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박한빈이 탄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고 그는 직접 차를 몰아 서향시로 향했다.장장 다섯에서 여섯 시간의 여정 동안 그는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사실 처음엔 사람들을 데리고 올까 고민했었다.하지만 연정우는 분명히 말했다.“혼자 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보게 될 건 성유리의 시체일 겁니다.”박한빈은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지만 성유리에게는 조금의 위험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어차피 후속 조치는 이미 다 준비해 둔 상태였다.만약 정말로 자신이 여기서 죽는다면 연정우 역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그가 사라진 순간 연정우를 지탱해 온 배후 세력도 붕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성유리는 풀려나게 될 것이다.만약 성유리가 아직 살아 있다면. 또 만약 이미 끔찍한 일을 당한 상태라면... 박한빈은 그녀를 혼자 두고 떠나게 놔둘 수 없었다.함께 죽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박한빈 자신도 이렇게 행동하는 게 무책임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특히 그의 어머니와 하늘이를 생각하면 말이다.하늘이가 이제야 자신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는데 지금 떠나버린다면 정말 무책임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하지만 그 모든 것 이전에 그는 박한빈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성유리의 남편이었다.그들은 맹세했다.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하겠다고.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 약속을 나눴다.그래서 성유리를 혼자 남겨둘 순 없었다.그렇게 하면 그녀 혼자 너무 외롭지 않은가?차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가로질렀고 도시의 번화함과 북적이는 거리들이 모두 뒤로 밀려났다.GPS 위치를 따라가던 끝에 드디어 그곳이 보였다.낡고 쇠락한 마을.버려진 땅.눈앞에 펼쳐진 건 그야말로 황량함 그 자체였다.차를 멈추고 전화를 걸려는 순간,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소리.그건 바로 바닥을 긁는 야구 방망이 소리였다.그 소리를 들은 박한빈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그 시각, 집 안에서 몇 명의 남자들이 걸어 나왔다.새벽이 막 밝아오기 시작한 시간. 그들이 손에
그래서 성유리는 정말로 이미 세상을 떠난 건가?그녀가 이리도 허망하게 죽었다고?‘말도 안 돼.’하지만 죽은 게 아니라면 왜 그토록 찾아 헤매도 성유리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던 걸까?박한빈이 이미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과 수단을 동원했는데도 아무런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그리고 더 중요한 건 성유리가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단 한 번도 박한빈에게 신호를 보내지 않았겠는가?이 가능성에 대해선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다만, 차마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그러나 이제는 그 가설이 사실임이 증명된 셈이었다.박한빈을 지탱해 오던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이 바로 이 순간, 완전히 무너졌다.그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그 순간, 놈들이 움직였다.손에 든 무언가가 그를 향해 내리쳤다.이미 박한빈의 모든 감각이 마비된 상태였고 살고자 하는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럼에도 칼이 몸에 닿기 직전,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막아냈다.날카로운 칼날이 팔에 파고들었고 너무도 심해 숨이 막힐 듯한 통증이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그리고 그 순간, 몸이 다시 반사적으로 움직였다.앞에 있던 남자를 발로 걷어찬 박한빈은 곧바로 차 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뛰어올랐다.“놓치지 마! 저놈 잡아!”남자들이 소리쳤다.하지만 박한빈은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무표정하게 시동을 걸었고 붉은 피가 계속해서 팔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핸들을 꽉 잡았다.그리고 그대로 엑셀을 밟았다....“하루가 멀다 하고 뭐 이런 일들이 터지는 거야!”윤도준은 전화를 끊자마자 짜증 섞인 욕설을 내뱉었다.“유신촌? 거기 몇 년 전에 이미 다 철거됐잖아? 거기에 대체 누가 남아 있어서 싸움을 벌이는 거야? 설마 또 그 불량배들 짓이야?”사무실 안 누구도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윤도준이 더 말을 하려던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전화를 받은 윤도준은 숨을 거칠게
과다 출혈을 막기 위해 그리고 상사들이 자신의 실수를 추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윤도준은 부하들에게 박한빈을 자신의 사무실로 데려가게 했다.한쪽에서는 질문을 하면서 동시에 그들은 박한빈의 다친 팔에 응급 처치를 해주었다.그의 상태를 정리하는 동안, 출동했던 동료들이 두 사람을 데리고 경찰서로 돌아왔다.“뭐 하는 거야? 우리 정말 합법적으로 결혼하려고 했다고! 난 신부 어머니한테 예물까지 줬어! 근데 경찰서로 끌고 오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남자는 걸어오면서도 계속 소리를 질렀다.윤도준은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옆에 있던 동료에게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죠?”“아, 구청에서 신고한 건입니다.”동료는 간단히 설명했다.“이 두 사람이 오늘 혼인 신고를 하러 갔는데 신부의 신분증 정보와 실제 신분이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이도 맞지 않았고요.”“게다가 신부라는 여성이 본인의 전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상태가 약간 둔한 듯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청 직원들이 불법 인신매매 가능성을 의심하고 신고한 겁니다.”설명을 듣고 난 윤도준은 그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그런데 여자의 얼굴이 예상보다 더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낡은 옷을 입고 있고 머리도 흐트러져 있었지만 맑은 피부와 단정한 이목구비는 분명 이곳 토박이 같지 않았다.그러니 구청 직원들이 의심할 만도 했다.윤도준은 그녀를 몇 번 더 훑어본 후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지시했다.“철저히 조사합시다. 그리고 사무실 안에 다른 사람도 많으니까 저 남자 좀 조용히 시키고.”명령을 마친 뒤, 그는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에서는 이미 박한빈의 팔에 대한 응급 처치가 끝난 상태였다.한편, 진술을 담당하던 경찰이 작성한 서류를 윤도준에게 건넸다.한 차례 훑어보던 그는 눈살을 찌푸리다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박 대표님, 그러니까... 실종된 아내를 찾으러 이곳까지 오셨다는 말씀이십니까?”“네.”“원래 이 지역 출신이신가요?”“아닙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차분하게 말을 마쳤다.그 모습에 윤도준조차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윤도준 또한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안심하세요! 제가 꼭 돕겠습니다! 아, 아니죠. 원래 저희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걱정 마세요!”그러면서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곧이어 박한빈의 휴대폰 속 사진이 출력되었다.사진을 다시 마주한 순간, 윤도준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어딘가 낯이 익었고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윤도준 씨?”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윤도준은 여전히 박한빈이 사무실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아, 맞다. 박 대표님, 이쪽으로 오세요. 호텔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박한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윤도준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뻗어 문을 열어 주었다.한편, 방금 경찰서로 끌려온 남자는 여전히 소리치고 있었다.“아니, 우리는 정말 자발적으로 결혼한 거라니까요! 나랑 이 사람 같은 마을에서 자랐어요! 어릴 때도 얘네 집에서 밥 먹은 적도 있다니까요!”“이번 결혼도 양가 부모님 다 동의하셨고 어제 막 신부 집에 예물까지 보냈어요! 200만원 이나 줬다고!”“설아, 너도 빨리 말해 봐! 내 말이 다 사실이지?”여자는 마치 명령을 받은 것처럼 남자의 옆에서 고개만 끄덕였다.“진정하세요. 문제는 현재 민설 씨 신분과 서류상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 신분증상의 출생 연도를 보세요. 서류상 민설 씨는 지금 마흔 살이어야 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마흔 살처럼 보이나요?”경찰이 그들 맞은편에서 차분히 설명했다.남자는 여전히 뭐라고 변명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더 이상 들을 생각이 없었다.그저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걸어 나갔고 막 로비를 빠져나가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서훈이었다.그때 그 상황에서, 박한빈은 절대 이길 수 없었다.경찰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창문이 깨진 후엔 결국 그들과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
그의 휴대폰 벨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고 옆에 있던 윤도준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그녀 옆에 앉아 있던 남자는 여전히 흥분한 상태로 설명하고 있었지만, 박한빈의 귀에는 그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의 시야에는 오직 앞에 있는 그 여자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멀리 보이는 여자는 남자 옆에 앉아 있었는데 깨끗하지만 낡아 보이는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거기에 더해 머리를 낮게 묶고 있었다. 하지만 박한빈이 서 있는 위치는 그녀와의 거리가 꽤 멀었다.그러나 여자의 모습은 마치 박한빈의 뇌리에 새겨진 것 같았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두 주먹을 꽉 쥐었으며 심지어 어깨까지 떨리고 있었다.“박한빈 씨?”윤도준은 계속 말을 걸고 있었지만 박한빈이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이 불렀다.그럼에도 박한빈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오직 여자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박한빈 씨, 당신...”윤도준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했을 때, 박한빈은 이미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발걸음이 망설이는 듯 아주 느리게 내디뎌졌다.그러나 점점 그의 발걸음은 빨라졌다.박한빈이 그 테이블 앞에 도착했을 때, 그의 발걸음은 이미 비틀거릴 정도로 빨라져 있었다.그리고 그는 마침내 멀리서 보이던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봤다.자신이 밤낮으로 그리워하던 그 얼굴이 드디어 눈앞에 펼쳐졌다. 36일 동안의 공백 끝에.박한빈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고 있었고 입술까지 바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그는 여자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성대와 다른 모든 감각들이 이 순간 모두 사라져 버린 듯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박한빈은 오직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그토록 바라던 그녀는 살이 빠진 듯 피부도 조금 까매졌고 이마에는 못 보던 상처 자국도 생겼다. 단 한 번의 시선으로도 박한빈은 그녀의 모든 변화를 알아차렸다. “당신 누구야? 뭘 하려는...”남자도 그를 발견하고 이상하다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사람은 내 와이프야. 우리 오늘 혼인신고 하러 가기로 했다고! 이 사람 어머니도 이미 예물을 받아 갔어.”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박한빈의 정신도 그 순간 제대로 돌아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마치 그녀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으로. 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을 전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를 다시 만났는데도 성유리는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손가락을 잡고 몸부림치며 벗어나려고 했다. “성유리.”박한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너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그러나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이빨을 꽉 악문 채 그녀를 잡아당겨 물어보려는 순간, 성유리는 비명을 지르며 놔달라고 외쳤다.그 날카로운 목소리에 박한빈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아야 했다. 그러자 성유리는 즉시 뒤로 물러나 그 남자 뒤에 숨었다. “봤어? 이 사람은 당신을 전혀 모른다고. 아내? 내 와이프가 예뻐 보여서 꼬신 거지? 겉보기엔 멀쩡한 사람 같은데 이렇게 무례할 줄이야.”남자는 매우 화가 난 듯 보였고 담방이라도 마치 박한빈과 싸우려고 달려들 것 같았다. 하지만 박한빈은 그를 전혀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그 남자 뒤에 있는 성유리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감히 박한빈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앞에 있는 남자의 옷자락을 꽉 잡고 있었다.박한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여기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윤도준이 급히 상황을 정리하며 동료를 돌아보았다.“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여성분 신원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빨리 확인해 보십시오.”“그리고 여성분의 가족도 즉시 연락하세요!”...박한빈의 손에 있던 상처가 점점 크게 벌어져 피가 붕대를 적셨지만 그는 이미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는 그저 제 자리에 앉아 시선을 성유리에게 고정했고 그 시선은
“이 근처에 병원 없습니까?”박한빈의 목소리엔 이미 짜증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유전자 검사 한번 해보면 바로 알 텐데?”“그렇죠. 그런 방법이 있습니다.”윤도준은 이제서야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는지 그들을 병원으로 안내할 사람을 준비하려 했다.그런데 순간 염우섭이 불만을 표출했다.“안 돼. 다들 한 패거리잖아. 내가 모르는 줄 알아? 저 남자 돈 좀 있다고 아부하는 거 다 뻔히 보인다고! 결과는 다 너희 마음대로 만들 테고!”“염우섭 씨, 말조심하십시오.”날뛰는 염우섭의 고함에 윤도준의 안색이 즉시 어두워졌다.“지금 어디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난... 어쨌든 너희들은 공모한 거야. 우린 지금 당장 집에 갈 거라고.”말을 마친 염우섭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 했고 그 순간, 박한빈이 일어섰다.“그 손 떼.”그의 목소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나... 네가 뭔데 참견이야? 말해두는데 저놈들이 너한테 아부하는 거랑 난 상관없어. 지금 당장...”“염우섭 씨, 만약 강제로 데려가면 납치와 감금, 그리고 성폭행이나 성매매 혐의로 고소할 수 있습니다.”윤도준 또한 염우섭에게 다가오며 경고하자 염우섭의 눈이 동그래졌다.그때, 성유리가 염우섭의 소매를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집에 가고 싶어.”그 말이 끝나자 현장은 물 뿌린 듯 조용해졌다. 박한빈을 포함한 모두가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박한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성유리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계속 몸을 피하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염우섭을 바라보았다.“제발 가자. 부탁이야.”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염우섭은 비웃듯 박한빈을 보며 말했다.“봐. 얘는 당신을 전혀 모른다고.”“경찰관님, 다들 보셨죠? 이 여자는 저 남자를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 남자가 데려가는 게 바로 범죄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공범이고.”“이건...”윤도준도 이런 상황을 처리해 본 적이 없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할머니, 보세요. 이게 바로 박한빈 씨의 아내 사진인데 여성분이랑...”“무슨 사진? 저 남자 아내가 생긴 거랑 우리 설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이 애는 내 딸이야!”“알겠습니다만 의혹이 제기된 이상 검사 한번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DNA 검사라도...”“DNA는 무슨 DNA! 너희들 다 미친 거 아냐? 내 딸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왜 남의 아내가 되냐고? 설아, 따라와!”할머니는 성유리의 손을 단호히 잡아끌며 몸을 돌렸다. 윤도준이 막 말을 걸려는 순간 박한빈이 오히려 그를 제지했다.“박한빈 씨, 이건...”“저 사람들 사는 마을이 어딥니까?”박한빈이 한없이 차가운 태도로 물었다.“네?”“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세상에 닮은 사람이 둘 있는 건 흔한 일이란 말을 누구나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확신했다. 자신이 틀릴 리 없다는 것을.그녀의 눈동자 깊이 스민 습관, 손가락을 깨무는 버릇까지 모든 게 36일 전 사라진 아내와 일치했다.사실 그는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갈 수도 있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만 한다면 설령 그녀가 저항해도 가장 가까운 신분으로 법적 조치가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이 선택을 하기까지 결정했던 순간은 성유리가 노파의 품으로 달려가 엄마라고 부르는 모습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어린 시절 엄마에게서 느끼지 못한 가족의 온기를 이 할머니에게서 찾고 있음을.병상에 누워 생명이 사라져가는 엄마와 달리 옆에서 챙겨주는 노파의 따스함이 지금 성유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다.만약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간다면 그녀가 무조건 자신을 혐오하고 증오할 것이라고 믿었다.게다가 성유리를 데려간 사람들 또한 잘해주는 것 같았고 그녀 스스로도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가짜라고 한들 동년의 아쉬움과 공허한 마음 한구석을 채워주고 있으니 박한빈은 어쩌면 성유리에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당연하게도 염우섭이라는 남자의 존재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그래서
“저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같이 가서 식사 하시겠습니까?”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그러나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윤도준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박한빈이 멀리서 가볍게 손짓을 한 뒤 그대로 성유리를 차에 태웠다.이 차는 어제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차체는 마을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온통 흙탕물로 뒤덮여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차가 한참을 달린 뒤에야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엄마가 알게 되면 어떡해요!”“걱정 마십시오. 혹시 유리 씨한테 화를 내면 제가 가서 설명할 테니까.”“아마 엄마는 분명 당신을 때릴 거예요.”박한빈은 여전히 운전대를 잡은 채 성유리를 슬쩍 바라보았다.“왜요? 걱정되십니까?”“당연히 그건 아니에요.”성유리는 즉각 반박하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당신...”놀란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가만히 있으세요. 지금 저 운전 중이니까.”“게다가 손에 아직 상처가 있습니다.”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고개를 숙여 보니 그의 흰 셔츠 아래로 여러 겹의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리고 그 아래로 스며 나온 붉은 피가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아직 안 나았어요?”성유리는 무심결에 눈썹을 찌푸렸다.“걱정 마십시오. 안 아픕니다.”박한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런 그를 한참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그러나 박한빈의 손이 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이상한 감각이 퍼졌다.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더니 결국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읍내로 데려간 것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장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그녀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가 자
할머니는 마을에서 작은 땅을 갖고 있었다.예전에는 옥수수를 심었지만 몇 년 전 이웃 마을에서 계약 농사를 제안하면서 딸기로 바꿨다.그러니 지금은 딸기 씨앗을 심을 시기였다.아침부터 소란을 피운 할머니를 성유리는 억지로 집에서 쉬게 하고 자신이 대신 밭일을 맡았다.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쪼그려 앉아 씨앗을 심던 성유리가 잠시 눈을 감고 쉬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지금 뭐 하십니까?”고개를 들어보니 박한빈이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순간 얼어붙었고 이내 허둥지둥 그의 손을 밀어냈다.그리고는 황급히 몇 걸음 물러나 박한빈과의 거리를 벌린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저... 근데 왜 여기 계세요?”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절 무서워하시는 겁니까?”“아... 아니에요!”성유리는 서둘러 부정했다.마치 그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말이다.“다만... 엄마가 당신이랑 같이 있는 걸 싫어해요.”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엄마가 화낼 거예요.”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성유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왜죠? 그쪽 어머니는 제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네.”“하지만 유리 씨는 제가 나쁜 놈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요?”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을 따르는 겁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의 질문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혼란스러운 건지 알 수 없지만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게다가 유리 씨가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모를 텐데 말이죠.”“그럼... 그건 속이는 거잖아요.”“속이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성유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박한빈 또한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여기
박한빈은 많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환경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더구나, 이번에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창문 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누군가를 쫓아내고 있었다.이미 백발이 성성했지만 기운만큼은 넘쳤다.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몰아내는 동안, 마을 안팎 사람들이 소란에 놀라 몰려들었고 할머니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까지 싸잡아 한바탕 호통을 쳤다.그 뒤에는 성유리가 조용히 서 있었다.마치 어미 닭에게 보호받는 병아리처럼.주변을 궁금한 듯 둘러보면서도 절대 할머니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박한빈이 그 장면을 바라보던 순간, 성유리도 마침 그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려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소동이 한참 이어진 끝에, 할머니는 성유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쾅!그 문이 닫히는 소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컸다.그러고 나서야, 할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겁먹지 마라. 저런 놈이 뭐라고!”“우리 딸처럼 좋은 아가씨가 결혼할 상대를 못 찾을 것 같아? 걱정 마. 엄마가 더 좋은 사람 골라줄 테니!”“엄마... 사실 저는 결혼 서두를 생각 없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말했다.“그건 안 돼!”할머니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랐다.“여자는 크면 시집가야 하는 법이야.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으면 어쩌자는 거냐?”“게다가 내가 지금은 네 곁을 지켜주지만 언젠가는 나도 떠나야 한다. 그때 네가 혼자 남으면 누가 널 지켜주겠어?”엄마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아직 화가 덜 풀린 할머니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하지만 문밖의 사람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안녕하세요.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이번엔 또 누구야?”할머니는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단정한 흰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
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황급히 돌아섰는데 마치 얼굴에 ‘당황’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은 듯했다.할머니는 가느다란 눈을 좁히며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다녀온 거야?”“저... 밖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서 좀 보고 오느라...”“고양이?”할머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이 마을에 고양이 몇 마리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해?”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할머니도 깊이 따지지는 않았다.“얼른 자라.”그저 짧은 말만 남긴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성유리도 조용히 뒤따라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방 창문은 길 건너편 박한빈이 머무는 집과 마주 보고 있었다.그곳의 창문에는 어제 새롭게 창호지를 발라놓아 이제 더 이상 구멍이 나 있지 않았다.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빛 조명은 성유리의 방 조명과 똑같은 따뜻한 색이었다.성유리는 그 창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누워 잠을 청했다.그렇게 밤이 지나갔다.할머니는 원래 잠이 적었기에 해가 뜨기도 전에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침구를 정리한 후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계란을 깨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분명 할머니의 것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순간 긴장했다.그래서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나섰다.그러나 마주한 사람을 보고는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아주머니, 어쩐 일이세요?”“너희 어머니 계시니? 볼 일이 있어서 왔어.”여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아마 밭에 계실 거예요. 불러올까요?”“그래, 다녀와.”여자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그러더니 성유리를 한 번 훑어보곤,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별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마침 그 순간, 할머니가 밭에서 돌아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에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흠, 듣고 보니 꽤 재미있을 것 같군.”“그럼 이 일은 네게 맡길게.”“뭐라고?”“너도 알다시피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그리고 사씨 가문 쪽도...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내가 직접 손을 대긴 어려워.”“예전부터 네가 한국 시장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지금이 바로 기회 아닌가?”에릭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박한빈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이 마을 사람들은 일찍 잠드는 편이었다.지금은 사방이 조용했기에 그 작은 소리조차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었다.“누구십니까?”아직도 업무 모드였던 탓에 목소리에는 저절로 냉기가 서려 있었다.그랬더니 문밖에서 들리던 노크 소리가 멈췄다.하지만 대답은 없었다.불안해진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연정우 씨가 또 사람을 보낸 걸까?’그는 반사적으로 방 안을 둘러보며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문밖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저예요.”박한빈은 순간 멍해졌다.그리고는 에릭이 뭐라고 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향했다.느슨하게 걸린 낡은 나무문을 밀어 열자 문 앞에는 성유리가 서 있었다.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 한 그릇이 들려 있었고 발치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어딘가 머뭇거리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는 이내 시선을 떨구며 덧붙였다.“저... 저녁을 드셨는지 몰라서요. 그리고 여기 불 때는 곳도 없길래... 그냥 면을 좀 끓였어요. 따뜻한 물도요.”박한빈은 그녀가 들고 있는 그릇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둔탁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을에서는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윤도준이 일부러 사람들을 데려와 집을 정리해 준 덕분에 겨우 머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신호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다행히 박한빈은 집 안 구석구석을 돌며 신호가 잡히는 곳을 찾아냈고 마침내 에릭과의 통화를 연결할 수 있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에릭은 비꼬듯이 물었다.“난 또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네?”“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난 아주 잘 살아 있었어.”박한빈이 대답했다.“난 안 좋아.”에릭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지금 회사 쪽에서 어떤 난리가 났는지 알아? 전부 나한테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 네가 전에 말했던 불편해서 직접 나서지 못한다는 말, 결국 다 핑계였잖아. 나보고 대신 뒤집어쓰라는 거였지?”“일이 끝나면 내 몫의 이익 절반을 넘기지.”박한빈이 제시한 그 금액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하지만 돈은 이미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나 다름없었다.그들이 하는 일에서 중요한 건 오직 짜릿함이었다.애초에 한 번에 일을 끝낼 수도 있었다.에릭은 심지어 축하 파티에서 마실 술까지 이미 골라 두었었다.그런데 갑자기 박한빈이이 모든 걸 멈추라고 했다.그 순간, 에릭은 마치 새벽녘 힘차게 울 준비를 하던 수탉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목을 눌린 듯한 기분이었다.숨이 막히고 무엇보다 기분이 몹시 나빴다.그때 박한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파티장에서 사고 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너를 급하게 건지러 가지 않았어도, 성유리는 애초에 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거야.”“뭐야? 지금 나한테 책임이라도 묻겠다는 거냐?”“책임을 묻겠다는 건 아냐. 다만 우리나라엔 이런 말이 있지. 한 방울의 은혜에도 샘물처럼 보답하라는 말.”“너...”“됐고, 본론부터 들어가자.”박한빈이 그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성유리를 찾았어.”“오, 그건 축하할 일이네.”그러나 에릭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기쁨도 담겨 있지 않았다.오히려 실망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그도 누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저희 또 만났네요.”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여기 사는 겁니까?”성유리는 묻는 남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여기 삽니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네. 오늘 막 이사 왔거든요.”“아...”성유리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어딘가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런데 이 집, 꽤 오래됐어요. 비라도 오면 새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상했다. 정작 상대방의 이름조차 모르는 데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도 박한빈이 이곳에 산다는 말에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이 집과 그 남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그럼 그는 어디에 살아야 할까?성유리는 스스로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할머니는 박한한이 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 순간, 할머니의 표정이 확 변했다.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휘두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이 망할 놈아! 감히 내 딸한테 손을 대?”“어서 손 안 놔! 당장 안 놓으라고!”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엄마, 진정하세요. 그냥 얘기 좀 나누고 있었던 것뿐이니까.”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윤도준을 쫓아 몇 바퀴나 뛰었는지 이미 숨이 가빠져 있었다.그런데도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박한빈을 보는 시선엔 노골적인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엄마, 우리 들어가서 밥 먹어요.”성유리가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가 아직 노려보는 와중에도 성유리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그쪽도 오늘 새로 이사 온 이웃이에요.”그 말에 할머니의 주의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성유리의 엄마라고 주장하는 할머니는 박한빈을 다시 한번 훑어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
“설아?”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렸다.“네. 엄마, 왜 그러세요?”“그건 내가 물어볼 말이지.”할머니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성유리의 밥그릇을 탁탁 두들겼다.“밥 먹는데 무슨 넋을 놓고 앉아 있어?”성유리가 그 말에 재빨리 고개를 숙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럼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오늘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거지? 그 경찰들 다 헛소리 지껄이는 거야.”“어쨌든 결혼 날짜는 이미 정해졌으니 결혼식은 먼저 치러. 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 만큼 결혼하자마자 빨리 애 낳아. 내가 돌봐줄 수 있게.”“제가 누구랑 결혼해요?”성유리가 물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복섭이지! 예물도 이미 받았는데 뭘 더 바라?”할머니의 언성이 높아지며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그 모습을 본 성유리가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그냥... 물어본 거예요.”“네가 지금 행복에 겨워서 정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예전에 다 정해진 일 아니었니? 게다가 너랑 복섭이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결혼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어?”“제가 우섭이랑 오래 사귀었어요?”“그럼! 너희 어릴 때부터 함께 목욕도 했잖아. 몇 년이 아니라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거야!”할머니의 말이 끝나가도 성유리는 아무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가 애써 기억을 더듬으려는 순간, 머리가 격렬하게 아파지기 시작했다.고통을 무릅쓰고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마을 길이 고르지 못해 차체가 격하게 흔들리며 지나가더니 성유리와 할머니가 앉아 있는 식탁 앞으로 먼지가 고스란히 날려왔다.그러자 할머니의 얼굴이 확 붉어졌고 젓가락까지 내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눈이 안 달렸냐! 밥 먹는데 먼지를 날리다니! 망할 놈의 새끼들아!”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 모르는 할머니의 욕설은 매 한 마디가 다 아주 더러운 말들이었다.마을 누구나 아는 할머니의 억척스러움은
“할머니, 보세요. 이게 바로 박한빈 씨의 아내 사진인데 여성분이랑...”“무슨 사진? 저 남자 아내가 생긴 거랑 우리 설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이 애는 내 딸이야!”“알겠습니다만 의혹이 제기된 이상 검사 한번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DNA 검사라도...”“DNA는 무슨 DNA! 너희들 다 미친 거 아냐? 내 딸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왜 남의 아내가 되냐고? 설아, 따라와!”할머니는 성유리의 손을 단호히 잡아끌며 몸을 돌렸다. 윤도준이 막 말을 걸려는 순간 박한빈이 오히려 그를 제지했다.“박한빈 씨, 이건...”“저 사람들 사는 마을이 어딥니까?”박한빈이 한없이 차가운 태도로 물었다.“네?”“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세상에 닮은 사람이 둘 있는 건 흔한 일이란 말을 누구나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확신했다. 자신이 틀릴 리 없다는 것을.그녀의 눈동자 깊이 스민 습관, 손가락을 깨무는 버릇까지 모든 게 36일 전 사라진 아내와 일치했다.사실 그는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갈 수도 있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만 한다면 설령 그녀가 저항해도 가장 가까운 신분으로 법적 조치가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이 선택을 하기까지 결정했던 순간은 성유리가 노파의 품으로 달려가 엄마라고 부르는 모습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어린 시절 엄마에게서 느끼지 못한 가족의 온기를 이 할머니에게서 찾고 있음을.병상에 누워 생명이 사라져가는 엄마와 달리 옆에서 챙겨주는 노파의 따스함이 지금 성유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다.만약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간다면 그녀가 무조건 자신을 혐오하고 증오할 것이라고 믿었다.게다가 성유리를 데려간 사람들 또한 잘해주는 것 같았고 그녀 스스로도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가짜라고 한들 동년의 아쉬움과 공허한 마음 한구석을 채워주고 있으니 박한빈은 어쩌면 성유리에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당연하게도 염우섭이라는 남자의 존재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