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묵은 보좌관과 병풍 뒤에서 나와 먼저 송석석을 안고 사람들에게 방 마마를 데리고 나가라고 분부했다.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대추나무 아래에 상자가 있을 것이오. 거기에 그 여자들의 명단이 모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니 반드시 찾아야 하오.” “네.” 보좌관은 명을 받고 나갔다. 사여묵의 품에 안긴 송석석은 마음과 목이 악취로 가득한 솜으로 막힌 듯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부인. 더 이상 취조하지 마시오. 방 마마가 한 말은 잊으시오. 장인께선 잘못을 하지 않았소. 모두 장공주가 혼자만의 사랑에 빠져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친 것이오.” 송석석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얼굴이 창백해서 말했다. “난 괜찮아요. 계속 심문할 수 있어요. 방 마마가 정신을 차리면 내가 다시 천천히 물어보겠습니다. 적어도 그 여자들의 명단은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가족들에게 더 이상 찾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십시오. 죽었다는 걸 알았으니 더 이상 염 선생의 가족들처럼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겠지요.” 송석석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죽으면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실종된 것보다 더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게다가 우리는 방 마마의 입에서 장공주가 문엄 황제를 미워한다는 정보를 알았지 않습니까? 선제는 문엄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들이니 장공주가 문엄 황제에게 복수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선제가 살아 계실 때부터 그녀는 연왕과 역모를 꾸미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우리는 역모의 동기를 알아냈습니다.” 사여묵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송석석을 놓지 않고 말했다. “그래. 방금 얻어낸 정보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 더 이상 그녀를 심문하지 않아도 되오.” 그는 병풍뒤에서 석석이 괴로워서 주먹을 꽉 쥐고 참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장인어른은 석석 마음속의 영웅이야. 그런데 엉뚱한 사랑싸움에 말려들어 희생한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욕을 먹다니, 석석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고청란은 시만자를 보고 놀랐지만 그들이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을 하자 다소 불쾌했다. 계획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속인 건 속인 것이기 때문에 고청란은 최소한의 예의밖에 유지할 수 없었다. “시 아가씨,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시만자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청란이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말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고청란은 몸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고청란은 그들에게 속은 게 화가 났지만 그들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아버지에게 가서 말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팔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초라한 오두막집에는 작은 부엌과 안방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을 길 수 있는 우물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햇빛이 기왓장 사이로 스며들었다. 보나 마나 기와지붕이 낡아 장기간 수리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폭우가 쏟아지면 이 집 안은 물바다가 될 것이 뻔했다. 시만자는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좁은 집에서 흔들리는 걸상에 앉아 머리 위에 햇빛까지 내리쬐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고청란이 그의 어머니를 부축하러 갈 때 지붕으로 날아올라 갔다. 그녀는 기와가 밀린 것이면 제자리로 조정하려고 했는데 올라가 보니 이미 기와들이 깨져 있어서 수리를 하려면 기와를 좀 사 와야 했다.고청란은 림봉아를 부축해 나와서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시만자를 보고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가씨, 지붕에는 왜 올라간 겁니까?” “기와가 깨진 것 보지 못했습니까? 비가 오면 곤란합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밤에 바람이 들어와 겨울에 고생일 것입니다.” 그러자 고청란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사람 찾아 수리하겠습니다.” “그래요. 수리해야지요.” 그녀는 림봉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말했다. “어머님은 왜 모시고 나왔습니까? 어서 부축해서 눕히십시오.” 림봉아는 시만자에게 절하며 말했다. “시 아가씨와 북명왕
시만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왜 그러는 것입니까? 당신의 어머니는 림씨 집안의 딸이고 당신은 그들의 외손녀인데 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까?”그러자 고청란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말했다.“조용히 하십시오. 어머니가 듣겠습니다.”그러자 시만자가 말했다.“차라리 나가서 얘기합시다. 마침 홍작의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홍작의사는 당신들이 림씨 가문에 있는 줄 알고 있을 테니 그쪽으로 가서 기다립시다.”두 사람은 문을 열고 나갔다. 시만자는 몇 걸음 걷고 뒤돌아보며 물었다.“이 집은 림씨 가문에서 당신들에게 준 겁니까?”고청란은 담담하게 말했다.“원래는 세를 놓았었는데 너무 낡아서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자 우리에게 잠시 머물라고 한 겁니다. 사건이 해결되면 우리를 데리고 림씨 가문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더군요.”시만자가 물었다.“당신은 그 말을 믿습니까?”“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저희 모녀도 마땅히 갈 곳이 없고 해서 일단은 여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틀 후에 저는 일을 찾으러 나갈 것이예요. 돈을 벌면 머무는 곳을 바꿀 것이고요.”“일거리를 찾으러 나간다는 말입니까? 무슨 일을 찾으려는 겁니까?”시만자가 물었다.그녀의 물음에 고청란은 눈살을 찌푸렸다.“내가 무공을 좀 하니까 원래는 부잣집에 가서 시녀로 일하려고 했는데 내 출신으로서는 아무도 나를 쓰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습니다. 정 안 되면 길거리에서 재주를 팔든 부두에 가서 심부름이라도 해야지요. 그래도 나에겐 힘이 남아있으니까요.”시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당신의 무공은 형편없지만 힘은 있으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짐 심부름꾼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습니까?”고청란은 시만자를 보며 성격이 정말로 직설적이라고 생각했다.“수입은 보통입니다. 내가 예전에 알아봤는데 아무래도 힘을 쓰는 일이니 찻집과 술집에서 반찬을 나르는 것보다는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더군요.” 시만자는 부귀한 가문의 아가씨지만
시만자는 화를 내는 고청란을 보며 왠지 산에서 내려와 석석과 전쟁터에 나가고 다시 진성으로 돌아와 많은 일을 겪다 보니 인내심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고청란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바로 자리를 떴을 텐데 말이다. 그녀는 원래 독단적이었는데 지금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젠 시만자는 고청란의 분노와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줄곧 친척에게 이용당해 왔을 뿐만 아니라 근 몇 년 동안 조금의 신뢰도 받지 못했다. 고부진과 어머니, 그리고 언니를 가족으로 생각해 왔는데 고부진은 자신을 배신했고, 이젠 언니마저 어머니를 해하려고 했다고 하니, 그것도 외부인이 말하니 당연히 믿지 않을 만도 했다. 시만자는 화를 내지 않고 계속 말했다. “당신이 믿든 말든 이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공주부의 의원이 거짓증언을 했다해도 대리사 사람들을 속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언니가 공주부의 의원을 이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와 잠자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고청란은 온몸을 떨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만하십시오. 어떻게 우리 언니를 그렇게 모욕할 수 있습니까? 언니가 명기라서 그러는 것입니까? 언니도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언니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왜 당신들마저 그를 모욕하고 우리 세 모녀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시만자가 말했다. “그래요. 믿거나 말거나, 그건 당신의 선택입니다. 나는 알려줬으니 내 도리를 다 한 겁니다. 나중에 장사를 하려 거든 언제든지 나한테 은냥을 빌리러 오십시오. 우리 사이에 친분을 봐서 내가 은 300 냥은 빌려줄 수 있습니다.” 시만자는 친구를 대할 때 항상 돈으로 관계를 계산했다. 이것은 시씨 가문의 관례인데 어떤 큰 인물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석석에겐 한도가 없어 그녀에게 빌려주든 그저 주든 말만 하면 모두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몽동이에겐 오늘 아침 이 주먹으로 인해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청란과는 함께 일을 했었으니
고청란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하지만 시만자는 그녀를 위로하지 않고 홍작이 오는지 골목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청란은 한참 울다가 말했다. “그날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오는 마차에서 어머니는 저에게 언니의 어떤 말도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언니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내 말을 믿는 것인가?’ 시만자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겁니까? 그럼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네요. 당신 언니가 왜 그랬는지는 당신 어머니에게 물어보십시오.” 홍작이 당나귀를 타고 골목으로 들어서자 시만자가 얼른 손을 흔들며 소치 쳤다. “홍작, 여기입니다.” 홍작은 그들을 보고 왜 림씨 가문 앞에서 기다리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당나귀를 타고 다가와서 물었다. “왜 여기 있는 것입니까?” “고청란과 어머님은 림씨 가문에 살지 않고 저쪽에 있어요.” 시만자는 고청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의 병세가 아주 심각합니다. 석석이 바쁜 와중에도 당신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 주라고 당부했으니 그녀의 호의를 저버리는 것은 상관없지만 자신의 감정 때문에 어머니를 해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홍작은 눈시울이 붉어진 고청란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치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고청란은 얼른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선생님. 저 따라오십시오.” “그래요. 나는 돌아갈 테니 둘이서 가십시오.”시만자는 마음속에 오기가 치밀어 올라 더 이상 고청란과 다투기 싫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투가 좋지 않아 고청란 모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기 싫었고 자신을 억울하게 하기 싫었다.고청란은 손을 뻗어 시만자의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시 아가씨, 방금은 제가 잘못했으니 화내지 마십시오. 저는 단지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입니다.”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며 부서질 듯한 눈빛으로 말했
문 밖으로 나오자 홍작은 더 이상 청란을 속이지 않고 말했다. “방금은 당신의 어머니가 계셔서 말하기가 곤란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한 달만 더 일찍 치료받았어도 지금처럼 악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잘 돌봐 주도록 하십시오.” 고청란은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방금 까지만 해도 그녀는 시만자의 말을 의심했는데 이젠 믿었다. ‘어머니가 지하감옥에서도 약을 드셨는데 이제 보니 폐병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었어. 장공주부의 의원은 의술이 뛰어나 정말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면 분명 좋아졌을 것인데. 그런데 언니가 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그녀는 멍하니 처방과 은표를 움켜쥐었다.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 마냥 흘러내렸다. 홍작은 세상의 애환에 익숙해져 말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일이 다 이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신이 강해지는 것만이 답인 것 같습니다.” 홍작은 당나귀를 타고 떠났다. 시만자도 함께 떠나려고 했지만 고청란의 모습을 본 그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를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어쨌든 당신 어머니는 당신이 돌봐야 하지 않습니까?” 고청란은 손에 쥔 은표와 처방을 모두 바닥에 내팽개치고 방으로 뛰어들어가 림봉아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고통스럽게 물었다. “어머니, 말해보십시오. 언니가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림봉아는 잠깐 멍해졌다가 바로 고청란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챘다. 그녀는 한참 동안 멍해 있다가 침울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청란아, 사람이라면 힘든 순간이 오기 마련이지. 네 언니가 정말 힘든가 보구나. 내가 너더러 언니를 멀리하라는 것도 네가 언니를 이해했으면 해서 한 말이었단다. 그녀는 전에 장공주에게 벌을 받은 적이 있단다. 그러니 그녀에게도 그녀만의 고통이 있는 것이겠지.” “그건 진짜 이유가 아닙니다. 나는 황실의 믿음을 얻었다고 언니에게 말했었습니다. 언니도 우리가 성공적으로 어머니를 구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고요. 그런데 왜…언니는 왜
떠나는 시만자는 화가 나면서도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그들 모녀는 장공주가 해친 수많은 여인들 중 일부일 뿐이다. 다행히도 가장 비참한 자들은 아니었기에 이렇게 장공주의 저택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지만, 그들 외 많은 이들은 이미 백골이 되어버렸다.그러니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풀리지 않을 원한이다.송석석은 아직 대리사에 있었다. 깨어난 방 마마는 국을 몇 모금 들이킨 후 다시 심문실로 보내졌다.사여묵이 더는 심문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송석석은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여전히 똑같은 심문실이었으나, 이번에는 보좌관이 없었고 사여묵이 병풍 뒤에 앉아 있었다.송석석과 방 마마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송석석은 안색이 어두워지고 눈빛에서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쓴웃음과 한숨뿐이었다. "하.. 어찌하여 또 묻는 것이오? 그대는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오? 내게 장공주의 반역을 증언이라도 하라는 것이오? 그대들은 이미 지하 감옥에서 증거들을 찾아냈으니 그 어떤 자백도 필요 없지 않소? 폐하께서도 절대 넘어가지 않을 것인데 어찌하여 나를 괴롭히는 것이오? 어찌하여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 하는 것이오? 만약 죄를 저질렀다면 벌은 반드시 받을 것인데 굳이 이럴 필요 있소?" 송석석은 다시 물었다. "그녀가 받을 응보가 무엇을 상쇄할 수 있겠느냐? 또 무엇을 돌릴 수 있냔 말이냐? 저지른 악행은 영원히 그녀 곁에 남아있을 것이고, 죽은 자들은 결코 부활하지 않는다. 너는 그녀가 불쌍하다고 여기지만 그저 내 아버지에게 거절당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존귀한 삶이지 않았느냐? 누군가는 평생을 바라는 것을 그녀는 쉽게 얻었다. 누군가는 모든 것을 바쳐서도 장공주의 저택에 있는 탁자 하나마저 사지 못한다." "그녀는 하늘이 내린 행운아라 끝없는 복과 부를 지닌 채 이생을 순탄하게 살 수 있었느니라. 유일한 상처는 누군가를 원했지만 얻지 못했을 뿐이다. 내 아버지를 사랑했다고
방마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장공주가 결코 소봉아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오직 자신의 억울함뿐이였다. 만약 그녀가 송회안과 혼인해 한 번이라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천지가 무너질 듯한 큰 소동을 일으켰을 것이다.송석석은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그대는 첩들은 천하기에 고구한 장공주가 무엇을 하든 모두 은혜라고 하였구나. 그럼 그런 은혜를 내가 그대에게 하사한다면 어떨 것 같으냐? 내가 너의 사지를 잘라내더라도 너는 기꺼이 바칠셈이냐?" 방 마마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그대가 천하다고 말한 첩들도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자들이다. 부유한 가문이든, 평범한 가문이든 간에 그녀들의 부모 역시 그대가 장공주를 사랑하듯 자신의 자식들을 사랑했을 것이니라. 하지만 그런 그녀들이 납치당해 장공주 저택에서 조용히 죽어갔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녀들이 감사해야 한다 여기느냐? 너무 무서운 세상이라 생각하지 않느냐? 영혼이란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장공주 저택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매년 한의절에 그토록 영혼을 위로하려 했던 모양이구나. 너는 죽은 첩들과 어린 남아들을 꿈속에서 보지 못했던 것이냐?" 방 마마의 손이 갑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송석석의 차가운 눈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생명을 경외하거라." 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를 뜨자 사여묵도 병풍 뒤에서 나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방 마마를 감옥으로 돌려보내라고 명하였고, 그렇게 방 마마는 비틀거리며 끌려 나갔다. 그녀의 굽은 등은 더 이상 예전의 위엄을 조금도 간직하지 못하였다.송석석이 사여묵에 말했다."며칠 기다렸다가 그녀를 다시 심문해야 할 것입니다. 그녀가 고부진의 딸들이 어디로 갔는지, 장공주가 전에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의 행방과 수없이 교체된 경비와 하인들이 생사를 알고 있을 것입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