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시연은 손을 흔들며 한참을 웃다가 간신히 멈췄다.그리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바라보았다. “가끔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혹시 그 여자애가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뭐?”유건은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이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럴 일 없어. 돌아오지 않아.”“그건 모르는 일이잖아요.”시연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남자의 가슴을 툭 눌렀다.“우리 유건 씨가 몇 살이죠? 스물여섯? 스물일곱? 그렇다면, 그 ‘나비 아가씨’는 더 어리겠네요? 인생은 긴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어요?”유건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조금 전까지는 웃고 있었으면서...”시연은 또다시 태연하게 남자의 가슴 위에 손가락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나비 아가씨’가 돌아오면 우리 유건 씨는 얼마나 곤란할까요?”시연은 지금도 장소미와 자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유건의 모습을 보자 하니, 미래의 혼란이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더 이상했다. “난 ‘나비 아가씨’를 본 적도 없지만, 그냥 느낌이 그래요. 나랑 장소미를 합쳐도 ‘나비 아가씨’만큼은 아닐 것 같아요. 당신이 고민하는 건 누구를 선택할지가 아니라, 우리를 어떻게 처리할 지겠죠? 안 그래요?”“그만 웃어.”유건은 시연의 손을 단단히 잡아 멈춰 세웠다. “하나도 안 웃겨.”남자의 갑작스러운 진지함에 시연은 순간 움찔하며 손을 빼냈다.“그냥 한 말이에요. 장난인데, 왜 그렇게 정색해요?”시연이 손을 빼자, 유건은 대신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런 농담, 난 싫어. 앞으로는 하지 마.”그는 이런 말이 정말 싫었다. 왜냐하면 시연이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여자와 엮으려는 게 너무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지시연에게 나는 정말 아무 상관 없는 존재일까...?’시연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알았어요.”‘이 사람, 왜 이렇게 오버하는 거야?'그런데 잠시 후, 시연은 갑자기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유건의 눈빛이
“시연아?”“정말 끈질기네요.”시연은 지동성의 약한 태도를 무시하고 단호하게 말했다.“강압적으로 해도 안 되니까 이젠 감성팔이를 하려고요? 아버지가 이렇게 하면, 제가 마음이 약해져서 간을 내줄 거라고 생각하세요?”“아니야, 그런 의도가 아니라...”“그만 좀 하세요!!”시연은 벌떡 일어났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소리를 크게 지르진 않았지만, 시연의 눈은 분노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리고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목소리를 낮췄다.“아버지의 말, 단 한 마디도 믿을 수 없어요. 내가 간을 줄 것 같으세요? 꿈 깨세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시연의 손이 배 위로 갔다.원래 배가 크지 않았고,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있어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녀가 살짝 원피스를 펴자 약간 볼록한 배가 드러났다.지동성은 경악했다.“이, 이게... 시연아, 너...”“흥.”시연은 냉소를 지었다. “보셨어요? 이제 좀 이해가 되세요? 그래요, 저 임신했어요. 그러니까 간 기증? 절대 불가능해요. 제가 미쳤다고 한들, 어떤 정신 나간 의사가 그 수술을 하려고 하겠어요?”그녀는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우주요? 손댈 생각도 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그 애한테 손끝이라도 댄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니까요!!”우주는 시연에게 단순한 동생이 아니었다. 직접 키운 자식과도 같았다.“아, 아냐. 그런 일 없을 거야...”지동성은 당황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의 말에 놀란 건지, 아니면 딸이 임신했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은 건지 알 수 없었다.그는 계속해서 침을 삼키며, 시연의 배를 바라보았다.“아이는... 고유건의...?”시연은 눈을 굴리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걸 아버지가 왜 궁금해하시죠?”딸의 반응에 지동성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몇 개월 됐어? 언제 가진 거야? 혹시...”“그만 좀 하세요!!”시연은 짜증이 폭발할 것 같았다.“아버지한테 그걸 대답할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그걸 따질 자격이나 돼요?”“알
“형님, 지동성 사장님께서 형수님을 찾아오셨어요... 그런데요, 형수님이 울고 계세요. 저한테도 화를 내셨고요...”유건은 조용히 끝까지 들었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알겠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네, 형님.”전화를 끊자마자, 유건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자칫하면 핸드폰이 부러질 뻔했다.‘지, 동, 성... 간 이식이 필요하다며?’ ‘병세가 심각해서 죽기 일보 직전이라더니, 시연이를 찾아갔다고?’ ‘난 불안해서 시연이의 과거를 캐는 게 아니야.’‘우리는 결혼한 사이라고. 그런 인간과의 일은 이미 끝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나저나, 시연이가 울었다고?’ ‘아직도 그 인간을 신경 쓰는 건가?’‘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눈물을 흘릴 만큼 가치 있는 관계였나?’머릿속이 복잡해진 유건은 일찍 퇴근해 강울대병원으로 시연을 데리러 갔다.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시연이 급히 내려왔다. 유건은 시연을 유심히 바라봤는데, 여자의 눈이 약간 부어 있었다. 시연은 확실히 울었다. 그것도 꽤 심하게. 유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여자의 손을 잡았다. “오늘 바빴어?” “그럭저럭이요.” 시연은 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 일을 얘기해봤자, 유건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 유건은 무심한 듯 물었다. “오늘은 누구를 만났어?” 이 질문은 너무 티가 났기에, 시연은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환 씨가 말해줬나 보네.’ “기환 씨가 말했줬어요?” “응.” 유건은 숨기지 않았고, 시연의 손을 천천히 주무르면서 말했다. “그 인간 만나서 무슨 얘기 했는데?” 그리고 한 손으로 시연의 긴 머리를 쓸어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기환 말로는 당신이 울었다던데, 그 인간 때문이야?” 시연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얘기를 꼭 해야 해요?” 순간, 유건의 얼
서재.유건은 심란한 마음에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려다가 그대로 멈췄다. ‘시연이는 임신 중이잖아. 담배 냄새를 맡기 싫어서...’‘나한테 집 안에서는 담배 피우지 말라고 했었는데...’ ‘정 피우고 싶으면 베란다나 마당에 나가서 피우라고 했어.’ 이렇게 생각한 유건은 괜히 더 답답해져서, 손에 든 담배를 대충 던져버렸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주지한이었다. “무슨 일이야?” [형님.]지한의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었다. [이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쯧.” 유건은 이미 짜증이 쌓인 상태였고, 질질 끄는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안 할 것 같으면 전화는 왜 했어?” [네, 형님.] 지한은 더 이상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만,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형님, 그 ‘머리핀’ 기억하세요?] ‘머리핀?’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에 쥔 라이터를 굴렸다. “설마... 나비 머리핀?” [네, 형님.] 그때, 유건은 경매에서 낙찰받아 ‘나비 공주’에게 ‘나비 머리핀’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나비 머리핀’은, ‘나비 공주’와 연락이 끊긴 뒤, 유건이 유일하게 그녀를 찾아낼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포기한 적 없지만, ‘나비 공주’에 대한 흔적은 물론, 그 ‘나비 머리핀’조차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시간이 지나면서, 유건은 어쩌면 두 사람의 인연이 거기까지였다고 체념했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 일은 언급하는 거지? 혹시...?’“계속 말해.”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형님,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그 ‘나비 머리핀’... 흔적을 찾았어요.] 유건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어디서?” [얼마 전에, 그 머리핀이 암시장에 나왔습니다.]“흥!” 유건은 가볍게 코웃음
시연은 상황을 파악하고 왕성애에게 말했다. “제가 부를게요.” “그럼 저는 먼저 내려가서 준비할게요.” “네.” 시연은 몸을 돌려 서재 문 앞에 선 후,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문 안 잠갔어!” 낮고도 분명한 남자의 목소리... 그 안에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시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문을 밀고 들어갔다. 책상 뒤쪽, 유건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두 다리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채. 그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뭔가를 보고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쁜 업무 중일지도 몰라서 시연은 다가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직도 바빠요? 밥은 먹어야죠.” 그러나 유건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안 먹어.” “왜요?” 시연은 유건의 고약한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다. ‘밥을 거르는 건... 정말 너무 유치하지 않나?’ “밥부터 먹어요.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그 말에 유건은 예상치 못한 듯 눈을 들었다. “오, 그럼 우리 지 선생님도 내가 떼쓴다는 걸 아는 건가?” “알죠.” 시연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모시러 온 거잖아요.” “그게 다야?” 유건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더 어떻게 해야 해요?” ‘이 사람, 대체 뭘 원하는 거지?’ 시연의 태도에 자극받은 유건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안 먹는다니까! 나가!” 그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고함쳤다. 그 소리에 시연은 두 걸음 물러섰지만, 곧바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 먹으면 말든가! 대체 뭔데 이 난리야?’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밥 먹을 거예요, 말 거예요?” 이번에 유건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아예 무시했다.‘그래... 알아서 해라.’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단호하게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갔다. 심지어 문까지 살짝 닫아주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 유건은 한 초 정도 멍하니 굳
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모님, 제가 한 번 더 가볼게요. 그런데 장담은 못 해요.” “당연히 효과가 있을 거예요! 유건 도련님, 지금도 사모님이 오셔서 달래주길 기다리고 계실 거라니까요!” 시연은 마지막 한 숟갈까지 국을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똑같이 문을 두드렸다. “또 무슨 일이야!!” 안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거칠고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시연은 잠시 주저했지만,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안을 보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짧은 사이에 방 안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화가 난 거예요...?” 책상은 엉망이었고, 바닥엔 컴퓨터, 서류, 책, 재떨이, 장식품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와중에 유건은 소파에 몸을 기댄 상태였다. 왼손 손가락 사이에는 담배 한 개비가 끼워져 있었고, 오른손엔 라이터를 쥐고 있었다.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반복하면서. ‘담배 피우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건가...?’시연은 문득 깨달았다. ‘이 남자, 단 한 번도 내 앞에서는 담배를 피운 적이 없는 것 같아.’ 이 생각이 드는 순간,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불편한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고유건 씨의 성질이 더러운 건 맞지만, 그만큼 세심한 면도 있는 건 인정해야 해.’ 시연은 조용히 다가가 남자 앞에 섰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밥 먹어요, 네?” “오?” 유건이 비웃듯 낮게 웃었다. “뭘 잘못했는데?” “아이고...” 시연은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말했다. “나랑 지동성,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앞으로도 그런 관계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거고요.” 그녀가 말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유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예요. 대체 뭘 더 묻고 싶은 건데요?” 시연은 쓰게 웃었다. “그 사람, 그냥 내 오랜 지인일 뿐이에요. 당신이 생
마치 홀린 듯, 시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손끝이 자연스레 유건의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고, 천천히 그에게 응답했다. 작은 불씨가, 순식간에 화르르 불타올랐다.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시연이 나지막이 물었다. “배 안 고파요? 밥부터 먹어요, 네?” “응...” 유건 역시 더 이상 참을 자신이 없었다. 더 가면, 선을 넘어버릴 것 같았으니까.그는 그대로 시연을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문을 열고 나섰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왕성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얼어붙었다.그녀는 한참이 지나도 시연이 내려오지 않길래, 혹시 두 사람이 싸우는 건 아닌가 걱정돼서 올라와 본 참이었다. ‘아니, 이건 대체 뭐야?!’ 하지만 곧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유건 도련님, 사모님... 저녁 준비 다 됐어요. 어서 내려가세요.” 시연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유건의 어깨를 치며 내려가려 했다. “내려줘요!” 하지만 유건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고생 많았어요, 이모님.” 그러면서도 품 안의 시연을 놓을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대로 그녀를 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가만히 좀 있어. 부부가 집에서 좀 안고 있겠다는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해?” “됐어요! 난 당신처럼 뻔뻔하지 않다고요!!” 왕성애는 조용히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서재 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얼어붙었다. “어머나, 세상에!”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류들, 바닥에 떨어진 컴퓨터와 의자, 깨진 재떨이... ‘유건 도련님의 성질, 정말 장난 아니네...’ ‘저 난리를 치고도 꼭 껴안고 있다니...’‘젊은 부부, 참 다이내믹하네.’ 다음 날. 시연은 늦잠을 잔 뒤, 오후가 돼서야 강울대병원으로 출근했다. 오전에 쉬었던 만큼, 진료 시간이 되자 예약된 환자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음 환자분, 들어오세요.”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손짓하며, 컴퓨터에서 환자 정보를
유건에게 자신의 밉고 추한 모습을 들킬까 두려워서였을까? 소미는 결국 그렇게 떠나버렸고, 아예 포기해 버렸다. 왜냐하면 소미에게 체면이란, 자신을 낳아 기르고 스무 해 넘게 사랑해 준 아버지의 목숨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태연히 내뱉을 수 있지?' 시연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자신이 지동성을 구하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쳐도, 소미가 지동성을 모른 척한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소미는 진료실을 나와 두리번거렸다. 역시나,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 정기환이 서 있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유건이 지시연한테 보디가드를 붙였다고?’ ‘그렇다면, 지금... 고유건한테 지시연이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건가?’ ‘그 남자, 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소중히 여긴 적이 없어!’ ...어느새 여섯 시 반이 되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시연은 마지막 환자까지 진료를 마쳤다. 다행히, 유건도 오늘은 꽤 바쁜 모양이었다. 둘은 일곱 시에 강울대 후문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시연은 짐을 정리하고 나서도 시간이 아직 여유로웠다. 여기서 강울대 후문까지는 걸어서 십 분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어깨에 가방을 멘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후문 앞, 바로 옆에는 작은 상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시연은 특별한 목적 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한 베이커리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유리문 너머로 갓 구운 에그타르트를 진열대에 올려놓는 직원이 보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아주 맛있어 보였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익숙한 저음과 함께 따뜻한 체온이 등 뒤에 닿았다. 시연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익숙한 페퍼민트 향의 오드콜로뉴. 바로 유건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 품에 안긴 채 가리켰다. “저기, 에그타르트...” “먹고 싶어?” 시연은 한참을
[너희 집안 때문에... 고 대표가 시연이더러 문란하다고 했어. 그래서, 시연이를 버린 거라고!]은범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고,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내가 시연이를 이렇게 만든 거야?’ ‘시연이가 이렇게까지 무너졌는데... 정작, 난... 그 이유도 모른 채...’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은범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고유건한테 가야 해. 오해든, 분노든, 뭐든 다 풀어야 해.’‘내가... 시연이 대신 말해야 해.’ 그날 밤, 은범은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부터 GP그룹 앞으로 향했다. 해가 채 뜨기도 전이었다. ‘여기서 마주친다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어젯밤부터 회사에 있었던 건가?’ 시계는 어느덧 오전 10시를 가리켰고, 불안해진 은범은 1층 로비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에 조심스레 물었다. 직원은 은범이 또 계약 관련 건으로 온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 대표님,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안 나오셨다고요?” 은범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어디 계신지는...” “죄송합니다.” 직원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희가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은범은 더 묻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건물을 나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바로 백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군데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정보를 얻었다. [고 대표? 지금 태평컨트리클럽에 갔대.]“알겠어. 고마워.” 전화를 끊자마자, 은범은 곧장 차를 몰아 태평만으로 향했다. 그곳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고급 골프장. 다행히 은범도 회원권이 있어, 어렵지 않게 입장할 수 있었다. 프런트에 물으니, 유건은 성하그룹 대표와 라운딩 중이라고 했다. ‘협상 중이겠지... 괜히 방해하면 안 돼.’ 그래서 은범은 탈의실 근처에서 조용히
진료 시간엔 병실 출입이 어려워서 은범은 외과 병동 건물 아래를 한참 서성이다가, 응급실과 외래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래... 오늘 시연이가 외래 근무일 수도 있잖아.’ 먼저 응급실을 찾았지만, 그곳엔 시연이 없었다. 이후 외래로 가보니 운이 좋았다. 시연은 정말로 외래에 있었다. 간호사가 환자를 부르고, 문이 열릴 때마다 시연은 환자와 마주 앉아 진지하게 상태를 묻거나, 진찰대 앞에 서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진지하게 집중한 듯한 그녀의 표정은 아주 안정되어 있었다. ‘별일 없나 보네. 고유건이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그 분노는 나한테만 쏟은 건가...?’‘시연이는 건드리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그래도 고유건,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구나.’ 은범은 그냥 돌아설 수도, 직접 물을 수도 없었다. 예전에 시연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기 때문. ‘되도록 얼굴 보지 말자’는 그 약속을 말이다. 그래서 은범은 조용히 외래 복도 한쪽에 앉아, 시연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점심 무렵.오전 진료가 끝난 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더니 병원 건물을 나섰다. 은범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갔다. ‘근데... 이상하네. 고유건이 붙여놓은 경호원은 어디 갔지?’ ‘내가 못 본 건가? 아니면... 오늘은 따로 없었던 건가?’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따로 있었다. 병원 문을 나와 좌측으로 꺾으면, 길은 세 방향으로 갈라진다. 하지만 시연이 선택한 길은... 진아 집이나 고씨 가문 본가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었다. ‘이 방향은 뭐지?’ 미간을 찌푸린 은범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삭에 가까운 몸으로, 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들어 보였지만, 묵묵히 나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시장?’ 마트보다 조금은 번잡하지만, 이곳의 채소와 고기들은 더 신선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닭이 당긴
은범은 늘 그렇게 생각해 왔다. 만약 시연 때문이라면, 유건은 애초에 HUA테크와 손을 잡지 않았을 거라고.하지만, 일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닐 수도 있지! 잘 생각해 봐. 우리랑 제일 먼저 계약 끊은 사람, 고 대표잖아. 그리고 그럴 능력 있는 사람도, 고유건밖에 없어.] 은범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일재 말도 꽤 설득력이 있지.’ “그래도 난, 고 대표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 사람, 그 정도로 감정에 휘둘릴 인간은 아닌데...’ 쿵!갑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 쾅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은범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엌 쪽에서 강수희가 당황한 얼굴로 반찬통 하나를 떨어뜨린 상태였다. 다행히 뚜껑이 단단히 닫혀 있어 내용물이 쏟아지진 않았다. 그런데도, 은범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어머니... 왜 저렇게 당황한 눈빛이지?’ “일단 끊을게.” 전화를 서둘러 끊고, 은범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수희 옆에 앉아 반찬통을 주워 정리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강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은범아, 너 방금... 전화할 때 고 대표 얘기했지?” “네.” 은범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 척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떠보려면 지금이 기회였으니 말이다. “요즘 고 대표랑 우리 회사 계약도 끊겼고, 그 이후로 프로젝트가 두 개나 물 건너갔어요. 일재가 묻더라고요, 혹시 제가 고 대표한테 밉보인 건 아니냐고요.”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수희가 눈을 질끈 감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반응을 본 순간, 은범의 가슴은 묘하게 쿵 내려앉았다. ‘뭔가 있다. 어머니... 뭔가 아는 거야.’ “어머니.” 은범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저한테 뭐 숨기고 있는 거 있어요?” “엄마... 엄마는...” 강수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입술
시연은 조용히 손바닥을 꼭 쥐었다.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고유건이 한 말, 틀린 건 아니야.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결국 사람 생명은 다 똑같잖아...’ ‘하지만 사람 생명을 구하는 일과 아버지를 용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구해야 할까?’ ... 한편, 은범이 유건을 만나지 못한 채, HUA테크와 GP그룹의 협업은 이달 말로 종료될 예정이었다. 요 며칠 은범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골치 아픈 건 이 일 하나만이 아니었다. 어제는 성하그룹 쪽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분기 협업을 끝으로, HUA테크와의 재계약은 없을 거라는 소식이었다. 은범은 친구이자 HUA테크 상무인 백일재와 함께 성하그룹 대표를 찾아갔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종일 밖에서 뛰어다니던 은범이 집으로 돌아온 건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샤워하고 약 먹고 겨우 몸을 뉘었는데, 눈을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강수희가 서 있었다. 두 손엔 큼직한 장바구니와 비닐백. “은범아, 엄마가 국 좀 끓였어. 반찬도 몇 가지 가져왔고.” 은범은 말없이 돌아섰고, 강수희는 그 뒤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어머니.” 은범이 입을 열었다. “이런 거 인제 그만 좀 가져와요. 저, 이 정도 나이면 밥은 알아서 챙겨 먹어요.” 아들의 무뚝뚝한 반응에 강수희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그렇지만 밖에서 먹는 건 질릴 때도 있잖아.” 강수희는 가져온 반찬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했고, 냉장고에 넣기 전엔 스티커를 붙였다. “위에 라벨도 붙였으니까 먹을 때 볼 수 있을 거야. 넌 데우기만 하면 돼.” 더는 설득이 안 통할 것 같아서, 은범은 그냥 입을 닫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는데, 박일재에서 온 전화였다. 은범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설마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순간, 마음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전화가 연결되자,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그럼 다행이네요.”시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라앉았다.‘다행이야... 아무 일도 아니어서.’“그나저나...”오선화는 진료차트를 정리하며, 마치 일상 대화하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이제 6개월 차에 들어섰어. 곧 임신 후반기인데, 슬슬 휴식은 생각 안 해?”“휴식이요?”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그 생각은 진심으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오선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부터는 배도 더 많이 나올 거고, 몸도 훨씬 무거워질 거야. 부기도 생기고, 움직이기도 불편해지고.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도 괜찮지 않나?”시연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아직 일할 수 있어요.”오선화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뭔가 걸리는 게 있어? 고 대표님이 계시니까, 병원에서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잖아.”“네... 알고 있어요.”시연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 “저보다 선배인 선생님들도 다들 만삭까지 일하세요. 7개월까지 야간 당직도 서시고요. 저야 그에 비하면 충분히 배려받고 있는 거죠.”‘그 배려가... 전부 고유건 덕분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게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이렇게 일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출산도 더 수월하다고 하잖아요?”“그건 맞아.” 오선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나는 그냥 권유만 한 거야.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컨디션 안 좋을 땐 꼭 쉬어야 해, 알지?”“네. 그럴게요.”시연은 산모 수첩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교수님, 수고하세요.”“그래, 잘 가.”시연이 문을 나서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무거워졌다.오선화는 웃음을 거두고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러고는 이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통화 목록을 스르륵 넘긴 오 교수의 손이, 한 이름에서 멈췄다.바로 ‘고유건’이었다. 오선화는 깊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걸 준비했다.
그날 오후, 은범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부사장 이지혁과 비서가 며칠 사이 벌어진 상황을 보고했다.“GP그룹이 우리와의 협약을 전면 종료했어요.”“GP그룹?”은범의 표정이 굳어졌다. ‘GP그룹... 고유건... 왜 갑자기...?’이번 협약은 처음부터 은범이 직접 유건과 만나 성사한 것이었다. 물론, 사적인 일로 둘 사이에 약간의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연을 둘러싼 복잡한 사정.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감정일 뿐.‘우린 둘 다 공사 구분은 확실한 사람들이었잖아...’은범은 이해할 수 없었다.“협약은 계속 수익이 나고 있었잖아요. GP 측에서 계약 종료 사유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정확히 말하지 않았어요.”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입장은 아주 확고했어요. 위약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다고 했고요. 환불 어음은 이미 발송했다고 합니다.”‘그렇게 빨리?’은범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설득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모든 절차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더 불안했다.“그래서 일단 수령하진 않았습니다. 돌아오시면 같이 상의하려고 했거든요.” “잘하셨어요.”‘보상보다 중요한 건, 이 협력이 가진 미래 가능성이었는데...’은범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내가 고 대표님한테 직접 연락해 볼게요.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야 하니까요.”“네, 애초에 사장님께서 직접 성사한 건이니까... 사장님께서 움직이는 게 맞죠.”은범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GP그룹으로 향했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GP그룹 본사 건물에 도착한 은범은 곧장 로비 데스크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 대표님 뵈러 왔습니다. 전해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비 데스크 직원은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안녕하세요, 혹시 예약은 하셨을까요?”“아니요.”“죄송하지만, 고 대표님과의 면담은 반드시 사전 예약이 필요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그건 알지...’은범은 고개를
“고 대표님!”하은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유건 앞을 가로막았다. 눈빛엔 분노가 가득했다.“이렇게 그냥 가시면 안 되죠!”“뭐라고?”유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시선엔 의아함과 경멸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시연이 말이에요.” 하은은 안쪽을 가리켰다.“시연이는 고 대표님의 아내잖아요. 근데, 아내 앞에서 애인이랑 나가는 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애인’이라는 단어가 뱉어지는 순간, 유건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눈가의 웃음기마저 순식간에 사라졌다.“지금... 누가 감히 소미 씨한테 그런 말을 해?”그 말에 하은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더 큰 화가 치밀었다.“제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그리고, 장소미 씨는 또 뭐예요? 고 대표님한테 아내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거, 무슨 의미인데요? 그리고 고 대표님이 장소미 씨를 감싸면, 시연이는 뭐가 되는 건데요?!” ‘시연이를 뭐로 보는 건지, 내가 대신 물어야겠어!’하지만 유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비웃음이었다.‘그럼 지시연은 나를 뭐로 봤을까?’그러나 이런 생각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비켜.”“싫어요!”그 말에 유건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목소리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솔직히, 너한텐 손쓸 가치도 못 느끼겠지만... 이쯤 되면 진짜 귀찮네.”“뭐라고요?”하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이런 말을...?’“비킬 거야, 안 비킬 거야?”“하은아!”그때, 시연이 급히 달려왔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며 중간에 섰다.“이런 사람들이랑 뭐 하러 싸워? 가고 싶다잖아. 그냥 보내줘. 누가 어딜 가든, 그건 자유잖아.”그러면서 하은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가서 라면이나 먹자. 아까 건 너무 불었으니까, 새로 하나 뜯어야겠어.”시연의 말투는 덤덤했고, 시선은 여전히 유건을 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유건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건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간 이식 얘기, 우주한테 물어본 적 있어?”“뭐라고요?”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걸... 저 사람이... 지금 왜 묻지?’찰나의 정적. 그리고 곧,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나는 우주의 보호자예요. 우주에 대한 결정은, 내가 해요.”하지만 유건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내가 알기론, 우주는 올해로 만 14세야. 이미 법적으로 자기 결정권이 생긴 셈이지.”남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분명했다.“게다가 우주는 신체 조건도 아주 좋잖아.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기증 가능 기준에 부합해.”유건의 말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논리는, 결국 ‘장소미’를 위한 것이었다.‘하... 정말 대단하다, 고유건.’시연은 속으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장소미를 스치듯 바라봤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말이 되는구나.’“우주의 열네 살이, 일반 아이들의 열네 살과 같다고 생각해요?”시연은 미세한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우주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내가 결정하는 거라고요.”그 말에 유건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는 톤을 낮추면서도 힘을 실어 말했다.“지나치게 독단적이네.”“우주는 똑똑한 아이야. 심리적으로 결핍이 있는 거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잖아. 만약 언젠가 지 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우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그 말에 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입꼬리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조차 사라졌다.“자책이요...?”시연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냉소가 섞인 차가운 어린 목소리로 유건을 향해 말했다.“잘 들어요. 우린 인생에서 많은 걸 후회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그 ‘누군가’ 안에 지동성은 절대 포함되지 않아요.”그 말에 유건의 이
하은은 눈치가 빨라서 괜히 시연에게 짐이 될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시연은 역시 장미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우리 엄마요? 죽은 지 십몇 년 됐는데, 오늘 좀비처럼 부활이라도 한 거예요?”하은은 그제야 시연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아!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무당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얼른 해줘.”두 사람은 말 그대로 티키타카였다. 장미리의 얼굴은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지시연! 넌 진짜 싹수가 없어!”“맞아요.”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라는 사람도 죽은 거나 다름없죠.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으니, 예의 따윈 배운 적 없어요.”그녀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무슨 용건인지는 상관없고, 지금 당장 나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나한테 ‘엄마’라는 말 좀 들먹이지 마세요. 혹시라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뱉는다면... 당신 입, 내가 부숴놓을 수도 있어요.”시연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서릿발 같았다.“진심이에요. 장난 아니니까, 절대 시도하지 마세요.”“너... 너 진짜...!”장미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시연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말솜씨에서도, 기세에서도 밀렸으니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네 아빠... 쓰러졌어. 지금 혼수상태야.”그 말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그 정도라고...?’눈빛 속에 망설임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럼 그분 옆에서 간병이라도 해주셔야죠. 여긴 왜 와서 소란인데요?”“너...”“지시연!”자기 엄마가 밀리는 걸 보다 못한 소미가 나섰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진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우리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나야 모르지.”시연은 흰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그럼 알려줘 봐. 여기엔 왜 온 건지.”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