동음만 울릴 뿐, 받지는 않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회의는 끝났을 텐데.’ ‘잠든 건가?’ 하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럴 리 없는데...’ ‘시연이... 요즘 몸도 약해졌는데...’ 유건은 핸드폰을 꾹 쥐고 곧바로 옆자리에 앉은 지한에게 말했다. “시연이가 L시에 있는 호텔 이름 확인해.
임신 후기가 되면서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된 시연은 L시까지 가는 KTX를 예약했다. 출장 기간은 일주일. 짐도 그만큼 많았다. 다행히 양석현 교수가 챙겨줘서 특실로 표를 끊을 수 있었다. 기차에 올라 지정석을 찾아갔지만, 자리 앞에서 시연은 한참을 고민했다. ‘이거... 혼자 올릴 수 있을까?’ 배가 제법 불러온 상태. 짐이 무거워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톡 쳤다. “시연아.” 그녀가 돌아보자, 은범이 웃으며 서 있었다. “은범이...?”시연은 깜짝 놀랐지만, 그의 얼굴이 반갑긴 했다. “이 캐리어 네 거야?” “응.” “내가 해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범은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들어 선반에 올려주었다. “고마워.” “뭘, 당연히 해야지.” 두 사람의 좌석은 우연히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정말 묘한 인연. 시연은 낮게 웃으며 물었다. “난 L시에서 학회 발표가 있어서 가는 거야, 너는 출장?” “응.” 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약 복용 중이라 장거리 운전은 피하라고 하길래, 그냥 기차 타기로 했어.” ‘약...’ ‘그럼, 역시...’ 시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은범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그래서 굳이 놀라는 척도, 돌려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은범의 그 담담한 말투 안에서 시연은 뭔가 미묘한 걸 느꼈다. “내가 그거, 알고 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었구나?” “응.” 은범은 아주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그날,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웠어.” ‘역시... 알았구나.’ 시연은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 그제야 그날 이후 유건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모두 들어맞는 듯했다. “너였구나.” “응, 내가 고 대표한테 말했어.” 은범은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곧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했던 일, 정말 미안해. 그 일로 두 사람 사이가 더 꼬인 건 아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건은 미묘하게 시선을 낮추며 기다렸다. “오늘 온 거, 프로젝트 투자자로서 문 과장님이랑 양 교수님의 체면을 봐서 온 거예요? 아니면... 정말, 나 때문이에요?” ‘이 질문은... 피하지 말고 꼭 해야 해.’ 생각보다 직설적인 질문에 유건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너는,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진심으로, 그녀도 헷갈렸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전자예요.” 그 말에 유건은 피식, 짧은 웃음을 흘렸다. 비웃는 것인지, 자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럼 당연히, 전자지.” 남자의 눈매가 비죽 올라갔다. “설마, 지금... 내가 너 때문에 왔다고 생각한 거야?” 시연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유건은, 그 침묵이 곧 대답이라는 걸 알아챘다. ‘아, 진짜 그렇게 믿은 거야?’ 그는 낮게 웃었다. 어딘가 허탈한 웃음. “너, 참 재밌다.”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궁금하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한다고... 나한테 마음도 없는 여자 붙잡고 질질 끌 사람으로 보여?”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뿐이고, 내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그 말에 시연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착각했구나.’ 무안함과 동시에, 어딘가 가볍게 안도감이 스쳤다. 시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굴었네요. 그냥... 우리가 예전에 했던 그 이상한 결혼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 시절,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 감정의 거래였으니까.’ 유건의 심장이 순간에 세게 쪼여왔다. ‘이상한 결혼 생활?’ ‘그게, 너한텐 그렇게까지 나빴던 거구나.’ 가슴이 먹먹했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담담했다. “나도 그래.” 그는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유건은 계속 이해가 안 됐다.‘그 정도로 화가 났다고? 내가 온 게 그렇게 싫은 건가.’ 사실 오기 전부터 그는 이미 예상했다. 시연이 자신을 반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비록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유건도 묘하게 가슴이 쓰렸다. ‘그래...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그 순간, 유건의 머릿속에 뭔가 스쳐 지나갔다. 살짝 몸을 기울여 시연의 귀에 대고 작게 물었다. “아까 족발, 좀 아쉬웠던 거지?” 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갑자기, 웬 족발?’ 하지만 놀란 얼굴로 유건을 바라보던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헉... 들켰나?’ 유건은 그 반응 하나로 모든 걸 알아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알았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더 시켜줄게.”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애도 아니고... 고작 한 점 덜 먹었다고 삐지는 거야?” “네?!” 시연은 반사적으로 부르려다 멈췄다. ‘뭐야, 지금 이 사람 왜 이래?’ ‘어디서 갑자기 예전처럼 굴고 있는 건데...’ 시연은 헷갈렸다.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거야? 아니면 진짜... 뭔가 바뀌었나?’ 잠시 후, 더 주문한 족발이 나왔다. 유건은 그것을 직접 들어 시연 앞에 내려놓았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먹어. 너 한 사람 먹으라고 더 시킨 거야. 그리고 오늘 회식비, 내 카드로 결제했어.” “당신...” 시연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걸 해?’ 하지만 주변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런 자리에서 굳이 따질 수는 없었다. ‘이따가 따로 물어보자.’ 그녀는 결국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고, 족발을 한 점 들어 입에 넣었다. 유건은 조용히 웃었다.며칠간의 출장 때문에 쌓인 피로가 단번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시연도 두 점쯤 먹고 나자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래, 이렇게까지 했는데... 굳이 삐져 있을 필요는
‘아래층? 무슨 아래층?’ 시연은 헛기침이 나왔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던 그녀는, 곧 유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지금 1층인데, 데리러 와줄래?’‘진짜... 온 거야?’ 그리고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잠깐...” 말도 제대로 안 마친 채, 주변 눈치도 보지 않고 헐레벌떡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1층 로비로 향했다. 그곳에, 유건이 있었다. 정말로. 큰 키, 넓은 어깨, 공항에서 막 돌아온 듯한 모습.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는, 그 익숙한 실루엣. “시연아.” 유건은 시연을 발견하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길고 고된 이동 끝에도 그 눈빛엔 피곤 대신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어쩐 일이에요...” 시연은 다가가며 말했다. 그 얼굴엔 놀람만 가득했고, 기쁨은 없었다. ‘기뻐해야 하나? 아니잖아.’ 유건은 살짝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초대한 거 아니었어? 지금 보니까... 아닌가 봐?”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시연은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표정은 최대한 부드럽게 유지한 채. ‘솔직히 말하면, 진짜로 온 게 아직도 실감 안 나.’ “네가 초대한 거 맞잖아. 나는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못 간다’라고는 안 했고.” 유건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입꼬리에 묘한 웃음까지 살짝 얹었다. 그 말에 시연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아, 또 저런 말장난이네.’ ‘바쁘면 안 와도 괜찮은데... 굳이 시간 내서 오면 나는 또 ‘잘 지내는 부부’처럼 보여야 하잖아...’‘할아버지 앞에서도 그랬고, 이젠 과장님, 교수님들 앞에서도?’ 시연은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 사람이 그걸 몰랐다고?’ ‘난 우리 둘 사이, 서로 암묵적으로 선 그은 줄 알았는데.’ “사실...” 시연이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문광수 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선생!” 시연은 본
지한은 조심스럽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형님... 근데 이건 좀 너무 빡빡한 거 아닙니까?” 유건이 직접 수정한 일정표에는 거의 쉴 틈이 없었다. 식사 시간은커녕, 수면 시간도 애매했다. “괜찮아.” 유건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대로 해. 중간중간 짬 날 때 눈 좀 붙이면 돼. 빨리 마무리하면, 빨리 돌아갈 수 있잖아.” 지한은 눈을 좁히며 물었다. “형님, 급하게 복귀하시는 이유라도...?” 유건은 짧게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할아버지 혼자 병원에 계시는데, G시를 너무 오래 비우니까 좀 신경 쓰여서.” 지한이 속으로 그 대답을 믿지 않았다.‘거짓말인 티가 너무 난다...’ ‘어르신은 전담 간호사도 있고, 형님은 G시에 있어도 병실에 잘 안 가시잖아...’ 하지만 그런 말을 지한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형님 마음속엔 다른 사람이 있는 거겠지.’ ...드디어, 심폐 프로젝트팀의 축하 파티 날. 의사, 간호사, 인턴, 심지어 병동 도우미까지, 진료과 전원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출발 전, 모두가 병동 회의실에 모여 대기 중이었고, 주하은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시연의 팔짱을 꼈다. “시연아, 나랑 같이 다니자. 낯선 자리에서 혼자 있으면 어색하잖아.” “좋지.”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뭘.” 하은은 슬쩍 웃으며 시연을 흘끗 바라봤다. 그러다 못 참고 툭 던지듯 물었다. “근데... 고 대표님이랑 너, 이제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응...?” 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나랑 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 “흥... 그 눈빛은 못 속이지.” 하은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지만, 그 순간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연의 눈이 커졌다. ‘고유건’이라는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왜?’ 그녀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양석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그건 너한테 부탁할게. 부부 사이잖아, 말하기 편할 테니까.” ‘부부 사이...’ 시연은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유건이 직접 나서서 논문 사건을 해결해 줬으니, 양석현 입장에선 두 사람이 사이가 좋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이, 그런 거 아니에요, 교수님...’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시연은 결국 꾹 삼켰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번 말해볼게요. 유건 씨가 그런 거 따지는 사람은 아니지만, 요즘 워낙 바빠서요... 시간이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괜찮아.” 양석현은 부담 주지 않으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고 대표가 바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우리 문 과장님이랑 나도 충분히 이해해.” “네.” ...병실 돌아다닐 때도,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서도 시연의 머릿속은 온통 ‘전화’ 생각뿐이었다. ‘며칠 전에 도움받았는데... 이렇게 또 연락하면, 진짜 내가 고유건한테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루 종일 핸드폰을 쥐었다 놨다 반복하며 망설이던 시연은, 결국 늦은 밤, 조용한 집 안 거실에서야 조심스레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시연은 이 기다림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마치 몇 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여보세요.]낮고,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시연?]이름을 불러주는 그 한마디에 시연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왜 이렇게 긴장돼...’ 입술을 한 번 핥고 나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고 대표님.” [응?]유건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또 무슨 호칭이야? 장난치지 마. ‘고 대표님’은 너한테 해당 안 되는 말이야.]“아, 그게...” 시연은 급히 말을 이어갔다. “이번 전화는 내 사적인 용무가 아니라서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그래?] 이번엔 유건의 말투가 조금 진지해졌다
그 질문은 유건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지하가 던진 말에, 유건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래... 인정해. 난 나비 공주를... 잊은 적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장소미가 나비 공주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 감정은 자연스레 장소미에게 옮겨갔다.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생각해 봐.” 지하는 유건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였다. “기억 속 첫사랑이랑 계속 살 건지, 지금 네 앞에 있는 결혼이라는 현실과 살아갈 건지... 이제는 정해야 할 때 아냐?” “치.” 유건은 코웃음을 치며 지하를 노려봤다. “내가 장소미랑 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지만...” “넌... 내가 시연이랑 백년해로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냥... 나 놀리는 거지?” 지하는 피식 웃으며 눈을 굴렸다. “왜, 네가 더 억울한 표정이냐?” 그는 가볍게 반문하며, 유건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나만 더 묻자. 넌, 시연 씨한테 ‘한 번이라도’ 제대로 다가가 본 적 있냐?” 유건은 말문이 막혔고, 대답하지 못했다. 지하는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없지.” “그럼 넌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시연 씨가 널 좋아해 주길 바라는 건데?” ‘그냥 돈이 많아서? 능력 있어서? 그게 다야?’ 유건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그렇게 한심했나?’ 그 순간, 멀리서 강석이 당구봉을 흔들며 소리쳤다. “야, 너희 둘! 왜 거기서 연애 상담만 하냐? 와서 당구나 쳐!” “갈게!” 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겉옷을 벗었다. 일어서기 전, 유건을 다시 바라보며 덧붙였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누굴 얻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야. 그럼 세상의 ‘순정남’들은 어디서 숨 쉬고 살겠냐?” 그 말은 유건의 가슴에 조용히 박혔다. ‘나 지금,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날 밤, 유건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댔고, 다음 날엔 아무 말 없
말을 마친 유건은 웃음을 거두고, 날카롭게 내뱉었다. “빨리 꺼져.” 은주는 유건의 눈빛에 숨이 턱 막혔다. 그 안에 담긴 서늘한 분노가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그래요... 인정 안 할 거면 갈게요!” 울먹이며 뒤돌아선 은주는 그대로 뛰쳐나갔다. 은주가 사라지자, 남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 분위기, 왜 이렇게 민망하지...’ “저기, 그게...” 유건은 식은땀이 날 정도로 당황했다.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말을 꺼냈다. “오해하지 마. 그날 클럽에는 지하랑 거래처 사람들이 있었고...”“굳이 설명 안 해도 돼요.” 시연은 황급히 손을 저었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그런 설명까지 필요하진 않잖아요. 법적으로만 안 끝났지, 서로의 감정은 이미 끝났으니까.”‘당신 마음은... 장소미를 향하고 있잖아.’ ‘이제 와서 해명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 말을 들은 유건은 얼어붙은 듯 시연을 바라봤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끝났다고?’ 둘 사이에 감돌던 공기가 더 묘하게 얼어붙었다. 시연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장소미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다행이죠, 뭐. 장소미였으면, 아까 그 상황을 설명할 겨를도 없었을걸요?”그 말에 유건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하... 그 이름을... 왜 굳이 지금 꺼내는 건데.’ 시연도 순간 후회했다. ‘말... 잘못했나?’ ‘괜히 분위기 풀어보려다 더 망친 것 같아...’이렇게 생각한 시연이 헛기침하자, 유건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그는 먼저 걸음을 옮겼고, 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따라갔다. 차 안. 출발한 뒤에도 유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운전만 할 뿐. 남자의 손은 단단히 핸들을 쥐고 있었다. 표정은 차분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