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만약 자신이 거절한다고 해서 박한빈이 정말 멈출 수 있을까?하지만 성유리는 지금 상황에서 원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그냥 조용히 박한빈을 째려보았다.속으로는 그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그 눈빛은 박한빈의 눈에 또 다른 애처로운 모습으로 비쳤다.박한빈은 성유리의 얼굴에 손을 대며 다시 물었다.“음?”성유리는 여전히 침묵했고, 눈길은 다른 곳으로 돌렸다.하지만 박한빈은 못 이기는 척 계속해서 대답을 요구했다.그는 성유리의 턱을 잡고 강제로 자기 쪽으로 얼굴을 돌려놓았다.“왜 아무 말도 안 하십니까? 싫은 건가요?”“정말 짜증 나요!”성유리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말했다.“아니면 그냥 내려가세요.”그 말속에는 분명히 분노가 섞여 있었지만 방금 전의 온기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애교가 섞인 듯했다.그래서 마치 박한빈과 장난을 치는 것처럼 들렸다.박한빈의 입꼬리는 더욱 높이 올라갔다.그는 마치 자기 혼자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아, 그럼 계속해도 된다는 거군요.”성유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그리고 박한빈의 손은 계속해서 그녀의 허리선을 따라 내려갔다.박한빈의 손끝은 차가웠지만 동시에 또 다른 온기를 지닌 듯했다.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성유리는 자동으로 움츠러들었다.마치 전류가 척추를 따라 치솟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가벼운 신음 소리를 냈고 그 소리에 성유리 본인도 놀랐다.여태까지 이곳에 살면서 그런 소리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소리가 나오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더 붉어졌고 애써 이를 악물려 했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다시 다가와 입술을 맞췄다.성유리는 그의 입술의 맞닿자 그냥 자연스럽게 입술을 열었다.그녀가 반응하려는 찰나, 박한빈은 갑자기 물러났다.그리고 입술을 성유리의 귀에 살며시 닿게 만들더니 물었다.“제가 정말 감옥에 가는 것 같아서 이런 방식으로 보상하려는 겁니까?”박한빈의 말은 질문처럼 들리지만 그 속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성유리는 그 말을 듣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박한빈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자신이 겪을 상황을 알게 된 순간, 붉어진 그녀의 눈빛과 분명히 벗어나고 싶어 했으나 결국 손을 내린 모습.성유리는 자신이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박한빈에게 투명하게 보였다.하지만 이런 상황도 괜찮았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박한빈이 성유리를 호텔로 데려올 기회와 이유가 있었을까?그는 원래 성유리와 천천히 연애를 하고 싶었다.단계별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그들이 부부 사이라는 사실에 대해 인정하고 알게 되었다.그럼에도 박한빈이 여전히 천천히 나아간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이 아니었을까?그리고 그 누가 성관계를 나눴다고 해서 연애를 할 수 없다고 말했는가?사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었다.성유리는 분명히 어떤 것들을 잊어버린 것 같다.그것은 바로 박한빈이 본래 굉장히 악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설령 성유리가 진심으로 그를 동정했다 하더라도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약자만이 다른 사람의 동정을 부정하고 그것이 자신에 대한 무시나 경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그러나 박한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누군가 자신을 동정한다면 그 사람은 뭔가 잘못된 사람일 것이다.그것은 남들에겐 해당하는 이야기다.그렇지만 만약 그 사람이 성유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성유리가 그를 동정한다면 그것은 박한빈에게 연민과 책임감을 느낀다는 뜻이다.그것이야말로 성유리가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사랑하는 사람은 자주 자신이 상대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끼니까 성유리는 분명히 박한빈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박한빈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성유리가 지금 자신에게 ‘보상’을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박한빈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 감정을 잊고 있었다.그것은 마치 더운 여름날 아이스콜라 한 모금처럼, 혹은 차가운 겨울날 따뜻한 난로 같은 것이다.그리고 성유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처럼 느껴졌다.그 눈빛
성유리는 순간 얼어붙었지만 이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손을 홱 빼버렸다.“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그녀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이건 전부... 박한빈 씨 때문이에요.”“저 때문이라니요?”박한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반박했다.“제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도 유리 씨가 안 일어난 거죠.”“만약... 당신만 아니었으면...”성유리는 계속해서 따지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혔다.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박한빈은 마치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십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입술을 살짝 깨문 후 몸을 돌려 일어섰다.“말 다 안 끝났잖아요? 제가 어쨌다고 이러시냐고요.”박한빈은 그녀를 따라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욕실로 가더니 문을 쾅 닫아 버렸다.그제야 박한빈의 목소리는 문밖으로 차단되었지만 여전히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성유리는 원래 화가 잔뜩 나 있었지만 표현숙을 생각하니 더 이상 박한빈과 다툴 기분이 아니었다.그래서 급히 씻고 나와 박한빈과 함께 호텔을 나섰다.“걱정 마십시오. 어젯밤에 이미 사람을 보내서 표현숙 씨한테 말씀드려 놨으니.”돌아가는 차 안,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리고 경찰서 쪽에서도 별다른 연락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문제 될 일은 없을 겁니다.”하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갑자기 박한빈이 어디선가 우유 한 병을 꺼내며 계속 말했다.“유리 씨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이거라도 마십시오.”성유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운전하던 기사 아저씨가 갑자기 푸근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두 분 부부 싸움이라도 하셨어요?”기사 아저씨는 현지인이었는지 말투가 살짝 어색했지만 웃음만큼은 푸근했다.성유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박한빈이 먼저 말했다.“네. 아내가 화가 났는데 아무리 달래도 풀리질 않네요.”“그럴 만도 하죠. 예쁜 여자들은 원래 성격이 까다로운
성유리는 원래 표현숙이 크게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왜냐하면 애초에 표현숙은 박한빈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어젯밤, 성유리가 갑자기 박한빈을 찾아갔으니 표현숙이 더욱 분노했을 것이 뻔하고 여겼다.하지만 뜻밖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표현숙은 두 사람을 한 번 쓱 바라보더니 가볍게 한 마디만 내뱉었다.“밥 먹자.”너무도 담담한 한마디.그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그래서 그녀는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히려 박한빈이 먼저 그녀의 손을 살짝 쥐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감사합니다.”표현숙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평소에는 두 사람만이 마주 앉던 작은 식탁.오늘은 거기에 박한빈이 하나 더 앉아 있었다.그의 손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왼손으로 젓가락을 다루는 데는 꽤 익숙해진 듯했다.다만, 작은 식탁이 박한빈에게는 너무 좁았다.길게 뻗은 다리를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해 보였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그때, 표현숙이 갑자기 몸을 돌려 두부찌개 한 그릇을 내왔다.예상치 못한 행동에 성유리는 다시 한번 놀랐다.“먹어.”표현숙이 담담하게 말했다.그러자 박한빈이 살짝 눈썹을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표현숙은 다시 이런 한 마디를 덧붙였다.“이밥 먹고 나면... 너희는 이만 떠나.”표현숙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엄... 엄마?”“알아. 나도 알아, 난 네 엄마가 아니야.”표현숙은 등을 돌린 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내 딸, 민설이는 이미 죽었어.”“엄마...”성유리는 표현숙을 손을 단단히 붙잡은 채 무엇인가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표현숙의 말은 다 사실이었다.성유리는 민설이 아니었다.그동안 받았던 사랑과 보살핌은 민설이라는 이름을 대신한 결과일 뿐이었다.그러니 지금, 성유리는 아무런 자격도 없이 이 여인 앞에 서 있었다.표현숙도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을 빼내고는 등을 돌려버렸다.하지
박한빈이 떠날 때만 해도, 표현숙은 분명 방에서 자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표현숙은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전등을 켜고 대문 앞에 앉아 있었다.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하지만 표현숙이 기다리는 그 사람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박한빈은 결국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그의 발소리에 표현숙은 귀를 기울였지만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민설 씨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박한빈이 먼저 말을 걸자 표현숙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이런 물음을 해본 적이 없는 박한빈은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심지어 자기 어머니와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그리고 눈앞의 이 여인은 그에게 있어 낯선 존재나 다름없었다.아니, 어쩌면 낯선 사람보다도 더 껄끄러운 관계였다.결국 박한빈의 손에 난 상처도 표현숙이 다치게 만든 것이었으니까.가능하다면, 그는 표현숙과 아무런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성유리가 가짜 엄마인 표현숙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과 혈연이 없더라도 그동안 표현숙이 성유리를 진심으로 보살펴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표현숙이 준 모성애 역시 가짜가 아니었다.만약 그들이 이대로 떠나 버린다면 성유리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박한빈은 성유리가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것이 박한빈이 이 어색한 순간을 감수하는 이유였다.그래서 다소 불편하더라도 표현숙에게 말을 걸었다.애초에 거절당할 것도 각오하고 있었다.표현숙이 자신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그런데 뜻밖에도 표현숙은 박한빈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민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설이는 세 살 때 아빠를 잃었어.”“행방불명됐지. 모두들 그 사람이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어.”“그래서 재혼하지 않았어. 혹시라도 그 사람이 돌아왔을 때, 내가 다른 사람과 살고 있으면 실망
표현숙은 마을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여자들 사이에서는 표현숙이 자신의 남편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젊었을 땐 다른 집 남자들을 유혹했다고도 했다.이런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행패를 부리는 여자라는 이미지가 생겨 그 후로는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사실 표현숙도 이 마을에 특별한 애착은 없었다.처음에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나중에는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이곳에 남았다.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마을에 남아 그 무엇도 기다릴 이유가 없어졌다.그런데 오늘, 표현숙은 처음으로 이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옆에 있는 박한빈은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으니까.그는 평소 위로의 말을 잘 하지 않았지만 애써 몇 마디를 꺼냈다.“사실, 제가 오늘 감사하다고 말한 이유는 성유리를 구해주신 거 뿐만 아니라... 성유리에게 정말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유리가 원했던 것들을요.”표현숙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외부 세계와는 다소 격리된 생활을 했던 표현숙이지만 박한빈의 경제적 여유를 알 수 있었다.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준 것이 분명히 좋은 것들일 텐데 그럼에도 자신이 성유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지 고민이었다.박한빈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성유리는 어릴 때 가족과 헤어졌어요.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되어 산골 마을에 팔려 갔고 그곳에서 양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리의 양어머니는 끝까지 그녀를 지키려고 했죠. 안타깝게도 그 어머니는 유리를 보호하다가 크게 다쳐 지금까지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박한빈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유리의 친부모는 유리가 15살 되던 해에 결국 찾아냈지만 이미 집에는 다른 여동생이 있었고 유리가 양아버지에게 당한 일을 알게 된 부모는 성유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유리는 저와 결혼했어요. 하지만 그때의 저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죠.”박한빈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 말했다
“당연히 너희들이 언젠가 도시에서 사는 삶이 지루해져서 돌아오고 싶으면 그 방은... 내가 너희를 위해 남겨둘게.”표현숙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박한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표현숙은 걸음을 멈췄지만 다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표현숙은 이미 떠났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이곳의 경제나 발전은 금성과 비교하면 말할 것도 없지만 공기는 정말 좋았다. 금성에서는 고개를 들어도 끝없이 이어지는 고층 빌딩만 보였고 달빛도 희미했다.그러나 이곳의 달빛은 매우 밝았다.박한빈은 한참 동안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한참 뒤, 천천히 일어나서 맞은편 집으로 걸어갔다.그는 몰랐지만 사실 박한빈이 표현숙과 대화할 때, 그 문 뒤에는 한 사람이 몰래 서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뒤에 서 있던 그 사람의 귀에 다 들렸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뺨에서는 차가운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한편, 연정우는 파티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파티는 작은 규모의 축하 모임이었다. 결국, 그는 지화의 인수 작업에서 한 작은 부분을 완성한 셈이었다.박한빈의 사망 소식 덕분에 지화의 많은 오래된 주주들이 별다른 노력 없이 그를 배신했고 연정우는 이미 상당한 지분을 인수했다.이제 곧 있을 주주 총회에서도 연정우는 정식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그쪽 상황은 이제 그의 손안에 있었다.그리고 결국 피라미드 꼭대기 위에 있던 사람이 연정우에 의해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갔다. 사실 연정우는 박한빈이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그가 이렇게 죽은 채로 일이 끝나버리면... 박한빈이 너무 쉽게 죽은 셈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박한빈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었다.그에게 모든 것을 하나하나 빼앗는 모습을 직접 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연정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예전에 자신처럼.그는 박한빈이 이렇게
연정우가 성유리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사씨 가문의 대저택이었다. 그날 성유리는 미리 핸드폰으로 해둔 녹음으로 자신을 협박하려 했다.연정우는 당연히 성유리의 뜻대로 되게 두지 않았다. 그는 본래 성유리와 차분히 대화하고 싶었지만 성유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휴대전화를 빼앗으려는 과정에서 성유리는 계단에서 떨어졌었다. 사씨 가문 사람들이 이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피가 사방에 흐르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연정우가 성유리를 차에 태우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연정우는 성유리를 숨기기 위해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고 했다.사실 그는 이 모든 계획을 미리 세워 놓았다.만약 성유리가 의식을 잃지 않았다면 그날 밤에라도 그녀를 데려가려고 했던 것이다. 차에 태운 후, 감시 카메라에 찍히지 않도록 다른 차로 갈아탔고 그 차의 목적지는 연정우의 어머니의 고향이었다.그곳에 성유리를 돌볼 사람을 이미 준비해 두었고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진행되었다.그러나 박한빈이 금성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은 이미 늦어버린 상태였다. 연정우는 그 차가 중간에 사고를 당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사고로 운전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자는 운전사 한 명뿐이었다. 차 뒷좌석에 있어야 할 성유리는 막상 흔적조차 없었다.연정우는 성유리가 차에서 튕겨져 나갔다고 생각했었다.차는 고속도로에서 떨어졌고 운전사의 시체는 온전치 못했다. 그래서 사실 이 시간 동안 박한빈뿐만 아니라 연정우도 성유리를 찾고 있었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리를 찾을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졌기에 연정우는 더 이상 그녀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 생각에 연정우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자신의 비열함을 알고 있었다.자신의 손은 이미 더럽혀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남아있던 아주 작은 진심 모두 성유리에게 바쳤다.사실 연정우는 정말로 성유리와 함께하고 싶었다.그래서 성유리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성유리가 눈앞에 서 있는
“안 먹을래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저 요즘 살쪄서 더 이상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요.”원래는 이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최근 내내 촬영장에 있다 보니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배우라는 직업은 극도로 자기관리가 필요한 일이었고 특히 대형 스크린에 얼굴이 나올 때는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됐다.주변 사람들과 비교해 보니 이제는 자신도 조금 더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성유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쥐었다.“누가 너 보고 살쪘다고 했어?”“아무도 안 그랬어요. 그냥 제가 스스로 조절하려는 거지.”“그럴 필요 없어.”“네가 어떤 모습이든 난 다 좋아. 그리고 나는 오히려 네가 조금 통통한 게 더 예쁜 것 같은데.”“음, 그러면 지금 저보고 살쪘다는 거네요?”“그게 아니라 내 말은...”“그럼 지금 제 모습이 안 예쁘다는 거예요?”박한빈은 어떻게든 해명해 보려고 했지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결국 말을 멈췄다.성유리도 물러서지 않고 그의 옷깃을 꽉 쥐었다.“빨리 말해요. 그 뜻으로 한 말 맞죠?”“아니라고.”“그럼 무슨 뜻인데요?”“내 말은 네가 어떤 모습이든 예쁘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정의하든 상관없어. 너는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고.”박한빈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네가 행복하면 다른 건 다 중요하지 않아.”성유리는 사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투정을 부린 것뿐이었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이런 진지한 대답이 돌아오니 순간 당황했고 얼굴에 스치는 미묘한 변화는 숨길 수 없었다.그런 성유리를 유심히 보던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왜 갑자기 말이 없어?”잠시 머뭇거리던 성유리는 결국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이미 다 말했는데 제가 뭘 더 말해야 돼요?”“그럼 이제 먹을 거야?”“먹을게요. 한빈 씨가 힘들게 사 온 건데 당연히 먹어야죠.”성유리가 망설
잠깐 기다리라는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30분을 하염없이 기다렸다.짧디짧은 시간 동안 박한빈은 곽단이 보내준 단체 사진을 이용해 성유리의 옛 선생님을 찾아냈다.그 시절 학교는 열악한 환경 탓에 대부분이 외부에서 파견된 교사들이었지만 다행히도 성유리의 담임은 아니었다.성유리의 담임선생님은 현재 50대가 넘었는데 그녀의 현재 신분이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박한빈은 오히려 그런 상황이라야 제대로 성유리의 과거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내일 선생님을 직접 만나기로 약속까지 잡아둔 상태였다.전화를 끊고 난 후, 그는 성유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어디에서 밥을 먹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머릿속은 온갖 상상으로 가득 찼다.‘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교통사고? 아니면 식당에서 폭발이나 화재라도?’‘아니면 누군가에게 납치라도 당한 건 아니겠지?’박한빈은 스스로도 이 생각들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았지만 쉽사리 통제가 되지 않았다.사 온 솜사탕이 천천히 녹아내릴 무렵,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성유리였다.손에 키를 들고 있는 그녀는 막 문을 열려던 참이었던 것 같았다.“어디 가려고요?”성유리는 박한빈과 눈이 마주치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박한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되물었다.“너 어디 갔었어?”“저요? 밥 먹으러 갔죠.”성유리는 이상하다는 듯이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전화로 말했잖아요?”박한빈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그렇지만 성유리는 그런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밀며 말했다.“아까 길에서 본 건데 이거 진짜 맛있더라고요. 한입 드셔볼래요?”성유리가 가리킨 건 이 지역의 특산 요리 같은 것이었다.떡과 비슷한 식감에 무말랭이와 파가 올려져 있었는데 맛은 의외로 달콤했다.박한빈은 성유리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마지못해 한입 베어 물었다.그런데 입안에서 퍼지는 독특한
“근데 그 박한빈이라는 사람은 다르더라. 내가 듣기로는 그 사람이 차고 있는 시계 하나만 해도 시내 아파트 몇 채 값이라던데? 그러니까 지서연이 나를 보고도 본척만척했던 거지. 저런 대단한 사람을 붙잡았으니 말이야.”“솔직히 내가 보기엔 걔가 너보다 더 예쁜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혹시라도 한번...”곽단은 더 이상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어서 바로 엄마의 말을 끊어버렸다.“엄마, 미쳤어? 그 사람 이미 결혼한 사람이야.”“결혼했으면 뭐 어때? 이혼하면 되잖아? 게다가 지서연 걔 원래부터 깨끗한 애도 아니었잖니. 내가 늘 말하지만 남자들은 이런 거 신경 많이 쓴다니까?”“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도 깨끗하지 않은 거네.”곽단이 냉랭한 태도로 반박했다.“엄마, 나도 전에 남자 친구 있었잖아. 잊었어?”“너... 그런 말 하니까 내가 더 화가 나잖아! 너 지금 그게 자랑이라고 떠들어? 네가 얼마나 천한 짓을 했는지 아니? 스스로 남자한테 들러붙어서 자기 모든 걸 줘 버리고 결국 어떻게 됐어? 걔는 널 차버리고 다른 여자랑 결혼했잖아! 결국 넌 공짜로 몸만 준 여자가 됐다고.”“누가 그래? 나도 그때 즐겼어.”“야! 너 진짜 내가 오늘 때려죽여야겠다.”여자는 참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곽단에게 던지려 했다.하지만 곽단은 익숙한 듯 그런 공격을 피하며 계속 말했다.“그리고 하나만 충고할게. 박 대표한테 기대하지도 말고 더 이상 헛된 망상을 하지 마.”“뭐라고?”“엄마는 그 사람이 그냥 심심해서 이곳에 온 거라고 생각해? 박 대표님은 지서연의 과거를 조사하러 온 거야. 남자가 자기 아내의 과거까지 그렇게 신경 쓴다는 건 그만큼 여자를 많이 아낀다는 뜻이야.”“그러니까 엄마는 차라리 엄마가 옛날에 지서연한테 너무 심한 짓을 하지 않았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어.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박한빈은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성유리가 방에 남겨둔 노트를 펼쳐보았다.사실 안에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적힌 숫자들이 눈
“사실 전 지서연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 돼요.”“이장님이 말하는 것들 다 믿지는 마세요. 서연이 양아버지는 정말 나쁜 사람이었죠. 겨울철에는 가끔 서연이를 집 밖으로 내쫓기도 했고.”“서연이가 중학교에 다닐 때, 한 번은 거의 옆 마을에 팔려 갈 뻔했어요. 그때 양아버지는 걔를 12살까지 키웠으면 이제 충분하다며 가족에게 보답할 때가 됐다고 했어요.”“서연이가 그때 그림 대회에 참가해서 상을 받고 상금을 받지 않았다면 아마 정말로 팔려 갔을 거예요.”“마을 사람들도 서연이에게 차가웠고... 이장님이 말한 것처럼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어.”“그리고 저도... 그 당시 지서연은 영양실조였지만 사실 꽤 예뻤어요. 남자들이 많이 좋아했죠. 그걸 보고 다른 여자들이 질투가 나서 서연이를 많이 괴롭혔어요. 저도 그중 하나였고...”“그래서 제가 말한 거예요. 서연이에게 사과해야 한다고.”“지금 서연이가 잘 살고 있다는 걸 보면 저는 정말 기뻐. 박 대표님도... 서연이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겠죠?”곽단은 한 번에 많은 말을 내뱉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에게서 무엇을 얻으려면 과거의 모든 것을 지우고 마을 사람들처럼 자기가 좋은 사람인 척 말을 꾸며야 한다는 것을.그러나 곽단은 박한빈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그것을 그대로 믿지 않을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리고 지서연은 지금 박한빈의 아내였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돌아가서 지서연에게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곽단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이 사진은 제가 가지고 있어도 별로 의미 없으니까 박 대표님에게 드릴게요.”잠시 뜸 들이던 곽단이 계속 말했다.“그리고 박 대표님께서 서연이한테 저 대신 미안하다는 말 좀 전해주세요.”“네.”박한빈은 짧은 대답만 내뱉었다.그때, 곽단의 어머니가 뒤에서 나왔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고는 잠시 놀랐다가 이내 눈이 반짝였다.그러나
그런 날들을 성유리는 대체 홀로 어떻게 버텨낸 걸까?배도 제대로 못 채우고 하루하루 지석민의 협박 속에서 벌벌 떨며 살아야 했던 그 시간 동안 성씨 가문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그들은 성유정을 진짜 딸처럼 아끼고 무용과 피아노까지 가르치며 키웠다.그래서 결국 성유정은 성유리보다 훨씬 더 귀한 집 딸처럼 보이게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유리의 촌스럽고 무례한 행동을 비웃었다.하지만 아무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성유리는 단 한 번도 자기 인생이 원래는 그런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걸.지금까지 살아온 그 10년이 사실은 애초에 잘못된 자리에 있었던 삶이란 걸.그때, 귀신처럼 성유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박한빈은 마침 식탁에 앉아 있던 중이었다.주변 사람들은 잔을 들고 연신 술을 따라주며 극진히 대접해 줬고 박한빈은 그들이 무슨 속셈인지 이미 훤히 알고 있었다.길을 닦고 학교를 짓자는 말은 그냥 명분일 뿐, 그들이 지금 이렇게 그에게 들러붙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어떻게든 성유리와 인연을 맺어 박한빈으로부터 실질적인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그게 이들의 진짜 목적이었다.박한빈은 이런 상황이 익숙했기 때문에 능숙하게 응대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이름이 뜬 화면을 보는 순간, 문득 정신이 흐트러졌다.곧바로 정신을 다잡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지금 어디예요?”수화기 너머 들리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잠시 망설였다.“밖에... 있어.”“누구랑 있는데요?”마을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는 밖으로 나와 조용한 자리를 찾아도 완전히 막을 수 없었고 당연하게도 수화기 너머로 그 소리가 성유리에게 전해졌다.고스란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의아한 듯 물었다.“왜 이렇게 시끄러워요?”“음... 공사장 근처에 있어서 그래.”박한빈은 성유리에게 자기가 이 마을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크게 고민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내뱉었다.“그럼 거기서 밥 드셨겠네요?”다행
“저기요! 거기 들어가면 안 돼요!”곽단이 급하게 뒤에서 소리쳤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집 앞의 잡초가 워낙 무성했기 때문에 안쪽도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박한빈은 이미 집 안의 방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발길을 옮기려 할 때마다 잡초가 앞을 가로막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그때 뒤에 있던 곽단이 조심스레 다가와 말했다.“혹시 뭐 찾으시는 거예요? 근데 이 집은 몇 년 전부터 방치된 곳이라 값나가는 건 다 누가 가져갔을 텐데... 이제 남은 건 하나도 없을걸요?”박한빈은 여전히 한마디 대꾸도 없이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그리고 곧장 작은 골목을 돌아 집 옆쪽으로 향했다.다행히 창문은 이미 깨져 있었기에 그는 무리 없이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실내는 예상한 그대로였다.오랜 시간 비워져 있던 만큼 바닥이며 창틀이며 온통 먼지투성이였다.한 바퀴 방안을 둘러본 후, 박한빈이 마지막으로 시선을 멈춘 곳은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 하나였다.오래되어 삐걱거리는 책상이었는데 어딘가 학교에서 쓰던 책상을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그 위엔 천 조각이 덮여 있었고 휴대폰 손전등을 비추어보니 작은 꽃무늬가 박혀 있었다.그리고 책상 옆 바닥에 내팽개쳐진 책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박한빈은 몸을 숙여 책들을 주워들었고 마침 그때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문이 열리면서 쌓였던 먼지가 우수수 쏟아졌고 그 소리까지 들려올 정도였다.뭔가 이상한 기분에 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 순간, 앞장선 남자가 급히 다가오며 소리쳤다.“이런 데를 들어오시게 어떡해요! 미리 말씀만 해주셨으면 제가 먼저 정리라도 해놨을 텐데.”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그제야 남자는 뭔가 깨달은 듯, 급히 손을 내밀었다.“아, 제가 소개를 깜빡했습니다. 저는 이 마을 이장, 지세찬이라고 합니다.”박한빈은 그와 짧게 악수를 나누며 대답했다.“그냥 궁금해서 한번 들어와 봤습니다.”“이 집은
화면 속 사람이 웃는 장면에 맞춰 가게 안의 여자도 따라 웃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어디가 웃기는지는 박한빈은 알 수 없었다.“거기서 왜 멍하니 있어?”여자는 화가 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카운터 위에 있던 장난감 상자 하나를 그대로 들고 상대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손님 온 거 안 보여!?”안쪽에 앉아 있던 여자는 원래 그 말조차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있었다.그렇지만 물건이 얼굴에 부딪히고 나서야 박한빈을 힐끔 쳐다보았다.그런데 단 한 번의 눈길 이후, 그녀의 얼굴빛이 확 바뀌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혹시... 당신은 그...”“아까 말했잖아. 이분은 지서연 남편, 큰 회사의 사장님이시라고!”여자는 다가가 딸의 팔을 세게 꼬집은 뒤, 박한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이쪽은 제 딸 곽단이에요. 서연이랑 같은 반 친구였답니다.”박한빈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그럼 제가 바로 이장님께 알리러 갈게요. 다만 지금 이 시간이면 다들 낮잠 자고 있을 수도 있어서 제가 직접 집마다 다녀볼게요. 곽단, 너는 얼른 사장님 모시고 마을 한 바퀴 돌면서 안내 좀 해드려!”이름이 불린 곽단은 마지못해 몇 걸음 앞으로 나섰는데 박한빈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잠시 후, 곽단은 안내를 하려는 듯 앞장서며 천천히 입을 뗐다.“따라오세요.”박한빈은 별말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사실 두 사람이 굳이 안내하지 않아도 그는 처음부터 이 마을을 둘러볼 생각이었다.애초에 그것이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가이드’가 하나 생겼다 해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뉴스에서 본 적 있어요, 사장님에 대한 기사요.”마을을 걷던 중, 곽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진짜로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어요…”“그 사람 집은 어딥니까?”곽단은 뜻밖의 질문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쳐다봤다.“당신 옛 동창 말입니다.”박한빈은 성유리라는 이름을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았고 지서연이라고 부르기도 싫었기에 그냥 동창이라는 단어로
여자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그저 침묵만 유지했다.하지만 그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 존재감만으로 주변 공기가 묵직해졌다.여자도 그 기운을 감지한 듯, 얼굴에 띠고 있던 미소도 서서히 사라졌다.처음에는 자기가 너무 성급하게 말을 꺼냈나 싶었지만 순간,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좋습니다.”“다만 그 사람은 이쪽에 아직 일이 있어서요. 지금은 저희와 함께 갈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먼저 다녀오는 게 좋겠네요.”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여자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좋아요, 좋아요!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원래 여자는 성유리 이야기를 미끼 삼아 박한빈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했었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순순히 따라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게다가 여자 입장에선 성유리가 오든 말든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여자가 진짜 원하는 건, 오직 박한빈이 가진 권력이었으니까.지금처럼 성유리를 건너뛰고 박한빈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아까 하신 말씀 중에... 유리랑 이웃사촌이었다고 하셨죠?”가는 길에 박한빈이 먼저 물었다.여자는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그러다 잠시 뒤에야 박한빈이 말한 성유리가 예전에 자신이 말했던 그 이웃임을 떠올렸다.여자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 맞아요! 우리 집이랑 서연이 집이 바로 옆에 있었거든요! 어릴 때는 유리가 아빠한테 자주 맞고 저희 집으로 도망 오기도 했어요! 제가 그럴 때마다 우유랑 빵도 챙겨줬답니다!”물론 이건 전부 여자가 직접 지어낸 이야기였다.어차피 지금 이 자리에 성유리가 없으니 반박할 사람도 없으니 뭐라 말하든 여자의 마음대로였다.박한빈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여자는 그런 박한빈을 힐끗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제 딸도요. 전에 서연이랑 같은 반이었어요! 둘이서 꽤 친하게 지냈다니까요. 근데 서연이는 워낙 특별한 집안 출신이잖아요. 그래서
여자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아직 촬영이 시작되기 전이라 현장은 조용했다.그렇기에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성유리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즉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리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내가 무슨 말을 할지...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여자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제는 재벌가 사모님이시라면서? 재벌 집안은 체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과거에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들 알게 되면 어떨까? 그때도 지금처럼 네 곁에 있어 줄까?”말을 마친 여자는 성유리를 시험하듯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의 눈에는 그 어떤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그 조용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여자의 심장은 세차게 요동쳤다.마치 자신이 ‘위협’한 게 아니라 오히려 판단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여자는 재빨리 입을 열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리가 먼저 입을 뗐다.“좋아요. 그럼 그렇게 해보세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그 태연한 반응에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그저 그대로 뒤돌아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러나 이건 여자의 입장에선 명백한 도발이라고 느껴졌다.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거기, 뭐 하는 거야?”감독이 여자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몇 번이나 불렀는데 왜 대답이 없어? 빨리 자리로 돌아와!”여자는 잠시 멈칫하다 곧장 대꾸했다.“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되는데? 나 안 해!”말을 마친 여자는 곧바로 촬영장을 나와 버렸다.그렇지만 몇 걸음 채 가지도 않아 그녀는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그래서 곧장 택시에 올라탔고 그녀가 향한 곳은 박한빈이 머무는 호텔이었다.호텔 앞, 여자는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들고 곧장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