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퇴원한 후 저녁이 되어 가희는 윤호로부터 짧고 냉정한 지시를 받았다. [내일 아침 B 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공편 예약해.] 윤호 특유의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말투였다. 통보하듯 한 마디를 남기고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병원을 나서며 가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곧바로 윤호가 현재 머물는 윤호의 별장으로 향했다.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예나가 이미 안에서 윤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희가 들어오자 예나는 잠시 당황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한 실장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가희는 차분한 목소
예나는 그녀의 칭찬에 눈웃음을 지으며 기분 좋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기뻐요.” 그러나 곧 그녀의 표정이 다소 우울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한 실장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윤호 오빠를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요. 아직 부족한 게 많죠.” 예나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며 가희를 바라봤다. “사실, 제가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온 이후로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한 실장님이 제 첫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혹시 제 고민도 좀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가희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익숙한 향이 나는 품에 안겼다. 익숙한 솔 향과 함께 자신을 감싸는 이 온기에 가희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목을 감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 남자의 목에 살짝 얼굴을 비비며 숨을 골랐다.옆에 있던 예나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윤호 오빠!” 가희의 행동에 윤호는 눈에 핏줄이 서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가희의 손목을 단단히 잡고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가희, 정신 차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어?” 이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노란 머리 남자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되레 큰소리를 쳤다.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기쁨이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윤호는 가희를 자기 몸에서 떼어내듯 내려놓았다. 가희는 서운한 표정으로 윤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윤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평소의 가희는 무기력하거나 말수가 적어서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윤호는 편안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한가희, 내가 왜 널 도와줘야 하지?” 가희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땀에 젖은 창백한 얼굴로 힘겹게 말했다
장씨 가문은 요즘 승승장구하며 대단한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업계의 절대적인 강자는 SR 그룹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씨 가문 측에서도 윤호에게 함부로 나서지 못할 거고, 문제는 가희였다. ‘한가희...’ 윤호는 가희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밤 자신의 행동이 과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희는 분명 그의 취향에 잘 맞는 여자였다. 그때, 의료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가희 님 보호자 계시나요? 환자분 위세척이 끝났
“맛있어?” 준서가 다정한 눈빛으로 웃으며 말했다. “응, 맛있어.” 하지만 그 다정한 분위기는 가희가 병실 앞에 나타나는 순간 사라졌다. 민주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고, 준서 역시 순간적으로 굳은 얼굴로 민주의 귀에 대고 무언가 조용히 속삭이고 나서, 아무 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민주는 입가에 비꼬는 듯한 미소를 띠며 가희를 바라보았다. “참 신기하네. 어딜 가든 널 꼭 마주치게 되네? 한가희,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야?” 가희는 민주의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희는 병원에서 며칠을 지내다 퇴원하던 날, 윤호로부터 출장을 가라는 문자 통보를 받았다. 짧고 간결한 메시지는 너무나도 윤호다운 방식이었다. [7시, 공항.]가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집으로 돌아가 짐을 간단히 챙기고 나서,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고,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7시 정각이었다.그녀는 헐레벌떡 공항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앉아 있는 윤호와 눈이 마주쳤다. 윤호는 가희를 보며 약간의 불만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한 실장, 지금 시간이...” 가희는 그가 말을 끝내기 전에 단호하게 끊으며 대답했다. “6
“내 사람.” 여자는 윤호와 가희를 번갈아 가며 짧게 훑어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자리를 뜨기 전, 기분 나쁜 듯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요즘 잘생긴 남자들은 죄다 눈이 먼 모양이네.” 가희는 속으로 황당함을 느꼈다. ‘내가 그렇게까지 보기 흉하게 생겼나?’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무표정하게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 순간 윤호가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앉아.” 가희가 잠시 멈칫하자, 윤호는 오해를 피하려는 듯 덧붙였다. “앞으로 또 귀찮게 굴지 못하게
가희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는 알렌의 얼굴빛이 순간 창백해졌다. 가희의 말은 마치 날 선 칼처럼 그녀의 자존심을 정면으로 찔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알렌은 그때 울린 휴대폰 벨 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구석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가희는 행사장 구석을 돌아다니며 이상이 없는지 점검을 마치고 잠시 앉아 쉴 생각이었지만, 그때 알렌이 다소 어색한 영어로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너더러 오라고 했어? 설마 왕국영도 그렇게 말했어? 걔 나 꼬실 때는 그런 말 안 했거든.” “뭐라고? 지금 내가 임신하니까 날
‘어쩐지, 들어올 때부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더라니.’ 지금 알렌이 윤호를 바라보는 눈빛이 단순한 비즈니스적 시선이 아니라, 어딘가 감상하는 듯한 기색이 짙었기 때문이었다. 가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윤호가 와인잔을 들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가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술을 마셔도 되는지 여부는 우리 비서가 허락해야 할 것 같은데요.”알렌의 표정이 순간 살짝 굳었다. 하지만 가희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침착하게 답했다. “대표님께서는 오후에 귀사에서 마련한 환영 행사에 참석하셔야 하고, 저녁에는 냉동창고
“실장님, 방금 대표님이 오늘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문서들 정리하러 갔다 왔는데, 오늘 AW 그룹의 알렌, 그러니까 그날 봤던 여자 비서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같이 가시겠어요?” 주성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고, 가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윤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네가 안 가도 돼. 난 창고 시찰하러 가야 하니까, 넌 호텔에 남아서 문서나 정리해.” 주성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조금 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면, 한 실장님 목에 있던 그건
가희의 얼굴이 순간 붉게 물들었고, 윤호를 바라보며 당황한 기색으로 두 손을 그의 가슴 앞에 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표님, 시간이 벌써... 저...”하지만 윤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고, 곧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가희, 넌 왜 여기 있어?”그 한마디에 가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어젯밤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결국 또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거네...’가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윤호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잡으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날 유혹하려
“대표님, 취하셨어요. 일단 가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희는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윤호는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마치 집착이라도 하듯 답을 강요했다. “후회하냐고! 한가희, 너 후회해?”‘후회?’ 가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후회할 게 대체 뭐가 있지?’ ‘나는 그저 당신의 말 한마디에 움직여야 했던, 아무런 선택권도 없는 존재였잖아.’ ‘당신이 나에게 애인이 되라고 했을 때, 거절할 수 없었어. 자존심을 내던지고 당신 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지.’ ‘그
윤호가 SR 그룹의 대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가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밤을 새우고, 거의 매일 과로와 싸우며 일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은 가희에게 익숙했다. 그가 직접 지시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윤호가 금방 눈치챌 것이 뻔했다. 가희는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비록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주어진 일을 끝내기로 결심했다.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자기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는 사이, 주성은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와서, 상처 다시 소독하고 붕대 감아주세요.”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여서 가희의 상처를 다시 제대로 처리했다. 의사는 처치를 마친 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환자분의 상처는 중요 장기나 신체 부위를 피했기 때문에 며칠만 안정을 취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만, 당분간 식사나 생활 습관에 신경을 쓰셔야 하고,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무리가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약간 우울 증세가 보이는데, 심해지기 전에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의사의 설명이 끝나자 모두 병실에서 빠져나갔고, 병실 안에는
윤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비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주성은 여비서의 은근한 매력에 점점 더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주성은 그녀의 눈에 잠깐 스친 불쾌감의 기색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그때 갑자기 주성의 휴대폰이 울렸다. 윤호는 곧바로 주성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간병인에게서 온 전화인가?”주성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병원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요.”윤호는 곧바로 여비서를 향해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미팅은 이만 마쳐야 할 것
“총알이 다행히 주요 장기를 크게 손상시키지는 않았습니다만, 환자분의 전반적인 생존 의지가 강하지 않아 당분간은 경과를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윤호가 병실로 들어섰을 때, 가희는 침대에 누워 미동도 없이 숨만 겨우 쉬고 있었다. 마치 이미 세상을 떠난 것처럼 창백하고 생기 없는 모습이었다. 아까 의사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윤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가희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한가희, 죽고 싶으면 적어도 나한테는 물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