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묵은 송석석을 앞으로 그러안더니 그녀의 멍든 눈을 만지며 물었다. “아프오?” 그러자 송석석은 누가 볼까 봐 그의 품에서 나와서 말했다. “조금 아픕니다.” “걱정 마시오.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오?” 그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송석석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의자에 앉아 눈가를 만졌다. 확실히 오늘 아침보다 좀 더 부은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만자와 비무하는데 몽동이가 갑자기 끼어드는 바람에 나와 만자가 모두 다쳤습니다.” “내가 나중에 그에게 벌을 주겠소.” 사여묵은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몽동이는 사실 늘 듬직했는데 만자와 석석과 놀 때면 소년의 모습으로 변하곤 했다. 송석석은 웃으며 말했다. “벌을 내는 건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벌을 내는 건 작은 일이지만 석소 사저가 알고 그의 사부에게 알린다면 그의 사부가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저 겁을 주려는 것이지 정말로 벌 하려던 것이 아니었소.” 사여묵은 그들의 감정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린 시절의 우정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파괴하려고 하지 않았다. “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송석석은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황제폐하께서 저더러 전북망을 어전시위장으로 추천하는 글을 써서 이부에게 임명서를 내라고 하더군요.” 사여묵은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는 예전부터 전북망을 쓰려고 했소. 다만 전북망이 그를 실망시켰을 뿐이오. 하지만 지금 드디어 공을 세웠으니 당연히 그를 승진시키겠지. 그리고 어전시위는 현갑군의 소속이지만 당신이 통제할 수는 없소. 그들은 결국 황제의 명령에만 복종할 것이니 지금은 그저 과도기에 불과하오.” “당신 말이 맞습니다. 황제는 이미 영시위부를 개설할 계획이니 그때가 되면 어전시위는 현갑군에서 이탈할 것 같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금군 12사에 어전시위가 포함되어야 하지만 황제가 제외한 것을 보아서는 자신의 심복을 양성하려는 것 같습니다. 안
방 마마는 나이가 많아 다른 집사들과 분리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깨끗한 작은 감방에 따로 수감되어 있었다. 그녀는 대리사에 온 후부터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진이는 직접 그녀를 심문하고 음식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감방에 누워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사실 사여묵도 그녀가 장공주에게 불리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공주는 그녀가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들의 감정은 이미 주종을 초월했다. 지금까지 장공주 주변의 사람들이 바뀌었지만 유독 그녀만이 장공주의 곁을 지켜왔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장공주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온갖 더러운 일을 모두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녀의 손을 거치기도 했었다. 사여묵은 송석석에게 말했다. “진이가 오늘 도준을 심문한 결과 장공주가 원래 당신 당숙의 얼굴을 망가뜨리고 그의 일가를 죽이라고 명령했었는데 방 마마가 도준에게 명령을 이행하지 말라고 했다더군. 그렇지 않으면 당신 당숙의 가족은 모두 몰살당했을 것이오.” 송석석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미친 것 아닙니까? 외모가 우리 어머니를 닮은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부진에게 첩으로 보내 아이를 낳게 하고 우리 아버지를 닮은 사람은 데려가 얼굴을 망가뜨리고 죽이려는 것입니까?” “그러니 그녀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오직 방 마마만이 잘 알고 있소. 장공주부에는 역모사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피빚도 있소. 황제는 역모사건 외에는 신경 쓰지 않지만 아직 살아있는 그리고 이미 사망했을지도 모를 피해자들을 위해서 조사할 필요가 있소.”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역을 꾀하는 것은 극악무도한 죄지만 장공주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도 유일무이한 인생이 망쳐진 것이었다. “내가 가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사람을 시켜 취조실로 데려가겠소.” “취조실에 형구는 놓지 마십시오.” 사여묵은 웃으며 말했다. “형구는 취조실에 두지 않고 전용 형구실이 있소. 지금까
그녀는 마치 오래된 우물처럼 고요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송석석을 노려보았다. 송석석도 그녀를 보았다. 예전에 장공주부에 갔을 때 송석석은 방 마마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방 마마는 석청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 위엄이 가득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남색 옷은 쭈글쭈글했고 비녀는 비뚤어져 귀밑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눈 밑은 처져 있었으며 얼굴은 여위고 반점도 뚜렷했다. 근심걱정에 단식까지 해서 이렇게 초췌해진 것이었다.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죽음을 기다리는 듯했지만 사실 그녀의 애간장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진이는 방 마마와 이야기를 하러 갔었지만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눈빛조자 주지 않았다. 하지만 송석석에게는 입을 열었다. “내 입에서 공주에게 불리한 말을 들을 생각 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도준이 당신이 우리 당숙 일가를 구했다고 하던데, 당신이 아니었으면 아마 우리 당숙 일가는 없어졌을 것이네. 그것만은 고맙소.” 방 마마는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난 그들을 살리려는 마음 없었습니다. 내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잡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죽이든 말든, 그리고 언제 죽이는 것은 모두 내 결정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멀쩡히 살아서 장공주부에서 나왔소.” 그러자 방 마마는 차갑게 말했다.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그래봤자 장공주의 증언을 해달라는 것 아닙니까?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지 마십시오. 공주는 죄가 없습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든 건 나와 도준이 한 것입니다.” “방 마마는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이오?” 송석석은 그녀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공주부엔 말하지 못할 일이 많지 않소?” “뒤뜰에 있던 여인들 말입니까? 흥.” 방 마마는 원통스러운 눈빛으로 송석석을 보며 말했다. “모든 사람이 공주부를 비난할 자격이 있지만 송씨 가문만은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의 부친이 공주님의 평생을 망쳤습니다. 그리고 뒤뜰에 있던 여인들도 모두
송석석은 방 마마의 말들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좀 슬프다고 생각했다. 방 마마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확실했다. 송석석은 방 마마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장공주 몰래 당숙 일가를 풀어준 것을 보면 마음가짐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건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그래. 모든 것이 방 마마와 도준이 한 것이라면 장공주와는 무관하니 근 몇 년 동안 당신의 손을 거쳐 장공주부로 데려온 여인은 몇 명이고 죽은 사람은 얼마인지 말해보시오.” 방 마마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안색이 창백해졌다. 송석석은 계속 말했다. “그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방 마마가 책임져야 하지 않소? 그리고 끌려온 여인들의 부모나 친척들에게도 더 이상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고 알려야 하지 않겠소? 게다가 장공주께서 모역죄를 지었으니 죽음은 면치 못할 것이오. 그러니 당신이 그 여인들의 신분을 밝히는 것도 장공주를 위해 덕을 쌓는 것이나 다름없소.” 방 마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송석석을 올려다보더니 입술을 심하게 떨었다. 배가 고파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고 그녀의 모역죄 때문일 수도 있었다. 송석석은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방 마마의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 한 잔 주시겠습니까?” 탁자 위에는 차 주전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건 송석석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송석석은 마시지 않고 차 한 잔을 따라서 방 마마에게 건네며 말했다. “드시오.” 방 마마의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이 부들부들 떨며 차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나서 잔을 손에 쥐며 송석석에게 우는 것보다 더 보기 흉한 웃음을 지었다. “나에게 모든 사람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보아하니 대리사에서도 장공주부를 샅샅이 뒤졌겠지요. 내 방 앞에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대추나무 가장자리에 돌의자가 하나 있습니다. 그
방 마마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화를 참으며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그녀의 말을 계속 들었다. 왜냐하면 방 마마가 말을 많이 할수록 자백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증언들은 나중에 장공주를 심문할 때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모역죄든 여자들을 살해한 죄든 그녀는 결국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었다. “이번에는 장공주가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도 예전에는 명랑하고 활발하며 존귀하기 그지없는 아가씨였습니다. 천하의 남자들이 줄을 서서 선택해 주기를 기원하는데 하필이면 송회안이라는 무부에게 첫눈에 반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게다가 하필이면 송회안의 마음속에 장공주의 자리가 눈곱만큼도 없었지요. 처음엔 나도 그저 장공주가 즐거웠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추억에 잠긴 방 마마는 마음속에 담아둔 말이 너무 많아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마음이 약해진다더니 예전에 했던 일들을 생각하니 후회가 파도같이 몰려왔다. 그녀는 순서가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그녀는 공주이니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문엄 황제가 자신의 행복을 손수 꺾었다고 문엄 황제를 욕했었지요. 장공주는 문엄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딸이었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무릎을 꿇고 빌어도 문엄 황제는 동의하지 않았지요. 참 모질기도 했었지요.” “애초에 의귀비가 살아 계실 때 문엄 황제는 그녀의 부탁이라면 반드시 들어주셨는데 고작 무부인 송회안 때문에 공주의 부탁을 거절하다니. 세상에 무공을 익힌 사람이 많고 많은데 왜 하필 송회안이어야만 나라를 지킬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설령 정말 그렇다고 해도 부마로 세우고 계속 군대를 거느리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부마가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던 선례도 깨트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공주를 위해서라면 선례를 깨트리는 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살면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바로 송회안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사여묵은 보좌관과 병풍 뒤에서 나와 먼저 송석석을 안고 사람들에게 방 마마를 데리고 나가라고 분부했다.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대추나무 아래에 상자가 있을 것이오. 거기에 그 여자들의 명단이 모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니 반드시 찾아야 하오.” “네.” 보좌관은 명을 받고 나갔다. 사여묵의 품에 안긴 송석석은 마음과 목이 악취로 가득한 솜으로 막힌 듯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부인. 더 이상 취조하지 마시오. 방 마마가 한 말은 잊으시오. 장인께선 잘못을 하지 않았소. 모두 장공주가 혼자만의 사랑에 빠져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친 것이오.” 송석석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얼굴이 창백해서 말했다. “난 괜찮아요. 계속 심문할 수 있어요. 방 마마가 정신을 차리면 내가 다시 천천히 물어보겠습니다. 적어도 그 여자들의 명단은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가족들에게 더 이상 찾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십시오. 죽었다는 걸 알았으니 더 이상 염 선생의 가족들처럼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겠지요.” 송석석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죽으면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실종된 것보다 더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게다가 우리는 방 마마의 입에서 장공주가 문엄 황제를 미워한다는 정보를 알았지 않습니까? 선제는 문엄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들이니 장공주가 문엄 황제에게 복수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선제가 살아 계실 때부터 그녀는 연왕과 역모를 꾸미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우리는 역모의 동기를 알아냈습니다.” 사여묵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송석석을 놓지 않고 말했다. “그래. 방금 얻어낸 정보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 더 이상 그녀를 심문하지 않아도 되오.” 그는 병풍뒤에서 석석이 괴로워서 주먹을 꽉 쥐고 참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장인어른은 석석 마음속의 영웅이야. 그런데 엉뚱한 사랑싸움에 말려들어 희생한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욕을 먹다니, 석석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고청란은 시만자를 보고 놀랐지만 그들이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을 하자 다소 불쾌했다. 계획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속인 건 속인 것이기 때문에 고청란은 최소한의 예의밖에 유지할 수 없었다. “시 아가씨,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시만자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청란이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말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고청란은 몸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고청란은 그들에게 속은 게 화가 났지만 그들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아버지에게 가서 말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팔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초라한 오두막집에는 작은 부엌과 안방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을 길 수 있는 우물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햇빛이 기왓장 사이로 스며들었다. 보나 마나 기와지붕이 낡아 장기간 수리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폭우가 쏟아지면 이 집 안은 물바다가 될 것이 뻔했다. 시만자는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좁은 집에서 흔들리는 걸상에 앉아 머리 위에 햇빛까지 내리쬐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고청란이 그의 어머니를 부축하러 갈 때 지붕으로 날아올라 갔다. 그녀는 기와가 밀린 것이면 제자리로 조정하려고 했는데 올라가 보니 이미 기와들이 깨져 있어서 수리를 하려면 기와를 좀 사 와야 했다.고청란은 림봉아를 부축해 나와서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시만자를 보고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가씨, 지붕에는 왜 올라간 겁니까?” “기와가 깨진 것 보지 못했습니까? 비가 오면 곤란합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밤에 바람이 들어와 겨울에 고생일 것입니다.” 그러자 고청란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사람 찾아 수리하겠습니다.” “그래요. 수리해야지요.” 그녀는 림봉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말했다. “어머님은 왜 모시고 나왔습니까? 어서 부축해서 눕히십시오.” 림봉아는 시만자에게 절하며 말했다. “시 아가씨와 북명왕
시만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왜 그러는 것입니까? 당신의 어머니는 림씨 집안의 딸이고 당신은 그들의 외손녀인데 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까?”그러자 고청란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말했다.“조용히 하십시오. 어머니가 듣겠습니다.”그러자 시만자가 말했다.“차라리 나가서 얘기합시다. 마침 홍작의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홍작의사는 당신들이 림씨 가문에 있는 줄 알고 있을 테니 그쪽으로 가서 기다립시다.”두 사람은 문을 열고 나갔다. 시만자는 몇 걸음 걷고 뒤돌아보며 물었다.“이 집은 림씨 가문에서 당신들에게 준 겁니까?”고청란은 담담하게 말했다.“원래는 세를 놓았었는데 너무 낡아서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자 우리에게 잠시 머물라고 한 겁니다. 사건이 해결되면 우리를 데리고 림씨 가문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더군요.”시만자가 물었다.“당신은 그 말을 믿습니까?”“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저희 모녀도 마땅히 갈 곳이 없고 해서 일단은 여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틀 후에 저는 일을 찾으러 나갈 것이예요. 돈을 벌면 머무는 곳을 바꿀 것이고요.”“일거리를 찾으러 나간다는 말입니까? 무슨 일을 찾으려는 겁니까?”시만자가 물었다.그녀의 물음에 고청란은 눈살을 찌푸렸다.“내가 무공을 좀 하니까 원래는 부잣집에 가서 시녀로 일하려고 했는데 내 출신으로서는 아무도 나를 쓰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습니다. 정 안 되면 길거리에서 재주를 팔든 부두에 가서 심부름이라도 해야지요. 그래도 나에겐 힘이 남아있으니까요.”시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당신의 무공은 형편없지만 힘은 있으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짐 심부름꾼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습니까?”고청란은 시만자를 보며 성격이 정말로 직설적이라고 생각했다.“수입은 보통입니다. 내가 예전에 알아봤는데 아무래도 힘을 쓰는 일이니 찻집과 술집에서 반찬을 나르는 것보다는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더군요.” 시만자는 부귀한 가문의 아가씨지만
고청우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역겹다는 눈빛이 새어 나왔다. ‘버러지 같은 놈, 능력도 없고 용맹하지도 못하면 마음이라도 독하게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천하의 멍청한 놈!’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다.“역시 저희 서방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제가 서방님을 참 잘 만난 것 같네요.”한편, 결심을 하고 나니 왕표는 되레 마음이 너무 편했다. 그는 고청우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눈앞의 이 여자와 남은 평생 신분을 숨긴 채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상상을 하고 있었다.지금까지 남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삶도 살아봤고 나라를 위해 목숨도 잃을 뻔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왕표는 절대 잘못한 게 없으며 더군다나 그가 남강에 있든 없든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어차피 제린과 방천허 등 부하들은 그를 원수로 인정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가서 왕진을 불러오게. 이곳을 떠나기로 했으니 그자와 논의해서 우리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가야지.”왕진은 본래 평서백부의 교두였는데 왕표를 따라 남강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다.왕표는 전에 최씨가 그의 곁에 몰래 사람을 붙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부인 고청우가 남강에 오고나서 최씨가 심어놓은 사람들을 전부 제거한 것이다.때문에 지금 저택에 남아있는 부하들은 왕표의 믿음을 듬뿍 받고 있는 자들이다.한편, 왕표의 계획을 들은 왕진이 흠칫 놀랐지만 이내 찬성했다.남강에 오기 전, 왕진은 진성에서 더할 나위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평서백부에서 교두로 지내던 나날들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하지만 왕표를 따라 남강에 오고 나서부터 좋은 술을 마셔본 적도 없고 입맛에 맞는 요리를 먹어본 적도 없었다.지금 그 부귀영화를 누리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더군다나 전쟁이 터져서 왕표가 전장에 나가면 왕진도 따라가서 목숨 걸고 피 터지게 싸울 수밖에 없다.왕진 등 사람들은 정식적인 사병이 아니기에 지금 도망간다고 해도 그들의
몰래 저택 안으로 들어온 무당은 10분 뒤, 다시 뒷문으로 빠져나갔다.한편, 저택에 앉아있던 왕표는 온몸에 힘이 쫙 풀렸으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조금 전, 무당은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한 마디만 뱉었다.“장군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그리고 나서는 고청우가 아무리 울며 빌어도 무당은 입을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굿을 해달라고 해도 단호하게 거절하며 소용없는 짓이라고 얘기했다.그러다가 저택을 떠나기 전, 무당은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이 땅은 장군의 무덤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가족들을 달 대피시키십시오.”무당의 말에 왕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이 남강 땅에 얼마나 많은 장군의 뼈들이 묻혀 있단 말인가! 더할 나위 없이 용맹하고 전쟁 경험이 많은 송회안 부자도 이 땅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왕표는 송회안 부자를 존경하지만 두 사람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만약 전장에서 죽는다면 평서백부가 아무리 대대손손 흥한다고 해도 왕표는 전혀 그 영광을 누리지도 못할 것이고 심지어 그의 부인과 아들도 이를 누릴 수 없다.이때, 고청우가 뒤에서 왕표를 끌어안고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서방님, 서방님께서 전장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면 저와 아들도 서방님을 따라 가겠습니다.”“아니, 난 절대 죽을 수 없어!”눈물을 뚝뚝 흘리는 고청우를 보며 왕표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고청우의 손을 덥석 잡더니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우린 아무도 안 죽을 것이오. 전에도 약속하지 않았소?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남강 땅을 떠날 것이오!”흠칫하던 고청우가 당황한 기색으로 왕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저희가 정녕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요? 이 저택에 저희 사람만 있는 건 아닙니다. 더군다나 모든 걸 버리고 몸만 떠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왕표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안일한 생활을 오랫동안 보낸 왕표는 절대 가난하게 살 수는 없었다.반드시 당당하고 순조롭게 금은보화를 저택 밖으로
한편, 남강에서 왕표는 며칠동안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그는 사국 병사들이 정말 쳐들어올 줄은 몰랐으며 시씨 가문 도련님이 보낸 서신이 사실일 줄도 전혀 몰랐다.왕표는 방천허 등 사람들과 몇 번이고 논의를 했지만 그자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으며 쳐들어오면 바로 전쟁을 치르면 된다고 했다.방천허가 보인 자신감에 왕표는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지만 전쟁이 일어난 순간 왕표는 절대 군영에서 지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그리고 방천허 등 병사들에게 정말 그만한 실력이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송씨 가문 군대와 북명군은 평소에도 건방진 태도로 왕표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병사 훈련을 진행하지 않았기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승산이 높지 못할 것이다.왕표는 자신의 다리를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비가 내리면 다친 무릎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으며 전장에서 다리도 잃을 뻔했다.진성으로 돌아가 오랜 시간의 치료를 통해 겨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가끔 다리가 불편했다.왕표는 전장에서 죽음에 이르렀던 그 순간을 여전히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살인으로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심지어 칼을 들 힘도 없었다.그뿐만 아니라 몸에 입고 있는 갑옷이 너무 무거웠던 탓에 적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 누군가가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왕표는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을 것이다.물론 이제 원수가 된 왕표는 굳이 전장에 직접 나갈 필요가 없지만 남강에는 원수가 숨어서 지휘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앞장서서 싸워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다.그 전통을 만든 사람이 바로 송회안과 사여묵이었고, 제린과 방천허도 이 전통을 찬성하는 바였다. 원수가 전장에 직접 나서야만 병사들의 투지와 열정을 끌어올릴 수 있어, 짧은 시간 내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바로 그때, 대문이 열리며 고청우가 인삼차를 들고 들어왔다.왕표는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긴 채 고청우를 쳐다보았고 고청우는 조금 전에 울고 온 듯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
임 태의는 북명왕의 상태가 걱정되어 황실에 남아 밤을 보내려고 했지만 저녁쯤 돌아온 단 신의가 한걸음에 황실로 달려와 북명왕에게 단설환 한 알을 건네 주었다.단설환을 복용한 북명왕은 흉부 통증이 바로 완화되었고 임 태의가 맥을 짚어보니 그가 처방한 약보다 효과가 훨씬 좋았다.임 태의는 오래 전부터 단 신의의 명성을 익히 전해 들었기에 굳이 자신이 황실에 남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위로 몇 마디를 남긴 뒤 황실을 떠났다.임 태의가 가자마자 단 신의는 북명왕을 위해 처방을 했고 제자를 시켜 약왕당에서 가서 약재를 구해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약을 먹은 사여묵은 가슴에 꽉 막혀 있던 큰 돌멩이가 사라진 기분이었으며 겨우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임 태의가 내일도 찾아올 걸세. 때문에 왕야께서 진성을 떠난다고 해도 내일 저녁까지 저택에 계시다가 출발하셔야 하네.”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임 태의께서 내일 다시 장군님의 맥을 짚어본다면 모든 게 들통나는 거 아닙니까?”“사람을 시켜 저택 밖에서 지켜보다가 임 태의가 나타나면 내가 다시 왕야께 약을…”“약을 또 드셔야 한다는 겁니까? 더 이상 중독되면 안 됩니다.”송석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다급하게 말하자 단 신의가 송석석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렇게 걱정됐다면 그 반 알도 드시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송석석이 후회 막심한 표정을 지었고 단 신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남은 반 알을 먹이려는 게 아니네. 현빙환이라는 약이 있는데 조울증을 치료하는 약이라 이 약을 복용하면 맥박이 여전히 이상하게 보일 걸세.”그제야 마음이 놓인 송석석이 다시 물었다.“그 전에 드신 약이 이미 심장을 손상시켰는데 거기에 이 현빙환까지 드시면 몸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겠습니까?”“큰 문제는 없을 것이네. 그래서 치료제로 이런저런 약을 많이 드리지 않았나?”단 신의의 말에 곁에 서있던 동동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그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왕야께 현빙환을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친위병 몇 명을 거느린 척귀가 임 태의와 오대반과 함께 북명 황실로 향했다.송석석은 며칠동안 공무를 내려놓기로 하고 모든 업무를 필명과 오진에게 맡겼다.시만자도 송석석을 통해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고 오늘 임 태의와 오대반이 저택에 왔다는 소식에 시만자는 괜히 어설픈 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나타나지 않았다.임 태의와 오대반은 이내 두 눈이 퉁퉁 부은 송석석을 만나게 되었고 오대반이 조심스럽게 위로했다.“왕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임 태의가 계시니 왕야께서도 조만간 호전될 것입니다.”“감사합니다.”송석석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한편, 척귀 등 친위병은 왕야와 왕비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기에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척귀는 침실 밖에 나타난 염구진을 보자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물었다.“염 선생, 폐하께서 왕야를 걱정하셔서 이렇게 소인을 보냈습니다. 혹시 왕야께서 예전에도 이런 질병을 앓으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왜 갑자기 쓰러지신 겁니까?”염구진은 척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왠지 모르게 마음속으로 짜증이 확 났고 요즘 따라 이런 감정을 자주 느끼는 것 같았다.그는 황제의 이러한 조사가 결국 불신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염구진은 짜증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왕야께서 이토록 바쁘신데 쓰러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언젠가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낮에는 대리사에서 공무를 처리하시고 저녁에는 잡다한 일로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조정에 참석하시느라 한 시간도 채 못 주무시는데 몸이 어떻게 건강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노주로 가셨을 때 산속에 숨어 지낸 탓에 추위에 약해지셨고 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신 적이 없었지요.”척귀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어명을 받고 탐문하러 온 척귀는 지금 이 순간 북명왕이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으며 북명왕처럼 매일 바쁘게 살면 쓰러지지 않을 사람이 없
저녁쯤, 숙청제가 송석석을 궁으로 불렀고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송석석을 보며 숙청제는 사여묵이 아프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임 태의가 있으니 상황이 호전될 것이야.”숙청제의 말에 송석석은 영혼을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감사합니다, 폐하. 소인이 단 신의께 소식을 전했으니 단 신의께서도 곧 돌아오실 겁니다. 단 신의에게 좋은 약이 있으십니다.”“단설환을 얘기하는 것이냐?”숙청제도 단설환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으며 진성에 있는 황족과 세가들은 돌발 상황을 대비하여 한두 알 정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2년 전부터 이 약은 거의 판매를 하지 않았기에 매우 귀한 약이 되었다.“네.”“단 신의는 언제쯤 돌아올 수 있다고 하더냐? 그 약을 약왕당에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냐?”숙청제의 물음에 송석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아무리 빨라도 삼일 정도는 걸릴 것입니다. 약왕당에도 현재 이 약을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홍작한테서 들었는데 단 신의께서 단설환 두 알을 가지고 계신다고 합니다.”“그럼 단설환 외에는 다른 약이 없느냐?”숙청제는 단설환의 약효가 좋다는 건 인정하지만 들리는 소문처럼 그리 신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저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하다고 여겼다.“다른 약은 약효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머뭇거리던 송석석은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전북망 장군님 모친께서도 심각한 심장 질병으로 거의 사망하시기 직전이셨는데 단설환을 드시고 목숨을 부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로 매달 단설환 한두 알씩 드셨다고 하는데 효과가 확실했다고 합니다.”숙청제도 이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망자를 언급하는 건 재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내 송석석을 위로했다.“임 태의한테서 들었는데 상황이 조금은 호전되고 있으니 치료를 받고 충분히 휴식하면 곧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네, 폐하. 오늘 임 태의가 계셔서 너무 다행이었습니다.”송석석의 눈시울은
어서방에서, 임 태의가 허리를 숙인 채 황제에게 사여묵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두 시간 전, 대리사 소경 진이가 북명왕의 옥패를 들고 태병원으로 달려와 북명왕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외쳤다.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숙청제도 이내 보고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소인이 보기엔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의심됩니다. 상황이 매우 위험한데 소인이 도착했을 때 왕야는 이미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계셨습니다. 침술을 몇 번이나 사용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셨는데 제대로 걷지 못하셔서 마차에 태워 황실로 보내 드렸습니다.”“왜 갑자기 발작을 한 것인가? 전에는 한 번도 이런 병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 없는 것 같은데.”숙청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며 속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찌 됐든 사여묵과 피를 나눈 형제였기에 평소에 의심하고 경계한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소인도 황실에 계신 염 선생한테서 들었는데 왕야는 얼마전 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했고 가끔 기침을 심하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가슴이 답답할 때도 있었는데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고뿔이 악화되면서 발작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숙청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조금 의심이 들기도 했다.“고뿔을 앓고 있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상태가 악화될텐데, 왜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것이냐?”“폐하, 염 선생께서는 왕야가 진성에 돌아온 뒤로부터 너무 바빠서 쉴 시간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고뿔 외에도 마음에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고뿔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뿔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평소에 풍채가 좋은 분들은 증상이 확실하게 티가 나지 않아서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잘 모릅니다. 왕야도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숙청제는 의학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그저 물을 수밖에 없었다.“그럼 이젠 조금 나아졌느냐?”“폐하, 왕야는 현재 상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충분한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절대 과로해서는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