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분노, 그리고 굴욕과 공포의 감정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성유리는 그 충격으로 몸부림조차 할 수 없어 잠시 멈췄지만 몇 초 후 정신을 차리자마자 더욱 거칠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입을 크게 벌려 그의 손등을 있는 힘껏 물었다. 온몸의 힘을 다해 문 성유리기에 남자의 살이 거의 뜯길 정도였다. 그제야 그 남자는 참지 못하고 고통에 하던 행동을 멈추더니 신음을 냈다. 그 틈을 타 성유리는 무릎으로 그의 복부를 강하게 찼지만 이번에는 남자가 먼저 대비를 하고 있었다.남자는 성유리의 다리를 붙잡아 아래로 눌러 제압한 뒤, 그녀의 입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성유리는 곧바로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거 놔요! 살려주세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이미 풀고 있던 넥타이를 그녀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 남자의 몸에서는 진한 술 냄새가 났지만 그보다 더 익숙한 냄새가 성유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성유리는 그 순간 치가 떨렸고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남자를 쳐다봤다. 방 안에 불은 꺼져 있었기에 어둠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성유리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넥타이를 성유리의 입에 밀어 넣은 뒤, 다시 그것으로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 성유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시야마저 완전히 차단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불길한 추측이 자리 잡았고 성유리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남자의 일방적인 분풀이였다.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고 그제야 성유리는 깨달았다. 이전까지 그가 그녀를 다루던 방식은 그나마 부드러운 편이었다는 것을. 이제 남자는 그녀를 만족시키려는 마음을 완전히 버렸는지 성유리는 오로지 고통만 느낄 뿐이었다. 일 초는 일 년같이 느껴졌고 결국 성유리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정도로 지쳐버렸다. 얼마나 시
성유리는 이미 모든 걸 알게 되었지만 박한빈은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이 잘됐다고 생각했다. 다른 모든 사람은 그의 부드럽고 완벽한 모습만을 보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또 다른 면모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 해도 결국 성유리는 박한빈의 아내이자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와 끝까지 함께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박한빈이 자신의 진짜 “얼굴”을 성유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박한빈은 이런 방식과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알게 될 줄은 몰랐다. 거의 광기에 서려 이성을 잃었던 하룻밤이 지나고 박한빈은 잠에서 깨어났다. 겨우 두 시간밖에 자지 않았지만 정신은 매우 맑았다. 옆에 누워 있는 성유리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눈꺼풀은 퉁퉁 부어있었고 목 아래에는 온통 빨간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깨에는 박한빈의 치아 자국까지 선명하게 남아있었지만 그는 언제 그렇게 물었는지 기억나지 않았고 딱히 상관도 없었다. 옷을 입으면서 그는 호텔 프런트에 약을 주문했고 직접 잠 들어있는 성유리에게 발라주려고 했다. 당연히 이 과정이 순조로울 리 없었고 성유리는 약이 몸에 닿자 바로 깨어났고 박한빈이 자기 위에 있는 걸 발견하자 깜짝 놀라 그를 발로 차려고 했다. 그러나 곧 박한빈이 단지 약을 발라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비록 투덜거리며 불만을 표했지만 결국 가만히 있었다. 약을 다 바른 후, 박한빈은 호텔에서 주문한 아침 식사를 성유리의 옆에 놓고는 방을 떠났고 나가기 전 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유리의 여권을 박한빈이 이미 가져간 상황이지만 그녀가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의 일을 겪고 나서 박한빈은 더 이상 예전처럼 조건만으로 그녀를 위협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새로운 협상 카드가 필요해.’ 그리고 그 새로운 카드는 사실 어렵지 않게 준비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준비되어 오고 있
박한빈은 옷을 입으면서 이미 알아차렸지만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다. 예전 성유리가 그의 뺨을 자주 때릴 때도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그대로 하고 회사에 나가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에릭의 시선이 닿자 박한빈은 이상하게도 어딘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들은 게 있는데 너희 쪽 여성들은 대개 현모양처에 부드럽고 사랑스럽다며? 그런데 보니까 네 아내는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아.” 에릭이 박한빈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너는 왜 성유리 씨와 결혼했어?” 에릭은 마치 성유리에 점점 더 흥미가 생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한빈은 셔츠 깃을 살짝 당기며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SK 쪽 협상은 어떻게 돼 가고 있어?” “상황이 별로 좋지만은 않아.” 박한빈의 딱딱한 말투에도 에릭은 신경 쓰지 않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데이비드 그 노인이 도무지 입을 열지 않으려고 해. 네가 직접 가야 할 것 같아.” 박한빈이 씩 미소를 지었다. “네가 가는 게 더 적합하지 않나? 어차피 그 사람 딸을 너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하잖아.” “내가 미쳤다고 찾아가서 만나겠냐?” “괜찮지 않나? 들으니 그 딸 명의로 된 석유 광산 몇 개가 있다던데 그 여자랑 결혼하면 너도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 아냐.” 에릭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박한빈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그 여자 너한테도 관심이 적진 않던데?” “나는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잖아.” 박한빈은 손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쪽은 결혼하면 상대만 보는 일편단심이야. 그러니 네가 가는 게 더 적합하지. 그걸 핑계 삼아 그 노인의 입을 막을 수 있잖아.”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에릭에게 고정했다. 하지만 에릭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너도 알잖아. 올해 우리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는 이번 일에 달렸다는 거. 너는 이쪽으로 이주할 생각도 없으니 데이비드가 고집을 꺾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움
성유리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생활에 꼭 필요한 물과 각종 음식을 발견했다. 그 음식들은 대부분 하루 종일 보관할 수 있는 빵 종류였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성유리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문 앞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문은 예상대로 밖에서 잠겨 있었고 성유리는 화가 나서 문을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당장 문 열어!”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씩씩거리던 성유리는 다시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호텔 프런트에도 전화를 걸어봤지만 프런트에서는 자신들도 문을 열어줄 권한이 없다고 할 뿐이었다. 성유리가 여러 차례 불만을 제기하며 강하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녀에게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성유리는 하루 종일 방에 갇혀 있어야 할 거라 생각했지만 해질 무렵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박한빈이 돌아온 줄 안 성유리는 그를 마냥 반길 마음은 없었기에 손에 재떨이를 들고 그에게 던질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박한빈이 아니었다. 문 앞에는 로버트가 아주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그를 바라보던 성유리는 들고 있던 재떨이를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요?” “에릭 선생님의 지시로 부인을 저녁 식사에 모시러 왔습니다.” “박한빈 씨는 어디 있나요?” 성유리는 로버트에게 따지듯 물었다.그러나 로버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가 에릭과 함께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지금은 저녁 식사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고민도 없이 거절하려던 성유리에게 로버트가 말했다. “사모님, 빨리 가시죠. 에릭 선생님께서도 바쁘십니다.” 성유리는 눈을 꼭 감았다 뜨더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 날씨를 고려해 박한빈이 챙겨준 옷은 대부분 슬립 드레스였는데 지금 그녀의 몸에 남은 흔적들은 슬립 드레스로는 도저히 가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얇은 흰색 시스루
에릭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평온했는데 마치 성유리와 날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잠시 그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에릭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웃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사실 성유리는 에릭을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었다. 그때 에릭은 좋은 교양과 박한빈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성유리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의 눈빛에는 뚜렷한 오만함과 성유리에 대한 무시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둘이 있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에릭은 이런 태도가 지금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억지로 온화한 표정을 지어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고 에릭의 웃음은 도리어 일그러져있어 어딘가 섬뜩해 보였다. 에릭은 성유리에게 더 많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 그림 마음에 드는 겁니까? 그럼 제가 성유리 씨에게 선물해 주죠.” “괜찮아요.” 성유리는 에릭의 말에 재빨리 거절하며 대답했다. “저는 잘 모르거든요.” “그러십니까? 근데 여기 이렇게 많은 것들 중에 성유리 씨는 유독 이걸 골랐잖아요. 그래도 보는 눈은 있는 것 같습니다.” 에릭의 말은 칭찬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불쾌한 느낌만 들었다. 박한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성유리는 더 이상 에릭과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박한빈 씨도 있을 때 같이 밥이나 먹죠.” 말을 끝낸 성유리는 곧장 뒤돌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에릭은 성유리를 굳이 막으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성유리가 입구에 다다르자 문 앞에 서 있던 정장 차림의 체구가 큰 남자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당황한 성유리가 다시 에릭을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그야 당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려는 거죠.” 에릭은 담담히 대답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저는 당신이
에릭은 불쾌한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성유리는 결국 자신이 초대한 손님이니 꾹 참고 계속 말했다. “잘 이해가 안 되시나본데 지금 저는 남자대 여자로 이성적인 호감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하하.” 성유리는 에릭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뭐지?’ 그녀의 웃음에 에릭의 미간은 더더욱 찌푸려졌다. “에릭 씨는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잖아요.” “지금 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짜증이 나시는 걸 꾹참고 계시는 거 다 알아요. 그러니까 굳이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성유리는 에릭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쯧. 숨기려 했는데 결국 들켜버렸네요.” “네. 그러니까 원하시는 게 뭔지 저한테 바로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에릭은 도도하게 구는 성유리를 오랫동안 말없이 쳐다보더니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역시 로얀이 선택한 여자 아니랄까 봐 재미있네요.” 그는 성유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말 참 잘 꺼냈어요. 저도 바쁜 사람이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전 성유리 씨와 자고 싶거든요.” 만약 성유리가 입안에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면 그대로 뿜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는 에릭의 말에 충격을 받아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시각, 에릭의 시선은 이미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결국 성유리가 걸친 얇은 시스루 셔츠 위에 멈췄다. “로얀과 어젯밤 꽤 재미있게 놀았나 보군요. 오늘 아침 그의 몸에 남아있는 자국을 봤어요.” “하지만 전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여자란 침대에서 얌전해야 하거든요. 그러니 부탁인데 잠시 후엔 제 몸에 어떤 자국도 남기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아시겠죠?” ‘미친놈인가?’ 성유리는 차마 입 밖으로 욕설을 내뱉지 못해 속으로 에릭에게 고함을 질렀다. ‘역시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어.’ 박한빈과 에릭이 저녁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이미 두 사람은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과 똑같이 미친 사람들이라는 걸 성유
한편 박한빈은 아주 순조롭게 담판을 마쳤다. 그렇지만 데이비드는 아니나 다를까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고는 박한빈에게 저녁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며 자신의 딸을 소개해 줬다. 박한빈이 몇 번이나 자신은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라고 말했지만 데이비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딸이 아주 말을 잘 듣는 편이니 이곳에 남아 딸을 아무 때나 보러 와도 괜찮다고까지 했다. 박한빈은 끝까지 데이비드의 말을 믿지도, 듣지도 않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티격태격” 다퉜다. 그가 비행기에 오른 시간은 이미 12시가 지나버린 뒤였기에 박한빈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호텔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두 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박한빈은 회의를 하고 있거나 비행기에 타 있어 미처 받지 못했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아주지 않았다. ‘화가 났나?’ 성유리 혼자 호텔에 가둬두고 온 것이 마음이 걸려 박한빈은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 화가 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참 고민하던 박한빈은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케이크 하나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비록 성유리가 지금 화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약간의 성의는 보여야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한빈은 방 카드로 문을 열었지만 왜인지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이 또한 박한빈이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그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케이크를 든 채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밤 날씨는 생각보다 너무 좋아 창문을 통해 달빛이 환하게 비췄다. 그래서 방 안 구조는 한눈에 잘 보였고 박한빈은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었는지 움직이지 못했다. 성유리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줄 알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박한빈은 행여나 자신이 피곤한 탓에 성유리를 발견하지 못한 줄 알아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가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박한빈은 머릿속이 새하얘
그 순간, 에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호원들과 다투던 박한빈은 에릭의 목소리에 재빨리 뒤를 돌았다. 하지만 허리띠도 풀려있고 편한 잠옷 차림으로 나온 에릭을 보는 순간, 박한빈의 안색은 아까보다 더 굳었고 떨리는 목소리로 에릭에게 물었다. “성유리는?” “뭐?” “성유리 어디 있냐고 묻잖아!” 박한빈은 화를 못 이겨 에릭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꽉 잡으며 고함을 질렀다. “왜 이렇게 흥분해?” 에릭은 늘 그렇듯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네 아내 잘 있어. 방금 잠 들었는데?” 웃어 보이기까지 하는 에릭을 보자 박한빈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 없이 별장 위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때, 성유리는 아래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방에서 나왔다. 박한빈은 아무 일 없이 아직 멀쩡한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성유리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성유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다행이네. 유리한테 아무 일도 없어서.’ 성유리가 괜찮다는 확신이 들자 박한빈은 점점 더 이성을 되찾았고 그제야 자신에게 성유리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 내내 박한빈은 이것저것 많은 가능성들을 생각했었다. 만약 에릭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필경 박한빈을 질투하고 라이벌로 삼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 사람들은 입에도 못 담을 짓들을 숨 쉬듯이 하기에 박한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잡생각들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심한 공포와 걱정이 밀려오자 박한빈은 오직 성유리만 안전하면 된다고 빌고 또 빌었고 부디 그녀에게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 시각, 성유리는 박한빈의 품에 꼭 안겨있었기에 그의 체온과 심장박동이 잘 느껴졌다. 저녁 내내 미친 듯이 뛰던 심장과 오르내리던 감정 기복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에릭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어때? 이제는 내가 이긴 판이 확실한 건가?”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