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시연은 더욱 긴장했고, 작은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유건은 시연의 긴장감을 눈치채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지시연이 겁내는 거야? 이혼하기 싫어서 그런 걸까? 이렇게까지 이 결혼을 지키고 싶은 건가?’ 고상훈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너와 시연이가 어떻게 한다는 건지 다시 말해 보거라!” 유건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제가 하려던 말은요, 원래는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조금 더 요양하시길 바랐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퇴원하셨나 싶어서요.” “난 또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고상훈은 약간 못마땅해하며 말했다. “병원에 너무 오래 있으니 멀쩡하던 사람도 환자가 다 될 지경이야. 병원이든 집이든 요양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맞지, 시연아?” “네.” 시연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으면 몸에도 좋을 거예요. 저도 방금 확인했는데, 간병인들이 정말 잘 보살피고 있어서 문제없을 거예요.” 그녀가 뒤에 하는 말은 유건을 향한 것이었다. 그때 가정부가 와서 말했다. “저녁 준비가 다 됐습니다.” “그럼 우리 가족 다 함께 저녁을 먹자꾸나.” 식사 시간 동안 시연은 고상훈의 기분을 맞추며 분위기를 조율했고, 고상훈은 오랜만에 반 공기나 되는 밥을 먹고 국도 한 그릇 다 마셨다. 고유건은 그 장면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할아버지가 정말 시연이를 좋아하시는구나!’‘할아버지 때문에 이혼 이야기는 잠시 미뤄야겠어...’ 식사가 끝난 후 유건이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희는 이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딜 가려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상훈이 말을 받으며 웃음을 지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가라. 방은 이미 가정부들에게 준비시켜 놓았단다.” 시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건은 더 격한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건 안 돼요. 저희는...” “너희는
“소리 내!” 유건의 얼굴에 열기가 도는 가운데, 그는 시연에게 명령했다. 시연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빨리 해!” 유건이 재촉했다. “네가 뭐 순결을 지키는 처녀도 아니고, 그런 소리 하나 못 내?” 유건의 말을 듣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아... 으아...” 유건은 순간 얼이 빠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남녀관계에서 어떤 소리를 냈는지도 기억 못 해?” ‘그때는 아주 격렬했잖아? 거기가 심하게 찢어지는 상처를 입을 정도였는데!’“나...” “됐어!” 유건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시연을 바라봤다. “네가 아까 내가 필요하면 뭐든 해준다고 했지?” “네.” 시연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고유건 씨는 지금 뭘 하려고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시연의 목에서 가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유건은 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키스하고 있었다! “음... 하...” 시연의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소리에 놀랐다. ‘이게 정말 내가 낸 소리 맞아? 어떻게 이렇게 수치스러운 소리를 낼 수 있지!’ 그녀의 소리는 유건의 신경을 자극했다. “너, 경험이 많다며? 그런데 이렇게 쉽게 반응해? 겨우 키스 한 번일 뿐인데...” “당신...” 시연은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여 그를 밀어내려 했다. “움직이지 마!” 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할아버지가 아직 밖에 계셔! 걱정하지 마, 그냥 키스일 뿐이야. 네가 소리를 제대로 냈다면 내가 이런 희생까지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시연은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본인이 희생한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야?’ 남자의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유건의 코끝에 시연의 향기가 가득했다. ‘이 향기..
다음 날 아침. 식탁 위에서 고상훈은 활짝 펴진 얼굴로, 가끔 시연의 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흘끗 보며 크게 웃었다. “시연아, 더 먹어라. 너도 고생이 많구나.” 그리고 유건에게 당부했다.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시연이는 이제 혼자가 아니잖니!”유건과 시연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지만,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 두 사람은 함께 고씨 저택을 나섰다. 유건은 시연을 강울대학교 기숙사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늘은 출근 안 해?” “아니요, 출근해야 해요.”시연은 가방을 메며 대답했다.“야간 근무라서 낮에는 병원에 안 가요.” 강울대학교 기숙사 건물을 힐끔 본 유건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 건물 정말 허름하고 낡았다.” 이건 그가 처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시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래요, 좀 낡긴 했죠. 고유건 씨,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 최근 유건은 은수 프로젝트로 바빠졌다. 마침내 모든 일이 정리되고,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유건이 한강우를 은수 프로젝트를 정식적으로 시작하는 축하 연회에 초대했을 때, 한강우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 생명의 은인인 지시연 씨도 올 거지?” 유건은 예상한 대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시연이와 함께 한 회장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아, 좋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유건이 시연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전화기 너머로 시연의 늘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들렸다. 시연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유건은 입가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번 주말 은수 프로젝트 시작 연회가 있는데, 한 회장님이 너를 꼭 보고 싶다고 하셨어. 올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니, 시연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네, 갈 수 있어요.] “좋아.” 유건은 만족스러운 듯 다시 물었다. “적당히 입을
노은범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시연에게 말했다. “그래, 나야.”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연회장 안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도 이 연회에 참석하려고 온 거야?” 은범의 말투에는 어딘가 의아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시연이가 왜 이런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할까?’ “응.”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애매하게 두 마디 정도로 설명했다. “어쩌다 보니, 이 곳의 주인을 구한 적이 있어.” “한강우, 한 회장님 말이야?”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한 회장님은 내 환자라고 볼 수도 있지.” “그렇구나.”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유건이 전화를 걸어 그녀를 재촉하고 있었다. 시연은 받지 않고 은범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가 계속 날 재촉하네. 먼저 가볼게!” “천천히 가!” 은범이 말하기도 전에, 시연은 재빨리 후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범은 어딘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시연아, 나중에 보자.” ... 남쪽 문까지 달려가자 시연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겨우 주지한을 만났다. “미안해요, 늦었죠!” 지한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형님은 손님들을 맞이하러 먼저 갔어요. 저는 시연 씨 옷 갈아입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시연과 지한은 휴게실에 도착했다. 장소미는 유건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떠나 있었다. 주지한은 탁자 위에 놓인 선물 상자를 가리켰다. “이건 형님이 시연 씨를 위해 준비한 드레스예요.”“예? 그렇군요.” 선물 상자를 열자 시연은 놀란 숨을 들이마셨다. “엄청 화려한 드레스네요.” “당연하죠.” 지한은 유건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떠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형님이 특별히 해외에서 주문했어요. 다 디자이너와 보조들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완성한 드레스예요. 전 세계에서도 단 한 벌밖에 없어요.”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고유건이 이렇게까지
장소미가 여기에 있는 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장소미는 고유건의 여자 친구였으니,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소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 “네가 여기에 왜 있어?” 그러나 이것조차 소미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아니었다. 소미를 가장 충격에 빠뜨린 것은 바로 시연이 입고 있는 그 드레스였다. ‘이 드레스는 분명 내가 조금 전 고유건의 휴게실에서 본 그 드레스인데!’ 시연은 이 모든 것을 알 리 없었고, 그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 “어떤 법에 내가 여기 있지 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시연은 배가 고파 더 이상 소미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지나가는 순간 소미가 시연을 힘껏 잡아당겼다. “지시연, 너 지금 못 가!!” 시연은 당황해서 말했다. “장소미, 너 제정신이야? 당장 이 손 놓으라고!” 하지만 소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시연을 놓지 않고 더욱 악착같이 붙잡았다. “내가 말했잖아, 넌 아무 데도 못 가!” “정말 어이없네!” 시연은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미는 강하게 손아귀에 힘을 줘 시연을 놓아주지 않았다. “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아야...” 팔에 심한 통증이 느껴져 내려다보니, 소미의 손톱이 시연의 피부를 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소미는 시연에게 마치 원수라도 된 듯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너 입은 이 드레스, 어디서 난 거야?” 시연은 어리둥절했다. ‘장소미가 이 일 때문에 이렇게 발광을 한 건가?’ “왜 내가 너한테 그걸 말해야 하지?” “너, 유건 씨와 무슨 관계야?” 소미의 눈빛은 분노로 불타올랐다. “이건 유건 씨가 나를 위해 산 건데, 왜 네가 입고 있는 거야?” “하!” 시연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날카로운 칼처럼. “맞아, 고유건 씨 거야. 그런데 왜 내가 입고 있는지, 네 남자 친구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시연
유건과 은범 둘 다 뛰어난 수영 실력의 소유자라 금방 시연과 소미를 물에서 건져 올렸다. 유건은 소미를 안고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렸다. “소미 씨, 소미 씨, 괜찮아?” “푸!” 소미는 물을 한가득 뱉으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유건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유건 씨! 나 정말 무서웠어! 흐흐흑...” 그러나 시연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지시연, 시연아?” 은범이 시연을 안고 있었지만, 시연은 여전히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급히 시연을 땅에 평평하게 눕혔다. 바닥에 누워있는 시연을 보고 있는 은범의 심장은 초조하기 이를데 없이 마치 빠르게 두드리는 북소리 같았다. “시연아, 내가 너에게 무례를 범하려는 건 아니야, 미안해...” 그는 먼저 누워있는 시연에게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러나 그 순간, 은범은 누군가가 어깨를 잡는 강한 힘을 느꼈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고유건이었다. “고 대표님?” “비켜!” 유건의 말은 간결했지만, 그의 눈에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은범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 시연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가슴압박을 30회 시행한 후 시연의 코와 입을 막고는 머리를 숙여 자신의 입을 그녀에게 맞대고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은 숨죽인 듯 조용해졌다. 소미는 충격으로 입을 벌리고 그 장면을 바라봤다. ‘이 두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은범은 멍해진 채, 머릿속이 엉망이 되어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유건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계속해서 심폐소생술을 반복해서 실시했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지만, 마음속으로는 조용히 다짐하고 있었다. ‘지시연! 당장 깨어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 당장 이혼이다!! 무슨 이유가 됐든 상관없어!!!’ “콜록, 콜록...” 마치 그의 경고를 들은 듯, 시연은 의식이 돌아오면서 삼켰던 물을 토하며 기침을 했고, 눈썹을 찡그리며 눈을 떴
소미는 눈짓으로 장미리에게 신호를 보냈고, 장미리는 잠시 화를 참으며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떠나기 전, 유건은 은범을 한번 쓱 바라보며 물었다. “그쪽은?” 둘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은범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자기소개를 했다. “노은범입니다. 시연이 친구예요.” 유건은 은범을 잠시 응시하더니, 문득 그를 기억해 냈다. ‘이 사람,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어!’ ‘SYD호텔에서 그날 밤, 호텔 주방에서 우리 둘이 스치듯 지나간 것 같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날 밤, 만둣국을 하려고 호텔 주방을 빌렸던 남자가 바로 이 노은범이었네.’ ‘그리고 그 만둣국도 아마 지시연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지.’ ‘두 사람의 사이가 이렇게 가까웠어?’ 유건은 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시연이 지금 자고 있어요. 노은범 씨도 안으로 들어가 보실래요?” “아니요.” 은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연이 자고 있다면, 전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네요.” 유건은 속으로 안도하며 말했다. “알겠어요. 노은범 씨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유건은 소미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 옥상 테라스에서, 유건은 모든 상황을 낱낱이 소미에게 설명했다. “상황이 이래. 지시연은 내 아내야.” 소미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울부짖었다. “그럼, 지... 지 선생님이 유건 씨의 아내였단 말이에요?!” 소미의 내면은 슬픔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시연이 고유건의 아내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지시연이 갑자기 돈이 생겨 지우주의 치료비를 낸 것도, 지시연이 고유건의 결혼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도...’‘어쩐지, 내가 계속해서 지시연과 고유건 사이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도... 이제서야 이유가 분명해졌네!’유건은 휴지를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왜 저에게 말하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찰나, 주지한이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 시연 씨 깨어났어요.]“그래, 알았다.” 유건이 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소미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깨어났으니, 가서 봐야겠어.” “잠깐만요!!” 소미가 유건의 팔을 잡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도 같이 갈게요.” 지금 소미는 유건과 시연이 단둘이 있는 상황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유건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유건 씨, 걱정하지 마요.” 소미는 서둘러 말했다. “저 지 선생님과 싸우지 않을게요. 저도 지 선생님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같은 여자로서 더 쉽게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유건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같이 가자.” ... 휴게실. 은범은 침대 옆에 앉아 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시연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가득했다. “괜찮아?”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종이로 만든 인형도 아닌데, 물에 좀 담갔다고 죽기야 하겠어?” “그런 말 하지 마.” 은범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하게 말했다. “시연아, 그때 내가 얼마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과 소미가 들어왔다. 시연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즉시 사라졌다. “은범아, 난 괜찮으니까. 먼저 나가 있어.” 은범은 내키지 않았지만, 유건과 시연 사이에 더 많은 일이 있을 것을 알았기에 마지못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잘 쉬어.” “응.” “고 대표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은범이 고유건과 스치듯 지나칠 때, 그는 유건에게서 강한 적대감을 느꼈다. 문이 다시 닫히자, 시연이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이 함께 오셨군요. 꽤 시끌벅적하네요.” 소미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지 선생님, 아까 일은 정말 미안해요.” 시연은 놀랍다는 듯 비웃으며 말했다. “뭐라고요?” 그러나 유건이 먼저 나서
응급실에서 시연은 기본적인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생명 지표는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임신 중이었기에, 산부인과 전문의의 협진이 필요했다. 그 사이, 유건은 병실 밖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환아.” “예, 형님.” 오늘 시연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기환이었기에, 유건은 그에게 반드시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봐.” 기환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형님, 죄송합니다. 형수님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자신이 기억하는 전후 상황을 전부 설명했다. 그 얘기를 다 들은 유건은 눈썹을 깊게 찌푸렸다. “네가 마신 그 밀크티... 장소미 씨가 줬다고?” “네.” 기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방심했어요. 장소미 씨가 줬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의심도 안 했습니다.” 곧이어 서둘러 덧붙였다. “그런데요 형님, 이 모든 게 장소미 씨의 계략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장소미 씨도 누군가에게 이용당한 걸 수도 있어요.”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엔 소미를 의심하긴 했다. 하지만, 소미가 이런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 지한에게 들은 바로는 소미 역시 납치당했고, 시연보다 훨씬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건 그녀의 소행일 리 없었다.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일을 꾸민 놈... 우리 쪽 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어. 다친 사람들은 전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야.’ ‘CA국... 그 사람들이 아니라면 또 누가?’ ‘아직은 뚜렷한 대상이 없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으니, 날 흔들려고 이런 짓을 벌인 건가?’ ‘진짜 못된 놈들... 남까지 해치면서 날 압박하겠다는 건가?’유건이 보기에, CA국 사람들은 비열하고 비합리적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또 성공했다는 것. 지금,
기환은 곧장 환풍기로 향했다. ‘시간이 없어. 옷을 덮어드린 건 찰나의 시간을 끈 것일 뿐이야. 진짜 중요한 건... 여기서 빨리 나가는 거야.’ 기환은 환풍기 선을 확인한 뒤, 맨손으로 선을 잡아당겨 끊었다. 환풍기의 날개가 천천히 멈춰가는 것을 기다린 후, 바지 주머니에서 멀티툴 나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곧바로 해체를 시작했다. 약 삼십 분이 지나자, 환풍기 전체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됐다.” 기환은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띠며 시연에게 달려갔다. “형수님...” 그런데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시연이 뭐라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네? 형수님, 뭐라고요?” “유건 씨... 유건 씨...” 기환은 귀를 가까이 댔다. 분명히, 시연은 유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형수님, 형님을 찾고 계신 거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모셔다드릴게요.” 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을 안아 들었다. 시연은 의식을 잃은 채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춥...다...” 얼굴을 찡그리며 작게 신음했다. “아...” 기환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다정히 말했다. “이제 곧 나가요. 나가면 따뜻해질 거예요.” 하지만 그 순간, 시연이 갑자기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으... 으흑... 유건 씨... 추워요...” 기환은 더 당황했다. “형님을 곧 만나게 해드릴게요. 조금만, 조금만 더...”창고의 환풍구는 제법 큰 편이라 기환이 시연을 안고 움직이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하지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조금만 더... 천천히 가자. 형수님을 다치게 하면 안 돼.’ 그는 달팽이처럼, 아주 조금씩 몸을 움직이며 바깥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환풍기 밖은 냉동창고 안처럼 춥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이젠 괜찮아질 터였다. 그때, 부지하가 사람들을 이끌고 도착했다. “전부 흩어져! 이 구역 전부를 샅샅이 뒤져! 땅을 파서라도 찾아내!” “네!” 지하
“지한, 받아!” 지한이 반응할 틈도 없이, 유건은 품에 안고 있던 사람을 그대로 그의 쪽으로 넘겼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불 속으로 돌진했다. “형님!” 지한은 깜짝 놀라 외쳤다. ‘형님 지금 뭐 하시는 거야?! 위험하잖아!’ ‘장소미 씨 때문이라면 이해가 되는데... 이번엔... 또 왜?’ 유건이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짙은 연기가 덮쳐왔다. “컥... 콜록, 콜록!” 그는 허리를 낮추며 바닥을 이리저리 뒤졌다. 이마엔 굵은 주름이 짙게 잡혔다. “대체 어디 떨어진 거야... 설마 못 찾는 건 아니겠지?”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멈췄다. 불꽃 속 어딘가에서 반짝이는 금속... 그것은 시연이 선물했던 그 라이터였다. 유건의 눈이 번쩍 빛났다. “찾았다!!” 망설임 없이, 그는 불길 속으로 팔을 뻗었다. “악...!” 뜨거운 열기와 불꽃에 살갗이 타들어 갔다. 고통에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유건은 멈추지 않았다.라이터를 움켜쥐고 몸을 돌렸고, 빠르게 밖으로 달려 나왔다. “형님!!” 밖에 있던 지한은 안절부절못했는데, 유건이 나오지 않으면 직접 들어갈 생각이었다. “괜찮으세요?!” 유건은 왼팔을 감싸 쥔 채,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손을... 좀 데었어. 병원 가야겠네.” “구급차 도착했습니다.” 소방대도 이미 현장에 도착했고,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유건은 팔을 안고 걸음을 재촉하며 물었다. “사람은? 장소미 맞아?” 지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예, 그런데 상태가 좀... 안 좋습니다.” 유건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얼굴도 못 봤어...’ “어디 있어?” “저쪽입니다.” 소미는 이미 구급차에 옮겨져 응급 처치를 받고 있었다. 유건이 올라타자, 그녀의 상태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의식은 없이 링거와 산소 치료를 받는 소미.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왼쪽 팔과 아
“으... 으으...” 소미는 마치 애벌레처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몸을 꿈틀거리며 문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유건 씨... 유건 씨... 저 여기 있어요, 여기요!”불과 몇 미터도 안 되는 거리... 그런데도 마치 하늘 끝만큼 멀게 느껴졌다. 그때, 소미는 갑자기 몸을 멈췄고, 눈물에 젖은 얼굴마저 굳었다. ‘뭐야, 이 냄새?!’ 무언가 타는 냄새가 났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며 고개를 홱 들었다. 창문 밖, 붉은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자의 눈이 순간 수축됐다. ‘불이야...? 불... 난 거야?!’ “으으... 으으으...!” 소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눈물이 흘러내리며, 얼굴 가득 공포가 번졌다. ‘왜? 왜 불이 난 거야?’ ‘나는 말도 못 하고, 손발도 묶여 있고... 이렇게 불 속에서 타 죽는 거야?’ “으... 으으...” 소미는 발버둥 쳤지만,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바닥에 엎드린 채, 절망 속에 흐느꼈다. ...“형님!” 지한이 뛰어왔다. 사람들도 도착한 듯했다. “다 도착했습니다! 외곽부터 수색 시작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좋아.” “형님!” 지한이 동남쪽을 가리켰다. “저기요! 불빛이 보여요! 불이 난 것 같습니다!” 그곳이었다. 유건은 즉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지나쳤던 자리였다. “가자. 직접 확인하자.” “네!” 둘이 급히 현장으로 뛰어갔다. 이미 화염은 제법 커져 있었다.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에, 불이 났다는 건, 누군가 이곳에 있었다는 의미였다. “당장 119에 신고해. 그리고 수색팀도 다 이쪽으로 불러. 샅샅이 뒤져야 해.” “알겠습니다!” 타닥타닥- 화염 속에서, 소미는 희미하게나마 유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눈이 번쩍 떠졌다. ‘고유건이야! 그 사람이 왔어!’ 소미는 다시 문 쪽으로 조금씩 몸을 기어갔다. 하지만 화염이 커
지한은 유건의 싸늘하고 날카로운 얼굴을 바라보며, 감히 입을 뗄 수 없었다. 차는 묵묵히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기환이는?” 유건이 턱을 굳게 다물며 물었다. 지한은 바로 눈치를 챘고, 정기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기환이가... 연락이 안 됩니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큰일이다!!’ 기환마저 연락이 두절됐다는 건, 그 역시 무슨 일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좋게 생각하면 시연과 같이 있는 걸 수도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지한은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따로 떨어졌다면, 정말 골치 아파질 것 같은데...’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유건은 깊이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들어 부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하야, 나야.” 유건이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지하는 단번에 파악했다. [시연 씨 쪽, 내가 대신 가달라는 거야?] 0.1초의 정적. “맞아...” 유건이 낮게 대답했다. [문제없어.]친형제 같은 사이, 부지하는 당연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이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진짜 이게 최선일까? 난 상관없지만, 같은 ‘구출’이라도, 내가 가는 거랑 형이 가는 거... 시연 씨 입장에서 보면 다르잖아.]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직접 가고 싶지만...’ 시연의 생명도 소중하고, 소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연은 자기 아내, 소미는 자신이 오랜 시간 찾아 헤매던 ‘나비 공주’... ‘두 사람 중 누구라도 잘못되면, 나는 미쳐버리고 말 거야.’ 냉정하게 따지면, 유건이 지금 있는 위치는 소미에게 더 가까웠다. 그렇다면, 시연을 부지하에게 맡기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유건은 이를 악물었다. “부탁할게. 나도 최대한 빨리 가서 너랑 합류할게.” [알겠어.] 더는 묻지 않고, 지하는 전화를 끊었다. 유건은 핸드폰을 내려놓고도,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차는 도착했고, 멈췄다. 눈앞에 펼쳐진 건 연
“그 사람이 말이야, 그러니까... 응?” 소미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이마를 짚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 그래?” 시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모르겠어...” 소미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지러워... 눈앞이 흐려...” “야...” 시연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하지만 곧, 그녀도 머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증상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쿵! 무거운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소미가 이미 의식을 잃고 테이블 위에 고꾸라져 있었다. ‘뭐야 얘... 왜 이래?’ “야! 장소미...” 시연이 소미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 지금은 잘 때 아니잖아!” 하지만 그녀도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눈앞이 새까매져서 결국 소미처럼 테이블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룸 안은 조용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룸의 문이 열리고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하나는 뚱뚱한 남자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마른 남자였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각각 한 명씩 안아 들고 룸을 빠져나갔다. ...한편, 유건은 몇몇 임원들과 함께 소회의실에서 회의 중이었다. 그때, 지한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조용히 한쪽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통화 내용이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지한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는 곧장 유건의 뒤로 다가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장소미 씨가... 납치됐습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유건이 즉시 손을 들어 회의를 중단시켰다. “일단 여기까지 합시다. 여러분, 각자 자리로 돌아가세요.” “네, 대표님.” 임원들은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어떻게 된 거야? 방금 전화... 범인한테서 온 거야?” “예.” 유건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런 일이 또... CA국 쪽인가?’ ‘집사님이 이미 손을 썼을 텐데, 걔네가 아직도 움직일 여유가 있다고?’
시연은 온몸이 찌릿하게 굳었고,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로얄호텔... 그날 밤... 그 남자...’ 애써 잊으려 했지만, 그건 분명 시연의 가슴 깊숙이 박힌 가시였다.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찔림. 그런데 소미가 지금 그걸 언급했다. ‘무슨 뜻이지? 설마... 뭔가 알아낸 거야?’ 시연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고, 소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너, 뭘 안다는 거야?” 시연은 숨을 참으며 다그쳤다. “그날... 그 남자, 누구야?” [진정해.] 소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 지금 강울대 뒷골목에 있어. 우리 잠깐 만나자. 내가 아는 걸 다 말해줄게.] “좋아.” 시연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근무 중 자리를 비우는 그녀를, 기환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소미가 보낸 주소를 따라, 시연은 강울대 후문 쪽에 있는 한 중식당으로 갔다. 물론, 식사하러 가는 건 아니었다. 그 식당엔 단독 룸이 있었고, 대화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먼저 도착한 시연은, 소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환은 무슨 일인지 몰라 식당 입구에서 대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미가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장소미 씨?” 기환은 의아해졌다. ‘설마 형수님이 만날 사람이 장소미 씨였어?’ “기환 씨.” 소미는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여기, 밀크티예요. 아까 주차하러 가는 길에 사 왔어요.” “아...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장소미 씨 드시죠.” “괜히 사 온 거 아니에요. 시연이도 있으니, 정기환 씨도 있을 것 같아서 석 잔 산 거예요. 안 드시면 그냥 버릴 수밖에 없는데요?” “그럼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기환은 어쩔 수 없이 받아서 들었다. “천만에요.” 소미는 환하게 웃은 후, 나머지 두 잔을 들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기환은 밀크티를 들고 복잡한 표정으로 생
“들어가시죠.” “응.”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밀어 열었다. 방 안엔 이미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말라보였지만, 한 명은 비대한 체격. 여자가 들어서자, 두 사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 마른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금은, 가져왔지?” 여긴 이태길, G시에서 알아주는 암시장이자,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될 모든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이곳의 규칙은 단 하나. 오직 현금을 이용하는 것.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 “응.” 그녀는 미리 준비해 온 여행용 가방을 들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마른 남자가 옆의 뚱뚱한 남자를 흘끔 보더니, 둘이 함께 다가와 가방을 열었다. 현금다발을 일일이 확인한 뒤, 이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시킨 일, 내용은 다 이해했어.” “좋아.” 여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끝나는 대로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때 잔금을 줄게.” “거래 성사.” 이 말을 마친 여자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모자챙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놀란 여자가 허둥지둥 줍기 전에, 마른 남자가 손을 뻗어 먼저 집어 들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내밀었다. “여기.”여자는 얼른 모자를 받아서 들었지만,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시선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뭘 그렇게 봐?” “아, 그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서. 우리... 예전에 본 적 있나?” “아니거든.” 여자는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뱉고, 단숨에 자리를 떠났다. ‘기분 나빠...’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를 벗어나 골목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고 거칠게 숨을 몰아쉰 그녀는 전혀 생각지 못한 듯했다. ‘설마 했는데... 이 암시장에서 잡은 놈들이 그 둘일 줄은 몰랐네.’ ‘하마터면... 들킬
탈의실 한가운데엔, 의료진이 환복할 때 앉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시연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의식을 잃은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유건은 물론, 함께 들어온 간호사도 깜짝 놀랐다. “지 선생님, 왜 이러시죠?” “여보!” 유건은 단숨에 뛰어 들어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간호사님, 당장 의사 좀 불러주세요! 제 아내는... 임신 중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간호사가 급히 뛰쳐나가려던 찰나, 유건의 품에 안긴 시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으...음...” 유건은 얼떨떨했다. ‘여보...?’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눈빛으로 유건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탈의실이었다. “여긴...? 당신, 어떻게 들어왔어요?” ‘설마 이젠 수술실까지 침입하는 건가? 이 사람...?’“정신 좀 들어?” 유건은 대답 대신 그녀를 꼭 안은 채 그대로 걸어 나가려 했다. “어디 불편해? 쓰러질 때 부딪힌 데는 없어?” “어...어어?” 시연은 놀라 입을 벌렸다. “쓰러졌다고요?” 그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아... 이건 완전한 착각이잖아.’“내려줘요.” 시연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난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쓰러졌잖아.” “아니, 쓰러진 게 아니라...” 결국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어요.” 이번 수술을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중간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긴 했지만, 시연은 끝까지 버텼고, 체력이 바닥나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으려다 잠시 벤치에 앉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던 거였다. “진짜예요. 그냥 잠들었어요.” “잠든 거라고?” 유건은 여전히 믿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 당신 생각만큼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요. 수술 끝났다고 바로 기절하는 스타일 아니라고요.” 옆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