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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6화

작가: 송진
박한빈이 직접 하늘이를 재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평소 성유리가 하던 것처럼 동화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어릴 때 한 번도 동화책을 들으며 잠든 적이 없었고 누군가를 위해 읽어준 적도 없어서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어색하고 딱딱했다. 그래도 하늘이는 이미 울다 지쳐 있었기에 오래 지나지 않아 곧 깊이 잠들었다.

박한빈은 잠든 하늘이의 옆에 한동안 앉아 있다가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늘 하늘이가 자신과 닮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순간, 아이에게서 더 많이 보이는 건 오히려 성유리의 모습이었다.

눈과 얼굴의 윤곽, 그리고 화를 낼 때의 모습까지 성유리와 거의 똑같았다.

박한빈은 눈을 감고는 자신의 감정을 다잡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침실로 돌아가니 예상대로 방 안은 캄캄했다.

불을 켜고 드레스룸으로 이어진 작은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

이곳은 원래 침실에서 확장한 공간으로 처음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 그와 성유리의 옷을 정리해 두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유리를 위해 산 옷들이 늘어나면서, 결국 그의 공간 일부까지 내주게 되었다.

이제 바라보면 자신의 수트 옆으로 성유리의 형형색색의 원피스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박한빈은 그 옷들을 오랫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차가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감촉이었다.

...

“연 대표님!”

뒤에서 들려온 공손한 목소리에 연정우의 걸음이 멈췄다.

몸을 돌리자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한껏 비위를 맞추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연 대표님!”

연정우는 상대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죄송합니다만, 누구시죠?”

“역시 바쁘신 분이라 저 같은 사람은 잊으셨군요. 저는 장수아입니다! 지난번 회의 때 뵈었잖아요!”

연정우는 남자의 말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요즘 회의가 많다 보니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괜찮습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연 대표님께서 요즘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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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유리가 들고 온 것은 아침 일찍 정성껏 끓인 죽이었다.새벽부터 장에 나가 사 온 닭고기와 표고버섯을 넣고 쌀과 함께 뚝배기에서 30분 넘게 고아 낸 것이었다.뚜껑을 여는 순간, 은은한 향이 병실 가득 퍼졌다.그 순간, 박한빈은 문득 그날 밤 성유리가 건넸던 그 한 그릇의 면을 떠올렸다.그는 평생 맛있는 음식을 못 먹어본 적과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음식은 그저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 별다른 특별한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하지만 그날 밤, 단출한 면 한 그릇 앞에서 박한빈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왜냐하면 드디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성유리를 찾았으니까.한때 박한빈은 성유리가 영영 사라졌다고 믿었다.더 이상 세상 어디에도 그녀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확신했던 순간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성유리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존재였는지.사람들이 흔히 말하지 않던가.[한 번 빛을 본 사람은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갈 수 없다.]박한빈은 원래 그런 어둠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심지어 그의 어머니조차도 박한빈에게 따뜻한 한 끼를 만들어 준 적 없었다.어릴 때부터 박한빈은 그런 인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성유리가 나타났었다.그녀는 마치 박한빈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마지막 퍼즐 조각 같았다.성유리가 박한빈을 찾아왔었고 늘 그의 곁에 있었다.그녀야말로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온전한 존재로 만든 것이다.그런데, 그 완전함을 또다시 잃으라고?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박한빈은 천천히 손을 뻗어 성유리가 내민 따뜻한 죽 그릇을 바라보았다.그러자 또다시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멍하니 죽만 바라봤다.그러다 성유리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렸다.“이거... 안 좋아하세요?”성유리의 손이 살짝 움츠러들었다.그러자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누가 그랬습니까?”되묻는 박한빈의 목소리는 어딘가 살짝 쉰 듯했다.‘내 착각일까?’성유리는 박한빈을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9화

    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이 그의 눈 속에 비치는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박한빈이 가로등 아래 서서 미소 지을 때마다, 그 모든 순간마다 그를 향한 감정은 더 이상 불확실하지 않았다.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눈을 감아도 박한빈의 얼굴이 생각났고 어둠 속에서도 쉽게 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아주 예전처럼 수없이 반복해 본 일처럼.비록 기억 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박한빈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은 격하게 뛰었다.이 감정은 낯설었지만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성유리는 이미 박한빈을 좋아하고 있었다.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를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그날 밤, 박한빈은 결국 병원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외부에 철저히 비밀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이미 이 지역에서는 박한빈의 존재가 알려진 상태였다.윤도준의 보고를 받은 서장은 곧바로 사람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찾아왔다.“차라리 시내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현 서장은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이곳 환경은 좀...”“괜찮습니다.”박한빈은 오히려 아주 담담했다.“여기서도 충분합니다.”“그러면 제가 몇 사람을 배치해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아닙니다.”현 서장의 말을 박한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아직 한 손은 멀쩡하니 그런 자원 낭비는 필요 없습니다.”“하지만...”박한빈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기에 먼저 몸을 일으켰다.“이번 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행방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신경 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그야 당연한 일입니다!”현 서장은 즉시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병원 쪽도 이미 단속을 해놨으니 정보가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박한빈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몇 마디 더 나눈 뒤, 사람들을 보냈다.그러자 병실이 다시 조용해졌고 그는 천천히 시계를 보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8화

    이번에는 성유리도 미처 말리지 못했다.할머니의 괭이가 내려오는 순간, 박한빈은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다.그러자 방금 병원에서 새로 감싼 상처가 다시 터져버렸다.순간,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아무리 박한빈이라도 그 순간 찾아온 극심한 통증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고 얼굴은 한순간에 굳어졌다.“엄마!”성유리는 다급하게 뛰어가 할머니를 붙잡았다.그러나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은 할머니는 성유리를 밀쳐내며 다시 박한빈을 공격하려 했다.그때, 신고를 받고 출동한 윤도준이 도착했다.박한빈의 피 묻은 팔을 보자 윤도준은 눈앞이 아찔해졌다.그래서 즉시 사람들을 시켜 할머니를 제지했다.“뭐 하는 거야! 이놈들아, 당장 이거 놔!”할머니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소리를 질렀다.결국 윤도준은 고민 끝에 날뛰는 할머니를 경찰서로 데려가려고 했다.그러나 박한빈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일단 저부터 병원에 데려다주십시오.”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져 있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하지만...”“저분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유리를 힐끗 본 뒤, 이런 말을 덧붙였다.“제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니 일단 저부터 병원에 데려다주시죠.”피해자인 박한빈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윤도준도 더는 강하게 나갈 수 없었다.게다가 할머니가 연세도 많고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경찰서에 데려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박한빈이 직접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오히려 윤도준은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의 요청에 따르기도 결정했다.서둘러 사람들을 시켜 마을 주민들을 해산시킨 후, 그는 박한빈을 차에 태웠다.하지만 피를 흘리고 있는 박한빈과는 달리 할머니의 분노는 여전히 사그라 들지 않았다.오히려 경찰차가 떠나려 하자 윤도준이 박한빈을 도망시키려는 거라 생각한 듯, 경찰차를 향해 욕설을 몇 마디 쏟아내기도 했다.결국 옆에 있던 성유리가 필사적으로 할머니를 붙잡아야만 했다.겨우 집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7화

    “저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같이 가서 식사 하시겠습니까?”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그러나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윤도준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박한빈이 멀리서 가볍게 손짓을 한 뒤 그대로 성유리를 차에 태웠다.이 차는 어제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차체는 마을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온통 흙탕물로 뒤덮여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차가 한참을 달린 뒤에야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엄마가 알게 되면 어떡해요!”“걱정 마십시오. 혹시 유리 씨한테 화를 내면 제가 가서 설명할 테니까.”“아마 엄마는 분명 당신을 때릴 거예요.”박한빈은 여전히 운전대를 잡은 채 성유리를 슬쩍 바라보았다.“왜요? 걱정되십니까?”“당연히 그건 아니에요.”성유리는 즉각 반박하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당신...”놀란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가만히 있으세요. 지금 저 운전 중이니까.”“게다가 손에 아직 상처가 있습니다.”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고개를 숙여 보니 그의 흰 셔츠 아래로 여러 겹의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리고 그 아래로 스며 나온 붉은 피가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아직 안 나았어요?”성유리는 무심결에 눈썹을 찌푸렸다.“걱정 마십시오. 안 아픕니다.”박한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런 그를 한참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그러나 박한빈의 손이 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이상한 감각이 퍼졌다.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더니 결국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읍내로 데려간 것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장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그녀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가 자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6화

    할머니는 마을에서 작은 땅을 갖고 있었다.예전에는 옥수수를 심었지만 몇 년 전 이웃 마을에서 계약 농사를 제안하면서 딸기로 바꿨다.그러니 지금은 딸기 씨앗을 심을 시기였다.아침부터 소란을 피운 할머니를 성유리는 억지로 집에서 쉬게 하고 자신이 대신 밭일을 맡았다.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쪼그려 앉아 씨앗을 심던 성유리가 잠시 눈을 감고 쉬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지금 뭐 하십니까?”고개를 들어보니 박한빈이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순간 얼어붙었고 이내 허둥지둥 그의 손을 밀어냈다.그리고는 황급히 몇 걸음 물러나 박한빈과의 거리를 벌린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저... 근데 왜 여기 계세요?”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절 무서워하시는 겁니까?”“아... 아니에요!”성유리는 서둘러 부정했다.마치 그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말이다.“다만... 엄마가 당신이랑 같이 있는 걸 싫어해요.”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엄마가 화낼 거예요.”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성유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왜죠? 그쪽 어머니는 제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네.”“하지만 유리 씨는 제가 나쁜 놈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요?”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을 따르는 겁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의 질문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혼란스러운 건지 알 수 없지만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게다가 유리 씨가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모를 텐데 말이죠.”“그럼... 그건 속이는 거잖아요.”“속이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성유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박한빈 또한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여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5화

    박한빈은 많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환경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더구나, 이번에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창문 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누군가를 쫓아내고 있었다.이미 백발이 성성했지만 기운만큼은 넘쳤다.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몰아내는 동안, 마을 안팎 사람들이 소란에 놀라 몰려들었고 할머니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까지 싸잡아 한바탕 호통을 쳤다.그 뒤에는 성유리가 조용히 서 있었다.마치 어미 닭에게 보호받는 병아리처럼.주변을 궁금한 듯 둘러보면서도 절대 할머니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박한빈이 그 장면을 바라보던 순간, 성유리도 마침 그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려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소동이 한참 이어진 끝에, 할머니는 성유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쾅!그 문이 닫히는 소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컸다.그러고 나서야, 할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겁먹지 마라. 저런 놈이 뭐라고!”“우리 딸처럼 좋은 아가씨가 결혼할 상대를 못 찾을 것 같아? 걱정 마. 엄마가 더 좋은 사람 골라줄 테니!”“엄마... 사실 저는 결혼 서두를 생각 없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말했다.“그건 안 돼!”할머니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랐다.“여자는 크면 시집가야 하는 법이야.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으면 어쩌자는 거냐?”“게다가 내가 지금은 네 곁을 지켜주지만 언젠가는 나도 떠나야 한다. 그때 네가 혼자 남으면 누가 널 지켜주겠어?”엄마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아직 화가 덜 풀린 할머니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하지만 문밖의 사람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안녕하세요.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이번엔 또 누구야?”할머니는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단정한 흰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4화

    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황급히 돌아섰는데 마치 얼굴에 ‘당황’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은 듯했다.할머니는 가느다란 눈을 좁히며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다녀온 거야?”“저... 밖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서 좀 보고 오느라...”“고양이?”할머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이 마을에 고양이 몇 마리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해?”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할머니도 깊이 따지지는 않았다.“얼른 자라.”그저 짧은 말만 남긴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성유리도 조용히 뒤따라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방 창문은 길 건너편 박한빈이 머무는 집과 마주 보고 있었다.그곳의 창문에는 어제 새롭게 창호지를 발라놓아 이제 더 이상 구멍이 나 있지 않았다.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빛 조명은 성유리의 방 조명과 똑같은 따뜻한 색이었다.성유리는 그 창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누워 잠을 청했다.그렇게 밤이 지나갔다.할머니는 원래 잠이 적었기에 해가 뜨기도 전에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침구를 정리한 후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계란을 깨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분명 할머니의 것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순간 긴장했다.그래서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나섰다.그러나 마주한 사람을 보고는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아주머니, 어쩐 일이세요?”“너희 어머니 계시니? 볼 일이 있어서 왔어.”여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아마 밭에 계실 거예요. 불러올까요?”“그래, 다녀와.”여자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그러더니 성유리를 한 번 훑어보곤,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별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마침 그 순간, 할머니가 밭에서 돌아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753화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에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흠, 듣고 보니 꽤 재미있을 것 같군.”“그럼 이 일은 네게 맡길게.”“뭐라고?”“너도 알다시피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그리고 사씨 가문 쪽도...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내가 직접 손을 대긴 어려워.”“예전부터 네가 한국 시장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지금이 바로 기회 아닌가?”에릭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박한빈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이 마을 사람들은 일찍 잠드는 편이었다.지금은 사방이 조용했기에 그 작은 소리조차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었다.“누구십니까?”아직도 업무 모드였던 탓에 목소리에는 저절로 냉기가 서려 있었다.그랬더니 문밖에서 들리던 노크 소리가 멈췄다.하지만 대답은 없었다.불안해진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연정우 씨가 또 사람을 보낸 걸까?’그는 반사적으로 방 안을 둘러보며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문밖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저예요.”박한빈은 순간 멍해졌다.그리고는 에릭이 뭐라고 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향했다.느슨하게 걸린 낡은 나무문을 밀어 열자 문 앞에는 성유리가 서 있었다.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 한 그릇이 들려 있었고 발치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어딘가 머뭇거리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는 이내 시선을 떨구며 덧붙였다.“저... 저녁을 드셨는지 몰라서요. 그리고 여기 불 때는 곳도 없길래... 그냥 면을 좀 끓였어요. 따뜻한 물도요.”박한빈은 그녀가 들고 있는 그릇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둔탁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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