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송석석이 현갑군의 지휘사로 임명되었을 때 많은 조신들이 반대했었다. 여성이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맡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제 황제의 일련의 조치를 보고 그의 의도를 깨닫게 된 조신들은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현갑군에 결국 순방영만 남게 되어 귀족 자제들이 모이는 집합소로 전락할까 걱정하였다.현갑군은 원래 황성을 지키는 중요한 방패였다. 하지만 해체되고 분해되면서 그 권위를 잃은 듯하여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다.더군다나 송석석이 지휘사로 임명된 이후 현갑군은 더욱 강력한 위엄과 안전감을 갖추게 되었고, 송석석에게 반감을 가졌던 이들도 이제는 진심으로 그녀를 인정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송석석에 대한 인정이 숙청제로 하여금 더 빠른 개혁을 추진하게 했고, 어전 시위를 현철군으로 개편하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앞으로의 개혁도 더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었다.한편 소 대장군은 근용위의 호위를 받아 소부로 돌아왔다. 오랜 세월 비워진 소부는 황폐해져 형편없는 상태였기에 근용위가 직접 들어가 잡초를 뽑고 청소를 했다. 오 대반은 몇몇 궁녀들 골라 들어가 시중을 들도록 조치했다.전북망은 직접 호위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에 소 대장군이 입주하자마자 스무 명의 근용위를 파견했다. 그 중 열 명은 소부 안에서, 나머지 열 명은 밖에서 세개의 대문을 지켰다. 정문에는 네 명, 후문과 측문에는 각각 세 명씩 배치했다.소 대장군이 소부에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 회왕비가 사람들을 이끌고 정문 밖에 찾아와 면회를 요청했으나, 근용위에 의해 막혔다. 그녀는 시끄럽게 굴지 않고 밖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다른 일은 차치하더라도 아버지가 돌아왔는데 보러 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지금 왕야가 진성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왕야가 있었다면 아버지가 죄인의 신분인 만큼 그녀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을 탐탁지 않아 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황제가 그를 집으
선평후는 주변에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이 혼자 왔다. 청색의 옷에 검정색의 두꺼운 외투까지 입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어느 집안의 하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사여묵과 송석석은 먼저 일어나 기쁘게 그를 맞이하였고,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따라 일어났다. 그들 또한 아무 말없이 도와준 선평후에게 마음 속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치레를 나눈 뒤, 선평후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송구스럽습니다. 그 녀석을 조건없이 동의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장기문이 조건 하나를 내세웠는데, 왕비님과 시 소저에게 먼저 물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왔습니다.”선평후가 처음 송구스럽다고 이야기할 때 모두 놀랐지만 뒤에 이어진 말까지 듣자 안심했다. 시만자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제 의견을 물어야 하죠? 대체 뭘 하려는 건가요?”선평후도 이 말을 전하면서 다소 의아해하며 답했다.“장기문이 말하길, 시 소자를 사부로 삼고 싶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오진과 필명처럼 친히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네? 저는 그를 가르친 적이 있는걸요?”시만자는 장기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해 잠시 당황했다. 그는 어전 시위에 속해 있어서 이미 함께 수업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사부로 삼고 싶어 하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제자는 세 명으로 정해 두었다고 말을 했었다.그러자 선평후가 설명했다.“그 녀석이 자기 실력으로 승진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전에서 필요한 것은 무예와 민첩함인데, 민첩함은 충분하지만 무예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모양입니다.”“그런가요?”시만자는 짧게 대답하고는 송석석을 바라보았고 송석석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문제는 시만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지만, 제자를 받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시만자의 성격상 이미 오진 등 세 명의 제자를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상당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받아들이겠습니다.”시만자는 오랜 고민 없이 바로 대답하였다. 평소 같았으면 이러한 강압적인 요청은 절대
장기문은 땅에 무릎을 꿇고 재빨리 외쳤다. “아버지, 안심하십시오.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인 것을 제가 압니다. 반드시 사부님께 열심히 배우고 절대 나태하거나 게으르지 않겠습니다. 또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장기문은 시만자의 수업을 두 차례 들었었다. 하지만 다른 때는 당직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고, 그가 시간이 될 때는 시만자가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 매우 아쉬워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그의 부모님에게 몇 번이나 말하길, 만약 시 사부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너무 좋겠다고 했었다.장기문은 성릉관에 갔다가 이렇게 운이 좋은 기회를 얻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의 방법이 좀 비겁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없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전 시위가 독립하게 되면 현갑군의 지휘를 받지 않게 될 것이고, 시 사부님은 송 대인의 체면을 봐서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어전 시위가 독립한 후에도 황제가 계속 가르치도록 허락한다 해도, 수업에 참여할 기회가 줄어들어 예전처럼 여러 번에 한 번 겨우 수업에 참석할 수 있게 될 것이 뻔했다.장기문의 아내도 장기문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남편이 사부를 모시는 예를 갖추니 자신도 함께 절을 올린 것이다. 시만자는 제자 부부가 올린 차를 받아 마신 후, 제자의 아내에게 팔찌를 선물로 건넸다. 장기문의 아내는 그 팔찌의 귀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너무 비싸다며 사양했다.시만자는 말했다."받으시오. 내게 싼 물건은 없소."장기문의 아내는 잠시 망설이며 도와 달라는 눈치로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장기문의 어머니가 말했다.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니 받도록 하여라. 앞으로 시간이 될 때마다 사부님을 찾아 뵙고 제자 며느리로서의 본분을 다하도록 해라.""알겠습니다." 장기문의 아내는 그제야 팔찌를 받고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사부님!"사부 예식을 마친 후 장기문은 부모님께 먼저 돌아가시라고 전했다. 장
시만자는 송석석을 곁에 앉혀 두고 경기를 지켜보게 했다. 그녀는 송석석이 지금 외조부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제자들을 불러 시합을 하게 함으로써 그녀의 주의를 돌리려 했다. 무술은 송석석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니 이를 보면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사여묵도 곁에서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목적 역시 석석과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다.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기문은 세 명을 상대하면서 거의 반격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고, 그 모습은 꽤나 참혹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자들이 적당히 조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머리나 얼굴은 제외하고 주로 몸에 타격을 주었다. 누가 봐도 큰 문제가 없는 선에서 경기를 이어갔다.하지만 이렇게 계속 얻어맞다가는 장기문이 몇 번 버티지 못할 듯했다.사여묵이 경기를 멈추려는 찰나, 송석석이 먼저 나서서 멈추라고 외쳤다. 무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일방적인 폭행을 견디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다. 장기문의 단점이 일찍이 드러났다. 기초는 그럭저럭 다져져 있지만 기술이든, 주먹질이든, 발차기든 전부 엉망진창이었고 전혀 체계가 없었다.시만자는 송석석의 주의가 완전히 전환된 것을 보고 안심이 되었다. 얻어맞아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장기문을 바라보는 눈빛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송석석이 장기문에게 물었다. "무술을 배운 지 얼마나 되었느냐?"장기문은 숨을 몰아 쉬며 막 대답하려는 찰나, 시만자가 재촉했다. “어서 사백께 대답 드려라.”송석석의 표정은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시만자와는 전혀 다른 문파였기 때문에 이들의 사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장기문은 비틀거리면서 힘들게 대답했다. “사백님께 말씀드리자면, 저는 일곱 살부터 무술을 배웠으니 지금까지 스무 해가 되었습니다.”“원래는 누구에게 배웠소?”장기문은 답했다. “정식으로 사부님을 모신 적은 없고, 집안의 교관과
그렇게 그는 열세 살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정식으로 사부를 모시지 못한 탓에 무술을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매번 사부를 모시려 할 때마다 본인이 아프거나 사부에게 불길한 일이 닥치는 등 항상 문제가 생겼다. 결국 장기문의 아버지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냥 배울 수 있는 만큼만 배우라고 했다.시만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미친듯이 복잡해졌다. ‘이 사람 혹시 불운의 화신이 아닐까? 이렇게까지 불운할 수가 있나? 게다가 사부를 해치는 기운도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게도 불행이 닥치는 건 아니겠지?’하지만 장기문의 지난 경험을 보면 모두 사부로 모시기 전에 생긴 문제들이었다. 이번에는 무사히 사부를 청하여 제자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운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장기문은 정식으로 큰형님, 둘째 형님, 셋째 형님께 인사를 드렸다. 그의 성실하고 공손한 태도에 형님들도 그를 특별히 어렵게 대하지 않았다.송석석은 그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너는 현철위 소속이지 않느냐. 이렇게 대놓고 사부를 청하러 와도 현철위에서 출세하는 데 문제가 될까 두렵지는 않느냐?”장기문이 공손히 답했다. “지금 당장은 출세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충분한 실력을 쌓기만 하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무예를 갈고 닦지 않으면 설령 황제께서 중용하시더라도 능력이 부족해 결국 자리를 내려와야 할 테니 그게 더 볼품없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 젊으니 더 견딜 수 있습니다.”송석석은 그의 말을 듣고 격한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불운을 겪고도 올바른 길을 고수해 온 그의 끈기에 정말 감탄했다. 사여묵이 그를 믿고 받아들였던 이유가 확실히 있음을 알 수 있었다.그들이 떠난 뒤, 몽동이가 들어와서 선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지만 예전처럼 다가가서 뒤적거리지 않았다. 연초에 자신의 사부의 집에 한번 다녀오면서 그간 벌었던 돈을 전부 사부에게 드렸는데 오히려 한바탕 얻어맞았다. 이유는 그가 사온 많은 장신구와 화장품들 때문이
다음날 밤, 사여묵과 송석석은 소부를 찾아갔는데, 소부 대문 밖에서부터 근용위가 정성껏 준비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은 새로 걸렸고 문 앞은 깨끗하게 정돈되었으며 대문의 구리 몼가지 하나하나 빛나도록 닦여 있었다. 낮에는 백성들이 찾아와 그들의 정성을 담아 과일과 채소, 닭, 오리, 생선, 고기 등을 바쳤다. 백성들의 감정은 가장 소박했다.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힘을 보탠 것이었다.전북망은 문을 지켰지만 백성들과는 반대로 낮에는 올 염두를 내지 못하고 밤에 찾아와 보초를 섰다. 스스로 충분히 용기를 북돋은 후에 들어가서 죄를 고할 계획이었다.그러나 문을 밀고 들어갈 용기는 끝내 생기지 않았고, 매번 실패했다. 그러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다가오자 무심결에 뒤로 물러서며 몸을 숨겼다.이 반사적인 반응은 요즘 그를 향한 백성들의 엄청난 비난 때문이다.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어떤 이는 그를 향해 썩은 채소를 던지기도 했다. 전북망은 성릉관에서의 공로가 지금은 백성들의 분노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그러나 그는 묵묵히 그 비난을 감내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머니께 설명할 필요도, 그녀의 분노를 감당할 필요도 없었고 받을 것을 모두 받고 나면 이 일이 끝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말고삐를 함께 잡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그는 어쩐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송석석은 어두운 구름 무늬와 큰 국화 문양이 수놓아진 넓은 소매의 운단 옷을 입고 있었는데, 검고 속은 붉은 외투가 바람에 흩날렸다.최근에 몇 번 그녀를 볼 때마다 늘 관복 차림으로 관의 위엄을 뽐내는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여성복을 입어 한층 더 화려한 미모가 돋보였다. 살짝 붉어진 눈가가 마치 복숭아꽃 빛을 띈 듯 해 한 번 보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모습을 자아냈다.전북망은 그녀를 한 번 힐끗 보고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문 앞의 등이 밝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이 자신을 보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는 사여묵을 마주 볼
그가 사여묵보다 먼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키며 어린 시절처럼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송석석은 어린 시절 조금이라도 억울하거나 불편한 일이 생기면 외조부를 찾아와 고자질을 하곤 했다. 작은 몸에 세상 불만이 가득 차, 누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나쁜 말을 하면 모두 기억해 두었다가 외조부가 진성에 돌아오면 한껏 하소연하곤 했다.고자질을 마친 뒤에는 외조부의 품에 안겨 있었다. 겉으로는 억울해 보였지만 눈가에 가득 찬 웃음은 그녀가 얼마나 만족스러워하는지 드러냈다.송석석의 눈물이 끊어진 구슬처럼 뺨을 따라 굵게 흘러내렸다.외조부는 거친 손끝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애써 목소리의 떨림을 참으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누가 우리 작은 석석이를 괴롭혔단 말이냐? 그러나 이제는 다 커서 외조부가 나설 필요도 없겠구나. 네가 스스로 되갚아 줄 수 있으니 말이다.”외조부의 애틋함과 자랑스러움이 섞인 목소리에 송석석의 마음은 더욱 아려 왔다. 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으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곳에 울려고 온 것도 아니고, 외조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려 온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흐릿한 눈 너머로 바라보니 여전히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외조부의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그의 연세가 뚜렷이 보였다.지난 몇 년 동안 그녀가 겪어온 일보다 외조부는 더 많은 고난을 겪어 왔을 것이다. 송가의 불행만으로도 충분히 힘드셨을 텐데 삼야 삼촌은 팔이 잘리고, 일곱째 외삼촌은 세상을 떠나고…… 본인도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는 등 한 고비 한 고비를 넘기며 힘겹게 견뎌 왔을 것이다. 이 모든 고비를 넘겨 오면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외조부를 보며 다른 사람들은 존경할지 몰라도 그녀는 그저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사여묵 덕분에 가까스로 조부와 손녀는 마음을 달래고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송석석은 외삼촌과 외숙모의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일곱째 외삼촌을 떠올리게 할까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지도, 물어 보지도
소 대장군은 사여묵의 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서경의 복수는 일종의 주고받기가 된 것이다. 만약 상국이 서경 마을을 학살했을 때 그들이 아무런 복수 없이 지금처럼 사절을 파견했다면 상국이 절대적으로 잘못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복수했다.소 대장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마을 학살의 잘못만 있었다면 그들의 복수는 이미 충분합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항복한 자를 죽인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항복한 자를 죽였다는 말은 일종의 표현일 뿐이었다. 실상은 한 나라의 태자를 극도로 모욕해 비참하게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서경 황제도 원래 그 평민들을 위해 정의를 되찾아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형을 위해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마을 학살은 덮을 수 있다 해도, 타국의 태자를 모살한 일은 어떻게 되는가?사여묵이 말했다. “지금은 항복한 자를 죽인 일이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습니다. 수란키가 전에 뒤로 물러난 것도 서경 태자의 체면과 서경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번에 사절단으로 온 사람이 냉옥 장공주이기 때문에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송석석도 덧붙였다. “그리고 이전에 남강 전장에서 수란키가 말하길, 서경으로 도망친 정탐조들이 모두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평 사저의 조사에 따르면 두 명이 도망친 것으로 보입니다. 사저는 그 두 명을 계속 추적해왔고, 이미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이 현재 이곳으로 오는 중입니다.”그들이 한마디씩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소 대장군은 마음이 무겁지만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다. 그들이 남강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로 줄곧 자신을 위해 발 벗고 뛰어다녔으니, 그가 진성에 돌아와 조사를 받게 될 때 모든 준비를 완벽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형부에 갈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어찌 됐든, 이 소부로 돌아와 며칠이라도 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후회는 없었다.그는 두 손을 의자 팔걸이에 올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깊은 목소리로
황후는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두운 눈빛 속에는 분노가 서리고 있었다.그녀는 후궁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줄은, 심지어 황제가 그 무엇보다 먼저 송석석을 감싸며 노여움을 터뜨릴 줄은 감히 생각치도 못했다. 게다가 그 노여움도 오직 그녀를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송석석이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은, 황제가 스스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된다. 황제가 모든 비난을 혼자 떠맡기로 한 것이다.황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평소 자신의 명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물 흐르듯 상황을 이용해 송석석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의 명성을 먼저 보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근데 왜 지금 송석석을 먼저 보호하려 하는 것인가? 만약 외부에게도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황제가 터무니없는 행동을 했다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바로 그때, 다양한 감정들이 서서히 제 황후의 마음을 휘감았고, 문득 예전에 황제가 송석석을 궁으로 들이겠다고 말했던 일이 떠올랐다.설마 황제가 송석석에게 마음을 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이야 말로 황당한 일이었다. 그녀는 황제에게 시집온 그날부터 이 남자가 자신만을 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랑이나 좋아한다는 감정 같은 것은 지위와 권력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하지만 전제 조건은, 황제가 그 어떤 여성에게도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긴 세월 동안 황제의 총애를 받는 새로운 여인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질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총애란 단지 황제가 패를 몇 번 더 뒤집은 것뿐이었지, 진정한 마음을 쏟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예전에 황제가 송석석을 궁으로 들이겠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기뻐하지 않았다.평소 후궁을 간택할 때 황제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대부분 그녀가 주관했다. 그러나 오직 송석석만은 예외였다. 송석석의 이름은 황제가 직접 올렸기에, 그녀는 자연스레 질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또 다른 이유는 송석
염선생의 걱정대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황실의 하인들을 찾아가 몰래 물어보려는 시도를 했다. 다행히 미리 경계를 해두었기 때문에, 하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물어도 모른다고 대답했다.하지만 북명황실이 입을 다물면 다물수록 더 많은 의심을 자아내게 했다. 이 일이 보통 평범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황제가 궁궐을 나선다는 것은, 화본에서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소수의 사람만 데리고 미복하여 민간을 방문해 민정을 살피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황실이나 훈작세가에 어떤 경사가 있더라도, 황제가 가마를 이끌고 그곳에 방문하려면 미리 몇 일 전부터 조서를 내려 황제를 맞이할 일을 준비하게 해야 했다. 심지어는 정원이나 집을 미리 수리하고, 부드러운 융단을 깔고 꽃을 심으며, 다양한 음식을 준비하기도 했다.한마디로 말하자면, 한밤중에 단 몇 명만 데리고 신하의 집에 가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게다가 북명왕은 아직 남강에 있었고, 북명왕비이자 사령관인 송석석은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줄곧 그녀를 어서방에 불러 국사를 논의했다고 했다.과연 진짜로 국사를 논의하기 위해서 일까?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웠다.이렇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할 때면, 남자를 탓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더군다나 황제를 탓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만약 황제가 잘못을 했다면, 모두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에 의한 유혹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심지어, 황제가 송석석과 어서방에서 단둘이 있는 동안 황제는 후궁에 한번도 들르지 않았다.이런 일은 아무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틀림없이 속삭이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물론 후궁들은 알고 있었다. 황제가 후궁에 들르지 않았다고 해도, 한밤중에 거동한 일은 감출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날 후궁들이 장춘궁에 안부 인사를 전하러 왔다. 수빈과 덕비는 평소에는 후궁의 상황을 황후에게 보고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사소한 것까지 모두 보고했다. 보고를
서방에는 불이 아직 켜져 있었다.심청화의 말을 듣자마자 송석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 상처가 빨리 나을 수 있겠네요. 정말 답답해서 죽을 뻔했습니다."염선생이 말했다. "오늘 밤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심청화는 송석석을 바라보며 살며시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가 진짜로 연왕을 본받는다면, 사제는 아마 사청엄처럼 될 것이다.""그는 이미 결과를 예측했을 겁니다." 염선생이 말하자 송석석이 매우 우울해하며 말했다. "그가 정말 이런 짓까지 할 이유가 없을텐데…... 어렸을 때 그는 둘째 형과 잘 지내며, 항상 나를 여동생처럼 대해줬고, 내가 조정에 들어간 후에도 진심으로 나를 신하로 대해줬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런 마음을 품게 된 것인지.."그러자 염선생이 놀라며 물었다. "갑자기요? 왕비님은 남강을 되찾고 돌아왔을 때, 그가 왕비님을 궁에 들여 후궁으로 삼으려고 했던 걸 잊으셨습니까?""나는 그가 나를 이용해 사제의 병권을 빼앗으려고 했던 것뿐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그리고 그때 그녀는 송회안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궁에 들이는 것은 누군가가 그녀를 아내로 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심청화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그때 그가 너에게 마음에 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익을 계산해본 후 포기한 거겠지."그러고나서 송석석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만약 그때 진짜로 너를 궁에 들이려 했다면, 넌 궁에 들어갈 생각이 있었느냐?"송석석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곧장 짐을 싸서 매산으로 돌아갔을 겁니다.""단순히 궁에 들어가기 싫어서였나, 아니면 그를 좋아하지 않아서였나?""대사형, 이건 쓸데없는 질문이에요. 궁에 들어가기도 싫었고, 그를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하지만 너는 그때 사제도 좋아하지 않았을 텐데, 왜 망설임 없이 그에게 시집을 간 것이지?" 심청화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니면 그때 이미 사제를 좋아하고는 있었지만, 너 자신도 그 감정을 몰랐거나
심청화의 그림 솜씨는 실로 대단했고, 그림이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 넘치게 느껴졌다.모두가 그림 속의 인물을 한번 보고, 다시 의자에 앉아 있는 피곤함 하나 없는 숙청제를 바라보았는데, 마치 숙청제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 듯, 방금 전의 표정조차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다.눈과 눈가에 흐릿한 주름, 귀 밑으로 흩어진 몇 가닥의 흰 머리, 오른쪽 입술 아래 작은 검은 점, 그리고 입술의 주름까지 세밀한 부분마저 놓치지 않았다.옷에는 아직 색이 칠해지지 않았지만 문양은 이미 그려져 있었고, 실제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숙청제는 마치 처음으로 이렇게 자신을 마주한 것처럼, 한참 동안 멍하니 그림을 보고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짐이 참 늙었구나."그는 평소에 구리거울조차 잘 보지 않으며, 보더라도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보지 않았었다."폐하는 늙지 않으셨습니다. 겨우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십니다." 오 대반이 아첨하며 말했다.숙청제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쓱 쳐다보고 다시 말했다. "짐과 아우는 확실히 비슷한 점이 있구나."그러면서 송석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송석석은 방금까지 계속 하품을 한 탓에 눈 주위가 붉어져 있었는데, 숙청제가 묻자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폐하와 왕야는 조금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그러자 숙청제는 다시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어두운 기색이 사라진 듯했다.송석석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제가 훨씬 더 잘생겼으며 골상도 더 빼어납니다.’그들의 용모는 실제로 닮아 있었다. 결국 같은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도 친자매였으니 말이다. 다만, 예전에는 그렇게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기운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황제는 웃음을 잘 지어 보이지 않았으며 차갑고 위엄 있었다. 그의 얼굴선은 더 각지다.사여묵은 혼인 후 훨씬 부드러워졌다. 만약 그가 스산한 기운을 가라앉힌다면 온화하고 우아한 군자가
숙청제도 정신이 조금 맑아진 듯, 궁 안에서처럼 혼란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그가 웃으며 말했다."굳이 예의 차리지 말고 편하게 있어라. 짐은 그저 마음이 답답해서 황실에 와 심선생과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송석석이 대답했다."그럼 폐하와 사형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서두르지 마라. 이미 왔으니 함께 이야기하자." 숙청제는 송석석을 바라보며 다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상처는 좀 나았느냐?"송석석은 손을 받쳐 일어나려 하다가 다시 내리며 대답했다."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처가 많이 낫긴 했지만 의관이 조언하길, 침상에 누워 며칠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답니다.""음." 숙청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뼈와 근육을 다쳤으니 잘 쉬어야 한다."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송석석을 내보내지 않았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앉아 있거나 서서 함께 있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숙청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요기할 것이 있느냐? 배가 좀 고프구나."오 대반이 급히 대답했다."폐하께서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다. 장혁, 빨리 가라!”사람들이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폐하, 무얼 드시고 싶으십니까?”“무엇이 있느냐?”심청화가 대답했다."폐하께서 드시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황실에서 만들 수 없다면 사람을 보내 왕경루에서 사오도록 하겠습니다."숙청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렇게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된다. 면 한 그릇만 끓여오거라."양 마마는 직접 부엌에 가서 고기와 고수, 파와 계란을 넣고 끓인 뜨끈한 면을 숙청제 앞에 내놓았다.숙청제는 원래 그저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었을 뿐,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러나 고수와 파의 향을 맡고 나자 입맛이 돌았다.면 한 그릇을 다 먹고 국물도 절반가량 마신 후, 그는 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말 맛있구나. 상을 내리겠다."양 마마는 기쁜 표정으로 상을 받았다. 폐하께서 내리신 상이라니, 어떻게 기쁘지 않겠
상서원과 지안궁에서 벌어진 일은 순식간에 숙청제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마음이 나날로 초조해져갔다.게다가 연일 계략까지 모색하느라 두통이 심해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정도였다.황후의 금족령을 해제한 것도, 대황자를 태자로 책봉하기 위한 준비였다. 태자가 될 인물에게 금족된 어머니가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숙청제는 금족된 황후가 자식을 방치하는 것이 곧 자식을 해치는 일임을 깨달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황후는 반성하긴 커녕, 오히려 황자가 자신의 곁에 있어야만 자신의 지위를 굳힐 수 있다고 확신할 뿐이었다. 한편, 숙청제는 입맛이 없는듯 저녁 식사를 대충 때운 뒤 약탕을 마셨다. 아무리 지쳐도 약은 반드시 복용해야 했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매번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항상 죽음은 먼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이리도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다가온 것이니 말이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국가의 중대사나 미래의 계획 같은 무거운 이야기가 아닌 단순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숨을 돌리며, 마음을 편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참을 머리를 굴린 끝에 떠오른 인물은 단 한 사람, 송석석뿐이었다. 송석석은 부상 치료로 며칠간 어서방에 오지 않았다. 숙청제는 임태의를 불러 침술로 두통을 진정시켰으나, 어지러운 증상과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지러움 때문인지, 검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가 싶더니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그러다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닌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확신이었다.한편, 북명왕부에서 노 집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급히 달려왔다.“무슨 일이오?” 염 선생이 서재에서 나오며 물었다. 노 집사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서는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왕비마마를 뵙고 싶다 하시옵니
황후는 시간을 맞춰 다시 상서원으로 간 후, 대황자를 데리고 함께 지안궁으로 가서 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앞뒤로 늘어선 수행원들의 위세는 대단했다.대황자마저 어린 환관의 등에 업혀 궁문에 이르러서야 그를 내려놓았다.황후는 의복을 단정히 하고 대황자의 손을 잡고 지안궁으로 들어갔다. 꿇어앉아 예를 올린 후, 태후의 안부를 여쭈어 보았다. 비록 예법은 완벽했으나, 태후는 한동안 그녀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다만 대황자를 불러 물었다. “오늘 태부께 칭찬을 들었느냐?” 그러자 대황자는 태후의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태부께서 칭찬을 잊으신 것 같사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황후가 서둘러 말을 보탰다. “태부께서는 엄격하시어 쉬이 칭찬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황후는 태후가 이미 태부와 약속을 해둔 일을 모르고 있었다.대황자가 그날 착실하고 성실히 임하면 수업이 끝날 때 한마디 칭찬을 해 주기로, 그렇지 않으면 칭찬은 없기로 말이다. 이를 통해 태후는 대황자의 하루 태도를 알 수 있었다. 태후는 황후의 말을 무시한 채 담담히 대황자를 향해 말했다. “규율은 기억하고 있느냐?” 그러자 순간 대황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급히 변명하며 말했다. “태부께서는 어머니가 저를 찾으신 것을 못마땅히 여기셔서 칭찬하지 않으신 것 같사옵니다.”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 하는 건 너냐, 아니면 네 어미냐?” 태후가 묻자, 대황자는 황후를 가리키며 재빨리 말했다. “어머니를 벌하옵소서! 어머니께서는 글을 베끼시는 것을 가장 즐기시옵니다!” “맞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글을 베끼는 것을 좋고 자식을 가르치지 못한 죄도 있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 하옵니다.” 황후도 서둘러 맞장구를 치자, 태후는 그녀를 흘끗 보더니 금마마에게 명했다. “대황자를 저녁을 차려주고 작은 서재로 보내라. 해시 전까지 모두 베끼지 못하면 출입을 금하라.” 그러자
두 사람은 그렇게 어서방에서 거의 한 시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태후가 떠난 뒤, 숙청제는 황후의 금족령을 해제하라는 어명을 내릴 뿐, 후궁을 관리하는 권한은 돌려주지 않았다.오대반으로부터 어명을 전해 들은 제황후는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갑자기 금족령이 해제했단 말인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자신이 전에 퍼뜨리도록 지시했던 말들이 효과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후가 살아 있는데, 적자를 태후궁에서 보살피는 것은 규율에 어긋난다는 말이었다.금족령이 해제된 제황후는 감사의 인사는 뒤로하고 대신, 곧장 서대신, 곧장 대황자를 만나러 상서원으로 향했다. 대황자는 황후를 보자마자 봅시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태부가 강의를 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장 속에서 풀려난 새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아들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사옵니다! 언제쯤 저를 다시 데려가시겠나이까!” 황후는 허리를 숙여 그의 어깨를 잡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들을 찬찬히 살폈다. 초구를 걸치지 않은 대황자는 많이 야워어 턱선이 뽀쪽하게 드러난 모습에 황후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어찌 이렇게 수척해졌느냐? 잘 먹지 못한 것이냐?” 대황자는 입을 삐죽이더니 금세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재에서 돌아가면 황조모께서는 또 글을 외우게 하십니다. 외우지 못하면 밥을 주지 않으시니 황조모궁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빨리 돌아가고 싶사옵니다!” 제황후는 태후가 엄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방금 금족령이 풀린 상황에서 태후와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다만 대황자를 달래며 말했다. “조금만 더 참거라. 어미가 네 부황을 설득할 것이다.” 대황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하려다, 안만수 태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문을 닫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때 안만수가 제황후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마마, 대황자께서는 수업 중이시옵니다.” 제황후는 안
이튿날, 목 승상은 바로 태의원으로 향하였다. 태의원에서는 모든 태의와 원정이 대기 중이었다. 자리에 앉은 목 승상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딱 한 가지만 묻겠다. 폐하의 병을 치료할 자신이 있느냐?” 태의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오원정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목 승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사옵니다.” “조금이라도 말이냐?” 목 승상은 쉽게 납득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 “단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혹 다른 방도라도 없단 말이냐?” 모두가 다시 침묵하자, 목 승상의 눈빛은 점차 어두워졌고 그러다 완전히 빛을 잃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의원의 명성을 걸고서라면, 이 기한을 2년으로 늘릴 수는 없겠느냐?” 오원정은 얼굴에 깊은 자책감이 서려 있었다. “승상, 폐적증은 발작하면 기세가 매우 심각하여 2년은커녕 1년조차도…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번에는 목 승상이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는 마침내 한 마디 내뱉었다.“입들 조심하거라.” 그는 천천히 태의원을 나서며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이렇게도 빨리 또 연말이 다가왔다. 날씨가 갈수록 추워져 뼛속까지 스며들었다.태후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모르는 듯했지만, 태의원의 밤새 꺼지지 않는 불을 보고일이 터졌음을 짐작했다. 그녀는 두통을 핑계로 오원정을 불러 진맥을 청했다. 그러자 진맥을 마친 오원정이 말했다. “태후마마께서는 수면이 부족하신 듯하옵니다.” 꼿꼿이 서 있는 그는 태후가 이미 무엇인가를 눈치챘음을 알고 있었다. 궁에서 태후의 눈과 귀를 피해 갈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태후가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때만 예외였다. 태후는 주변 사람들을 돌려 보내고, 오원정만 남게 했다. 문지방 위로 햇살이 드리웠지만 매서운 바람이 드리워, 그 햇살조차 싸늘하게 느껴졌다. “말해보거라.” 태후는 자리에 앉아, 오원정의 멍든 눈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