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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4화

작가: 송진
문이 열리는 순간, 성유리는 박한빈의 몸에서 풍겨오는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문손잡이를 꽉 잡은 채 몸으로 문을 막았다.

“대체 여긴 왜 찾아온 거예요?”

때는 해가 완전히 저물어 버린 캄캄한 밤이었다.

같은 층에는 성유리네 말고도 세 가구가 더 거주 중이었다. 이웃들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던 탓에 성유리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을 열라며 난동을 부리던 박한빈은 정말 문이 열리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윽한 눈으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시 박한빈과 눈을 맞추고 있던 성유리는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할 말 없으면 이만 돌아가요.”

말을 끝낸 그녀는 문을 닫으려 했지만 이내 박한빈의 손에 의해 가로막혀 버렸다.

“이렇게까지 날 피하고 싶은 거야?”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물었다.

“옆집으로 이사 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도망치듯 이사를 가버리는 건데?”

“성유리, 너 정말 매정하다. 어떻게 나한테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안 주는 건데?”

한참이나 박한빈을 가만히 바라보던 성유리가 대답했다.

“대표님, 제발 대표님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게다가 대표님 같은 조건과 위치라면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요. 굳이 저한테 이렇게 집착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여자들이 줄을 선다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넌 정말 그 여자들이 날 진심으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만약 내가...”

“애초에 접근할 기회도 안 주면서, 진심일지 아닐지 어떻게 확신하는데요?”

성유리가 박한빈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더군다나, 지금 저랑 그 여자들이 다를 게 뭔데요?”

“박한빈 씨, 저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적어도 그 여자들은 돈 때문에라도 한빈 씨를 사랑하겠지만 저는 이제 그럴 수도 없어요.”

“한빈 씨 사업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가장 치명적인 투자가 어떤 건지도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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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이 열리는 순간, 성유리는 박한빈의 몸에서 풍겨오는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그녀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문손잡이를 꽉 잡은 채 몸으로 문을 막았다.“대체 여긴 왜 찾아온 거예요?”때는 해가 완전히 저물어 버린 캄캄한 밤이었다.같은 층에는 성유리네 말고도 세 가구가 더 거주 중이었다. 이웃들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던 탓에 성유리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을 열라며 난동을 부리던 박한빈은 정말 문이 열리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그저 그윽한 눈으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잠시 박한빈과 눈을 맞추고 있던 성유리는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할 말 없으면 이만 돌아가요.”말을 끝낸 그녀는 문을 닫으려 했지만 이내 박한빈의 손에 의해 가로막혀 버렸다.“이렇게까지 날 피하고 싶은 거야?”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물었다.“옆집으로 이사 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도망치듯 이사를 가버리는 건데?”“성유리, 너 정말 매정하다. 어떻게 나한테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안 주는 건데?”한참이나 박한빈을 가만히 바라보던 성유리가 대답했다.“대표님, 제발 대표님의 인생을 사세요.”“저도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게다가 대표님 같은 조건과 위치라면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요. 굳이 저한테 이렇게 집착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여자들이 줄을 선다고...”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넌 정말 그 여자들이 날 진심으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만약 내가...”“애초에 접근할 기회도 안 주면서, 진심일지 아닐지 어떻게 확신하는데요?”성유리가 박한빈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더군다나, 지금 저랑 그 여자들이 다를 게 뭔데요?”“박한빈 씨, 저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적어도 그 여자들은 돈 때문에라도 한빈 씨를 사랑하겠지만 저는 이제 그럴 수도 없어요.”“한빈 씨 사업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가장 치명적인 투자가 어떤 건지도 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13화

    “감사합니다.”성유리는 결재서류를 받아들고 사인하며 말했다.“우리 남편 들어오면 담배라도 한 갑 사 오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쉬운 대로 몇만 원 더 드릴 테니까 돌아가시는 길에 뭐라도 사드세요.”“아뇨, 괜찮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직원들은 극구 사양하는 척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성유리가 건네주는 현금을 받았다.성유리는 직원들이 떠나자마자 곧장 상자 속에 있던 신발을 현관에 놓고는 남자 옷까지 몇 벌 더 꺼내 베란다에 걸어두었다.“엄마, 우리 이제 여기서 사는 거야?”성하늘이 물었다.“맞아.”“그럼 우리가 원래 살던 집은 어떻게 됐어?”“방 뺐어.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야.”“그럼... 난 이제 승민이 오빠 못 만나는 거야?”“아니야, 여기서 얼마 멀지도 않으니까 나중에 하늘이가 유치원 들어가면 또 만날 수 있을 거야.”그제야 성하늘은 안심한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하루 종일 짐 정리를 하느라 저녁도 차리지 못했다.그래도 성하늘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성유리가 저녁을 직접 차리지 못한다면 배달 음식으로 먹게 되는 것은 밖에서 파는 정크푸드였기 때문이다.새로운 환경으로 옮겨서인지 성하늘은 밤이 되어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한참이나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감았다.아이가 잠든 줄 알았던 성유리는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깊은 잠에 빠져있던 줄만 알았던 성하늘이 눈을 떴다.“그럼 난 이제 그 사람도 못 보는 거야?”“그 사람이 누군데?”성유리가 무심코 물었다.하지만 성하늘은 그녀의 질문에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침대 곁에 서 있던 성유리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아이가 얘기한 ‘그 사람’이 박한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성유리는 아이에게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눈을 질끈 감은 성하늘은 정말로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결국, 그녀는 잠든 아이를 두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성유리는 얼마 전에 받았던 커미션의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12화

    박한빈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평소 성유리와 아이의 외출 시간은 오전과 초저녁으로 나뉘었다.보통 오전 11시쯤이면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잠깐의 낮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모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박한빈은 앞집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꼈다.그는 그 소리가 곧바로 문을 열었다.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낯선 남자 무리였다.박한빈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남자들이 깜짝 놀라 박한빈을 돌아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그쪽은 누구신데요?”“지금 뭐 하시는 거냐고요?”박한빈은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전선 고치러 오신 거예요? 무슨 전선 하나 고치는 데 이렇게 많이 몰려와요?”“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저희는 이 집으로 이사 온 건데요.”남자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그 말에 박한빈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이사요?”“네, 이사 왔어요.”남자는 대답을 하면서도 다시 문 앞에 적힌 번호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5동 904호, 맞는데요.”그 말과 함께 남자는 이미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들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그저 자신의 집 현관 앞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가장 행복해야 할 놀이공원에서 모두에게 버림받은 아이라도 된 듯, 믿기 힘든 감정과 함께 몰려온 혼란스러운 감정이 쓰나미처럼 박한빈을 덮쳐왔다.박한빈은 천천히 집안으로 돌아왔다.모니터에는 여전히 알아보기도 힘든 다양한 데이터 수치들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평소 작은 움직임 하나로 박한빈을 흥분시키던 데이터였지만 지금은 아무리 날뛰어도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던 박한빈은 이내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성유리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11화

    가운데에 있어야 할 벽이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안방과 서재가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그 덕에 작은 방과 거실이 넓어졌다.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성하늘은 성유리에게 안기자마자 그녀의 어깨 위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와 있는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침구는 다 깨끗한데, 더 필요한 거 있어?”방 문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이 물었다.“필요 없어요, 고마워요.”“너... 씻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을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반응에 박한빈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미안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럼... 잘 자. 나는 앞방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불러.”말을 마친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뒤를 곧바로 따라나섰다.그때까지만 해도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건 줄로 알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성유리는 매정하게 방 문을 닫았다.뒤이어 문을 잠그는 듯한 소리까지 들려왔다.박한빈은 걸음을 멈추고 참았던 웃음을 피식 터뜨렸다.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성유리는 여전히 순진하기 그지없었다.아무리 문을 잠근다고 해도 이곳은 박한빈의 집이었고, 집주인인 그에게 스페어 키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박한빈 역시 성유리에게 허튼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지금이 적절한 때가 아닌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지금 이대로도 박한빈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수없이 박한빈은 거부했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난 진전이나 다름없었으니까.박한빈은 계속 걸음을 옮겨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서재의 컴퓨터 책상 위에는 수많은 자료들이 쌓여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 자료들을 확인해 볼 의지도 없다는 듯 곧바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그날 밤, 박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은 잠에 들었다.쓸데없는 꿈을 꾸지도 않았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았다.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10화

    “CCTV는 내가 설치한 거야.”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재빨리 말했다.“저걸 설치한 이유는 너희의 안전을 위해서야. 오늘 밤처럼, 내가 없었으면...”“대표님이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저 사람이 우리 모녀의 삶에 등장하는 일도 없었겠죠.”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이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이것도 내 잘못이라는 거야?”“그럼 아니에요?”성유리가 되물었다.“저 사람, 대표님이 부른 사람들이잖아요.”“난 그냥 이삿짐센터를 불렀을 뿐이야. 거기서 어떤 사람을 보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대표님이었잖아요. 대표님만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걸요.”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무슨 일이 생기든 모든 책임을 다 박한빈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었고 박한빈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반박하고 변명해보려 해도 아무 소용없었다.성유리도 더는 박한빈은 신경 쓰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하지만 성유리가 뒤늦게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전선이 여전히 끊긴 상태가 집 안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는 점이다.성유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결국, 그녀는 성하늘을 안고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박한빈은 여전히 앞집 문 앞에 서 있었다.그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이 모든 일을 예상했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조금 전과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성유리가 곤란해지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이 시간에 업체 부르긴 힘들 거야.”박한빈이 말했다.성유리는 그의 말에 아무 대꾸로 하지 않은 채 성하늘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이미 한 시간 동안이나 시달리며 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탓에 성하늘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이는 한 손으로 성유리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눈을 비비적대고 있었다.“이 늦은 시간에 애 데리고 어딜 가려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09화

    그 광경에 성유리의 낯빛이 곧바로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던 열쇠를 빼앗듯 가져갔다.“너...”성유리는 설마 훔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곧장 입을 열었다.“아까 네가 밖에서 물건 꺼내다가 떨어뜨린 거야. 그걸 내가 주운 거고.”“그럼 왜 진작 안 줬는데요?”“네가 말할 틈을 안 줬잖아.”박한빈은 조금 억울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게다가 애가 그렇게 급하다는데, 병이라도 나면 안 되잖아.”박한빈의 말은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들렸다.잠시 할 말을 잃은 성유리는 가만히 박한빈을 노려보다가 성하늘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주스... 안 마실 거야?”박한빈이 뒤에서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박한빈이 일부러 이런 짓을 한다는 것쯤은 성유리도 눈치챘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열쇠부터 건넸을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에 열이 올랐던 건지 문을 닫던 성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런 엄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성하늘이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하늘이가 잘못한 거야?”이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가 다급히 사과했다.“아니야, 그런 거. 엄마가 실수로 문을 너무 세게 닫아서 그래. 엄마 화 안 났어.”성하늘은 그렇게 성유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로 성유리는 집까지 찾아와 준 업체 직원에게 오랫동안 상황 설명을 해줘야 했고, 먼 길 달려온 그에게 교통비까지 물어주고 나서야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그렇게 박한빈을 향한 성유리의 원망이 한층 더 추가됐다.그때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그저 지나가면 끝일 작은 해프닝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자기 전, 샤워를 준비하던 그때, 머리 위에서 전등이 갑자기 깜빡이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집안 전체가 어둠에 휩싸여 버렸다.침대 위에서 놀고 있던 성하늘 역시 깜짝 놀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08화

    “잠깐만요.”엘리베이터 문밖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성유리도 곧바로 열림 버튼을 눌러줬을 터였다.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여느 때와 달리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친 듯이 닫힘 버튼만 연속으로 눌러대고 있었다.그런데도 엘리베이터 밖의 사람보다 한발 늦고 말았다. 문이 천천히 닫히려던 그 순간, 남자가 닫히려는 문을 손으로 잡았던 탓이다.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성유리의 입술은 열려버린 엘리베이터 문과는 반대로 꽉 다물어졌다.남자는 분명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성유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성유리는 그런 남자의 인사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성하늘을 데리고 옆으로 물러섰다.그녀는 마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남자를 무서운 바이러스라도 되는 양 취급하며 최대한 그와 멀어지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런 모녀를 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점점 올라가는 숫자판만 바라보고 있었다.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성유리와 성하늘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현관 앞으로 도착한 성유리는 열쇠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였다.그녀는 그제야 뒤늦게 자신의 열쇠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성하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는 대충 아이의 말에 대답해준 후 더욱 다급한 손길로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찾아보아도 가방 안에 있어야 할 그 열쇠들이 보이지 않았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다니까.”시간이 꽤 걸리자 성하늘의 목소리도 더욱 다급해져 더 끌었다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들렸다.성유리가 아이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려던 그때, 모녀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집에서 해결할래?”그 소리에 가방을 뒤적이던 성유리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지만 아이는 여전히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박한빈은 더 고민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성하늘을 안아 들어 자신의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성유리는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이게 지금 무슨 짓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607화

    서훈은 박한빈의 비서실장으로서 평소 박한빈과 거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그런 서훈을 시켜 짐을 옮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뻔할 뻔 자였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성유리는 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셔츠 하나만 걸친 채 소매를 걷어 올린 남자의 소매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그의 머리카락은 어느 정도 흐트러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 허술함이 남자의 생기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성유리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그 상태로 한참이나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다가 입을 열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우연이라니?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박한빈의 얼굴이 뭔가를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도 박한빈의 말을 믿을 사람은 바보가 아닌 이상 존재할 리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은 더 상대하지도 않은 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성하늘 역시 당연하게도 박한빈을 알아보았다.아이는 유심히 박한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 성하늘은 곧장 성유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엄마,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나도 몰라.”성유리의 대답은 아이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다. 성하늘은 곧장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난 저 사람 진짜 싫어. 자꾸 거머리처럼 달라붙잖아.”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휴대폰을 꺼내 근처의 임대 정보를 확인하며 이사 갈 만한 집이 있는지 찾아보았다.이사가 번거롭긴 했지만 이미 이 동네에 익숙해진 성유리에게는 별 큰 문제도 아니었다.적어도 그녀는 자신만 이사하면 박한빈이 계속 따라붙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오전 시간이 다 지나도록 웹사이트는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집 창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구조가 너무 별로였고, 동네가 너무 낡았다.무엇보다 성하늘이 이미 이곳에서 사귄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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