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분노, 그리고 굴욕과 공포의 감정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성유리는 그 충격으로 몸부림조차 할 수 없어 잠시 멈췄지만 몇 초 후 정신을 차리자마자 더욱 거칠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입을 크게 벌려 그의 손등을 있는 힘껏 물었다. 온몸의 힘을 다해 문 성유리기에 남자의 살이 거의 뜯길 정도였다. 그제야 그 남자는 참지 못하고 고통에 하던 행동을 멈추더니 신음을 냈다. 그 틈을 타 성유리는 무릎으로 그의 복부를 강하게 찼지만 이번에는 남자가 먼저 대비를 하고 있었다.남자는 성유리의 다리를 붙잡아 아래로 눌러 제압한 뒤, 그녀의 입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성유리는 곧바로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거 놔요! 살려주세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이미 풀고 있던 넥타이를 그녀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 남자의 몸에서는 진한 술 냄새가 났지만 그보다 더 익숙한 냄새가 성유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성유리는 그 순간 치가 떨렸고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남자를 쳐다봤다. 방 안에 불은 꺼져 있었기에 어둠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성유리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넥타이를 성유리의 입에 밀어 넣은 뒤, 다시 그것으로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 성유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시야마저 완전히 차단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불길한 추측이 자리 잡았고 성유리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남자의 일방적인 분풀이였다.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고 그제야 성유리는 깨달았다. 이전까지 그가 그녀를 다루던 방식은 그나마 부드러운 편이었다는 것을. 이제 남자는 그녀를 만족시키려는 마음을 완전히 버렸는지 성유리는 오로지 고통만 느낄 뿐이었다. 일 초는 일 년같이 느껴졌고 결국 성유리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정도로 지쳐버렸다. 얼마나 시
성유리는 이미 모든 걸 알게 되었지만 박한빈은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이 잘됐다고 생각했다. 다른 모든 사람은 그의 부드럽고 완벽한 모습만을 보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또 다른 면모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 해도 결국 성유리는 박한빈의 아내이자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와 끝까지 함께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박한빈이 자신의 진짜 “얼굴”을 성유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박한빈은 이런 방식과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알게 될 줄은 몰랐다. 거의 광기에 서려 이성을 잃었던 하룻밤이 지나고 박한빈은 잠에서 깨어났다. 겨우 두 시간밖에 자지 않았지만 정신은 매우 맑았다. 옆에 누워 있는 성유리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눈꺼풀은 퉁퉁 부어있었고 목 아래에는 온통 빨간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깨에는 박한빈의 치아 자국까지 선명하게 남아있었지만 그는 언제 그렇게 물었는지 기억나지 않았고 딱히 상관도 없었다. 옷을 입으면서 그는 호텔 프런트에 약을 주문했고 직접 잠 들어있는 성유리에게 발라주려고 했다. 당연히 이 과정이 순조로울 리 없었고 성유리는 약이 몸에 닿자 바로 깨어났고 박한빈이 자기 위에 있는 걸 발견하자 깜짝 놀라 그를 발로 차려고 했다. 그러나 곧 박한빈이 단지 약을 발라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비록 투덜거리며 불만을 표했지만 결국 가만히 있었다. 약을 다 바른 후, 박한빈은 호텔에서 주문한 아침 식사를 성유리의 옆에 놓고는 방을 떠났고 나가기 전 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유리의 여권을 박한빈이 이미 가져간 상황이지만 그녀가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의 일을 겪고 나서 박한빈은 더 이상 예전처럼 조건만으로 그녀를 위협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새로운 협상 카드가 필요해.’ 그리고 그 새로운 카드는 사실 어렵지 않게 준비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준비되어 오고 있
박한빈은 옷을 입으면서 이미 알아차렸지만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다. 예전 성유리가 그의 뺨을 자주 때릴 때도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그대로 하고 회사에 나가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에릭의 시선이 닿자 박한빈은 이상하게도 어딘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들은 게 있는데 너희 쪽 여성들은 대개 현모양처에 부드럽고 사랑스럽다며? 그런데 보니까 네 아내는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아.” 에릭이 박한빈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너는 왜 성유리 씨와 결혼했어?” 에릭은 마치 성유리에 점점 더 흥미가 생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한빈은 셔츠 깃을 살짝 당기며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SK 쪽 협상은 어떻게 돼 가고 있어?” “상황이 별로 좋지만은 않아.” 박한빈의 딱딱한 말투에도 에릭은 신경 쓰지 않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데이비드 그 노인이 도무지 입을 열지 않으려고 해. 네가 직접 가야 할 것 같아.” 박한빈이 씩 미소를 지었다. “네가 가는 게 더 적합하지 않나? 어차피 그 사람 딸을 너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하잖아.” “내가 미쳤다고 찾아가서 만나겠냐?” “괜찮지 않나? 들으니 그 딸 명의로 된 석유 광산 몇 개가 있다던데 그 여자랑 결혼하면 너도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 아냐.” 에릭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박한빈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그 여자 너한테도 관심이 적진 않던데?” “나는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잖아.” 박한빈은 손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쪽은 결혼하면 상대만 보는 일편단심이야. 그러니 네가 가는 게 더 적합하지. 그걸 핑계 삼아 그 노인의 입을 막을 수 있잖아.”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에릭에게 고정했다. 하지만 에릭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너도 알잖아. 올해 우리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는 이번 일에 달렸다는 거. 너는 이쪽으로 이주할 생각도 없으니 데이비드가 고집을 꺾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움
성유리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생활에 꼭 필요한 물과 각종 음식을 발견했다. 그 음식들은 대부분 하루 종일 보관할 수 있는 빵 종류였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성유리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문 앞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문은 예상대로 밖에서 잠겨 있었고 성유리는 화가 나서 문을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당장 문 열어!”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씩씩거리던 성유리는 다시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호텔 프런트에도 전화를 걸어봤지만 프런트에서는 자신들도 문을 열어줄 권한이 없다고 할 뿐이었다. 성유리가 여러 차례 불만을 제기하며 강하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녀에게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성유리는 하루 종일 방에 갇혀 있어야 할 거라 생각했지만 해질 무렵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박한빈이 돌아온 줄 안 성유리는 그를 마냥 반길 마음은 없었기에 손에 재떨이를 들고 그에게 던질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박한빈이 아니었다. 문 앞에는 로버트가 아주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그를 바라보던 성유리는 들고 있던 재떨이를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요?” “에릭 선생님의 지시로 부인을 저녁 식사에 모시러 왔습니다.” “박한빈 씨는 어디 있나요?” 성유리는 로버트에게 따지듯 물었다.그러나 로버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성유리는 그가 에릭과 함께 있을 거라 짐작했지만 지금은 저녁 식사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고민도 없이 거절하려던 성유리에게 로버트가 말했다. “사모님, 빨리 가시죠. 에릭 선생님께서도 바쁘십니다.” 성유리는 눈을 꼭 감았다 뜨더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 날씨를 고려해 박한빈이 챙겨준 옷은 대부분 슬립 드레스였는데 지금 그녀의 몸에 남은 흔적들은 슬립 드레스로는 도저히 가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얇은 흰색 시스루
에릭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평온했는데 마치 성유리와 날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성유리는 잠시 그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에릭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웃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사실 성유리는 에릭을 한 번밖에 만난 적이 없었다. 그때 에릭은 좋은 교양과 박한빈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성유리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의 눈빛에는 뚜렷한 오만함과 성유리에 대한 무시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둘이 있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에릭은 이런 태도가 지금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억지로 온화한 표정을 지어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고 에릭의 웃음은 도리어 일그러져있어 어딘가 섬뜩해 보였다. 에릭은 성유리에게 더 많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 그림 마음에 드는 겁니까? 그럼 제가 성유리 씨에게 선물해 주죠.” “괜찮아요.” 성유리는 에릭의 말에 재빨리 거절하며 대답했다. “저는 잘 모르거든요.” “그러십니까? 근데 여기 이렇게 많은 것들 중에 성유리 씨는 유독 이걸 골랐잖아요. 그래도 보는 눈은 있는 것 같습니다.” 에릭의 말은 칭찬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불쾌한 느낌만 들었다. 박한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성유리는 더 이상 에릭과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박한빈 씨도 있을 때 같이 밥이나 먹죠.” 말을 끝낸 성유리는 곧장 뒤돌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에릭은 성유리를 굳이 막으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성유리가 입구에 다다르자 문 앞에 서 있던 정장 차림의 체구가 큰 남자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당황한 성유리가 다시 에릭을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그야 당신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려는 거죠.” 에릭은 담담히 대답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저는 당신이
에릭은 불쾌한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성유리는 결국 자신이 초대한 손님이니 꾹 참고 계속 말했다. “잘 이해가 안 되시나본데 지금 저는 남자대 여자로 이성적인 호감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하하.” 성유리는 에릭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뭐지?’ 그녀의 웃음에 에릭의 미간은 더더욱 찌푸려졌다. “에릭 씨는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잖아요.” “지금 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짜증이 나시는 걸 꾹참고 계시는 거 다 알아요. 그러니까 굳이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성유리는 에릭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쯧. 숨기려 했는데 결국 들켜버렸네요.” “네. 그러니까 원하시는 게 뭔지 저한테 바로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에릭은 도도하게 구는 성유리를 오랫동안 말없이 쳐다보더니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역시 로얀이 선택한 여자 아니랄까 봐 재미있네요.” 그는 성유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말 참 잘 꺼냈어요. 저도 바쁜 사람이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전 성유리 씨와 자고 싶거든요.” 만약 성유리가 입안에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면 그대로 뿜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는 에릭의 말에 충격을 받아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시각, 에릭의 시선은 이미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결국 성유리가 걸친 얇은 시스루 셔츠 위에 멈췄다. “로얀과 어젯밤 꽤 재미있게 놀았나 보군요. 오늘 아침 그의 몸에 남아있는 자국을 봤어요.” “하지만 전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여자란 침대에서 얌전해야 하거든요. 그러니 부탁인데 잠시 후엔 제 몸에 어떤 자국도 남기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아시겠죠?” ‘미친놈인가?’ 성유리는 차마 입 밖으로 욕설을 내뱉지 못해 속으로 에릭에게 고함을 질렀다. ‘역시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어.’ 박한빈과 에릭이 저녁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이미 두 사람은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과 똑같이 미친 사람들이라는 걸 성유
한편 박한빈은 아주 순조롭게 담판을 마쳤다. 그렇지만 데이비드는 아니나 다를까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고는 박한빈에게 저녁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며 자신의 딸을 소개해 줬다. 박한빈이 몇 번이나 자신은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라고 말했지만 데이비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딸이 아주 말을 잘 듣는 편이니 이곳에 남아 딸을 아무 때나 보러 와도 괜찮다고까지 했다. 박한빈은 끝까지 데이비드의 말을 믿지도, 듣지도 않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티격태격” 다퉜다. 그가 비행기에 오른 시간은 이미 12시가 지나버린 뒤였기에 박한빈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호텔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두 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박한빈은 회의를 하고 있거나 비행기에 타 있어 미처 받지 못했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아주지 않았다. ‘화가 났나?’ 성유리 혼자 호텔에 가둬두고 온 것이 마음이 걸려 박한빈은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 화가 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참 고민하던 박한빈은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케이크 하나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비록 성유리가 지금 화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약간의 성의는 보여야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한빈은 방 카드로 문을 열었지만 왜인지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이 또한 박한빈이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그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케이크를 든 채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밤 날씨는 생각보다 너무 좋아 창문을 통해 달빛이 환하게 비췄다. 그래서 방 안 구조는 한눈에 잘 보였고 박한빈은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었는지 움직이지 못했다. 성유리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줄 알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박한빈은 행여나 자신이 피곤한 탓에 성유리를 발견하지 못한 줄 알아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성유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성유리가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박한빈은 머릿속이 새하얘
그 순간, 에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호원들과 다투던 박한빈은 에릭의 목소리에 재빨리 뒤를 돌았다. 하지만 허리띠도 풀려있고 편한 잠옷 차림으로 나온 에릭을 보는 순간, 박한빈의 안색은 아까보다 더 굳었고 떨리는 목소리로 에릭에게 물었다. “성유리는?” “뭐?” “성유리 어디 있냐고 묻잖아!” 박한빈은 화를 못 이겨 에릭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꽉 잡으며 고함을 질렀다. “왜 이렇게 흥분해?” 에릭은 늘 그렇듯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네 아내 잘 있어. 방금 잠 들었는데?” 웃어 보이기까지 하는 에릭을 보자 박한빈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 없이 별장 위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때, 성유리는 아래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방에서 나왔다. 박한빈은 아무 일 없이 아직 멀쩡한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성유리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성유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다행이네. 유리한테 아무 일도 없어서.’ 성유리가 괜찮다는 확신이 들자 박한빈은 점점 더 이성을 되찾았고 그제야 자신에게 성유리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 내내 박한빈은 이것저것 많은 가능성들을 생각했었다. 만약 에릭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필경 박한빈을 질투하고 라이벌로 삼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 사람들은 입에도 못 담을 짓들을 숨 쉬듯이 하기에 박한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잡생각들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심한 공포와 걱정이 밀려오자 박한빈은 오직 성유리만 안전하면 된다고 빌고 또 빌었고 부디 그녀에게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 시각, 성유리는 박한빈의 품에 꼭 안겨있었기에 그의 체온과 심장박동이 잘 느껴졌다. 저녁 내내 미친 듯이 뛰던 심장과 오르내리던 감정 기복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에릭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어때? 이제는 내가 이긴 판이 확실한 건가?”
성유리의 대답은 홍지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뒤,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박한빈이 곧장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떠나기 전, 그는 단 한 번도 홍지은을 쳐다보지 않았다.하지만 홍지은은 알았다.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그러나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시궁창뿐인 인생이 여기서 훨씬 나빠진다고 한들 얼마나 더 나빠질까?그렇다고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었다.그러니 죽더라도 반드시 한 사람은 끌어내릴 것이다.성유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지 홍지은은 아직 모른다.세상 그 누가 행복하게 지낸다 해도 괜찮다.‘성유리는 절대 안 돼.’...성유리는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복도 끝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뒤따라오던 박한빈도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옆에 조용히 서서 성유리만 쳐다봤다.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나 상대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연달아 몇 번을 끊었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그렇게 주차장까지 도착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난 박한빈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박 대표님, 저예요. 왜 말도 없이 먼저 가셨습니까? 저...”박한빈은 상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행여 핸드폰이 또다시 울릴까 봐 박한빈은 이번에 아예 전원을 꺼버
홍지은의 말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아까보다 더 얼굴을 찌푸렸다.눈빛에 그득히 담겨있는 혐오와 무시의 감정은 선명히 드러났지만 박한빈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바로 맞은편에 서 있던 홍지은도 당연히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진짜예요. 박 대표님,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제 남편은...”“꺼져.”단 두 글자뿐인 박한빈의 대답에 홍지은은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사실... 신경 쓰이는 건 박한빈의 대답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었다.홍지은은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난감해진다는 사실을.그러나 박한빈은 홍지은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자리를 떠버렸다.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홍지은은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박한빈 씨, 계속 이러신다면... 제가 유리한테 그 일들을 다 알려줘도 제 탓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고 이내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쳐다봤다.그러자 홍지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제가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그때 유정 씨가 임신했던 아이 말이에요. 박 대표님 아이 맞죠?”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홍지은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냉랭했다.그의 눈빛에 홍지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말했다.“지금 유정 씨가 잡혀있긴 하지만 그 일들이 다 끝이 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때 유리가 잃었던 아이도... 사실 박한빈 씨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유정 씨가 그랬다는 걸.”홍지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의 뒤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쿵!그 소리에 박한빈이 뒤돌아보자 성유리가 머지않은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그녀의 표정은
그리고 이내 홍지은은 자신의 자리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금성에서 제일가는 큰 인물은 박한빈은 당연하게도 가장 앞에 있는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무대 위에 전시되는 물건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홍지은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 박한빈도 마침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멈칫하던 그는 다정하게 성유리 귓가에 얽혀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그저 연인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박한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을 일일이 다 풀어줬다.만약 홍지은이 직접 본 게 아니라면 그녀는 꿈에서도 박한빈이 이런 일을 한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너무 놀란 홍지은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박한빈 좀 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성유리는 퉁명스럽게 그의 손을 밀쳐냈다.그리고는 박한빈을 슬쩍 째려봤지만 그는 화를 내기도 커녕 오히려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꽤 거리가 있던 홍지은과 두 사람이기에 그녀는 박한빈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옆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기 좀 봐요. 두 사람 사이 너무 좋아 보이지 않아요? 유리가 평소에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게 혹시 박 대표님께서 쟤를 숨겨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니까요.”홍지은의 옆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성에서 거주하는 현지 사람이 아니었고 결혼한 남자도 업계에서 중하층에 속하는 위치였다.전에 그녀는 홍지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막상 말을 거니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그렇게 홍지은의 미소와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정 사모님?”상대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이내 정연화는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홍지은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선명히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은 ‘화살’이 되어 홍지은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고 있었고 흐르는 ‘피’조차 그녀에게는 차갑게 느껴졌다.입술을 뻥긋거리
홍지은은 마치 성유리와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라는 듯 능글맞게 대꾸했다.그리고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발 빠르게 성유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은 경매에 참석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유리는 미소를 지은 채 그의 곁을 지켰다.사실 그녀는 웃고는 있었지만 이미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상태였고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그래서 홍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예전에는 이런 장소에 오는 거 별로라고 했잖아.”홍지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잡힌 손을 빼냈다.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홍지은은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보며 계속 말했다.“어머? 박 대표님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만약 이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면 아무리 싫어도 박한빈은 몇 마디 대답은 해줬었다.그렇지만 유독 오늘따라 그는 대답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말을 건 상대가 홍지은이라서 싫었다.필경 홍지은을 볼 때면 성유리가 지나간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까 말이다.그게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박한빈은 성유리가 홍지은을 마주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오다가다 마주친다고 하더라도.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고 홍지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녀와 함께 떠나버렸다.박한빈은 홍지은이 자신의 대답을 들을 자격도, 자기가 대답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답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제자리에 서 있던 홍지은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던 박한빈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박 대표님!”이내 다른 사람이 박한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그는 미소 지으며 상대에게 성유리를 소개해 줬다.“여기는 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성유리라고 하고요.”“안녕하세요. 사모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
사실 박한빈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곤 끝없는 공부와 훈련뿐이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할 것이 많았다.학교 성적은 언제나 최고여야 했고 악기나 골프, 승마를 포함한 다양한 외국어까지 익혀야 했다.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박한빈의 신분을 부러워했다.박 씨라는 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광을 의미했다.하지만 그 영광과 함께 짊어져야 할 무게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인지조차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한빈이 평범한 아이로서의 행복을 잃었다는 사실이다.잃을 게 많은 만큼 박한빈은 손에 넣은 것도 많았다.그리고 그는 자신이 짊어졌던 짐을 하늘이에게 만큼은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그래서 얼마 전, 김서영이 하늘이에게 특별 교육을 시키자고 했을 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박한빈, 네 딸은 분명 앞으로 금성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될 거야.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익히지 못하면 그 신분이 아깝지 않겠니?”김서영은 박한빈을 설득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뭐가 어떻게 됐든 하늘이는 박한빈의 핏줄이자 친딸이다. 설령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말이다.감히 누가 박한빈의 딸을 무시하고 얕잡아볼 수 있겠는가?그래서 김서영이 뭐라고 하든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 이야기를 마친 후, 박한빈의 품 안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박한빈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녀는 살짝 찌푸린 미간과 다물린 입술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인가 싶어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에요.”성유리는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그런데 이거 왜 아직도 안 멈추죠?”“곧 멈출 거야.”박한빈은 짧게 대답하다 문득 깨달았다.“설마... 지금 나를 가슴 아파하는 거야?“아니거든요?”성유리는 전혀 망설
박한빈은 천천히 웃음을 거두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접 물을 따라왔다.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마실 물을 준비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박한빈이 몸을 휙 돌리곤 성유리에게 컵을 내밀었다.“방금 건 그냥 장난이었어. 재미없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물컵을 받아 들었다.그것만으로도 이미 박한빈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푹 쉬어.”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성유리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컵을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 나갔다 올게요.”그녀가 문 쪽으로 향하려 하자 박한빈이 손목을 붙잡았다.“어디 가려고?”“정원이요. 햇볕 좀 쬐려고.”“나도 같이 가.”“아까 그렇게 아프다면서 괜찮으세요?”성유리는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그 눈빛에는 박한빈을 향한 의심이 가득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나도 햇볕 좀 쬐고 싶어. 그리고 의사가 말했잖아? 내 면역력 좋다고.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래.”‘심각하지 않다?’‘그러면 아까까지는 왜 그렇게 책임지라고 난리였는데?’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지만 결국 성유리는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그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박한빈은 마치 그것을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성유리의 손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방에서 본 그대로 오늘 날씨는 유난히 화창했다.햇살 아래, 정원의 회전목마가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박한빈이 특별히 주문 제작해 놓은 것이라 그런지 원색의 유채가 한층 더 생생해 보였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그런데, 박한빈은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보내는 그윽한 시선을 느꼈지만 성유리는 한참을 모른 척했다.박한빈이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한번 타볼래?”“뭐를요?”“회전목마.”성유리는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어린애도 아니고.”“그럼 어릴 때는 타봤어?”그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잠시 침
“그럼 자. 난 네가 잠들면 나갈게.”박한빈의 말을 성유리가 철석같이 믿을 리가 없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와 다투는 것도 귀찮았다.그래서 그냥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푹 덮고 등을 돌리고는 박한빈에게서 멀어졌다.사실 처음에는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조금 전 박한빈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피곤함이 몰려왔다.머릿속에 들던 생각도 점점 흐려지고 그렇게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의 말을 거짓말이었다.다음 날 아침, 성유리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바로 옆에 누워 있는 박한빈이었다.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들어있었는데 성유리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당장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갑자기 그가 몸을 돌려 두어 번 기침을 했다.그리곤 반쯤 감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너한테서 감기가 옮은 것 같아.”성유리는 그 말에 그대로 멈춰버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잡아 자기 이마에 갖다 댔다.“한번 만져봐. 나 열 나는 거 같지 않아?”성유리는 일단 체온계를 가져와 박한빈의 체온을 재봤다.그러나 체온계에 표시된 건 아주 멀쩡한 수치였다.그 말인즉 박한빈은 열이 안 나고 있다는 것이었고 감기에 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몸이 아프다며 자신이 감기에 걸렸으니 여기서 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전의 고고하고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마치 억지를 부리는 아이 같았다.결국 성유리는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방으로 옮겨서 지내기로 결심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간파한 듯,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뭐 하려는 거야?”“방을 옮길 거예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의사 선생님께서 교차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요.”“그럼 난 어떡하라고?”“저택에 도우미분들도 많고 의사 선생님도 있잖아요. 박한빈 씨를 돌볼 사람 충분하죠.”“난 다른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
“걱정 마, 엄마 괜찮으니까.”하늘이는 문가에 서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한참을 그러던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시 감기 옮으면 어떡해?”그 말에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엄마 마스크 쓰고 있잖아.”그래도 하늘이는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다.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괜찮다는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가서 자. 혼자 잘 수 있겠어?”“응!”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 이제 다 컸어.”“그래, 그럼 가서 쉬어.”하늘이는 여전히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점차 거뒀다.하늘이가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은 걸 확인한 뒤에야 성유리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낮 동안 너무 오래 잠들었던 탓인지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소리.그걸 듣는 순간 성유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곧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침대 곁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몸을 뒤로 빼며 경계하듯 눈을 떴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열은 안 나는지 보려고 했어.”“전 괜찮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이 행여 다른 말을 할까 두려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박한빈 씨는 서재에서 주무셔아 하는 거 아니었어요?”“잠이 안 와.”“그러면 그냥 조용히 나가주세요. 제 잠까지 방해하지 말고.”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미동도 없었다.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점점 짜증이 밀려왔고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빨리 나가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