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신 그룹 대표 사무실.엄규민은 반하준에게 업무 보고를 마친 후 아이패드를 옆구리에 끼고 여러 번 망설인 끝에 결국 말을 꺼냈다.“대표님, 오늘은 사모... 오늘이 ALI 그룹 수학 경시대회 결승전 날입니다.”사무실 의자에 앉아 막 서류에 사인을 마친 반하준은 수억 원짜리 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빙빙 돌렸다.윤곽이 뚜렷한 그의 얼굴은 흔들림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내 전 와이프한테 관심이 많은가 봐?”그가 입을 열자마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압박감에 엄규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매회 ALI 수학 경시대회가 끝나면 부신 그룹에서는 결승에서 20위 안에 든 참가자들한테 러브콜을 보냅니다. 만약 강민아 씨가 20위 안에 든다면...”엄규민은 강민아와 반하준이 함께 일하는 모습이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만약 강민아가 정말 부신 그룹에 들어온다면 엄규민은 미리 부신 그룹의 모든 직원들에게 강민아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주의를 줘야 했다.반하준이 덤덤하게 말했다.“20위 안에 든다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는 말이겠지. 그럼 오퍼를 보내. 부신 그룹에 순조롭게 들어올 수 있을지는... 내 기분에 달려있어.”비웃는 듯한 기색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그와 이혼 소동을 벌일 때 강민아는 ALI 수학 경시대회에 신청서를 냈다. 이는 그녀가 반하준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걸 의미했다.반하준에게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고 싶어 했고 남편과 아들이 계속 사랑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생각했다.그 생각에 반하준의 두 눈에 잔혹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강민아의 사모님 신분을 박탈한 순간 강민아가 아무리 존재감을 드러내려 애써도 뒤돌아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그때 반하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연진숙의 전화인 걸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연진숙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하준아, 너한테 보낸 재벌가 딸들 자료 다 봤니? 마음에 드는 사람 있어? 주말에 선자리 마련해줄게. 한번 만
아들이 지금까지 한 여자의 편을 이렇게 들어준 적이 없었다. 연진숙이 노발대발했다.“어떻게 어머니한테 그딴 식으로 말할 수 있어? 루나 그 여우 같은 년이 아주 널 제대로 홀렸구나. 어머니도 못 알아보게 만든 거 보면.”연진숙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반하준은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휴대폰을 테이블에 휙 던졌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그녀가 루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루나라는 이름만 들으면 마음속에 의심스러운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전에 정수산에서 반하준은 루나에게 사흘 안에 반씨 가문으로 와서 차를 가져가라고 했다.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루나는 오지 않았다. 심은호 외에 루나와 연락이 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반하준은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내 차고에 있는 부가티 라 부아튀르 누아르랑 애스턴 마틴 발키리를 팔아버려.”엄규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왜 갑자기 차를 팔려고 하시는 겁니까?”게다가 두 대 모두 한정판 최고급 스포츠카였다. 엄규민은 차고에서 그 두 대의 스포츠카를 보기만 해도 압도당해 넋이 나갔었다.반하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이렇게 하는 이유를 엄규민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그리고 내가 그 두 대를 팔려고 한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이게 다 루나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루나가 계속 나타나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 두 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서경대학교.점심 12시, 결승전 종료까지 다섯 시간 반이 남았다.강민아는 컴퓨터로 답안 제출 버튼을 클릭한 후 감독관에게 손을 들고 말했다.“제출했어요.”그 순간 시험장의 모든 참가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감독관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뭐라고요? 정말 제출했어요?”강민아가 대답했다.“문제 다 풀었어요.”전에 그녀는 예선전이 끝나는 순간에 답안을 제출했었다. 그땐 반하준 때문에 시간을 지체했었고 또 5년 만에 다시 참가한 수학 경시대회라 반응 속도가 다소 느려졌기 때문이었다.결
그 기자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다른 기자들의 반응이 더 컸다.“추적 818 대단한데요? 강민아 씨 아들까지 인터뷰하다니.”“강민아 씨한테 아들이 있었어요? 딸만 있는 줄 알았는데.”그러자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던 기자가 악의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강민아 씨한테 아들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전남편의 신분까지 알아냈어요. 강민아 씨의 전남편이 부신 그룹 대표 반하준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그 순간 다른 기자들은 충격이라도 받은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대박. 정말이에요?”“반하준요? 서경 3대 태자 중 한 명인 부신 그룹 대표 반하준 말인가요?”상상도 못 한 사실에 강민아를 바라보는 눈빛마저 달라졌다.“강민아 씨, 정말 반하준 씨와 이혼하신 건가요? 어떻게 재벌가 사모님 자리를 버릴 수 있죠?”“이혼한 이유가 대체 뭡니까?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대표님께 내쫓긴 거죠?”“재벌들은 쉽게 이혼하지 않는데. 도대체 뭘 하셨기에 재벌가에서 쫓겨난 거예요?”지금 이 순간 강민아는 기자들의 먹잇감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강민아에게서 재벌가의 뒷이야기를 캐내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그리고 놀라운 건 모두 강민아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그녀가 강씨 가문의 딸이긴 했지만 18살이 되어서야 강씨 가문에 돌아왔다는 걸 기자들은 알고 있었다.하여 분명히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기에 반씨 가문에서 쫓겨난 것이라고 생각했다.추적 818 프로그램 기자가 녹음 펜을 꺼내더니 이젠 진실을 밝힐 때가 됐다는 생각에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지금까지 강민아 씨한테 속고 계신 것 같으니까 강민아 씨의 친아들이 어머니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들어보시죠.”기자가 녹음 펜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전 반현민이고 올해 다섯 살입니다. 반우정은 제 여동생인데 지금은 강윤정으로 이름을 바꿨어요.”아이의 앳된 목소리가 들린 순간 몇몇 기자들은 녹음 펜에 마이크를 들이댔다.“강민아는 더 이상 제 엄마가 아니에요. 아빠랑 이혼
녹음 펜에서 반현민에게 묻는 기자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현민 어린이는 어머니가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하는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나요?”반현민의 목소리가 울렸다.“유명해지고 싶어서요. 돈도 갖고 싶고 아빠한테서 저를 빼앗고 싶어 해요. 저를 빼앗아가면 앞으로 아빠를 협박해서 더 많을 돈을 받아낼 수 있거든요.”아이의 순진하고 앳된 목소리는 마치 수천 개의 바늘처럼 강민아의 몸에 박혀 말 못 할 고통이 밀려왔다.그 순간 강민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한때 그녀의 아들이었고 아킬레스건이었으며 그녀와 심장 박동을 공유했던 아이였다.뭐라 해도 결국에는 그녀의 친아들이라 반현민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강민아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고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강민아의 얼굴이 핏기없이 창백해졌고 눈동자에도 빛이라곤 없이 어두웠다.기자가 또 물었다.“현민 어린이, 네티즌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여러분, 이 여자한테 속지 마세요. 정말 자기밖에 모르는 나쁜 여자예요. 전 친아들이라 어떤 엄마인지 제일 잘 알아요.”반현민의 목소리가 끊겼고 기자는 녹음 펜을 든 채 강민아를 보며 웃었다.수많은 카메라가 강민아의 얼굴을 찍고 있었다. 강민아의 표정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기자들은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마이크를 강민아의 얼굴에 거의 들이밀다시피 했다.“강민아 씨, 아들이 한 말이 다 사실인가요?”“강민아 씨, 일부러 아들을 버린 건가요?”강민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손을 들자 관절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뚜두둑 났다.그녀는 손바닥으로 마이크를 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마이크가 얼굴을 찌를 것 같았다.추적 818 기자는 흥분한 나머지 콧구멍까지 벌름거리면서 말했다.“다섯 살짜리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강민아는 입술을 적시고 싸늘하게 웃었다.“하지만 아이는 헛소리를 할 수 있죠.”얼굴이 납작한 누런 이 기자가 침을 튀기면서 그녀를 비난했다.“당신 아들이 당신을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는 자격 없는 엄마이기 때문입니
강민아는 경호원 십여 명의 호위를 받고서야 겨우 강의동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한여름의 모기처럼 끝까지 쫓아왔다.“당신들은 누구십니까?”“누가 보냈습니까?”기자들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면서 마이크를 무표정한 경호원들의 얼굴에 들이댔다.그 바람에 많은 학생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민아 쪽을 쳐다보았다.맨 뒤에 걷던 한 경호원이 귀찮게 달라붙는 기자들에게 증을 보여줬다.기자들은 증에 적힌 대통령실이라는 네 글자를 본 순간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그 경호원이 기자들에게 경고했다.“무엇을 보도할 수 있고 보도할 수 없는지 잘 알고 있겠죠? 보도해서는 안 될 것을 보도하면 결과는 알아서 감당해야 할 겁니다.”웅성거리던 기자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몇몇 눈치 빠른 카메라맨들은 어깨에 멘 카메라를 내려놓고 카메라 렌즈를 덮개로 덮었다.그들이 대통령실 소속 경호원이라는 걸 알게 된 기자들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검은색 현대 제네시스 한 대가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서경대학교에서는 학교 지도부의 차조차도 캠퍼스 내에서 함부로 다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장엄한 모습의 제네시스는 캠퍼스 안으로 들어왔다.차 문이 열리자 넓은 뒷좌석에 훤칠한 키의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차량 내부가 어두컴컴하여 남자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곽이 뛰어난 건 알아볼 수 있었다.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을 길게 빼 들고 눈을 크게 떴다.“혹시 반하준 대표님이에요? 좀 닮았는데.”“강민아 씨랑 이혼했다고 하지 않았어요?”“반 대표님이 대통령실의 경호원을 동원할 수 있어요? 불가능할 텐데.”기자들은 훈련이 잘된 경호원들에게 2, 3m 떨어진 곳에서 가로막혔다.강민아는 차 문 쪽으로 걸어가 차 안에 있는 남자를 보고는 공손하게 인사했다.“작은아버지.”무심코 불렀다가 문득 그 호칭이 적절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차 안의 분위기도 숨 막힐 듯 무거워졌다.이젠 반하준과 이혼했으니 더 이상 반용화를 작은
반용화가 문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차 문이 다시 닫혔다. 기자들은 밖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경호원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야 추적 818 기자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현이 형. 반씨 가문의 그분이 계속 강민아를 감싸고돌 거란 말은 안 했잖아요. 오늘 그분을 건드렸으면 앞으로 이 바닥에서 발도 못 붙일 뻔했어요.”반용화는 이미 떠났지만 추적 818 기자는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강나현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울려 퍼졌다.“반씨 가문의 그분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반용화 말이에요. 그분이 경호원들을 데리고 와서 강민아를 데려갔어요.”“말도 안 돼.”강나현이 큰 소리로 말했다.“반용화가 강민아를 데려가는 걸 직접 봤다고? 나랑 하준 오빠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는데도 몇 번 본 적이 없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고연과학원의 수석 연구원이, 그것도 국가 극비 프로젝트도 참여하는 사람이 왜 강민아를...”“정말 반용화예요.”기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내가 직접 봐서 절대 거짓일 리가 없어요. 연구원님께서 나한테 베테랑 기자가 5살짜리 아이의 입에서 특종을 파내려는 게 창피하지도 않냐고 했어요.”기자가 가슴을 움켜쥐고 걱정스럽게 말했다.“회사로 돌아가면 해고당하는 거 아니겠죠? 현이 형을 도와줬다가 반용화를 건드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강나현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중얼거리듯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반용화가 왜 강민아를 도와줘? 말도 안 돼.”기자가 또 말했다.“아무튼 강민아에 관한 기사는 내지 못하겠어요.”그러자 강나현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강민아의 추문을 보도하려는 언론사는 너 말고도 엄청 많아. 걔가 아들을 학대했다는 기사가 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강나현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쥔 채 싸늘하게 웃었다.‘ALI 수학 경시대회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려고? 흥. 인터넷에서 추앙받는 만큼 더 처참하게 추락시켜줄게.
강민아는 반용화에게 정중하게 말했다.“다음 달에 정이랑 이사 가려고요. 이미 학군 좋은 곳에 집을 알아뒀어요. 다음 주에 ALI 수학 경시대회 결승 결과가 발표될 텐데 3위 안에 들 자신이 있어요. 그리고 일자리는...”그녀의 가늘고 짙은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가볍게 떨렸다.“저...”그녀는 반용화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망설이다가 결국 용기를 내어 물었다.“용성에 들어가도 될까요?”어찌나 긴장했는지 목소리에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반용화의 맑고 깨끗한 시선이 강민아의 얼굴을 스쳤다.그녀는 반용화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대략 알고 있었다. 반용화는 중책을 맡고 있었고 그가 이끄는 용성연구센터는 우리나라 10대 연구센터 중 하나였다. 심지어 위치가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강민아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반용화에게 자신을 추천했다.“지금 우리나라에서 인공지능 연구를 진행 중이고 연구원님이 책임자인 거 알아요. 저...”“강민아.”반용화가 성까지 부르자 강민아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바르게 앉았다.“용성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그의 목소리는 깊은 우물처럼 잔잔했다. 그가 이 말을 내뱉었을 때 반하준에게서 봤던 차가움이 조금 보이는 듯했다.‘역시 피는 못 속인다니까.’하지만 강민아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연구원님이 직접 절 뽑으셨잖아요.”13년 전 반용화는 교육 자원이 부족한 작은 마을에서 강민아를 발굴했고 그의 추천서 한 장으로 강민아는 고연대학교 영재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강민아의 뜨거운 눈빛에 반용화는 숨을 가볍게 들이쉬었다가 고개를 돌렸다.“그럼 금상을 받고 나서 얘기해.”강민아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웃음을 머금은 눈빛이 마치 촛불처럼 흔들렸다.“연구원님도 제가 ALI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한 걸 지켜보고 계셨던 건가요?”“우연히 봤어.”반용화는 짧게 대답하며 오해를 살 만한 여지를 주지 않으려 했다.검은색 현대 제네시스가 호텔 문 앞에 멈춰 섰다. 강민아가 내리려 하자
어느 한 5성급 호텔 꼭대기 층, 육성민이 헬스장에서 돌아왔다. 금방 운동을 마친 상태라 온몸의 근육이 살아있었다.샤워를 마쳤는데도 몸에서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비서가 한참 전부터 계속 기다렸다.평소 사람들에게 늘 친절하고 잘난 척하는 법이라곤 없는 사람이라 비서가 웃으면서 장난을 쳤다.“대표님, 여동생분이 부신 그룹 대표의 아내였다니. 왜 그동안 한 번도 말씀 안 하셨어요?”육성민의 안색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어디서 들었어?”비서가 휴대폰을 그에게 보여주었다.“보세요. 여동생분이 또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요.”[#강민아 아들 학대#][#강민아 전남편 반하준#][#강민아 돼지 먹이#]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한 내용 모두 강민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었다.육성민이 기자가 반현민을 인터뷰한 녹음을 눌렀다. 그러다가 녹음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휴대폰을 부숴버릴 듯 꽉 쥐었다.그의 팔에 있는 핏줄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터무니없는 소리.”분노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 비서는 깜짝 놀라 심장이 다 쿵쾅거렸다.강민아의 전남편이 서경시의 재벌인 부신 그룹 대표 반하준이라는 사실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친아들이 강민아를 비난하는 말을 듣고 난 후 네티즌들은 분노를 터트렸다.[반씨 가문 도련님 말이 맞아요. 강민아가 반하준이랑 결혼한 7년 동안 반씨 가문에 아이 둘을 낳아준 것 외에 무슨 기여를 했나요? 어떻게 기자들 앞에서 전남편을 무시하는 발언을 할 수가 있죠? 염치도 없나 봐요.][재벌가 사모님이 됐으면 얌전히 있기나 할 것이지, 남편과 자식을 버리다니. 허. 가정주부가 사회생활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는데도 자존심은 엄청 강하더라고요.][강민아는 아예 모를 거예요. 전남편이 밖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서경의 재벌 2세라서 아이를 낳아주겠다는 여자가 줄을 섰을 텐데.][제 친척이 서경시 상류층과 접촉한 적이 있었는데 반하준은 사생활이 깨끗하고 스캔들 하나 없다고 하더라고요. 많은 여자들이 매달리는데도 눈길 하나
강나현은 다급한 어조로 강민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이 모든 게 강민아가 우리를 해치려고 짠 계획이에요!”그런데 얼굴 전체가 돼지처럼 부어올라 말을 해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목소리가 어눌하게 들렸다.그런 그녀의 말에 강성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서둘러 벨트를 반으로 접은 뒤 강나현의 콧대를 조준해 휘둘렀다.“민아랑 내 부녀 사이 이간질할 생각 마!”강나현은 당황했다. 강성진이 왜 갑자기 강민아 편을 드는 걸까.“아빠가 키운 자식은 저예요! 강민아랑 무슨 감정이 있다고 그래요? 애초에 데려올 생각도 없었잖아요!”“닥쳐!”강성진은 화가 났다. 그의 평판은 무너졌지만 강민아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앞으로 그녀에게 의지해야 할 일이 많은데, 강나현이 대놓고 헛소리하는 걸 그냥 둘 리가 없었다.강성진이 소리를 질렀다.“테이프 가져와!”작고 하얀 손이 검은 테이프를 건넸다.강기성은 강성진에게 테이프를 건네는 김예나를 보고 날카로운 눈썹을 들썩였다.강성진이 테이프를 찢자 강나현이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아빠, 뭐 하는 거예요?”강성진이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네 망할 입을 막으려는 거지!”강성진은 본인과 강민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강민아가 강씨 가문에 돌아온 지 9년이 지났어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건 손에 꼽힐 정도였다.게다가 둘은 한때 팽팽하게 맞서 싸운 적도 있었다.하지만 이제 강성진은 강민아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아빠! 하지 마요!”강나현이 비명을 질렀지만 강성진의 행동에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강성진이 곧장 테이프로 그녀의 입을 감자 김예나는 한쪽에 서서 진흙탕처럼 혼탁한 눈빛으로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비슷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한때 강나현은 그녀를 화장실에 가두고 테이프를 붕대 삼아 눈과 머리, 입, 코를 감아 숨도 못 쉬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힘조차 없게 만들었다.그렇게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 잠식되어 갈 때 가위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강나현은 강성진의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고 상황을 뒤집을 희망이라도 본 듯 서서히 안도했다.‘그래, 이제 강민아가 맞아서 이빨이 뽑힐 차례야!’강성진은 강나현의 휴대폰 앨범 속 강민아와 관련된 영상을 지우고 숨을 고르더니 손을 들어 또다시 강나현의 뺨을 때렸다.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강나현의 얼굴을 강타했다.강나현의 입에 머금었던 솜뭉치가 끈적끈적한 피와 섞여 바닥에 튀어나왔다.“강나현, 이 망할 것! 날 해친 것도 모자라 민아까지 해치려고 들어? 강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싶은 모양이구나! 내가 오늘 너 때려죽인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아니에요!”강나현이 피를 뱉자 혀끝에는 온통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소리를 질렀지만 그녀의 설명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강성진은 왜 그녀를 믿지 않는 걸까.휴대폰을 강나현에게 던진 뒤 강성진은 벨트를 풀었다.강나현은 강성진이 벨트로 자신을 채찍질하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드러냈다.그 순간 강성진의 휴대폰이 울렸다.벨트로 강나현을 한 대 세게 내려친 뒤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여보세요.”강성진은 발신자를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들어와요.”강승 테크의 주요 주주 몇 명이 들어왔고 맨 앞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성진, 지금 여론이 자네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옴 쪽에서는 입찰에서 빠지려고까지 해!”강성진은 그 말에 덩달아 조바심을 냈다.“네? 어떻게 멋대로 발을 뺀다는 거죠? 지금 당장 옴 테크 쪽 임원에게 연락해 봐야겠어요!”또 다른 주주가 강성진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지금 어디든 자네가 나서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다는 걸 몰라? 사람들 웃음거리가 되고 싶어?”“난...”주주들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우린 고심 끝에 만장일치로 자네가 먼저 대표 사임 발표를 하길 바라네. 그래야 자네나 회사에 대한 불리한 여론이 잠잠해질 거야.”“어떻게 강승
그러자 강성진은 강나현에게 소리쳤다.“민아를 좀 봐! 우리 회사를 위해서 애쓰고 있잖아!”강민아가 덧붙였다.“그런데 오늘 파티에서 공개된 영상이 서경 상류층에 퍼졌어요.”그녀는 부드러운 한숨을 내쉬며 강나현에게 물었다.“나현아, 넌 상류층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니까 가서 확인해 봐. 다들 우리 집 얘기하고 있는지.”강나현은 심장이 철렁하고 소름이 돋았다.강민아가 지금 그녀를 골탕 먹이고 있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강성진이 곧바로 강나현을 재촉했다.“휴대폰 내놔.”강나현은 두 볼이 부어올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강민아가 또다시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그녀는 강성진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곧바로 강성진이 그녀의 뺨을 또 때렸고, 이미 빨갛게 부어오른 뺨 사이로 새빨간 피가 스며 나왔으며 살갗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강성진은 그녀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며 명령했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강성진의 위협적인 압박에 강나현은 순순히 휴대전화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부은 얼굴로 휴대폰 잠금이 풀리지 않자 지문으로 해제한 뒤 카톡 채팅 기록을 살펴보았다.곧 여러 명이 친구 추가 요청을 보냈고, 강나현을 삭제하지 않은 재벌 2세들이 파티에서 강나현이 당당하게 강성진이 바람피운 것을 공개한 영상 링크를 보냈다.[강나현, 너 멋있다!][나현, 이게 네가 말한 빅 뉴스야?][역시 너야. 나오자마자 아빠부터 건드리네. 강나현, 용감해! 너는 내가 인정한다!]강성진은 강나현을 칭찬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두 눈에 담긴 불길이 거세게 번졌다.한심한 재벌 2세들은 부모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강나현이 파티에서 보여준 행동은 그들에게 ‘모범’ 역할을 했기에 강나현을 숭배하기 시작했다.강나현은 소파에 앉아 강성진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발바닥부터 올라오는 한기가 온몸을 휩쓸고 팔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래위 치아가 달달 떨리며 서로 부딪혀 딱딱 소리를 냈다.“아빠...”강성진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강나
강민아는 눈을 깜빡이며 물잔이 강나현의 가슴을 강타하고 뜨거운 물이 마침 강나현의 얼굴에 튀면서 그녀의 얼굴도 씻기는 것을 바라보았다.“아악! 젠장!”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강나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물이 그녀의 얼굴에 있던 핏자국과 뒤섞이며 연분홍색으로 바뀔 때쯤 그녀가 허둥지둥 소파에서 일어났다.“죄송해요...”김예나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어두운 동공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이런 망할!”강나현은 욕설을 내뱉으며 뒤에서 쿠션을 잡아 김예나를 향해 세게 내리쳤다.김예나는 피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강나현이 던지는 딱딱한 물건에 맞아 머리에 피가 난 적도 있는데 이까짓 쿠션쯤이야.강기성이 손을 뻗어 쉽게 쿠션을 낚아채더니 김예나를 등 뒤로 보내면서 쿠션을 옆으로 던졌다.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예나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그의 눈에 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미친개 같았다.강나현은 입에 솜을 물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당장이라도 김예나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 같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일부러 그런 거야! 왜 아직도 우리 집에 살게 놔두는 거야? 저번에 내 그릇도 깨고, 내 옷도 잘못 빨고, 내 방 창문도 열어놔서 엄청나게 큰 벌레가 내 침대에 기어들어 왔어!”김예나는 벌벌 떨며 강기성 뒤로 숨었다.강나현의 말이 맞다. 일부러 그랬다.강기성의 손에 이끌려 강씨 가문에 살게 되면서 강나현은 일부러 그녀에게 집안일을 시켰다.김예나도 기꺼이 도우미를 자처했는데 청소도구를 들고 강나현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강씨 가문의 다른 도우미들이 너도나도 일을 도와주는 탓에 강나현의 방을 꼼꼼히 뒤져 불리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강나현에게 학창 시절 겪었던 괴롭힘을 하나하나 되갚아주는 것뿐이었다.2년 내내 강나현에게 괴롭힘을 당했기에 강씨 가문에서 강나현에게 했던 복수는 그녀가 한 짓에 비하면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어디서 목소리를 높여?
그녀가 강기성에게 약을 먹이고 나서야 그는 조금 나아질 기미가 보였다.강기성은 이 집안에서 강성진에게 맞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강나현은 어렸을 때부터 강성진에게 매를 맞으며 점차 폭력을 동경하게 되어 여성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자 무리에 어울리려 했다. 마치 자신도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가 되어야만 매 맞는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처럼.“그 사람이 도민영을 아끼는 것처럼 보여도 예전에 때려서 도민영 얼굴이 부은 걸 봤어. 난 어렸을 때부터 도민영이 저 사람한테 맞아서 머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어젯밤에 왜 오빠를 때린 거야?”강기성은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내가 사람을 시켜서 친부모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어.”강기성이 그녀를 돌아보았다.“강씨 가문은 남자가 물려받아야 한다면서 내가 친부모에게 가면 강씨 가문 대가 끊길 거래.”말하며 강기성이 경멸하듯 비웃었다.“난 언젠가 저 사람 죽여버릴 거야.”그저 홧김에 하는 말이었다. 강성진의 피가 튀는 것조차 더러운데 아무 상관 없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앞길까지 망칠 필요는 없었다.강민아는 숟가락으로 강기성에게 포도당 물을 먹여주었다.“언젠가 우리가 크면 저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날이 올 거야.”도민영이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는 걸 강성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강기성은 그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하지만 고리타분한 마인드와 강나현의 출생 이후 강성진은 큰딸을 되찾으려는 생각을 접었다.“다들 이만 돌아가세요.”직원들에게 말하던 강민아는 자리에 있던 임원들과 주주들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단상 위에 꿇고 앉은 그녀의 발치에는 아직 기절한 척 시늉하는 도민영이 있었다.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임원들도 마음을 진정시켰다.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강민아의 차분한 모습은 임원들에게 구원의 지푸라기와 같았다.강민아는 심은호의 손바닥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나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강성진에게 설명했다.“아빠,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올린 영상이 아니라고요!”강성진은 이제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과 어린 비서의 동영상이 폭로되었고, 게다가 폭로한 당사자는 그의 잘난 딸이었다.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행복한 얼굴로 단상 아래에 있는 임직원들에게 두 딸이 강승 테크에 입사해 온 가족이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그의 열정적인 연설이 아직도 귓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효녀 강나현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강나현의 목을 비틀어 머리를 공처럼 차버리고 싶었다.“개자식,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강성진은 발을 들어 강나현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이대로 머리를 박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강나현은 겁에 질려 오줌까지 지리며 서둘러 기어서 도망쳤다.그때 강민아를 돌아보았다.‘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냥 내버려두진 않겠지?’그런데 강민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 도민영의 어깨를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엄마, 일어나봐요!”강민아가 손을 뻗어 도민영의 인중을 누르자 도민영은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뜨며 강민아를 노려보았다.“아파!”그리고 다시 기절했다.강민아는 연기라는 걸 알았다.지금 상황에서는 무고한 피해자인 척 연기하는 것만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도 엄마를 걱정하는 효녀인 척 강성진에게 맞는 강나현을 무시하고 있었다.강나현의 비명이 끝없이 울려퍼졌지만 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강성진은 그들의 대표였고 말 한마디로 그들을 해고할 수 있으니까.임원들과 주주들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거나 굳은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다.강성진이 어린 비서와 놀아난 사실은 사내에서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적나라한 영상이 공개되고 현장에 기자까지 있으니 일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그들은 지금 어떻게 하면 강승 테크에 미칠 부정
강나현의 목소리가 반하준의 귓가에 들리고, 그는 포박당한 채 매서운 눈빛으로 TV 화면을 응시했다.강민아를 저격하는 말인 건 안다.대체 강민아의 무슨 약점을 잡은 걸까.강민아가 강씨 가문을 파멸로 몰고 갈 만큼 위험한 짓을 한 건 그를 이곳에 가둔 것뿐이었다.하지만 강나현이 그가 감금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고?반하준은 자신의 뇌 어딘가에서 신경이 거칠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안 돼!’절대 그가 이곳에 감금된 사실을 폭로해선 안 된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확장되며 스크린에는 적나라한 영상이 재생되었다.강성진의 얼굴이 단번에 퍼렇게 질렸다.“아아악!”도민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미처 입을 가리지 못한 채 비참한 비명을 내뱉었다.강씨 가문의 다른 친척이나 주주들도 일제히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좋지 않았고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강나현은 단상에 서서 모두의 반응을 살피고는 단상 아래 손님들에게 말했다.“여러분, 다 보셨나요? 저런 사람이 강승의 리더가 될 자격이 있나요? 저렇게 사생활이 엉망인데 정말 강승 테크를 믿고 맡길 수 있나요?”강나현이 눈가에 악의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차갑게 웃었다.무죄로 석방된 후 강민아에게 주는 큰 선물이었다.‘그러게 누가 감히 도발하래?’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꿨으니 이제 강민아가 심은호와 사귀면서 다른 남자와 낯 뜨거운 행각을 벌인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다.강나현은 심은호를 바라보며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했다.무대 맨 앞줄에 서 있던 심은호는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강나현 씨의 가족도 서슴없이 희생하는 용기는 대단하네요!”강나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심은호는 왜 저렇게 담담한 걸까.게다가 대놓고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강나현은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역시 심은호는 강민아를 그저 데리고 놀 생각이었고, 어쩌면 진작 그녀가 방탕하다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강나현이 승리의
강나현은 강민아의 게시물을 클릭해서야 이미 올렸던 영상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고개를 든 그녀가 매서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쳐다보았다.영상을 삭제했다고 그녀를 도발했던 게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이미 강민아와 반하준의 영상을 저장해 놓았으니까!강민아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며 강나현은 일부러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올렸다고 더더욱 확신했다.강민아는 분명 반하준이 합의서에 사인하고 아직 민이가 병원에 있는 데도 강나현이 보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에 화가 난 거다.그래서 다시 친구 추가를 한 뒤 일부러 그녀만 볼 수 있는 게시물을 올려 기선제압을 했다.강민아는 그녀가 반하준을 좋아해서 그의 체면 때문에 영상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겠지만, 강나현은 강민아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강나현은 영상을 저장한 뒤 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꾸었다.이제 강민아에게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주련다.“강민아, 내가 이미 경고했지. 날 건드리지 말라고! 심은호와 만나고 하준 씨랑 얽혀 있다고 해서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마.”강나현의 경고가 끝나고 파티장 스피커가 울렸다.무의식적으로 단상 위를 돌아보니 강성진이 그쪽으로 다가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제가 이 자리에서 몇 마디 짧게 얘기하겠습니다...”강성진은 10분 넘게 열정적으로 연설한 뒤 도민영과 두 딸까지 무대 위로 데려갔다.그들은 저마다 다른 속셈을 품고 역겨움을 참아가며 사람들 앞에서 다정한 가족인 척 연기를 했다.마침내 강성진의 연설이 끝나고 강나현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으며 말했다.“아빠의 딸로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강나현의 발언은 약속된 게 아니었기에 강성진은 당황한 듯 강나현을 바라봤고, 강민아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우리 중엔 직책에 걸맞지 않은 품행을 지닌 사람이 있어요. 비록 가족이지만 사생활이 난잡해 강승 테크의 임원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호흡을 가다듬은 강나현은 강민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구치소에서 나온 뒤 미용실에 가서 브라운으로 염색하고 깔끔하게 묶은 포니테일이 걸을 때마다 흔들렸다.일부러 피부과에 가서 관리도 받았다. 그게 아니면 이 많은 사람 앞에 나설 용기도 없었을 거다.남성 정장을 입고 검은 가죽 구두를 신은 그녀의 발걸음은 당차 보였지만 나이 많은 임원이나 주주들 눈에는 무척 거슬리는 차림새였다.“언니, 축하해. 벌써 다른 사람 만나네.”강나현은 다가가 심은호를 돌아보며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눈빛을 감추었다.“심은호, 궁금한 게 있는데 어쩌다 우리 언니랑 만나게 됐어?”강나현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심은호는 무심하게 그녀를 흘겨볼 뿐이었다.“대단하네.”강나현이 눈이 휘어지게 히죽 웃었다.“심은호, 내가 물어보고 있는데 뭘 칭찬하는 거야?”“사고를 내고도 벌을 받지 않았잖아. 반씨 가문 도련님이 그 정도 다쳤는데 한 달도 안 돼서 나왔어. 참 운도 좋네. 반하준이 아마 불길 속에서도 구해줄 거야.”강나현의 표정이 다채롭게 바뀌었다.안 그래도 심은호는 존재만으로 눈에 띄고 주위에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걸려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이제 그들이 전부 강나현을 조롱하듯 쳐다보고 있다.게다가 그들을 촬영하는 카메라도 있었다.지난달 강나현이 강변대로에서 큰 사고를 쳤다는 건 서경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심은호는 고개를 돌려 강민아에게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산에 있는 불상 대신 반하준이 거기 앉아있으면 되겠네요.”강민아는 심은호의 팔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얘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따스하고도 솔직한 심은호의 눈빛이 강민아의 얼굴에 머물렀다.“걱정되는데요.”강민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놀리듯 말했다.“얘가 날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요?”두 사람은 거의 얼굴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강나현은 불쾌함에 입을 삐죽거렸다.“언니는 날 뭐로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