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에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호원들과 다투던 박한빈은 에릭의 목소리에 재빨리 뒤를 돌았다. 하지만 허리띠도 풀려있고 편한 잠옷 차림으로 나온 에릭을 보는 순간, 박한빈의 안색은 아까보다 더 굳었고 떨리는 목소리로 에릭에게 물었다. “성유리는?” “뭐?” “성유리 어디 있냐고 묻잖아!” 박한빈은 화를 못 이겨 에릭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꽉 잡으며 고함을 질렀다. “왜 이렇게 흥분해?” 에릭은 늘 그렇듯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네 아내 잘 있어. 방금 잠 들었는데?” 웃어 보이기까지 하는 에릭을 보자 박한빈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 없이 별장 위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때, 성유리는 아래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방에서 나왔다. 박한빈은 아무 일 없이 아직 멀쩡한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성유리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성유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다행이네. 유리한테 아무 일도 없어서.’ 성유리가 괜찮다는 확신이 들자 박한빈은 점점 더 이성을 되찾았고 그제야 자신에게 성유리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 내내 박한빈은 이것저것 많은 가능성들을 생각했었다. 만약 에릭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필경 박한빈을 질투하고 라이벌로 삼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 사람들은 입에도 못 담을 짓들을 숨 쉬듯이 하기에 박한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잡생각들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심한 공포와 걱정이 밀려오자 박한빈은 오직 성유리만 안전하면 된다고 빌고 또 빌었고 부디 그녀에게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 시각, 성유리는 박한빈의 품에 꼭 안겨있었기에 그의 체온과 심장박동이 잘 느껴졌다. 저녁 내내 미친 듯이 뛰던 심장과 오르내리던 감정 기복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에릭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어때? 이제는 내가 이긴 판이 확실한 건가?”
박한빈은 잔뜩 긴장한 탓에 온몸이 굳어 있었다.결국 성유리가 젖 먹던 힘을 다해 그를 억지로 끌고 나와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박한빈은 에릭을 당장이라도 죽일 듯 때렸을 것이다.물론 성유리는 박한빈의 싸움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에릭 옆에는 수많은 경호원들이 있었기에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아무리 지금 박한빈이 밉다 해도 이렇게 황당한 상황에서 그가 목숨을 잃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성유리는 오늘 자신이 방 안에 갇혔던 일을 떠올렸다. 그래서 박한빈의 손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려고 했다. 하지만, 순간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목을 꼭 잡더니 욕실로 데리고 갔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던 성유리는 박한빈이 서두르듯 자신의 옷을 벗기려는 행동을 보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박한빈의 동작은 평소보다 더 거칠었고 그녀는 문득 에릭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성유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지금 와서 확인한다고요? 너무 늦은 거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손이 잠시 멈췄다. “저 그 사람이랑 잤어요.” 성유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잤다고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하던 행동을 갑자기 멈추었다. 그때는 이미 성유리가 입고 있던 치마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성유리의 말은 박한빈의 모든 움직임을 멈추게 만들었다. 오랜 침묵 끝에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아팠어?”예상치 못한 박한빈의 질문은 성유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박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미안해.” “여길 데려오지 말아야 했어. 그리고 에릭을 만나게 하지도 말아야 했고 호텔에 혼자 두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어.” 박한빈은 해변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그녀에게 고개를 숙일 일은 없으리라 다짐
“내가 말했잖아, 이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박한빈은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이번엔 성유리도 아무런 말 없이 조용하게 박한빈의 말을 들어주었다. “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마찬가지야.” 박한빈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어갔다. “걱정 마. 널 괴롭혔던 사람들 내가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거니까.” “그러세요? 근데 에릭 씨는 박한빈 씨 파트너 아닌가요? 그 사람이랑 틀어지면 당신 입장이 곤란해질 텐데요?”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녀는 드디어 박한빈이 지금 상황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항상 이익이 제1순위였으니까.’ 그렇게 확신한 성유리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한마디 더 하려던 찰나, 박한빈이 입을 열었다. “걔는 이제 내 파트너가 아니야.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그래도 두 사람 서로 이익을 공유하고 있잖아요. 에릭 씨를 적으로 돌리면...”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여긴 모풍국이야. 금성이 아니라고.” “지화 그룹의 기반은 금성에 있어. 여기의 모든 건... 다 버려도 상관없고.”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지금 나를 걱정해 주는 거야?” 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 모습만으로도 박한빈은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챈 듯했다. 박한빈은 순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성유리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오늘 밤 많은 일을 겪은 두 사람이라 박한빈은 지금 기뻐하기엔 어딘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해 자기 감정을 억눌렀다. “걱정하지 마. 에릭 그 새끼 내가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여기서는 에릭의 영향력이 크니까 네 안전을 위해 내가 사람을 붙여서 먼저 너를 돌려보낼게. 그리고...” “필요 없어요.” 성유리가 그의 말을 뚝 끊었다.박한빈은 얼굴을 찌푸리며 뭔가 더 말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성유리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박한빈은 아직도 베란다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하는 속도가 빨라 성유리는 박한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물론 성유리는 굳이 알아들으려 애쓰기도 싫었다. 그녀는 바로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지고 두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는 오늘 있었던 일들이 필름처럼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에릭이 흥미를 느낀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박한빈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에릭은 박한빈이 자신과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 건 에릭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박한빈의 선택에 흥미를 느낀 것이었다. 그런 생각은 분명 비정상적이었으나 더 비정상적인 것은 성유리가 그 논리와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이 성유리에게 가장 두려운 부분이었다.‘역시... 미친 사람과 오래 지내다 보니 나도 점점 이상해지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박한빈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성유리가 잠에 들었을까 봐 조심조심 움직였다.성유리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박한빈이 침대에 올라와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약간 불쾌해진 성유리가 그를 밀어내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말했다.“연정우 씨의 일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보라고 지시했어.” 그 말에 성유리는 곧바로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뭘 하려는 거죠?” 그녀의 경계심 어린 태도에 박한빈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무심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그랬잖아. 연정우 씨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서 확인해 보라고 한 거야. 그 사람이 정말 억울하다면... 도와줄 수도 있지.” 갑작스러운 박한빈의 태도 변화에 성유리는 오히려 더 의심스러워졌다. 성유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박한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박한빈은 이미 체념한 듯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한빈은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이대로 끝났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때, 성유리가 갑자기 먼저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뭐가 고맙다는 걸까? 연정우를 대신해 고마워하는 걸까?’ 비록 박한빈의 처음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지만 성유리의 입에서 직접 이 말을 들었을 때, 그의 가슴은 묵직한 무언가로 눌리는 듯했다. 박한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다야? 그냥 이렇게 끝낼 거야?” 성유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박한빈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촉촉했고 달빛이 더욱 밝아지며 성유리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지금 박한빈의 눈에 성유리는 그 어떤 여자보다 더 예뻐 보였다. 박한빈은 말없이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만 보다 천천히 손을 뻗어 성유리의 뺨을 쓰다듬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이미 수없이 많은 사랑들을 나눴지만 이 단순하고 부드러운 동작 하나에 마치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박한빈의 손끝에서 성유리의 피부로, 그리고 다시 그녀의 피부에서 박한빈의 마음속으로 흐르는 듯했다. 그는 손가락을 살짝 움츠렸고 성유리 역시 어색함을 느끼며 박한빈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에 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성유리와 입을 맞췄다. 평소와 달리 박한빈의 키스는 부드러웠다. 입술을 살며시 물고 어루만지듯 말이다. 마치 성유리를 달래듯 그녀의 입술을 탐냈고 손은 여전히 그녀의 뺨에 머물러있었다. 손끝이 무심코 그녀의 귓불을 스치자, 성유리의 팔에 소름이 돋고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그 틈을 타 박한빈의 혀가 성유리의 입술 사이로 쑥 들어갔다. 박한빈은 부드럽게, 그리고 또 천천히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며 키스했다. 그것은 욕망이나 다른 의도가 담긴 키스가 아니었고 그저 사랑으로 충만한 감정에 이끌린 키스였다. 마치 두 사람이 깊은 사랑을 하는 연인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이어진 행위일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박한빈은 천천히 입을
그 시각, 박한빈은 에릭과 마주 앉아 있었다. 어제 박한빈에게 주먹을 한 대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아무렇지도 않게 박한빈을 보고 웃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시가를 건넸다. “이거 피고 나랑 화해할래?” 박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정말 나랑 연 끊으려고?” 에릭은 여전히 밝게 웃으며 물었다.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에릭에게 대답했다. “내가 담배를 끊어서.” “왜? 너희 와이프 때문인가?” 에릭은 놀란 척하며 계속 물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에릭은 혀를 끌끌 차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너 참 재미없다. 네가 원래 얼마나 자유롭고 멋있었는지 기억 안 나? 지금은 말 그대로 결혼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여자를 위해 들어간 꼴 아니야?” 에릭은 박한빈을 쳐다보며 비웃듯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봐. 네 와이프가 그렇게 특별한 사람인가? 뭐가 그리 대단해서 너를 이렇게 바보로 만드는 건데?” 그의 눈으로 보기에 성유리는 그저 평범한 미모를 가진 여자일 뿐이었다. 특별히 똑똑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지도 않았으니 그저 “평범”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정말 바보였다면 차라리 특별한 점이라도 있었을 텐데 그 평범함이 오히려 그녀를 더욱 흔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박한빈은 에릭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냐?” “뭔데?” 에릭은 약간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신이 아담을 창조한 뒤 그가 너무 외로워 보였는지 그의 갈비뼈를 하나 떼어내 이브를 만들었지. 그리고 둘은 에덴동산에서 함께 살게 되었어.” 에릭은 박한빈이 왜 이런 뻔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듣고만 있던 에릭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기 시작했고 말을 끊기 전에 박한빈이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나의 갈비뼈와 같은 존재지.” 박한빈은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내 몸의 일부고 이 세상에서 나와
“그래서 말인데 난 너희 쪽 문화가 제일 싫더라.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에 효도니, 예의니 신경 쓸 게 너무 많잖아. 스스로 고생을 사서 하는 것 같다고.” “그러니까 내가 늘 말했잖아. 여기가 너한테 딱 맞는 곳이라고. 자유롭고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잖아.”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고맙다. 네 조언은 잘 들었어.” 그 말과 함께 박한빈은 바로 자리를 떠났다. 에릭은 그런 박한빈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만약 네 아내가 널 배신하게 되면 언제든 돌아와!” 하지만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걸음을 멈추지도, 에릭의 말을 받아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에릭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성유리 씨, 좋은 소식 기대할게요.] ... 그날 바로 박한빈과 성유리는 예정보다 빨리 비행기를 타고 금성으로 돌아갔다. 박한빈은 원래 일정을 반달 정도 잡아두었지만 계획을 급히 바꿔 귀국했다. 그는 서두르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에 돌아오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김난희는 자신이 보유한 5%의 지분을 박세빈에게 넘겼으며 그가 앞으로 회사에 합류해 박한빈과 함께 지화 그룹을 운영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그들의 업계는 들썩였다. 지화는 업계의 선두 주자로 그룹 내의 사소한 변화도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특히 5%라는 막대한 원시 지분이 걸린 문제라면 더더욱. 박세빈이 박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 지분이 외부인에게 넘어갔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을 것이다. “박세빈이랬나? 이 사람 대단하네. 박성훈 씨가 죽은 지도 꽤 됐는데 이제야 나타나서 이런 판을 벌이는 걸 보니.” “지금까지 참았던 것도 대단하지만 노인을 설득해서 원시 지분까지 넘겨받았다니... 이거 박한빈과 맞붙겠다는 뜻 아니야?” “하지만 지금 와서 싸운다고
박한빈은 원래 성유리를 먼저 도연제로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성유리를 회사로 데려갔다. 성유리가 지화 그룹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박한빈이 손을 잡고 당당하게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박한빈의 이런 행동 때문에 회사 안 곳곳에서 직원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하지만 박한빈의 권위 때문에 대놓고 보지는 못하고 대부분 은근슬쩍 성유리를 훔쳐보는 정도였다. 성유리는 이런 시선이 불편해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더 세게 손을 잡았다. 대중 앞에서 그와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일 수 없어 결국 성유리는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그의 뒤를 따라 박한빈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박한빈이 김서영에게 시간이 없다고 말한 건 핑계가 아니었다. 며칠간의 출장으로 밀린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끝없는 회의가 이어졌다. 성유리는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피곤한지 사무실 소파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게다가 박한빈이 성유리를 회사까지 억지로 데려온 상황이니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소파에 누웠고 바로로 잠이 들었다. 사실 성유리는 예전에도 회사에서 바쁜 날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곤 했다. 하지만 박한빈의 사무실 소파는 훨씬 편안했고 눈을 감자마자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낯선 공간이 보이자 성유리는 잠깐 어리둥절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여기가 박한빈의 사무실이라는 걸 떠올렸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옆에는 스탠드 조명 하나가 켜져 있었다. 성유리의 몸 위에는 누군가 덮어준 담요가 있었는데 박한빈이 돌아왔다가 다시 나간 것인지,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담요를 덮어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자고 일어나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던 성유리는 소파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먹을 것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 이미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각이었지만, 비서실에는 여전히 불이 환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