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의 부인은 전북망을 좋아하지 않기에 하인에게 대강 술안주 몇 가지를 내오게 하고는 이내 방을 나가버렸다. 심지어 하인들마저도 모두 데리고 나가며 그가 냄새난다는 이유로 시중을 들지 않게 했다. 전북망은 그저 술만 홀짝거릴 뿐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필명의 부인이 그를 싫어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더더욱 우울해졌다."안주도 좀 드십시오.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필명이 물었다.전북망은 술잔을 비우더니 갑자기 술상에 엎드려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큰 소리로 우는 것도 아니고 마치 부드러운 베개로 입과 코를 막은 것처럼 답답하게 흐느꼈다.필명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혼자 술과 안주를 즐길 뿐이었다. 전북망은 단지 마음 편히 울 곳을 찾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가 왜 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한참 울던 전북망은 아무도 자신을 위로해 주지 않는 걸 깨닫고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쌓였던 먼지와 때가 눈물에 씻겨 나가자 그의 모습은 더없이 우스웠다.필명은 결국 웃음을 떠트리며 물었다. "필 대인도 내가 우스운 게요?" 전북망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저 웃음거리일 뿐이지."필명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덕을 쌓으려면 절대 이렇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 그가 물었다. "왜 댁으로 돌아가지 않는 겁니까?"전북망은 술 두 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말했다. "돌아간들 어쩌겠소? 가봐야 욕이나 먹고 조롱이나 당할 테지."필명의 입가엔 경련이 일었다. "관직도 포기할 셈입니까? 폐하를 노하게 한다면 장군님의 앞날도 끝나는 겁니다.""어차피 끝난 거나 마찬가지요. 아니, 애초에 나에겐 앞날 같은 건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요. 직위 강등에 3년간의 봉급까지 깎여 집으로 돌아가 폐인처럼 사느니 차라리 밖에서 유랑이나 하는 게 낫겠소. 그러면 더는 폐하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 테니."필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러지 마시고 열심히 하십시오. 장군님의 능력과
필명이 정신을 차렸을 땐 전북망은 이미 술을 절반 이상 마시고 의식을 잃어버린 뒤였다. 더욱 후회가 밀려왔다. 이런 무뢰한을 데려온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이렇게 많이 마셔서 죽지 않겠냐는 걱정도 들었다.화가 난 그는 당장이라도 차가운 물통을 가져와 전북망의 머리 위로 쏟아붓고 싶었지만 마치 시체처럼 차가운 전북망의 얼굴을 보니 결국 물을 붓는 것도 망설이게 되었다. 그래도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어서 하인을 시켜 마차를 준비하게 하고 직접 전북망을 집으로 데려가기로 결심했다.마차가 덜컹거리자 전북망은 그 안에서 정신없이 토하기 시작했다. 그의 위장에서 올라오는 썩은 냄새가 바깥까지 진동해 마차가 움직이는 내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필명은 분노가 폭발한 나머지 마차 안으로 고함을 질렀다. “설마 마차를 배상할 생각이십니까!”사실 이 마차는 그의 부인이 외출할 때 사용하는 유일한 마차라 빌려주는 것을 망설였는데 이렇게 엉망이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필명은 반드시 부인에게 제대로 혼날 것이다.역시 사람은 너무 착하면 안 되고 호기심이 많아서도 안 되었다.곧 마차는 장군부에 도착했고 그는 씩씩거리며 내려와 장군부의 사람을 불렀다.“당장 전 장군을 끌어내거라, 당장!” 전북경과 하인들이 마차 문을 열자마자 끔찍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전북경은 역겨움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동생을 마차에서 끌어내려 하인에게 그를 안으로 모시라고 했다. 전북경은 필명에게 전북망이 왜 이 정도로 취했는지 물었고 필명은 전북망에게 직접 물으라며 자신은 마차를 씻으러 가겠다고 했다.전북경은 하는 수 없이 필명에게 인사를 건넸고 필명은 불쾌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집에 돌아온 필명은 부인에게 크게 혼났다. “다른 자를 데려오는 건 괜찮다지만 저런 자는 처음부터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 마차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아십니까? 내일 사부님께 청단(떡)을 보내려면 마차가 꼭 필요한데 이젠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필이면 은혜도 모르는 사람을 건드리시다뇨!” 사실 필
어서방. 숙청제는 눈살을 찌푸린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전북망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사직이라? 잘 생각했느냐?"전북망은 머리를 조아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신은 폐하의 큰 은혜를 저버렸고 소가의 신임도 저버렸습니다."숙청제는 분노로 머리가 아파질 지경이었다. "너에게 그토록 큰 기대를 걸었는데 너는 그 기대를 저버리고 관직을 사직하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다."전북망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 신이 무능하고 나약하여 현철위 부사령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오 대반도 참지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한사코 자기가 죄인이라고 운운한다면 황제가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숙청제는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간 자숙하고 다시 찾아오거라. 물러가라."전북망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몸을 숙이며 답했다. "예!"그가 물러나자마자 숙청제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오 대반, 전북망에게 가서 진정 소 대장군에게 빚진 마음이 있다면 이 시기에 관직을 내놓지 말라고 전해주어라."오 대반은 명을 받고는 전북망을 쫓아가 말했다. "전 대인, 잠시 멈추십시오."전북망은 잠시 멈춰서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 공공, 무슨 일이십니까?"그의 멍한 표정을 보고 오 대반은 등을 곧게 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대인, 이렇게 사직을 한다면 소가의 여러 장군들까지 연루될 것입니다. 전 대인은 어전의 사람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전 대인이 면직당한 줄 알 겁니다. 사직을 하려거든 이 시기를 피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소가에 더 큰 누를 끼치는 것이 될 것입니다."그러자 전북망은 크게 놀랐다. "제가 사직하는 것이 소가와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오대반이 말했다. “전 대인이 자책감으로 사직을 한다면 소가의 사람들이 어찌하겠습니까? 그들 또한 죄를 자청하며
시만자는 늘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곤 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물었다. “황제가 직위를 강등하고 녹봉을 삭감한 것에 불만을 품고 그만두겠다고 한 거 아닌지?”전북망이 그런 생각인지 아닌지 그녀는 몰랐지만 확실했다. 집에서나 사부님이나 기대보다 적게 주면 그녀는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더 발끈하고 나섰다. 송석석의 어두운 안색에 그녀는 즉시 말을 돌렸다. “전북망 말은 그만하자. 전북망 얘기만 나오면 머리가 아프구나. 폐하께서 사직을 불허하셨으니 더 이상 꼴불견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모두들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리며 청단을 먹었다. 사여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에 보주는 왕야을 위해 일부분을 남겨두자고 했다.모두가 떠난 후, 시만자가 송석석에게 물었다. “사실 사직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저런 사람이 어떻게 현철위 사령관 자리에 어울리겠어?”송석석이 답했다. “이 시점에서는 성릉관과 관련된 사람들은 조용히 있는 것이 최선이다. 어떤 식으로든 논란을 일으키지 않는 게 중요하지. 그가 사직하든, 폐하가 그를 해임하든 얘기는 외조부와 외삼촌 쪽으로 번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마음먹은 사람이 빌미를 잡아서 또다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지 않겠느냐.”“일리가 있다.” 시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나 대체 어떤 문제들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냐?”송석석은 화를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연왕은 줄곧 소가를 성릉관에서 철수시키고 싶어 했다. 녹분성에서 벌어진 일은 서경과 성릉관 모두에 파문을 일으켰으니, 이 일에는 서경과 연왕이 손을 잡고 개입한 게 분명할 것이다. 지금 이방이 첫 번째로 서경에 압송되었고, 외조부에겐 성릉관 총사령관으로서 감독 소홀과 군기 해이의 책임을 물었지. 전북망은 녹분성으로 병력을 이끌고 갔기 때문에 일정 부분 책임을 지게 되었다. 사건 전체를 보면 외삼촌에게까지 연루되지 않았기 때문에 합리적인 처분이지만 전북망이 사직을 청하면 연왕은
혜 태비는 아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두 사람의 입맛이 워낙 다를 뿐만 아니라 대화도 몇 마디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태후는 한 달에 몇 번은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나 당부했다. 하인들이 입방아를 찧으며 사여묵과 석석이 불효한다는 소문을 퍼뜨릴까 걱정했기 때문이다.'휴, 사람 사는 게 원래 다 이런 거지. 항상 여기저기서 얽매여 원하는 대로 살 수는 없으니 말이야.'고 씨 유모는 늘 혜 태비를 향해 복을 누리면서도 그 가치를 몰라본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에 진정으로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나날을 보내더라도 그 나름의 걱정이 있고,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라 해도 그 부유함에 따른 고민이 있는 법이니 말이다.아무튼 그녀는 기쁠 때는 마음껏 기뻐하고, 고민이 있을 때는 누구도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고민하는 것도 자신의 권리라고 여기는 사람이었다.사여묵과 송석석은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기에 보통 시만자를 불러 함께 식사를 했다. 시만자는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데 능숙하여 지루하고 딱딱한 식사 시간을 흥미롭고 생기 있게 바꿔 놓곤 했다.한편, 전북망은 결국 사직하지 않았다. 며칠 후 관복을 다시 입고 풀이 죽은 채 복직했다.숙청제는 그를 다시 불러들여 얼굴에서 조금이라도 투지를 읽으려 했으나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전북망은 마치 집을 잃은 개처럼 온몸에서 나약함과 패배감만 뿜어냈다.숙청제는 속으로 크게 화가 치밀었다. 전북망을 순수한 신하로 만들어 잘 훈련시키면 훗날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적을 토벌하고 전장을 누빈 경험이 있는 무장이자, 몰락한 가문의 출신으로 황제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줄 아는 전북망은 최소한 충성심 하나만큼은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하지만 숙청제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충성심이 중요한 건 맞지만 능력이 없는 충성심은 쓸모없다는 사실을 말이다.숙청제는 전북망이 조금 더 분발하여
장기문이 무술을 배우기 위해 사부를 모신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무술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승진을 위해서였다.하지만 그는 충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3년 안에 안 되면 5년을 기다리고, 5년 안에 안 되면 10년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경험이 쌓이니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 성공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물론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3년 안에는 부위장에, 5년 안에는 위장에 오르는 것이었다.그러나 황제가 그를 소환해 현철위 부사령관 직책을 내렸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어전에서 한번도 실례를 범한 적이 없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옆에 있던 오월이 그를 발로 툭 차며 웃으며 나무랐다.“멍하니 뭐하느냐? 어서 은혜에 감사드리지 않고!”장기문은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은 후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미천한 신하를 발탁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신은 반드시 충성을 다하고 몸 바쳐 헌신하겠습니다.”숙청제는 이런 말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월, 그를 데리고 가서 네 형제들에게 술 한잔 얻어먹으라고 해라.”그날 승진된 세 사람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장기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고 척귀는 약간 실망스러워했으며, 노아금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과거 정탐조로 활동했던 만큼 비밀을 지키는 데 익숙해 감정을 겉으로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모두 마음속에 감췄다.장기문은 당연히 동료들에게 술을 대접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걸음걸이조차 가벼워, 구름 위를 걷는 듯했고, 이 모든 일이 믿기지 않은 모습이었다.그는 원래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가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하늘에서 떡이 떨어져 그의 머리에 딱 맞아떨어진 격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얼떨떨해 정신을 차리고 오월에게 물었다.“부사령관직은 전 대감께서 맡고 계신 거 아닙니까? 어째서 저를 이렇게 승진시키신 겁니까?”오월
다음 날, 장기문은 부모님과 처자식을 데리고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 시만자를 찾아갔다. 당연히 많은 예물도 정성껏 준비했다.시만자는 전날 밤 석석이 미리 전해주어 장기문의 승진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관직이 오른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처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하지만 이렇게 장기문이 모든 가족을 데리고 와서 감사 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모두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차 있었고 마치 금덩이를 발견한 듯 활짝 웃고 있었다. 시만자는 그들의 기쁨에 전염되듯 승진의 의미를 실감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승진하려면 구조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황제를 구하는 대단한 공을 세우지 않는 이상, 몇 년이고 묵묵히 버텨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문 가족이 그녀에게 보여준 깊은 감사는 시만자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그가 승진하는 데 있어서 그녀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그저 그가 스스로 노력해 얻어낸 결과였다.장기문은 부모님과 처자식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낸 뒤 자신은 황실에 남았다. 그는 미리 이야기를 나누어 나중에 혹시 있을지 모를 오해와 갈등을 예방하고 싶었다.모든 설명을 마친 뒤, 그가 말했다.“물론 이는 제 추측일 뿐입니다. 황제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저희가 감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제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지름길이라면 결코 가지 않을 것입니다. 사부님과 송 사백께서 이 점은 안심하셔도 됩니다.”송석석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뭔가 말하려다 시만자가 장기문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말없이 넘겼다. ‘그래, 사백이면 어때.’ 황제가 장기문을 갑자기 발탁한 것은 전북망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신호로 보였다. 전북망은 황제의 기대를 여러 번 저버린 셈이다. 황제가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그를 감싸줬지만
송석석은 이미 현실을 받아들인 듯 몽동이에게 물었다.“그럼, 그녀의 시신을 인수해 간 사람은 있어?”“공대인께서 그녀의 친정을 찾아갔지만 부모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고, 형수 부부가 집안을 주관하고 있다더군. 그런데 여자가 이혼을 당해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강물에 몸을 던진게 불길하다며 시신을 인수하길 거부했대.”“그럼 남편 쪽은?” 시만자가 물었다. 하지만 묻고 나서야 스스로 부질없는 질문임을 깨달았다. 이미 내쫓은 아내를 어떻게 다시 거두겠는가?“그녀의 남편은 며칠 후 새 신부를 맞이할 예정이라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녀의 장례를 치러 주겠어?”시만자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화를 냈다.“그렇게 빨리 새 신부를 들이다니! 저런 개 같은 놈! 양심이란 게 있긴 한 거야?”송석석은 담담히 말했다.“아마 오래전부터 이미 준비해 둔 상대였겠지.”그러자 시만자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그 자수공은 아이가 없어서 버림받았다지. 그럼 혼수품은? 혼수품까지 그 남편 쪽이 다 챙긴 거야?”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냥 평범한 백성이라 큰 혼수품을 갖고 있을리가 없지. 있다 해도 그동안 다 써버렸을거야. 그런데 들리는 얘기로는 그 자수공이 손재주가 아주 좋아서 평소에 자수를 팔아 꽤 많은 은화를 벌었대. 하지만 대부분 집안 살림에 보태느라 다 썼다고 해. 시신을 발견했을 때 그녀 몸에는 삼 냥짜리 동전 세 개뿐이었다고 하더라.”시만자가 벌떡 일어서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너 그걸 다 조사한 거야?!”“경조부에 다녀왔었어.” 송석석은 오히려 차분히 답했다. 그녀 역시 시만자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조사를 해본 후에야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었다.“다만 내가 갔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친정이 시신을 거두지 않을 줄은 정말 몰랐어.”“네가 다녀온 줄 알았으면 나는 가지도 않았을 거야.” 몽동이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음이 아픈 듯했다.“지금 그녀의 시신은 의장에 안치되어 있어. 내가 갔을 땐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