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사여묵이 물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이 어떴소? 아이는 없어진 게 확실하오?” “네. 아이는 확실히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란이는 하마터면 출혈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다행히도 단신의 덕분에 목숨만은 건졌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일 년은 몸조리를 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주는 현재 혼수상태니 깨어나면 엄청 슬퍼하겠지요.”사여묵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열 달을 뱃속의 아이와 함께 했는데 란이도 마음이 괴로울 것이오.” 송석석은 얼굴이 창백해서 말했다. “그녀도 하마터면 따라갈 뻔했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량소를 그대로 풀어줄 수 없습니다. 그는 적어도 감옥에서 몇 년은 지내게 해야 합니다.” “그건 내게 맡기시오.” 사여묵은 그녀가 가을바람에서 연약하면서도 강인해 보여 마음이 좀 쓰리고 아파왔다. ‘란이가 출산할 때 석석이 란이를 잃을까 봐 엄청 두려웠을 것이야.’ 생각을 마친 사여묵은 눈이 싸늘해졌다. 그의 눈빛을 본 송석석이 일깨워 주었다. “란이가 떠난 후에 시작하십시오. 지금 량소를 잡아간다면 모든 사람이 란이에게 가서 빌 것입니다. 나는 란이가 방해받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 나는 먼저 대리사로 돌아갈 테니 내일 당신이 란이를 데리고 떠난 후 내가 사람을 보내 량소를 체포하도록 하겠소. 그는 본처에게 상처를 입히고 뱃속의 아이까지 죽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황가인 군주를 살해하려고 했으니 처벌받기에는 충분하오.” “그는 아직 탐화랑이라 공명이 있는데...” “내가 당장 목 승상을 찾아가서 황제에게 아뢰도록 하겠소.”사여묵은 량소가 벼슬이 없어 천자의 문하생이라는 것을 순간 잊을 뻔했다. 그를 처벌하려면 일단 그의 이름을 등과록에서 지워 천자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해야 했다. 송석석은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잡고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 그녀는 모든 사람 앞에서 강한 척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정말로 놀랐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여묵 앞에서 나약함을 드러낸 것이다. 사여묵은
송석석은 밤새 한숨도 자지 않고 란이를 지키고 있었고, 시만자도 의자를 가져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어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승은백 부인은 사람을 시켜 그들에게 반찬을 가져다주었지만 송석석은 입맛이 없어 먹지 않았다. 그리고 시만자는 두 입 먹더니 란이가 고통스러워서 온몸을 비틀던 모습이 계속 떠올라 더 이상 먹지 못했다. 그렇게 한밤중이 되서야 란이가 깨어나 잠결에 송석석을 부르자 송석석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 여기 있어.” 그녀가 깬 것을 보자마자 홍작은 서둘러 그녀에게 약을 먹였다. 약을 먹은 후에 란이는 더 이상 눈도 뜨지 못하고 계속 잤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흘렀다. 그 모습을 본 송석석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다. 제일 힘든 고비를 넘겼으니 앞으로는 괜찮아질 것이다.” 기력을 다 쓴 란이는 메마른 호수와도 같았다. 약을 세 번 먹어야 물을 조금 마실 수 있었지만 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약을 먹자마자 바로 잠에 들었다. 홍작은 아까전 조금이라도 눈을 붙였기에 송석석에게 속삭였다. “왕비님, 가서 눈 좀 붙이십시오.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아닙니다. 난 졸리지 않아요.” 송석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낮에 고생했으니 어서 가서 좀 더 주무십시오. 사경이 되면 약을 한 번 더 먹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홍작이 말했다. “예. 회왕께서는 가셨지만 회 왕비께서 아직 승은백부에 계십니다. 바로 옆방에 있으신데 군주를 데리고 떠나는 것을 막으려는 것 같습니다.” “내가 마음먹고 란이를 데리고 가려는 것이니 회 왕비는 날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낮에 사여묵이 여기에서 떠난 후 승상을 찾아갔다. 다음날 아침 조정에서 승상이 황실 서재에 가서 한 마디 하면 숙청제가 크게 노하여 량소의 탐화랑 공명을 제거하고 등과록에서 그의 이름을 지운 후 대리사에 이 사건을 맡길 생각이였다. 그리고 대리사에서 이 사건을 맡은 이상 이혼은 문제없을 것이다.그래서 다음날 송석석이 란이를 업고 떠날 때 회
란이는 여전히 몸이 허약했다. 그리고 그녀는 출산 전에 단신의가 왔을 때부터 아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촌 언니 앞에서 눈물을 꾹 참았지만 별청에 도착해 송석석이 나가자마자 고개를숙이고 울어 버렸다. 시만자가 그 소리를 듣고 위로하려고 가자 송석석이 그녀를 잡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은 그 어떤 위로도 소용없응 것이다. 스스로 이겨낼 수 밖에.” 어떤 아픔은 위로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고 더 많은 눈물만 흘리게 할 뿐이었다. 이때 홍시가 와서 연 왕비 시민주와 측비 김 씨가 평서백부에 갔다고 아뢰었는데 시만자는 이를 듣자마자 송석석에게 곧바로 알렸다. 송석석은 멍하니 듣더니 그제서야 어제 평서백부인 최 씨가 왔었다는 게 생각이 났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 송석석은 최 씨가 왔다 간 게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허락된 범위 내에서 주시하되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거라.” “걱정 마십시오. 그래도 평 사저가 배양해 낸 사람이니 일 처리를 잘할 것입니다.”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석소 사저와 라 사저를 찾아갔다. “이제 이혼은 불가피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애초에 제가 란이 출산할 때까지만 돌봐달라고사저들에게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출산도 했고 승은백부에서도 나왔는데 매산으로 돌아가실 것입니까? 아님 여기에 남아 란이와 좀 더 있을 것입니까?” 석소 사저는 자책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군주를 보호하지 못한 건 우리 책임도 있다. 우린 이미 사부님께 조금 더 있다가 매산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어제 내가 망토를 가지러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어. 난 량소 그자가 그렇게 간사할 줄은 몰랐다. 그전에 복직에 관한 일은 말한 적이 없고 매번 군주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하기에 우리는 그가 양심이 찔려 군주에게 잘해주려나보다 했지. 모두 나의 실수다. 그러니까 군주가 힘든 시기를 넘길 때까지 내가 옆에 있으마.” 그러자 송석석이 가벼운 위로를 건넸다. “사저, 자책하지 마십시오. 일은 막을 수
송석석은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사여묵은 다정다감 한 사람이라 그런 사람이 가장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지.” 그러자 시만자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데 바로 인정하면 어떡해? 반박이라도 해야지, 듣기 불편하지 않니?”송석석은 멍해졌다. “그런 가능성을 분석한 것 아니야? 실제로 일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괴로워해야 해?” “내가 만약이라고 했잖아. 근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정말로 여기면 어떡해?” 시만자는 송석석을 보며 참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툭 때렸다. “어이구. 난 네가 사여묵을 사랑하는지가 의심스러워. 비록 난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지만 누군가가 내 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나쁠 것 같아.” 그러자 송석석은 그녀를 째려보았다. “쪼잔하기는!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 후에 화를 내도 늦지 않아. 그런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상하고 화를 내는 건 자신의 기분도 상하고 부부의 감정도 상하게 해서 수지가 맞지 않은 일이야.” 그녀는 말하며 시만자의 혼담이 실패한 게 순간 떠올랐다. “게다가 넌 결혼도 싫고 경험도 없는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뭐라는 것이냐?” 그러자 시만자는 화가 나서 말했다. “난 경험이 없지만 사랑을 모르는 건 아니야.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하기 싫은 건 나와 결혼할 만큼 우수한 남자가 없는 것이고. 난 세상에 둘도 없는 시만자야. 너도 세상에 둘도 없는 송석석 이긴 하나 우린 경황이 다르잖아. 넌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입궁해야 했고 그리고 사여묵이 너에게 잘해주기도 하고. 하지만 난 달라. 나에겐 어려서부터 좋아하고 날 기다려준 사람도 없는데 결혼해서 뭐 해? 혼자 살면 이렇게나 자유롭고 신나는데. 아이도 낳을 필요 없고. 란이가 아이를 낳다가 죽을 뻔한 거 너도 두 눈으로 봤잖냐.”그녀는 놀라서 물었다. “넌 아이 낳는 게 무섭지 않니?” 그러자 송석석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무섭지. 내가 홍작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응. 그리고 평서백부인도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 왕청여와 방시원의 사건을 해결할 때 가족 편 들지 않고 이치를 따랐잖아. 세가에서는 영광이 있으면 함께 누리고 망하면 다 함께 망하는 것이라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건 정말로 대단한 일인 것 같아.” “그래. 네가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은 나도 대단하다고 생각해.” 시만자는 얼굴을 송석석한테 비비며 말했다. “우리 사촌 언니가 지금 평서백부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왕야를 위해 왕표를 매수하려는 것이겠지.” 평서백부는 오늘 아주 시끌벅적했다. 노부인, 평서백부인 최 씨, 둘째 부인 남희, 그리고 왕가의 어르신들이 모두 함께했다. 시민주와 측비 김 씨는 시녀를 데리고 와 선물을 탁자 위에 쌓아 놓았는데 작은 산처럼 높은 것으로 보아 시민주가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시민주는 수완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신분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측비 김 씨가 말할 때마다 적당히 말을 끊으며 최 씨의 아이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렇게 최 씨가 낳은 1남 2녀는 많은 선물을 받게 되었고 서자와 서녀들은 조금 적게 받았다. 측비 김 씨는 몇 번이고 말이 끊겼지만 화를 내지 않고 여전히 양호한 교양을 유지하며 웃으을 지으며 노부인과 남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점에서 최 씨는 측비 김 씨가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측비 김 씨에게 방어선을 쳤고 그녀의 말에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생각을 한 후에야 대답을 했다. 어차피 시민주가 있으니 그녀의 실속 없는 질문부터 대답해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다.측비 김 씨는 평서백부를 둘러보겠다는 제안을 했고 지금 8월이라 계화가 만발할 시기라 멀리서부터 계수나무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백부를 둘러보려면 최 씨가 함께 해야 하는데 최 씨가 일어나자 측비 김 씨가 말했다. ‘내 정신 좀 봐. 제가 며칠 전에 발을 삐끗한 걸 깜박했습니다. 난 정
저택에서는 오늘 극단까지 배치해 있었다. 친왕비를 대접하는 것이니 격이 낮아서는 안 되니 필요한 것은 모두 불러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물어보자 아무도 연극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들은 저녁까지 남아 있었는데, 측비 김 씨가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저희 왕야께서는 줄곧 연주에 계셔서 진성에 온 적이 아주 드뭅니다. 그래서 저희도 진성에 늘 친구가 없었는데, 오늘 부인과 얘기를 나누어 보니 너무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 또한 저희의 인연이겠지요. 그러니 며칠 후에 모두들 연황실에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마침 우리와 함께 진성으로 온 무상 선생이 상국의 유명한 점쟁이인데 앞날의 길흉을 기가 막히게 알아맞힌답니다.” 그러자 노부인은 깜짝 놀랐다. “무상 선생 말입니까? 상국에 그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인데 왕비가 추천해 주신다면 저희야 감사하지요.” 측비 김 씨가 웃으며 그녀의 말에 응했다. “노부인, 그럼 그렇게 결정합시다.” 하지만 최 씨는 곧이어 얼굴이 굳었다. ‘그렇게 왕래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은 두 집안의 관계가 친밀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두어서는 절대 안 돼.’ 최 씨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가장 서투른 방법으로 이 자리에 남게 되었지만 측비 김 씨의 초대에 시어머니까지 이미 응해버린 마당에 다시 가지 않는다고 하면 미움을 받을 것 같았다. 미음을 사는가? 아님 남의 입에 오르내리겠는가? 그녀는 잠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순간 북명왕비의 말이 떠올랐다. ‘북명왕비께서는 될수록 복잡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좋다고 하셨지. 그렇다면 미음을 살까 봐 두려워할 것도 없지.’ “어머님, 측비께서 그저 하는 말씀이십니다. 어떻게 정말 폐를 끼치겠습니까? 지금 영태비가 앓고 있어 왕야님과 왕비님이 모두 입궁해서 시중을 들어야 하니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방문하더라도 영태비가 다 나은 후에 가야지요. 왕야님의 효도를 방해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노부인은 자신의 며느리가 얼마나 예의 바
하지만 사람이 대리사에 갇혔는데 어찌 쉽게 풀려날 수 있겠는가? 노부인이 단식하니, 소문이 퍼져 승은백부가 불효를 저지른다는 말이 돌까 두려워, 그들은 비록 가능성이 희박한 줄 알면서도 황제에게 가서 애원했다. 승은백부도 나름대로 인맥이 있었기에 그에게 전해진 말은 단 한 가지였다. 오직 황제가 그를 용서하고 그를 놓아주기를 원한다면, 량소를 풀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승은백부의 사람들 중 감히 황제에게 찾아갈 사람은 없었다. 모두 그럴 낯짝도 없었고, 두려워 나서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북명왕비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마침내 승은백부는 회왕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결국 대리사에서 량소를 끌어낼 때 회왕이 그를 도와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군주와 량소가 이혼하는 것을 원치 않는 듯했기에 그들 부부가 직접 군주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회왕은 이를 허락하였으나, 그가 직접 나설지는 승은백부의 사람들조차도 알 수 없었다. 회왕비는 원래부터 사란을 만나고 싶어 했었다. 이제는 명이 내려져 이혼은 피할 수 없는운명이 되었으니, 결국 사란을 집으로 데려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막 사란을 데리고 나서려던 찰나, 송석석이 마차에 가득 실은 많은 물건을 가져왔다. 그녀는 과거 서로 주고받았던 선물들을 돌려주러 온 것이었다. 마차에는 평범한 물건들부터 귀한 금은보화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는 오랜 자매 간의 정을 증명해 보였다. 진복과 이 씨 이모, 그리고 양 씨 이모의 기억에 따르면, 어머니가 회왕비에게 보낸 선물에는 금은보화도 있었고, 평범한 물건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단신의가 진북후부에 준 귀한 약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외상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는 약들이었는데, 아무래도 부친과 형이 전장에 나가 있었기에 많은 약을 준비하는 것이 좋았다.다양한 약들 외에도 몸을 보양하는 약이나 급한 상황에 쓸 수 있는 약도 있었으며, 그중에는
마차에 실려 온 물건들이 모두 희왕부의 정청 밖에 내려졌고,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물건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희왕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안색이 잿빛으로 질려 있었다. 송석석이 회왕비를 보며 입을 열었다."물건은 모두 돌려드렸습니다. 지금 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나중에 천천히 보셔도 상관없으니, 혹여 빠진 것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 알려주시지요. 어머니께서 희왕비께 드렸던 것도 모두 돌려주시길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제 기억엔 상당수가 약왕당의 약이었던 듯합니다." 희왕비는 차갑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약은 이미 다 써버렸네. 헌데 어찌 그 물건들을 돌려줄 수 있겠나? 네가 이렇게 한다면 네 어머니 마음만 상하게 할 뿐인 걸 모르더냐." 송석석이 대답했다. "어머니께서는 사란을 각별히 아끼셨습니다. 만약 어머니께서 왕비께서 사란을 이렇게 대하신 걸 아신다면, 아마도 왕비 마마와 자매의 인연을 끊으실 것입니다." 그러자 희왕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차올라 나지막이 물었다. "석석아, 네가 어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네 이모를 이렇게 모른 척하더니… 이제는 사촌과의 이혼을 강요하기까지… 내가 대체 너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이더냐? 네가 전북망을 떠날 때, 내가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더냐?" 송석석이 더는 얘기하기 싫은 듯 냉정하게 대답하였다."그런 이야기는 그만두시지요. 저는 그저 왕비께서 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희왕비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상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나와 제대로 이야기를 하려 하지도 않는구나. 우리 두 집안이 이렇게까지 갈라설 필요가 있느냐?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좋지 않아 보일 것이야… 그리고 네 외조부와 외조모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얼마나 상심하시겠느냐?" 하지만 송석석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회왕비가 사람을 시켜 물건을 꺼내 오기만을 기다렸다. 희왕비는 그녀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금도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끝내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
사여묵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침대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남강에서 돌아와 병권을 황제께 바친 뒤에도 황제는 여전히 사여묵을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사여묵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황제가 의심과 경계를 조금은 풀 수 있도록 사여묵은 지금까지 최대한 언행에 조심했으며 서경과의 담판이 끝나고 나서도 황제 앞에서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다.나중에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황제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사국이 이번에 다시 쳐들어온 건 사국과 손잡은 내국 역적이 남강에 이미 함정을 파 놓았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이오. 그래서 사국은 저렇게 겁도 없이 남강을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폐하는 내가 폐하께 대한 위협이 사국 병사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사여묵이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송석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황제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조금 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부터 계속 이렇게 숨막히는 인고를 견뎌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난 무조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을 놓아준 사여묵은 강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보탰다.“난 당신처럼 용감하게 변할 것이오.”예전에 송석석이 입궁하여 황제께 상황을 보고했을 때 황제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때 당시 송석석은 마냥 기다리거나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 홀로 남강까지 찾아갔다.송석석은 그때 자신의 생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한편, 사여묵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바로 뜻을 알아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전 장군님을 응원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폐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면 전 평소와 같이 진성을 지키고 있을 것이고 만약 폐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전 북명
사여묵이 방시원을 잘 달래어 돌려보낸 뒤, 염구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다들 감정이 격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남강 땅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 또 전쟁이 난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요.”말을 하던 염구진은 고개를 돌려 사여묵을 힐끔 쳐다보았으며 방시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사여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한편, 한참동안 말이 없던 사여묵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잘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소식이 들리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게.”“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사여묵은 다시 연주에 관한 일에 대해 물었다.“연주에서 성문을 봉쇄했다고 들었는데 소식은 끊기지 않은 것이오? 혹시 그쪽에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나?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가?”“아직 확실한 소식은 접하지 못했지만 소인은 모성을 믿습니다. 계획한대로 잘 하고 있을 겁니다.”“그래. 나도 그자를 믿네.”염구진의 대답에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성은 연주 좌부승이었고 연왕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여묵은 바로 사람을 시켜 모성에게 접근했다.총명하고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모성은 선황제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성격이 너무 오만했기에 아직까지도 직급은 그저 부승이었다. 평소에 시를 즐겨 쓰는 모성은 시문의 대부분 내용이 세상을 향한 불만 표시였기에 연왕은 모성이 조정에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그렇게 모성은 오랜 세월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 중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성은 연왕의 반역죄 증좌를 수집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연주에 남았다.하지만 연왕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않고 핵심 병력의 상황도 모성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모성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기도 했다.때문에 모성은 하상지의 잡일을 처리해주면서 간간이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확실한 증좌가 없는 탓에 모성은 지금까지도 연왕
”소인도 오늘 폐하께 감히 많은 얘기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봐 왕야를 찾아가지도 못했지요.”이덕회가 대답하자 목 승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잘하셨습니다. 병부는 최대한 사적으로 북명왕을 접촉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면 혹시 병사 감찰대로 폐하께 한 사람을 추천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왕표 그자가 남강 전쟁 원수를 맡기엔 걱정된다면 방시원 장군을 황제께 추천해보십시오.”“하지만 방시원 장군님은 주군 총병이라 남강 전쟁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 장군을 보낼 바에는 차라리 방천허와 제린에게 전사를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란이 터지고 있는 지금 진성 주군에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이덕회의 말에 목 승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도리는 그게 맞지요. 제 말은 폐하께 왕야 한 사람만 추천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더 추천하라는 뜻입니다.”이덕회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소인이 솔직한 성격이라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르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왕야가 가장 적합한 원수인데 어차피 역적은 아직 나라에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아니니까 나중에 목종욱한테 처리하라고 하면 되지요.”“그 어떤 반역자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반역자들은 사국 사람들과도 엮여 있습니다. 사국과 손을 잡았다는 건 그만큼 충분한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지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목 상승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덕회가 대답했다.“승상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소인 북명왕과 함께 내일 다시 궁으로 가서 폐하를 만나 뵙고 내란에 대해서도 의논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합시다!”목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사청엽은 여전히 옥에 갇혀 있었다. 황제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청엽은 자신이 사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이날 저녁, 혼인을 앞둔 방시원이 황실을 찾아왔다. 치석
한편, 목종욱은 최선을 다해 산적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싹을 다 자르진 못했지만 크게 겁을 먹은 산적들이 산 속에 꽁꽁 숨어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숙청제도 제린이 보낸 소식을 접했고, 사국 대군들이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제린은 사국 대군이 25만 명 정도 된다고 보고를 했고 여전히 빅토르가 대군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바로 병부 대신들을 불러 남강에서 사국의 25만 대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이덕회는 황제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폐하, 남강은 오랜 시간의 전사와 왜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남강 땅은 아직 전쟁에 버틸 수 있지만 백성들은 더 이상 전쟁을 견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정말 전쟁이 난다면 확실한 한 방으로 빠르게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매년 한 번씩 이렇게 날뛸 것입니다. 이는 저희 남강 지역의 치안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그럼 자네 생각엔 송씨 가문 병사들과 북명군이 적들을 신속하게 물리치지 못할 것 같은가?”숙청제의 물음에 이덕회가 바로 대답했다.“이제 송씨 가문 군대아 북명군을 나눌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남강 병사들입니다.”이덕회는 숙청제가 남강의 병사들을 모은 게 송씨 가문과 북명왕이라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강조했지만 숙청제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만약 남강 전쟁이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이고 사여묵이 병권을 상납한지 꽤 오래 됐다면 숙청제는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왕표가 군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남강에 있는 병사들이 송씨 가문 군대이든 북명군이든 결국 전부 사여묵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사여묵을 남강에 보낸다는 건 병권을 다시 사여묵에게 쥐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현재 연왕도 역모를 일으켰고 황제 자리를 대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
숙청제가 사여묵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건 사국이 네 위엄에 겁을 먹은 것이야. 빅토르가 너를 많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 살짝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황제께서 소인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고 빅토르도 소인에게 겁을 먹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전쟁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기 때문입니다.”“네 말대로 전쟁으로 많은 걸 잃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는 원기를 쉽게 회복할 수 없지 않느냐?”“소인이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사국은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절대 저희 남강이 순조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가끔씩 비열한 수법으로 훼방을 놓아야 정상인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게 너무 수상합니다.”숙청제가 사여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그럼 네 말은 누군가가 사국과 손잡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사여묵은 전에도 숙청제와 이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한 적이 있었으며 그때 당시 숙청제도 사여묵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숙청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여묵은 그런 황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사실 숙청제도 왕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국을 상대하려면 사여묵을 다시 남강 전장으로 내보내는 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숙청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그때 당시 겨우 송석석을 이용하여 사여묵에게서 병권을 빼앗았는데 이렇게 쉽게 다시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숙청제는 절대 사여묵을 전장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때문에 사여묵이 며칠동안 어서방에 남아 숙청제와 이런저런 상의를 해봤지만 숙청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어서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아무도 먼저
그날 밤, 연왕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솔직히 지금 상황은 연왕의 오랜 계획과 차질이 조금 있었다. 지방 지역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심지어 진성에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진성까지 쳐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연왕과 무상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일단 병사들을 일정한 수량까지 늘이고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진성 일대로 전이하여 병사들을 안치한 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그땐 사온이 진성에서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가들의 지지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고부진의 딸들을 세가에 시집 보냈기에 세가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나서 적절한 시기만 잘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 진성에 전란이 일어나고 산적과 유랑민들이 판을 칠 때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내로 쳐들어가 바로 궁 전체를 포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대석촌에 일이 터져 버려 사청엽이 체포된 탓에 연왕은 급하게 병사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승산이 너무 낮았기에 연왕도 망설였던 것이며 지방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진성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백성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수군거리겠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과 격문을 그저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국에서 남강을 공격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사국에서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야망을 보였기에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직 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패했다는 소식도 없기에 상국 무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하기에도 애매했다.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태평한 상황에서 연주도 꽤 부유한 땅이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모두 그저 연왕이 언제 잡히는지, 언제 역모죄로 목이 잘릴지를 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국에는 사국 사람들을 물리친 북명왕이 있기에 다들 역적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되레 연왕이 왜 역모를 일으키
무상이 아니라는 말에 연왕은 회왕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화들짝 놀란 회왕이 변명하려던 그때, 연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왕일 리는 없어.”회왕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연왕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묘했다.한편, 연왕은 당연히 회왕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회왕은 무일푼으로 연주로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성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따내지 못했으며 사온의 비교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회왕이 연주에 온 뒤로 연주 백성들은 회왕을 만나면 겉으로는 왕야라고 부르며 인사를 올리긴 하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아니꼽게 생각했다.때문에 회왕은 절대 마총우를 명령하지 못한다.조금씩 차분해진 연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총우 그자가 귀순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인가?”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무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마총우가 귀순한 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왕야께서 격문을 보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희 병력은 대여섯 군데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전의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는데 조정에서 절대 쉽게 조사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마총우 그자를 찾아서 귀순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날 일부러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그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연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왕이 몇 년 동안 끌어 모은 사람들 중에 황제의 친인척과 세도가들도 있지만 친왕은 연왕과 회와 두 사람밖에 없었다.연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연왕의 부하들 중에서 황제의 친인척들이 제일 무능하고 멍청했으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의심되는 상대는 여전히 무상이었다.하지만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연왕이 무상을 끌어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무상은 강한 충성심을 보였고 심지어 평소에 연왕에게 쓸만한 제안도 가장 많이 하고 계책