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건지도 기억을 못 했다. 몇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진 성유리는 비몽사몽인 상황에서 누군가 자신의 몸에 닿는 느낌을 받았다. 서서히 눈을 뜬 성유리는 자기 옆에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깨어난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바로 성유리의 종아리를 잡더니 힘껏 그녀를 깔았다. 성유리는 화가 나 손을 뻗어 박한빈의 얼굴이라도 할퀴고 싶었지만 그는 어느새 그녀의 두 손을 다 잡아 자신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박한빈의 힘을 당할 수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는 순순히 따르는 그녀에 더 흥분했다. 가만히 있는 자신을 잡고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며 사랑을 나누고 있던 박한빈이 방심하는 틈을 타 성유리는 그의 배를 강하게 차버렸다. “저 숨 좀 쉬게 놔두면 안 돼요?” 진심이 담긴 자신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그가 정말 정신병자라고 생각했다. 성유리는 옆으로 돌아 박한빈을 애써 무시하며 자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저항하면 할수록 더욱 강하게 안던 박한빈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 할게.” “근데 네가 이렇게 계속 움직이면 난 안 한다는 보장은 못 해.” 박한빈의 말이 성유리에게 먹혔는지 그녀는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시간이 오래 흐르도록 잠에 들지 못한 박한빈은 지금 자기 품에 얌전히 안겨있는 사람은 아주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어나면 또 나를 그런 눈으로 보겠지.’ 박한빈이 아무리 애를 쓰며 관심을 받고 싶어 해도 성유리는 눈길 한번 돌려주지 않았고 분노와 원망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또 좋아지겠지.’ 박한빈의 강압 아래 다시 혼인을 한 두 사람이니 그는 성유리가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고 품에 있는 그녀를 더욱 꽉 안았다. 성유리는 잠에 들었지만 매우 불편한지 미간을 찌푸렸고 박한빈은 서서히 힘을 풀었다. 박한빈은 잠이 든 성유리의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꿈속에서 박한빈은 성유리가 연정우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으려고 다급히 뛰어갔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망치고 성유리를 다시 자기 곁에 세우고 싶어 그녀의 손에 거의 닿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눈을 번쩍 떴다. 눈이 부시게 비추는 햇살 때문인지 박한빈은 눈물이 맺혔고 정신을 다잡고는 옆에 누워있는 사람을 안으려 했다. 하지만 옆에 있는 것은 오직 베개 하나뿐이었다. 큰 방에 홀로 남겨진 박한빈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빠른 속도로 아래층에 내려간 박한빈은 얼른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세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전화를 꽤 빨리 받았다. “어디야?” 박한빈은 잠긴 목소리로 물었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내, 문 벨 소리가 성유리의 대답 대신 들렸다. 성유리도 벨 소리를 들었는지 박한빈과의 통화를 끊어버리고는 입구 앞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른 곳이 아닌 뒤에 있는 정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유리를 본 박한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 손에 들려있는 약 봉투를 발견했다. 머릿속에는 약 봉투 안에 뭐가 담겼는지 떠올랐지만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성유리는 약을 개봉하더니 물과 함께 꿀꺽 삼키더니 박한빈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왜 저를 찾은 거죠?”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없이 상위에 놓인 약상자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예상은 딱 맞아떨어졌고 박한빈은 꽉 쥐었던 주먹에 서서히 힘을 풀었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보며 되물었다. “배 안 고파? 나가서 밥 먹을까?” “저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돼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보니 이미 그녀가 외출복 차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허리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연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성유리는 유난히 더 아름다웠다. 안 하던 화장까지 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묶어 목선이 드러난 성유리를 말없이 쳐다보던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랑 한 약속인데?” “...” 아무 대답
성유리와 연정우는 시내에 있는 어느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서로 마주친 순간, 연정우는 성유리의 볼에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연정우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아차렸지만 모르는척 하며 그에게 물었다. “외할아버님은 어떻게 되셨어?” “괜찮아. 알다시피 이런 병은 쉽게 고쳐지지 않으니까 할아버지가 조금이나마 정신이 드실 때 많이 모시고 다니려고.” 성유리는 잠시 당황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물었다. “여행 가는 거야? 좋은 생각인데? 그...” “여행 아니지.” 연정우는 성유리의 말을 채 듣지도 않더니 대답했다. “그럼 이민 준비하는 거구나?” 성유리는 그의 굳은 표정과 낮은 목소리를 듣고는 빠르게 눈치챘다. “응.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연정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을 이어갔다. “학교 쪽은 이미 그만둔 상태고 해야 하는 절차도 거의 다 마친 상태야. 아마 다음 달이면 가야 할 수도 있어. 그래서 지금보다 더 많이 바빠질 것 같은데 유리 네 시간이 없을까봐 오늘 보자고 한 거야. 마지막 인사라도 하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성유리였지만 무릎 위에 놓고 있던 손에는 점점 더 힘을 줬다. “미안해.” 그때, 연정우가 먼저 적막을 깨며 입을 열었다. “네가 미안하다는 말을 왜 해? 넌 나한테 미안할 일을 한 적이 없잖아.” 성유리는 사과의 말을 전하는 연정우에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만약 그때...” “그때는 너도나도 마찬가지였어.” 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을 끊어버리며 계속 말했다. “너도 알잖아. 성리 그룹 상황. 똑같이 비관적이라 나도 그때는 힘들었어.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한 사람도 나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연정우는 아무 말도 없이 성유리만 쳐다보고 있었고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 내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려고 결정했어?” “영국.” “그래. 그럼 나중에 기회 되면 내가 한번 갈게.” 성유리가 연정우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연정우 또한 웃어줬다.
그녀의 말에 연정우는 피식 웃었고 성유리는 그가 왜 웃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내가 너를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네가 이런 말 하면 어떡해. 만약 그때 그런 복병들이 없었다면 나는 절대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근데 세상에는 만일이라는 경우가 존재하지 않잖아. 이렇게 서로 미안해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 없어.” 연정우의 말에 성유리도 표정이 풀렸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아무 의미도 없지.”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고 성유리는 연정우와의 지난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에는 수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맞은편에 서로 마주 앉아보고 있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짐작이 안 갔다. 성유리뿐만 아니라 연정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성유리는 커피를 다 마셨지만 더 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럼 나 먼저 가볼게. 몸 잘 챙겨.”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성유리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고 연정우는 담담히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 성유리는 그렇게 카페를 나와 버렸고 택시를 잡으려는 순간, 핸드폰이 한번 울렸다.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해 발신자를 확인하니 연정우였다.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었는데 얼굴 보고 할 용기가 없네. 전화 걸 용기도 없고.] 성유리는 조용히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며 그의 다음 문자 메시지를 기다렸다. 몇 분 뒤, 한참을 고민하던 연정우가 메시지를 전송했다. [만약 우리가 진짜 결혼을 했다면 네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했을까?] 짧은 한마디에 연정우는 모든 정력을 쏟아부은 것 같았고 성유리는 카페에 앉아 자신의 답장을 기다릴 연정우를 떠올렸다. 성유리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응. 그랬을 거야.] 연정우는 별다른 답장을 보내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핸드폰을 꺼버리고는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잡았다. 차에 올라탄 성유리는 도연제가 아닌 어느 한 백화점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과 약속한 시간이 아직
날은 빠르게 어두워졌고 박한빈은 도연제에서 하루 종일 머물렀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그렇게 일찍 나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보낸 문자에 답장조차 하지 않는 성유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오늘 밖에서 자고 올 건가?’ 오늘이 신혼 두 번째 밤인지라 박한빈은 불만이 더 많았고 전화를 걸어 따지려 했지만 집착이 강한 남편처럼 보일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 시간만 쳐다보고 있었다. 깊은 새벽이 오기 전, 성유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인기척 소리를 들은 박한빈이 몸을 일으켜 그녀를 맞이하려고 했지만 가만히 있기를 선택했다. 박한빈은 서재의 문을 닫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성유리는 서재 앞을 그냥 지나쳐버렸다. 작은 방 앞에 도착한 성유리는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뒤돌아 큰방으로 향했다. 두 번이나 박한빈이 있는 서재를 지나쳤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다. 그러자 박한빈은 더는 가만히 못 있겠는지 먼저 성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유리야.” 박한빈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던 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췄고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술 마셨어?” “무슨 일 있으세요?” 성유리는 무서울 정도로 평온하게 되물었고 박한빈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다시 입을 뗐다. “연정우 씨랑 술 마시러 갔었어?” “무슨 일 있으시냐고요.” 성유리는 박한빈이 대답이 없자 뒤돌아 가던 길을 가려 했다. 그 순간, 박한빈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뒤에서 성유리를 꽉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성유리가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술을 마신 탓에 평소보다 맥이 빠져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또다시 모든 것을 포기한 성유리를 박한빈이 욕실로 데리고 갔다. 성유리가 제자리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와중에 그녀에게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비록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너무 찬 물줄기에 성유리는 순식간에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욕실 안에서 성유리는 반항할 힘조차 없어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려는 성유리의 귀에 박한빈이 살짝 뽀뽀하며 입을 열었다. “연정우 씨랑은 잤었어?” 성유리는 몸을 덜덜 떨며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대답 따위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됐어.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지금 너는 내 사람이잖아.” “이미 결혼했으니 유리 너는 내 아내고 네 마음속에는 나 하나만 있어야 돼. 나만 좋아해야 되는 건 기본이고. 알겠어?” 성유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박한빈은 밑으로 허리를 더 숙이는 그녀가 자신에게 순종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입을 가리고 있던 박한빈도 서서히 손을 뗐고 그 순간, 성유리가 박한빈의 손을 힘껏 깨물었다. ... 다친 박한빈과 마찬가지로 성유리의 상태도 좋지만은 않았다. 이미 자기 앞에서 본색을 다 드러낸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그가 정말 자신을 죽여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성유리가 목이 너무 아파 힘들어 할때 박한빈은 아주 다정하게 그녀에게 물을 따라주며 살뜰하게 챙겨줬다. 만약 예전 같았다면 이런 박한빈에게 순응하고 따랐겠지만 성유리는 지금 절대 그러기가 싫었다. 박한빈이 아무리 다양한 “미끼”를 던진다 해도 성유리는 물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한테 상처를 주는 사이가 되었다. 누가 이기는 싸움인지 성유리는 몰랐지만 다시 깨어나 보니 방 안에 혼자 남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유리가 힘든 몸을 이끌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지만 덜덜 떨리는 다리와 무릎에 난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어젯밤 약을 먹은 성유리는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고 찾기도 귀찮은 성유리는 새 약을 꺼내 바로 삼켜버렸다. 그때, 성유리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는데 박씨 본가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잠시 멈칫하던 성유리는 결국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너머 집사는 오늘 집으로 와 밥을 먹으라는 말만 전했다.
성유리는 박세빈이 건네는 인사에도 한동안 멍만 때렸다. 그녀는 “형수님”이라는 호칭에 당황했는지 아니면 박세빈이라는 이름에 당황했는지 자신도 몰랐다. 박세빈, 그는 박한빈의 아버지가 밖에서 낳은 말 그대로 사생아였다. 성유리는 왜 오늘 갑자기 박세빈이 본가에 나타났는지 알 길이 없었고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집 안에서 집사가 빠르게 나오더니 박세빈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둘째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본가에는 왜...” 성유리는 집사의 말에 머리가 더 혼란스러워졌고 왜 이 시간 본가에 박세빈이 모습을 드러냈는지 궁금했다. ‘지화 그룹 내부 상황이 바뀐 건가?’ 성유리가 멍하니 서 있을 때, 집사는 박세빈과 함께 자리를 떠났고 박세빈은 뒤돌아 성유리를 보더니 씩 웃어 보였다. 박세빈의 미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사실도 까맣게 잊었다. 한참을 서 있던 성유리는 정신을 다잡아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박한빈은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 지금 박한빈 씨 본가에 있어요.” 성유리는 자기 말에 박한빈이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릴 줄 알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그가 먼저 통화를 끝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해서 왔어요. 별일 없으시면 오세요.” “그리고 여기 손님 한 분이 더 오셨네요. 마음 단단히 먹고 오시는 게 좋을 거예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고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그녀의 말투가 아주 다정하다고 느꼈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성유리의 모습을 보지 못한 박한빈은 하루 종일 예민했던 신경이 차분해졌고 연정우에 대한 생각도 사라졌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말한 손님의 정체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어갔
박한빈이 거실을 다 둘러봤지만 성유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난희의 뒤에 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린 박한빈도 성유리와 마찬가지로 당황했는지 동공이 흔들렸다. 하얀 셔츠에 높은 콧대, 그리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그 남자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던 박한빈은 옆에 있는 가사도우미에게 물었다. “유리는요?” 거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 묻는 박한빈에게 쏠렸지만 그는 못 본 척했고 심지어는 김난희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아마 화장실 가셨을 겁니다. 곧...” 가사도우미의 말에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화장실 쪽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성유리도 볼 일을 다 보고 밖으로 나왔고 박한빈과 거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번갈아 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손을 확 잡더니 그녀를 강제적으로 끌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이런 행동에 가족들은 황당해했지만 박한빈은 이미 본가 대문 앞까지 걸어간 상태였다. “박한빈! 너 거기 서.” 뒤에서 들리는 고함에 박한빈은 그제야 발걸음을 뚝 멈췄고 서서히 뒤를 돌아봤다.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 두 분 다 계셨군요.” “너 그게 무슨 뜻이냐? 우리는 아까부터 여기 있었어. 한빈이 네가 눈뜬장님이야?” 김난희는 누군가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적이 없었기에 박한빈의 행동에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박한빈은 화를 내는 김난희의 말에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할머니, 죄송합니다. 아까 못 볼 것을 보는 바람에 눈이 멀어 미처 보지 못했나 봅니다.” 박한빈이 말한 못 볼 것이라는 물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김난희의 안색은 박한빈의 말 때문에 점점 더 어두워져갔지만 박세빈은 그의 말을 듣지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박세빈은 가만히 있는 박한빈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먼저 인사를 건넸다. “형.” 해맑게 인사를 건네는 박세빈의 말에도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를 조용히 쳐다만 봤다. 박
성유리의 대답은 홍지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뒤,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박한빈이 곧장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떠나기 전, 그는 단 한 번도 홍지은을 쳐다보지 않았다.하지만 홍지은은 알았다.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그러나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시궁창뿐인 인생이 여기서 훨씬 나빠진다고 한들 얼마나 더 나빠질까?그렇다고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었다.그러니 죽더라도 반드시 한 사람은 끌어내릴 것이다.성유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지 홍지은은 아직 모른다.세상 그 누가 행복하게 지낸다 해도 괜찮다.‘성유리는 절대 안 돼.’...성유리는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복도 끝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뒤따라오던 박한빈도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옆에 조용히 서서 성유리만 쳐다봤다.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나 상대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연달아 몇 번을 끊었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그렇게 주차장까지 도착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난 박한빈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박 대표님, 저예요. 왜 말도 없이 먼저 가셨습니까? 저...”박한빈은 상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행여 핸드폰이 또다시 울릴까 봐 박한빈은 이번에 아예 전원을 꺼버
홍지은의 말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아까보다 더 얼굴을 찌푸렸다.눈빛에 그득히 담겨있는 혐오와 무시의 감정은 선명히 드러났지만 박한빈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바로 맞은편에 서 있던 홍지은도 당연히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진짜예요. 박 대표님,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제 남편은...”“꺼져.”단 두 글자뿐인 박한빈의 대답에 홍지은은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사실... 신경 쓰이는 건 박한빈의 대답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었다.홍지은은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난감해진다는 사실을.그러나 박한빈은 홍지은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자리를 떠버렸다.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홍지은은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박한빈 씨, 계속 이러신다면... 제가 유리한테 그 일들을 다 알려줘도 제 탓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고 이내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쳐다봤다.그러자 홍지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제가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그때 유정 씨가 임신했던 아이 말이에요. 박 대표님 아이 맞죠?”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홍지은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냉랭했다.그의 눈빛에 홍지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말했다.“지금 유정 씨가 잡혀있긴 하지만 그 일들이 다 끝이 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때 유리가 잃었던 아이도... 사실 박한빈 씨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유정 씨가 그랬다는 걸.”홍지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의 뒤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쿵!그 소리에 박한빈이 뒤돌아보자 성유리가 머지않은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그녀의 표정은
그리고 이내 홍지은은 자신의 자리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금성에서 제일가는 큰 인물은 박한빈은 당연하게도 가장 앞에 있는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무대 위에 전시되는 물건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홍지은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 박한빈도 마침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멈칫하던 그는 다정하게 성유리 귓가에 얽혀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그저 연인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박한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을 일일이 다 풀어줬다.만약 홍지은이 직접 본 게 아니라면 그녀는 꿈에서도 박한빈이 이런 일을 한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너무 놀란 홍지은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박한빈 좀 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성유리는 퉁명스럽게 그의 손을 밀쳐냈다.그리고는 박한빈을 슬쩍 째려봤지만 그는 화를 내기도 커녕 오히려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꽤 거리가 있던 홍지은과 두 사람이기에 그녀는 박한빈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옆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기 좀 봐요. 두 사람 사이 너무 좋아 보이지 않아요? 유리가 평소에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게 혹시 박 대표님께서 쟤를 숨겨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니까요.”홍지은의 옆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성에서 거주하는 현지 사람이 아니었고 결혼한 남자도 업계에서 중하층에 속하는 위치였다.전에 그녀는 홍지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막상 말을 거니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그렇게 홍지은의 미소와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정 사모님?”상대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이내 정연화는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홍지은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선명히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은 ‘화살’이 되어 홍지은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고 있었고 흐르는 ‘피’조차 그녀에게는 차갑게 느껴졌다.입술을 뻥긋거리
홍지은은 마치 성유리와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라는 듯 능글맞게 대꾸했다.그리고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발 빠르게 성유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은 경매에 참석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유리는 미소를 지은 채 그의 곁을 지켰다.사실 그녀는 웃고는 있었지만 이미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상태였고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그래서 홍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예전에는 이런 장소에 오는 거 별로라고 했잖아.”홍지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잡힌 손을 빼냈다.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홍지은은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보며 계속 말했다.“어머? 박 대표님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만약 이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면 아무리 싫어도 박한빈은 몇 마디 대답은 해줬었다.그렇지만 유독 오늘따라 그는 대답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말을 건 상대가 홍지은이라서 싫었다.필경 홍지은을 볼 때면 성유리가 지나간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까 말이다.그게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박한빈은 성유리가 홍지은을 마주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오다가다 마주친다고 하더라도.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고 홍지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녀와 함께 떠나버렸다.박한빈은 홍지은이 자신의 대답을 들을 자격도, 자기가 대답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답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제자리에 서 있던 홍지은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던 박한빈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박 대표님!”이내 다른 사람이 박한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그는 미소 지으며 상대에게 성유리를 소개해 줬다.“여기는 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성유리라고 하고요.”“안녕하세요. 사모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
사실 박한빈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곤 끝없는 공부와 훈련뿐이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할 것이 많았다.학교 성적은 언제나 최고여야 했고 악기나 골프, 승마를 포함한 다양한 외국어까지 익혀야 했다.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박한빈의 신분을 부러워했다.박 씨라는 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광을 의미했다.하지만 그 영광과 함께 짊어져야 할 무게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인지조차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한빈이 평범한 아이로서의 행복을 잃었다는 사실이다.잃을 게 많은 만큼 박한빈은 손에 넣은 것도 많았다.그리고 그는 자신이 짊어졌던 짐을 하늘이에게 만큼은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그래서 얼마 전, 김서영이 하늘이에게 특별 교육을 시키자고 했을 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박한빈, 네 딸은 분명 앞으로 금성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될 거야.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익히지 못하면 그 신분이 아깝지 않겠니?”김서영은 박한빈을 설득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뭐가 어떻게 됐든 하늘이는 박한빈의 핏줄이자 친딸이다. 설령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말이다.감히 누가 박한빈의 딸을 무시하고 얕잡아볼 수 있겠는가?그래서 김서영이 뭐라고 하든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 이야기를 마친 후, 박한빈의 품 안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박한빈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녀는 살짝 찌푸린 미간과 다물린 입술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인가 싶어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에요.”성유리는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그런데 이거 왜 아직도 안 멈추죠?”“곧 멈출 거야.”박한빈은 짧게 대답하다 문득 깨달았다.“설마... 지금 나를 가슴 아파하는 거야?“아니거든요?”성유리는 전혀 망설
박한빈은 천천히 웃음을 거두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접 물을 따라왔다.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마실 물을 준비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박한빈이 몸을 휙 돌리곤 성유리에게 컵을 내밀었다.“방금 건 그냥 장난이었어. 재미없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물컵을 받아 들었다.그것만으로도 이미 박한빈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푹 쉬어.”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성유리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컵을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 나갔다 올게요.”그녀가 문 쪽으로 향하려 하자 박한빈이 손목을 붙잡았다.“어디 가려고?”“정원이요. 햇볕 좀 쬐려고.”“나도 같이 가.”“아까 그렇게 아프다면서 괜찮으세요?”성유리는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그 눈빛에는 박한빈을 향한 의심이 가득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나도 햇볕 좀 쬐고 싶어. 그리고 의사가 말했잖아? 내 면역력 좋다고.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래.”‘심각하지 않다?’‘그러면 아까까지는 왜 그렇게 책임지라고 난리였는데?’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지만 결국 성유리는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그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박한빈은 마치 그것을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성유리의 손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방에서 본 그대로 오늘 날씨는 유난히 화창했다.햇살 아래, 정원의 회전목마가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박한빈이 특별히 주문 제작해 놓은 것이라 그런지 원색의 유채가 한층 더 생생해 보였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그런데, 박한빈은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보내는 그윽한 시선을 느꼈지만 성유리는 한참을 모른 척했다.박한빈이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한번 타볼래?”“뭐를요?”“회전목마.”성유리는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어린애도 아니고.”“그럼 어릴 때는 타봤어?”그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잠시 침
“그럼 자. 난 네가 잠들면 나갈게.”박한빈의 말을 성유리가 철석같이 믿을 리가 없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와 다투는 것도 귀찮았다.그래서 그냥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푹 덮고 등을 돌리고는 박한빈에게서 멀어졌다.사실 처음에는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조금 전 박한빈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피곤함이 몰려왔다.머릿속에 들던 생각도 점점 흐려지고 그렇게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의 말을 거짓말이었다.다음 날 아침, 성유리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바로 옆에 누워 있는 박한빈이었다.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들어있었는데 성유리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당장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갑자기 그가 몸을 돌려 두어 번 기침을 했다.그리곤 반쯤 감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너한테서 감기가 옮은 것 같아.”성유리는 그 말에 그대로 멈춰버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잡아 자기 이마에 갖다 댔다.“한번 만져봐. 나 열 나는 거 같지 않아?”성유리는 일단 체온계를 가져와 박한빈의 체온을 재봤다.그러나 체온계에 표시된 건 아주 멀쩡한 수치였다.그 말인즉 박한빈은 열이 안 나고 있다는 것이었고 감기에 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몸이 아프다며 자신이 감기에 걸렸으니 여기서 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전의 고고하고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마치 억지를 부리는 아이 같았다.결국 성유리는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방으로 옮겨서 지내기로 결심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간파한 듯,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뭐 하려는 거야?”“방을 옮길 거예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의사 선생님께서 교차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요.”“그럼 난 어떡하라고?”“저택에 도우미분들도 많고 의사 선생님도 있잖아요. 박한빈 씨를 돌볼 사람 충분하죠.”“난 다른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
“걱정 마, 엄마 괜찮으니까.”하늘이는 문가에 서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한참을 그러던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시 감기 옮으면 어떡해?”그 말에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엄마 마스크 쓰고 있잖아.”그래도 하늘이는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다.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괜찮다는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가서 자. 혼자 잘 수 있겠어?”“응!”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 이제 다 컸어.”“그래, 그럼 가서 쉬어.”하늘이는 여전히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점차 거뒀다.하늘이가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은 걸 확인한 뒤에야 성유리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낮 동안 너무 오래 잠들었던 탓인지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소리.그걸 듣는 순간 성유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곧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침대 곁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몸을 뒤로 빼며 경계하듯 눈을 떴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열은 안 나는지 보려고 했어.”“전 괜찮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이 행여 다른 말을 할까 두려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박한빈 씨는 서재에서 주무셔아 하는 거 아니었어요?”“잠이 안 와.”“그러면 그냥 조용히 나가주세요. 제 잠까지 방해하지 말고.”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미동도 없었다.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점점 짜증이 밀려왔고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빨리 나가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