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와 연정우는 시내에 있는 어느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서로 마주친 순간, 연정우는 성유리의 볼에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연정우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아차렸지만 모르는척 하며 그에게 물었다. “외할아버님은 어떻게 되셨어?” “괜찮아. 알다시피 이런 병은 쉽게 고쳐지지 않으니까 할아버지가 조금이나마 정신이 드실 때 많이 모시고 다니려고.” 성유리는 잠시 당황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물었다. “여행 가는 거야? 좋은 생각인데? 그...” “여행 아니지.” 연정우는 성유리의 말을 채 듣지도 않더니 대답했다. “그럼 이민 준비하는 거구나?” 성유리는 그의 굳은 표정과 낮은 목소리를 듣고는 빠르게 눈치챘다. “응.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연정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을 이어갔다. “학교 쪽은 이미 그만둔 상태고 해야 하는 절차도 거의 다 마친 상태야. 아마 다음 달이면 가야 할 수도 있어. 그래서 지금보다 더 많이 바빠질 것 같은데 유리 네 시간이 없을까봐 오늘 보자고 한 거야. 마지막 인사라도 하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성유리였지만 무릎 위에 놓고 있던 손에는 점점 더 힘을 줬다. “미안해.” 그때, 연정우가 먼저 적막을 깨며 입을 열었다. “네가 미안하다는 말을 왜 해? 넌 나한테 미안할 일을 한 적이 없잖아.” 성유리는 사과의 말을 전하는 연정우에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만약 그때...” “그때는 너도나도 마찬가지였어.” 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을 끊어버리며 계속 말했다. “너도 알잖아. 성리 그룹 상황. 똑같이 비관적이라 나도 그때는 힘들었어.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한 사람도 나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연정우는 아무 말도 없이 성유리만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 내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려고 결정했어?” “영국.” “그래. 그럼 나중에 기회 되면 내가 한번 갈게.” 성유리가 연정우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연정우 또한 웃어줬다.
그녀의 말에 연정우는 피식 웃었고 성유리는 그가 왜 웃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내가 너를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네가 이런 말 하면 어떡해. 만약 그때 그런 복병들이 없었다면 나는 절대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근데 세상에는 만일이라는 경우가 존재하지 않잖아. 이렇게 서로 미안해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 없어.” 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도 표정이 풀렸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아무 의미도 없지.”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고 성유리는 연정우와의 지난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에는 수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맞은편에 서로 마주 앉아보고 있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짐작이 안 갔다. 성유리뿐만 아니라 연정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성유리는 커피를 다 마셨지만 더 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럼 나 먼저 가볼게. 몸 잘 챙겨.”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성유리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고 연정우는 담담히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 성유리는 그렇게 카페를 나와 버렸고 택시를 잡으려는 순간, 핸드폰이 한번 울렸다.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해 발신자를 확인하니 연정우였다.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었는데 얼굴 보고 할 용기가 없네. 전화 걸 용기도 없고.] 성유리는 조용히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며 그의 다음 문자 메시지를 기다렸다. 몇 분 뒤, 한참을 고민하던 연정우가 메시지를 전송했다. [만약 우리가 진짜 결혼을 했다면 네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했을까?] 짧은 한마디에 연정우는 모든 정력을 쏟아부은 것 같았고 성유리는 카페에 앉아 자신의 답장을 기다릴 연정우를 떠올렸다. 성유리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응. 그랬을 거야.] 연정우는 별다른 답장을 보내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핸드폰을 꺼버리고는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잡았다. 차에 올라탄 성유리는 도연제가 아닌 어느 한 백화점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과 약속한 시간이 아직
날은 빠르게 어두워졌고 박한빈은 도연제에서 하루 종일 머물렀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그렇게 일찍 나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보낸 문자에 답장조차 하지 않는 성유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오늘 밖에서 자고 올 건가?’ 오늘이 신혼 두 번째 밤인지라 박한빈은 불만이 더 많았고 전화를 걸어 따지려 했지만 집착이 강한 남편처럼 보일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 시간만 쳐다보고 있었다. 깊은 새벽이 오기 전, 성유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인기척 소리를 들은 박한빈이 몸을 일으켜 그녀를 맞이하려고 했지만 가만히 있기를 선택했다. 박한빈은 서재의 문을 닫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성유리는 서재 앞을 그냥 지나쳐버렸다. 작은 방 앞에 도착한 성유리는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뒤돌아 큰방으로 향했다. 두 번이나 박한빈이 있는 서재를 지나쳤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다. 그러자 박한빈은 더는 가만히 못 있겠는지 먼저 성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유리야.” 박한빈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던 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췄고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술 마셨어?” “무슨 일 있으세요?” 성유리는 무서울 정도로 평온하게 되물었고 박한빈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다시 입을 뗐다. “연정우 씨랑 술 마시러 갔었어?” “무슨 일 있으시냐고요.” 성유리는 박한빈이 대답이 없자 뒤돌아 가던 길을 가려 했다. 그 순간, 박한빈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뒤에서 성유리를 꽉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성유리가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술을 마신 탓에 평소보다 맥이 빠져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또다시 모든 것을 포기한 성유리를 박한빈이 욕실로 데리고 갔다. 성유리가 제자리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와중에 그녀에게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비록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너무 찬 물줄기에 성유리는 순식간에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욕실 안에서 성유리는 반항할 힘조차 없어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려는 성유리의 귀에 박한빈이 살짝 뽀뽀하며 입을 열었다. “연정우 씨랑은 잤었어?” 성유리는 몸을 덜덜 떨며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대답 따위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됐어.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지금 너는 내 사람이잖아.” “이미 결혼했으니 유리 너는 내 아내고 네 마음속에는 나 하나만 있어야 돼. 나만 좋아해야 되는 건 기본이고. 알겠어?” 성유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박한빈은 밑으로 허리를 더 숙이는 그녀가 자신에게 순종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입을 가리고 있던 박한빈도 서서히 손을 뗐고 그 순간,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을 힘껏 깨물었다. ... 다친 박한빈과 마찬가지로 성유리의 상태도 좋지만은 않았다. 이미 자기 앞에서 본색을 다 드러낸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그가 정말 자신을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성유리가 목이 너무 아파 힘들어 할때 박한빈은 아주 다정하게 그녀에게 물을 따라주며 살뜰하게 챙겨줬다. 만약 예전 같았다면 이런 박한빈에게 순응하고 따랐겠지만 성유리는 지금 절대 그러기가 싫었다. 박한빈이 아무리 다양한 “미끼”를 던진다 해도 성유리는 물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한테 상처를 주는 사이가 되었다. 누가 이기는 싸움인지 성유리는 몰랐지만 다시 깨어나 보니 방 안에 혼자 남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유리가 힘든 몸을 이끌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지만 덜덜 떨리는 다리와 무릎에 난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어젯밤 약을 먹은 성유리는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고 찾기도 귀찮은 성유리는 새 약을 꺼내 바로 삼켜버렸다. 그때, 성유리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는데 박씨 본가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잠시 멈칫하던 성유리는 결국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너머 집사는 오늘 집으로 와 밥을 먹으라는 말만 전했다.
성유리는 박세빈이 건네는 인사에도 한동안 멍만 때렸다. 그녀는 “형수님”이라는 호칭에 당황했는지 아니면 박세빈이라는 이름에 당황했는지 자신도 몰랐다. 박세빈, 그는 박한빈의 아버지가 밖에서 낳은 말 그대로 사생아였다. 성유리는 왜 오늘 갑자기 박세빈이 본가에 나타났는지 알 길이 없었고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집 안에서 집사가 빠르게 나오더니 박세빈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둘째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본가에는 왜...” 성유리는 집사의 말에 머리가 더 혼란스러워졌고 왜 이 시간 본가에 박세빈이 모습을 드러냈는지 궁금했다. ‘지화 그룹 내부 상황이 바뀐 건가?’ 성유리가 멍하니 서 있을 때, 집사는 박세빈과 함께 자리를 떠났고 박세빈은 뒤돌아 성유리를 보더니 씩 웃어 보였다. 박세빈의 미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사실도 까맣게 잊었다.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아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박한빈은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 지금 박한빈 씨 본가에 있어요.” 성유리는 자기 말에 박한빈이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릴 줄 알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그가 먼저 통화를 끝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해서 왔어요. 별일 없으시면 오세요.” “그리고 여기 손님 한 분이 더 오셨네요. 마음 단단히 먹고 오시는 게 좋을 거예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고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그녀의 말투가 아주 다정하다고 느꼈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성유리의 모습을 보지 못한 박한빈은 하루 종일 예민했던 신경이 차분해졌고 연정우에 대한 생각도 사라졌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말한 손님의 정체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어갔
박한빈이 거실을 다 둘러봤지만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난희의 뒤에 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린 박한빈도 성유리와 마찬가지로 당황했는지 동공이 흔들렸다. 하얀 셔츠에 높은 콧대, 그리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그 남자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던 박한빈은 옆에 있는 가사도우미에게 물었다. “유리는요?” 거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 묻는 박한빈에게 쏠렸지만 그는 못 본 척했고 심지어는 김난희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아마 화장실 가셨을 겁니다. 곧...” 가사도우미의 말에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화장실 쪽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성유리도 볼 일을 다 보고 밖으로 나왔고 박한빈과 거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번갈아 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손을 확 잡더니 그녀를 강제적으로 끌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이런 행동에 가족들은 황당해했지만 박한빈은 이미 본가 대문 앞까지 걸어간 상태였다. “박한빈! 너 거기 서.” 뒤에서 들리는 고함에 박한빈은 그제야 발걸음을 뚝 멈췄고 서서히 뒤를 돌아봤다.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 두 분 다 계셨군요.” “너 그게 무슨 뜻이냐? 우리는 아까부터 여기 있었어. 한빈이 네가 눈뜬장님이야?” 김난희는 누군가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적이 없었기에 박한빈의 행동에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박한빈은 화를 내는 김난희의 말에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할머니, 죄송합니다. 아까 못 볼 것을 보는 바람에 눈이 멀어 미처 보지 못했나 봅니다.” 박한빈이 말한 못 볼 것이라는 물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김난희의 안색은 박한빈의 말 때문에 점점 더 어두워져갔지만 박세빈은 그의 말을 듣지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박세빈은 가만히 있는 박한빈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먼저 인사를 건넸다. “형.” 해맑게 인사를 건네는 박세빈의 말에도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를 조용히 쳐다만 봤다. 박
“신분이요? 무슨 신분 말씀입니까?” 박한빈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묻자 김난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한빈이 네 생각에는 무슨 신분일 것 같은데?” “음, 박성훈 씨의 사생아 신분 말씀입니까?” 박한빈은 자기 친아버지의 이름을 주저도 없이 입 밖으로 뱉어버렸고 김난희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담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며 계속 말했다. “금성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제 부모님들 금슬이 아주 좋다고 생각할 겁니다. 근데 만약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박씨 가문에게는 해가 될까요? 아니면 이득이 될까요?” “하하, 금슬이 좋아? 작년에 있었던 일을 다 잊은 모양이구나.” 김난희는 김서영을 흘깃 째려보며 말했다. 마치 다 김서영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는 것처럼. 박한빈은 매우 덤덤해 보였고 심지어는 미소까지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두 일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제 어머니가 작년에 무슨 일을 벌였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결혼생활에서는 스스로의 역할을 잘했었습니다. 근데 박성훈 씨도 이미 세상은 떠난 지 몇 년이 흘렀는데 갑자기 이런 돌덩이가 굴러들어 오면 죽은 사람 얼굴에 먹칠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럼 세빈이는 한평생 저렇게 숨어서 빛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쟤 엄마처럼 파렴치하고 뻔뻔한 여자가 저지른 일이니 평생 빛을 보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박한빈은 길거리에 흔히 보이는 동물들을 대하듯 평온하고 무감정한 말투로 말했다. 쿵! 김난희가 화를 못 이겨 결국 밥상을 힘껏 내리치더니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박한빈! 세빈이도 결국 네 형제나 마찬가지다. 너한테 형이라고까지 부른 애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박씨 가문에서 너를 지금까지 그렇게 교육시켰어? 피가 섞인 형제를 함부로 모욕하고 무시하라고 가르쳤냐는 말이다!” 박한빈은 화를 내는 김난희도 두렵지 않은 듯 옅은
아까부터 언짢았던 김난희는 성유리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너는 왜 웃는 거지?” “아니요. 그냥 할머님 대신 제가 다 기뻐서 그랬어요.” 성유리는 말하며 박한빈을 힐끔 쳐다봤는데 그는 마치 성유리가 다른 이유라도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는데 방금 전과는 달리 아주 자연스럽고 솔직한 웃음이었다. 자신의 말에 웃는 박한빈을 성유리는 보는 체도 안 하고 김난희와 계속 말했다. “그래도 이 넓은 집에서 홀로 지내시느라 외롭고 심심하셨을 텐데 이렇게 착한 손주가 들어오면 정말 좋으실 것 같네요.” 성유리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외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었기에 김난희는 끓어오르던 분노를 꾹 삼켰다. 박한빈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박세빈을 쳐다보다가 문득 그에게 말했다. “뭘 잘 모르나 본데 너는 나한테서 다른 물건을 뺏어갈 자격도 없어.”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놓고 보면 박한빈과 성유리가 지금 함께 박세빈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박세빈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굳은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김난희는 목소리를 잔뜩 내리깔고는 박한빈의 이름을 불렀다. “박한빈.” “할머니의 뜻은 저도 잘 알겠습니다. 할머니께서 결정한 일이라면 저도 뭐라 할 자격이 없으니까요. 뭘 하시고 싶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아무 의견이 없으니까.” 박한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저한테서 형 노릇을 하기를 바라지는 마십시오. 쟤를 챙기거나 뭘 가르치라는 말도 하지 마시고요.” “제가 예전에 말했던 거 잊으셨습니까? 쟤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다면 평생 쥐 죽은 듯 조용히 살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 앞에 나타난 이상 제가 무슨 짓을 하던 제 탓을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박한빈은 김난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떠났다. 밥을 먹던 주방에서 벗어난 두 사람의 뒤로 뭐가 깨지는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