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이 직접 하늘이를 재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평소 성유리가 하던 것처럼 동화책을 읽어주기로 했다.하지만 어릴 때 한 번도 동화책을 들으며 잠든 적이 없었고 누군가를 위해 읽어준 적도 없어서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어색하고 딱딱했다. 그래도 하늘이는 이미 울다 지쳐 있었기에 오래 지나지 않아 곧 깊이 잠들었다.박한빈은 잠든 하늘이의 옆에 한동안 앉아 있다가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사람들은 늘 하늘이가 자신과 닮았다고 했다.그런데 이 순간, 아이에게서 더 많이 보이는 건 오히려 성유리의 모습이었다.눈과 얼굴의 윤곽, 그리고 화를 낼 때의 모습까지 성유리와 거의 똑같았다.박한빈은 눈을 감고는 자신의 감정을 다잡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침실로 돌아가니 예상대로 방 안은 캄캄했다.불을 켜고 드레스룸으로 이어진 작은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이곳은 원래 침실에서 확장한 공간으로 처음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 그와 성유리의 옷을 정리해 두었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유리를 위해 산 옷들이 늘어나면서, 결국 그의 공간 일부까지 내주게 되었다.이제 바라보면 자신의 수트 옆으로 성유리의 형형색색의 원피스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박한빈은 그 옷들을 오랫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러다 문득 차가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얼음처럼 차가운 감촉이었다....“연 대표님!”뒤에서 들려온 공손한 목소리에 연정우의 걸음이 멈췄다.몸을 돌리자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한껏 비위를 맞추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오랜만입니다,연 대표님!”연정우는 상대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죄송합니다만, 누구시죠?”“역시 바쁘신 분이라 저 같은 사람은 잊으셨군요. 저는 장수아입니다! 지난번 회의 때 뵈었잖아요!”연정우는 남자의 말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 요즘 회의가 많다 보니 기억이 잘 안 나네요.”“괜찮습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연 대표님께서 요즘 얼마나
“그러는 연 대표님께서는 무슨 의도로 하시는 말씀이죠?”“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죠?”연정우는 짜증 섞인 말투로 상대의 말을 끊었다.이 남자가 아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결국 연정우가 어떤 태도로 그녀를 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시간도, 기분도 장수원과 빙빙 돌며 말장난할 여유가 없었다.장수원은 애써 뜸을 들이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사실 별거 아닙니다. 저는 그저 연 대표님께서 그 여자를 동약거리로 데려다주는 걸 봤을 뿐이에요.”그 말이 끝나자 연정우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책상 위에 올려둔 손이 천천히 힘을 주며 움켜쥐어졌다.이 남자가 하는 말은 사실이었다.그리고 동약거리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는 미국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화려한 도시가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라면 그곳은 그 아래에서 썩어가는 축축한 하수도 같은 곳이었다.무수한 부랑자들과 범죄자들, 심지어 살인범들까지 숨어 있는 곳.그곳에 여자 혼자 던져진다는 건, 마치 늑대 무리에 떨어진 어린 양과도 같았다.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곳.연정우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유효정은 은 분명히 말했었다.절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그래서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돈으로 여생을 보내길 원했다.그리고 그 삶에 연정우도 함께하기를 바랐다.하지만 그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렇게 길에서 다투게 되었고 유효정이 연정우 앞에서 늘 유지하던 착한 모습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처음 만났을 때처럼,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키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그래서 연정우는 일부러 차를 그곳으로 몰았다.그리고 일부러 유효정을 그곳에 버렸다.차를 몰고 떠날 때, 뒤에서 그녀의 절박한 울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유효정에게 일말의 연민도, 동정도 없었다.오히려 우스웠다.그리고... 후련했다.언제나 남들 위에 군림하려던 여자, 감옥에 몇 년을 있어도
[미끼를 물었어.]에릭의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 박한빈은 하늘이의 유치원에 있었다.오늘은 유치원 공개수업 날이었다.이런 행사에는 늘 성유리가 참석했었지만 이번엔 박한빈이 홀로 이곳에 앉아 있었다.주변은 거의 엄마들뿐이었다.남자인 그가 혼자 앉아 있으니 처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공개수업의 마지막 순서는 아이들이 부모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손가락 춤을 추는 시간이었다.하늘이는 박한빈 앞에 앉아 있었고 작은 얼굴은 몹시 진지했다.그 모습에 박한빈은 살짝 의심이 들었다.혹시 자기 앞에서 공연하기 싫어서 저러는 걸까?다행히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다만, 다른 아이들은 공연이 끝난 후 자연스럽게 부모에게 안겼지만 하늘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저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아이의 행동을 본 박한빈은 천천히 손을 펴 하늘이의 손을 감싸 쥐었다.행사가 끝난 후, 그는 하늘이를 데리고 나왔다.에릭은 아까부터 계속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는 답할 틈이 없었다.차에 오르고 난 뒤, 박한빈은 하늘이를 바라보며 먼저 말을 걸었다.“내가 요즘 좀 바빠. 우선 할머니 댁에 잠깐 가 있을 수 있겠니? 이틀 후에 데리러 갈게.”그 말에 하늘이가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원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요즘 어떤 말을 해도 조용히 따르기만 했으니까.하지만 이번엔 달랐다.하늘이는 한참 동안 박한빈을 빤히 바라보더니 조용히 물었다.“이틀이라고 말했으면… 진짜 이틀이에요?”그 말을 듣고 나서야 박한빈은 깨달았다.하늘이는 지금 자신과 떨어지기 싫어하고 있었다.“응. 딱 이틀이야.”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그제야 하늘이는 안심한 듯,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은 하늘이를 먼저 엔젤 월드에 데려다준 후, 에릭에게 전화를 걸었다.“드디어 연락이 됐네. 난 네가 실종된 줄 알았어.”에릭이 비꼬듯 계속 말했다.“말해.”박한빈은 그의 농
그의 가슴은 점점 더 거칠게 오르내렸고 가만히 앉아 눈앞의 숫자들이 다시 반등하기만을 기다렸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늘 그래왔으니까.하지만 이번엔 아무 변화도 없었다.곧 거래 시간이 종료되었다.주식 시장이 닫히는 순간, 연정우는 이를 세게 악물었다.그리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장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원래부터 시장에 깊이 발을 들일 생각은 없었다.애초에 장수원의 성가신 권유를 대충 받아들이며 시작한 일이었을 뿐.그러나 곧 깨달았다.그 남자가 단순한 허풍쟁이가 아니라는 것을.그때야 알았다.장수원이 단순한 중개인이 아니라 그쪽 펀드의 파트너라는 사실을.국내에서 신중하게 추진하는 사업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 숫자가 뛰어오르는 쾌감, 그리고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금융 피라미드 최상층에 오를 수 있다는 감각.그건 마치 마약과도 같았다.그렇게 두 번째 투자 제안서가 그에게 전달됐다.한 주당 10억.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몇 대를 걸쳐도 만질 수 없는 돈이었지만 연정우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숫자였다.그리고 무엇보다 연정우는 잘 알고 있었다.박한빈 역시 그쪽에 (파트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더 흥미로운 건, 장수원이 속한 펀드와 박한빈 쪽 펀드가 서로 적대적 관계라는 점이었다.이건 아주 마음에 들었다.금성에서 그를 짓누르는 것뿐만 아니라 이 시장에서도 박한빈을 짓밟아야 했다.그리고 연정우는 박한빈을 완전히 끝장낼 시나리오까지 완벽하게 짜두었었다.심지어 승리 후 열릴 축하 파티에서 무엇을 할지까지.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게 한순간에 불타버린 금박처럼 사라졌다.연정우가 지켜보는 앞에서 아예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없어져 버렸다.장수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끊임없이 울리는 차가운 통화연결음을 들을수록 연정우의 심장은 점점 깊이 가라앉았다.그렇지만 그는 믿을 수 없었다.‘그럴 리가 없어. 내가 속았다고? 말도 안 돼... 그저 잠시 진 것뿐이야. 내일 시장이 열리면 반등만 하면...’그 순간을 기다리기 위해 연정우는 다시
박한빈은 약속대로 하늘이를 데리러 갔다.막 도착하자마자, 김서영이 그의 얼굴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어디 다녀온 거야?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그냥 지난 이틀 동안 너무 바빴을 뿐이에요.”박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하늘이 앞에 쭈그려 앉았다.“집에 갈까?”하늘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는 담담한 척했지만 돌아서자마자 바로 그 작은 책가방을 챙기러 달려갔다.그 모습을 보며 박한빈은 미소를 지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하늘이는 굳은 박한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그 표정이 기대처럼도 보였지만 한편으론 불안한 것처럼도 보였다.하지만 아이가 더 자세히 보기 전에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잠깐만 기다려. 전화 좀 받고 올게.”그렇게 말한 뒤, 천천히 정원 쪽으로 걸어 나갔다.일부러 느리게 걸었지만 전화를 건 쪽에서는 기다릴 생각이 충분한 듯했다.첫 번째 전화를 받지 않자 곧바로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왔다.이번에는 박한빈 또한 피하지 않고 받았다.“박한빈 씨.”수화기 너머 연정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당신이 한 짓입니까?”박한빈이 대답하지 않자 연정우가 피식 웃었다.“박 대표님은 늘 스스로 고결한 척하면서 이런 더러운 수법을 가장 경멸하지 않나요? 그런데 이제 와서 똑같이 쓰는 겁니까?”그의 비아냥에도 박한빈은 반응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만 물었다.“살고 싶습니까?”그 질문에 연정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박한빈은 멈추지 않았다.“성유리는 어디에 있죠?”그 말을 듣는 순간, 연정우는 비아냥거렸다.“이 모든 일을 벌인 이유가 결국 그 여자 때문이야? 네 동업자들은 알고 있나? 이 난리를 친 게 단순히 성유리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였다고?”“연정우.”박한빈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나는 지금 너랑 돌려 말할 시간 없어. 딱 10분 줄게. 대답하지 않겠다면... 상관없어. 네가 했던 짓들, 전부 세상에 공개해
김서영은 옆에서 서 있다가 박한빈의 말을 듣고 놀란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유리 소식이 있다고? 지금 어디 있어?”“서향시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데리러 갈 거고.”“누가 알려줬어? 유리가 왜 서향시에 있지? 그리고 그동안 왜 너한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는데? 이 정보는 확실한 거야?”김서영은 여전히 침착한 척하고는 있었지만 한꺼번에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그 무렵, 박한빈에게는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전 지금 바로 서향시로 갈 겁니다. 어머니는 하늘이만 잘 돌봐주십시오.”“아니, 그게 혹시 사기일 수도 있잖아? 박한빈!”김서영이 막아보려 했지만 박한빈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뒤따라 나왔을 땐 이미 차에 올라탄 뒤였다.사기?그래, 어쩌면 연정우가 박한빈을 속이려는 것일 수도 있고 시간을 끌기 위해 거짓 정보를 준 걸 수도 있다.서향시에는 그가 미리 짜놓은 함정이 있을 수도 있고 박한빈이 도착하는 순간 바로 그를 죽이려는 계획이 실행될지도 모른다.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성유리는 마치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아무도 모른다. 박한빈이 이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박한빈은 처음으로 행복이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마치 살아 있는 시체가 된 듯한 나날들.그를 붙잡고 있는 단 하나의 끈은 성유리를 찾아야 한다는 의지뿐이었다.만약 그마저도 없었다면 박한빈은 아마 진작에 죽어버렸을지도 몰랐다.그래서 그는 냉정해질 수 없었다.연정우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면서도 직접 가서 확인해야만 했다.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말이다.비행 일정은 이미 예약해 두었다.서향시로 바로 가는 비행기가 없어 근처 도시까지 가는 티켓을 예약해 두었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다른 도시에 도착하는 즉시 차를 타고 이동하면 되니까.지금 박한빈은 단 1초도 기다릴 수 없었다.그가 서둘로 공항으로 향하는 길, 에릭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뉴스 다
다행히 박한빈이 탄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했고 그는 직접 차를 몰아 서향시로 향했다.장장 다섯에서 여섯 시간의 여정 동안 그는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사실 처음엔 사람들을 데리고 올까 고민했었다.하지만 연정우는 분명히 말했다.“혼자 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보게 될 건 성유리의 시체일 겁니다.”박한빈은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지만 성유리에게는 조금의 위험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어차피 후속 조치는 이미 다 준비해 둔 상태였다.만약 정말로 자신이 여기서 죽는다면 연정우 역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그가 사라진 순간 연정우를 지탱해 온 배후 세력도 붕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성유리는 풀려나게 될 것이다.만약 성유리가 아직 살아 있다면. 또 만약 이미 끔찍한 일을 당한 상태라면... 박한빈은 그녀를 혼자 두고 떠나게 놔둘 수 없었다.함께 죽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박한빈 자신도 이렇게 행동하는 게 무책임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특히 그의 어머니와 하늘이를 생각하면 말이다.하늘이가 이제야 자신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는데 지금 떠나버린다면 정말 무책임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하지만 그 모든 것 이전에 그는 박한빈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성유리의 남편이었다.그들은 맹세했다.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하겠다고.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 약속을 나눴다.그래서 성유리를 혼자 남겨둘 순 없었다.그렇게 하면 그녀 혼자 너무 외롭지 않은가?차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가로질렀고 도시의 번화함과 북적이는 거리들이 모두 뒤로 밀려났다.GPS 위치를 따라가던 끝에 드디어 그곳이 보였다.낡고 쇠락한 마을.버려진 땅.눈앞에 펼쳐진 건 그야말로 황량함 그 자체였다.차를 멈추고 전화를 걸려는 순간,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소리.그건 바로 바닥을 긁는 야구 방망이 소리였다.그 소리를 들은 박한빈이 빠르게 몸을 돌렸다.그 시각, 집 안에서 몇 명의 남자들이 걸어 나왔다.새벽이 막 밝아오기 시작한 시간. 그들이 손에
그래서 성유리는 정말로 이미 세상을 떠난 건가?그녀가 이리도 허망하게 죽었다고?‘말도 안 돼.’하지만 죽은 게 아니라면 왜 그토록 찾아 헤매도 성유리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던 걸까?박한빈이 이미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과 수단을 동원했는데도 아무런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그리고 더 중요한 건 성유리가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단 한 번도 박한빈에게 신호를 보내지 않았겠는가?이 가능성에 대해선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다만, 차마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그러나 이제는 그 가설이 사실임이 증명된 셈이었다.박한빈을 지탱해 오던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이 바로 이 순간, 완전히 무너졌다.그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그 순간, 놈들이 움직였다.손에 든 무언가가 그를 향해 내리쳤다.이미 박한빈의 모든 감각이 마비된 상태였고 살고자 하는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럼에도 칼이 몸에 닿기 직전,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막아냈다.날카로운 칼날이 팔에 파고들었고 너무도 심해 숨이 막힐 듯한 통증이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그리고 그 순간, 몸이 다시 반사적으로 움직였다.앞에 있던 남자를 발로 걷어찬 박한빈은 곧바로 차 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뛰어올랐다.“놓치지 마! 저놈 잡아!”남자들이 소리쳤다.하지만 박한빈은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무표정하게 시동을 걸었고 붉은 피가 계속해서 팔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핸들을 꽉 잡았다.그리고 그대로 엑셀을 밟았다....“하루가 멀다 하고 뭐 이런 일들이 터지는 거야!”윤도준은 전화를 끊자마자 짜증 섞인 욕설을 내뱉었다.“유신촌? 거기 몇 년 전에 이미 다 철거됐잖아? 거기에 대체 누가 남아 있어서 싸움을 벌이는 거야? 설마 또 그 불량배들 짓이야?”사무실 안 누구도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윤도준이 더 말을 하려던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전화를 받은 윤도준은 숨을 거칠게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