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영의 말에 성유리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에 김서영은 불쾌함을 느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뗐다. “역시 사모님은 여전히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고 계시네요.” 가볍게 던진 성유리의 한 마디에 김서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사모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렇다 해서 박한빈 씨를 용서할 생각은 없고요.” 성유리는 찻잔을 상에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박한빈 씨가 업계 상의 위치를 이용해 그렇고 그런 수단과 방법으로 강압하고 위협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됐을 거예요.” “만약 사모님이시라면 이런 상황에서 다시 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나요?” 김서영은 성유리의 말에 뭐라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성유리가 자신의 말에 강하게 반박하고 따졌다면 김서영은 아직 그녀가 박한빈에게 감정이 남아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 “나도 알아.” 몇 분 뒤, 김서영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름이 연정우라고 했나? 근데 유리 너도 그 남자를 좋아했어?” “네.” 평온한 말투로 제일 듣기 버거운 말을 내뱉는 성유리의 대답에 계단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은 몸이 굳어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성유리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연정우와는 그저 평범한 비즈니스 사이라고 성유리가 직접 인정했었다. 왜 결혼을 하냐고 물었을 때도 성유리는 직접 박한빈에게 연정우의 외할아버지가 건강이 악화돼서 서두른다고 알려줬다. ‘어떻게 유리가...’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박한빈의 뒤에 서 있던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집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서영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동공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옆에 있던 성유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그거랑은 다르죠.” “뭐가 다른데?” 성유리도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며 계속 물었다. “다 알면서 왜 계속 묻는 거죠?” 박한빈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점점 더 실렸다. 성유리는 그와 달리 아주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희는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잖아요. 굳이 결혼식을 해야겠어요?” 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김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생각도 유리랑 같아. 그리고 혼인 신고서도 이미 손에 넣지 않았니? 결혼식은 그저 형식일 뿐이야. 중요하지 않잖니?” “하지만 결혼 사실은 알려야 할 거야. 그러니까 결혼식보다는 연회 같은 거 준비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니?” 김서영의 말에 성유리는 더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저는 꼭 결혼식을 치를 겁니다. 이미 다 말해놔서 번복 못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는 김서영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성유리만 쳐다봤다. 성유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지금 자기가 마치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툭 터져버려 공중에서 사라지는 그런 우스운 풍선 말이다. 풍선이 아니라면 떼를 쓰는 어린아이나 관심받고 싶어서 애를 쓰는 철없는 어른이라고 형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옆에서 별의별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어떠한 반응도 해주지 않는 성유리가 미웠고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시선을 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저는 또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디 가게?” 김서영이 물었다. “회사요.” “그럼 유리는?”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한빈을 보고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마 김서영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속으로 내심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랐지만 성유리는 그러지 않았다. 뒤돌아 빠른 속도로 앞으로 걸어 나가는 박한빈은 사실 별일이 없었지만 빨리 이곳에서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성유리는 몇 분간 누워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우려 했다.박한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다. 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몇 번이나 잠옷 단추를 끼우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곧이어 박한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훤칠한 데다가 이목구비까지 뚜렷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방금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의 복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성유리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의 눈을 피하며 여전히 단추를 잠그려 애쓰고 있었다.“내일이 바로 유정이가 퇴원하는 날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퇴원 절차를 밟아주고 집에 데려와 줘. 어머님께는 한동안 여기에 머물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어.”성유리는 단추를 만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성유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2년째 부부로 지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자, 금성 지화 그룹의 후계자 박한빈이었다.그리고 방금 그가 말한 성유정은 성유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다.다섯 살 때, 성유리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고 그렇게 16년 가까이 실종됐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성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성씨 가문에는 이미 또 다른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유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생’이 되었다.아버지는 성유리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청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비슷한 나이대인 성유정을 입양했었다. 16년이 지나고 성유리가 다시 성씨 집안에 돌아오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한 가족이 다시 상봉하게 되었지만, 그 후의 날들은 예상만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원유진은 성유정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유정과 함께 자라며 박한빈과 성유정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하지만 성유리가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이었기에 원유진은 성유리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거나 민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오히려 성유정이 먼저 말을 돌렸다.“언니,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데리러 왔어. 짐은 다 챙긴 거지?”“다 챙겼어.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성유정은 평소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원유진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참지 않고 존댓말까지 해가며 비아냥거렸다.“사모님,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정이가 퇴원하는데 설마 안 오셨어요?”“출근했어. 바쁜가 봐...”“정말 바쁜 거 맞아? 아니면 누군가가 바가지를 긁어대서 오고 싶어도 못 온 건 아닐지 모르겠네.”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유진아, 그만해.”그러나 원유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뭘 그만해? 듣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봐?”성유리는 원유진을 가볍게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박한빈의 번호를 찾아 원유진에게 내밀었다.“뭐 하는 거야?”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야! 너...”원유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성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언니랑 싸우지 마.”원유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넌 정말 착한 거니? 아니면 바보인 거니? 성유리는 네 것을 탐내고 채간 사람이야!”성유리는 원유진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정의 짐을 들어 앞장서서 병실에서 나갔다.차에 타자마자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리야, 유정이 데리러 갔어?”친딸과의 통화였지만 윤청하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색했다.“네.”“유정이는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규
저녁 7시가 되자마자, 박한빈이 집으로 돌아왔다.성유정은 거실에 있다가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오빠, 이제 퇴근한 거야?”박한빈은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외투를 받아들이고 조용히 말했다.“저녁 식사 준비됐어.”식사 중에 성유정은 먼저 조심스럽게 성유리를 한번 쳐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오빠,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언니랑 오빠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면... 사실 엄마한테도 혼자 있을 수 있다고 얘기했었거든... 그런데도 엄마가 걱정된다고...”박한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편하게 지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정말? 여기서 지내는 게 민폐가 되는 건 아니겠지?”“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유정 씨가 여기 계시면 저희도 좋아요.”숙자 아주머니가 식탁에 음식을 올리며 말했다.“오랜만에 집이 북적여서 정말 좋네요!”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성유리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성유정처럼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에는 서툴렀다.숙자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집에서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은 성유리는 서둘러 밥을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먼저 올라가 볼게. 천천히 식사해.”“언니, 이거밖에 안 먹어?”성유정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내가 같이 올라가 줄까?”“괜찮아.”성유리는 성유정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말했다.“천천히 먹어. 나는 괜찮아.”그 말만을 남기고 성유리는 식탁에서 멀어졌다. 다이닝룸을 벗어나기 전, 성유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언니... 화난 것 같지 않아? 내가 와서 두 사람을 방해한 거야?”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과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성유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 관심이 없었다. 박
성유리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 팔에 힘을 주어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더 세게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칠고 이기적이었다.성유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밖에 있는 성유정을 떠올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샤워기의 물소리 때문인지 문밖에 있던 성유정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큰 소리로 말했다.“오빠? 샤워 중이야?”성유리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노려보았다.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평소와 달리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평소의 조용하고 무기력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앙큼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후끈 달아올라 다시 그녀를 밀어붙였다. 마치 그 안에 쌓인 감정을 풀어내듯,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두 사람의 몸은 완벽하게 맞물렸고 성유리는 절정에 달아올라 숨이 멎을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문밖에서 성유정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벽 쪽에 밀어붙였을 때, 성유리는 참지 못하고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그러자 문밖에서 들리던 성유정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그제야 성유리는 상황을 깨닫고 손을 꽉 쥐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이 그녀를 들어 올렸고 그의 어깨가 성유리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했지만, 있는 힘껏 물지는 못하고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떼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렇게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숙자 아주머니가 그녀를 깨우며 말했다.“오늘은 본가에 가는 날이
성유정은 박한빈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였다. 그래서 박씨 가문의 본가에 대해선 성유리처럼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았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김난희에게 다가갔다.“할머니!”“아이고! 우리 유정이가 왔구나!”김난희는 매우 기뻐하며 성유정을 반겼다.“얼굴은 왜 또 야위었어?”“아니에요...”성유정은 웃으며 말했다.“이것 좀 보세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게살 완자를 만들어 왔어요.”“유정이는 어쩜 이렇게 착해? 정말 마음이 예쁘구나!”두 사람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와 손녀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김난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그러나 성유리가 다가오자, 김난희의 표정은 조금 굳어졌다.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중하게 인사했다.“할머니.”김난희는 성유리를 보고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는 눈을 돌려 계단 위에 서 있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어머님...”“아줌마, 잘 지내셨어요...”김서영이 나타나자, 원래 김난희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성유정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비쳤다.“유정 씨도 왔네. 환영해.”김서영은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반가움도 비치지 않았다.김서영은 김난희를 향해 인사했다.“어머님, 오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김난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서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성유정이 가져온 음식을 슬쩍 본 후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님은 요즘 소화가 잘 안되셔서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할 것 같네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김서영은 김난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바로 지시했다.“정식 씨, 이 음식을 주방으로 가져가세요.”김서영은 성유정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성유정이 주위의 호감을 쉽게 사는 재주가 있었지만, 김서영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김서영은 항상 차가운 모습을 유지했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격식을 차리고 일정한 거리
박한빈은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본가에 도착했다. 김난희는 박한빈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미소 번진 얼굴로 그를 맞이하며 손을 잡고 안부를 물었다.“얼굴 좀 봐! 또 살이 빠졌네...”김난희는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전보다 더 말라 보이잖아. 네 아내는 대체 집구석에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은 성유리를 겨냥한 것이었다.성유리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성유정이 나서서 말했다.“할머니, 언니를 오해하지 마세요. 언니는 정말 바쁜 사람이에요. 곧 새 만화가 출간된다고 하더라고요. 언니도 마음이 아플 정도로 많이 야위었더라고요.”성유정은 성유리를 변호하는 듯 말했지만, 성유리의 귀에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들렸다. 그녀의 가시가 돋친 말은 성유리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김난희는 성유정의 말을 듣고 더욱 불만스러워졌다.“만화라니? 또 그 하찮은 것들 하는 거야? 너는 애가 어쩜 그렇게...”김난희가 계속 잔소리하려는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저녁 준비는 다 됐나요?”“한빈아, 너...”김서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어머님, 한빈이는 이제 다 컸으니 자기 관리도 잘 할 거예요.”그 말에 김난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불만들을 삼켰다. 그러고는 성유정을 보며 말했다.“우리 유정이는 착하고 자기 사람도 잘 챙기고... 쟤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았었어도...”김난희도 아차 싶었던지 말끝을 흐렸다.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겼다.“유리야, 부모님은 아직 안 돌아오셨니?”“네. 아직이요.”“유정 씨가 너희 집에서 오래 머무는 것도 불편할 테니, 이참에 아예 본가에서 머물게 하는 게 어떨까? 유정 씨도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김서영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는...”그러나 김서영은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게다가 내가 요즘 괜찮은 청년 몇 명을 알아봤거든. 편한 시간 알려주면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그건 너무 이른
“그거랑은 다르죠.” “뭐가 다른데?” 성유리도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며 계속 물었다. “다 알면서 왜 계속 묻는 거죠?” 박한빈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점점 더 실렸다. 성유리는 그와 달리 아주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희는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잖아요. 굳이 결혼식을 해야겠어요?” 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김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생각도 유리랑 같아. 그리고 혼인 신고서도 이미 손에 넣지 않았니? 결혼식은 그저 형식일 뿐이야. 중요하지 않잖니?” “하지만 결혼 사실은 알려야 할 거야. 그러니까 결혼식보다는 연회 같은 거 준비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니?” 김서영의 말에 성유리는 더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저는 꼭 결혼식을 치를 겁니다. 이미 다 말해놔서 번복 못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는 김서영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성유리만 쳐다봤다. 성유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지금 자기가 마치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툭 터져버려 공중에서 사라지는 그런 우스운 풍선 말이다. 풍선이 아니라면 떼를 쓰는 어린아이나 관심받고 싶어서 애를 쓰는 철없는 어른이라고 형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옆에서 별의별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어떠한 반응도 해주지 않는 성유리가 미웠고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시선을 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저는 또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디 가게?” 김서영이 물었다. “회사요.” “그럼 유리는?”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한빈을 보고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마 김서영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속으로 내심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랐지만 성유리는 그러지 않았다. 뒤돌아 빠른 속도로 앞으로 걸어 나가는 박한빈은 사실 별일이 없었지만 빨리 이곳에서
김서영의 말에 성유리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에 김서영은 불쾌함을 느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뗐다. “역시 사모님은 여전히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고 계시네요.” 가볍게 던진 성유리의 한 마디에 김서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사모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렇다 해서 박한빈 씨를 용서할 생각은 없고요.” 성유리는 찻잔을 상에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박한빈 씨가 업계 상의 위치를 이용해 그렇고 그런 수단과 방법으로 강압하고 위협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됐을 거예요.” “만약 사모님이시라면 이런 상황에서 다시 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나요?” 김서영은 성유리의 말에 뭐라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성유리가 자신의 말에 강하게 반박하고 따졌다면 김서영은 아직 그녀가 박한빈에게 감정이 남아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 “나도 알아.” 몇 분 뒤, 김서영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름이 연정우라고 했나? 근데 유리 너도 그 남자를 좋아했어?” “네.” 평온한 말투로 제일 듣기 버거운 말을 내뱉는 성유리의 대답에 계단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은 몸이 굳어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성유리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연정우와는 그저 평범한 비즈니스 사이라고 성유리가 직접 인정했었다. 왜 결혼을 하냐고 물었을 때도 성유리는 직접 박한빈에게 연정우의 외할아버지가 건강이 악화돼서 서두른다고 알려줬다. ‘어떻게 유리가...’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박한빈의 뒤에 서 있던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집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서영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동공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옆에 있던 성유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김서영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비록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네가 우리 한빈이랑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니까 주는 거야. 이건 내가 결혼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건데 오늘 유리 너한테 넘겨줄게. 처음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받아.” “이건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괜찮아. 어차피 한빈이는 평생 유리 너랑 살겠다고 마음먹었잖아. 결국 이건 네 손에 들려야 할 거야.” 옅은 미소를 띠며 말하는 김서영을 성유리는 조용히 쳐다만 보았다. 눈앞에 있는 김서영은 여전히 성유리가 알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사람이었고 전과는 다를 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러한 김서영도 박씨 가문이라는 큰 “철창”에서 벗어나려고 목숨까지 바친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서영이 사랑했던 남자는 이미 세상을 떴고 두 사람의 일은 세상에서 점점 잊혀갔다. 그리고 김서영마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달랐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김서영을 대해야 하는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 대신 김서영이 건넨 물건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에게 시선을 휙 돌리더니 입을 뗐다. “할머님 편찮으시다. 올라가서 얼굴이나 뵙고 가. 유리는 여기 놔두고.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유리도 같이 올라가고 싶습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꽉 잡으며 김서영의 말에 거부 의사를 비쳤다. “이미 혼인 신고까지 마쳤는데 내가 설마 유리를 어떻게 하겠니?” 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뒤돌아 위층으로 뚜벅뚜벅 올라갔다. “앉아.” 멀뚱멀뚱 서 있는 성유리에게 김서영이 다정하게 말했다. “일부러 네가 좋아하는 홍차로 끓였어. 이거 좋아하는 거 맞지?” 성유리는 앞에 놓인 찻잔과 김서영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세요?” 김서영은 말없이 성유리를 쳐다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를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자신이 머무르는 호텔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금성에서는 아마 박한빈이 모르는 곳이 없을 테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찾아낼 수 있다. 다음 날, 성유리가 깨어나자마자 초인 종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앞에는 박한빈이 서 있었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자. 혼인 신고하러 구청에.” 오늘 다른 정장 외투 없이 깔끔한 하얀 셔츠만 입은 박한빈은 앞머리까지 내려 평소와는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마치 수년 전, 자신이 몰래 훔쳐보던 박한빈이 떠올라 멍해졌다. 성유리는 이제야 그때 박한빈의 모습 또한 가짜였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뻔뻔하고 파렴치한 사람이 진짜 박한빈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옷은 이미 내가 다 준비했어. 혼인 신고하는 데 필요한 물건은 잘 챙겼지?” 성유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다 아는지 웃으며 계속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는데 이제 와서 미처 못 챙겼다는 말로 시간 끄려는 건 아니지?”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인데? 아니야?” 성유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다 챙겼으니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만족한 듯 더 환하게 웃더니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건네주며 재촉했다. “가서 이 옷으로 갈아입고 와. 빨리 가자.” 두 사람은 이내 빠르게 구청에 도착했고 성유리는 이번에 3번째 방문이라 딱히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3번이나 같은 남자와 구청에 온 본인이 한심했고 올 때마다 성유리의 마음은 더 차가워져 있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결혼이 아닌 두 사람인지라 혼인 신고를 하는 모든 과정을 아주 익숙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다.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장이 꾹 찍힌 혼인 신고서는 그들의 손에 쥐어졌다. 성유리는 혼인 신고서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가방 안에 던지듯 넣어버리고는 택시를 타려고 뒤를 돌았다. 하지만 뒤에 있던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의
그러나 그런 감정도 시간이 지나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고 김서영이 깨어난 날, 박한빈은 기쁘다는 감정보다는 성유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부터 고민했다. 성유리의 죄책감을 끌어낸다는 잔인한 계획은 박한빈도 보통 사람이라면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냉철하고 매정한 교육을 받아온 박한빈은 가능했다. 김서영은 어린 박한빈에게 어떻게 해야만 좋은 상인이 되는지, 어떻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줬었다. 그녀는 결국 박한빈을 자신이 원하던 상인으로 만들어 냈지만 좋은 아들로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만약 보통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다. 김서영은 박한빈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유리한테 무슨 짓을 했니?”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자 김서영이 이빨을 꽉 깨물며 다시 물었다. “유리를 협박이라도 한 거야? 요즘 유리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 어떻게 그래? 이게 바로 너의 수단이야?” “네.” 간단하기만 한 박한빈의 대답에 김서영은 안색이 잔뜩 어두워져갔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요?” 박한빈은 화를 내는 김서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어머니가 시킨 결혼 아니었습니까? 성유리가 내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원하던 대로 됐는데 도대체 왜 화를 내시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가네요.” 김서영은 화를 꾹꾹 참으며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난 네가 내 말을 이렇게 잘 듣는 사람인 줄 몰랐어.” 아무 말이 없는 박한빈을 보던 김서영은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는지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빈아, 전에는 엄마가 잘못했어. 유리는 너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이미 이혼하지 않았니? 지나는 길은 지나간
김난희는 너무 화가 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박한빈은 감정이 없어 보일 정도로 덤덤했고 차까지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할머니, 저도 이젠 다 큰 어른입니다. 제 평생 삶이 걸린 문제는 이제 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요.” “네 일? 네 놈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경고하는데 네 성이 박 씨인 이상 내 손자고 내 말에 따라야 해!” “잊었나 본데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건 다 내가 너한테 준 거야. 허튼수작 부리면 내가 다...” 김난희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말하다 문득 멈췄다. 박한빈은 그런 김난희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물었다. “다 뭐요? 밖에 있는 그 애들 말씀이십니까?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전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의 말에 김난희는 김서영을 매섭게 노려보았고 김서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한빈은 두 사람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상관하지 않았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할머니, 걱정 마십시오. 사실 저도 그냥 한 명의 존재만 알 뿐입니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이름이 뭔지 모르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지금 공개된 박씨 가문 유일한 상속자는 저 하나잖습니까. 만약 할머니께서도 그 사람을 손자라고 생각한다면 잘 숨어 있으라고 전해주십시오. 정말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 사람이 박씨 가문의 모든 것에 적응하지 못해 가문의 멸망을 초래할 것 같은데... 할머니 마음이 아프시지 않겠습니까?” 박한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짙은 어둠 속에서 이빨을 숨기고 있는 맹수처럼 보였고 김난희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화를 내던 김난희는 천천히 진정하다 떨리는 손으로 박한빈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박한빈! 너 지금 누구 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김난희는 김서영에게 시선을 돌리며 그녀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역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너 같은 애한테서 무슨 좋
담담하게 사인을 하던 성유리는 마지막에 화를 못 이기고 종이를 연필로 찢었다. 허나 그녀는 찢어진 종이를 신경도 안 쓰고 서류를 박한빈에게 던지듯 건넸다. 그리고는 박한빈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옆으로 몸을 돌리더니 차에서 내리려 했다. “어디로 갈 건데? 데려다줄게.” 순간, 박한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맞다! 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자. 아침에 데리러 가도 되지?” 성유리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거절하지 않았고 그대로 차 문을 닫아버렸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차 안에는 또다시 적막이 찾아왔고 박한빈은 운전대를 잡은 채로 성유리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그녀가 던진 서류를 손에 쥐었다. 일부로 두 개의 서류를 준비한 박한빈은 성유리가 두 장 다 사인을 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잊은 탓인지 아니면 보기도 싫어 두고 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유리가 가져가야 하는 서류는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었다. 박한빈은 뭐가 어떻게 됐든 성유리가 사인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류를 잘 넣어두고 박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고 시간도 너무 늦지 않았기에 김난희와 김서영도 깨어있었다. 저번 일이 발생한 뒤로 두 사람의 사이는 얼음 빙판을 걷는 듯 차가웠고 김나희는 김서영이 박씨 가문의 체면을 다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서영은 이미 김난희의 생각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고 두 사람은 같은 집 안에 있지만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집에 돌아온 박한빈을 발견한 두 사람은 깜짝 놀랐고 김난희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밥상 위에 툭 내려놓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집에 돌아올 줄은 아나 보지? 내가 너한테 전화를 몇 통이나 걸었는지 알아?” “죄송합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새벽밖에 시간이 없었습니다. 혹시 새벽에 다시 전화를 걸면 할머니 주무시는데 방해될까 봐 하지 않았고요.”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박한빈을 보던 김난희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지만 혼자 뭐라고 중
박한빈의 말을 끝으로 차 안에는 적막만 흘렀다. 성유리는 그가 내민 서류를 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너무 힘을 쓴 탓에 손가락에 피가 안 통해 혈색이 없었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옆에 가만히 앉아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만약 성유리가 전처럼 화를 못 이겨 자신을 힘껏 깨문다 해도 박한빈은 아마 속으로 좋아할 것이다. 오랜 시간 함께 한 두 사람이라 그런지 성유리도 박한빈의 속내를 알아차렸고 이미 미쳐버린 사람과 상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박한빈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성유리는 애를 써서 자기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만약 거절한다면요?” “음, 그럼 할 수 없지. 성리 그룹이 점점 더 망가져 가는 꼴을 두고 봐야 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거야. 연정우 씨에 관한 일도 나는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을 거고.” 평온하게 대답하는 박한빈이었지만 마음이 급한 탓인지 말은 점점 더 빨라졌다. 성유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커다란 회사를 거머쥐고 있는 대단한 대표가 아니라 그냥 날강도 같아 보였다. ‘정말 뻔뻔한 사람! 어쩜 사람이 이래?’ 비록 성유리가 입 밖으로 박한빈을 욕하는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는 무언가 눈치 차린 듯 먼저 말을 이어갔다. “지금 속으로 나를 욕하고 있는 거 알아. 그래도 아무런 소용은 없어. 어차피 넌 이제 연정우 그 사람이랑 다시 만나지는 못할 테니까. 툭 털어놓고 말할게, 잘 들어. 앞으로 네가 어떤 남자를 만나든 나는 절대 그 남자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평생 너는 어차피 나랑 얽히게 될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나랑 결혼하지 그래?” 박한빈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성유리에게 말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그녀는 지금 자기 옆에 물 한 잔도 없다는 사실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만약 물이 있다면 당장 박한빈의 얼굴에 뿌려버렸을 성유리지만 물이 없으니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시골에서 자란 성유리는 이런 일을 종종 봐왔었지만 결국 본인이라는 “턱”을 넘지 못해 포
성유리는 능청맞게 말하는 박한빈을 보기도 싫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짓더니 바로 병실 밖을 나갔다. “저게 무슨 말이냐? 지금 두 사람 같이 살고 있어?” 성시원은 박한빈이 나가자마자 성유리를 보며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정우랑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성유리는 성시원의 물음에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오늘 저는 성리 그룹의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이미 그럴 필요 없겠네요. 저는 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잠깐만! 아까 내가 한 물음에 대답부터 해줘야지. 정말 같이 사는 거야? 그래서 이 모든 게 다 둘이 짜고 한 판이다 이거야? 어쩐지 시간을 넉넉하게 주겠다고 한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빠르게 찾아와서 결판을 짓는지 궁금했는데... 다 네가 한 짓이었구나.” “됐어요.” 성유리는 피로에 잔뜩 찌든 목소리에 입을 열었다. “뭐라고?” “이미 다 알고 계세요. 박 대표님은.” 성유리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처음부터 끝까지 저희는 그냥 그 사람의 손아귀에 잡힌 사냥감일 뿐이었다고요.” “아예 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평 공정하게 싸울 수 있겠어요?” 성유리의 평온한 목소리는 마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 같았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입만 뻥끗거리다 결국 연정우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럼 연정우는? 이미 무산된 결혼 아니냐? 그 사람 일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런 정 없고 매정한 인간은 우리 성씨 가문과 절대 어떠한 관련도 없어!” 성유리는 화를 내며 말하는 성시원의 앞에서 효녀가 되고 싶지 않아 아무 말 없이 뒤돌아 떠났다. “성유리!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데 어디가? 당장 돌아와!” 뒤에서 들리는 성시원의 고함에도 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걷는 와중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병원 앞에 몰려있던 기자들은 이미 다 떠났는지 조용했기에 성유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