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이 이렇게까지 많은 걸 해줬는데, 시연은 자신이 적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아...”시연은 깊이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자신을 나무랐다.‘너무 쉽게 마음이 흔들려...’‘다짐했잖아. 더 이상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결국, 그녀는 선물을 주지 않기로 했다.그리고 상자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유건이 돌아왔을 때, 욕실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시연이 샤워 중이라는 걸 알기에 방해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은 후, 소파에 앉았다.그때,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상자가 눈에 띄었다.“이건 뭐지?”그는 무심코 그것을 집어 들었다.손바닥 크기의 작은 상자였다. 시계 상자처럼 보였다.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열어보았다.그런데 시계가 아니었다.황동으로 만들어진 반듯한 네모의 그 물건은, 라이터였다.손안의 정교한 그 물건은 표면이 매끄럽게 연마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작은 영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To H.]그는 무심코 속삭였다.“To H?”그 순간, 유건의 눈이 흔들렸다.‘H?’‘‘husband’? 나잖아?!’‘나한테 주는 선물인가?’‘하긴, 이 방에서 나한테 이런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유건은 바로 떠올렸다.시연이 직접 자신의 생일 선물을 준비했다던 기환의 말을. ‘설마... 이건가?’유건은 손아귀에 서서히 힘을 주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때, 욕실 안에 샤워기 소리가 멈췄다.시연이 욕실에서 나왔고, 곧바로 유건의 시선을 마주했다.그리고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 순간, 당황스러움에 시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녀는 급히 달려갔다.“유건 씨...!”“응?”유건은 웃으며 대답했고,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괜히 애쓰지 마. 당신, 나보다 키 작은 거 알잖아. 뺏을 수 있겠어?”시연도 그걸 알고 있었다.‘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건가...’그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
“네.”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딱히 움직임은 없어요. 아마, 자기들 살기 바쁠 거예요.” 고상훈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때마침 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수술 날짜 정해졌어요. 이번 주 금요일인데, 그날은 할아버지 한 분만 수술이 잡혀 있어서 양석현 교수님께서 직접 집도하실 거예요. 물론 저도 양 교수님 곁에서 그분을 도와드릴 거고요. 할아버지, 제가 같이 있어 드릴게요.” “그래, 잘 됐구나.” 고상훈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착한 손자며느리가 옆에 있는데, 내가 뭐가 무섭겠냐.” 수술 이야기를 마친 뒤, 유건은 먼저 병원을 나서 회사로 향했다. 시연은 고상훈 곁에 조금 더 머물다가 병실을 나섰다. 그런데 복도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심재규였다. 그는 유건이 우주를 위해 따로 모셔 온 정신과 교수였다. “심 교수님?” “사모님.” 심재규 역시 시연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시간이라면, 그는 분명 태산요양병원에 있어야 할 터였다. 그래서 심재규도 급히 해명했다. “오늘 진행해야 할 우주 군의 치료 일정은 모두 끝났습니다. 요양병원을 떠나기 전에 최예민 선생님께 인수인계도 다 해뒀고요.” “혹시라도 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급한 볼일이 생기는 바람에... 바로 처리하고 돌아갈 겁니다.” 시연은 손을 내저었다. “교수님, 긴장하지 마세요. 따지러 온 건 아니니까요.” 그 말투와 표정이 진심처럼 느껴져, 심재규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제 환자 중 한 분이 지난번에 다쳤는데, 이후로 통 진료를 받으러 못 오셔서요. 시간 날 때 한번 보려고 들렀습니다.” “환자 보러 오신 거였군요?” 같은 의료인으로서, 시연은 그런 의사들을 가장 존경했다. ‘역시 심 교수님은 진짜 의사야.’ “교수님처럼 진심으로 환자를 생각하시는 분께 뭐라 할 이유는 없죠.” “사모님, 과
심재규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것들, 시연은 스스로 다 알 수 있었다. “그건...” 기환이 아직도 망설이자, 시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같이 가요. 제 말이 거짓말이라면... 당장 절 묶어서 끌고 가세요.” 그러곤 간절히 덧붙였다. “부탁이에요, 기환 씨, 은범이는... 제 친구예요. 지금 많이 아픈 것 같아요. 아주 심하게.” “그럼, 알겠습니다.” 시연의 간절함에 결국 기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혹시라도 시연이 은범을 직접 만나게 될까 봐, 기환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뒤따르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시연은 익숙하게 응급 외과로 향했고, 은범의 진료차트를 어렵지 않게 열람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트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병력, 과거력란에서 시선이 멈췄다.‘우울증 병력, 3년?’‘왼쪽 손목 자해 흉터... 영구적 손상?’그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뻐근했다. 옆에 있던 당직 간호사가 말을 걸었다. “지 선생님, 지인분이세요?” “네.” 시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드릴게요. 많이 도와주세요.” “물론이죠.”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히 외상은 크지 않아요. 아직 젊으니까 회복도 빠르고요. 근데...” 간호사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우울증이 꽤 심해요. 밤새 잠도 못 자고, 반복 행동도 있고... 오늘 정신과 교수님도 다녀가셨어요. 좀 나아진 것 같긴 한데...” 그 뒤로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연의 머릿속은 엉망이 되었다가, 이내 텅 비어버렸다. “부탁드릴게요.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지 선생님.” 진료차트를 돌려주고, 시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병실을 빠르게 벗어났고, 끝내 은범과 만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기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시연은 점점 걸음을 재촉했고, 이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시연이? 우리 시연이, 너무 오랜만에
기환은 시연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보고 급히 손을 뻗었다. “형수님, 괜찮으세요?”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근데... 내가 한때 사랑했고,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그 사람이...’‘그 사람이 병들었어. 그것도, 너무 많이...’기환은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시연을 본가까지 바래다주었다. 왕성애와 이호민에게 그녀를 맡긴 뒤, 유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형님, 형수님이 노은범 사장님을 만난 건 아니지만, 진료차트를 보고 오셨습니다.” [알겠어.]전화를 끊은 유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노은범이... 우울증이라니...’ 그날 밤. 유건이 본가로 돌아왔을 때, 시연은 이미 잠든 상태였다. 그는 조용히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가가 살짝 부어 있었는데, 많이 운 모양이었다. ‘내 아내가... 다른 남자를 위해 울다니.’ “됐어.” 유건은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만 봐준다. 딱, 이번 한 번만.” ...그 시각, 장소미는 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건, 장미리의 날카로운 고함이었다. “말 좀 해봐요! 당신, 벙어리라도 된 거예요?” 며칠 전 퇴원한 지동성은 간 이식 대기 중이라, 당분간은 외래 치료로 버티고 있었다. “뭘 자꾸 설명하라는 거야?!” 지동성은 피곤한 얼굴로 짜증을 냈다. “분명히 말했잖아.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하? 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 장미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비웃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당신, 사람을 기만하는 재주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네요!” 그때, 소미가 들어왔다. “엄마, 아빠, 또 왜 그러세요?” 부부싸움이 일상이 된 이 집안에서, 소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소미야!” 장미리는 다급히 딸을 붙잡고, 손가락으로 지동성을 가리켰다. “너 잘 왔다. 엄마 좀 도와줘. 너희 아빠...
소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이 집구석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네...’ 그녀의 시선이 장미리가 들고 온 박스들로 향했다. 전부... 아기용품이었다. 놀란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설마, 진짜예요?” ‘설마 진짜 밖에 여자가 있어서... 애까지?’ 이쯤 되면 장미리의 의심이 헛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정말 너무 수상했다. “소미야...!” 장미리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 으흐흑...” 지동성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며, 한결같이 말했다. “그런 일 없었다니까.” “그럼 이건 다 뭐예요?” 소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가 거짓말하는 건 같진 않아. 그럼 이 많은 아기용품은 대체 왜?” “선물하려고 산 거야.” 결국 지동성이 입을 열었다. “하! 웃기고 있네요!” 장미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 우리 집 사람들 경조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챙기는 사람이에요” “요즘 주변에 임신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믿든 말든 당신 마음이지.” 지동성은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미야, 너도 들었지?” 장미리는 억울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울먹였다. 소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빠의 행동... 확실히 요즘 너무 이상해.’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아빠, 엄마가 이미 다 알아버렸잖아요.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건 어때요? 계속 숨기다간... 더 골치 아파질 거예요.” “소미야?” 장미리는 놀라 소리쳤다. “너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소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아빠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지동성은 입을 뗄 듯 말 듯 망설였다.그 모습에, 소미의 뇌리를 번뜩 스치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설마... 최근 들어 아빠가 보여준 수상한 움직임... 전부 지시연 때문인가?’ “아빠... 이거
그 한마디가 소미의 뇌리에 박혔다.‘그래...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난 아직 포기할 수 없어.’‘그리고... 내 손에는 아직 남은 패도 있으니까.’ 그 순간, 눈물이 뚝 그쳤다. “늦었네, 이만 올라가서 쉬자.” “네...” 모녀는 서로의 팔짱을 끼고 계단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발밑을 가득 메운 아기용품들에 막혀 걸음을 멈췄다. “쳇!” 장미리는 갑자기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박스를 몇 번이나 세게 차도 성에 안 찼다. “네 아빠, 병에 걸리더니 이젠 정신까지 나갔나 봐. 죽기 전에 후회한들 뭐가 달라지니?” “엄마.” 소미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조용히 말했다. “아빠, 병 걸리고 나서 좀 달라졌잖아요. 너무 방심하지 마세요.” “왜?” 장미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몸 가지고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서 그래?” “그게 아니라...” 소미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지시연이랑 지우주 쪽이 걱정돼요.” 장미리는 단번에 그 의미를 알아챘고,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너 지금... 그 둘한테 돈 줄까 봐 걱정하는 거야?” “네.” 소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마, 이 집안의 돈은 엄마가 잘 관리해야 해요. 아빠가 몰래 두 사람한테 뭔가 주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요.” “네 아빠 감히...?” 장미리는 눈을 부라리며 이를 악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이 집을 십수 년 동안 지킨 사람이야. 내가 그런 허튼 꼴 당할까 봐?” “아니면 다행이고요.” 금요일.오늘은 고상훈의 수술 날이었다. 아침 일찍, 유건과 시연은 병원에 도착했고, 모든 수술 전 준비는 이미 마무리된 상태였다. 고상훈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채 병상에 앉아 있었고, 유건은 곁에서 말벗이 되어주고 있었다. 시연은 수술 준비 때문에 밖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유건이 고상훈의 손을 꼭 잡았다. 오히려 고상훈보다 손자의 얼
시연은 유건을 조심스럽게 놓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봐요.” “응.” 그녀는 뒤돌아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문이 서서히 닫히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밖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유건은 처음으로, 시간이 이렇게까지 더디게 흐르는 걸 느꼈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 곧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지한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형님, 수술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잠깐 뭐라도 드시죠.” 하지만 유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안 먹을래.” 진심이었다. 그는 무언가 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고도의 긴장 상태에서는 배고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유건은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눈썹을 깊게 찌푸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시연이가 분명... 이번 수술은 양석현 교수가 직접 지도하는 거고, 큰 수술이 아니라고 했었는데...’‘잘만 되면 정오쯤이면 끝날 거라고... 그런데 지금이 몇 시지?’ 벌써 12시를 넘겼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유건의 가슴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불안하게 걸음을 옮겼다. 지한과 다른 이들도 그 모습을 지켜봤지만,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결국 한 시간 반이 지나, 오후 두 시가 가까워질 무렵 수술실 문이 열렸다. “할아버지!” 유건은 누구보다 먼저 뛰어갔다. 지한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간호사가 밀고 나온 수술대 위, 고상훈은 조용히 누워 있었고, 팔에는 아직 링거가 꽂혀 있었다. 곧이어 양석현 교수가 마스크를 벗고 나왔다. 그는 유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 대표님.” “교수님...” “수술은 아주 잘 됐습니다.” 양석현은 침착하게 말했다. “다만 어르신의 회복력이 떨어질 수 있어서 48시간 정도는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큰 문제가 없다면, 그 후엔
탈의실 한가운데엔, 의료진이 환복할 때 앉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시연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의식을 잃은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유건은 물론, 함께 들어온 간호사도 깜짝 놀랐다. “지 선생님, 왜 이러시죠?” “여보!” 유건은 단숨에 뛰어 들어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간호사님, 당장 의사 좀 불러주세요! 제 아내는... 임신 중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간호사가 급히 뛰쳐나가려던 찰나, 유건의 품에 안긴 시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으...음...” 유건은 얼떨떨했다. ‘여보...?’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눈빛으로 유건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탈의실이었다. “여긴...? 당신, 어떻게 들어왔어요?” ‘설마 이젠 수술실까지 침입하는 건가? 이 사람...?’“정신 좀 들어?” 유건은 대답 대신 그녀를 꼭 안은 채 그대로 걸어 나가려 했다. “어디 불편해? 쓰러질 때 부딪힌 데는 없어?” “어...어어?” 시연은 놀라 입을 벌렸다. “쓰러졌다고요?” 그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아... 이건 완전한 착각이잖아.’“내려줘요.” 시연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난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쓰러졌잖아.” “아니, 쓰러진 게 아니라...” 결국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어요.” 이번 수술을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중간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긴 했지만, 시연은 끝까지 버텼고, 체력이 바닥나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으려다 잠시 벤치에 앉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던 거였다. “진짜예요. 그냥 잠들었어요.” “잠든 거라고?” 유건은 여전히 믿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 당신 생각만큼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요. 수술 끝났다고 바로 기절하는 스타일 아니라고요.” 옆에
시연은 온몸이 찌릿하게 굳었고,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로얄호텔... 그날 밤... 그 남자...’ 애써 잊으려 했지만, 그건 분명 시연의 가슴 깊숙이 박힌 가시였다.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찔림. 그런데 소미가 지금 그걸 언급했다. ‘무슨 뜻이지? 설마... 뭔가 알아낸 거야?’ 시연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고, 소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너, 뭘 안다는 거야?” 시연은 숨을 참으며 다그쳤다. “그날... 그 남자, 누구야?” [진정해.] 소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 지금 강울대 뒷골목에 있어. 우리 잠깐 만나자. 내가 아는 걸 다 말해줄게.] “좋아.” 시연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근무 중 자리를 비우는 그녀를, 기환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소미가 보낸 주소를 따라, 시연은 강울대 후문 쪽에 있는 한 중식당으로 갔다. 물론, 식사하러 가는 건 아니었다. 그 식당엔 단독 룸이 있었고, 대화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먼저 도착한 시연은, 소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환은 무슨 일인지 몰라 식당 입구에서 대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미가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장소미 씨?” 기환은 의아해졌다. ‘설마 형수님이 만날 사람이 장소미 씨였어?’ “기환 씨.” 소미는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여기, 밀크티예요. 아까 주차하러 가는 길에 사 왔어요.” “아...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장소미 씨 드시죠.” “괜히 사 온 거 아니에요. 시연이도 있으니, 정기환 씨도 있을 것 같아서 석 잔 산 거예요. 안 드시면 그냥 버릴 수밖에 없는데요?” “그럼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기환은 어쩔 수 없이 받아서 들었다. “천만에요.” 소미는 환하게 웃은 후, 나머지 두 잔을 들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기환은 밀크티를 들고 복잡한 표정으로 생
“들어가시죠.” “응.”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밀어 열었다. 방 안엔 이미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말라보였지만, 한 명은 비대한 체격. 여자가 들어서자, 두 사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 마른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금은, 가져왔지?” 여긴 이태길, G시에서 알아주는 암시장이자,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될 모든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이곳의 규칙은 단 하나. 오직 현금을 이용하는 것.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 “응.” 그녀는 미리 준비해 온 여행용 가방을 들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마른 남자가 옆의 뚱뚱한 남자를 흘끔 보더니, 둘이 함께 다가와 가방을 열었다. 현금다발을 일일이 확인한 뒤, 이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시킨 일, 내용은 다 이해했어.” “좋아.” 여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끝나는 대로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때 잔금을 줄게.” “거래 성사.” 이 말을 마친 여자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모자챙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놀란 여자가 허둥지둥 줍기 전에, 마른 남자가 손을 뻗어 먼저 집어 들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내밀었다. “여기.”여자는 얼른 모자를 받아서 들었지만,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시선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뭘 그렇게 봐?” “아, 그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서. 우리... 예전에 본 적 있나?” “아니거든.” 여자는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뱉고, 단숨에 자리를 떠났다. ‘기분 나빠...’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를 벗어나 골목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고 거칠게 숨을 몰아쉰 그녀는 전혀 생각지 못한 듯했다. ‘설마 했는데... 이 암시장에서 잡은 놈들이 그 둘일 줄은 몰랐네.’ ‘하마터면... 들킬
탈의실 한가운데엔, 의료진이 환복할 때 앉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시연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의식을 잃은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유건은 물론, 함께 들어온 간호사도 깜짝 놀랐다. “지 선생님, 왜 이러시죠?” “여보!” 유건은 단숨에 뛰어 들어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간호사님, 당장 의사 좀 불러주세요! 제 아내는... 임신 중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간호사가 급히 뛰쳐나가려던 찰나, 유건의 품에 안긴 시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으...음...” 유건은 얼떨떨했다. ‘여보...?’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눈빛으로 유건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탈의실이었다. “여긴...? 당신, 어떻게 들어왔어요?” ‘설마 이젠 수술실까지 침입하는 건가? 이 사람...?’“정신 좀 들어?” 유건은 대답 대신 그녀를 꼭 안은 채 그대로 걸어 나가려 했다. “어디 불편해? 쓰러질 때 부딪힌 데는 없어?” “어...어어?” 시연은 놀라 입을 벌렸다. “쓰러졌다고요?” 그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아... 이건 완전한 착각이잖아.’“내려줘요.” 시연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난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쓰러졌잖아.” “아니, 쓰러진 게 아니라...” 결국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어요.” 이번 수술을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중간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긴 했지만, 시연은 끝까지 버텼고, 체력이 바닥나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으려다 잠시 벤치에 앉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던 거였다. “진짜예요. 그냥 잠들었어요.” “잠든 거라고?” 유건은 여전히 믿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 당신 생각만큼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요. 수술 끝났다고 바로 기절하는 스타일 아니라고요.” 옆에
시연은 유건을 조심스럽게 놓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봐요.” “응.” 그녀는 뒤돌아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문이 서서히 닫히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밖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유건은 처음으로, 시간이 이렇게까지 더디게 흐르는 걸 느꼈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 곧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지한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형님, 수술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잠깐 뭐라도 드시죠.” 하지만 유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안 먹을래.” 진심이었다. 그는 무언가 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고도의 긴장 상태에서는 배고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유건은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눈썹을 깊게 찌푸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시연이가 분명... 이번 수술은 양석현 교수가 직접 지도하는 거고, 큰 수술이 아니라고 했었는데...’‘잘만 되면 정오쯤이면 끝날 거라고... 그런데 지금이 몇 시지?’ 벌써 12시를 넘겼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유건의 가슴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불안하게 걸음을 옮겼다. 지한과 다른 이들도 그 모습을 지켜봤지만,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결국 한 시간 반이 지나, 오후 두 시가 가까워질 무렵 수술실 문이 열렸다. “할아버지!” 유건은 누구보다 먼저 뛰어갔다. 지한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간호사가 밀고 나온 수술대 위, 고상훈은 조용히 누워 있었고, 팔에는 아직 링거가 꽂혀 있었다. 곧이어 양석현 교수가 마스크를 벗고 나왔다. 그는 유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 대표님.” “교수님...” “수술은 아주 잘 됐습니다.” 양석현은 침착하게 말했다. “다만 어르신의 회복력이 떨어질 수 있어서 48시간 정도는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큰 문제가 없다면, 그 후엔
그 한마디가 소미의 뇌리에 박혔다.‘그래...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난 아직 포기할 수 없어.’‘그리고... 내 손에는 아직 남은 패도 있으니까.’ 그 순간, 눈물이 뚝 그쳤다. “늦었네, 이만 올라가서 쉬자.” “네...” 모녀는 서로의 팔짱을 끼고 계단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발밑을 가득 메운 아기용품들에 막혀 걸음을 멈췄다. “쳇!” 장미리는 갑자기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박스를 몇 번이나 세게 차도 성에 안 찼다. “네 아빠, 병에 걸리더니 이젠 정신까지 나갔나 봐. 죽기 전에 후회한들 뭐가 달라지니?” “엄마.” 소미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조용히 말했다. “아빠, 병 걸리고 나서 좀 달라졌잖아요. 너무 방심하지 마세요.” “왜?” 장미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몸 가지고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서 그래?” “그게 아니라...” 소미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지시연이랑 지우주 쪽이 걱정돼요.” 장미리는 단번에 그 의미를 알아챘고,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너 지금... 그 둘한테 돈 줄까 봐 걱정하는 거야?” “네.” 소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마, 이 집안의 돈은 엄마가 잘 관리해야 해요. 아빠가 몰래 두 사람한테 뭔가 주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요.” “네 아빠 감히...?” 장미리는 눈을 부라리며 이를 악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이 집을 십수 년 동안 지킨 사람이야. 내가 그런 허튼 꼴 당할까 봐?” “아니면 다행이고요.” 금요일.오늘은 고상훈의 수술 날이었다. 아침 일찍, 유건과 시연은 병원에 도착했고, 모든 수술 전 준비는 이미 마무리된 상태였다. 고상훈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채 병상에 앉아 있었고, 유건은 곁에서 말벗이 되어주고 있었다. 시연은 수술 준비 때문에 밖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유건이 고상훈의 손을 꼭 잡았다. 오히려 고상훈보다 손자의 얼
소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이 집구석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네...’ 그녀의 시선이 장미리가 들고 온 박스들로 향했다. 전부... 아기용품이었다. 놀란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설마, 진짜예요?” ‘설마 진짜 밖에 여자가 있어서... 애까지?’ 이쯤 되면 장미리의 의심이 헛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정말 너무 수상했다. “소미야...!” 장미리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 으흐흑...” 지동성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며, 한결같이 말했다. “그런 일 없었다니까.” “그럼 이건 다 뭐예요?” 소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가 거짓말하는 건 같진 않아. 그럼 이 많은 아기용품은 대체 왜?” “선물하려고 산 거야.” 결국 지동성이 입을 열었다. “하! 웃기고 있네요!” 장미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 우리 집 사람들 경조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챙기는 사람이에요” “요즘 주변에 임신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믿든 말든 당신 마음이지.” 지동성은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미야, 너도 들었지?” 장미리는 억울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울먹였다. 소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빠의 행동... 확실히 요즘 너무 이상해.’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아빠, 엄마가 이미 다 알아버렸잖아요.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건 어때요? 계속 숨기다간... 더 골치 아파질 거예요.” “소미야?” 장미리는 놀라 소리쳤다. “너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소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아빠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지동성은 입을 뗄 듯 말 듯 망설였다.그 모습에, 소미의 뇌리를 번뜩 스치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설마... 최근 들어 아빠가 보여준 수상한 움직임... 전부 지시연 때문인가?’ “아빠... 이거
기환은 시연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보고 급히 손을 뻗었다. “형수님, 괜찮으세요?”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근데... 내가 한때 사랑했고,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그 사람이...’‘그 사람이 병들었어. 그것도, 너무 많이...’기환은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시연을 본가까지 바래다주었다. 왕성애와 이호민에게 그녀를 맡긴 뒤, 유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형님, 형수님이 노은범 사장님을 만난 건 아니지만, 진료차트를 보고 오셨습니다.” [알겠어.]전화를 끊은 유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노은범이... 우울증이라니...’ 그날 밤. 유건이 본가로 돌아왔을 때, 시연은 이미 잠든 상태였다. 그는 조용히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가가 살짝 부어 있었는데, 많이 운 모양이었다. ‘내 아내가... 다른 남자를 위해 울다니.’ “됐어.” 유건은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만 봐준다. 딱, 이번 한 번만.” ...그 시각, 장소미는 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건, 장미리의 날카로운 고함이었다. “말 좀 해봐요! 당신, 벙어리라도 된 거예요?” 며칠 전 퇴원한 지동성은 간 이식 대기 중이라, 당분간은 외래 치료로 버티고 있었다. “뭘 자꾸 설명하라는 거야?!” 지동성은 피곤한 얼굴로 짜증을 냈다. “분명히 말했잖아.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하? 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 장미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비웃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당신, 사람을 기만하는 재주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네요!” 그때, 소미가 들어왔다. “엄마, 아빠, 또 왜 그러세요?” 부부싸움이 일상이 된 이 집안에서, 소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소미야!” 장미리는 다급히 딸을 붙잡고, 손가락으로 지동성을 가리켰다. “너 잘 왔다. 엄마 좀 도와줘. 너희 아빠...
심재규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것들, 시연은 스스로 다 알 수 있었다. “그건...” 기환이 아직도 망설이자, 시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같이 가요. 제 말이 거짓말이라면... 당장 절 묶어서 끌고 가세요.” 그러곤 간절히 덧붙였다. “부탁이에요, 기환 씨, 은범이는... 제 친구예요. 지금 많이 아픈 것 같아요. 아주 심하게.” “그럼, 알겠습니다.” 시연의 간절함에 결국 기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혹시라도 시연이 은범을 직접 만나게 될까 봐, 기환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뒤따르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시연은 익숙하게 응급 외과로 향했고, 은범의 진료차트를 어렵지 않게 열람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트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병력, 과거력란에서 시선이 멈췄다.‘우울증 병력, 3년?’‘왼쪽 손목 자해 흉터... 영구적 손상?’그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뻐근했다. 옆에 있던 당직 간호사가 말을 걸었다. “지 선생님, 지인분이세요?” “네.” 시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드릴게요. 많이 도와주세요.” “물론이죠.”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히 외상은 크지 않아요. 아직 젊으니까 회복도 빠르고요. 근데...” 간호사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우울증이 꽤 심해요. 밤새 잠도 못 자고, 반복 행동도 있고... 오늘 정신과 교수님도 다녀가셨어요. 좀 나아진 것 같긴 한데...” 그 뒤로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연의 머릿속은 엉망이 되었다가, 이내 텅 비어버렸다. “부탁드릴게요.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지 선생님.” 진료차트를 돌려주고, 시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병실을 빠르게 벗어났고, 끝내 은범과 만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기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시연은 점점 걸음을 재촉했고, 이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시연이? 우리 시연이, 너무 오랜만에
“네.”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딱히 움직임은 없어요. 아마, 자기들 살기 바쁠 거예요.” 고상훈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때마침 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수술 날짜 정해졌어요. 이번 주 금요일인데, 그날은 할아버지 한 분만 수술이 잡혀 있어서 양석현 교수님께서 직접 집도하실 거예요. 물론 저도 양 교수님 곁에서 그분을 도와드릴 거고요. 할아버지, 제가 같이 있어 드릴게요.” “그래, 잘 됐구나.” 고상훈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착한 손자며느리가 옆에 있는데, 내가 뭐가 무섭겠냐.” 수술 이야기를 마친 뒤, 유건은 먼저 병원을 나서 회사로 향했다. 시연은 고상훈 곁에 조금 더 머물다가 병실을 나섰다. 그런데 복도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심재규였다. 그는 유건이 우주를 위해 따로 모셔 온 정신과 교수였다. “심 교수님?” “사모님.” 심재규 역시 시연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시간이라면, 그는 분명 태산요양병원에 있어야 할 터였다. 그래서 심재규도 급히 해명했다. “오늘 진행해야 할 우주 군의 치료 일정은 모두 끝났습니다. 요양병원을 떠나기 전에 최예민 선생님께 인수인계도 다 해뒀고요.” “혹시라도 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급한 볼일이 생기는 바람에... 바로 처리하고 돌아갈 겁니다.” 시연은 손을 내저었다. “교수님, 긴장하지 마세요. 따지러 온 건 아니니까요.” 그 말투와 표정이 진심처럼 느껴져, 심재규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제 환자 중 한 분이 지난번에 다쳤는데, 이후로 통 진료를 받으러 못 오셔서요. 시간 날 때 한번 보려고 들렀습니다.” “환자 보러 오신 거였군요?” 같은 의료인으로서, 시연은 그런 의사들을 가장 존경했다. ‘역시 심 교수님은 진짜 의사야.’ “교수님처럼 진심으로 환자를 생각하시는 분께 뭐라 할 이유는 없죠.” “사모님,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