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로얄호텔.지시연이 7203호 로얄 스위트룸의 호수를 확인했다.‘여기구나.’그 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지동성이 보내온 문자 메시지였다. [시연아, 네 새엄마가 네가 진 사장을 잘 모시기만 하면, 바로 네 동생의 치료비를 주겠다고 약속했단다.]이 문자 메시지를 읽은 시연의 창백한 얼굴에 무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미 신경이 마비되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듯했다. 아버지는 재혼한 후, 시연과 동생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심지어는 계모가 10여년간 두 남매를 가혹하게 학대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의식주를 마련해주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때리고 욕하고 비난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까지 벌인 학대로도 모자라, 사업상의 빛 때문에 딸 시연이 남자랑 잠자리를 가지게 하다니...시연이 응답을 하지 않자, 지동성과 새엄마 장미리는 동생 지우주의 치료비를 빌미로 그녀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시연의 동생 우주는 자폐증을 앓고 있어서 치료를 멈출 수 없었다.호랑이도 자기 새끼는 건들지 않는 법이거늘... 지동성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었다!시연은 동생 우주를 위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시연이 방문 앞에 선 채 깊은숨을 들이마셨고, 이내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문고리를 살짝 돌리자, 스르륵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조금의 불빛도 없이 어두컴컴했다. 시연은 눈썹을 찌푸린 채 더듬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진 사장님, 저예요. 어...”갑자기 길고 우락부락한 팔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더니 벽으로 밀쳤다. 벽에 부딪힌 시연은 등에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바로 이때, 남자의 거친 숨결이 순식간에 그녀를 휘감기 시작했다.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며 손으로 시연의 목을 조여왔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머릿속이 멍해진 시연은 이것이 도통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몰라요...” 그 남자는 시
시연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을 때, 머리가 반쯤 벗겨진 뚱뚱한 중년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장소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작 별거 아닌 연예인 주제에 날 무시해?! 내가 너랑 결혼해 주겠다는데도 날 밤새워 기다리게 한 거냐고!” 소미는 간신히 굴욕을 참아냈다. ‘이 진 대머리가 이런 핑계로 여자를 농락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설령 저 사람이 정말 결혼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여자 입장에서 그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누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어?’‘하... 내가 얼마나 재수가 없었길래 저 남자의 눈에 띈 거야?’‘부모님께서는 나를 아끼는 마음에 지시연한테 대신 가라고 하셨지만...’‘지시연이 도망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장미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진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거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지동성도 설설 기며 말했다. “맞습니다, 화 푸십시오, 진 사장님.”“화를 풀라고?”진광수는 분노를 삼킬 수 없었다.“웃기는 소리! 장소미 씨가 원하지 않는 이상, 나도 억지로 할 생각은 없어! 그냥 파산하고 감옥에 갈 준비나 하는 게 좋을 거야!” 몸을 일으킨 그가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려다가 시연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진광수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느 집 계집애길래 이렇게 예쁜 거지?’ 시연은 화장기가 없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청아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탄력 있는 피부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짙은 이목구비를 가진 전형적인 미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가씨는 누구?”시연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진 사장이구나.’ ‘어젯밤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 남자가 훤칠한 키에 탄탄하고 힘 있는 근육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어. 눈앞의 이 사람은 절대 아니었단 말이지!’ ‘우리 우주를 위해서 존엄과 순결을 바쳤는데... 상대를 잘못 찾았던 거야?’ ‘하긴... 지금 생각해 보니까 어젯밤의 그
“고 대표님.”진광수가 갑자기 행동을 멈추었는데, 상업계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고유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유건은 진광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는 장소미를 응시하였다.‘저 여자가 바로 어젯밤에 내 품에서 간드러지게 신음하던 여자라는 거지...?’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거센 힘으로 진광수를 바닥에 뒤집어엎었다. “으악!”진광수가 갑자기 피가 잔뜩 문득 이빨 하나를 뱉어냈다. 이 광경을 본 지동성의 일가족은 겁에 질려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유건은 얇은 입술로 조롱의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그의 말투는 얇고 예리한 칼날 같았다.“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진광수는 처절한 모습으로 땅에 엎드려 입을 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고 대표님, 정말이지 장소미 씨가 고 대표님의 여자인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건드린 적도 없지만요. 정말입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그의 말을 들은 유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미를 바라보았다.“확실해요?”소미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네, 확실해요...”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고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진광수가 헐레벌떡 저택을 뛰어나갔다. 지동성 일가가 분분히 서로를 마주 보던 찰나, 유건이 허리를 숙여 소미를 일으켜 세웠다.그는 부드러운 손끝으로 소미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울어요? 겁낼 거 하나도 없어요.”“내가 있으니까 아무도 소미 씨를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약간은 허스키하고 저음인 목소리를 들은 소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저를 아세요?”“어젯밤에...”이 말을 뱉는 유건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다.“로얄호텔 7203호실, 소미 씨와 나, 이제 알겠어요?”‘어젯밤?’‘로얄호텔?’‘나와 이 남자?’ 지동성 일가는 말이 막힐 정도로 놀랐다.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동시
시연은 유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결혼은 장난이 아니었다.그녀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죠? 그냥 어르신을 잘 설득해 보시는 게...”하지만 시연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이 말했다. 그는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평온한 어투를 유지하고 있었다. “계약 결혼 조건으로 보상도 해줄게요, 돈으로요.” ‘금전적인 보상을 하겠다고?’멍해진 시연은 차마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 우주는 아직도 치료비를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고씨 저택을 찾아간 이유였지.’ 시연이 흔들린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건이 계속해서 말했다. “지시연 씨가 원하는 대로 드릴게요.” 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게 할게요.” 눈을 흘기는 유건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조롱이 서려 있었다. ‘고작 돈 때문에 결혼을 결심하다니, 정말 보잘것없는 여자잖아?’‘하지만 오히려 좋아, 앞으로도 다루기 쉬울 테니까.’ “그럼 합의서는 내가 준비할게요. 내일 아침, 신분증과 필요한 서류를 들고 구청으로 오세요!”“네.”이튿날 아침, 시연은 구청 입구에서 유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밤새 잠을 잘 자지 못했기 때문에 유건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머리가 멍한 상태였다.하지만 바로 그때, 유건이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을 본 시연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고유건 씨.”하지만 유건은 시연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따라와요!”“아, 네.”절차는 빠르게 끝났는데, 혼인관계증명서를 손에 쥔 지시연은 왠지 마음이 복잡했다. ‘생존을 위해 몸을 파는 것도 모자라서, 결혼까지 하다니...’ 구청의 입구에는 차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유건이 뒤에 있는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타요, 기사님이 집까지 데려다 줄 거예요.” 그는 곧장 앞에 있는 차로 향했다. “형수님.”주지한은 지시연에게 다가가 카드 한 장을 건네주었다. “형님께서 주신 겁니다.”‘바라던 바
비틀거리던 시연은 하마터면 똑바로 서지 못할 뻔했다. 방금 고상훈의 검사를 마친 의사가 유건을 향해 말했다.“고 대표님, 오셨습니까. 고 어르신께서는 아무 문제가 없으십니다만, 조금 허약하셔서 충분한 영양 섭취와 휴식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어르신께서 자극받지 않도록 주의하시고, 좋은 기분을 유지하도록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의사는 이 말을 마치고 병실을 떠났다.고상훈은 반쯤 누워서 손을 흔들었다.“유건아, 그리고 시연아, 너희는 오늘 혼인신고를 했잖니... 행복한 신혼 밤을 보내지는 못할망정, 이 할아버지를 보러 오면 어쩌겠다는 게야.”“어르신.” 시연이 손에 땀을 쥐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고상훈이 조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아직도 나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게야? 그리고, 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게야?” “저는...”유건이 그녀의 손목을 거세게 쥐었다.“할아버지께서 아직 입원 중이신데, 저희 두 사람이 행복한 신혼 밤을 즐길 수 있겠어요. 그리고 시연 씨는 할아버지의 뜻을 어길 수밖에 없어서 죄송하다는 거고요.” 시연은 매우 놀랐다.‘왜 나의 민낯을 폭로하지 않으려는 거지?’ “하하, 역시 시연이는 참 착한 아이구나.” 고상훈이 활짝 웃었다.“얼굴 봤으니 됐다. 의사 선생도 괜찮다고 했고... 여기에는 의사 선생과 간호사들이 있을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거라. 너희 둘만 괜찮다면 나는 너무 기쁘단다. 유건아, 오늘은 네가 좀 주동적으로 행동하려무나.” “네, 할아버지, 그럼 푹 쉬세요.”시연의 손을 잡은 유건이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다정한 모습은 잠시일 뿐, 유건은 병실을 나오자마자 시연을 뿌리쳤고, 두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충분한 안정이 필요하시니까 당분간은 사실을 숨기는 게 좋겠어.” ‘할아버지께서 결혼을 종용한 여자가 이런 여자였다는 걸 알게 되신다면, 당장이라도 화병이 도지고 마실 거야.’ 유건이 말하지 않아도 시연은
병실 안.우주는 환자복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이미 국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카락과 얼굴에도 밥반찬과 국물이 묻어 이목구비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중년의 간병인이 숟가락을 들어 우주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먹어! 빨리 먹으라니까?! X신 같은 놈, 입도 못 벌리다니! 이 개돼지만도 못한 X! 아...” 갑자기 머리카락이 힘껏 뒤로 당겨진 그녀가 돼지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녀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어떤 정신 나간 새X야?! 너, 내가 누구인지 알아?!” “허, 당신이 누군데요?!”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시연은 온몸에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당신이 뭔데 내 동생을 때려?! 입만 열면 천박한 말을 내뱉는 주제에 왜 어린아이를 괴롭히냐고! 이 아이의 가족이 다 죽고 없는 줄 아는 거야?!” 시연이 더욱 팽팽하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자, 그 간병인은 두피가 벗겨질 것 같았다. “아파, 아프다고! 이거 놔!”간병인은 전형적으로 약자를 업신여기고 강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벌벌 떨며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그래요,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고요!” 시연은 손을 놓으며 간병인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닥치는 대로 도시락을 들고 간병인의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당신, 이렇게 억지로 먹이는 거 좋아하잖아? 당신도 당해봐!” “아, 아...”철제 숟가락은 간병인의 입을 거의 베어버릴 지경이었다. 간병인은 말하지 못하고 손짓으로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연이 어떻게 그녀를 가만히 둘 수 있겠는가. 찰싹!시연이 손을 들어 간병인의 뺨을 한 대 때렸다.“방금 내 동생을 이렇게 때렸지? 때리니까 속이 시원했니? 그런데 어쩌지? 이제 내가 배로 돌려줄 건데!” 찰싹, 찰싹, 찰싹!몇 번의 따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간병인이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시연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가자, 당장 병원장님을 만나야겠으니까!”“안 돼요, 제발!
강렬한 직감을 느낀 시연이 되돌아가자, 지씨 저택 앞에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곱게 한 장소미가 나와 있었다. 차 문이 열리고, 차에서 내린 고유건이 손에 든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붉은색의 아름다운 장미는 남자의 열정적인 사랑을 대신하는 듯했다. “너무 예뻐요.” 꽃다발을 받은 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유건의 팔을 잡았다. 유건은 신사처럼 차 문을 열어 소미를 조수석에 태웠고, 그렇게 두 사람은 지씨 저택을 떠났다. 차가 지나가자, 등을 돌린 시연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했다.‘장소미가 오늘 밤에 있다던 중요한 약속이 고유건과의 약속일 줄이야!’ ‘고유건은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말했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던 거야?’ ‘게다가 그의 여자 친구가 장소미인 거고?!’ ‘장소미한테 고유건 씨 같은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 지씨 일가는 꿈에서도 웃음이 나겠지?’‘그런데 어쩌지? 내가 먼저 알게 되었는걸.’ ‘이건 하늘이 내게 준 기회나 다름없어!’ 시연이 말없이 두 손을 꼭 쥐었다.‘왜 지씨 일가는 잘만 사는데, 나랑 우주는 진흙 속에서 발버둥 쳐야만 하는 거야?!’‘절대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거야!’ 가로등 아래, 시연의 그림자가 매우 길게 뻗어져 있었다. ...나무 식탁 위의 촛불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급 도자기 식기, 은으로 된 나이프와 포크는 어느 것 하나 정교하지 않았고,병풍 뒤에서는 악단이 잔잔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유건과 소미는 마주 앉아 있었는데, 유건이 먼저 소미에게 와인 한 잔을 따라 주었다.“상황이 좀 달라져서 곧바로 이혼할 생각이에요. 절차는 이틀 후에 진행할 것 같아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린 소미의 눈동자에서는 기쁨의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녀는 곧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흘리려 했다. 유건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왜 울어요?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 “아니요.”소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울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려고 애썼
시연은 진아의 집에 하루 종일 머무르다가 저녁에 시간을 확인하고서야 가방을 메고 외출했다. 오늘 밤, 그녀는 해야 할 아르바이트가 있었다. 18세가 된 이후, 장미리는 시연에게 일절 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시연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스스로를 책임져야만 했다. 비록 그녀는 고유건이 준 카드로 우주의 치료비를 지불했으나, 그 외의 비용은 지출할 생각도 없었고, 지출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연이 아르바이트하는 곳은 ‘BLUE’였다.‘BLUE’은 G시의 유명한 재벌 마사지 클럽으로서 재벌들의 사치스러운 유흥업소라고 할 수 있었다. 시연은 이곳에서 안마사와 침구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임상의학이 전공인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하여 특별히 한의학의 안마와 침구에 대한 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했고, 자격증까지 수료한 바 있었다. 하지만 실습의 자체가 바쁘기 때문에 임시직으로 아르바이트했으며, 손님의 수와 서비스 시간에 따라 임금을 계산하고 정해진 출퇴근 시간조차 없었다. 정규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입이었지만, 시연은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물론 호의적이지 않은 손님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시연은 늘 유연하게 대처했다. 시연은 출근할 때 찍어야 할 직원 카드를 스캔한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그 순간, 매니저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시연아, 손님 오셨다!” “네, 바로 갈게요!”그녀는 서둘러 안마와 침술에 필요한 도구를 가지고 나와 객실로 달려갔다. 한 명의 손님에게 서비스를 마친 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배웅했다. “손님, 안녕히 가세요. 오늘 밤에는 푹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복도의 다른 한쪽 끝,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유건은 주지한을 따라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그가 앞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한이 물었다.“형님, 왜 그러십니까?” “지한아, 봐봐, 저게 누구야?” 유건의 어조는 마치 ‘오늘 날씨가 참 좋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낯빛
시연은 짐 정리는 이미 끝나 있었다. 사실, 딱히 챙길 것도 많지 않았다.그녀는 캐리어 하나, 그리고 작은 캐리어 하나를 꺼내 놓고, 문 옆에 조용히 세워뒀다. 고개를 들자, 진아가 서운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진짜 가는 거야?” “응.” 시연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여기 살 순 없잖아. 언젠가는 떠나야지.”몇 달 뒤면 아이가 태어난다. 지동성이 준 그 작은 집은, 시연이 임시로 머물던 공간이었다.그리고 지동성이 건넨 그 카드에는, 우주의 유학 비용을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금액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는 출산 후, 시연이 아이를 돌보는 도우미를 쓰는 데 쓸 수 있을 터였다. ‘내가 조리원에서 나와 다시 일하게 되면, 어떻게든 살 수 있겠지.’‘그 사람이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건 인정해야 해.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날 도와준 거야.’ 진아도 그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말없이 입술을 내밀었다.“그냥... 네가 가는 게 싫어서 그래.”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 뭘.” 시연은 진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우리 집 넓어. 방도 많으니까 자주 놀러 와. 꼭이야.”“응...” 진아는 코끝을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멍청이.” 시연은 웃으며 그녀를 안았다. “그래서 너, 남자 친구는 언제 만들 거야?”“나?” 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 친구 같은 건 안 만들래. 난 그냥... 잘생긴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또 시치미 떼네.’ 시연은 장난스럽게 진아의 목덜미를 팔로 감싸고 속삭였다.“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여자가 먼저 고백할 수도 있는 거야. 여자가 먼저 다가가도 돼. ‘여자가 마음먹고 다가가면, 남자는 무너진다’는 말도 몰라?”진아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그, 그런 거 아냐! 그런 사람 진짜 없다고 했잖아!”‘과연 그럴까?’ 시연은 모른 척, 가볍게 웃었다.“
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마음은, 통째로 꼬여버린 듯 아팠다. ‘아파. 진짜... 미치게 아프네...’ 그래서 더 또렷해졌다. 이 아픔이 현실임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걸.그녀는 유건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냈다. “인제 그만 가요. 늦어서 나도 이만 자야 해요.” 말을 마치며 하품까지 했다. 꽤 피곤한 얼굴이었다.유건은 끝내 시연의 손을 놓았다. 얽히고설킨 마음을 억지로 끊어내는 듯, 조용히.“나도, 당신 자신도 좀 놓아줘요. 유건 씨, 마음이 둘인 거, 그것만큼 힘든 건 없어요.” 그 말만 남기고 시연은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닫히는 정문. 그 앞에 홀로 선 유건은, 주먹을 쥔 채 숨을 삼켰다.‘놓아달라고? 전엔 그랬지.’‘근데 지금은 안 돼. 못 놔. 절대 못 놔.’...다음 날 아침. 최예민은 첫 지하철을 타고 새벽같이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단정히 주차된 포르쉐 카이엔을 발견했다.‘설마... 어젯밤부터 있었던 거야?’차에 다가가지는 않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시연은 이미 세수도 끝낸 상태였다. 우주의 세수를 도와주며 옆에서 웃고 있었다.“사모님, 아침 사 왔어요. 드시고 가세요.” 최예민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네, 고마워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앉았다.우주가 거실로 나오자, 최예민이 서둘러 아이를 돌봤다.시연은 따뜻한 죽을 천천히 먹으며, 무심하게 묻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사모님, 아까 보니까 고 대표님이 벌써 도착해 계시던데요? 매번 이렇게 일찍 와서 데려가세요? 완전 스윗하시다...”‘뭐...?’숟가락을 멈춘 시연은 눈을 깜빡였다.‘그 사람... 어젯밤에 안 간 거야?’‘아님... 새벽부터 또 온 거야?’어느 쪽이든, 그녀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그래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아침을 다 먹고, 우주에게 인사하고 시연은 가방을 멨다. 하지만 정문으로는 나가지 않았다.‘그 사람... 아직 거기
‘손을 잡으라고?’시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요청이야?’ ‘또 왜 이러는 걸까?’‘진짜 미쳤나? 하지만 나까지 같이 미쳐줄 순 없지.’ “당신...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별일 없으면 나 들어가야 할 것...”말을 마치기도 전에, 유건이 성큼 다가와 시연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단숨에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어...!” 순간, 시연은 중심을 잃고 유건의 가슴팍에 안겨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남자의 두 손에 단단히 얽혀 있었다. 두 사람의 손이, 꼭 맞물렸다.“당신, 이 밤중에 왜 이러는데요?” 시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냐고?” 유건의 눈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남자의 타오르는 눈빛은, 오로지 그녀만을 향하고 있었다.유건은 시연의 손을 입술에 가져갔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내 아내야. 내 사람이라고. 나 말고, 누구도 당신을 건드릴 수 없어. 설마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미쳤어. 또 시작이네.’ “누가 날 건드렸다고 그래요? 정신 차려요, 고유건 씨.” 시연은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채 반박했다.‘또 그 망상이야? 또 내 사생활 의심하는 거야?’“정말 아니야?”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다시 생각해 봐. 힌트를 줄게. 오늘 있었던 일이야.” “뭐라고요...?” 시연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러다 문득, 머리가 번뜩였다.‘설마... 아버지?’‘맞네, 오늘 하루 종일 정기환이 나를 따라다녔었지.’ 시연의 경호원이자, 동시에 유건의 정보원이기도 한 정기환.“하하.” 시연은 비웃듯 웃었다.“계속 기환 씨를 시켜서 날 감시할 거면, 경호는 필요 없어요. 그냥 데리고 가요.”그녀는 몸을 빼려고 했지만, 유건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헛수고야. 도망친다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남자는 두 팔로 더욱 단단히 시연을 조였다.유건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시연이 향한 곳은 태산요양병원이었다. 즉, 우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시연이 도착했을 때, 최예민은 방을 정리 중이었다.“사모님, 오셨네요.” “네. 우주는요?” 최예민은 우주의 방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교수님과 심리상담 중이에요. 방해될지도 모르니 조금만 기다리시죠.” “알겠어요.” 최예민은 시연에게 물을 내오며 덧붙였다. “우주 상태가 정말 아주 좋아졌어요. 교수님이 확실히 전문가이긴 하시네요.” “정말 수고 많았어요.” “별말씀을요. 전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예요.”시연은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 밤엔 제가 여기 있을게요. 지금 퇴근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와주세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는 내가 보이면 나만 찾잖아요. 어차피 여기 계셔도 특별히 할 일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오랜만에 휴식 시간을 좀 가지세요. 멀리 가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그럼 감사합니다, 사모님.” “천천히 정리하고 가요.”최예민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시연은 가방을 내려두고, 미리 사 온 딸기를 씻기 시작했다. ‘오늘 딸기가 유난히 향긋하네.’ 가을 냄새가 짙게 내려앉은 저녁. 해가 완전히 져갈 무렵, 검은색 카이엔 한 대가 요양병원 앞에 조용히 멈췄다.차 문이 열리고, 긴 다리가 바닥을 디뎠다. 고유건이었다.“형님!” 기환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왔다. “지동성이랑 헤어진 후, 곧장 여기로 오셨어요. 계속 안에서 계십니다.”“그래.” 유건은 짧게 대답하고 곧장 안으로 향했다.하지만 요양병원 입구에서 보안팀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면회 시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지금은 아이들도 다 잠든 시간이거든요.” 유건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9시 50분이었다.‘강제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자는 우주를 깨우게 될지도 몰라. 놀라게 하면... 그건 안 되지.’그는 잠시 고민한 뒤,
“장난 그만 치시고, 여기까지 하자고요.” 시연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시연아!” 지동성은 다급히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마! 제발...!”아버지의 목소리엔 진짜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말도 다 꺼냈는데, 딸은 여전히 받지 않겠단다. 그 순간, 지동성은 절실하게 깨달았다. 딸이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그것도, 뼛속까지.‘이젠 애원으로도 안 되는 거구나...’지동성은 이를 악물며 쓴웃음을 흘렸다. “그냥 가버릴 거야? 그게 네 마음이야?”“무슨 뜻이에요?” 시연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아빠는 이제 오래 못 살아. 네가 이 집도, 돈도 안 가지겠다고 하면, 이 모든 건 결국 소미 엄미랑 소미의 몫이 될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그 말에, 시연의 눈빛이 단단히 흔들렸다.“너희 엄마 말이야.” 지동성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네 엄마... 내가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같이 고생한 사람이야. 지금 이 집, 이 돈, 반은 네 엄마 몫이야. 정말... 안 가져갈 거야?”시연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그래... 우리 엄마는 아버지가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함께했지. 겨우 자리 잡기 시작했을 땐 이미 병에 걸려...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떠나셨고.’‘그리고, 그 자리를 장미리가 차지했어... 떳떳하게 들어와, 우리 엄마의 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여자라고...’시연은 말이 없었지만, 지동성은 딸의 흔들리는 눈빛을 읽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손에 봉투를 쥐여주며 말했다. “가져. 원래 너랑 우주의 몫이야.”시연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멀리, 건물 모퉁이 한쪽. 기환은 그 장면을 모두 목격하고 있었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어서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지동성은 시연의 손을 잡았던 것을 봤다. 그것도, 두 눈으로 똑똑히.기환은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그리고 바로 유
‘고유건... 보기 드물게 화가 나 있었는데... 정말, 나 때문일까?’시연의 마음이 더욱더 복잡해졌다.“형수님.” 기환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흰 다 알아요. 형님이 진심으로 형수님 좋아하신다는 거요. 정말로 잘해주시잖아요.”“그래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부정하지 않았다.“나한테는 정말 잘해줘요. 근데... 나한테만 잘하는 건 아니잖아요. 장소미한테도 잘하니까요. 아니, 어쩌면... 더 잘하겠죠.” ...다음 날, 시연은 마침 휴무였다. 오랜만에 게으름을 부릴 수 있었고, 거의 정오가 다 돼서야 눈을 떴다. 진아는 출근하면서 식사를 챙겨놓고 갔다.시연이 늦은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지동성이었다.“무슨 일이세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시연아, 지금 어디야?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장소미 상태가 그 정도면 바쁠 만도 한데... 날 보러 나올 시간이 있나?’“어디서요?” [강울대 뒷길, 거기서 보자.]“좋아요.” 전화를 끊고도 시연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식사를 마친 뒤 옷을 챙겨 입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강울대 뒷골목. 그곳에 도착하자, 지동성은 이미 와 있었다.“시연아, 여기.” 그가 손을 흔들었다.시연은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요? 아버지도 바쁘실 텐데.”지동성은 잠시 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알고 있구나?”그는 얼굴빛이 조금 바뀌었다. “하긴, 소미가 다친 건 워낙 큰일이니까... 네가 모를 리 없지.”“설마 그 얘기 하려고 절 부른 건 아니겠죠?” 시연의 말투엔 은근한 짜증이 묻어났다. “용건은 뭐죠?” “알았어, 바로 말할게.” 지동성은 황급히 말을 돌리며, 옆에 두었던 갈색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다.“이게 뭐죠?”“전에 말했던 집문서야. 너랑 우주 명의로 된 집문서랑 열쇠, 그리고 네가 지난번에 안 가져간 카드도 같이 들어 있어.”
시연은 손에 들고 있던 ‘팸플릿’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해, 조한나의 상대 남자들... 얼굴은 꽤 괜찮았다.‘인성은 글러도, 눈은 제대로 달린 모양이네.’그렇게 감탄하고 있던 찰나, 시연의 눈앞이 훅 어두워졌다. 누군가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은은한 민트향의 향수 냄새. 누군지 안 봐도 알 것 같은 그 향기.유건은 시연의 손에서 팸플릿을 쓱 빼내고 나서야, 두 손을 풀었다. “이런 거 보지 마. 예쁜 눈 더럽히지 말란 뜻이야.”‘또 시작이네...’시연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만으로도 유건은 알 수 있었다. ‘나랑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거구나...’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만하지. 내가 잘못했으니까. 조금만 참자.’“오늘 저녁은 같이 못 먹겠어.” 유건은 말투를 낮춰 설명했다. “수액 맞고, 바로 옆 도시로 가야 해. 비즈니스 미팅이 있어.”“나한테 그런 말 안 해도 돼요.” 시연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일찍이 그런 반응을 예상한 유건은 예전만큼 동요하지 않았다.“아니, 해야 해. 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매일 당신한테 보고할 거야.”‘맘대로 하던가.’ 시연은 그저 대꾸하지 않았다. “할 말 다 했어요? 그럼 어서 수액 맞으러 가요.” ‘제발 빨리 좀 가라.’유건은 그녀의 표정에서 ‘귀찮음’ 세 글자를 읽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내일 오후, 늦어도 저녁엔 돌아올 거야.”“그래요...” 시연은 성의 없는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유건은 더 이상 붙잡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시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만큼은 안 봐도 되네. 다행이야.’그리고 몸을 돌리자마자, 기환과 딱 마주쳤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를 은근히 지켜주는 사람이었다.기환은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시연을 보자 화들짝 놀라 그 봉투를 얼른 등 뒤로 숨겼다. “형수님, 이제 퇴근하세요?”“그건
식사를 마치고, 유건은 약속대로 시연을 진아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기환은 이미 짐을 옮겨놓은 상태였다.“도착했어요. 난 이만 올라갈게요.” 시연은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손이 탁 잡혔다. 유건은 앞을 보며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 건물, 복도 등이 다 고장 나 있어. 당신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어떡해?”‘진짜 별걸 다 챙기네.’ ‘이럴 필요가 있을까? 지금 우리 같은 사이에?시연은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고유건도 시간이 지나면 알겠지. 내가 애교 부리는 것도, 밀당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다음 날, 시연은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오전에 정리해야 할 자료와 진료차트가 한가득, 오후엔 외래 진료까지 있었다.외래 진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병원 로비 쪽이 왁자지껄해졌다.시연은 마지막 환자를 진료하고 차트를 건네며 당부했다. “정해진 날짜에 꼭 다시 오세요.” “네, 선생님.”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시연은 궁금해져서 복도를 따라 걸었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아, 날카롭고 귀에 익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보지 마! 다들 그만 봐!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시연은 잠깐 멍해졌다가, 곧 머릿속에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곧이어 두 눈이 그 사실을 확인해 줬다. 조한나였다.로비 한쪽, 병원 홍보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의료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환자와 보호자였다.“비켜! 다들 꺼져! 가라고!!” “야, 사진 속 여자랑 똑같은데?” “진짜야? 가슴에 명찰 달고 있잖아.” “맞네, 조한나라고 적혀 있어!” “어머, 저 여의사, 진짜 뻔뻔하네.”“더러워, 손대지 마!” “아악!”조한나는 눈이 벌게진 채, 게시판에 붙은 사진을 찢고 사람들을 마구 밀쳤다. 그리고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소리 질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시연이
유건은 간신히 유지하던 표정을 더는 감추지 못 했다. “내가 보기엔, 네가 너무 모르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 관계엔 아무 영향도 없을 거야.” ‘영향이 없다고? 그럴 리가...’ “당신은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난 달라요.” 시연은 입술을 꾹 눌러 담았다.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란 건 인정해요. 나도 한때는 당신한테 마음이 있었고, 앞으로 쭉 함께할 수 있겠다는 환상도 품었으니까요.” “그럼 계속 그렇게 생각해.”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말하는 유건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 하지만 시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이젠 그만두기로 했어요.” “그럴 필요 없어...” 유건은 놀란 듯 여자의 손을 붙잡고,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럴 필요 없어, 여보. 난 정말로 장소미 씨를 보살펴주고 있을 뿐이야. 그 이상은 없어.” ‘그 이상은 없다고?’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하나만 물을게요. 대체 언제까지 장소미를 돌볼 생각이에요? 하루? 이틀?”유건은 말이 없었다. 소미의 상태를 생각하면, 금방 끝날 일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루아침에 회복시킬 수 있는 병은 아니었다.“오래 걸릴 거잖아요?” 시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내 입장에선 얼마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여보...” “그 여자를 보살피고 싶으면, 마음껏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내 남편이 다른 여자한테 그렇게까지 잘해주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유건 씨, 난 싫어요.”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남자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냈다. 허공에 남은 손끝을 바라보자, 유건은 가슴이 싸하게 저며왔다. “나한테... 아무런 미련도 없는 거야?” “있죠.” 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솔직하게 말했다. “당연히 아쉽고, 조금은 슬플 거예요. 하지만 인생엔 사랑만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을 잃는 건 안타깝지만... 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