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묵과 송석석은 성문에서 멀지 않은 주점의 2층에 있었다. 이 주점의 2층 귀빈실은 위치가 가장 좋아 창문을 열면 성문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그들의 일정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사여묵은 송석석이 소 대장군을 볼 수 있게 일찍이 이 귀빈실을 예약했다. 송석석은 소 대장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달려 내려가 어린 시절 때처럼 외조부의 품에 안겨 한바탕 울고 싶었다. 외조부에게 억울함을 쏟아내면 그는 석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곤 했다.“우리 석석이를 괴롭히는 사람이 누구냐? 외조부가 가서 혼내 줄 것이다!"그러나 지금 그녀는 이 2층에서 서서 외조부의 말이 백성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귀청이 터질 듯한 지지의 함성을 들으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외조부는 이전보다 많이 늙은 것 같았다. 그가 비록 예전에도 귀밑머리가 희끗했어도 정신이 맑고 의지가 넘쳤다. 진성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몇 세트의 권법을 연습해도 얼굴이 붉어지거나 숨이 차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온통 백발이 되어 검은 머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비록 대장군의 위엄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며칠간 계속된 여정으로 인해 피로한 기색이 보였다.게다가 그는 전체적으로 많이 수척해 보였다. 예전에는 얼굴이 검게 그을렸지만 살이 통통했는데, 지금은 피부색은 변함없지만 빵빵하던 살이 축 늘어졌다.이는 노쇠의 징후였다. 소 대장군은 인파 속에서 힘겹게 전진하고 있었다. 때로는 두 손을 모아 감사를 표하고, 때로는 어전 시위들이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백성들이 다칠까 염려했다.거의 반 시진이 지나서야 행렬이 주점 아래까지 도달했다.원래 순방영과 경위과 와서 길을 열어주려 했지만 백성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완전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었으나 이제는 백성들이 철옹성처럼 모여 소 대장군을 보호했다.어떤 백성은 어전 시위와 실랑이를 벌이려 했다. 그러나 즉시
필명과 오진이 경위와 순방영을 이끌고 인파 속으로 들어가 서서히 길을 만들어내어 마침내 소 대장군과 어전 시위들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어전 시위들은 소 대장군을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게 했다.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백성들의 소란과 외침이 숙청제에게 보고되었다.숙청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백성들이 자신을 향해 외치는 함성이 마치 그를 옭아매는 밧줄처럼 느껴졌다. 원래 그는 소승이 돌아오면 먼저 형부의 조건이 비교적 나은 감방에 수감하고 서경 사신에게도 핑계가 될 만한 처분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척귀의 인도로 소 대장군은 어서방으로 들어가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죄인 소승,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폐하 만수무강 하옵소서!”숙청제는 소승을 보기 전까지 머릿속에서 이 사건을 처리할 계획만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가 눈앞에 무릎 꿇고 예전의 위풍당당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채 마치 쓰러진 산처럼 보이자 마음속에 찡한 감정이 올라왔다.그가 태자였을 때 소승과 송회안은 그를 무척이나 지지해 주었다. 그 또한 자주 진북후부를 찾아 송가의 아들들과 진심으로 교류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제 황제가 된 그는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했고, 마음도 예전처럼 순수하지 않게 되었으며 여러 걱정과 책략이 늘었다.오랜 세월이 지나 눈앞에 서 있는 그를 보니 국경의 매서운 바람이 이 철같은 노장을 산골의 노인처럼 변하게 만든 것이 느껴졌다. 숙청제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져 직접 일어나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소 대장군, 어서 일어나시오.”소승은 눈물을 쏟아내며 말했다. “죄인 소승, 폐하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숙청제가 깊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앉아서 이야기하시오.”숙청제는 직접 소 대장군을 부축하여 한쪽에 앉히면서 그가 진정으로 쇠약해졌음을 비로소 실감했다. 강철 같던 그의 어깨와 팔이 이제는 그 단
예전에 송석석이 현갑군의 지휘사로 임명되었을 때 많은 조신들이 반대했었다. 여성이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맡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제 황제의 일련의 조치를 보고 그의 의도를 깨닫게 된 조신들은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현갑군에 결국 순방영만 남게 되어 귀족 자제들이 모이는 집합소로 전락할까 걱정하였다.현갑군은 원래 황성을 지키는 중요한 방패였다. 하지만 해체되고 분해되면서 그 권위를 잃은 듯하여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다.더군다나 송석석이 지휘사로 임명된 이후 현갑군은 더욱 강력한 위엄과 안전감을 갖추게 되었고, 송석석에게 반감을 가졌던 이들도 이제는 진심으로 그녀를 인정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송석석에 대한 인정이 숙청제로 하여금 더 빠른 개혁을 추진하게 했고, 어전 시위를 현철군으로 개편하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앞으로의 개혁도 더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었다.한편 소 대장군은 근용위의 호위를 받아 소부로 돌아왔다. 오랜 세월 비워진 소부는 황폐해져 형편없는 상태였기에 근용위가 직접 들어가 잡초를 뽑고 청소를 했다. 오 대반은 몇몇 궁녀들 골라 들어가 시중을 들도록 조치했다.전북망은 직접 호위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에 소 대장군이 입주하자마자 스무 명의 근용위를 파견했다. 그 중 열 명은 소부 안에서, 나머지 열 명은 밖에서 세개의 대문을 지켰다. 정문에는 네 명, 후문과 측문에는 각각 세 명씩 배치했다.소 대장군이 소부에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 회왕비가 사람들을 이끌고 정문 밖에 찾아와 면회를 요청했으나, 근용위에 의해 막혔다. 그녀는 시끄럽게 굴지 않고 밖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다른 일은 차치하더라도 아버지가 돌아왔는데 보러 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지금 왕야가 진성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왕야가 있었다면 아버지가 죄인의 신분인 만큼 그녀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을 탐탁지 않아 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황제가 그를 집으
선평후는 주변에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이 혼자 왔다. 청색의 옷에 검정색의 두꺼운 외투까지 입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어느 집안의 하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사여묵과 송석석은 먼저 일어나 기쁘게 그를 맞이하였고,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따라 일어났다. 그들 또한 아무 말없이 도와준 선평후에게 마음 속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치레를 나눈 뒤, 선평후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송구스럽습니다. 그 녀석을 조건없이 동의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장기문이 조건 하나를 내세웠는데, 왕비님과 시 소저에게 먼저 물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왔습니다.”선평후가 처음 송구스럽다고 이야기할 때 모두 놀랐지만 뒤에 이어진 말까지 듣자 안심했다. 시만자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제 의견을 물어야 하죠? 대체 뭘 하려는 건가요?”선평후도 이 말을 전하면서 다소 의아해하며 답했다.“장기문이 말하길, 시 소자를 사부로 삼고 싶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오진과 필명처럼 친히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네? 저는 그를 가르친 적이 있는걸요?”시만자는 장기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해 잠시 당황했다. 그는 어전 시위에 속해 있어서 이미 함께 수업을 받을 수 있는데 왜 사부로 삼고 싶어 하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제자는 세 명으로 정해 두었다고 말을 했었다.그러자 선평후가 설명했다.“그 녀석이 자기 실력으로 승진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전에서 필요한 것은 무예와 민첩함인데, 민첩함은 충분하지만 무예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모양입니다.”“그런가요?”시만자는 짧게 대답하고는 송석석을 바라보았고 송석석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문제는 시만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지만, 제자를 받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시만자의 성격상 이미 오진 등 세 명의 제자를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상당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받아들이겠습니다.”시만자는 오랜 고민 없이 바로 대답하였다. 평소 같았으면 이러한 강압적인 요청은 절대
장기문은 땅에 무릎을 꿇고 재빨리 외쳤다. “아버지, 안심하십시오.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인 것을 제가 압니다. 반드시 사부님께 열심히 배우고 절대 나태하거나 게으르지 않겠습니다. 또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장기문은 시만자의 수업을 두 차례 들었었다. 하지만 다른 때는 당직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고, 그가 시간이 될 때는 시만자가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 매우 아쉬워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그의 부모님에게 몇 번이나 말하길, 만약 시 사부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너무 좋겠다고 했었다.장기문은 성릉관에 갔다가 이렇게 운이 좋은 기회를 얻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의 방법이 좀 비겁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없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전 시위가 독립하게 되면 현갑군의 지휘를 받지 않게 될 것이고, 시 사부님은 송 대인의 체면을 봐서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어전 시위가 독립한 후에도 황제가 계속 가르치도록 허락한다 해도, 수업에 참여할 기회가 줄어들어 예전처럼 여러 번에 한 번 겨우 수업에 참석할 수 있게 될 것이 뻔했다.장기문의 아내도 장기문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남편이 사부를 모시는 예를 갖추니 자신도 함께 절을 올린 것이다. 시만자는 제자 부부가 올린 차를 받아 마신 후, 제자의 아내에게 팔찌를 선물로 건넸다. 장기문의 아내는 그 팔찌의 귀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너무 비싸다며 사양했다.시만자는 말했다."받으시오. 내게 싼 물건은 없소."장기문의 아내는 잠시 망설이며 도와 달라는 눈치로 시어머니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장기문의 어머니가 말했다.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니 받도록 하여라. 앞으로 시간이 될 때마다 사부님을 찾아 뵙고 제자 며느리로서의 본분을 다하도록 해라.""알겠습니다." 장기문의 아내는 그제야 팔찌를 받고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사부님!"사부 예식을 마친 후 장기문은 부모님께 먼저 돌아가시라고 전했다. 장
시만자는 송석석을 곁에 앉혀 두고 경기를 지켜보게 했다. 그녀는 송석석이 지금 외조부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제자들을 불러 시합을 하게 함으로써 그녀의 주의를 돌리려 했다. 무술은 송석석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니 이를 보면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사여묵도 곁에서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목적 역시 석석과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다.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기문은 세 명을 상대하면서 거의 반격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고, 그 모습은 꽤나 참혹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자들이 적당히 조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머리나 얼굴은 제외하고 주로 몸에 타격을 주었다. 누가 봐도 큰 문제가 없는 선에서 경기를 이어갔다.하지만 이렇게 계속 얻어맞다가는 장기문이 몇 번 버티지 못할 듯했다.사여묵이 경기를 멈추려는 찰나, 송석석이 먼저 나서서 멈추라고 외쳤다. 무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일방적인 폭행을 견디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다. 장기문의 단점이 일찍이 드러났다. 기초는 그럭저럭 다져져 있지만 기술이든, 주먹질이든, 발차기든 전부 엉망진창이었고 전혀 체계가 없었다.시만자는 송석석의 주의가 완전히 전환된 것을 보고 안심이 되었다. 얻어맞아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장기문을 바라보는 눈빛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송석석이 장기문에게 물었다. "무술을 배운 지 얼마나 되었느냐?"장기문은 숨을 몰아 쉬며 막 대답하려는 찰나, 시만자가 재촉했다. “어서 사백께 대답 드려라.”송석석의 표정은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시만자와는 전혀 다른 문파였기 때문에 이들의 사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장기문은 비틀거리면서 힘들게 대답했다. “사백님께 말씀드리자면, 저는 일곱 살부터 무술을 배웠으니 지금까지 스무 해가 되었습니다.”“원래는 누구에게 배웠소?”장기문은 답했다. “정식으로 사부님을 모신 적은 없고, 집안의 교관과
그렇게 그는 열세 살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정식으로 사부를 모시지 못한 탓에 무술을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매번 사부를 모시려 할 때마다 본인이 아프거나 사부에게 불길한 일이 닥치는 등 항상 문제가 생겼다. 결국 장기문의 아버지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냥 배울 수 있는 만큼만 배우라고 했다.시만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미친듯이 복잡해졌다. ‘이 사람 혹시 불운의 화신이 아닐까? 이렇게까지 불운할 수가 있나? 게다가 사부를 해치는 기운도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게도 불행이 닥치는 건 아니겠지?’하지만 장기문의 지난 경험을 보면 모두 사부로 모시기 전에 생긴 문제들이었다. 이번에는 무사히 사부를 청하여 제자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운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장기문은 정식으로 큰형님, 둘째 형님, 셋째 형님께 인사를 드렸다. 그의 성실하고 공손한 태도에 형님들도 그를 특별히 어렵게 대하지 않았다.송석석은 그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너는 현철위 소속이지 않느냐. 이렇게 대놓고 사부를 청하러 와도 현철위에서 출세하는 데 문제가 될까 두렵지는 않느냐?”장기문이 공손히 답했다. “지금 당장은 출세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충분한 실력을 쌓기만 하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무예를 갈고 닦지 않으면 설령 황제께서 중용하시더라도 능력이 부족해 결국 자리를 내려와야 할 테니 그게 더 볼품없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 젊으니 더 견딜 수 있습니다.”송석석은 그의 말을 듣고 격한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불운을 겪고도 올바른 길을 고수해 온 그의 끈기에 정말 감탄했다. 사여묵이 그를 믿고 받아들였던 이유가 확실히 있음을 알 수 있었다.그들이 떠난 뒤, 몽동이가 들어와서 선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지만 예전처럼 다가가서 뒤적거리지 않았다. 연초에 자신의 사부의 집에 한번 다녀오면서 그간 벌었던 돈을 전부 사부에게 드렸는데 오히려 한바탕 얻어맞았다. 이유는 그가 사온 많은 장신구와 화장품들 때문이
다음날 밤, 사여묵과 송석석은 소부를 찾아갔는데, 소부 대문 밖에서부터 근용위가 정성껏 준비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은 새로 걸렸고 문 앞은 깨끗하게 정돈되었으며 대문의 구리 몼가지 하나하나 빛나도록 닦여 있었다. 낮에는 백성들이 찾아와 그들의 정성을 담아 과일과 채소, 닭, 오리, 생선, 고기 등을 바쳤다. 백성들의 감정은 가장 소박했다.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힘을 보탠 것이었다.전북망은 문을 지켰지만 백성들과는 반대로 낮에는 올 염두를 내지 못하고 밤에 찾아와 보초를 섰다. 스스로 충분히 용기를 북돋은 후에 들어가서 죄를 고할 계획이었다.그러나 문을 밀고 들어갈 용기는 끝내 생기지 않았고, 매번 실패했다. 그러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다가오자 무심결에 뒤로 물러서며 몸을 숨겼다.이 반사적인 반응은 요즘 그를 향한 백성들의 엄청난 비난 때문이다.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어떤 이는 그를 향해 썩은 채소를 던지기도 했다. 전북망은 성릉관에서의 공로가 지금은 백성들의 분노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그러나 그는 묵묵히 그 비난을 감내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머니께 설명할 필요도, 그녀의 분노를 감당할 필요도 없었고 받을 것을 모두 받고 나면 이 일이 끝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말고삐를 함께 잡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그는 어쩐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송석석은 어두운 구름 무늬와 큰 국화 문양이 수놓아진 넓은 소매의 운단 옷을 입고 있었는데, 검고 속은 붉은 외투가 바람에 흩날렸다.최근에 몇 번 그녀를 볼 때마다 늘 관복 차림으로 관의 위엄을 뽐내는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여성복을 입어 한층 더 화려한 미모가 돋보였다. 살짝 붉어진 눈가가 마치 복숭아꽃 빛을 띈 듯 해 한 번 보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모습을 자아냈다.전북망은 그녀를 한 번 힐끗 보고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문 앞의 등이 밝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이 자신을 보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는 사여묵을 마주 볼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