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이 향한 곳은 태산요양병원이었다. 즉, 우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시연이 도착했을 때, 최예민은 방을 정리 중이었다.“사모님, 오셨네요.” “네. 우주는요?” 최예민은 우주의 방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교수님과 심리상담 중이에요. 방해될지도 모르니 조금만 기다리시죠.” “알겠어요.” 최예민은 시연에게 물을 내오며 덧붙였다. “우주 상태가 정말 아주 좋아졌어요. 교수님이 확실히 전문가이긴 하시네요.” “정말 수고 많았어요.” “별말씀을요. 전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예요.”시연은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 밤엔 제가 여기 있을게요. 지금 퇴근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와주세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는 내가 보이면 나만 찾잖아요. 어차피 여기 계셔도 특별히 할 일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오랜만에 휴식 시간을 좀 가지세요. 멀리 가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그럼 감사합니다, 사모님.” “천천히 정리하고 가요.”최예민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시연은 가방을 내려두고, 미리 사 온 딸기를 씻기 시작했다. ‘오늘 딸기가 유난히 향긋하네.’ 가을 냄새가 짙게 내려앉은 저녁. 해가 완전히 져갈 무렵, 검은색 카이엔 한 대가 요양병원 앞에 조용히 멈췄다.차 문이 열리고, 긴 다리가 바닥을 디뎠다. 고유건이었다.“형님!” 기환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왔다. “지동성이랑 헤어진 후, 곧장 여기로 오셨어요. 계속 안에서 계십니다.”“그래.” 유건은 짧게 대답하고 곧장 안으로 향했다.하지만 요양병원 입구에서 보안팀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면회 시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지금은 아이들도 다 잠든 시간이거든요.” 유건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9시 50분이었다.‘강제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자는 우주를 깨우게 될지도 몰라. 놀라게 하면... 그건 안 되지.’그는 잠시 고민한 뒤,
‘손을 잡으라고?’시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요청이야?’ ‘또 왜 이러는 걸까?’‘진짜 미쳤나? 하지만 나까지 같이 미쳐줄 순 없지.’ “당신...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별일 없으면 나 들어가야 할 것...”말을 마치기도 전에, 유건이 성큼 다가와 시연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단숨에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어...!” 순간, 시연은 중심을 잃고 유건의 가슴팍에 안겨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남자의 두 손에 단단히 얽혀 있었다. 두 사람의 손이, 꼭 맞물렸다.“당신, 이 밤중에 왜 이러는데요?” 시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냐고?” 유건의 눈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남자의 타오르는 눈빛은, 오로지 그녀만을 향하고 있었다.유건은 시연의 손을 입술에 가져갔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내 아내야. 내 사람이라고. 나 말고, 누구도 당신을 건드릴 수 없어. 설마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미쳤어. 또 시작이네.’ “누가 날 건드렸다고 그래요? 정신 차려요, 고유건 씨.” 시연은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채 반박했다.‘또 그 망상이야? 또 내 사생활 의심하는 거야?’“정말 아니야?”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다시 생각해 봐. 힌트를 줄게. 오늘 있었던 일이야.” “뭐라고요...?” 시연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러다 문득, 머리가 번뜩였다.‘설마... 아버지?’‘맞네, 오늘 하루 종일 정기환이 나를 따라다녔었지.’ 시연의 경호원이자, 동시에 유건의 정보원이기도 한 정기환.“하하.” 시연은 비웃듯 웃었다.“계속 기환 씨를 시켜서 날 감시할 거면, 경호는 필요 없어요. 그냥 데리고 가요.”그녀는 몸을 빼려고 했지만, 유건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헛수고야. 도망친다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남자는 두 팔로 더욱 단단히 시연을 조였다.유건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마음은, 통째로 꼬여버린 듯 아팠다. ‘아파. 진짜... 미치게 아프네...’ 그래서 더 또렷해졌다. 이 아픔이 현실임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걸.그녀는 유건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냈다. “인제 그만 가요. 늦어서 나도 이만 자야 해요.” 말을 마치며 하품까지 했다. 꽤 피곤한 얼굴이었다.유건은 끝내 시연의 손을 놓았다. 얽히고설킨 마음을 억지로 끊어내는 듯, 조용히.“나도, 당신 자신도 좀 놓아줘요. 유건 씨, 마음이 둘인 거, 그것만큼 힘든 건 없어요.” 그 말만 남기고 시연은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닫히는 정문. 그 앞에 홀로 선 유건은, 주먹을 쥔 채 숨을 삼켰다.‘놓아달라고? 전엔 그랬지.’‘근데 지금은 안 돼. 못 놔. 절대 못 놔.’...다음 날 아침. 최예민은 첫 지하철을 타고 새벽같이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단정히 주차된 포르쉐 카이엔을 발견했다.‘설마... 어젯밤부터 있었던 거야?’차에 다가가지는 않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시연은 이미 세수도 끝낸 상태였다. 우주의 세수를 도와주며 옆에서 웃고 있었다.“사모님, 아침 사 왔어요. 드시고 가세요.” 최예민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네, 고마워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앉았다.우주가 거실로 나오자, 최예민이 서둘러 아이를 돌봤다.시연은 따뜻한 죽을 천천히 먹으며, 무심하게 묻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사모님, 아까 보니까 고 대표님이 벌써 도착해 계시던데요? 매번 이렇게 일찍 와서 데려가세요? 완전 스윗하시다...”‘뭐...?’숟가락을 멈춘 시연은 눈을 깜빡였다.‘그 사람... 어젯밤에 안 간 거야?’‘아님... 새벽부터 또 온 거야?’어느 쪽이든, 그녀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그래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아침을 다 먹고, 우주에게 인사하고 시연은 가방을 멨다. 하지만 정문으로는 나가지 않았다.‘그 사람... 아직 거기
시연은 짐 정리는 이미 끝나 있었다. 사실, 딱히 챙길 것도 많지 않았다.그녀는 캐리어 하나, 그리고 작은 캐리어 하나를 꺼내 놓고, 문 옆에 조용히 세워뒀다. 고개를 들자, 진아가 서운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진짜 가는 거야?” “응.” 시연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여기 살 순 없잖아. 언젠가는 떠나야지.”몇 달 뒤면 아이가 태어난다. 지동성이 준 그 작은 집은, 시연이 임시로 머물던 공간이었다.그리고 지동성이 건넨 그 카드에는, 우주의 유학 비용을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금액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는 출산 후, 시연이 아이를 돌보는 도우미를 쓰는 데 쓸 수 있을 터였다. ‘내가 조리원에서 나와 다시 일하게 되면, 어떻게든 살 수 있겠지.’‘그 사람이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건 인정해야 해.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날 도와준 거야.’ 진아도 그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말없이 입술을 내밀었다.“그냥... 네가 가는 게 싫어서 그래.”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 뭘.” 시연은 진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우리 집 넓어. 방도 많으니까 자주 놀러 와. 꼭이야.”“응...” 진아는 코끝을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멍청이.” 시연은 웃으며 그녀를 안았다. “그래서 너, 남자 친구는 언제 만들 거야?”“나?” 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 친구 같은 건 안 만들래. 난 그냥... 잘생긴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또 시치미 떼네.’ 시연은 장난스럽게 진아의 목덜미를 팔로 감싸고 속삭였다.“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여자가 먼저 고백할 수도 있는 거야. 여자가 먼저 다가가도 돼. ‘여자가 마음먹고 다가가면, 남자는 무너진다’는 말도 몰라?”진아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그, 그런 거 아냐! 그런 사람 진짜 없다고 했잖아!”‘과연 그럴까?’ 시연은 모른 척, 가볍게 웃었다.“
“네, 형님!” 기환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 곧바로 시연이 타고 있는 차량의 위치를 유건에게 전송했다.지동성이 마련해준 그 집은, 진아의 집과 멀지 않은 강울대병원 근처였다. 차는 조용히 단지로 들어섰고, 아파트 입구에 멈췄다.짐을 내려놓고, 지동성이 말했다. “열쇠 챙겼지? 난 여분이 없어.”“네, 있어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동성의 뒤를 따랐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조용히 올라가는 길. 시연은 잠깐 숨을 고르며 문을 열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센서 등이 켜졌다.그녀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 하지만 첫 번째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리모델링이 끝난 이 집은, 깔끔한 가구들과 소프트한 조명, 따뜻한 톤으로 채워져 있었다.지동성은 짐을 안방에 옮겨놓고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네, 좋아요.” 시연은 솔직하게 말했다. ‘편안하다. 처음으로, 진짜 내 공간이 생긴 느낌이야.’“다행이네...” 지동성은 미소를 보였지만,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복부를 살짝 감쌌다.그 순간, 시연이 눈치를 챘다. “몸이 안 좋으세요?”“괜찮아.” 그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물 좀 줄래? 약을 먹어야 해서.”“네.” 시연은 바로 부엌으로 가서 컵에 물을 담아 왔다. “여기요.”“고마워.” 지동성은 약병에서 몇 알을 꺼내 물과 함께 삼켰다.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시연은 괜히 미안해졌다. ‘저 나이에, 병든 몸으로 나까지 도와주고... 뭐,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보다는 더 많이 해준 셈이네.’“조금 앉아서 쉬세요. 무리하시면 안 돼요.”“응.” 지동성이 소파에 조용히 앉으려는 순간, 벨소리가 울렸다. 띵동-두 사람 모두 놀라, 서로를 바라봤다.“누구지?” 시연은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마자, 긴 다리로 정갈하게 선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절제된 표정, 억눌린 듯한 웃음, 유건이었다.시연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일어나는 거 도와드릴게요.” “그래, 고맙다.”시연은 지동성을 부축해 조심스레 일으켰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유건의 눈빛은, 금세 타오르기 시작했다.‘왜 자꾸 저 인간 몸에... 자꾸 손을 대는 거야?’ 유건의 분노는 이미 임계점을 넘었다.“지시연, 놔! 그 손 당장 놔!”“내가... 내가 다시는 그 인간한테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유건의 눈동자에서는 불이 이는 듯했다. 언제 터질지 모를 화산처럼, 들끓고 있었다.시연은 속에서부터 전율이 일었지만, 지동성이 또 다칠까 봐 얼른 보내야 했다. “이제 가세요, 빨리요.” 시연은 그의 눈을 피하며 재촉했다. “얼른요!”“하지만, 시연아...” 지동성은 머뭇거렸다. 딸을 남기고 가는 것이 불안했다.“제발요, 그냥 가요! 내 일이에요.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어요. 여기 남아봤자 또 맞기만 해요, 그걸 원해서 이러시는 거예요?”“그럼, 또 보러 올게.”지동성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유건의 눈빛은 살기를 품고 있었다. “가긴 어딜 가?” ‘저 노친네, 생각할수록 더 화난다니까? 시연이가 저 노친네를 지키다니, 내 마음은 점점 무너지는 느낌이라고!’“한 발짝도 못 나가.”“고유건 씨!” 시연은 유건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이제 그만해요! 다신 누구도 때리지 마요!! 알겠어요?!”“여보!!!” 유건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상처가 뒤섞여 있었다.“나한테 화내는 건 이해해. 하지만... 저 사람은...”그때, 지동성이 발걸음을 멈췄다.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고 대표님, 이만 시연이를 놔주세요.”“하.” 유건은 비웃었다. “저 노친네가 지금... 씨X,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그는 다시 앞으로 다가가려 했고, 주먹을 말았다.“안 돼요!” 시연은 본능적으로 유건을 껴안았다.“부탁이에요!! 때리지 마요!!”지동성은 담담하게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말을 이었다. “내 딸은 내가 가장 잘
시연은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유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협상의 여지... 상상도 못 한 방법...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저 사람, 분명 뭔가 꾸미고 있을 것 같아...’...그날 이후, 시연은 지동성이 사준 강울대 근처 아파트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매일 병원까지 걸어 다니며 출퇴근했고, 생활은 그녀가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그리고 유건은 한 번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이상하네...’ 조용해서 좋으면서도, 시연은 이상하게 가슴 깊은 곳이 계속 불안했다. 어딘가, 아주 미세하게 균형이 어긋나 있는 느낌.그날 오후, 마침 병원 쉬는 날이었던 시연은 버스를 타고 태산요양병원으로 향했다....“우주 누나, 왔네요?” 경비 아저씨가 놀란 얼굴로 인사했다.“네, 저 왔어요.”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녀는 웃음을 멈췄다.“혹시 우주가 뭐 놓고 갔어요? 찾으러 오신 거예요?”“네...?” 시연의 미간이 즉시 찌푸려졌다.“우주가 뭘 놓고 갔다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경비는 당황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어라? 그게 아닌가요? 전 그냥... 뭔가 두고 갔나 싶어서... 그럼 우주 보러 오신 거예요?”“당연하죠.” 시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그 순간, 경비는 뭔가 눈치챘다는 듯 입술을 떼었다.“설마... 정말 몰랐어요? 우주, 여기서 퇴원했어요.”“뭐라고요?” 시연의 온몸이 얼어붙었다.“퇴원이요...? 언제요? 어디로요?”경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안에 들어가서 의사나 간호사분들께 한번 물어보세요. 아마 아실지도...”“네, 알겠어요!”시연은 거의 달리다시피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복도를 빠르게 지나 간호 스테이션에 도착했다.하지만 의사와 간호사들도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저희도 정확한 건 몰라요. 퇴원 절차는 최예민 씨가 진행하셨어요.”“고 대표님과 보호자 되시는 분, 그러니까 시연 씨와 상의해서 더
시연은 병동 복도 끝, 창가에 기대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유건이 병실에서 나왔다.“여보.”남자의 부름에 시연은 돌아섰다. 그리고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우주 어딨어요? 지금 어디 있어요?”시연의 표정은 얼핏 차분해 보였지만, 꼭 쥔 양손이 그녀의 진심을 말해주고 있었다.‘떨지 마... 지금 화내면 지는 거야.’유건은 여자의 손을 흘긋 보고, 미간을 살짝 좁혔다.“태산요양병원, 솔직히 말해서 최고는 아니야. 자폐 스펙트럼 관련 전문 치료도 그리 뛰어나지 않고.”그는 의도적으로 말투를 부드럽게 했다.“더 좋은 시설이 있어서, 우주를 거기로 옮겼어. 최예민 씨랑 심재규 교수도 같이 갔고, 우주 상태는 아주 좋아.”그 말투, 그 표정... 모든 게 너무 완벽해서 더 불쾌했다.“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요. ‘어디’ 있는지 물었는데, 왜 말을 돌려요?” 시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억눌려 있던 감정이, 그 순간 확 터져 나왔다.“나는! 지금 당장, 우주를... 보고 싶다고요!”유건은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침착하게 시연을 바라봤다.“보고 싶어? 내 조건은 간단해. 당신도 내가 원하는 걸 알잖아?” ‘진짜, 이 인간... 끝까지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네.’순간, 시연은 숨이 턱 막혔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그래, 애초에... 우리는 계약으로 시작된 관계였어. 내가 아주 잠깐, 착각했을 뿐이야.’ ‘고유건의 다정함에, 사람다운 모습에... 내가 방심했어.’시연은 눈을 들어, 유건의 눈동자를 곧장 바라봤다.“당신한텐 장소미가 있잖아요. 장소미가 당신의 ‘나비 공주’라면서...”“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요? 나한테도, 장소미한테도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 건데요?”유건은 입꼬리를 거의 티 나지 않게 올렸다.“당신만 순순히 굴었으면, 나도 이런 방법은 쓰지 않았을 거야.”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뭐라고...?” 장미리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그 말 한마디에, 마치 불씨에 기름을 부은 듯, 장미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지동성! 그게 사람이 할 소리야?”“내가 당신이랑 몇 년을 살았는데... 우린 부부잖아! 집안 돈은 우리 공동재산이라고!” 지동성은 코웃음을 쳤다. “공동재산? 웃기고 있네.” 싸늘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잊었어? 당신, 나한테 시집올 때 빈손이었잖아. 혼수? 그런 건 하나도 없이 나한테 온 거 아니었나?” 장미리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 그때 난 진짜 아무것도 없었지... 근데 그 일을 지금, 이 순간에 꺼낸다고?’그녀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 난 빈손으로 왔어! 하지만 소미는? 소미는 내 딸이야! 내가 낳은 내 딸이라고!” 지동성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소미만 아니었으면... 난 당신이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하, 미쳤네 진짜...” 장미리는 이성을 잃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날 그렇게 깔보며 살아온 거야?!” 지동성은 귀찮다는 듯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됐고, 그만 좀 해. 이 나이에 이런 말싸움은 하고 싶지도 않거든.” 그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 “가긴 어딜 가!” 장미리는 그를 붙잡았다.“설마... 시연이한테 돈이랑 집을 준 거야? 진짜냐고! 나 몰래 챙겨준 거 맞지?” 지동성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 “몰래라니? 시연이는 내 딸이고, 우주는 내 아들이야. 내가 내 자식한테 주겠다는데, 누구 눈치를 봐?!” “뭐... 라고...?” 장미리는 무너지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소미 말이 맞았어. 이 인간, 진짜로 지시연한테 다 퍼줬어.’“그 돈은 내 거야! 소미의 미래를 위해 모은 거라고!!” 장미리는 소리쳤다. “당장 가서 시연이한테 준 거 다 받아와! 그 집도, 그 돈도! 다 내놓
장소미가 납치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화상을 입은 이후, 유건과 시연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누가 됐든, 반드시 뿌리까지 뽑아낼 거야.’유건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의 싸늘한 기운에 방 안의 공기조차 무거워졌다.“네, 형님.”지한은 짧게, 그러나 단단한 어조로 대답했다.말보다 표정이 먼저 충성심을 증명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이 다이닝 룸으로 내려갔을 때, 유건은 아직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났어?” 유건은 조용히 시연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히며, 얼굴을 살폈다. “머리는 어때? 아직 아파?” 부드러운 목소리. 언뜻 보기엔, 누구보다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모님이 아침부터 생선 머리 탕을 끓여주셨어. 당신 어제 술을 조금 마셨잖아. 속 풀리게 한 그릇 먹어.” 이때 왕성애가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오늘 아침에 직접 당부하셨어요. 어젯밤에 술을 드셨으니, 꼭 속 풀어드리라고요.” “감사합니다.”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하지만 그 말은 왕성애를 향한 것인지, 유건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국을 한 숟갈 뜨는 사이, 유건은 조용히 상 위에 작은 상자를 꺼내 놓았다. “여보.” 그는 다정하게 불렀다. “선물이야.” 시연은 반응하지 않았다. 유건은 약간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입사 축하 선물이야. 시계야.” “필요 없어요.” 짧고 단호했다. 유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직도 어제 일 때문에 화난 거야?” “아니요.”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시계... 너무 비쌀 것 같아요. 난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인데, 그런 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유건은 낮게 웃었다. “그게 문제였어?” 그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던 건, 고급스러운 여성용 파텍 필립 시계. 그가 평소에 차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었
유건은 시연을 조심히 안아 차에 올랐다. 하지만 문턱을 넘는 순간, 그녀의 머리가 살짝 닿았다. “아야.” 시연이 눈을 뜨며 그를 째려봤다. “아프잖아.” 삐죽한 입매에 살짝 붉어진 눈꼬리. 투정 부리듯 말하는 그녀는, 말도 안 되게 귀여웠다. 요즘 내내 싸우기만 했고, 시연은 유건에게 제대로 된 눈빛 하나 준 적 없었다. 오늘, 만약 실수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녀가 이렇게 말할 일도 없었을 터. 유건의 목젖이 뚜렷하게 움직였다. ‘미치겠네... 이럴 땐 정말, 참기 힘들다.’“여보, 그렇게 날 유혹하지 마.” “응?” 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유혹 안 했는데? 난 유혹한 거 아닌데? 난 의사야. 후크 아냐.” “푸흡!!” 참으려 했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더는 참지 못한 유건이 여자의 턱을 살며시 잡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시연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고, 깊고, 절제되지 않은 키스였다. “읏...!” 호흡이 가빠지자, 시연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었다. “숨... 못 쉬겠어.” 유건은 여자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키스하는 법 몰라?” 그 순간, 시연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를 말없이 바라보는 눈빛에, 무언가 낯선 기운이 돌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유건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유건!!” 시연은 그의 옷깃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 흐리던 눈빛이, 조금은 맑아진 듯했다. “괜찮아.” 그 말에 유건은 오히려 더 당황했다. 시연은 너무 조용했고, 너무 순했고, 평소 같지 않았다. 유건은 다가가 뺨에 입을 맞췄다. 시연은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텅 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가에서, 조용히 눈물이 떨어졌다. 유건의 손등 위로, 작고 뜨거운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여보...?” 그가 급히 얼굴을 들었다. 시연의 두 눈엔 이미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너희...!!!” 하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더는 말 안 할게. 하지만 너희, 앞으로는 입 단속 잘 하는 게 좋을 거야. 다음에 또 이런 말 들리면...”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냉정하게 말했다. “고 대표님께 바로 말씀드릴 거야. 고 대표님이 시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지? 과연, 그분이 가만히 계실까?” 그 말에 간호사 두 사람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병원 안에서 이미 떠도는 소문... 조한나가 갑작스레 ‘사라진’ 이유가, 바로 시연과 관련 있다는 얘기. “다,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말하지 마...” “맞아. 우리가 잘못했어.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 “흥.” 하은은 그들이 뉘우치는 척하는 얼굴조차 보기 싫었다. “그럼 얼른 꺼져.” “알았어. 가면 되잖아!” “미, 미안해...”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서는 두 사람, 그 순간, 정면에 서 있는 유건과 마주쳤다. 딱!싸늘한 눈빛, 입꼬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고, 고 대표님...” 유건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이미 다 들었어. 다음엔 조한나보다 더한 꼴을 보게 될 거야.”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조한나 이야기가 진짜였어...’“두 번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꺼져.” “죄,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도망치듯 자리를 떴고, 그제야 하은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고 대표님... 아까는 시연이가 안에 있어서... 괜히 듣고 속상해할까 봐... 제가 맘대로 대표님 이름을 입에 올렸어요...” 유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잘했어. 오히려 고마워.” 그는 처음으로, 하은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같은 학교 동기인 데다, 병원에서도 늘 같이 있다고 했지? 시연이... 내가 못 챙길 때가 많아. 앞으로도 이런 일 있으면, 부탁 좀 할게.” “아, 네... 그럼요! 저야
샤부샤부와 시연이 좋아하는 채소들까지. 유건은 직접 음식 코너를 몇 번이나 오가며 이것저것 챙겼다. 직원들이 다가와 도와드리겠다고 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내 아내가 부탁한 거니까.” 남의 손을 빌릴 수 없었다.시연이 원한 것이니, 유건이 직접 해야만 했다. 가스 불을 켜고, 국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유건은 채소며 고기며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넣기 시작했다. 시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 과정을 지켜봤다. 입술이 살짝 벌어져, 침 삼키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저 고기... 다 익은 거 같은데... 언제 주려나?’ ‘고기야 오래 익힐 필요 없지.’ 그 모습을 보고 유건은 웃음을 지으며, 익은 고기를 시연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그녀 취향에 맞춰 소스까지 만들어주고 나서야 말했다. “됐어. 이제 먹어봐.” 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들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풀 정도로 가득 넣고, 입을 오물거리며 행복하게 웃었다. “맛있어?” “응.” 시연은 또 고개를 끄덕이며, 국물을 가리켰다. “더.” “알겠어.” “그리고... 소고기 완자도!” “그래, 그것도.” 주변 동료들은 그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고 대표가 시연에게 이렇게 다정한 줄은 몰랐다. 아까 하은에게 냉정하게 굴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먹다 말고, 시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좌우로 흔들며,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왜 일어나? 뭐 필요한 거 있어?” 유건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화장실.” 시연은 천진하게 웃으며 유건의 손을 뿌리려 했다. ‘이런 상태로 혼자 가게 둘 수는 없지.’ 유건은 그녀를 반쯤 안다시피 하며 일어났다. “같이 가자.” “고 대표님.” 목소리에 돌아보니, 하은이었다. “제가 같이 갈게요. 화장실 안쪽은 남자분이 들어가기 힘들 테
하은이 새우 완자를 시연의 그릇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시연은 한 눈으로 슬쩍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하은은 순간 멍해졌다. 분명, 평소의 시연이라면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시연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보자, 시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은을 바라봤다. 멍한 눈, 어딘가 초점 없는 시선. “왜?” “너, 설마 취한 거야?” “응?” 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아니야, 나 멀쩡해!” ‘뭐야, 딱 취한 모습이잖아.’ 하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떨리는 손끝이 컵에 닿아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연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없어. 헤헤.” “배는?” 하은은 조심스레 시연의 배를 바라보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 시연이 배에는 고씨 가문의 후계자가 계시니까...’“배 아프진 않아?” “배?” 시연은 곧 두 손을 배 위에 얹고,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입술 끝엔 미소까지 걸렸다. “여기 내 아기가 있어.” 서로의 눈을 마주친 하은과 현진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해...?’ 그때, 룸 안이 웅성거리며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고 대표님!” “고 대표님, 어서 오세요!” 양석현 교수가 일어서며 반갑게 인사했다. 유건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럽게 시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아내랑 함께하는 자리이니, 꼭 오려고 했습니다. 양 교수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시연이는 저기 있습니다.” 유건은 가볍게 인사만 나눈 뒤, 바로 시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은과 현진은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하지만 시연은 그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자기 앞의 접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어딘가 멍하고, 또 순진했다. “무슨 일 있어?” 유건의 목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시연은 물러설 수 없었다. 게다가, 우주를 생각하면 유건의 의중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얇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교수님, 그럼 어서 다 함께 내려가시죠.” “그... 그래.” “좋다!” “얼른 가자!” “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 “나도. 저녁 먹으려고 하루 종일 굶었단 말이야.”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아까 있었던 일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건물 앞에는 차가 여섯 대쯤 대기 중이었고, 일행은 그 차들을 나눠 타고 ‘셀레스트’로 향했다. ...일반 뷔페의 북적임과는 달리, ‘셀레스트’는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손님들은 각자 음식을 고른 후, 식사 중에도 조용히 대화를 나눴으니 말이다. 지한이 예약해 둔 자리는 창가 쪽 세 테이블을 붙여놓은 넓은 자리였다. 음식은 신선한 재료로 구성되어 있었고, 해산물, 육류, 디저트... 중식, 양식 가릴 것 없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깔끔한 플레이팅은 보기만 해도 식욕을 자극했다. “와... 이래서 비싼 거구나.” 주하은이 시연과 함께 음식 코너를 돌며 감탄했다. “여기 음료는 다 즉석에서 만들어주네.” 그리고 시연을 슬쩍 보며 웃는다. “고 대표님, 여전히 너한테는 돈 아끼는 법이 없네?” ‘돈을 아끼지 않는다...’시연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예전에 시연은, 바로 그 ‘아낌없이 주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이 오히려 그녀를 더 미치게 했다.자리로 돌아오자, 양석현이 컵을 들었다. “오늘은 지 선생이 쏜다니까... 우리 과 식구가 된 걸 축하하면서, 다 같이 건배하자! 지 선생, 고마워!” “지 선생, 축하해!” “지 선생님, 환영합니다!” “건배!” “...”시연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들었다. 그 컵은 아까 하은이 가져다준 거였다. 시연은 살짝 긴장하며 입을 뗐다. “선생님들, 저는 이제
사무실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모두가 두 여자의 상황을 지켜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숨고 싶을 정도의 굴욕감. ‘왜...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해?’이를 악물고 소미의 팔을 잡았다.“고유건 씨는 지금 여기 없어. 그 사람을 찾고 싶으면, 직접 전화해.”손에 힘을 주며 억지로 끌어내려 했다.“싫어! 난 안 가!” 소미는 저항하며 울부짖었다. “유건 씨! 난 유건 씨 봐야 해!!”“없다니까!!!”시연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미는 갑자기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뛰어갔다.“유건 씨!!!”복도 끝. 병동 입구.막 들어서던 유건이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소미의 등장에 당황한 그는, 곧장 시연을 찾았다.시연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이 상황, 최악이야.’유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모두의 시선은 전부 두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숨죽인 채, 입도 뻥끗하지 못한 채.사람 중 몇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진짜 소문대로였네. 고유건 대표님과 장소미 씨...”“둘 사이, 예전부터 돌던 스캔들...”“끝나지 않은 거였어... 지금도...”“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고 대표님의 아내인... 지 선생님도 있는데...?”“...”소미는 유건의 팔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시연은 계속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모두가 그 장면을 보는데도,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건은 시연에게 말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었다.“여보...” 그는 한 발 내디뎠지만, 소미가 남자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유건 씨, 왜 이틀째 병실에 안 온 거예요? 나 치료도 안 받고 있었어요.”“소미 씨.” 유건은 난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요즘 일이 많았어.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소미 씨 상태는 계속 보고 있었어.”“정말요?” 소미는 울다가 입술을 삐죽였다.“그럼, 지금은 시간 있잖아요? 저랑 같이 있어 줄래요?
외과 사무실을 나와 병원 건물을 벗어날 때까지, 시연의 얼굴엔 내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여보.” 유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세웠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물었으니 대답해야 할 터였다. 시연은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식사 자리는 내가 마련했어야 하는 건데, 왜 아무 상의도 없이 당신이 정했어요?”“어...?” 유건은 억울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내가 예약한 데가 마음에 안들어? 당신 셀레스트 음식 좋아하잖아.”“좋아하긴 하는데...” 시연의 눈썹이 확 짧아졌다. “당신, 우리 과에 몇 명이나 있는 줄 알아요? 의사 간호사 포함하면 30명은 넘는다고요!”“그래서?” 유건은 고개를 갸웃했다.‘‘그래서’라니...’ 시연은 숨을 꾹 참았다.‘대충 계산해도 거의 몇천만 원이야. 그걸 아무 말 없이 덜컥?’“비싸잖아요, 당신 정말 몰라서 그래요?”“그게 비싸?” 유건은 미간을 찌푸렸고, 진심으로 의아한 듯했다.“우리가 부담 못 할 정도는 아니잖아.”‘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만약 자신들이 ‘정상적인' 부부였다면, 그녀도 이걸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당신한테 빚지고 싶지 않다고. 그게 싫은 거야.’그녀가 진심으로 표정을 굳히자, 유건은 눈치 빠르게 태도를 바꿨다.“알았어,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턴 꼭 당신한테 먼저 물어볼게. 미안해, 응?”‘다음? 우리 사이에 다음이 있긴 한 걸까?’시연은 속으로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지만, 입 밖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 자리는 돌아오는 주말로 정해졌다. 당일, 당직 간호사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전원 참석 예정.근무 시간이 끝나기 전부터 사무실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하지만 시연만큼은 평소처럼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그래도... 다들 내가 임신 중인 걸 챙겨주는 덕에, 차트 정리는 내 몫이 된 거야.’ “지 선생, 그만하고 옷 갈아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