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마치 오래된 우물처럼 고요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송석석을 노려보았다. 송석석도 그녀를 보았다. 예전에 장공주부에 갔을 때 송석석은 방 마마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방 마마는 석청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 위엄이 가득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남색 옷은 쭈글쭈글했고 비녀는 비뚤어져 귀밑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리고 눈 밑은 처져 있었으며 얼굴은 여위고 반점도 뚜렷했다. 근심걱정에 단식까지 해서 이렇게 초췌해진 것이었다.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죽음을 기다리는 듯했지만 사실 그녀의 애간장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진이는 방 마마와 이야기를 하러 갔었지만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눈빛조자 주지 않았다. 하지만 송석석에게는 입을 열었다. “내 입에서 공주에게 불리한 말을 들을 생각 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도준이 당신이 우리 당숙 일가를 구했다고 하던데, 당신이 아니었으면 아마 우리 당숙 일가는 없어졌을 것이네. 그것만은 고맙소.” 방 마마는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난 그들을 살리려는 마음 없었습니다. 내가 사람을 보내 그들을 잡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죽이든 말든, 그리고 언제 죽이는 것은 모두 내 결정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멀쩡히 살아서 장공주부에서 나왔소.” 그러자 방 마마는 차갑게 말했다.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그래봤자 장공주의 증언을 해달라는 것 아닙니까?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지 마십시오. 공주는 죄가 없습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든 건 나와 도준이 한 것입니다.” “방 마마는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이오?” 송석석은 그녀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공주부엔 말하지 못할 일이 많지 않소?” “뒤뜰에 있던 여인들 말입니까? 흥.” 방 마마는 원통스러운 눈빛으로 송석석을 보며 말했다. “모든 사람이 공주부를 비난할 자격이 있지만 송씨 가문만은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의 부친이 공주님의 평생을 망쳤습니다. 그리고 뒤뜰에 있던 여인들도 모두
송석석은 방 마마의 말들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좀 슬프다고 생각했다. 방 마마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확실했다. 송석석은 방 마마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장공주 몰래 당숙 일가를 풀어준 것을 보면 마음가짐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건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그래. 모든 것이 방 마마와 도준이 한 것이라면 장공주와는 무관하니 근 몇 년 동안 당신의 손을 거쳐 장공주부로 데려온 여인은 몇 명이고 죽은 사람은 얼마인지 말해보시오.” 방 마마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안색이 창백해졌다. 송석석은 계속 말했다. “그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방 마마가 책임져야 하지 않소? 그리고 끌려온 여인들의 부모나 친척들에게도 더 이상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고 알려야 하지 않겠소? 게다가 장공주께서 모역죄를 지었으니 죽음은 면치 못할 것이오. 그러니 당신이 그 여인들의 신분을 밝히는 것도 장공주를 위해 덕을 쌓는 것이나 다름없소.” 방 마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송석석을 올려다보더니 입술을 심하게 떨었다. 배가 고파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고 그녀의 모역죄 때문일 수도 있었다. 송석석은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방 마마의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 한 잔 주시겠습니까?” 탁자 위에는 차 주전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건 송석석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송석석은 마시지 않고 차 한 잔을 따라서 방 마마에게 건네며 말했다. “드시오.” 방 마마의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이 부들부들 떨며 차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나서 잔을 손에 쥐며 송석석에게 우는 것보다 더 보기 흉한 웃음을 지었다. “나에게 모든 사람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보아하니 대리사에서도 장공주부를 샅샅이 뒤졌겠지요. 내 방 앞에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대추나무 가장자리에 돌의자가 하나 있습니다. 그
방 마마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화를 참으며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그녀의 말을 계속 들었다. 왜냐하면 방 마마가 말을 많이 할수록 자백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증언들은 나중에 장공주를 심문할 때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모역죄든 여자들을 살해한 죄든 그녀는 결국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었다. “이번에는 장공주가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도 예전에는 명랑하고 활발하며 존귀하기 그지없는 아가씨였습니다. 천하의 남자들이 줄을 서서 선택해 주기를 기원하는데 하필이면 송회안이라는 무부에게 첫눈에 반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게다가 하필이면 송회안의 마음속에 장공주의 자리가 눈곱만큼도 없었지요. 처음엔 나도 그저 장공주가 즐거웠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추억에 잠긴 방 마마는 마음속에 담아둔 말이 너무 많아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마음이 약해진다더니 예전에 했던 일들을 생각하니 후회가 파도같이 몰려왔다. 그녀는 순서가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그녀는 공주이니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문엄 황제가 자신의 행복을 손수 꺾었다고 문엄 황제를 욕했었지요. 장공주는 문엄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딸이었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무릎을 꿇고 빌어도 문엄 황제는 동의하지 않았지요. 참 모질기도 했었지요.” “애초에 의귀비가 살아 계실 때 문엄 황제는 그녀의 부탁이라면 반드시 들어주셨는데 고작 무부인 송회안 때문에 공주의 부탁을 거절하다니. 세상에 무공을 익힌 사람이 많고 많은데 왜 하필 송회안이어야만 나라를 지킬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설령 정말 그렇다고 해도 부마로 세우고 계속 군대를 거느리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부마가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던 선례도 깨트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공주를 위해서라면 선례를 깨트리는 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살면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바로 송회안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사여묵은 보좌관과 병풍 뒤에서 나와 먼저 송석석을 안고 사람들에게 방 마마를 데리고 나가라고 분부했다.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대추나무 아래에 상자가 있을 것이오. 거기에 그 여자들의 명단이 모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니 반드시 찾아야 하오.” “네.” 보좌관은 명을 받고 나갔다. 사여묵의 품에 안긴 송석석은 마음과 목이 악취로 가득한 솜으로 막힌 듯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부인. 더 이상 취조하지 마시오. 방 마마가 한 말은 잊으시오. 장인께선 잘못을 하지 않았소. 모두 장공주가 혼자만의 사랑에 빠져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친 것이오.” 송석석은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얼굴이 창백해서 말했다. “난 괜찮아요. 계속 심문할 수 있어요. 방 마마가 정신을 차리면 내가 다시 천천히 물어보겠습니다. 적어도 그 여자들의 명단은 알아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가족들에게 더 이상 찾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십시오. 죽었다는 걸 알았으니 더 이상 염 선생의 가족들처럼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겠지요.” 송석석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죽으면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실종된 것보다 더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게다가 우리는 방 마마의 입에서 장공주가 문엄 황제를 미워한다는 정보를 알았지 않습니까? 선제는 문엄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들이니 장공주가 문엄 황제에게 복수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선제가 살아 계실 때부터 그녀는 연왕과 역모를 꾸미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우리는 역모의 동기를 알아냈습니다.” 사여묵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송석석을 놓지 않고 말했다. “그래. 방금 얻어낸 정보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 더 이상 그녀를 심문하지 않아도 되오.” 그는 병풍뒤에서 석석이 괴로워서 주먹을 꽉 쥐고 참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장인어른은 석석 마음속의 영웅이야. 그런데 엉뚱한 사랑싸움에 말려들어 희생한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욕을 먹다니, 석석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고청란은 시만자를 보고 놀랐지만 그들이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을 하자 다소 불쾌했다. 계획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속인 건 속인 것이기 때문에 고청란은 최소한의 예의밖에 유지할 수 없었다. “시 아가씨,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시만자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청란이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말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고청란은 몸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고청란은 그들에게 속은 게 화가 났지만 그들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아버지에게 가서 말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팔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초라한 오두막집에는 작은 부엌과 안방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을 길 수 있는 우물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햇빛이 기왓장 사이로 스며들었다. 보나 마나 기와지붕이 낡아 장기간 수리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폭우가 쏟아지면 이 집 안은 물바다가 될 것이 뻔했다. 시만자는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좁은 집에서 흔들리는 걸상에 앉아 머리 위에 햇빛까지 내리쬐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고청란이 그의 어머니를 부축하러 갈 때 지붕으로 날아올라 갔다. 그녀는 기와가 밀린 것이면 제자리로 조정하려고 했는데 올라가 보니 이미 기와들이 깨져 있어서 수리를 하려면 기와를 좀 사 와야 했다.고청란은 림봉아를 부축해 나와서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시만자를 보고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가씨, 지붕에는 왜 올라간 겁니까?” “기와가 깨진 것 보지 못했습니까? 비가 오면 곤란합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밤에 바람이 들어와 겨울에 고생일 것입니다.” 그러자 고청란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사람 찾아 수리하겠습니다.” “그래요. 수리해야지요.” 그녀는 림봉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말했다. “어머님은 왜 모시고 나왔습니까? 어서 부축해서 눕히십시오.” 림봉아는 시만자에게 절하며 말했다. “시 아가씨와 북명왕
시만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왜 그러는 것입니까? 당신의 어머니는 림씨 집안의 딸이고 당신은 그들의 외손녀인데 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까?”그러자 고청란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말했다.“조용히 하십시오. 어머니가 듣겠습니다.”그러자 시만자가 말했다.“차라리 나가서 얘기합시다. 마침 홍작의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홍작의사는 당신들이 림씨 가문에 있는 줄 알고 있을 테니 그쪽으로 가서 기다립시다.”두 사람은 문을 열고 나갔다. 시만자는 몇 걸음 걷고 뒤돌아보며 물었다.“이 집은 림씨 가문에서 당신들에게 준 겁니까?”고청란은 담담하게 말했다.“원래는 세를 놓았었는데 너무 낡아서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자 우리에게 잠시 머물라고 한 겁니다. 사건이 해결되면 우리를 데리고 림씨 가문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더군요.”시만자가 물었다.“당신은 그 말을 믿습니까?”“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저희 모녀도 마땅히 갈 곳이 없고 해서 일단은 여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틀 후에 저는 일을 찾으러 나갈 것이예요. 돈을 벌면 머무는 곳을 바꿀 것이고요.”“일거리를 찾으러 나간다는 말입니까? 무슨 일을 찾으려는 겁니까?”시만자가 물었다.그녀의 물음에 고청란은 눈살을 찌푸렸다.“내가 무공을 좀 하니까 원래는 부잣집에 가서 시녀로 일하려고 했는데 내 출신으로서는 아무도 나를 쓰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습니다. 정 안 되면 길거리에서 재주를 팔든 부두에 가서 심부름이라도 해야지요. 그래도 나에겐 힘이 남아있으니까요.”시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당신의 무공은 형편없지만 힘은 있으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짐 심부름꾼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습니까?”고청란은 시만자를 보며 성격이 정말로 직설적이라고 생각했다.“수입은 보통입니다. 내가 예전에 알아봤는데 아무래도 힘을 쓰는 일이니 찻집과 술집에서 반찬을 나르는 것보다는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더군요.” 시만자는 부귀한 가문의 아가씨지만
시만자는 화를 내는 고청란을 보며 왠지 산에서 내려와 석석과 전쟁터에 나가고 다시 진성으로 돌아와 많은 일을 겪다 보니 인내심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고청란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바로 자리를 떴을 텐데 말이다. 그녀는 원래 독단적이었는데 지금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젠 시만자는 고청란의 분노와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줄곧 친척에게 이용당해 왔을 뿐만 아니라 근 몇 년 동안 조금의 신뢰도 받지 못했다. 고부진과 어머니, 그리고 언니를 가족으로 생각해 왔는데 고부진은 자신을 배신했고, 이젠 언니마저 어머니를 해하려고 했다고 하니, 그것도 외부인이 말하니 당연히 믿지 않을 만도 했다. 시만자는 화를 내지 않고 계속 말했다. “당신이 믿든 말든 이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공주부의 의원이 거짓증언을 했다해도 대리사 사람들을 속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언니가 공주부의 의원을 이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와 잠자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고청란은 온몸을 떨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만하십시오. 어떻게 우리 언니를 그렇게 모욕할 수 있습니까? 언니가 명기라서 그러는 것입니까? 언니도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언니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왜 당신들마저 그를 모욕하고 우리 세 모녀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것입니까?” 그러자 시만자가 말했다. “그래요. 믿거나 말거나, 그건 당신의 선택입니다. 나는 알려줬으니 내 도리를 다 한 겁니다. 나중에 장사를 하려 거든 언제든지 나한테 은냥을 빌리러 오십시오. 우리 사이에 친분을 봐서 내가 은 300 냥은 빌려줄 수 있습니다.” 시만자는 친구를 대할 때 항상 돈으로 관계를 계산했다. 이것은 시씨 가문의 관례인데 어떤 큰 인물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석석에겐 한도가 없어 그녀에게 빌려주든 그저 주든 말만 하면 모두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몽동이에겐 오늘 아침 이 주먹으로 인해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청란과는 함께 일을 했었으니
고청란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하지만 시만자는 그녀를 위로하지 않고 홍작이 오는지 골목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청란은 한참 울다가 말했다. “그날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오는 마차에서 어머니는 저에게 언니의 어떤 말도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언니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내 말을 믿는 것인가?’ 시만자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겁니까? 그럼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네요. 당신 언니가 왜 그랬는지는 당신 어머니에게 물어보십시오.” 홍작이 당나귀를 타고 골목으로 들어서자 시만자가 얼른 손을 흔들며 소치 쳤다. “홍작, 여기입니다.” 홍작은 그들을 보고 왜 림씨 가문 앞에서 기다리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당나귀를 타고 다가와서 물었다. “왜 여기 있는 것입니까?” “고청란과 어머님은 림씨 가문에 살지 않고 저쪽에 있어요.” 시만자는 고청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의 병세가 아주 심각합니다. 석석이 바쁜 와중에도 당신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 주라고 당부했으니 그녀의 호의를 저버리는 것은 상관없지만 자신의 감정 때문에 어머니를 해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홍작은 눈시울이 붉어진 고청란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치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고청란은 얼른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선생님. 저 따라오십시오.” “그래요. 나는 돌아갈 테니 둘이서 가십시오.”시만자는 마음속에 오기가 치밀어 올라 더 이상 고청란과 다투기 싫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투가 좋지 않아 고청란 모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기 싫었고 자신을 억울하게 하기 싫었다.고청란은 손을 뻗어 시만자의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시 아가씨, 방금은 제가 잘못했으니 화내지 마십시오. 저는 단지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입니다.”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며 부서질 듯한 눈빛으로 말했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