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잔뜩 화가 나 있는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을 후회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도 아닌데 또 나한테 화풀이하네.’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짜증이 나 아예 입을 꾹 닫아버렸다. 그러나 성유리의 태도에 박한빈은 불만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지 그녀에게 따지듯 계속 물었다. “왜 말이 없어?” “어차피 박한빈 씨 집에 있는 일이니까 사실 저랑은 별 상관이 없잖아요.” 이미 박한빈의 본가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까지 와있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성유리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갑자기 멈춘 박한빈의 차 때문에 온몸이 앞으로 쏠렸다. 다행히 좌석 시트는 진짜 가죽으로 만든 푹신한 시트였기에 머리가 부딪쳐도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박한빈을 째려보았다. 박한빈도 마침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계속 물었다. “우리 집 일이라고? 너는 내 와이프 아니야?” “오.” “오?” 박한빈은 성유리의 짧은 대답에 화가 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밥상에서 자신을 대신해 박세빈을 조롱하고 전화를 걸 때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라는 경고를 해준 성유리가 떠올라 분노를 꾹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 대신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 뭣 같은 놈이 돌아왔으니 지금 엄청 기뻐할 거야.”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당황했지만 그는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있는 길은 박씨 본가에 편하게 가기 위해 시내에서부터 만든 길이었기에 박씨 가문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용이었다. 그래서 사실 평일에는 지나다니는 차가 몇 대 없는 데다가 지금 시간도 늦었기에 드넓은 도로에는 박한빈과 성유리가 타 있는 차만 우두커니 멈춰있었다. 박한빈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성유리에게 계속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머니는 계속 본가에 머물러있었어. 할머니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 몰랐을 리가 없다고.” “어머니는 그런 할머니를 말리지도 않았고 나한테 슬그머니 알려주지도 않았지. 어
“싫어요.” 성유리는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제가 왜 박한빈 씨 말에 동의해야 하는 거죠?” “봐. 너도 지금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 “만약 정말 자신 있으면 왜 나랑 내기를 못 하겠어? 이길 자신만 있으면 이참에 나한테 요구도 하나 제시할 수 있는데 너한테는 좋은 일 아니야?” 성유리는 다시 한번 거절하려고 했지만 박한빈의 눈을 마주한 순간부터 고민이 됐다. 아마 오늘 밤 본 박한빈의 모습이 예전의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한 탓인지 성유리는 갑자기 김서영이 박한빈에 대한 감정을 알고 싶어졌다. 친 아들이지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박한빈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지만 착하고 순진해 보이는 박세빈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지 궁금했다. 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민하다 박한빈에게 물었다. “만약 박한빈 씨가 이기면 저한테 무슨 요구를 제시하고 싶으신데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피식 웃더니 되물었다. “너 자신을 너무 못 믿는 거 아니야?” “됐어요.” 성유리는 또다시 후회했고 시선을 다른 곳에 올리며 계속 말했다. “저는 알고 싶지도 않고 당신과 내기할 생각도 없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못 들은 사람처럼 핸드폰을 꺼내더니 김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행동에 자기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박한빈은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 김서영의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저예요.” “응.” “오늘 밤 있었던 일은 서로 상의를 하신 건가요?” 박한빈은 운전대를 잡고 있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 스르르 힘을 풀다가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다시 운전대를 잡더니 입을 열었다. “저한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면 제가 절대 오지 않을 걸 알고 계셨으니 성유리를 이용해 저한테 통보를 한 건가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김서영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리가 혼자 왔었어. 그래서 나도 너희 부부 사이에 연락 한 통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박한빈의 전화가 끝나자 차 안에는 순간적인 정적이 흘렀다. 그의 예상대로 이 내기의 승자는 바로 박한빈이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이 순간, 전혀 기쁘지도 신나지도 않았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였기 때문일까? 박한빈은 처음 박세빈을 보았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김서영이 이 일을 주도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그녀는 그저 냉담하게 방관하기를 선택했을 뿐이라는 것을. 마치 어릴 적, 박한빈이 다른 아이들과 싸울 때도 김서영은 언제나 저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그들이 헤어지면 그제야 다가와 박한빈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물 한 병을 그의 머리 위에 쏟아부으며 묻곤 했다. “이제 좀 진정됐니?” 김서영은 늘 박한빈에게 이렇게 말했다. “싸움은 최악의 방법이야. 가장 무능한 사람만이 그런 거친 방법을 쓴단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말은 박한빈의 선생님이나 다른 어른들이 해주는 것이 맞을지 몰라도 친어머니가 해줄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어릴 때부터 책과 뉴스를 많이 읽었다. 책 속에서 그려진 어머니의 모습은 언제나 온화하고 헌신적이었으니까. 책 속 어머니는 늘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위험이 닥치면 주저 없이 아이 앞을 막아주고 따스하게 곁을 지켜주는 그런 존재였다. 밤에 읽어주는 책 한 권이든 아니면 따뜻하게 끓여준 죽 한 그릇이든 박한빈은 그런 것들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김서영은 오직 박한빈의 성장을 재촉하며 그를 유능한 지화 그룹의 후계자로 키우는 데만 집중했다. 심지어 오늘 박한빈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집으로 들이는 일조차도 그를 위해서라고 말한 김서영이지 않은가? 아까 그녀가 한 말을 박한빈은 아마 평생 기억할 것이다.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함이라던 말. 마치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김서영이 박한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김서영의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성유리는 바로 넋이 나간 채로 그의 옆에서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두 여자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성유정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이미 상대방 여자에 의해 뺨을 맞았는지 볼은 시뻘겋게 부어있었다. 자세히 보면 두 여자는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유정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 여자는 성유정을 정신없이 때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상위에 있던 술병으로 성유정의 머리를 내리치려고 했다. 조영준은 그제야 깜짝 놀랐는지 때리려는 여자를 말리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거 놔요. 지금도 이 여우 같은 년을 보호하겠다 이거예요? 조영준 씨, 누가 당신을 그 자리까지 올려줬는지 잊으셨어요? 제가 아니면 당신은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하다고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던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힘껏 던져버렸다. 입구에 서 있던 성유정은 술병이 날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그녀 뒤에 있던 사람은 더 빨리 반응을 했다. 누군가가 성유정의 앞을 가로막아 선 채로 손을 쭉 뻗어 그녀를 보호했고 술병은 남자의 팔목에 강하게 부딪힌 다음 쨍그랑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졌다. 큰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구경하던 사람들도 조용해졌고 박한빈과 눈이 마주친 조영준은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안색이 굳어져 갔다. 성유리의 시선은 난리 통에서도 성유정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성유정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다가 박한빈과 성유리를 발견한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는지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성유정은 상대방 여자에 의해 찢겨나간 옷가지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지도 못했다. 마침, 이때 식당의 직원이 도착했고 얼마 안 걸려 싸움을 벌인 사람들을 떨어뜨려 놓았다. 박한빈은 이 상황에 더 관여하기 싫은지 성유리의 손을 확 잡고는 식당 밖으로 나갔다. 성유리의 머릿속엔 온통 성유정이 자신을 보던 눈빛이 맴돌고 있어 박한빈이 자신을 끌
매 사람마다 주의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마치 늘 우울하고 힘이 없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장면을 목격해 우울함을 잊었다 해도 고작 그 몇 초뿐인 것처럼. 몇 초가 지나면 우울함은 또다시 찾아올 테니 박한빈과 성유리 사이 분위기는 다른 점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박세빈의 등장으로 두 사람은 잠시 적군에서 아군이 되었지만 사실 다른 일들은 평소와 똑같았다. 성유리의 기분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내렸고 박한빈은 그녀보다는 감정 기복이 덜했다. 박한빈은 한참을 말없이 운전만 하다 성유리에게서 핸드폰을 다시 가져다 차 안 아무 공간에나 놓았다. “나를 안 믿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성유리는 담담하게 계속 대답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박한빈 씨도 저를 속이실 이유가 없지 않나요?” 성유리의 대답을 들어도 박한빈은 전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유리가 자신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에게 관심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성유정이 어떻게 되든 나랑은 상관없어. 앞으로도 나랑 개 사이를 엮으려 하지 마.” “네. 알겠어요.”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건 워낙 예전부터 잘하셨으니까.” 박한빈은 그녀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라고?” “제 말이 틀렸나요?” 성유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늘 박한빈 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매정하게 버렸잖아요.” “전에 성유정에게 항상 인내심 있고 다정하게 대해주셨죠? 소위 말하는 우정 때문인가요? 아니면 걔를 이용해 제 마음을 아프게 한 다음 당신에 대한 제 사랑을 시험해 보고 싶었나요?” “근데 지금 성유정을 상관하지 않으시겠다고요? 하긴 걔는 이제 박한빈 씨에게 아무런 도움이 돼주지 못하니 이렇게 주저하지도 않으시고 내팽개치시겠죠. 아무리 늪에 빠져 허우적대도 동정도 안 해주시고 무시했잖아요. 이런 일 저도 당해본 것
박한빈을 밀어내려던 성유리는 결국 포기한 듯 조용히 창밖만 쳐다보았다. 빛나는 가로등과 늘어진 건물들의 조명이 더해져 금성의 밤은 유달리 아름다웠다. 그러나 성유리의 눈에는 그 어떠한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박한빈과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없다고 생각했고 돌아오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박한빈은 성유리와는 아예 생각이 달랐는지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가 이제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렸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이제 성유리한테 무언가를 강박하거나 위협하지 못한다. ... 성유리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 방 안에는 여전히 혼자 있었지만 이런 일상에 익숙해진 성유리는 간단히 씻고 난 다음 바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성시원이 퇴원하는 날이다. 성리 그룹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지만 총대표인 성시원에게는 아직 처리할 일들이 가득 남아있었다. 성유리가 성시원을 대신해 퇴원 절차를 마치고 난 뒤, 병실로 돌아와 보니 성유정이 성시원 곁을 지키고 있었다. 얼굴에 남은 상처를 가리기 위해 화장을 두껍게 한 성유정은 머리까지 풀어 헤쳐 평소의 모습과는 아예 달랐다. 성유정은 병실에서 성시원더러 다른 방면에 투자하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성리 그룹만 절차를 마치면 성씨 가문과는 관계가 없어지지만 성시원은 이런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성유정은 지금 열정적으로 그를 격려해 주며 솟아날 구멍을 찾자고 열변을 토해냈다. 성유리가 병실 안에 들어가자 성유정은 입을 꾹 닫아버리다가 이내 배시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언니, 제 말이 맞죠?” “지금 이 시대는 자원이 너무 빨리 바뀌잖아요. 그래서 무조건 자원이 들어오는 곳을 꽉 막아야 돼요. 이 프로젝트도 제가 확인했는데 진짜 엄청 괜찮아요. 무열 오빠도 지금 투자하려고 준비 중이에요.” “아참! 무열이는?” 성유정의 말에 성시원이 무릎을 ‘탁’ 치며 물었다. “무열이 걔를 본 지도 한참이 지났구나. 내가 입원해
도연제로 돌아간 성유리는 박한빈이 먼저 와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그의 옆에는 이미 열려있는 캐리어가 놓여있었고 조용히 자료들을 넘겨보던 박한빈은 성유리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박한빈과 두 눈이 마주치자 성유리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를 무시한 채 지나가려고 했다.그때, 박한빈이 먼저 적막을 깨뜨리며 성유리에게 말을 걸었다.“나 내일 출장 가.”“네.”“모풍국이야. 마지막 일주일이고.”“알겠어요.”성유리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박한빈은 마치 자신의 말에 대충대충 대답해 주는 것 같은 성유리를 발견했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조금 뒤, 박한빈은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나랑 같이 갈래?”그의 물음에 성유리는 당황하는 것도 잠시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더니 결정을 내렸다.“나랑 같이 가자.”“안 가요.”“너한테는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이 없거든.”“왜죠? 설마 저를 납치해 비행기에 태우실 건가요?”“왜냐고? 너는 내 서류상 아내이자 가족이기 때문이야.”박한빈은 보고 있던 자료들을 캐리어에 넣어버리더니 성유리의 옷 몇 벌도 자기 캐리어에 넣기 시작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무슨 짓을 하든 못 본 체하며 뒤돌아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그러자 뒤에서 박한빈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내가 연정우 씨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마. 요즘 그 사람 이민 준비하고 있더라? 솔직하게 말해줄게. 이미 다른 사람이 연정우 씨에 대해 조사하고 있어.”“마침 타이밍 좋게 이민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 사람들도 연정우 씨를 그렇게 쉽게 보내주지 않을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가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뒤돌아 그를 째려보며 물었다.“무슨 말이에요 그게? 전에 더 이상 그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했지 도와주겠다는 말은 안 했는데?”“게다가 난 합법적인 공민이잖아. 누가 나한테 물어보기라도 하면 내가 무슨 대답을
성유리는 크기가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평소에 끼기 불편할 거라 생각해 그 대신 사용할 다른 반지를 준비하려 했다.그러나 성유리는 박한빈과 이혼할 때까지도 그 반지를 건넬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 반지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그런데 놀랍게도 박한빈이 지금 성유리의 손가락에 끼워준 반지는 당시 성유리가 골랐던 것과 매우 닮아 있었다. 장밋빛 금색 테두리에는 국화 모양의 은은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성유리는 그 반지를 보며 잠시 멍해졌다.박한빈은 성유리가 다시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 억지로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게 했다.“다이아몬드 반지는 내가 따로 샀으니까 결혼식 때 사용할 거야. 평소엔 이걸 끼면 돼.”박한빈은 반지에 대해 설명했다.“사실 혼인신고를 했던 날에 받았어야 했는데 맞춤 제작이라 시간이 좀 걸렸어.”성유리는 사실 이런 걸 물어본 적이 없었다.그러나 박한빈이 하나하나 이유를 설명하는 동안 성유리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 마지막에 짧게 대답했다.“그래요.”박한빈은 원래 성유리가 반지를 거부할까 봐 걱정했지만 그녀가 반지를 빼려는 기색이 없자 안도하며 입가에 미소까지 번졌다.그런데 그 순간, 성유리가 말을 꺼냈다.“아까 한 말 다 진짜에요?”“뭐가?”“연정우 씨에 대해 누군가 조사를 시작했다는 거 말이에요. 그러면 정우 씨는 어떻게 되는 거죠?”성유리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박한빈의 기분이 간신히 좋아지려고 할 때, 그 감정을 단숨에 망쳐놓는 능력이 있었다.허나 성유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숙여 밑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사실 저는 연정우 씨가 그런 일을 했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 그래서 전 그 사람이 단순히 공범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정우 씨 외할아버지나 가족들이 강요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는 조용해졌다.박한빈은 한참이 지나서야 성유리가 자신에게 묻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이내 코웃음을 치며 성유리의 말에 대답했다.“내가 그걸
성유리의 대답은 홍지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뒤,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박한빈이 곧장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떠나기 전, 그는 단 한 번도 홍지은을 쳐다보지 않았다.하지만 홍지은은 알았다.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그러나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시궁창뿐인 인생이 여기서 훨씬 나빠진다고 한들 얼마나 더 나빠질까?그렇다고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었다.그러니 죽더라도 반드시 한 사람은 끌어내릴 것이다.성유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지 홍지은은 아직 모른다.세상 그 누가 행복하게 지낸다 해도 괜찮다.‘성유리는 절대 안 돼.’...성유리는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복도 끝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뒤따라오던 박한빈도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옆에 조용히 서서 성유리만 쳐다봤다.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나 상대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연달아 몇 번을 끊었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그렇게 주차장까지 도착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난 박한빈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박 대표님, 저예요. 왜 말도 없이 먼저 가셨습니까? 저...”박한빈은 상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행여 핸드폰이 또다시 울릴까 봐 박한빈은 이번에 아예 전원을 꺼버
홍지은의 말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아까보다 더 얼굴을 찌푸렸다.눈빛에 그득히 담겨있는 혐오와 무시의 감정은 선명히 드러났지만 박한빈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바로 맞은편에 서 있던 홍지은도 당연히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진짜예요. 박 대표님,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제 남편은...”“꺼져.”단 두 글자뿐인 박한빈의 대답에 홍지은은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사실... 신경 쓰이는 건 박한빈의 대답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었다.홍지은은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난감해진다는 사실을.그러나 박한빈은 홍지은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자리를 떠버렸다.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홍지은은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박한빈 씨, 계속 이러신다면... 제가 유리한테 그 일들을 다 알려줘도 제 탓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고 이내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쳐다봤다.그러자 홍지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제가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그때 유정 씨가 임신했던 아이 말이에요. 박 대표님 아이 맞죠?”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홍지은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냉랭했다.그의 눈빛에 홍지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말했다.“지금 유정 씨가 잡혀있긴 하지만 그 일들이 다 끝이 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때 유리가 잃었던 아이도... 사실 박한빈 씨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유정 씨가 그랬다는 걸.”홍지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의 뒤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쿵!그 소리에 박한빈이 뒤돌아보자 성유리가 머지않은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그녀의 표정은
그리고 이내 홍지은은 자신의 자리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금성에서 제일가는 큰 인물은 박한빈은 당연하게도 가장 앞에 있는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무대 위에 전시되는 물건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홍지은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 박한빈도 마침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멈칫하던 그는 다정하게 성유리 귓가에 얽혀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그저 연인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박한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을 일일이 다 풀어줬다.만약 홍지은이 직접 본 게 아니라면 그녀는 꿈에서도 박한빈이 이런 일을 한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너무 놀란 홍지은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박한빈 좀 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성유리는 퉁명스럽게 그의 손을 밀쳐냈다.그리고는 박한빈을 슬쩍 째려봤지만 그는 화를 내기도 커녕 오히려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꽤 거리가 있던 홍지은과 두 사람이기에 그녀는 박한빈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옆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기 좀 봐요. 두 사람 사이 너무 좋아 보이지 않아요? 유리가 평소에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게 혹시 박 대표님께서 쟤를 숨겨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니까요.”홍지은의 옆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성에서 거주하는 현지 사람이 아니었고 결혼한 남자도 업계에서 중하층에 속하는 위치였다.전에 그녀는 홍지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막상 말을 거니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그렇게 홍지은의 미소와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정 사모님?”상대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이내 정연화는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홍지은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선명히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은 ‘화살’이 되어 홍지은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고 있었고 흐르는 ‘피’조차 그녀에게는 차갑게 느껴졌다.입술을 뻥긋거리
홍지은은 마치 성유리와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라는 듯 능글맞게 대꾸했다.그리고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발 빠르게 성유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은 경매에 참석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유리는 미소를 지은 채 그의 곁을 지켰다.사실 그녀는 웃고는 있었지만 이미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상태였고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그래서 홍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예전에는 이런 장소에 오는 거 별로라고 했잖아.”홍지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잡힌 손을 빼냈다.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홍지은은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보며 계속 말했다.“어머? 박 대표님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만약 이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면 아무리 싫어도 박한빈은 몇 마디 대답은 해줬었다.그렇지만 유독 오늘따라 그는 대답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말을 건 상대가 홍지은이라서 싫었다.필경 홍지은을 볼 때면 성유리가 지나간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까 말이다.그게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박한빈은 성유리가 홍지은을 마주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오다가다 마주친다고 하더라도.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고 홍지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녀와 함께 떠나버렸다.박한빈은 홍지은이 자신의 대답을 들을 자격도, 자기가 대답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답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제자리에 서 있던 홍지은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던 박한빈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박 대표님!”이내 다른 사람이 박한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그는 미소 지으며 상대에게 성유리를 소개해 줬다.“여기는 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성유리라고 하고요.”“안녕하세요. 사모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
사실 박한빈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곤 끝없는 공부와 훈련뿐이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할 것이 많았다.학교 성적은 언제나 최고여야 했고 악기나 골프, 승마를 포함한 다양한 외국어까지 익혀야 했다.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박한빈의 신분을 부러워했다.박 씨라는 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광을 의미했다.하지만 그 영광과 함께 짊어져야 할 무게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인지조차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한빈이 평범한 아이로서의 행복을 잃었다는 사실이다.잃을 게 많은 만큼 박한빈은 손에 넣은 것도 많았다.그리고 그는 자신이 짊어졌던 짐을 하늘이에게 만큼은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그래서 얼마 전, 김서영이 하늘이에게 특별 교육을 시키자고 했을 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박한빈, 네 딸은 분명 앞으로 금성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될 거야.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익히지 못하면 그 신분이 아깝지 않겠니?”김서영은 박한빈을 설득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뭐가 어떻게 됐든 하늘이는 박한빈의 핏줄이자 친딸이다. 설령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말이다.감히 누가 박한빈의 딸을 무시하고 얕잡아볼 수 있겠는가?그래서 김서영이 뭐라고 하든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 이야기를 마친 후, 박한빈의 품 안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박한빈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녀는 살짝 찌푸린 미간과 다물린 입술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인가 싶어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에요.”성유리는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그런데 이거 왜 아직도 안 멈추죠?”“곧 멈출 거야.”박한빈은 짧게 대답하다 문득 깨달았다.“설마... 지금 나를 가슴 아파하는 거야?“아니거든요?”성유리는 전혀 망설
박한빈은 천천히 웃음을 거두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접 물을 따라왔다.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마실 물을 준비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박한빈이 몸을 휙 돌리곤 성유리에게 컵을 내밀었다.“방금 건 그냥 장난이었어. 재미없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물컵을 받아 들었다.그것만으로도 이미 박한빈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푹 쉬어.”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성유리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컵을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 나갔다 올게요.”그녀가 문 쪽으로 향하려 하자 박한빈이 손목을 붙잡았다.“어디 가려고?”“정원이요. 햇볕 좀 쬐려고.”“나도 같이 가.”“아까 그렇게 아프다면서 괜찮으세요?”성유리는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그 눈빛에는 박한빈을 향한 의심이 가득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나도 햇볕 좀 쬐고 싶어. 그리고 의사가 말했잖아? 내 면역력 좋다고.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래.”‘심각하지 않다?’‘그러면 아까까지는 왜 그렇게 책임지라고 난리였는데?’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지만 결국 성유리는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그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박한빈은 마치 그것을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성유리의 손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방에서 본 그대로 오늘 날씨는 유난히 화창했다.햇살 아래, 정원의 회전목마가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박한빈이 특별히 주문 제작해 놓은 것이라 그런지 원색의 유채가 한층 더 생생해 보였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그런데, 박한빈은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보내는 그윽한 시선을 느꼈지만 성유리는 한참을 모른 척했다.박한빈이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한번 타볼래?”“뭐를요?”“회전목마.”성유리는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어린애도 아니고.”“그럼 어릴 때는 타봤어?”그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잠시 침
“그럼 자. 난 네가 잠들면 나갈게.”박한빈의 말을 성유리가 철석같이 믿을 리가 없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와 다투는 것도 귀찮았다.그래서 그냥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푹 덮고 등을 돌리고는 박한빈에게서 멀어졌다.사실 처음에는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조금 전 박한빈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피곤함이 몰려왔다.머릿속에 들던 생각도 점점 흐려지고 그렇게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의 말을 거짓말이었다.다음 날 아침, 성유리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바로 옆에 누워 있는 박한빈이었다.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들어있었는데 성유리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당장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갑자기 그가 몸을 돌려 두어 번 기침을 했다.그리곤 반쯤 감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너한테서 감기가 옮은 것 같아.”성유리는 그 말에 그대로 멈춰버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잡아 자기 이마에 갖다 댔다.“한번 만져봐. 나 열 나는 거 같지 않아?”성유리는 일단 체온계를 가져와 박한빈의 체온을 재봤다.그러나 체온계에 표시된 건 아주 멀쩡한 수치였다.그 말인즉 박한빈은 열이 안 나고 있다는 것이었고 감기에 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몸이 아프다며 자신이 감기에 걸렸으니 여기서 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전의 고고하고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마치 억지를 부리는 아이 같았다.결국 성유리는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방으로 옮겨서 지내기로 결심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간파한 듯,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뭐 하려는 거야?”“방을 옮길 거예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의사 선생님께서 교차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요.”“그럼 난 어떡하라고?”“저택에 도우미분들도 많고 의사 선생님도 있잖아요. 박한빈 씨를 돌볼 사람 충분하죠.”“난 다른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
“걱정 마, 엄마 괜찮으니까.”하늘이는 문가에 서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한참을 그러던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시 감기 옮으면 어떡해?”그 말에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엄마 마스크 쓰고 있잖아.”그래도 하늘이는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다.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괜찮다는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가서 자. 혼자 잘 수 있겠어?”“응!”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 이제 다 컸어.”“그래, 그럼 가서 쉬어.”하늘이는 여전히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점차 거뒀다.하늘이가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은 걸 확인한 뒤에야 성유리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낮 동안 너무 오래 잠들었던 탓인지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소리.그걸 듣는 순간 성유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곧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침대 곁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몸을 뒤로 빼며 경계하듯 눈을 떴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열은 안 나는지 보려고 했어.”“전 괜찮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이 행여 다른 말을 할까 두려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박한빈 씨는 서재에서 주무셔아 하는 거 아니었어요?”“잠이 안 와.”“그러면 그냥 조용히 나가주세요. 제 잠까지 방해하지 말고.”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미동도 없었다.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점점 짜증이 밀려왔고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빨리 나가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