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324화

작가: 송진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1-28 19:00:00
성유리는 박세빈이 건네는 인사에도 한동안 멍만 때렸다.

그녀는 “형수님”이라는 호칭에 당황했는지 아니면 박세빈이라는 이름에 당황했는지 자신도 몰랐다.

박세빈, 그는 박한빈의 아버지가 밖에서 낳은 말 그대로 사생아였다.

성유리는 왜 오늘 갑자기 박세빈이 본가에 나타났는지 알 길이 없었고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집 안에서 집사가 빠르게 나오더니 박세빈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둘째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본가에는 왜...”

성유리는 집사의 말에 머리가 더 혼란스러워졌고 왜 이 시간 본가에 박세빈이 모습을 드러냈는지 궁금했다.

‘지화 그룹 내부 상황이 바뀐 건가?’

성유리가 멍하니 서 있을 때, 집사는 박세빈과 함께 자리를 떠났고 박세빈은 뒤돌아 성유리를 보더니 씩 웃어 보였다.

박세빈의 미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사실도 까맣게 잊었다.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아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박한빈은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 지금 박한빈 씨 본가에 있어요.”

성유리는 자기 말에 박한빈이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릴 줄 알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그가 먼저 통화를 끝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해서 왔어요. 별일 없으시면 오세요.”

“그리고 여기 손님 한 분이 더 오셨네요. 마음 단단히 먹고 오시는 게 좋을 거예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고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그녀의 말투가 아주 다정하다고 느꼈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성유리의 모습을 보지 못한 박한빈은 하루 종일 예민했던 신경이 차분해졌고 연정우에 대한 생각도 사라졌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말한 손님의 정체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어갔
잠긴 챕터
앱에서 이 책을 계속 읽으세요.

관련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325화

    박한빈이 거실을 다 둘러봤지만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난희의 뒤에 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린 박한빈도 성유리와 마찬가지로 당황했는지 동공이 흔들렸다. 하얀 셔츠에 높은 콧대, 그리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그 남자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던 박한빈은 옆에 있는 가사도우미에게 물었다. “유리는요?” 거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 묻는 박한빈에게 쏠렸지만 그는 못 본 척했고 심지어는 김난희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아마 화장실 가셨을 겁니다. 곧...” 가사도우미의 말에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화장실 쪽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성유리도 볼 일을 다 보고 밖으로 나왔고 박한빈과 거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번갈아 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손을 확 잡더니 그녀를 강제적으로 끌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이런 행동에 가족들은 황당해했지만 박한빈은 이미 본가 대문 앞까지 걸어간 상태였다. “박한빈! 너 거기 서.” 뒤에서 들리는 고함에 박한빈은 그제야 발걸음을 뚝 멈췄고 서서히 뒤를 돌아봤다.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 두 분 다 계셨군요.” “너 그게 무슨 뜻이냐? 우리는 아까부터 여기 있었어. 한빈이 네가 눈뜬장님이야?” 김난희는 누군가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적이 없었기에 박한빈의 행동에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박한빈은 화를 내는 김난희의 말에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할머니, 죄송합니다. 아까 못 볼 것을 보는 바람에 눈이 멀어 미처 보지 못했나 봅니다.” 박한빈이 말한 못 볼 것이라는 물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김난희의 안색은 박한빈의 말 때문에 점점 더 어두워져갔지만 박세빈은 그의 말을 듣지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박세빈은 가만히 있는 박한빈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먼저 인사를 건넸다. “형.” 해맑게 인사를 건네는 박세빈의 말에도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를 조용히 쳐다만 봤다. 박

    최신 업데이트 : 2024-11-28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326화

    “신분이요? 무슨 신분 말씀입니까?” 박한빈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묻자 김난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한빈이 네 생각에는 무슨 신분일 것 같은데?” “음, 박성훈 씨의 사생아 신분 말씀입니까?” 박한빈은 자기 친아버지의 이름을 주저도 없이 입 밖으로 뱉어버렸고 김난희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담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며 계속 말했다. “금성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제 부모님들 금슬이 아주 좋다고 생각할 겁니다. 근데 만약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박씨 가문에게는 해가 될까요? 아니면 이득이 될까요?” “하하, 금슬이 좋아? 작년에 있었던 일을 다 잊은 모양이구나.” 김난희는 김서영을 흘깃 째려보며 말했다. 마치 다 김서영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는 것처럼. 박한빈은 매우 덤덤해 보였고 심지어는 미소까지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두 일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제 어머니가 작년에 무슨 일을 벌였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결혼생활에서는 스스로의 역할을 잘했었습니다. 근데 박성훈 씨도 이미 세상은 떠난 지 몇 년이 흘렀는데 갑자기 이런 돌덩이가 굴러들어 오면 죽은 사람 얼굴에 먹칠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럼 세빈이는 한평생 저렇게 숨어서 빛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쟤 엄마처럼 파렴치하고 뻔뻔한 여자가 저지른 일이니 평생 빛을 보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박한빈은 길거리에 흔히 보이는 동물들을 대하듯 평온하고 무감정한 말투로 말했다. 쿵! 김난희가 화를 못 이겨 결국 밥상을 힘껏 내리치더니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박한빈! 세빈이도 결국 네 형제나 마찬가지다. 너한테 형이라고까지 부른 애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박씨 가문에서 너를 지금까지 그렇게 교육시켰어? 피가 섞인 형제를 함부로 모욕하고 무시하라고 가르쳤냐는 말이다!” 박한빈은 화를 내는 김난희도 두렵지 않은 듯 옅은

    최신 업데이트 : 2024-11-28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327화

    아까부터 언짢았던 김난희는 성유리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너는 왜 웃는 거지?” “아니요. 그냥 할머님 대신 제가 다 기뻐서 그랬어요.” 성유리는 말하며 박한빈을 힐끔 쳐다봤는데 그는 마치 성유리가 다른 이유라도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는데 방금 전과는 달리 아주 자연스럽고 솔직한 웃음이었다. 자신의 말에 웃는 박한빈을 성유리는 보는 체도 안 하고 김난희와 계속 말했다. “그래도 이 넓은 집에서 홀로 지내시느라 외롭고 심심하셨을 텐데 이렇게 착한 손주가 들어오면 정말 좋으실 것 같네요.” 성유리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외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었기에 김난희는 끓어오르던 분노를 꾹 삼켰다. 박한빈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박세빈을 쳐다보다가 문득 그에게 말했다. “뭘 잘 모르나 본데 너는 나한테서 다른 물건을 뺏어갈 자격도 없어.”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놓고 보면 박한빈과 성유리가 지금 함께 박세빈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박세빈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굳은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김난희는 목소리를 잔뜩 내리깔고는 박한빈의 이름을 불렀다. “박한빈.” “할머니의 뜻은 저도 잘 알겠습니다. 할머니께서 결정한 일이라면 저도 뭐라 할 자격이 없으니까요. 뭘 하시고 싶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아무 의견이 없으니까.” 박한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저한테서 형 노릇을 하기를 바라지는 마십시오. 쟤를 챙기거나 뭘 가르치라는 말도 하지 마시고요.” “제가 예전에 말했던 거 잊으셨습니까? 쟤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다면 평생 쥐 죽은 듯 조용히 살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 앞에 나타난 이상 제가 무슨 짓을 하던 제 탓을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박한빈은 김난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떠났다. 밥을 먹던 주방에서 벗어난 두 사람의 뒤로 뭐가 깨지는

    최신 업데이트 : 2024-11-28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328화

    성유리는 잔뜩 화가 나 있는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을 후회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도 아닌데 또 나한테 화풀이하네.’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짜증이 나 아예 입을 꾹 닫아버렸다. 그러나 성유리의 태도에 박한빈은 불만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지 그녀에게 따지듯 계속 물었다. “왜 말이 없어?” “어차피 박한빈 씨 집에 있는 일이니까 사실 저랑은 별 상관이 없잖아요.” 이미 박한빈의 본가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까지 와있었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성유리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갑자기 멈춘 박한빈의 차 때문에 온몸이 앞으로 쏠렸다. 다행히 좌석 시트는 진짜 가죽으로 만든 푹신한 시트였기에 머리가 부딪쳐도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박한빈을 째려보았다. 박한빈도 마침 성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계속 물었다. “우리 집 일이라고? 너는 내 와이프 아니야?” “오.” “오?” 박한빈은 성유리의 짧은 대답에 화가 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밥상에서 자신을 대신해 박세빈을 조롱하고 전화를 걸 때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라는 경고를 해준 성유리가 떠올라 분노를 꾹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 대신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 뭣 같은 놈이 돌아왔으니 지금 엄청 기뻐할 거야.” 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당황했지만 그는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있는 길은 박씨 본가에 편하게 가기 위해 시내에서부터 만든 길이었기에 박씨 가문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용이었다. 그래서 사실 평일에는 지나다니는 차가 몇 대 없는 데다가 지금 시간도 늦었기에 드넓은 도로에는 박한빈과 성유리가 타 있는 차만 우두커니 멈춰있었다. 박한빈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성유리에게 계속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머니는 계속 본가에 머물러있었어. 할머니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 몰랐을 리가 없다고.” “어머니는 그런 할머니를 말리지도 않았고 나한테 슬그머니 알려주지도 않았지. 어

    최신 업데이트 : 2024-11-29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329화

    “싫어요.” 성유리는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제가 왜 박한빈 씨 말에 동의해야 하는 거죠?” “봐. 너도 지금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 “만약 정말 자신 있으면 왜 나랑 내기를 못 하겠어? 이길 자신만 있으면 이참에 나한테 요구도 하나 제시할 수 있는데 너한테는 좋은 일 아니야?” 성유리는 다시 한번 거절하려고 했지만 박한빈의 눈을 마주한 순간부터 고민이 됐다. 아마 오늘 밤 본 박한빈의 모습이 예전의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한 탓인지 성유리는 갑자기 김서영이 박한빈에 대한 감정을 알고 싶어졌다. 친 아들이지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박한빈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지만 착하고 순진해 보이는 박세빈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지 궁금했다. 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민하다 박한빈에게 물었다. “만약 박한빈 씨가 이기면 저한테 무슨 요구를 제시하고 싶으신데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피식 웃더니 되물었다. “너 자신을 너무 못 믿는 거 아니야?” “됐어요.” 성유리는 또다시 후회했고 시선을 다른 곳에 올리며 계속 말했다. “저는 알고 싶지도 않고 당신과 내기할 생각도 없어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못 들은 사람처럼 핸드폰을 꺼내더니 김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행동에 자기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박한빈은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 김서영의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저예요.” “응.” “오늘 밤 있었던 일은 서로 상의를 하신 건가요?” 박한빈은 운전대를 잡고 있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 스르르 힘을 풀다가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다시 운전대를 잡더니 입을 열었다. “저한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면 제가 절대 오지 않을 걸 알고 계셨으니 성유리를 이용해 저한테 통보를 한 건가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김서영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리가 혼자 왔었어. 그래서 나도 너희 부부 사이에 연락 한 통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최신 업데이트 : 2024-11-29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330화

    박한빈의 전화가 끝나자 차 안에는 순간적인 정적이 흘렀다. 그의 예상대로 이 내기의 승자는 바로 박한빈이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이 순간, 전혀 기쁘지도 신나지도 않았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였기 때문일까? 박한빈은 처음 박세빈을 보았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김서영이 이 일을 주도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그녀는 그저 냉담하게 방관하기를 선택했을 뿐이라는 것을. 마치 어릴 적, 박한빈이 다른 아이들과 싸울 때도 김서영은 언제나 저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그들이 헤어지면 그제야 다가와 박한빈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물 한 병을 그의 머리 위에 쏟아부으며 묻곤 했다. “이제 좀 진정됐니?” 김서영은 늘 박한빈에게 이렇게 말했다. “싸움은 최악의 방법이야. 가장 무능한 사람만이 그런 거친 방법을 쓴단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말은 박한빈의 선생님이나 다른 어른들이 해주는 것이 맞을지 몰라도 친어머니가 해줄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박한빈은 어릴 때부터 책과 뉴스를 많이 읽었다. 책 속에서 그려진 어머니의 모습은 언제나 온화하고 헌신적이었으니까. 책 속 어머니는 늘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위험이 닥치면 주저 없이 아이 앞을 막아주고 따스하게 곁을 지켜주는 그런 존재였다. 밤에 읽어주는 책 한 권이든 아니면 따뜻하게 끓여준 죽 한 그릇이든 박한빈은 그런 것들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김서영은 오직 박한빈의 성장을 재촉하며 그를 유능한 지화 그룹의 후계자로 키우는 데만 집중했다. 심지어 오늘 박한빈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집으로 들이는 일조차도 그를 위해서라고 말한 김서영이지 않은가? 아까 그녀가 한 말을 박한빈은 아마 평생 기억할 것이다.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함이라던 말. 마치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김서영이 박한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김서영의

    최신 업데이트 : 2024-11-29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331화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성유리는 바로 넋이 나간 채로 그의 옆에서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두 여자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성유정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이미 상대방 여자에 의해 뺨을 맞았는지 볼은 시뻘겋게 부어있었다. 자세히 보면 두 여자는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유정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 여자는 성유정을 정신없이 때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상위에 있던 술병으로 성유정의 머리를 내리치려고 했다. 조영준은 그제야 깜짝 놀랐는지 때리려는 여자를 말리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거 놔요. 지금도 이 여우 같은 년을 보호하겠다 이거예요? 조영준 씨, 누가 당신을 그 자리까지 올려줬는지 잊으셨어요? 제가 아니면 당신은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하다고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던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힘껏 던져버렸다. 입구에 서 있던 성유정은 술병이 날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그녀 뒤에 있던 사람은 더 빨리 반응을 했다. 누군가가 성유정의 앞을 가로막아 선 채로 손을 쭉 뻗어 그녀를 보호했고 술병은 남자의 팔목에 강하게 부딪힌 다음 쨍그랑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떨어졌다. 큰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구경하던 사람들도 조용해졌고 박한빈과 눈이 마주친 조영준은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안색이 굳어져 갔다. 성유리의 시선은 난리 통에서도 성유정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성유정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다가 박한빈과 성유리를 발견한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는지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성유정은 상대방 여자에 의해 찢겨나간 옷가지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지도 못했다. 마침, 이때 식당의 직원이 도착했고 얼마 안 걸려 싸움을 벌인 사람들을 떨어뜨려 놓았다. 박한빈은 이 상황에 더 관여하기 싫은지 성유리의 손을 확 잡고는 식당 밖으로 나갔다. 성유리의 머릿속엔 온통 성유정이 자신을 보던 눈빛이 맴돌고 있어 박한빈이 자신을 끌

    최신 업데이트 : 2024-11-29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332화

    매 사람마다 주의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마치 늘 우울하고 힘이 없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장면을 목격해 우울함을 잊었다 해도 고작 그 몇 초뿐인 것처럼. 몇 초가 지나면 우울함은 또다시 찾아올 테니 박한빈과 성유리 사이 분위기는 다른 점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박세빈의 등장으로 두 사람은 잠시 적군에서 아군이 되었지만 사실 다른 일들은 평소와 똑같았다. 성유리의 기분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내렸고 박한빈은 그녀보다는 감정 기복이 덜했다. 박한빈은 한참을 말없이 운전만 하다 성유리에게서 핸드폰을 다시 가져다 차 안 아무 공간에나 놓았다. “나를 안 믿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성유리는 담담하게 계속 대답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박한빈 씨도 저를 속이실 이유가 없지 않나요?” 성유리의 대답을 들어도 박한빈은 전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유리가 자신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에게 관심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성유정이 어떻게 되든 나랑은 상관없어. 앞으로도 나랑 개 사이를 엮으려 하지 마.” “네. 알겠어요.” 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건 워낙 예전부터 잘하셨으니까.” 박한빈은 그녀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라고?” “제 말이 틀렸나요?” 성유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늘 박한빈 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매정하게 버렸잖아요.” “전에 성유정에게 항상 인내심 있고 다정하게 대해주셨죠? 소위 말하는 우정 때문인가요? 아니면 걔를 이용해 제 마음을 아프게 한 다음 당신에 대한 제 사랑을 시험해 보고 싶었나요?” “근데 지금 성유정을 상관하지 않으시겠다고요? 하긴 걔는 이제 박한빈 씨에게 아무런 도움이 돼주지 못하니 이렇게 주저하지도 않으시고 내팽개치시겠죠. 아무리 늪에 빠져 허우적대도 동정도 안 해주시고 무시했잖아요. 이런 일 저도 당해본 것

    최신 업데이트 : 2024-11-30

최신 챕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03화

    “자기 친자식을 미워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아이가 죽어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시겠다고요?” “그래. 내가 그 말을 했었지. 하지만 분명히 말할게. 난 이 수술 못 하겠어.” 박한빈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는 지금 성유리에게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유리의 말이 맞다. 박한빈은 약속을 어겼고 말한 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병원 규정에 따르면 반드시 본인이 병원에 와서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결정권은 박한빈에게 있었으니 그가 동의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의 손을 강제로 잡아 서명하게 만들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성유리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박한빈이 아무리 나빠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자기 아이가 정말로 위험에 처했을 때 그걸 눈 뜨고 지켜보진 않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는 정말로 그런 냉혈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이미 목구멍이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박한빈 씨, 전 평생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마침내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 오히려 네가 날 미워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었거든.”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막지 않았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이 사실 또한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 박한빈이 성유리를 미워하듯 그녀 또한 그를 미워했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성유리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몰랐기 때문에. 하늘이는 여전히 병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의사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이미 검사 결과가 나왔으니 의사들 눈에는 동의서 서명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박한빈은 아이의 아버지였다.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02화

    박한빈은 자신을 억제해 왔다. 결국 버림받은 사람은 그였으니까. 버려진 사람이 다시 상대를 붙잡고 이유를 묻는 것은 실패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에 재회한 이후 그는 한 번도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국 참지 못했다. 성유리가 직접 말해주는 정답이 너무 궁금했고 진심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유리의 과거 행동들은 박한빈에게 너무도 모순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고생하고 싶지 않다며 떠났지만 정작 그의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박한빈이 그때 성유리에게 해준 선물들은 아주 많았다. 그중 단 하나만이라도 가져갔다면 평생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유리가 말한 이유는 단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한 핑계였던 걸까?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한빈은 간절하게 답을 알고 싶어 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향했고 성유리는 잠시 그의 시선을 마주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는 제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어요.” “뭐라고?” “혼자였다면 당신과 함께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제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아이를 당신 때문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성유리는 조용히 진실을 말했다. 그건 극적이거나 박한빈이 상상했던 불가피한 사연 같은 것도 아니었고 답은 그저 이렇게 간단했다.하지만 이 간단한 답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박한빈의 마음을 꿰뚫었다.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던 박한빈의 손에 힘이 천천히 풀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성유리는 시선을 내리깔고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하늘이는 저에게 너무도 소중해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저는 모든 걸 버릴 수 있어요.” “알겠어. 그래 보이네.” 박한빈은 여전히 피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때는 주저 없이 나를 떠나고 이혼했겠지. 지금은 나랑 잠자리를 해서라도 동의서를 얻어내려는 거고.” 성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01화

    하지만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를 무시한 채 뒤돌아섰다.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당연히 그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성유리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건 제 잘못이에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간절함이 더 묻어나 있었다.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아이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 제발...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성유리는 행여나 박한빈의 심기를 또 건드릴까 신중히 단어들을 선택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성유리는 이곳에서 박한빈의 시간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성유리도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은 사실 그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박한빈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굴욕적이게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기를 바랐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쳐다봐줬다. 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잡아 억지로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고 그렇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성유리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한층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잠시 성유리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그의 말은 성유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다잡은 뒤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성유리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고 그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그녀의 눈빛은 박한빈이 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이 조금 담겨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500화

    박한빈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성유리가 카드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이번 거래 조건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보는 게 어때요?”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이건 수술 동의서예요. 먼저 서명해 주세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 지난번 그는 자신이 약속한 적 없다고 했을 때 성유리는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행여나 같은 일이 반복이 되는 것이 두려운 성유리는 이번에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했다. 박한빈은 철저한 사업가였으니 결국 눈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동의서 외에도 또 다른 계약서를 준비했는데 그 계약서에는 그들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계약서에 똑똑히 이런 문구를 적었다.자신이 박한빈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지만 그 조건은 하늘이가 회복되는 기간 동안에만 작용을 한다는 문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하늘이가 건강을 되찾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즉시 종료되며 앞으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게 된다.] 계약서의 조항은 간단하지만 지나치리만큼 직설적이었다. 이 문서가 만약 언론에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둘 모두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거래의 도구로 내놓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박한빈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조용히 서류만 주시하고 있었다. 짧은 몇 줄의 문장이었기에 그는 이미 내용을 다 읽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바라봤다. “박 대표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제야 박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성유리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9화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단지 분풀이일 뿐일 거야.”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말했다. “나에게서 받은 좌절과 실망감을 이제 와서 나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일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진 않았을 거야.”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그의 말에 따르고 있는 것도 하늘이가 수술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야. 이런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사하나, 나와 그 사람은 정말로 끝난 사이야.” ... 어느새 밤이 다시 찾아왔다.솔직히 말해서 성유리는 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박한빈에게서 어떤 메시지가 올까 걱정했고 동시에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어쨌든 박한빈은 아직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전날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뉴스에서는 전날 밤 박한빈이 어떤 연회에 참석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 속 박한빈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이 조금 달라졌지만 성유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와 함께 마트에 갔던 여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유리에게 있어 함께 마트로 향하는 일은 꽤 친밀한 행위로 느껴졌다. 둘이 함께 살지 않는다면 마트에서 함께 필요한 물건을 고르며 자신들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박한빈은 항상 바빴다. 그의 옷은 계절마다 고급 맞춤 팀에서 직접 저택으로 보내졌고 생활용품 같은 사소한 물건에 시간을 쓰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낭비라는 것도 박한빈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든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8화

    “유리 언니? 성유리 씨!” 사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더니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사하나가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며 물었다. “정신이 어디 외딴곳으로 나가 있는 것 같아요.” “나... 괜찮아.” “그런데 다크서클이 왜 이렇게 심해요? 어제는 집에 가서 푹 쉬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병원에서 밤을 새웠을 때보다 더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어젯밤에 잘 못 잤어.” 성유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늘이를 못 봐서 걱정돼서 그런가 봐.” “뭐가 걱정이세요? 여기 이렇게 의사랑 간호사가 많은데. 게다가 의사 선생님도 말했잖아요. 이식 수술만 잘되면 하늘이는 곧 완치돼서 퇴원할 거라고.” 사하나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나저나 박한빈 씨는 언제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러 오는데요? 그 말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성유리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는 성유리의 모습을 사하나가 놓칠 리 없었다. “왜 그래요? 설마... 박한빈 씨가 마음을 바꾼 건 아니죠?” “아니야.” “근데 이상하잖아요. 어제도 병원에 안 왔고 오늘도 안 왔어요. 이게 뭘 의미하는 건데요? 검사가 끝난 걸 모를 리 없잖아요. 그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죠? 일부러 잘난 척하려고 그러는 건가? 언니한테 직접 와서 부탁하게 만들려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하나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듯 언성을 높이며 계속 말했다. “미쳤나 봐요! 하늘이가 자기 친자식인데! 언니가 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한다고요? 이건 완전 고의적인데?”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언니가 무릎 꿇고 빌기라도 바라는 건가요? 아님 자기 앞에서 사죄하면서 참회하라고? 정말...” 사하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성유리가 그녀를 진정시키듯 입을 뗐다. “진정해.” 사하나와는 달리 성유리는 오히려 차분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7화

    박한빈은 언제나 어딜 가도 주목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성유리는 잘 알고 있다. 예전에도, 그리고 얼마 전에도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곁에 머물렀고 심지어 종래로 마트에 발을 들이지 않던 박한빈이 다른 여자와 함께 다니는 모습까지 보았었다. 박한빈이 원하기만 하면 그와 함께 침대에 올라가려는 여자들은 줄을 서 있을 것이다. 늘 인기가 많은 박한빈에게는 성유리를 제외하고도 다른 선택지가 많다. 그리고 자신은 그 많은 선택지 중에서 제일 좋은 선택이 될 리가 없었다. 예전에도 아니었으니 지금은 더더욱 아닐 것이 뻔했다. 그 순간, 박한빈의 몸이 굳어지더니 시선이 성유리의 흉터에 머물렀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시선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고 무슨 원인에서인지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입꼬리를 약간 올려 미소를 짓던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그래서 박한빈 씨는 계속하실 건가요? 확실하세요?”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어두워 성유리는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뭔가를 더 말하려는 찰나, 그는 고개를 숙였고 이내 박한빈의 입술이 그녀의 흉터에 닿았다. 부드럽고 섬세한 감촉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안색이 잔뜩 어두워지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단단히 눌러 제압했다. “당신...” 성유리는 뭔가 말하려 애썼지만 박한빈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쳐 하려던 말을 막아버렸다. 이런 감정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그녀는 이미 잊고 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사실 성유리는 오늘 박한빈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오늘 밤을 함께 보내면 내일 수술을 받아들일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박한빈이 끝까지 자신과 사랑을 나눌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유리가 알던 박한빈은 늘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 흉터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6화

    금세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박한빈은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면 피울수록 박한빈의 기분은 더욱더 뒤숭숭해졌다. 욕실 안에서 끝도 없이 씻고 있는 성유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결국 담배를 꺼버리고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박한빈이 손가락으로 문을 살짝 두드리자 또랑또랑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5분 줄 테니까 나와.” 말을 마친 박한빈은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앉더니 시선을 욕실 문에 고정했다. 그러자 안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마침내 멈췄다. 성유리는 마치 안에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재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히 5분이 다 되어가는 순간, 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녀의 가운으로 자신의 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고 이를 본 박한빈은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꼭 이래야 해? 네 몸에서 내가 못 본 데가 어디 있다고?” 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땅바닥만 쳐다봤고 가운을 꽉 움켜쥔 손가락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박한빈은 지금 그녀가 폭발하기를 바랐다. 무엇이든 던지거나, 욕을 해도 되고 심지어는 자신을 물어뜯기라도 하길 바랐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쭈뼛거리던 성유리는 몸에 걸친 가운을 한 번 더 단단히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불 끄면 안 될까요?” “뭐라고?” “불... 끄고 싶어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아주 낮은 데다가 떨리기까지 했다. 마치 박한빈이 너무 두렵다는 듯이.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쭉 뻗어 그녀를 단숨에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성유리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은 이미 침대 위에 눕혀졌고 부드러운 매트리스가 그녀의 등을 받치자 이내 그녀의 눈앞에는 박한빈의 잔뜩 찌푸려져 있는 얼굴이 보였다. 그는 몸을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길게 늘어진 앞머리가 성유리의 뺨을 스치자 그녀는 더욱 떨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연기하려는 셈이야? 응?”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비웃으며 물었다. “내 아이까지 낳아준 몸인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495화

    이 층은 최고급 스위트룸이 있는 층이었다.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고 왠지 모를 스산함도 감돌았다. 성유리는 초인종을 누른 뒤 고개를 숙이고 자기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에서만 지내던 최근, 그녀의 하얀 운동화에는 어느새 흙이 묻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딛고 있는 고급스러운 브라운 카펫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기 지금 성유리가 서 있는 이 세상은 그녀의 세계가 아니었다. 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 수 없었다. 몇 초일 수도, 아니면 아주 긴 십여 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 시간이 한 세기처럼 길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손발이 저려오기 시작할 때쯤, 마침내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러나 문 너머의 사람을 본 순간, 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옆에 늘어져 있던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고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살짝 바라봤다. 박한빈은 방금 욕실에서 나온 상태였는지 허리에는 흰 수건 하나만 걸려 있었고 머리카락은 아직 마르지 않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방울은 하얗고 탄탄한 가슴을 타고 흘러내려 복근을 따라 아래로 이어졌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은 앞머리가 길어 눈을 거의 덮을 정도였지만 그 안의 깊고 어두운 눈빛은 성유리에게 똑똑히 보였다.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준 박한빈은 성유리를 본 체도 하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몇 걸음 걸어가던 박한빈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박한빈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먼저 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의 말에 성유리는 순간 숨이 가빠졌고 박한빈에게 되물었다. “뭐가 무슨 뜻이에요?” 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웃음을 터뜨렸다. “성유리, 네가 지금 나한테 질문을 하고 있어?” 그녀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내 박한빈은 벽에 몸을 기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