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에서는 오늘 극단까지 배치해 있었다. 친왕비를 대접하는 것이니 격이 낮아서는 안 되니 필요한 것은 모두 불러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물어보자 아무도 연극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들은 저녁까지 남아 있었는데, 측비 김 씨가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저희 왕야께서는 줄곧 연주에 계셔서 진성에 온 적이 아주 드뭅니다. 그래서 저희도 진성에 늘 친구가 없었는데, 오늘 부인과 얘기를 나누어 보니 너무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 또한 저희의 인연이겠지요. 그러니 며칠 후에 모두들 연황실에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마침 우리와 함께 진성으로 온 무상 선생이 상국의 유명한 점쟁이인데 앞날의 길흉을 기가 막히게 알아맞힌답니다.” 그러자 노부인은 깜짝 놀랐다. “무상 선생 말입니까? 상국에 그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인데 왕비가 추천해 주신다면 저희야 감사하지요.” 측비 김 씨가 웃으며 그녀의 말에 응했다. “노부인, 그럼 그렇게 결정합시다.” 하지만 최 씨는 곧이어 얼굴이 굳었다. ‘그렇게 왕래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은 두 집안의 관계가 친밀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두어서는 절대 안 돼.’ 최 씨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가장 서투른 방법으로 이 자리에 남게 되었지만 측비 김 씨의 초대에 시어머니까지 이미 응해버린 마당에 다시 가지 않는다고 하면 미움을 받을 것 같았다. 미음을 사는가? 아님 남의 입에 오르내리겠는가? 그녀는 잠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순간 북명왕비의 말이 떠올랐다. ‘북명왕비께서는 될수록 복잡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좋다고 하셨지. 그렇다면 미음을 살까 봐 두려워할 것도 없지.’ “어머님, 측비께서 그저 하는 말씀이십니다. 어떻게 정말 폐를 끼치겠습니까? 지금 영태비가 앓고 있어 왕야님과 왕비님이 모두 입궁해서 시중을 들어야 하니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방문하더라도 영태비가 다 나은 후에 가야지요. 왕야님의 효도를 방해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노부인은 자신의 며느리가 얼마나 예의 바
하지만 사람이 대리사에 갇혔는데 어찌 쉽게 풀려날 수 있겠는가? 노부인이 단식하니, 소문이 퍼져 승은백부가 불효를 저지른다는 말이 돌까 두려워, 그들은 비록 가능성이 희박한 줄 알면서도 황제에게 가서 애원했다. 승은백부도 나름대로 인맥이 있었기에 그에게 전해진 말은 단 한 가지였다. 오직 황제가 그를 용서하고 그를 놓아주기를 원한다면, 량소를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승은백부의 사람들 중 감히 황제에게 찾아갈 사람은 없었다. 모두 그럴 낯짝도 없었고, 두려워 나서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북명왕비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마침내 승은백부는 회왕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결국 대리사에서 량소를 끌어낼 때 회왕이 그를 도와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군주와 량소가 이혼하는 것을 원치 않는 듯했기에 그들 부부가 직접 군주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회왕은 이를 허락하였으나, 그가 직접 나설지는 승은백부의 사람들조차도 알 수 없었다. 회왕비는 원래부터 사란을 만나고 싶어 했었다. 이제는 명이 내려져 이혼은 피할 수 없는운명이 되었으니, 결국 사란을 집으로 데려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막 사란을 데리고 나서려던 찰나, 송석석이 마차에 가득 실은 많은 물건을 가져왔다. 그녀는 과거 서로 주고받았던 선물들을 돌려주러 온 것이었다. 마차에는 평범한 물건들부터 귀한 금은보화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는 오랜 자매 간의 정을 증명해 보였다. 진복과 이 씨 이모, 그리고 양 씨 이모의 기억에 따르면, 어머니가 회왕비에게 보낸 선물에는 금은보화도 있었고, 평범한 물건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단신의가 진북후부에 준 귀한 약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외상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는 약들이었는데, 아무래도 부친과 형이 전장에 나가 있었기에 많은 약을 준비하는 것이 좋았다.다양한 약들 외에도 몸을 보양하는 약이나 급한 상황에 쓸 수 있는 약도 있었으며, 그중에는
마차에 실려 온 물건들이 모두 희왕부의 정청 밖에 내려졌고,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물건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희왕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안색이 잿빛으로 질려 있었다. 송석석이 회왕비를 보며 입을 열었다."물건은 모두 돌려드렸습니다. 지금 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나중에 천천히 보셔도 상관없으니, 혹여 빠진 것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 알려주시지요. 어머니께서 희왕비께 드렸던 것도 모두 돌려주시길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제 기억엔 상당수가 약왕당의 약이었던 듯합니다." 희왕비는 차갑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약은 이미 다 써버렸네. 헌데 어찌 그 물건들을 돌려줄 수 있겠나? 네가 이렇게 한다면 네 어머니 마음만 상하게 할 뿐인 걸 모르더냐." 송석석이 대답했다. "어머니께서는 사란을 각별히 아끼셨습니다. 만약 어머니께서 왕비께서 사란을 이렇게 대하신 걸 아신다면, 아마도 왕비 마마와 자매의 인연을 끊으실 것입니다." 그러자 희왕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차올라 나지막이 물었다. "석석아, 네가 어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네 이모를 이렇게 모른 척하더니… 이제는 사촌과의 이혼을 강요하기까지… 내가 대체 너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이더냐? 네가 전북망을 떠날 때, 내가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더냐?" 송석석이 더는 얘기하기 싫은 듯 냉정하게 대답하였다."그런 이야기는 그만두시지요. 저는 그저 왕비께서 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희왕비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상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나와 제대로 이야기를 하려 하지도 않는구나. 우리 두 집안이 이렇게까지 갈라설 필요가 있느냐?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좋지 않아 보일 것이야… 그리고 네 외조부와 외조모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얼마나 상심하시겠느냐?" 하지만 송석석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회왕비가 사람을 시켜 물건을 꺼내 오기만을 기다렸다. 희왕비는 그녀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금도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끝내
송석석이 어찌 회왕비의 뜻대로 되게 하겠느냐. 그녀 역시 이미 체면을 가리지 않았고, 더는 회왕부와 승은백부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울분섞인 외침에도 송석석은 단호하게 말했다."량소가 첩을 사랑하고 본처를 멸시할 때, 사란이는 친정에 도움을 청했었습니다. 허나 왕비께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사란이에게 참고 견디라고만 했죠. 당당한 군주이자 세자의 정실인데 어찌 기생 같은 여인에게 굴복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는 왕실의 존엄을 어디에 두겠다는 뜻입니까? 또한, 사란이가 처음으로 량소에게 손지검을 당해 병상에 눕게 되었을 때도, 왕비께서는 량소를 꾸짖기는커녕, 단지 몇 가지 보양식을 승은백부에 보낸 뒤 그저 다시 참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란이는 량소의 마음을 돌리기를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사란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 또한 량소가 그녀를 계단 아래로 밀쳤기 때문입니다. 사란이가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을 때 부른 이는 저이지, 어머니인 왕비 마마가 아닙니다. 그리고 황상께서 이 일을 아시고 크게 노하셨죠. 그런데도 왕비께서는 딸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고 도리어 량소를 두둔하면서, 그 결혼을 유지하려 했지 않습니까. 왕비께서는 분명 사란이 이번에 죽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운 것이죠? 끝내 사란이를 죽게 만들어 연왕비처럼 청목암에서 고통 속에 비참하게 죽기를 바라는 것이죠?"그 말을 들은 회왕비는 얼굴빛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녀는 멍하니 있었는데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송석석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가차 없이 말할 줄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송석석이 마지막에 한 말은 의도적임이 분명했다. 아무도 연왕비의 일을 알지 못했기에 연왕부는 그 일을 철저히 감추고 있었고, 연왕비가 청목암에 간 것도 자진해서였다고 말했다. 또한, 청목암이 요양에 좋다고 칭찬 일색이었다. 연왕부는 바깥에 떠도는 소문들을 모조리 처리하였다. 심지어 연왕비가 낳은 두 딸조차 아버지를 보호하며 나섰다. 친
북명왕부, 서재염 선생이 상황을 보고한 후 자리에 앉아 천천히 차 한 모금 마셨다."승은백부가 회왕부에서 나온 후 바로 연왕부로 갔단 말이오?" 사여묵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흠, 역시 우리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군.. 이들은 모두 장공주와 한통속이었어.""이 회왕이란 자가 너무 깊이 숨어 있어서, 너무 주의깊게 보지 않았던 것 같소.”염 선생이 말했다."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남강 전장에서 시간을 보냈던 탓에, 경중의 많은 일을 모르고 있었군." "저들이 지금 권세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황제가 즉위할 때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군. 당시 성릉관에서 혼란이 있었고, 남강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며, 동시에 신황제가 즉위하였으니, 그때가 저들에게는 가장 좋은 기회였을 것이오."그러자 염 선생은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때가 비록 저들에게는 가장 좋은 기회였지만, 제왕에게는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니었소. 그러니 그런 번거로운 일을 스스로 떠맡을 리가 없지 않소. 어렵긴 하지만 상황이 혼란스러웠기에 저들이 성공할 가능성도 컸을 것이오. 이것이 바로 연왕이 야심이 큰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오. 황위를 원하면서도 명성과 민심까지도 원했소. 그래서 그는 이렇게 깊이 숨어 있었던 것이오. 만약 외적을 막고 있을 때 저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설령 황위를 차지하더라도 연왕은 반란을 일으킨 대역 죄인이 되었을 것이오. 무엇이든 다 얻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빈손으로 끝나기 마련이오. 아마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것이오." 사여묵은 염 선생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일단 계속 주시하는 게 좋겠소만. 왕비의 계획을 먼저 돕고 장공주 쪽을 뒤흔들어 보겠소. 참, 서경 쪽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소?”이것이 바로 염 선생이 오늘 두 번째로 보고해야 할 소식이었다. "수란키가 암살을 당하여 중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소. 그 전에도 몇 차례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피하지 못했소. 우리 사람을 그곳에 심을 수 있을 지는 모르겠군…""성공
사여묵은 이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지 못한다면 결코 혼인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알겠소, 이 일은 내가 왕비에게 한 번 이야기해보겠소. 허나 형님께서 이를 받아들일지 장담할 수는 없소. 사실 이 이야기는 좀 황당하게 들리오.”그러자 염 선생은 오히려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왕야께서는 그저 소인을 대신해 물어봐 주시면 됩니다. 안 된다고 해도 소인도 실망하지 않겠소이다.”“음, 알겠군.” 사여묵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문제들을 논의한 후 방으로 돌아갔다.이때 송석석 또한 마침 사란에게 다녀온 참이었다. 사여묵과 염 선생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놀란 기색이 역력하였다. “염 선생에게 어린 시절 실종된 여동생이 있었다니.. 의외입니다. 헌데 이미 홍시를 통해 평 사저에게 편지를 보냈다는데 좀 이상하지 않나요? 왜 직접 편지를 보내 묻지 않았을까요?”사여묵이 웃으며 대답했다. “염 선생께서는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분명히 구분하시는 분이오. 홍시를 통해 평 사저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왕부의 일이지만, 심 형님께 부탁드리는 일은 개인적인 일이니 중재자를 찾으신 것이오.”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대사 형님에게 편지를 보내 물어볼게요. 허나 대사 형님께서 지금 매산에 계신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분은 늘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하시니깐요.”사여묵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 지금쯤은 매산에 계실 거요. 사숙께서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셨으니, 당분간 매산에서 떠나는 이는 없을 거요.”이상하게도, 사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송석석은 여전히 그에 대한 경외심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그분을 떠올리며 긴장된 듯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저는 하산을 해서 혼인할 수 있었던 거네요.” “게다가 당신은 사숙의 유일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와 혼인했으니, 그분께서도 특별히 아끼실 거요.” 사여묵은 자랑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송석석은 믿기지 않아 잠시 멍해졌다. ‘내가 정말 그랬다고?’그녀는 그와 가까워지는 것을 거부한 적이 없었다. 매일 밤에도 그들은 가까이 지내며 함께 밤을 보냈다. 지금껏 그녀는 그의 가슴품을 떠난 적이 없었다.보주는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 들어 철이 덜 든 것 같은 송석석에게 직접 물었다."아씨, 왕야와 서로 예를 지키는 손님 같은 부부로 남고 싶으세요? 아니면 진정으로 은애하는 부부가 되고 싶으세요?""보주, 너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 아니더냐?" 송석석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니? 아님 열이라도 나는 거야?"보주는 그만 화가 나서 볼이 부풀어 오르며 눈도 동그랗게 뜬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씨, 어서 대답하시지요!"그러자 송석석은 어쩔 수 없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했는데, 이때 그녀의 이마 주변에 몇 가닥의 잔머리가 풀려나와 저녁 햇빛 아래서 반짝였다. "서로 예를 지키는 부부와 진정으로 서로를 은애하는 부부… 때론 둘 다 필요하지 않겠어? 사랑을 하면 서로 존중하지 않게 되는 거야? 굳이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해?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거니?""어?" 보주도 잠시 멍해졌다. 둘 다 가질 수 있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보주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때로는 아씨가 왕야의 감정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단 말이에요. 왕야께서는 아씨의 감정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잖아요. 그저 아씨도 그럴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거예요…”"내가 왜 신경 안 써? 나도 신경 쓰고 있단다.""뭔가 부족해요." 보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째 도련님과 둘째 마님께서는 서로를 진정으로 은애하셨어요. 둘째 도련님 부부처럼 아씨도 좀 노력을 하시란 말이예요!"송석석은 매산에서 돌아올 때마다 오빠와 새언니의 다정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걸을 때 손을 꼭 잡았고, 앉을 때도 꼭 옆에 앉았으며, 아무도 없을 때 그녀의 오빠는 새언니에게 몰래 입을 맞추기도
량소의 재판이 시작되었고, 먼저 영안군주와의 의절을 선고했다. 의절은 은혜를 베푼 승은백부의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그다음은 그가 본처를 학대하여 유산을 초래한 혐의였다. 특히, 낙태된 아이는 황실 군주의 신분을 지녔으며, 황제의 명령도 있었기 때문에 처벌이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대리사 소경은 량소에게 10년간 흉주로 유배를 보내어 흉주 관아의 관리하에 농지를 개간하며 고역을 치르도록 판결했다.재판장에서는 즉시 판결이 내려졌고, 다음 날부터 바로 형이 집행될 예정이었다. 그러자 승은백부도 더 이상 내려진 판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연왕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지만, 연왕은 태후 앞에서 그들의 가문을 위해 청원을 넣었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연왕은 이번에 량소만 처벌하고 그들의 작위는 박탈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했다. 더 소란을 피우면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경고를 한 것이다.량소가 유배형을 받았다는 사실은 태부인에게 알리지 않았다. 태부인은 단지 그가 감옥에서 고생하지 않는다고만 알고 있었고, 그를 보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 아이는 태부인의 마음속에서 가장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였기 때문이았다.량소가 떠나는 날이 오자 승은백부는 그를 배웅하러 나갔다. 하인이 실수로 말을 흘렸고, 그 소식을 들은 태부인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렸다. 이미 이틀간 단식을 했던 터라 몸이 약해져 있었고, 연로한 나이에다 분노와 슬픔이 겹쳐 결국 반신불수가 되어 입도 제대로 놀리지 못하고 구강마비까지 오고 말았다.한편, 아들인 량소를 배웅하러 간 승은백부부는 아직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성 밖에서 량소를 호송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아들이 족쇄를 차고 있는 모습을 보자, 과거 그의 의기양양한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초췌하고 겁에 질린 모습 뿐, 예전의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승은백부는 그런 그에게 급히 다가가 뇌물을 건네며 잠시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량소는 결국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애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
사여묵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침대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남강에서 돌아와 병권을 황제께 바친 뒤에도 황제는 여전히 사여묵을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사여묵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황제가 의심과 경계를 조금은 풀 수 있도록 사여묵은 지금까지 최대한 언행에 조심했으며 서경과의 담판이 끝나고 나서도 황제 앞에서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다.나중에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황제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사국이 이번에 다시 쳐들어온 건 사국과 손잡은 내국 역적이 남강에 이미 함정을 파 놓았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이오. 그래서 사국은 저렇게 겁도 없이 남강을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폐하는 내가 폐하께 대한 위협이 사국 병사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사여묵이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송석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황제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조금 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부터 계속 이렇게 숨막히는 인고를 견뎌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난 무조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을 놓아준 사여묵은 강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보탰다.“난 당신처럼 용감하게 변할 것이오.”예전에 송석석이 입궁하여 황제께 상황을 보고했을 때 황제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때 당시 송석석은 마냥 기다리거나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 홀로 남강까지 찾아갔다.송석석은 그때 자신의 생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한편, 사여묵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바로 뜻을 알아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전 장군님을 응원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폐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면 전 평소와 같이 진성을 지키고 있을 것이고 만약 폐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전 북명
사여묵이 방시원을 잘 달래어 돌려보낸 뒤, 염구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다들 감정이 격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남강 땅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 또 전쟁이 난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요.”말을 하던 염구진은 고개를 돌려 사여묵을 힐끔 쳐다보았으며 방시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사여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한편, 한참동안 말이 없던 사여묵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잘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소식이 들리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게.”“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사여묵은 다시 연주에 관한 일에 대해 물었다.“연주에서 성문을 봉쇄했다고 들었는데 소식은 끊기지 않은 것이오? 혹시 그쪽에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나?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가?”“아직 확실한 소식은 접하지 못했지만 소인은 모성을 믿습니다. 계획한대로 잘 하고 있을 겁니다.”“그래. 나도 그자를 믿네.”염구진의 대답에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성은 연주 좌부승이었고 연왕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여묵은 바로 사람을 시켜 모성에게 접근했다.총명하고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모성은 선황제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성격이 너무 오만했기에 아직까지도 직급은 그저 부승이었다. 평소에 시를 즐겨 쓰는 모성은 시문의 대부분 내용이 세상을 향한 불만 표시였기에 연왕은 모성이 조정에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그렇게 모성은 오랜 세월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 중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성은 연왕의 반역죄 증좌를 수집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연주에 남았다.하지만 연왕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않고 핵심 병력의 상황도 모성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모성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기도 했다.때문에 모성은 하상지의 잡일을 처리해주면서 간간이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확실한 증좌가 없는 탓에 모성은 지금까지도 연왕
”소인도 오늘 폐하께 감히 많은 얘기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봐 왕야를 찾아가지도 못했지요.”이덕회가 대답하자 목 승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잘하셨습니다. 병부는 최대한 사적으로 북명왕을 접촉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면 혹시 병사 감찰대로 폐하께 한 사람을 추천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왕표 그자가 남강 전쟁 원수를 맡기엔 걱정된다면 방시원 장군을 황제께 추천해보십시오.”“하지만 방시원 장군님은 주군 총병이라 남강 전쟁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 장군을 보낼 바에는 차라리 방천허와 제린에게 전사를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란이 터지고 있는 지금 진성 주군에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이덕회의 말에 목 승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도리는 그게 맞지요. 제 말은 폐하께 왕야 한 사람만 추천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더 추천하라는 뜻입니다.”이덕회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소인이 솔직한 성격이라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르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왕야가 가장 적합한 원수인데 어차피 역적은 아직 나라에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아니니까 나중에 목종욱한테 처리하라고 하면 되지요.”“그 어떤 반역자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반역자들은 사국 사람들과도 엮여 있습니다. 사국과 손을 잡았다는 건 그만큼 충분한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지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목 상승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덕회가 대답했다.“승상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소인 북명왕과 함께 내일 다시 궁으로 가서 폐하를 만나 뵙고 내란에 대해서도 의논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합시다!”목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사청엽은 여전히 옥에 갇혀 있었다. 황제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청엽은 자신이 사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이날 저녁, 혼인을 앞둔 방시원이 황실을 찾아왔다. 치석
한편, 목종욱은 최선을 다해 산적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싹을 다 자르진 못했지만 크게 겁을 먹은 산적들이 산 속에 꽁꽁 숨어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숙청제도 제린이 보낸 소식을 접했고, 사국 대군들이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제린은 사국 대군이 25만 명 정도 된다고 보고를 했고 여전히 빅토르가 대군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바로 병부 대신들을 불러 남강에서 사국의 25만 대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이덕회는 황제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폐하, 남강은 오랜 시간의 전사와 왜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남강 땅은 아직 전쟁에 버틸 수 있지만 백성들은 더 이상 전쟁을 견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정말 전쟁이 난다면 확실한 한 방으로 빠르게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매년 한 번씩 이렇게 날뛸 것입니다. 이는 저희 남강 지역의 치안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그럼 자네 생각엔 송씨 가문 병사들과 북명군이 적들을 신속하게 물리치지 못할 것 같은가?”숙청제의 물음에 이덕회가 바로 대답했다.“이제 송씨 가문 군대아 북명군을 나눌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남강 병사들입니다.”이덕회는 숙청제가 남강의 병사들을 모은 게 송씨 가문과 북명왕이라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강조했지만 숙청제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만약 남강 전쟁이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이고 사여묵이 병권을 상납한지 꽤 오래 됐다면 숙청제는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왕표가 군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남강에 있는 병사들이 송씨 가문 군대이든 북명군이든 결국 전부 사여묵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사여묵을 남강에 보낸다는 건 병권을 다시 사여묵에게 쥐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현재 연왕도 역모를 일으켰고 황제 자리를 대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
숙청제가 사여묵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건 사국이 네 위엄에 겁을 먹은 것이야. 빅토르가 너를 많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 살짝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황제께서 소인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고 빅토르도 소인에게 겁을 먹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전쟁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기 때문입니다.”“네 말대로 전쟁으로 많은 걸 잃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는 원기를 쉽게 회복할 수 없지 않느냐?”“소인이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사국은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절대 저희 남강이 순조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가끔씩 비열한 수법으로 훼방을 놓아야 정상인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게 너무 수상합니다.”숙청제가 사여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그럼 네 말은 누군가가 사국과 손잡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사여묵은 전에도 숙청제와 이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한 적이 있었으며 그때 당시 숙청제도 사여묵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숙청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여묵은 그런 황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사실 숙청제도 왕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국을 상대하려면 사여묵을 다시 남강 전장으로 내보내는 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숙청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그때 당시 겨우 송석석을 이용하여 사여묵에게서 병권을 빼앗았는데 이렇게 쉽게 다시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숙청제는 절대 사여묵을 전장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때문에 사여묵이 며칠동안 어서방에 남아 숙청제와 이런저런 상의를 해봤지만 숙청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어서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아무도 먼저
그날 밤, 연왕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솔직히 지금 상황은 연왕의 오랜 계획과 차질이 조금 있었다. 지방 지역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심지어 진성에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진성까지 쳐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연왕과 무상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일단 병사들을 일정한 수량까지 늘이고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진성 일대로 전이하여 병사들을 안치한 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그땐 사온이 진성에서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가들의 지지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고부진의 딸들을 세가에 시집 보냈기에 세가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나서 적절한 시기만 잘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 진성에 전란이 일어나고 산적과 유랑민들이 판을 칠 때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내로 쳐들어가 바로 궁 전체를 포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대석촌에 일이 터져 버려 사청엽이 체포된 탓에 연왕은 급하게 병사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승산이 너무 낮았기에 연왕도 망설였던 것이며 지방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진성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백성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수군거리겠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과 격문을 그저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국에서 남강을 공격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사국에서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야망을 보였기에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직 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패했다는 소식도 없기에 상국 무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하기에도 애매했다.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태평한 상황에서 연주도 꽤 부유한 땅이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모두 그저 연왕이 언제 잡히는지, 언제 역모죄로 목이 잘릴지를 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국에는 사국 사람들을 물리친 북명왕이 있기에 다들 역적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되레 연왕이 왜 역모를 일으키
무상이 아니라는 말에 연왕은 회왕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화들짝 놀란 회왕이 변명하려던 그때, 연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왕일 리는 없어.”회왕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연왕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묘했다.한편, 연왕은 당연히 회왕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회왕은 무일푼으로 연주로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성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따내지 못했으며 사온의 비교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회왕이 연주에 온 뒤로 연주 백성들은 회왕을 만나면 겉으로는 왕야라고 부르며 인사를 올리긴 하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아니꼽게 생각했다.때문에 회왕은 절대 마총우를 명령하지 못한다.조금씩 차분해진 연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총우 그자가 귀순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인가?”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무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마총우가 귀순한 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왕야께서 격문을 보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희 병력은 대여섯 군데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전의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는데 조정에서 절대 쉽게 조사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마총우 그자를 찾아서 귀순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날 일부러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그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연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왕이 몇 년 동안 끌어 모은 사람들 중에 황제의 친인척과 세도가들도 있지만 친왕은 연왕과 회와 두 사람밖에 없었다.연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연왕의 부하들 중에서 황제의 친인척들이 제일 무능하고 멍청했으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의심되는 상대는 여전히 무상이었다.하지만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연왕이 무상을 끌어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무상은 강한 충성심을 보였고 심지어 평소에 연왕에게 쓸만한 제안도 가장 많이 하고 계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