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아무리 원하지 않았더라도 그 순간 느낀 것은 오랜만에 경험하는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감각이었다.성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고 금세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바로 그때, 박한빈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더니 곧바로 입술로 향했다.그러자 성유리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그의 혀끝이 그녀의 입술을 밀고 들어오는 순간, 성유리는 정신이 들었는지 힘껏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그녀의 저항은 더 칠어졌고 박한빈은 성유리가 무엇을 꺼리는지 알면서도 씩 웃으며 오히려 더 세게 입을 맞췄다.결국 성유리는 하는 수 없이 박한빈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두 사람의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지만 박한빈은 이미 이런 고통에 익숙해졌다.그는 아프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성유리가 더 화내기 전에 그녀를 놓아주었다. 풀려난 성유리는 박한빈의 가슴을 한 대 치며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뭐가 무섭다고 그래? 더러운 것도 아니잖아.”“입 닥쳐!”성유리는 더욱 화가 나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짐작한 듯 곧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그 순간, 박한빈의 허리띠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금속이 바닥에 부딪히는 쨍한 소리가 울렸다. 시간은 이미 깊은 밤이었다.김서영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하늘과 저택의 다른 직원들도 성유리의 생활 패턴에 맞춰 움직였기 때문에 주변은 매우 조용했다.너무나도 고요해서 성유리는 자신의 귓가에 울리는 작은 소리마저 확대되어 들렸다. 이로 인해 그녀는 점점 더 긴장하고 난처해졌다.성유리의 손은 박한빈의 등을 꼭 움켜쥐었고 흐릿했던 목소리는 점점 애원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이 순간의 박한빈은 평소와 달랐다.더 이상 배려도 없고 부드러움도 없었다. 거친 움직임은 마치 그의 존재를 그녀에게 각인시키고 다시는 헤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했다.“성유리, 유리야...”박한빈은 성유리의 이름을 귀 옆에서 계속해서 불렀다.그 소리에 성유리가 몇 번이나 대답했지만 그럴 때마다 박한빈이 하는 말은 똑같았다.“내가 누구야?”“박...한빈
성유리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베개 밑에 숨겨진 붉은 봉투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봉투 안에는 돈과 함께 평안부 하나가 들어 있었다.잠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는 조용히 봉투를 제자리에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 시각, 거실에서는 김서영과 하늘이가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그들뿐만 아니라 저택의 다른 도우미들도 함께 있었고 다들 즐겁게 카드놀이를 하며 피스타치오를 판돈으로 삼고 있었다.하늘이가 이긴 판이었는지 아이는 기분 좋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신이 나 있었다.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하늘이는 더욱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달려와 자랑했다.“엄마, 나 또 이겼어! 이것 봐, 내가 얼마나 많이 땄는지.”하늘이의 순수한 웃음에 성유리는 평소대로 칭찬을 건네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뭔가 걸린 듯한 기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결국 그녀는 어색하게 미소만 지어 보였지만 그 미소조차도 자연스럽지 못했다.하늘이는 성유리의 눈을 마주하자 방금 전까지의 흥분돼 있던 감정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그리고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도통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다.결국 보다 못한 김서영이 다가와 말했다.“자, 그만하고 너희 엄마 아직 아침도 못 먹었잖니. 그리고 공민지 언니도 널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만 도망가고 다시 와서 하자.”“저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그 말에 하늘이가 즉시 대답했다.그러면서도 여전히 아쉬운 눈빛으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끝내 김서영의 말을 듣고 돌아서서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성유리는 하늘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자신이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하늘이가 지금 얼마나 실망하고 속상해하고 있을지도 알고 있었다.하지만...“괜찮아.”이런저런 생각에 이를 악물고 있을 때, 김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김서영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하늘이는 착한 아이잖니. 게다가 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성유리를 본 김서영이 계속 말했다.“너도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이럴 테니까.”그럼에도 성유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됐어. 그만하고 아침부터 먹자. 밥 다 먹고... 넌 나랑 갈 데가 있어.”...김서영이 말한 갈 곳이 사씨 저택일 줄은 성유리가 꿈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마지막으로 사씨 저택에 왔을 때의 기억은 아직 성유리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리고 류수미와 했던 약속도.성유리는 류수미에게 사하나가 하늘이한테 썼던 마음들과 은혜를 꼭 갚겠다는 말을 했지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아침에 박한빈이 그녀를 행복을 위해 직접 부탁한 평안부도, 하늘이가 엄마를 볼 때의 그 조심스러운 눈빛도, 사하나의 죽음도 다 잊고 싶었다.하지만 이제 와서 그간의 추억들을 성유리가 어찌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사모님은 내가 비겁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할 거야.’‘분명 약속까지 했으면서...’“가자.”김서영의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성유리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김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성유리의 손을 잡더니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김서영은 이미 사씨 가문의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상황인 것 같았다. 필경 그녀의 신분 또한 예사롭지 않았으니까 말이다.사씨 가문 사람들은 박한빈을 대하던 태도로 김서영을 대하진 않았지만 성유리에게는 쌀쌀맞았다.류수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를 악문 채로 성유리를 노려보며 외쳤다.“쟤가 여길 어디라고 와요!”하지만 김서영은 옅은 미소만 지으며 대답했다.“안부 물으러 왔어요. 설날인데 어떻게 지내시나 보러 오고 싶기도 했고.”“안부요?”류수미는 화가 나 씩씩거리며 따지듯 물었다.“설날에 대체 왜 찾아오신 거예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시러 오셨나 봐요? 혹시나...”“아니요. 그러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시
사민혁의 말에 성유리가 나서서 대답하려던 찰나, 김서영이 그녀를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저도 잘 압니다. 사하나 씨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클지.”“하지만 다시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이번 일에 유리의 잘못이 정말 존재하는지.”“자리에 있던 다른 목격자한테도 물었습니다. 근데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러더라고요. 그날 날씨가 안 좋아서 유리가 하나 씨를 말렸답니다. 아이랑 스키 타러 올라가지 말라고. 그런데도 하나 씨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어요.”“비록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두 분의 슬픔이 더 커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현실이 이렇습니다. 사하나 씨는 본인이 한 행동과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뿐이에요.”“지금 그게 무슨 뜻이죠? 제 딸이 죽어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건가요? 그런 선택을 했으니 잘 죽었다는 말이에요?”그 말에 류수미는 또다시 격동된 억양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김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사하나 씨는 너무 젊은 사람이었으니 누구라도 다 안타깝고 가엽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유리는 또 무슨 잘못을 지었나요?”“유리가 먼저 아이를 데리고 스키장에 가기로 한 것도 아니고 말리려고 애를 쓰기도 했잖아요. 눈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유리는 혼자 사고 현장으로 향해 두 사람을 찾으려고 했어요.”“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든 노력을 다한 아이예요. 그런데 더 이상 또 무얼 해야 되나요? 정말 자기 목숨으로 하나 씨의 죽음을 애도하고 보상해야 하나요? 유리가 죽는다고 해도 사하나 씨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 텐데.”김서영의 말투는 너무 차분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들렸다.류수미는 그 말에 표정이 완전 사라져버렸고 사민혁 또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오늘 제가 유리를 데리고 온 건 설날에 인사를 드리러 온다는 핑계로 이번 일에 대해 정확히 정정하려는 의도였어요. 두 분은 유리랑 같이 있지 않으니 지금 얘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지,
“사실 요즘 한빈이가 매일 사씨 저택으로 향했어.”“아니면 왜 사하나 씨 가족들이 그렇게 흥분하겠니?”“근데 한빈이 걔가... 하도 멍청해서 듣기 좋은 말들을 하는 법을 몰라. 그래서 가족분들이 반겨주지 않는 거고.”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그 사람이 사씨 저택에 왜... 뭐 하러 갔는데요?”“유리 네가 보기엔 뭐 하러 간 것 같은데?”김서영은 묻는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했다.“당연히 널 위해서지.”“네가 사하나 씨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도, 발이 묶여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것도 보기가 싫었을 거야.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도 없으니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유가족들이 너를 용서하게 하는 일이었겠지.”“아마 네가 그 사람들에게 용서받는다면 좀 괜찮아질 줄 알았나 봐.”“사실 걔가 한 일이 오늘 내가 한 일과 별반 다를 건 없었어. 그냥... 난 네가 보는 앞에서 하기를 선택했을 뿐이지.”“성유리, 난 네가 알았으면 해. 요즘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우리가 다 봤으니까 넌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없이 제자리에 앉아 김서영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그러다 조금 뒤,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마치 온몸에 남은 모든 힘을 주먹을 쥐는데 쓰는지 손가락 마디는 이미 하얗게 변해있었고 몸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김서영은 그런 성유리의 모습을 보고도 그저 묵묵히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기만 했다.이때, 두 사람이 탄 차가 엔젤 월드에 들어서자 박한빈이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달려 나왔다.어찌나 급히 나온 건지 외투조차 걸치지 않은 그는 평소 무덤덤하던 표정과는 달리 한껏 더 격동돼 있었다.기사가 차를 주차하고 나서야 박한빈은 헐레벌떡 달려오며 김서영에게 물었다.“유리 데리고 어디 갔다 오시는 겁니까?”김서영은 박한빈에게 거짓말을 하기 싫어 솔직히 대답했다.“사씨 저택.”그러자 박한빈의 안색이 더 어두워지더니 김서영에게 따지듯 물었다.
성유리와 다른 사람들은 엔젤 월드에서 대보름날까지 머물렀다.하늘이도 이젠 나이가 됐으니 성유리는 원래 경운시에 아이가 다닐 유치원을 찾아보려고 했다.하지만... 경운시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결국 하늘이가 다닐 유치원은 박한빈이 직접 골랐다. 그 유치원은 금성시에서 꽤 이름을 날린 국제 유치원이다.유치원에 다니는 학생들의 집안과 조건은 평범한 사람보다 더 월등했기에 성유리가 전에 찾아보던 유치원과는 차원이 달랐다.사실 성유리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만약 하늘이가 박한빈 옆에 남아있으면 접하는 영역과 사귀는 친구, 그리고 사는 수준은 성유리가 평생 노력해도 하지 못할 것들이라는 사실을.지금 하늘이가 입고 있는 옷, 먹는 음식, 쓰는 물건들 전부 다 제일 좋은 것들이었다.전에 김서영은 하늘이를 데리고 각종 파티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전에 그녀는 그런 떠들썩한 장소에 가는 것을 꺼렸다.하지만 하늘이만큼은 세상의 이런저런 모습을 많이 봐야지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서 자주 데리고 나갔다.이런 일은 원래 엄마인 성유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마치 지금 사람들은 이미 성유리가 박한빈의 아내임을 확신하고 있듯이.박한빈의 아내로서 그런 연회나 파티엔 응당 성유리가 참석해야 했고 그게 제일 기본적인 일이었다.하지만 김서영은 성유리를 강박하지 않았고 홀로 하늘이를 데리고 나가기를 반복했다.나중에 그녀는 하늘이를 데리고 승마장까지 갔고 아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말을 바로 사주기도 했었다.집에 돌아온 하늘이는 성유리에게 승마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자랑했다.사진 속 조련사는 하늘이를 앞에 앉히고 이리저리 달리고 있었고 아이는 승마복을 입은 채로 즐거운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성유리는 행복해 보이는 사진 속 아이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엄마, 거기 진짜 재밌어. 다음에 우리 같이 갈까?”하늘이는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난 말 탈 줄 몰라.”성유리가 난처해하며 대답했다.“괜찮아. 거기 말 잘 타는
하늘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성유리는 또다시 물었다.“여기서 지내는 게... 안 행복해?”성유리의 물음에 하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다시 끄덕였다.“난 엄마가 안 행복해 보여서.”침묵하던 하늘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엄마, 엄마는 지금... 하늘이를 보고도 웃어주지 않아.”“난 엄마가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성유리는 아이의 말에 멍해졌고 하늘이의 손을 잡고 있던 손도 점점 굳어갔다.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도우미는 계속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성유리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도우미는 빠르게 하늘이에게로 다가가더니 말했다.“성하늘 아가씨, 아까 그림 그리고 싶다고 하셨죠? 저랑 같이 그리러 갈까요?”하늘이는 도우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성유리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아이의 시선을 느낀 성유리는 심호흡 한 번 하고는 애써 미소 지으며 입을 뗐다.“기회가 생기면 엄마가 하늘이 데리고 한번 갔다 올게. 알겠지?”“진짜?”성유리의 말에 하늘이의 눈이 순식간에 빛났고 성유리는 그제야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진정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얼마 뒤,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이와 약속했다.“응. 진짜.”하늘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도우미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나갔고 성유리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비록 오늘 박한빈이 외출한 상태지만 집안에 남아있는 도우미들은 항시 성유리 곁을 지키며 감시 아닌 감시를 하고 있었다.성유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그녀가 화장실에 조금 오랫동안 머물러도 재빨리 다가와 괜찮냐고 묻곤 했다.그들은 항상 성유리가 괜찮다는 대답을 하고나서야 안심하며 화장실 밖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한편, 성유리가 멍하니 앉아 있을 무렵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오늘 저녁 식사 또한 변함없이 세 사람이 함께 먹었다.김서영은 하늘이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갑자기 물었다.“한빈이 요즘 왜 저렇게 바빠?”성유리는 그녀의 물음에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나
“내가 맨발로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박한빈은 얼굴을 찌푸리며 성유리에게 따지듯 물었다.“집안에 난방이 너무 잘 돼서요.”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아 하며 대답했다.“그래도 안 돼.”“네.”성유리는 박한빈을 지그시 쳐다보다 결국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아까 뭐 보고 있었어?”“요즘 왜 그렇게 바쁘세요?”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물었다.너무도 기막힌 타이밍에 박한빈은 멈칫하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를 본 성유리는 기분이 이상해져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웃으세요?”“알고 싶어?”박한빈은 대답 대신 성유리에게 되물었고 그녀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거렸다.“마침 잘됐네.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었거든.”“근데 내가 아직 씻지를 못해서... 나 좀 기다려줄래?”“먼저 알려주시면 안 돼요?”“안 돼.”아마 요즘 박한빈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성유리는 그의 그런 모습에 익숙해졌다.그래서 지금 박한빈이 고민도 안 하고 자신의 말에 거부 의사를 밝히자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도 못했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은 이미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고 성유리에겐 기회가 없어졌다.원래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쓱 물어보려 했던 성유리지만 박한빈의 말을 듣고 나니 흥미가 생겼다.김서영도 박한빈의 회사에 별일이 없다고 말했으니까.게다가 박한빈도 당연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성유리는 이 업계 일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그러니 그가 하려던 말을 바로 성유리와 관련된 사람에 대한 주제일 것이다.이미 욕실로 들어선 박한빈의 뒤를 성유리가 따라가려는 순간, 박한빈은 뒤에도 눈이 달린 듯 고개를 휙 돌리더니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맨발로 걸어 다니지 말라고.”바닥에 닿아있던 성유리의 발은 박한빈의 말에 움츠러들어갔고 그 틈을 타 그는 욕실 문을 잠가버렸다.결국 성유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침대로 돌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창문만 바라봤다.다행히 박한빈은 성유리를 오랜 시간 기다리지 않게 했고 10여 분이 흘렀을 즈음, 가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